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교실

[스크랩] 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과 기독교 청년운동가 노병선

류성련 2015. 6. 26. 22:24

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과 기독교 청년운동가

노병선

 

* 성경봉독 : 이사야 60:1~3

* 참고성경 : 요한계시록 21:1~8

* 요절 :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서론

2015년 한국 감리교의 아펜젤러 스크랜턴 선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해가 밝았습니다. 130년이란 자랑스러운 역사는 시간만 흐른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믿음의 선배들은 한국 감리교를 세우고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할 오늘의 한국 감리교와 우리 평신도들이 그들의 열정과 희생을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기억하여 그들의 뒤를 따라가야 할 이유입니다.

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는 지난 2013년과 2014년에 이어 자랑스러운 감리교 평신도들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새 시대를 열어가는 감리교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교훈을 얻자는 것이지요. 그 첫 번째 인물은 노병선입니다. 노병선은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청년운동과 전도활동에 헌신한 분입니다.

 

 

본론

노병선은 1871년 평북 철산에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뒤늦게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접하였습니다. 그는 이승만, 신흥우, 송언용, 문경호 등과 함께 1897년 7월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고 졸업 후에는 배재학당 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노병선은 배재학당 재학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학생 활동에 나서 1896년 11월 30일에 창립된 ‘협성회’에서 부회장 등 임원으로 일했습니다. 협성회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지도한 청년운동체로 충군애국하는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학생들 서로가 친목할 뿐 아니라 배운 대로 전국 동포를 가르치려 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회의 회원은 처음에는 배재학당의 학생과 교직원으로 한정하였으나 나중에는 일반인들에게까지 개방하였습니다. 협성회에서는 회의 진행하는 법을 가르쳤고,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공개적인 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토론회의 주제는 ‘국한문 혼용’ ‘학생 복장 착용’ ‘여성 교육’ ‘남녀교제의 자유’ 등과 같은 일반인들을 계몽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의 한국사회가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현실 문제들을 채택하였는데 그 자신도 이 토론회의 연사로 참석하곤 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인 1897년에는 기독교 청년운동의 시작으로 기록되는 감리교의 청년조직인 ‘엡웟청년회’(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회의 전신)의 창립을 위한 기초를 닦았습니다. 조직 목적은 “청년들의 활기와 열의를 한국의 구원을 위한 밝은 희망과 큰 포부 속으로 참여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엡웟청년회 창립위원으로 중앙본부 임원(서기와 통신국장)을 맡아 각 교회의 엡웟청년회 조직과 활동을 지도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동시에 1897년 10월 31일 정동제일교회의 남자 엡웟청년회(월은지회)의 창립을 주도하면서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노병선은 1897년에 전도 문서를 순한글로 저술하여 펴냈습니다. ‘파혹진션론’이란 제목의 문서인데, 16면에 불과한 작은 책자지만 한국 개신교 역사상 한국인이 기록한 첫 기독교 변증론이라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파혹진션론’이란 ‘의혹을 파하고 착한 데 나아가게 함’이란 뜻입니다. 그 내용은 “선교사들이 왜 자기 돈을 쓰며 타국에 와서 희생하며, 선교활동을 하는가”에 대한 한국인의 의혹에 대해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어느 나라이든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죄악이 관영하여 죽을 지경이 된 나라가 있다 하면 기어이 부비를 구취하여 전도교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한 형제로 여기고 천로로 인도하여 자기와 동등한 사람이 되기를 일구월심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기독교가 서양 종교라는 수구 세력의 관념을 부정하고, “대저 도의 근원은 하늘로부터 난 것이라. 어찌 서양 하늘과 동양 하늘이 다르다 하리오.”라 하면서 기독교를 동양과 서양의 도를 아우르는 하늘의 도(天道)로 해석하는 토착신학의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문서는 초기 한국인들이 어떻게 기독교를 이해하고 수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또 그는 감리교의 초기 신문인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 많은 논설을 남겼습니다. 그가 저술한 글들을 살펴보면 사회평등사상(상하와 남녀가 평등하며 제각각 개성과 장단이 있어 서로 의논하고 협력해야만이 문명한 나라를 이룰 수 있다.), 인간의 기본권사상(이는 자유하는 권리요 자주권이며, 이것이 없다면 인간은 초목과 금수에 불과하다. 또한 인간의 자유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사회교육사상(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 필요하며, 교육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고 어려서부터 해야 한다.), 자립·근로사상(게으르거나 놀고먹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요, 근면하게 일해서 자립하고 걸인에게까지 기회를 주어야 한다.), 언론사상(민중을 대변하는 언론의 책임과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데 중요성을 논함) 등과 같은 개혁적인 사상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의 기독교사상은 그의 민족운동·애국계몽사상과 직결되며, 사회평등사상·자유민권사상·사회개혁사상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노병선은 1894년에는 홀의 통역인으로 평양 개척의 기반을 닦으면서 박해를 당하였습니다. 1897년부터 1901년까지 동대문교회 설교자로 활동하였고, 1902년 6월 아펜젤러 선교사가 순직한 이후 거의 1년 동안 정동제일교회의 실질적인 목회자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1903년부터는 스크랜턴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상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서울 남부지역을 순행하며 전도하는 한편 전덕기 목사가 지도하는 상동파 민족운동가와 함께 민족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후 일제가 본격적으로 한국을 지배하면서 평양으로 이주하여 광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1930년대 초에는 서울 창천동으로 이사하여 이필주 목사가 시무하던 창천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는 일제말기에도 끝까지 일본말을 배우지 않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일제의 박해와 위협이 계속되자 서울 인근의 능곡으로 피난하여 은거생활에 들어갔습니다. 능곡에서는 능곡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다가, 집 한 채만 남긴 채 1941년 1월 11일 70세에 별세하였습니다. 별세할 때 “승만이 형, 승만이 형”을 불렀다 하며, 이승만 박사도 해방 직후 귀국하여 제일 먼저 노병선 선생을 찾았다 합니다. 6·25 때까지 가족들은 능곡에 거주하였는데 6·25 때 조병옥 박사의 처가라고 북한군들이 집마저 불태웠고, 이때 그가 남긴 자료와 문서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습니다.

 

 

결론

노병선은 궁핍한 외진 곳에서 성장했지만 뒤늦게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배재학당에서 기독교에 기반을 둔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였습니다. 신학문, 그 중에서도 서재필의 한국을 자주독립국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민주주의 교육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출세가 아니라 사회와 나라를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노병선은 먼저 협성회와 엡웟청년회를 통해 활동하였습니다. 이 청년조직들은 한국을 새롭게 하는 활동으로 이 일에 적극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에도 앞장섰습니다. 또 그는 선교사를 돕는 전도인으로 역할하면서 평양과 서울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문서를 통한 계몽 활동에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2015년 한 해 동안 우리와 우리교회, 그리고 감리교회에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2. 그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우리와 남선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

  

출처 : hyosunla
글쓴이 : 나효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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