코헬렛( תלהק )의 의식전환을 통해 헤벨( לבה )극복
김정원 (한국성서대학교/구약신학)
논 평 강소라 (한세대학교/구약신학)
1. 서론 및 연구목적
전도서는 그 내용에 있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당혹케 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것은 전도서 1:2절부터 나오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하벨 하발림 아마르 코헬렛트 하벨 하발림 하콜 하벨 )] הבל הבלים אמר קהלת הבל הבלים הכל הבל )라는 문장이다.
전도서에 나타난 “헤벨”의 의미는 너무도 다양하다. “헛됨, 숨, 공허, 허무”등을 나타내는 “헤벨”(lb,h)은 전도서에만 38회 나타난다.1) 이와 유사한 전도서에 나타난 “해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아말 למע )는 헛되다”란 후렴구 역시 전도서를 읽는 이들로 하여금 허무주의, 염세주의, 비관주의, 회의주의 등에 빠지게 만든다.
코헬렛이 말하는 “해아래”(타하트 하쉐메쉬 תחת השׁמשׁ ;)모든 것들은 한마디로 헛됨, 혹은 무익함을 말하는 “헤벨”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코헬렛이 말한 세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이 헛되다면 세상에서 “유익된”(이트론 ןורתי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이 물음은 전도서 전체에서 코헬렛이 찾고자 했던 물음이기도 하다. 본 연구의 목적은 코헬렛의 의식전환을 통해 헤벨을 극복하는 모습들을 발견하고자 한다.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수고가 무익한 것이라면, 과연 유익된 삶이 무엇이며, 지혜문학으로 전도서에서 말하는 지혜사상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한다. 코헬렛이 경험한 “헤벨”은 삶의 부조리한 부분들로 “덧 없는 삶” 혹은 “바람을 잡으려는 허망한 삶” 등으로 해석된다. 코헬렛이 경험한 “해아래” 모든 것들이 허무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을지라도 그의 의식전환을 통해 그는 삶에 대해서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인 삶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2. 연구 내용 및 방법론
본 연구에서 다루어질 내용은 첫 번째 전도서의 핵심 구절이라 말할 수 있는 “헛됨”을 나타내는 “헤벨”을 중심으로 부정적 의미가 연구될 것이다. 먼저 헤벨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볼 것이며, 전도서 본문에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 용례들을 살펴볼 것이다. 전도서에서 헤벨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 예는 다음과 같다(1:2*3, 14; 2:1, 11, 15, 17, 19, 21 ,23, 26 ;3:19; 4:4, 7, 8, 16; 5:9; 6:2, 9, 11; 7:6; 8:10, 14*2; 11:8, 10; 12:8*2).
두 번째 다루어질 내용은 코헬렛의 의식전환을 통한 헤벨을 극복하는 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코헬렛이 추구했던 긍정적 의미로 삶의 적극성을 말하는 본문들은 다음과 같다(2:24; 3:12; 3:22;5:17-18; 8:15; 9:7-9; 11:7-12:1).
3. 연구내용과 관련된 국내외 연구동향
전도서는 구약성서의 다른 지혜문학인 욥기나, 잠언들과 더불어 연구되었다. 특별히 전도서 연구에 거장이라 말할 수 있는 머피(Murphy)는 고대 근동에는 지혜학교가 있어서 코헬렛이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말한다.2) 카이저 역시 지혜교사인 코헬렛을 말하고 있다.3)
특별히 전도서에 나타난 코헬렛은 인간 삶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삶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인간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할 것”임을 옥덴은 강조한다.4) 데이비스(Davis)는 코헬렛이 연구한 것은 삶의 의미, 불공평한 운명, 피할 수 없는 죽음 등에 관해 연구했다.5) 폭스(Fox)의 헤벨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세상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다고 정의 내린다.
“세상의 모든 일이 수고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없으니 하나님 공의의 판단 기준이 모호하게 된 것”으로 말한다.6) 다니엘 프레드릭스(Fredericks)는 헤벨은 허무, 공허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순간적이고 찰라적 의미라 말한다.7)
아처(Archer)는 한시적인 지상의 실존은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게 살고 의미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여겼다.8)
조지(George)는 전통적 지혜사상을 적용해 젊은이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지혜라 말한다.9) 전도서의 결론이라 말할 수 있는 하나님 경외에 관한 연구 또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롱맨(Longman),10) 시아오(Seow)11)등을 말할 수 있다.
4. 본 론
4.1 코헬렛이 말하는 헤벨의 부정적 의미
코헬렛은 수사적 질문에 익숙하다. 이 수사적 질문은 어떤 사실에 관하여 묻되 대답을 끌어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어떤 사실을 엇나가게 할 목적으로 묻는 질문이다. 코헬렛이 사용한 수사적 질문은 “누구”(미 ימ )와 “무엇”(마 המ )를 즐겨 사용한다.12)
수사적 질문의 가장 큰 목적은 독자들을 설득하는데 있다. 예를 들어 전도서 1:3; 2:22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 란 질문을 통해 해아래 수고하는 수고는 아무 유익이 없음을 강하게 논증하는 것이다.
또한 “아무도”(no one), “모든 사람”(everyone), “항상”(always), “결코”(never)등과 같은 무조건적 선언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사적 질문이 사용된다. 결국 강한 반증과, 설득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행동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코헬렛이 주로 사용한 수사적 질문들이다.
4.1.1 인간 수고(아말 למע )의 “헤벨” (1:2-11)
헤벨은 전도서에만 38회 나타난다. 전도서에 나타난 헤벨은 (1:2)과 (12:8)사이의 인클루젼
(inclusions)구조를 “ לבה םילבה ....לבה ”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전도서 전체의 중요한 핵심 단어라 말할 수 있다. 코헬렛이 말하는 헤벨의 의미는 때때로 허무(vanity), 무익함(nothingness), 숨(vapour)등으로 해석된다. 이런 의미로 사용된 구약의 예는 (신 32:21; 사 57:13; 렘 8:19; 10:8; 51:18; 잠13:11; 21:6; 시 78:33) 등에서 나타난다. 위에서 사용된 구절에서는 무익함, 우상의 무능력함, 인간노력의 무가치함 등으로 사용되었다.13)
한편 머피는 헤벨의 의미를 “하찮다”, “부조리하다”, “무익하다” 등으로 해석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것을 경멸의 의미로 해석한다.14) 그렇지만 한 단어의 의미가 고정된 의미로 쓰일 경우 해석의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연구자 역시 본문(text)과 문맥(context)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 의미의 다양성을 열어놓고자 한다.
본문연구
2 הבל הבלים אמר קהלת הבל הבלים הכל הבל[(
사역: 전도자가 말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본문연구: 전도자는 “헤벨” 이란 단어를 5회 반복적으로 사용하므로 “헛됨”을 강조한다. 전도서 전체에서 헤벨의 의미는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 헤벨 לבה ”은 남성명사로, “힘이 없음” “효력이 없음”“의미 없음”등 다양하게 쓰인다.15)
“한 숨”(breath), “의미 없음”(meaningless),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fleeting), "부질없는 생각”, “무상함”(transience), “무”(emptiness), "불합리”(absurdity), “이해할 수 없는”(incomprehensible)등으로 해석한다.16)
브라운은 1장 2절에 나타난 하벨을 “ לבה ”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잘못 만난 형제 아벨( לבה )과 동일시함으로 “증기” 혹은 “숨”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연상케 하며 이 단어를 “공허한, 무의미한(사 57:13), 무용한” 이란 의미로 해석한다. 공허를 뜻하는 ‘vanity'는 “덧없음” 이란 의미에서 시작해서 비어 있음, 무의미나 불합리, 혹은 일말의 가치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전도자는 인간의 삶 가운데 좌절의 궁극적인 원천이라 말할 수 있는 헤벨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17)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자신의 운명을 조절할 수 없다고 전도자는 주장한다. 어쩌면 이 헤벨은 인간과 우주와 온 세계를 가득 덮고 있는 존재이다. 세상은 헤벨로 가득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헤벨의 반복은 “절대 최상급”을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ל תחת השׁמשׁ ? 3 ;מה־יתרון לאדם בכל־עמלו שׁיע
사역: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본문연구: 본문에서 중요한 어휘는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마 이트론 המ ןורתי )와 “해 아래” 이다. 유익으로 표현된 “이트론”은 오직 전도서에만 10회 나온다. 7회는 “유익”의 뜻으로(1:3, 2:11, 3:9,5:8(9), 15(16), 7:12(11), 10:10), 3회는 “뛰어남” 혹은 “쓸모”의 뜻으로(2:13, 13, 10:11)사용된다.18)
코헬렛은 “해 아래”서 벌어지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 가운데 “인간을 위한 모든 수고” (라아담 베콜 아말로 םדאל לכב ולמע )의 가치가 유익이 없음을 수사 의문문을 통해 강조한다. 1장 4-11절에 나타난 자연현상을 통해 나타나는 반복되는 수고의 모습은 마치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수고”와도 같음을 인간과 자연의 비교를 통해 묘사해주고 있다.
긴즈버그(Ginsburg)는 “수고”는 피곤한 일을 포함한 강압적인 노동이며 “수고하는 모든 수고”(콜 아말로 쉐야아몰 לכ ולמע שׁלמעי )라는 이중적 표현이 의미를 강화한고 말한다.19) 코헬렛이 말하는 수고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전도서에는 다양한 ‘수고’가 나타난다. 어떤 목표를 성취하려는 인간의 육체적, 지적 투쟁(2:11, 18, 19, 20,21,22; 3:9; 4:9; 5:15, 17; 8:17; 9:9)혹은 투쟁을 통해 얻어진 결과(2:10, 18, 19, 21, 22, 24; 3:13; 4:4,6, 8, 9; 5:14, 17; 6:7; 8:15; 9:9; 10:15)등을 가리킨다.20)
돌고 도는 바람처럼 인간 역시 이곳저곳 불가피하게 바람을 좇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다(1:14; 2:11, 17, 26). 물이 흘러서 바다를 채울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자신의 희망과 욕망을 채울 수 없다(4:8; 6:3).21) 인간의 언어 역시 모든 것을 표현하기 어렵다(1:8). 인간이 즐겨 사용하는 눈과 귀 역시 만족이 없다(1:8b). 결국 코헬렛이 말한 모든 수고가 유익이 없다는 것은 2절에 나타난 “헤벨”과 같은 것이다.
인간이 수고하는 모든 수고는 “해 아래”서 이루어진다. “해 아래”란 의미는 “이 땅 가운데서”, 혹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의 의미이다. 코헬렛은 인간이 사는 동안 세상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무익한 것이며, 곧 “헤벨”인 것이다.
1장 3절과 9절은 “해 아래”가 인클루지오(inclusio)로 구성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3절에 “유익이 없음”과 9절에는 “새것이 없음”이 강조되며 그 의미가 “헤벨”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역사의 반복을 고려할 때 새것이란 단지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의 변형일 뿐이란 의미에서 새것이 없음을 말한다. 코헬렛에게 있어서 우주는 활기도 없이 움직이는 인간의 역사처럼 지루하게 반복될 뿐임을 강조한다.22)
4.1.2 인간 지혜의 “헤벨” (1:12-18)
14 ראיתי את־כל־המעשׁים שׁנעשׂו תחת השׁמשׁ והנה הכל הבל ורעות רוח'
사역: 내가 해아래 행하는 모든 것을 보았다, 보라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는 것 같다.
본문연구: “바람을 잡는 것”은 변덕스럽고 불가시적인 것이다. 바람은 붙잡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헤벨”과 같은 것이다. “바람을 잡는 것”과 “헤벨”은 평행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 예는 (1:14, 17, 2:11, 17, 26, 4:4, 6, 16, 5:16, 6:9)에서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코헬렛이 경험한 해아래 행한 것은 1장 16-17절에 나타난 지혜와 지식이다. 지혜를 나타내는 “호크마”המכח) )는 실제적인 지혜 혹은 기술적인 행함으로 해석되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코헬렛에게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려는 무한한 욕망이 있었다(1:13). “나는 마음을 다하여 안다는 것( המכח )이 진정 무엇인지, 사물에 대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무엇인지를 알고 조사하여 찾고자 하였다”(7:25).
그러나 결국 코헬렛이 깨달은 사실은 지혜가 근심을 가져올 뿐 아니라 무익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는 지혜와 어리석음을 동일선상에 둠으로 이것 역시도 “헤벨”이라 말한다.
지혜와 지식이 헤벨적인 것은 2장 12-23절에 나타난 지혜자의 분깃이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넘어가기 때문에 헤벨이라고 설명한다.
4.1.3 지혜자의 죽음과 우매자 에게 넘어가는 그의 수고도 “헤벨” (2:12-23)
ן ולאכם שׁלא עמל־בו יתננו חלקו גם־זה הבל ורעה רבה ? כי־ישׁ אדם שׁעמלו בחכמה ובדעת ובכשׁ i 21
사역: 만일 어떤 사람이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해 수고해도, 그의 분깃을 수고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준다면 그것 역시 “헤벨”이며 큰 악이다.
본문연구: 코헬렛은 “죽음”(무트 תומ )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오기에 지혜로운 자나 미련한 자나 모두 같은 운명인 것을 한탄한다(2:14). 코헬렛의 관심은 죽음 자체가 아니다. 죽음을 통해 지혜자가 잊혀 진다는 사실을 그가 안타까워하는 것이다(2:16). 이 사실 역시 코헬렛에게 있어서는 “헤벨”인 것이다(2:17). 2장 18절 부터 코헬렛을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자신이 이룩해놓은 모든 업적들을 자격 없는 후계자에게 남겨준다는 사실이다(2:19). 자신의 노동의 열매와 유산을 누군가 악용할지도 모른 채 다음 세대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것이 코헬렛에게 이것 역시 “헤벨”이며 큰 악이라 고백한다.
5. 코헬렛의 의식전환을 통한 헤벨 극복
코헬렛은 지금까지 그가 경험하고, 느끼고, 행동한 모든 것들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헤벨”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점차 그의 의식이 삶에 대한 적극성과 긍정적으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코헬렛의 의식 전환에 중요한 요인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진다. 코헬렛이 “해아래 모든 것이” 헤벨이라고 외쳤던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며 그 분이 모든 것들을 때를 따라 움직이고 계시다는 깨달음을 통해 의식전환이 이루어진다.
모든 일에는 때( תע )가 있으며 인간은 그 때를 통제하거나 적절한 때를 알 수 없다. 제한된 시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영원한 시간 속에 계신 하나님의 일들을 깨달을 수 없다(3:11). 결국 인간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며(3:14)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물을 만드셨으며, 또한 아름답게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깨닫는 것이다.
또한 머피는 하나님 경외는 때를 정하시는 하나님의 근접성과 그 행사를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성 사이에서 취해진다고 말한다.23)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창조신학적 모티브는 지혜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고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의 지혜에 전도자는 모든 것들이 헤벨이라고 외쳤던 사고의 틀을 전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코헬렛의 의식전환의 몇 가지 예들을 살펴보면 첫째 먹고, 마시고, 즐기는 기쁨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한다. 둘째는 사람이 자기 일을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몫( קלח )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살아있음(삶) 자체가 즐거운 일이라고 고백한다. 이 몇 가지 예들을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4.1 먹고, 마시고, 즐기는 기쁨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다. (2:24-26)
בוט־ןיא םדאב שׁלכאי ושׁהת הארהו פנ־תאשׁו בוט ולמעב הז־םג יתיאר ינא יכ דימ םיהלאה איה e 24
사역 : 인간에게 먹는 것, 마시는 것, 수고하는 것 보다 그의 마음을 더 선하게(기쁘게) 하는 것은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본문연구: 코헬렛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먹고”(아칼 לכא ) “마시고”(샤타 שׁהת ) “기뻐하는”(샤마흐שׁחמ )것들 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2:24; 5:18; 9:7). 이것은 쾌락주의나 향략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코헬렛은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이 없다”(엔 토브 바아담 ןיא בוט םדאב )를 70인역과, 시리아 역에서을 따라 “인간 에게”(라아담 םדאל )로 수정한 것을 요구한다.
이유는 본문 이외에 2:22 “ םדאל המ הוה ” 과 8:15“ ןיא בוט םדאל ”와 평행을 이루기 위해 םדאל 을 사용한 것을 원한다.24)
코헬렛은 처음으로 인간의 활동 중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 דימ םיהל א)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코헬렛의 관점이 “해 아래”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을 헤벨로 보았는데 인간이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며 그것을 즐길 것을 요구한다.
2장 25절은 맛소라 본문 보다는 칠십인역을 따를 것을 선호한다. 맛소라 역은 “나를 떠나서”(후쯔미메니 ץוח ינממ )이지만 칠십인 역은 “그분을 떠나서”(파레스 아우투 παρεξ αυτου , 미네누 ונממ )이다.
25절을 수정된 본문으로 해석한다면 “그분을 떠나서 누가 먹고,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란 수사의문으로 해석하게 된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수고를 통해 기쁨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하나님의 손에서 나온다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 어느 누구도 먹고 즐기 수 없는 것이다. 결국 26절에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그러므로 2:24-26절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삶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기뻐하는 것 가운데 즐겁게 살 것을 코헬렛은 권면한다.
왜냐하면 기쁨의 원천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해 아래서” 이루어지는 인간들의 삶이 헤벨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누리는 삶이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한다면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누려야 할 것을 코헬렛은 강조한다.
4.2 기쁨과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3:12-13)
12 ידעתי כי אין טוב בם כי אם־לשׂמוח שׁלעשׂות טוב בחיין
13 וגם כל־האדם שׁיאכל ושׁתה וראה טוב בכל־עמלו מתת אלהים היא
사역: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고,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다. 또한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과 모든 수고함으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았다.
본문연구: 3장 1절은 “기한”(즈만 ןמז )과 “때”(에트 תע )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 단어들은 동의적 평행법으로 모든 일들 위한 어떤 시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3장 2-8, 11절 역시 일을 위한 마땅한 때, 알맞은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쓰였다. 3장 1-8절까지는 14가지의 때를 설명하고 있다. 70인역에서 는 시간을 나타내는 “ תע ”를 “카이로스”(καιρος)로 기록한다.
이것은 지정된, 혹은 적절한 시간이나 시기, 시대를 뜻한다.25) 반면 “ ןמז ”을 “크로노스”(χρονος)의 개념으로 폭스는 설명한다.26) 해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이 적절한 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 עמהשׁה אשׁר עשׁה םיהלא )을 측량할 수 없다.
비록 인간에게 선을 행하고 낙을 누리며 살도록 선물을 주셨으나,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콜 아쉐르 야아세 엘로힘 לכ אשׁר עישׁה םיהלא )의 계획을 바꾸거나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인간이 더하거나 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3:14).
하나님의 계획과 일들을 인간은 이해할 수 없으며,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인 것을 드러낸다. 코헬렛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마타트 תתמ ,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 때)을 누리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는 것을 3장에서 강조한다.
4.3 “해 아래” 먹고 마시고 즐기는 모든 수고가 하나님이 주시는 몫이다. (5:17-18)
טוב אשׁר־יפה לאכול ולשׁתות ולראות טובה בכל־עמלו שׁיעמל תחת־השׁמשׁ מספר ימי־חיו אשׁר־נתן־לו האלהים כי־הוא חלקו
17 הנה אשׁר־ראיתי אני
사역: 보라! 이것이 내가 깨달은 것이다. 먹고 마시고 해아래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몫이기 때문이다.
본문연구: 코헬렛은 “수고”를 본문에서는 더 이상 부정적인 의미로(2:22-23) 사용하고 있지 않다. 이 “수고”는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수고”를 통해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몫”(할라크 קלח )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헬렛은 18절에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신 “몫”을 즐길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몫을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혹은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할 수 있다.
4.4 삶은 즐거운 것이다. (11: 7-10)
7 ומתוק האור וטוב לעינים לראות את־השׁמשׁ
사역: 빛은 아름다운 것이며, 눈으로 태양을 보는 것은 즐거운(기쁜) 것이다.
본문주석: “아름다운” (마토크 קותמ )은 형용사로 달콤한, 즐거운, 유쾌한 등 다양하게 해석 할 수 있다.
קותמ 에 접속사 ו가 들어있는데 그것을 해석하게 될 경우 앞의 단락과 연속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7절을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생각한다면 접속사 해석을 생략하는 것이 좋다. “토브” בוט 는 형용사로 즐거운, 좋은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본 구절의 (마토크 하오르 קותמ אהוֹר )와 (토브 쉐메쉬בוט שׁמשׁ )는 동의적 평행법을 형성하고 있는 문장이다. 빛과 어둠은 늘 대조되어 나타난다. 인간이 빛을 보고, 태양을 보고 살아가는 것은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즐거움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난 빛은 생명을 의미하고 있으며, 어둠은 죽음을 의미한다.27) 빛은 지혜자로 어둠은 우매자로 전도서에 나타난다.28) 전도자에게 있어서 삶은 빛처럼 달콤하고 쾌적하며 감미로운 것이다. 그래서 태양의 눈부신 광채를 바라보는 것이 “아름다우며” 행복을 준다고 말한다.
전도자는 생명과 죽음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 즉 “살아있음”은 매우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 강조한다. 죽음 다음 스올에서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29)
전도자는 분명 죽음의 그늘 또한 생각하고 있었다. 황혼기의 일몰과 다가올 ‘어두운 날들’ 그리고 한 줄기 스치는 바람일 뿐인 미지의 불확실한 미래를 놓쳐버린 것이 아니다. 그가 가장 중요시 생각한 것은 살아있는 바로 지금의 모습이다.
전도자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나 미래의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무익하고 부질없는 짓이며, 지금 현 순간을 철저하게 음미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30) 코헬렛에게 있어서 살아있는 이 순간이 소중하며, 지금 이 시간이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빛과 태양의 은유적 수사법을 통해서 살아 있음이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라 고백한다. 3장 8절 역시 살아있는 동안 삶을 즐길 것을 권면한다.
8כי אם־שׁנים הרבה יחיה האדם בכלם ישׂמח ויזכר את־ימי החשׁך כי־הרבה יהיו כל־שׁבא הבל
>사역: 사람이 여러 해를 산다고 해도(살지라도) 모든 세월들 가운데 즐거워하라,
그리고 어둠의 날들이 많이 있을 것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오는 모든 것은 헛되다.
본문주석: “키 임 샤님 하르베” יכ ־םאשׁםינ הברה 에서 יכ םא 을 양보 문으로 해석해 “...한다고 해도”를 첨가할 수 있다. 첫 행을 해석하면 “많은 해(years)를 살지라도”이다. “모든 것들”로 번역되는 쿨람 ( םלכ)은 앞의 명사 샤님( שׁםינ )의 대명사이다. 그러므로 םלכב 을 “모든 세월들”로 해석해야한다.
본 절에는 두 행에 각각 두 개의 명령(jussive)동사가 나타난다. 그것은 רכזי ,ישִׁהמ 로 qal, 미완료태 3인칭, 남성, 단수로 명령 형태이다. 이쉬마 ( ישׁהמ )는 “기뻐하라, 즐거워 하라” 등으로 해석되며, 이즈코르 ( רכזי ) 는 “기억하라”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도자는 “기억하라” רכז 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과거를 기억하기 보다는 현재에 초점을 맞추어 기억할 것을 강조한다.31)
전도자는 그의 핵심 주제인 “즐거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언급한다. 그것은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서 즐거워하라”라는 명령이다. 또 다른 명령은 “이즈코르 엣트-예메 하호쉐크 키 하르베 이흐유” ר ימי־תא חהשׁך הברה־יכ ויהיכזי “어둠의 날들이 많이 있을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전도자는 즐거워하고, 기억해야하는 이유를 “오는 모든 것은 헛되기”(콜 쉐바 하벨 לכ שׁאב לבה ) 때문이라 설명한다. 7절에 전도자는 살아있음에 즐거워하며, 8절 역시도 여러 해를 살면서 즐거워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전도자의 삶은 전도서 1장에 나타난 허무와 염세주의적 사고가 아닌 적극적인 삶을 살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하 반절에 나타난 יכ는 사람이 모든 세월들을 즐거워해야하며, 어둠의 날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헛되기” לבה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헬렛은 젊은 청년의 때를 중요시한다. 11장 9절은 청년의 때에 관해 즐거워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שׁ. 9מח בחור בילדותיך ויטיבך לבך בימי בחורותך
<והלך בדרכי לבך ובמראי עיניך
ודע כי על־כל־אלה יביאך האלהים במשׁפט
사역: 청년이여, 너의 청년기를 즐거워하라, 너의 청년의 날들에 너의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라, 그리고 너의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걸으며, 너의 눈이 보는 대로 걸어라, 너는 알라! 이 모든 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심판을 네게 가져오실 것이다.
본문주석: “샤마흐” שׁחמ 는 Qal, 명령, 2인칭, 남성, 단수형으로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8절에 사용된 명령(jussive)보다 더 강한 명령형(imperatives)이다.32) “바호르” רוחב 의 의미는 “선택된 자” “삶의 최고의 전성기”인 청년을 가리킨다.33)
전도자의 가르침의 대상은 주로 청년들인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옐라도트” תודלי 는 청춘, 청년기를 뜻하는 여성명사로 “청년이여, 너의 청년기를 즐거워하라” (세마흐 바후르 베얄두테카 שׂחמ רוחב ךיתודליב )이다. ךביטיו 는 בטי 의 Hi, 미완료태, 3인칭, 남성, 단수형으로 “즐겁다, 기쁘다, 좋다, 선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에 인칭대명사 2인 칭, 남성, 단수형이 접미되어 있어 “너를 기쁘게 하라, 너를 기쁘게 만들어라”로 이를 해석하면 “너의 청년의 날들에 너의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라”이다. 첫 행에 사용된 “기뻐하다와 즐거워하다” (사마흐 야타브 שׂחמ, בטי )는 전도서의 핵심 구절로 병행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할라크” ךלה 는 Pi, 명령형으로 사용되었고, “너의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걸어라” (할라크 베다르케리브카 ךלה יכרדב ךבל )의 의미이다. “베마르에 에네카” יארמב ךניע , “너의 눈이 보는 대로”의 의미로 동사ךלה 와 연결되어 “너의 눈이 보는 대로 걸어라”의 의미를 가진다. “마르에” יארמ 는 다른 사본인 LXX,Syr, Vul, MSS 에서는 단수형태인 הארמ 로 읽을 것을 제안하지만 오히려 “보는 것들, sights” 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문맥과 일치한다.
이것은 추상적인 vision의 의미보다는 청년의 때 추구하는 다양한 기쁨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34) 이것은 또한 6장 9절에 나타난 헛된 열망(vain yearning)과 반대되는 의미이다. 35)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당신이 보는 기쁨들을 추구하라는 명령이다.
“베다” עדו , 는 “야다” עדי 의 Qal, 명령형으로 “그러나 알라”로 해석된다. “알 콜 엘레” ( הלא־לכ־לע )는 “이 모든 것”의 의미로 위에서 제기된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수기 15장 39절에는 욕망의 기관인 눈과 마음에 관해서 조심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36)
전도자는 청년의 때와 청년의 날들에 기쁨을 누릴 것을 명령한다. 이것은 단순한 명령형(jussive)이 아닌 강한 명령형(imperative)이 사용되었다. 더불어 전도자는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걸으며, 눈이 보는 대로 걸어갈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젊은 날의 방종이나 욕망 허영심을 버리며 균형 잡힌 젊은 날들을 살아갈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젊은 시절 역시 길지 않기 때문이다.
10 והסר כעס מלבך והעבר רעה מבשׂרך
כי־הילדות והשׁחרות הבל
사역: 그러므로 너는 너의 마음의 근심을 떠나가게 하며, 너의 몸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라, 왜냐하면 יכ) )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이 덧없이(빠르게)지나가기 때문이다.
본문주석: “베하세르” רסהו 는 “수르” רוס 의 Hi. 명령형, 2인칭, 남성, 단수로 “그러므로 너는 떠나게 하라”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카아스” סעכ 는 근심, 원통함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라아” הער 역시 고통(suffering)혹은 악(evil)의 의미로 사용되어 동의적 평행법을 이루는 문장이다. “베하아베르” רבעהו 는 “아바르” רבע 의 Hi, 명령, 2인칭, 남성, 단수로 “지나가게 하다, 사라지게 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도자는 마음에서 근심과 원통함을 떠나게 할 것과, 몸에서 고통을 사라지게 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기쁨과 행복을 마음에 가질 수 있으며 죽음의 잔인한 공포를 제거할 수 있다.
젊음을 나타내는 “베샤하루트” הושׁתורח 의 원형은, שׁתורח 로 hapax(구약성서이서 단 한번 나오는 단어)이다. 이것은 역본들마다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칠십인역(LXX)과 페쉬타(Peshitta)에서는 무지, 어리석음(ignorance, folly)로 해석하고 있으며, 벌게이트(Vulgate)에서는 욕구, 욕망(desire) 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중요한 의미는 검음(blackness), 검은 머리의 때 혹은 새벽(dawn)의 뜻을 가지고 있다. 동종의 아랍어로 sarih 로 젊음(youth)을 나타낸다. 욥기 30장30절에 어근 שׁרח 는 “어둠”을 의미한다. 또한 새벽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무엘상 9:26절에 “새벽에”가 사용되었다.
탈굼(Targum)에서는 “ 검은머리 날들”로 읽는다.37) 결국 שׁתורח 의 의미는 젊음, 검은 머리, 등과 같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며 이것은 “옐라도트” תודלי 와 평행을 이루는 단어이다. 마지막 לבה 의 의미는 “덧없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허무함”보다는 합리적이다. “덧없음”을 “빠르게”로 해석해도 전체적인 문맥을 매끄럽게 이끌어갈 수 있다.
시편 39편 5절에서는 לבה 이 하나님의 영원성에 비해 인간 생명의 짧음과 쉬이 지나감을 나타내고 있다.38) לבה 의 의미를 짧은 시간, 빠른 시간, 등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다니엘 프레드릭 역시 לבה 을 허무, 공허,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 보다는 순간적이고 찰라적이란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았고 이를 번역하길 “일시적”(temporary)으로 번역했다.39)
결국 전도자는 젊은 청춘의 시기가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마음의 근심과 몸의 고통”을 떠나버리고 삶을 즐겁게 살 것을 강조한다.
12장 1-8절의 전체적 주제
12장 해석의 틀은 앞장 11장 7-8절과의 연관성을 통해 구성된다. 11장 7-8절에 사용된 빛, 태양,어둠 등의 음성은 12장 2절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특별히 폭스(Fox)는 제안하길 2-5절은 5절 하반절에 나타난 장례식과 연관되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40)
그렇기 때문에 대분의 학자들은 12장 1-8절의 내용을 노년의 때와 죽음이라는 주제로 해석하길 원한다.41)
1< וזכר את־בוראיך בימי בחורתיך : :
;עד אשׁר לא־יבאו ימי הרעה
והניעו שׁנים אשׁר תאמר אין־לי בהם חפץ
사역: 너의 청년의 날들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악한 날들이 오기 전에, 이런 세월들은 내게 기쁨이 없다고 내가 말하기 전에
본문주석: “그리고 너는 기억하라”로 시작하는 1절은 11장 8절에 사용된 강한 명령형(imperative)이 사용되었다. “기억하라”는 명령은 단지 과거적 일들에 관한 회상이 아니다. 이것은 역동적인 개념으로 현재적 의미가 강하다.42) “너의 창조주” (보르에카 ךיארוב )는 ארב 의 복수 분사형인 “창조주들”이 사용되었다.
이 형태는 םיהלא 의 복수 연계형인 יהלא 형태와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들" 보다 는 장엄한 복수인 “창조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 단어가 칠십인역(LXX)에서는 “너를 창조하신 분”(tou/ ktis, anto,j se)으로 단수 형태가 사용되었다. ךיארוב 는 몇 가지 다른 해석들이 시도되었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경고로서 창조주를 언급하는 것은 전도자의 사상에 생소하지 않다(참조 5:6;7:18; 11:9). 12장 7절은 죽음을 영이 창조주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묘사한다. 죽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전도자는 창조 사실을 언급하다.
12장7절에 인간은 흙에서 난 존재이기에 죽음을 통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곧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죽음 이전에 생명을 주신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생명은 기쁨이며 즐거움이며, 인간이 누려야할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다. 전도자는 이미 2장 24-25절에 “먹고 마시는 것보다 인간에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또한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시간과 생명, 그리고 그 기쁨들은 창조주의 선물이다.
인간은 빠른 세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노년과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청년의 날들에”는 11장9절과 평행을 이룬다. “악한 , 재앙의 날들”이 “오기 전에”(아드 아쉐르 로 야보우 ואדע אשׁר אל-בי )로 재앙의 날들은 11장 7절에 사용된 “죽음”과 연관된 단어이다. 11장 8절에 사용된 רכז 역시 “어두운 날들”을 기억할 것을 명령한다. 전도자는 일반적으로 재앙, 악 (라아 הער )을 사회적혹은 개인의 삶에서 재난의 상황들(calamitous situations)과 연관시킨다.43) 그러므로 본문은 "죽음" 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죽음의 날들” 과 “기쁨이 없다는 세월들”이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구절이다. 죽음 후에는 모든 힘과 활력(vitality)을 상실한다.
그러므로 전도자가 강조하는 것은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명령인 것이다.“이런 세월들에는 내게 기쁨이 없다”(토마르 엔리 바헴 헤펫츠 תאמר אין־לי בהם חפץ )에서 이런 세월들은 구체적으로 노년의 때 더 나아가 죽음을 의미한다. 전도자는 악한 날과 세월들을 평행시켜 “죽음”의 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날들은 기쁨을 줄 수 없으며 이런 날들이 오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5. 결 론
코헬렛은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이 무익한 것, 바람을 잡으려는 것, 허무한 것, 불합리한 것으로 “헤벨”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가 경험한 세상은 불합리 했으며, 모순과, 불공정이 존재한 세상이며 이런 세상은 그에게 부정적 의미의 “헤벨”로 다가왔다. 그러나 코헬렛은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그의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그가 의식의 전환을 통해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삶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몫이며,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가운데 이루어진다. 코헬렛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즐길 것을 권면했던 것은 세월이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삶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것이 코헬렛이 깨달은 의식의 전환이다. 짧은 세월을 살기 때문에 전도자는 청년의 때를 즐거워하며, 기쁘게 살 것을 명령하고 있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걸으며, 눈이 보는 대로 걸어갈 것을 명령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게 선물 혹은 몫으로 주신 삶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코헬렛은 창조주를 기억하며 경외할 것을 명령한다.
인간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이다.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곧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에게로 인간은 돌아간다는 것이다. “해 아래”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허무와, 무익한 부정적 의미의 “헤벨”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몫” ( קלח )을 누리는 긍정적 의미의 삶을 살 것을 말하고 있다.
Key word: 코헬렛, 헤벨, 전도자, 헛되다, 해 아래,
각 주
1) Graham S. Ogden, Qoheleth (Sheffield: Phoenix Press, 2007), 21. 이 외에 “수증기”(vapor), “안개”(mist), "연기 “(smoke)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Jacques Ellul, Reason for Being: A Meditation on Ecclesiastes, trans. J. M. Hanks (Grand Rapids: Eerdmans, 1990), 53.
2) Roland E. Murphy, "Introduction to Wisdom Literature." 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 Eds. By R. E. Brown, J. A. Fitzmeyer, R. E. Murphy (Englewood Cliffs: Prentice Hall, 1990), 447-452.
3) Walter C. Kaiser, Ecclesiastes: Total Life (Chicago: Moody, 1979), 83.
4) Ogden, Qoheleth , 26.
5) Ellen F. Davis, Proverbs, Ecclesiastes, and the Song of Song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0), 164. 6) Michael V. Fox, "The Meaning of Hebel for Qoheleth." Jorunal for Biblical Literature 105(1986), 55-77.
7) Daniel C. Fredericks, Coping with Transience: Ecclesiastes on Brevity in Life (Sheffield: JSOT Press, 1993)
8) Gleason L. Archer, A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toon. Rev. ed. (Chicago: Moody, 1974), 488.
9) Mark K. George, "Death as the Beginning of Life in the Book of Ecclesiastes." Strange Fire: Reading the Bible after the Holocaust. Ed. Tod Linafelt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0), 282.
10) Tremper Longman, The Book of Ecclesiastes,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8), 39.
11) Choon-Leong, Seow, "The Socioeconomic Context of "The Preacher's Hermeneutic." Princeton Theological Bulletin 17: (1996), 168-95.
12) Raymond Johnson, “The Rhetorical Question as a Literary Device in Ecclesiaste, ” (Ph. D. diss,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1986).
13) Ogden, Qoheleth. 21.
14) Roland E. Murphy, Ecclesiastes , 김귀탁 역, 『전도서』, (서울:솔로몬, 2008), 121. 현창학 교수는 헤벨의 의미를 전통적 견해의 “vanity"의 의미와 팍스(M. Fox)나 미첼(D. Michel)이 주장하는 ”absurdity"의 의미가 전도서 가운데 모두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은 본문의 상황에 따라 적절히 해석할 것을 조심스럽게 말한다. 현창학, 『구약지혜서 연구전도서』(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09), 167-68.
15) Helmer Rinngren, Walther Zimmerli, 『잠언. 전도서』, 국제성서주석 v.17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225.
16) W. E. Staples, "The Vanity of Ecclesiastes,"JNES 2(1943)95-104; Ogden, Qoheleth,
17) William P. Brown, Ecclesiastes , 채은하 역, 전도서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6), 65.
18) 민영진, 『전도서,아가서』, 성서주석 20 (서울: 대한기독서회, 2009), 57.
19) H. Louis Ginsburg, Studies in Koheleth, (New York: The Jewish Theological Seminary of America, 1950), 260. 20) C. L. Seow, Ecclesiaste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B, (New York: Doubleday, 1997), 104.
21) Brown, 전도서 , 69.
22) Brown, 전도서 , 72.
23) Murphy, 『전도서』, 172.
24) 박 요한 영식, 『코헬렛의 지혜와 즐거운 인생』(서울: 성서와함께, 1997), 132.
25) R. N. Whybray, Ecclesiastes (Shefield: JSOT Press, 1989), 167.
26) Michael V. Fox, A Time to Tear Down and A Time to Build Up (Grand Rapid: Eerdmans, 1999), 194-96.
27)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전6:4).
28)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전2:13-14).
29)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9:10).
30) Antonio Bonora, Qohelet, 이 선영 역, 『코헬렛』(서울: 성서와 함께, 1999), 226-27.
31) Seow,Ecclesiaste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Ecclesiastes , 209-10.
32) Graham S. Ogden, "Qoheleth XI 7-XII8:Qoheleth's Summons To Enjoyment and Reflection," Vetus Testamentum XXXIV, 1 (1984), 27-38.
33) James L. Crenshaw, Ecclesiaste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7), 184.
34) Fox, A Time to Tear Down & A Time to Build Up, 317.
35) Michael V. Fox, The JPS Bible Commentary Ecclesiastes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2004), 75.
36) Crenshaw, Ecclesiastes, 184.
37) Crenshaw, Ecclesiastes, 184.
38) 장일선, 『삶을 위한 지혜』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0), 193; הבל 에 관해서 다양하게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다. 욥기 7장 16절을 RSV는 “breath"로 표준새번역은 “허무”; 이사야 30장 7절 RSV, “fleeting" 표준새변역은 “망상“, 잠언 31장 30절에서 여인의 아름다음은 RSV “fleeting" 표준과 개역은 “헛되다”로 번역한다.
39) Daniel C. Fredericks, Coping with Transience:Ecclesiastes on Brevity in Life (Sheffield: JSOT Press, 1993), 94.
40) M. V. Fox, Qoheleth and his Contradictions , JSOTSup, 71, (Sheffield: Sheffield Acadimic Press, 1989), 321.
41) Granam S. Ogden, Qoheleth , 213.
42) H. Eising, "Zkr," TDOT IV, ed. G. Botterweck and H. Ringgren; trans. D. Green (Grand Rapids: Eerdmans, 1980), 64-82.
43) Ogden, Qoheleth , 215.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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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헬렛(tlhq)의 의식전환을 통해 헤벨(lbh) 극복”에 대한 논평
논 평 강소라 (한세대학교/구약신학)
이 논문에서는 코헬렛이 ‘해 아래서’의 모든 수고가 헛됨(헤벨)을 깨닫지만 결국 창조주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의식전환이 일어나 하나님이 주신 삶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아 헤벨의 삶을 극복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 논문에서는 (1) 헤벨의 어원을 살펴보면서 전도서에서 나타난 헤벨의 사용 용례를 살펴보고 (2) 코헬렛이 의식전환을 통해 헤벨을 극복하는 본문을 살펴보는 방법을 택했다.
이 논문의 장점과 공헌점은 다음과 같다:
1. 이 논문의 발표자는 전도서에 나타난 삶의 헤벨을 제시하고 헤벨의 삶 속에서도 그 삶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고 기뻐하라는 내용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변화의 과정에 중점을 두어 전도서를 접근하는 시도를 하였고, 전도서 전체에서 다양한 본문을 선택하여 주해함으로써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비교 연구를 하였다.
2. 발표자는 이 논문을 통해서 해 아래에서 여전히 짧고 허무한 삶을 살아가는 현 시대의 독자에게 창조주이며 모든 때와 인간의 일을 주관하는 하나님께 다시금 초점을 맞춰 살도록 도전하고, 짧고 허무한 삶을 기쁨으로 받아 누릴 수 있도록 실제적인 삶의 적용점을 마련해주었다. 논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내용상에서 재고해볼 사항
a) 코헬렛의 의식전환이 본문에서 명확히 나타나는가?
발표자는 코헬렛이 세상의 수고, 지혜, 죽음 등에서 헤벨을 느꼈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경험함으로써 헛되고 수고로운 삶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과정적 변화와 그 결과에 초점을 두었다. 발표자는 코헬렛의 의식전환이 이루어진 요인을 만물의 때를 정하고 운행하고 계신 하나님이 계심(전 3:1-15)을 깨닫게 된 데에 있었다고 보았고, 그 의식전환의 결과로서 코헬렛이
(1) 먹고 마시고 즐기는 기쁨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며,
(2) 기쁨과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3) 사람이 자기 일을 즐거워하는 것 또한 하나님이 주신 몫이며,
(4) 삶 자체가 즐거운 것임을 제시한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때를 정하고 범사의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권한임을 알았을 때에 코헬렛의 사고의 틀에 전환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이 있다.
먼저, 발제자가 주장하는 이 의식전환의 일환으로서 전도서 3:11-12에 언급된 내용 즉 사람이 사는 동안 먹고 마시고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의식전환에서 비롯된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2:24-25에서 지혜자에게나 우매자에게나 일생의 수고 이후에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코헬렛이 이미 언급한 내용이다.
다시 말해, 코헬렛은 삶의 불공평과 죽음의 한계성을 깨달았을 때나 하나님이 때를 정하고 세상을 운행하심을 깨달았을 때나 같은 결론(즉, 먹고 마시고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게 낫고, 이는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에 도달했으며 같은 결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전도서 3:22와 5:18-19[MT17-18] 그리고 8:15에 위의 결론을 반복하여 말하는데, 이때에도 하나님의 경외에 대해 말하면서도 결국은 인간의 수고의 결과가 예측불허이며 헛되다는 것과 죽음의 한계 때문에도 인생이 허무함을 거듭 말하면서 “그러니까 이 허무한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덧붙여 전도서 3:15 이후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통치 속에서도 여전히 삶의 허무함을 강조하고 있다(3:16-19; 8:17; 9:9; 11:6-8; 12:8 등).
전도서 1장에서 12장까지 코헬렛은 10장(한국어 성경에서는 4장 포함)을 제외하고 계속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한다. 전도서의 초두인 1:13부터 인생의 노고가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2:26;3:10 등)이라고 설명하면서도, 2:24에서는 하나님 없이는 먹고 마시며 하는 일에서 기쁨도 찾을 수 없다고 진술함으로써, 삶의 헤벨도 헤벨의 삶을 기쁨의 삶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코헬렛이 삶의 허무함을 느끼다가 하나님을 경험하여 삶을 즐겁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깨달았다기보다는, 코헬렛이 언제 또는 어떤 경위에서인지는 모르나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이해했으며 짧은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지혜이며 그 즐거움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코헬렛은 이러한 이해 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며 살아왔지만 삶의 무의미함을 계속 깨닫게 됨으로써, 다시금 하나님께로 초점을 맞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을 즐겁게 사는 것이 지혜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서 3장의 우주만물의 창조주이며 때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 그의 의식에 전환이 일어났다고 이해하거나 전도서 본문에서 코헬렛의 의식전환이 명확하게 나타난 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b) 헤벨에 긍정적인 의미가 있는가?
발표자는 헤벨을 중심으로 부정적 의미를 연구하고 전도서 본문에서 헤벨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 용례들을 살핀다고 하였다. 이런 표현들은 헤벨의 다른 면에는 긍정적 의미가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D. C. Fredericks와 G. H. Jonhnsone이 각각 설명하듯이 전도서뿐 아니라 구약전체에서 헤벨은 ‘호흡, 숨’이라고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경우나(시 62:9[10]; 잠 21:6; 사 57:13) ‘우상,’‘삶’ 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나머지 75번의 예(예: 신 32:21; 왕상 16:13; 왕하 17:15; 렘 10:3; 욥7:16 등)에서나 모두 견고함 없고, 가볍고, 무상하고, 무의미하고, 헛되고, 거짓됨을 의미하며 (NIDOTTE 1:1005-6), 헤벨의 기본 동사형도 추상적인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기(NIDOTTE 1:1003-5) 때문에 헤벨의 의미에 긍정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고 본다. 발표자 자신도 헤벨의 긍정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부정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헤벨을 코헬렛이 극복하여 헤벨의 삶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 삶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려 하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헤벨의 의미에는 부정적 의미만이 강조되어 있음을 명시할 필요가 있겠다.
2. 수정할 부분과 소소한 제안
a) 본문 전개 순서 중 헤벨의 의미와 관련하여
본문 전개에 있어 발표자는 헤벨에 대한 의미를 살피고 전도서에서 헤벨의 사용 용례와 코헬렛이 의식전환을 통해 헤벨을 극복하는 예를 다루겠다고 ‘연구 내용 및 방법론’에서에서 밝혔다. 이 과정에서 발표자는 헤벨의 의미를 제시하는 데 있어 그 의미를 따로 다루지는 않고 전도서에서 헤벨의 사용 용례를 살펴보면서 그때그때 헤벨에 대한 의미를 제시하였다.
본문과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은 타당하지만, 헤벨의 의미가 이곳저곳에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있어서는 혼동이 올 수 있다. 본론의 시작에 전도서에서 사용된 헤벨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요약하여 먼저 제시한다면 독자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b) 헤벨의 정확한 통계와 예와 관련하여
발표자는 전도서에 헤벨이 38번 나타난다고 ‘서론’과 ‘4.1.1.’에 언급했지만, 본인이 직접 헤벨의 구절을 나열할 때에는 29번의 예만을 제시하였다. 이 29번이란 수치는 헤벨에 접미어가 붙었을 때, 전치사와 같이 나올 때, 헤벨의 복수형 등을 제외하고 단수형 헤벨 자체만 나온 구절의 통계이다. 그러므로 발표자가 나열한 예에 1:2(x2); 5:7[6]; 6:4, 12; 7:15; 9:9(x2), 12:8의 9번의 예가 부가되어야 한다.
c) 서지 정보와 관련하여
논문의 참고도서에는 본문의 각주에 언급된 책이 빠진 경우도 있고(예: 각주 1번의 Jacques Ellul, 각주 16번의 W. E. Stapes, 각주 38번의 장일선, 각주 40의 Fox), 각주에 언급되지 않은 책들이 첨가된 경우도 있다(예: Michael Eaton, Mark K. George, James Limburg, Jeffrey Meyers, Tommy Nelson의 책이나 에세이). 또한 전체적으로는 저자의 알파벳 순서로 재배열되어야 한다. 사소하지만 Crenshaw의 출판연도를 각주와 참고도서에 일치시켜야 되며, Seow나 Ogden 등의 소논문(articles) 페이지를 참고도서에 추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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