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3·6교실/구약이해 교실

[스크랩] 다윗 솔로몬 시대에 대한 마찰

류성련 2015. 5. 16. 13:00

다윗 솔로몬 시대(기원전 10세기)에 대한 마잘

/-토르(High-chronology/maximalist)와 핑켈슈타인(Low-chronology/minimalist)의 대화

임미영 서울신대

논 찬 김은호(한국성서대)

 

이스라엘의 고고학과 역사학의 논쟁 중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 와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빅 이슈 중 하나는 다윗/솔로몬 시대에 관한 것이다. 이 논쟁에 의하면 다윗/솔로몬 시대가 강력한 왕국의 시대로서 당시 대접을 받았을 것인가 심지어 다윗이 실존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다윗/솔로몬 시대 즉 기원전 10세기를 철기 II시대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었는가에 까지 그 질문은 확장되어 왔다. 더불어 다윗과 솔로몬은 성경 외에 어떤 고대 근동의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었기에 전설적인 영웅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제를 국내 강의실에서 소개했을 때 놀라움의 탄성은 끝없이 이어졌다. 본 주제를 발표하는 발표자 역시 유학시절 처음이 주제를 접했을 때 고민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High-chronology를 주장하는 히브리대학교와 바르일란대학교에서 수학한 발표자는 Low-chronology를 주장하는 텔아비브대학교에서 수학하던 한국인 유학생과 상당히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논쟁의 결론은 아직도 내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10세기 층에서 다윗과 솔로몬의 이름이 그리고 히브리어 문자로 기록된 성경과 관련된 문서들이 다량 출토되지 않는 한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 논쟁의 결론을 내 놓을 수도 결정지을 수도 없다. 단지 고고학적인 입장에서 이 논쟁의 과정과 현 주소만을 소개할 뿐이며 이는 적어도 우리를 놀라움으로 인한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1. 논쟁의 쟁점

 

1930-1970년 사이 하솔 X, 므깃도 VA-IVB, 게셀 VIII층 등의 발굴은 성서학자들과 고고학자들에게 기원전 10세기, 다윗/솔로몬 시대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Albright 1956; Yadin 1958). 위의 세 도시에서 발견된 유사한 건물들 -다듬은 돌로 지어진 행정 건물들(Ashlar Masonry)과 마굿간으로 해석된 기둥이 이 열로 서 있는 방들(Tripartite Pillared Buildings) 그리고 6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성문들(6 Chambered-Gate)-은 열왕기상9:15-19의 솔로몬이 건축한 병거성의 증거물로 해석되었고 자연스럽게 10세기 층으로 분류되었다(Wightman 1990: 5-10).

 

그러나 가르비니(Garbini), 톰슨(Thompson), 렘케(Lemche)같은 학자들은 통일 왕조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다. 와이트만(Wightman 1990:5-22)의 경우 하솔 X/IX층에서 발견되는 토기가 10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반의 연대로 측정되는 사마리아 I, II층에서 발견된 토기와 유사하다고 주장하면서 하솔을 비롯한 위의 세도시의 층들은 10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반에 세워진 도시들로 보았다.

 

그는 솔로몬 신화라는 제목아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 도시들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을 뿐 강력하게 요새화된 도시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와이트만과 같은 연대기(Low-Chronology)를 주장하면서 텔아비브대학교의 핑켈슈타인(Finkelstein)은 고고학적으로 10세기를 다시 읽어야 하며 다윗/솔로몬 존재에 대한 의심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히브리대학교의 마잘(Mazar)과 벤-토르(Ben-Tor)는 다시 고고학적 증거들을 들고 위의 도시층들이 여전히 10세기 초-중반으로 연대가 측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0e3c2190.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77pixel, 세로 186pixel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0e3c0001.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56pixel, 세로 173pixel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0e3c0002.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17pixel, 세로 153pixel

 

 

2. 텔 단 석비(Tel Dan Stele)

 

성경 속 사사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고 (21:25) 다윗이라는 왕이 나타남으로 혼란의 상태는 멈추는 것 같았다. 다윗이나 솔로몬의 이름이 10세기와 관련된 고대 근동 문헌에서 발견된 예가 있었다면 이 논쟁은 시작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사기에서 그랬던 것 처럼 각자의 소견들을 주장하면서 두 학파간의 논쟁이 과열되고 있을 때 이를 식히기라도 하려는 듯 갑자기 다윗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텔 단에서 1993-1994년 두 해에 걸쳐 발견된 세 조각의 현무암 석비는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Biran and Naveh 1993, 1995).

 

텔 단은 1966년부터 히브리 유니온 칼리지(Hebrew Union College) 비란(A.Biran) 교수가 2008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발굴과 조사를 거듭한 유적지이다. 텔 단은 사사기 18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의 쉐펠라 지역에 정착하지 못했던 단 지파가 라이스라 불리는 땅을 정복하여 거주지로 삼았던 장소로 보고 있다.

 

이 후 이 장소는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금송아지를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 장소로 제공했던 도시 단이라고 보고 있다. 성경 속의 에피소드들을 증명해 주듯 텔 단에서는 중기 청동기(기원전 2000-1600)부터 견고한 성문이 있었던 요새화된 도시가 발견되었고 기원 전 9-7세기 사이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신전 자리와 도시가 발견되었다. 총 세 개의 부숴진 조각으로 발견된 텔 단 석비는 가장 큰 조각은 1993년에 벽돌 틈 사이에서 그리고 다음해 다른 두 조각들이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나 세 조각은 서로 연결되어 어느 정도 문장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이 석비는 기원전 9세기 아람어로 기록된 것이었다.

 

1'. [.....................].......[...................................] and cut [.........................]

2'. [.........] my father went up [against him when] he fought at[....]

3'. And my father lay down, he went to his [fathers]. And the king of

I[s-]

4'. rael entered previously in my father's land. [And] Hadad made me

king.

5'. And Hadad went in front of me, [and] I departed from [the]

seven[.....]

6'. of my kingdom, and I slew [seve]nty kin[gs], who harnessed

thou[sands of cha-]

7'. riots and thousands of horsemen (or: horses). [I killed Jeho]ram son

of [Ahab]

8'. king of Israel, and I killed [Ahaz]iahu son of [Jehoram kin]g

9'. of the House of David. And I set [their towns into ruins and turned]

10'. their land into [desolation........................]

11'. other ...[......................................................................... and Jehu ru-]

12'. led over Is[rael......................................................................and I laid]

13'. siege upon [............................................................]

 

비란과 나베(J. Naveh)교수는 이 석비는 승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 주인공은 열왕기하 8:7-15에 등장하는 아람 왕 하사엘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엘리사가 예언했던 것처럼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지속적으로 괴롭혔고 (왕하 9,10,12) 석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호람과 남왕국 유다의 아하시야 왕과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었다.

 

그가 죽고 그의 아들 벤하닷의 재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 빼앗겼던 성읍을 되찾았다(왕하 13: 22-25). 아마도 요아스는 단에 서 있던 하사엘의 승전비를 파괴하였고 그 조각들은 건물 벽돌로 재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석비가 성경 속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학자들의 관심을 끈것은 9행에 기록된 BYTDVD라는 철자였다. 비란과 나베는 이 단어를 즉시 베이트 다비드다윗의 집/왕가로 읽었다.

 

그러나 데이비스(Ph. Davies: 1994)는 가나안어를 기록할 때 우리가 띄어쓰기를 하듯 단어와 단어 사이의 중앙에는 점을 찍어야 하는데 이 두 단어 사이에는 점이 찍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 단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단어를 베들레헴을 읽듯이 읽어야 하며 베이트도드 혹은 베이트두드로 읽어 장소/도시의 이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레이니(A, Rainey: 1994)는 고대 가나안의 문헌들 중에는 이 띄어쓰기 용도로 쓰인 점이 생략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특별히 뒤의 단어가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사람의 이름일 경우에는 더더욱 생략될 수 있다고 말했다.

 

레이니의 주장을 도운 것은 렌즈버그(G. Rendsburg: 1995)로 그는 앗수르어와 바빌론어로 기록된 고대 문헌들의 예로 볼 때 bit+이름의 경우 나라를 세운 자의 이름을 붙여 그 나라를 대표적으로 부른 예들이 있는데 아람어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했다고 보았다. 그는 좋은 예로 앗수르의 기록들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오므리왕가 bit-Omri"로 불리었다는 것이다.

 

살만에셀 III세의 블랙오벨리스크에 등장하는 예후 마저도 피 한방울 섞여 있지 않은 그가 오므리 왕가라 불렸다는 사실은 아마도 당시 남왕국 유다는 다윗 왕가로 불렸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0e3c0004.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82pixel, 세로 257pixel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0e3c0005.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15pixel, 세로 247pixel

 

 

3. 핑켈슈타인(I. Finkelstein)의 견해

 

이제 학자들은 적어도 기원전 9세기 경 남왕국 유다는 다윗 왕가라 불렸고 다윗이 있었기에 다윗의 이름으로 불리는 왕가가 있었다고 믿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이 논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여전히 단 하나의 유물로 이 논쟁을 종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핑켈슈타인의 경우 다윗이 있었다고 해서 10세기 초반부터 강력한 국가가 있었으며 10세기 층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은 아직도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펼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딱 들어맞는 층들을 적절하게 식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원전 10세기의 물질문화와 정착 양식들의 생생한 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하나의 개발 국가의 실존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보다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고 동시에 성서 본문에 있는 역사적 토대 가능성을 감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96: 177).”

 

그러나 핵심적인 질문은 통일 왕조의 고고학이 확고한 근거 위에 있는가이다. 최근에, 나는 가나안의 남부 해안 평야에서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정착 시기에 대한 문제를 새롭게 점검하면서 기원전 10-9세기의 고고학에서 팔레스타인의 토기가 오히려 Low-chronology 를 지지하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1996: 177-178).”

 

그의 연대기 논쟁의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블레셋 토기(Philistine Pottery) 연대이다. 블레셋 혹은 해양 민족은 아스돗과 텔 미크네-에그론 같은 도시에 거주하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토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고향에서부터 이주했을 때 동일한 생산기술과 양식 그리고 장식문양을 그대로 가지고 왔고 이를 지역시장에 그대로 반영하였다.

 

이들의 초기 토기형태는 아르골리스라든가 키프루스 그리고 Myc.IIIC:1이라 불렸던 에게 문명의 단색으로 장식된 식탁용 그릇들과 유사했다. 아스돗를 발굴한 모세 도단과 트루디 도단 교수들이 이 도시를 점령한 이들이 메르넾타(1212년 재위)와 람세스 III(1185-1156) 사이에 정착한 해양민족이라고 평가한데 반해 핑켈슈타인은 이 토기의 출발시기를 가난안 땅에 이집트인들이 사라진 이후, 12세기의 마지막 4분기로 제안하였다. 그의 주장은 주로 라기스 VI층과 텔 세라 IX층에 단색 블레셋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데 근거하고 있다.

 

이 두 층들은 이집트의 20왕조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결국 블레셋인들은 이집트의 지배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떠났을 때 이 땅에 정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초기 정착 형태에서 드러났던 블레셋인들의 단색토기의 연대가 12세기 말이 되면서 그들의 가장 대표적인 아름다운 2색 토기의 연대 역시 뒤로 밀려나게 되어 기원전 11세기 초반에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이 블레셋 2색 토기가 11세기 전반부에 유행했으며 10세기 중반에도 계속 사용되어 이 토기가 발견된 텔 카실레 X층과 텔 미크네 IV층의 파괴는 이집트의 시삭(920-925년 사이)의 침략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연대기로 계산하게 되면 앞서 언급된 솔로몬의 병거성의 특징으로 보았던 건물들의 연대는 자연히 9세기로 배정될 수 밖에 없다.

 

결국 핑켈슈타인은 열왕기상 9:15에 역사적 신뢰성이 없다고 본다. 그는 10세기 솔로몬의 건물들은 후기에 가정하여 기록한 사건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기념비적 건물들을 가지고 발전한 행정체제를 갖춘 대단한 국가가 아니었다고 말했다(1996: 184-185).

 

1999년 핑켈슈타인은 당시 히브리대학교의 벤-토르(A. Ben-Tor)교수와 그의 팀이 발굴하고 있던 하솔의 발굴결과를 가지고 다시 한 번 Low-chronology를 주장했다. 그는 하솔의 X층에서 발견된 몇가지 특징들이 이즈르엘의 9세기 층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즉 두 층 모두 땅을 고르게 하기 위해 흙으로 덮고 다진 후 그 위에 도시를 세웠으며 포곽 성벽과 4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성문을 가지고 있기에 하솔 X층 역시 9세기로 연대를 측정해야한다는 것이다(1999: 60).

 

그는 하솔의 발굴자였던 야딘의 벤하닷 I세의 하솔 IX층 파괴와 하사엘의 하솔 VII층 파괴설과는 달리 IX층이 하사엘에 의한 파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이스라엘의 철기 II시대는 10세기 말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거의 100년이라는 세월이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될 때 하솔의 층들 중에는 2개의 층이 상당히 빡빡한 연대에 껴 맞추어 져야 한다. 핑켈슈타인은 하솔이 아람과의 국가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층들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1999:65).

 

그는 야딘의 하솔 X층의 건물들이 솔로몬 시대에 속한다는 주장은 그저 성경적 근거에만 의존한 것뿐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연대기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게 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 기간은 자연스럽게 짧아지면서 더불어 이 나라의 모습은 축소되어진다-Minimalist의 견해.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0e3c0006.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97pixel, 세로 284pixel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0e3c0007.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21pixel, 세로 282pixel

 

 

4. 마잘(A. Mazar)/-토르(A. Ben-Tor)의 답변

 

1996년 핑켈슈타인의 글이 발표되자마자 히브리대학교의 마잘은 반격의 펜을 들었다. 마잘은 핑켈슈타인과 달리 블레셋인들은 람세스 III8년에 있었던 이집트와의 전투 이후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였다고 보고 있다.

 

핑켈슈타인은 이집트인들의 팔레스타인 통치 말년에 에게해 이주민들이 그들의 중심도시를 설립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마잘은 풍부한 이집트인들의 유적들이 라기스 VI층과 텔 세라 IX층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다른 유적지들의 예들을 봤을 때 실질적으로 그들의 지배는 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1997: 158).

 

핑켈슈타인이 단색 토기의 연대를 뒤로 미루면서 오히려 10-9세기 등장하게 되는 토기들이 서야 할 위치를 없애 버리고 말았다. 특별히 마잘은 그의 벧산 발굴을 통해 핑켈슈타인의 연대기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1997: 160).

 

벧산 S-2층의 곡식저장고에서 발견된 곡물을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이 층은 1128-1042년의 연대로 읽혀졌다. 그는 이 층의 토기들 이 므깃도 VIA층의 토기와 유사하기 때문에 후자는 11세기의 연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핑켈슈타인이 10세기 연대로 읽은 므깃도 VI, 벧산 S-2, 텔 카실레X(그외 단 V, 텔 키산 IX, 도르 XII, 실로 V, 텔 아부하왐 IV층 등)은 블레셋과 가나안 문명의 혼합적 요소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화재를 동반한 무력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파괴들은 11세기 중반에서 10세기 첫 20년 사이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며 후자의 연대는 다윗이 해안평야와 북부 계곡지역을 정복했던 시기였다. 이 유적지들은 솔로몬 시대에 이미 다윗이 물려준 영토 안에 소속되어 있었다(왕상 3:11-12). 핑켈슈타인은 이 연대기를 오히려 High-chronology라 부른다.

 

핑켈슈타인의 연구의 주요 결론 중 하나는 고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철기 시대 III 사이는 1000년경이라기 보다는 9세기 초반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어서 이 모든 것은 통일왕국의 역사성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고 말했다.

 

이에 대해 마잘은 이 두 가지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핑켈슈타인의 첫 번째 주장은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에 근거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10세기를 2000년간 지속된 가나안 물질문명의 마지막 국면으로서 사실 통일왕국의 시작에는 유사한 문명의 틀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1997: 163). “이러한 결론은 이스라엘 왕정의 출현이 다방면의 물질문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전통적인 견해와 대조된다.”

 

그러나 마잘은 하솔, 게셀 그리고 므깃도에서 발견된 솔로몬의 건축물들이 10세기의 건물임은 의심하지 않았다. 두로인들과의 긴밀한 관계와 왕국의 시작은 있었다. 단지 통일왕국을 제국이나 발전된 국가로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고 말했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10세기 동안 도시의 부흥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인구 분포는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잘은 그의 논문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다.

 

핑켈슈타인의 고무적인 연구는 철기시대 연대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요구한다. 내 견해로는 주전 12세기 후반에서 8세기 사이로 보는 전통적인 철기시대의 층을 20-100년 정도 낮추어 잡는 데에는 특별한 정당성이 없다. 이러한 후대의 연대는 철기 II시대에 이루어진 층위학과 토기학의 발전에 대한 문제있는 해석에 근거하였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등장과 관련된 논쟁적이고 근거자료가 없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10세기 층을 9세기 층으로 도매금으로 낮추는 것은 하솔과 같은 여러 유적지에서 보이는 조밀한 층위학 결과의 견지에서 볼 때 불가능한 것이다. 갑작스런 층위의 변화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토기 집단들에 대한 좀 더 꼼꼼하고 정확한 유형적 연구와 양적 연구에 기초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미래에 좀 더 정확한 탄소연대측정 자료들에 근거해야만 할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이용할 수 없는 한 나는 전통적인 연대를 선호한다. 내 견해로 볼 때, 통일왕국의 고고학적 배경과 관련된 핑켈슈타인의 결론은 미성숙한 것이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1997: 164-165).”

 

그리고 그는 역사학자들에게 역사 평가 시 핑켈슈타인의 자료를 사용하는데 있어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했다(1997: 164).

 

마잘의 이러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핑켈슈타인의 계속되는 Low-chronology 주장은, 더구나 하솔의 발굴결과를 예로 했을 때 하솔의 발굴자였던 벤-토르의 화를 돋은 것으로 보인다.

 

2000년 벤-토르는 핑켈슈타인에게 답변을 보냈다. 그는 핑켈슈타인이 이즈르엘을 키-사이트(Key-site)로 삼고 하솔과 비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즈르엘은 오므리(기원전 882-871)에 의해 세워졌지만 842년경 예후에 의해 무너진 짧은 시대 사용된 유적지였다.

 

이즈르엘의 너무나 적은 고고학적 흔적들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견고한 성이 서 있었던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상당히 큰 도시가 건설되었던 하솔과 비교하는 그 자체가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2000: 12-14). 더구나 핑켈슈타인이 두 유적지 사이의 유사점으로 예를 든 자료 역시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2000: 9-11).

 

9세기에 건설된 이즈르엘은 도시 전체를 땅을 채워 넣어 다지고 그 위에 세웠지만 하솔 X층은 단지 6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성문 만이 땅을 다져 평평하게 한 위에 세워졌다. 핑켈슈

타인은 이 6개의 방을 4개로 보고 이즈르엘에도 4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성문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하솔 X층의 성문은 분명 6개의 방이 있었다. 포곽벽 역시 두 유적지의 모습이 다르다.

 

하솔의 포곽벽의 곽들은 평균 8-10m 길이이지만 이즈엘은 2-3m 길이밖에 되지 않아 오히려 동시대의 사마리아와 유사하다. 더불어 토기와 여러 다른 고고학적 흔적으로 보아 하솔 X층은 하사엘이 아닌 야딘이 주장한 대로 벤하닷 I세의 파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핑켈슈타인의 견해들이 “wishful thinking“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토르는 핑켈슈타인의 이스라엘 철기 시대에 대한 Low-chronoloy 제안은 흥미롭고 매우 매력적인 가설이다. 그러나 그의 견해를 뒷받침해줄 만한 증거들이 부족하다. 차라리 지금 있는 증거들은 오히려 전통적인 연대기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2000: 14)”고 말했다.

 

5. 최근 발견

 

사실 두 학파 간의 논쟁을 진정 시킬 수 있는 key-site는 아마도 예루살렘일 것이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가나안의 여부스 족이 살고 있었고 중기 청동기 (기원전 2000-1600) 때부터 도시가 있었기에 문화적 변화는 물론 다윗의 정복과 파괴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두로왕 히람의 도움으로 세워진 다윗 성과 솔로몬의 궁전 그리고 성전의 흔적을 통해 우리는 10세기가 작은 마을은 아니었다는데 도움을 줄 수 도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4000년 가까운 세월동안 도시가 있었고 지속적으로 거주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현대를 살고 있는 예루살렘인들의 집 밑에 무궁한 고고학적 자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 중에는 성경과 관련된 사건들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더 많기에 그들의 삶의 터전을 발굴을 위해 내어 주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0e3c0008.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26pixel, 세로 300pixel

 

그러나 최근 히브리대학교의 에일랏 마잘(Eilat Mazar)박사의 다윗 성 북부 언덕부분의 발굴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안겨주었다(Mazar E. 2006:16-27, 70).

 

대부분의 학자들은 히람이 도와 건설한 다윗 궁전이 여부스인들의 성벽 안에 있었다고 생각했고 주로 다윗성의 중앙에서만 탐사를 해왔다. 그러나 마잘 박사는 사무엘하 5: 17에서 블레셋인들이 다윗의 재위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치러 오자 다윗이 요새로 내려갔다(한국 개역개정성경은 나가다라고 번역함)라고 기록된 사실을 근거로 궁전이 높은 장소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는 다윗 성의 북쪽 끝자락 높은 장소를 조사해나갔고 그 곳에서 건물을 발견했다. 여기서 그녀는 10세기경 사용된 그릇들과 그리핀과 풍뎅이로 조각된 인장을 발견했는데 이러한 문양은 이스라엘 왕국 초기에 주로 사용되었다. 마잘은 1960년대 캐년여사에 의해 발견된 G구역의 계단식 구조물(Stepped-stone structure)"이 그녀가 발견한 건물을 지탱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건물 벽과 접해 있는 경사면에서 프로토 에올릭(혹은 프로토 이오닉)이라고 불리는 기둥머리가 발견되었던 사실을 기억했다. 이 기둥머리는 페니키아 양식의 기둥머리로서 10세기경부터 므깃도, 하솔등과 같은 이스라엘의 여러 행정도시를 건설하는데 사용되었음이 밝혀진 바 있다.

 

마잘은 현재 예루살렘의 황금돔이 있던 부위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고 그 옆에 솔로몬의 궁전이 있었다면 이 궁전이 느헤미야 3:25에서 말한 왕의 윗 궁이며 다윗성에 있었던 다윗의 궁전은 아래 궁으로 불렸을 것이고 왕의 행정 건물로서 계속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다윗의 궁전을 페니키아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물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이 건물에서 발견된 토기들 중에는 10세기 연대로 측정되는 토기들이 있다. 또한 예레미야 38:1에 등장하는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의 불라에(인장이 찍혀 있는 점토조각들)가 발견된 바 있어 왕국시대의 행정건물로 사용되었던 것에는 의심이 없다.

 

핑켈슈타인은 이 건물의 발견에 흥분한 마잘에게 만약 그녀가 성경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건물을 10세기 건물로 해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 건물을 10세기 다윗의 궁전이라고 보는 견해를 거부했다.

 

다윗이 아람 군대의 병거들을 노획했을 때 그는 단지 병거 100대를 끌 말만을 남기고 나머지 말들의 힘줄을 끊었다(삼하 8:2-3). 우리는 이미 다윗이 말들과 마병들을 전쟁에 이용할줄도 몰랐으며 이들을 둘 건물도 그들을 먹일 식량도 넉넉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0세기 통일왕국이 주변국가들을 평정했을 만큼 처음부터 제국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상상은 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우리는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공공건물을 세운 10세기 층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에일랏 마잘의 발견으로 인해 한 번 더 논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는 다윗 성에서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발굴이 지속될 것인가는 아무도모른다.

 

마잘의 발굴도 다윗 성을 국립공원으로 단장하면서 할 수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이 건물 어디선가 다윗이나 솔로몬의 이름이 기록된 히브리어의 자료가 발견되기를 꿈 꿔 본다. 이스라엘의 왕이 드러난다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주장하는 논쟁의 시기는 멈출 것이다.

 

 

참고문헌

Albright, W.F. 1956. "Was the Age of Solomon without Monumental Art?"

Eretz-Israel 5: 1-9.

Ben-Tor, A. 2000. "Hazor and the Chronology of Northern Israel: A Reply to Israel

Finkelstein," BASOR 317: 9-15.

Biran, A. and J. Naveh. 1993. "An Aramaic Stele Fragment from Tel Dan," Israel

Exploration Journal 43: 81-98.

Biran, A. and J. Naveh. 1995. "The Tel Dan Inscription: A New Fragment," Israel

Exploration Journal 45: 1-18.

Ben-Tor, A. and D. Ben-Ami. 1998. "Hazor and the Archaeology of the Tenth

Century BCE", Israel Exploration Journal 48/1-2: 1-37 

Davies, Ph. R. 1994. “‘House of David’ Built on Sand: The Sins of the Biblical

Maximizers.”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0/4.

Finkelstein, I. 1996. "The Archaeology of the United Monarchy: an Alternative

View," Levant 28: 177-187.

- 213 -

----------- 1999. "Hazor and the North in the Iron Age: A Low Chronology

Perspective," BASOR 314: 55-70.

Finkelstein, I., Z. Herzog, Lily Singer-Avitz, and D. Ussishkin. 2007. "Has King

David's Palace in Jerusalem Been Found?," Tel Aviv 34(2): 142-164

Mazar, A. 1997. "Iron Age Chronology: A Reply to I. Finkelstein," Levant 29:

157-167.

Mazar, Eilat. 2006. "Did I Find King David's Palace?". Biblical Archaeology Review

32/1: 1627, 70

Rainey, A.F. 1994. "House of David' and the House of the Deconstructionists,"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0/6: 47.

Rendsburg, G.A. 1995. "On the Writing דודתיב in the Aramaic Inscription from Tel

Dan," Israel Exploration Journal 45: 22-25.

Wightman, G.J. 1990. "The Myth of Solomon," BASOR 277/278: 5-22.

Yadin, Y. 1958 "Solomon's City Wall and Gate at Gezer," Israel Exploration Journal

8: 80-96.

 

 

 

 

 

 

 

 

 

 

 

 

 

 

 

 

 

 

 

 

 

 

 

 

 

 

 

 

다윗 솔로몬 시대에 대한 마잘 벤 토르와 핑켈슈타인의 대화에 관한 논찬

논 찬 김은호(한국성서대)

 

 

한 세기 전에 올브라이트가 고고학적 연구를 토대로 성서의 비역사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경종을 올린 후 성서가 역사적 문헌임을 강조하는 듯하더니, 고고학 연구방법론의 변화와 고고학 자료는 이스라엘 고고학과 역사학의 논쟁에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특히 다윗-솔로몬의 통일국가를 입증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논란 가운데 있게 된다.

 

그것은 이 시기에 관한 성서 전승에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보는 주장이다. 역사를 서술하는 데에 있어서 성서 본문은 주된 자료가 되어야 하며 성서 이외의 증거는 부차적인 자료로서의 역할이 부여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 성서적 최소주의자들이 보여준 입장은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인류학적 또는 경제적인 모델들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방법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고고학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통일국가에 관한 문제는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 문제와 함께 가장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통일국가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매우 풍부하지만, 고고학은 다윗과 솔로몬의 역사를 거부하려고 한다.

 

이것이 고고학계에서의 최근 추세이다. 임미영박사는 이 논문에서 이스라엘 고고학과 역사학의 최근 연구동향 가운데 성서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의 대조되는 견해를 소개하는 두 가지의 대립적인 입장을 소개한다. 하나는 최대주의(maximalist)의 견해요 다른 하나는 최소주의(minimalist)의 견해다.

 

성서 고고학은 초기에 성서의 역사해석에 도움이 될 만한 유물 증거를 밝혀내는 것을 주요목적으로 삼았지만, 오늘날에는 그 자체의 목적을 지닌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 발전해가는 추세이다. 그 까닭에 더 이상 성서 고고학으로서보다는 일반 고고학의 한 분야로서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으로 불리고 있는 실정이다.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은 성서의 본문 기록을 입증해 주는 보조적 역할보다는 성서 기록을 넘어선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물을 밝혀내고 그에 기초하여 역사를 재구성 내지는 재해석하는 과제를 지향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역사에서 역사성을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논쟁의 중심 주제는 이스라엘의 출현과 다윗 솔로몬 시대의 존재이다. 먼저 필자의 논문에 나타난 논지를 간단하게 정리하여 그 타당성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필자는 논쟁의 쟁점으로 열왕기상 9:15절에 근거한 솔로몬의 건축사역에 관해서 논쟁이다. “솔로몬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여호와의 전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여기에 언급된 세 도시에서 발견된 유사한 건물들 -다듬은 돌로 지어진 행정 건물들과 마굿간으로 해석된 기둥이 이 열로 서 있는 방들 그리고 6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성문은 솔로몬이 건축한 주전10세기 층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하솔X, 므깃도 VA-IVB, 게셀 VIII층을 해석하는 성서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견해 차이를 지적한다. 통일 왕조에 대한 와이트만(Wightman)의 의구심은 하솔 X/ IX층 토기가 사마리아 I,II층에서 발견된 주전 10세기 후반에서 주전 9세기 초반의 연대 토기와 유사하기에 세 도시의 층들은 주전10세기 후반에서 주전9세기 초반에 세워진 도시라는 주장이다. 핑켈슈타인(Finkelstein) 이 같은 주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윗/솔로몬 존재에 대한 의심을 주장했다.

 

이에 반하여 마잘(Mazar)과 벤-토르(Ben-Tor)는 다시 고고학적 증거들을 들고 위의 도시층들이 여전히 10세기 초-중반으로 연대가 측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비란(A. Biran)이 텔 단에서 1993-1994년 두 해에 걸쳐 발견된 세 조각의 현무암 해석에 대한 논쟁이다. 이것은 주전 9세기 아람어로 씌어 진 석비인데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 빼앗겼던 성읍을 되찾았고(왕하 13: 22-25) 단에 있던 하사엘의 비문을 파괴하였던것으로 본다. 여기에서 9행에 기록된 BYTDVD라는 철자를 비란은 베이트 다비드로 읽었으나 데이비스(Ph. Davies)는 이 두 단어 사이에 점이 찍혀있지 않았기에 한 단어로 읽어 베이트도드 혹은 베이트두드로 장소/도시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레이니(A, Rainey)는 고대 가나안의 문헌들 중에 띄어쓰기 용도의 점이 생략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뒤의 단어가 알려진 사람의 경우에는 생략될 수 있다며 다윗 왕가를 지지한다.

 

셋째, 기원전 10-9세기의 고고학에서 팔레스타인의 토기가 Low-chronology를 지지한다는 핑켈슈타인(I. Finkelstein)의 주장이다. 그의 연대기 논쟁은 블레셋 혹은 해양민족의 토기(Philistine Pottery) 연대이다. 또 그는 하솔의 발굴결과를 가지고 Low-chronology를 주장한다.

 

그는 하솔의 X층에서 발견된 몇 가지 특징들이 이즈르엘의 주전 9세기 층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즉 두 층 위에 도시를 세웠으며 포곽 성벽과 4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성문은 하솔X층 역시 주전 9세기로 연대를 주장한다. 핑켈슈타인은 야딘의 하솔 X층의 건물들이 솔로몬 시대라는 주장은 단순하게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기간이 짧아지면서 나라의 역사를 축소하는 견해이다.

 

넷째, 핑켈슈타인의 고고학적 관점은 철기 시대 III 사이는 주전 1000년경이라기 보다 주전 9세기 초반이라는 주장과 이 모든 것이 통일왕국의 역사성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것에 마잘(A. Mazar)과 벤-토르(A. Ben-Tor)의 답변이다. 마잘은 이 두 가지 주장에 반격한다.

 

그는 핑켈슈타인의 첫 번째 주장은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격한다. , 단색토기의 연대를 뒤로 미루면서 오히려 10-9세기 등장하게 되는 토기들의 위치를 없앴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주전 10세기는 가나안 문명의 마지막 시기로서 통일왕국의 시작은 유사한 문명의 틀 안에 있는 것으로 논쟁적 근거자료가 없는 가정에 근거한 미성숙한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앞서 주장한 하솔과 이스르엘과의 관계성은 없다는 것이다. 하솔의 역사성과 그 규모가 이스르엘(오므리-예후과 비교 될 수 없는 가정으로 시작된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또 하솔의 6개의 방을 4개로 보고 이즈르엘에도 4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성문으로 시대를 낮추어 가정하지만 하솔 X층의 성문은 분명 6개의 방이 있었고 포곽벽 역시 두 유적지의 모습이 다르다며 그의 견해를 “wishful thinking“으로 지적했다.

 

다섯째, 에일랏 마잘(Eilat Mazar)의 다윗 성 북부 언덕부분의 발굴이다. 삼하5:17절에서 다윗이 요새로 내려갔다는 것을 근거로 다윗 성의 북쪽 끝자락 높은 장소를 조사했고 그 곳에서 건물을 발견한다. 여기서 그녀는 10세기경 사용된 그릇들과 그리핀과 풍뎅이로 조각된 인장발견은 이스라엘 왕국 초기 물건이었다. G구역의 계단식 구조물이 마잘이 발견한 건물을 지탱해주는 역할과 이 건물 벽 경사면에서 이미 발견된 '프로토 이오닉'이라는 기둥머리는 주전 10세기경 페니기아 양식으로 주전 10세기경 므깃도, 하솔 등 행정도시에서 발견한 것과 연관 지어 행정건물이었다는 결론이다.

 

이 논문은 고고학에 대한 빈약한 한국구약학회에 소개한 점과 공헌에 감사하면서 논 평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고고학 용어 설명에 대한 문제이다(포곽벽, 토기 등). pottery를 어떻게 번역해야 더 좋은 것인지 아직 전문 용어에 대한 이해이다. 뿐만 아니라 도표와 사진에 설명에 대한 전이해가 없는 독자에게는 많은 상상력만을 자아내게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전반적인 연대의 이동을 제안하면서 주전 10세기의 유적이라 여겨지던 것들을 9세기로 끌어내렸다. 만일 이와 같이 새로운 연대를 적용할 것 같으면, 여전히 다윗-솔로몬 시대를 입증할 만한 유력한 유적은 존재하지 않은 셈이다. 따라서 당대의 국가의 규모와 성격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가 된다. 이 제안된 연대가 다른 고고학자들과 함께 수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논란의 상황은 여전히 발굴된 유물들의 연대를 확정하기에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연대 설정의 지표가 될 만한 유물을 발견하고 규명할 수 있을 때, 다윗-솔로몬의 통일왕국의 규모와 성격에 관한 규명 또한 더욱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및 역사학적 논란에 관한 쟁점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필자의 견해가 못내 아쉬움이다. 또 유물 연대기 측정방법이 갖고 있는 문제가 소개 되었다면 우리는 논쟁의 진의를 이해하기에 더욱 쉽게 이해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다윗-솔로몬의 역사에 대한 규명으로 고고학적 증거가 이데오르기적인 선입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이다. 따라서 핑켈슈타인의 학문적 연대기( Low- chronology)를 설정하는 이유가 수정주의자(revisionist)로 재고되어야하지 않는가이다.

 

아무튼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필자 자신만의 독특한 학문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음을 높이 사지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고고학 연구와 성서학 해석의 학제 간 연구를 통하여 학문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그녀 고고학적 탐구가 성서연구에 크게 기여하기를 모두 함께 기대해본다.

 

 

출처 : 최경복의 희망광장
글쓴이 : 최경복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