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신학 교수 교실/김홍기 교수 교실

[스크랩] 웨슬리 경제 윤리 관련 자료 그냥 올립니다.

류성련 2015. 6. 26. 23:58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



김홍기 박사 : 감리교신학대학 신학과 교수


들어가는 말
I. 존 웨슬리 경제윤리의 신학적 근거
A. 행동주의 신학
B. 개인적 성화(personal sanctification)와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
C.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
D. 희년사상
II. 존 웨슬리의 복음적 경제윤리(Evangelical Economic Ethics)
A. 청지기경제윤리
B. 돈사랑의 위험
C. 하늘나라의 저축
D. 재산상속의 반대
III. 존 웨슬리의 대안적 경제윤리(The Third Alternative Economic Ethics)
A. 시장경제의 부당성
B. 돈사용의 3대 원리
C. 경제악의 치유
D. 고용체제의 개혁
E. 세금제도의 개혁
IV. 한국의 희년경제운동과 한국교회의 재정의 갱신
나오는 말

<제목> 웨슬리 경제윤리의 빛에서 본 교회재정

< 들어가는 말 >


IMF위기는 왜 왔는가? 그것은 복잡한 아세아 경제구조와 군사독재하에서 뿌리깊게 형성된 정경유착의 경제구조와 책임의식이 없는 통치구조를 함께 논의해야만 그 원인을 분석해 갈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 국민들의 잘못된 경제관과 잘못된 경제생활에서 비롯되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복잡한 경제 문제는 경제전문가들의 연구와 그 해결책을 정부와 온 국민들이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짧은 시간에 급속히 성장한 자본주의체제가 갖고 있는 병폐인 독점화, 이기주의,집단이기주의, 소비주의, 향락주의의 늪에 빠져 들어가 정신을 잃어버림으로 오늘의 지옥 같은 현실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마저 그 자본주의의 병폐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영적 소경과 영적 귀머거리처럼 이 깊은 죄악의 현실을 만드는 데 동참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경제평론가 찰스 핸디(Charles Handy)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 성숙한 사회로 가는 길은 공동체의 이익에 봉사하는 민주적 가치관을 지닌 자본주의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고 그의 책 [헝그리정신] (The Hungry Spirit)에서 강조하였다. 시장, 경쟁, 그리고 생산성은 그 자체로는 모두 바람직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던 부작용을 낳게 되었고, 자본주의는 공산주의 보다, 다양한 형태의 여러 사회주의보다 우월성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시장논리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이다.돈은 중요하지만 돈은 성공의 채점표가 되어서는 안되고, 돈은 행복의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안 되는 데 시장논리는 그것을 강조하여 왔다는 것이다.1) 시장경제에서 혜택을 못 받는 하부구조에 대해 책임을 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무관심과 냉소주의는 민주주의의 무서운 적이라고 핸디는 비판한다.2) 결국 우리사회가 IMF위기를 맞이한 것도 바로 자신에 대한 이기적 관심은 지나친 반면에 타인을 필요로 하는 인식과 타인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인식의 부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핸디가 주장하는 올바른 이기주의, 곧 경제적 자유를 누리면서도 타인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재분배하고 나누어주고 더불어 사는 평등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다. 20세기 초 미국의 경제공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책임적 자아(responsible self)가 책임적 사회 (responsible society)를 만드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처럼 오늘의 한국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길도 책임적 자아운동과 책임적 사회건설운동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 송병락 교수는 최근 저서 [자본주의의 웃음과 자본주의의 눈물]에서 한국의 IMF위기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의 정신을 순수하게 제대로 갖지 못하였음에 문제가 있다고 송교수는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생각이다. 자본주의란 무엇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거품을 빼고, 알뜰하게 저축하여 모은 돈으로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고, 좋은 제품을 더 많이 생산하여 더 윤택케 하는 각종 자본시설을 더 많이 건설해야 된다는 주의이다.3)

한국이 경제위기를 맞은 것은 올바른 자본주의 정신대로 살지 못하고 국민생활에 거품과 낭비가 많아서 저축과 자본축적이 잘 안된데서 기인하였다는 것이다. 돈을 쓰는 데 있어서 조금도 거품이 생기지 않도록 많이 아껴서 많이 저축해야 하고 저축한 돈은 다시 생산적인 투자가 되도록 하여 한국인의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게 해야 하며, 또한 올바른 자본주의정신은 개인의 능력개발은 남에게 도움되는 일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야 하고, 재산은 반드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열심히 한 노력의 대가로 받은 것이어야 한다고 송교수는 강조한다.4) 한국사회의 문제는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하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쳐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한 것에 있다. 그리고 송교수는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박애주의의 건전한 윤리의식으로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한다.5) 바로 이점에서 한국기독교가 건전한 신앙운동과 윤리운동을 일으켜 한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통일된 사회를 만들어야할 중요한 책임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도 웨슬리의 경제윤리의식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나눔 운동으로 한국교회가 깨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한국교회가 웨슬리 당시의 초기감리교회처럼 더불어 나누어 먹고 더불어 섬기는 경제윤리와 사회적 성화의 구체적 실천방안으로 사회봉사와 사회변혁운동을 통하여 사회복지의 희년사회건설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러한 사회적 성화중심의 교회가 되기 위한 한국교회의 개혁과 한국교회 재정의 개혁을 제안하여 보고자 한다.
특별히 이러한 웨슬리의 경제윤리문제에 관하여는 최근에 많은 연구들이 또한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제닝스(Theodore Jennings)는 그의 책 [가난한자를 위한 복음](Good News to the Poor)에서 웨슬리의 경제윤리는 복음적 경제윤리로서 그 핵심이 청지기정신에 있다고 해석한다.6) 웨슬리는 루터의 두왕국론과 다르게 종교와 세속을 구분하지 않고 회심과 성결은 세속제도의 변혁을 일으키고, 나아가 민족생활과 지구생활의 변혁을 일으키며, 크리스쳔은 부의 축적에 의해 경제활동에 관여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그의 청지기의식은 자본주의시장경제에 대한 도전적 해석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개신교를 자본주의의 보루와 옹호자(Bulwark)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이 되게 되었다고 제닝스는 지적한다.7)
믹스(Douglas Meeks)도 최근 연구논문 "성화와 경제(Sanctification and Economy)"에서 청지기 경제윤리를 소개하고 있다.8) 믹스는 제7차 옥스퍼드 감리교신학자대회의 여러감리교학자들의 웨슬리경제윤리에 관한 논문들을 모아서 [가난한자의 몫](The Portion of the Poor)-웨슬리전통에서본 가난한자를 위한 복음-을 편집 출판하기에 이르렀고, [하느님의 경제학](God the Economist)이란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는 본 저서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개념을 사회공동체적으로 해석한다. 사회공동체적인 삼위일체 하느님은 절대적 사유재산 소유자로서 예배되지 않는다.9) 믹스는 카파도키아학파의 삼위일체의 상호적 공동내재성(perichoresis)개념을 발전시켜서, 삼위는 셋이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하여 서로 안에 임재함으로써, 상호간의 헌신의 관계를 갖고 절대적 배타적 권리가 없이 모든 것을 공유한다고 해석한다.10) 따라서 이러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소유양식은 자기소유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사건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신 것처럼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피조물과 더불어 나누고, 줌으로써 소유한다.11) 따라서 그러한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백성들도 나눔과 줌으로써 소유해야함을 믹스는 강조한다. 그래서 신명기에 나타난 십일조정신은 제사장과 레위인을 먹여 살리는 종교체제유지만을 위하는 것이라는 현대교회의 해석을 뒤집어 가난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위해 나누어 주어야함도 의미한다고 믹스는 해석한다. 믹스교수는 다음과 같은 신명기 구절들을 예증으로 소개한다

매년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 28-29)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네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신 26: 12-13)12)

다시 말해서 십일조는 가난한자들의 생계수단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경제윤리는 나그네와 가난한자들을 위한 이삭줍기라든가 희년사상으로도 이어짐을 믹스는 강조한다. 희년의 나팔이 불 때 썩은 경제체제를 부수는 운동으로 첫째, 노예들은 해방되어야 한다. 둘째, 빚은 탕감되어야 한다. 셋째, 땅은 경작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 넷째, 땅(부 또는 생계수단)은 원소유자(하느님)에게로 돌려주거나 재분배되어야 한다(레 25: 23-24)고 주장한다.13) 더욱 나아가서 믹스교수는 하느님의 경제를 본받아 성도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선물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성화라고 해석한다. 1998년 10월 20일(화) 오전 11:00-오후 13:00까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대학원에서 행한 "God and the Economy of Gift in Wesley's Theology"이란 제목의 강연에서 역시 카파도키아학파의 공동체적 삼위일체론(perichoresis)을 끌어들이면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나 경세적 삼위일체론에있어서나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사를 되돌려 드리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14) 또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결(holiness)은 하나님의 사랑의 은사를 되돌려주는 정의 안에서의 사랑의 실천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15)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로 베풀어주신 모든 물질적 축복과 은사들을 다시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웨슬리 성화론의 핵심임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웨슬리의 모든 신학은 하나님의 성화케 하는 은사 때문에 그 계명을 심각하게 지키는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이다. 성화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사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16) 이렇게 시장의 논리를 반대하면서 은사의 논리를 웨슬리신학의 시각에서 전개한다.
또한 독일 웨슬리학자 마르크바르트(Manfred Marquardt)가 [존 웨슬리의 사회윤리](John Wesley's Social Ethics)를 저술하면서 그의 경제윤리가 어떻게 영국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웨슬리의 설교와 논문들 속에 나타난 경제윤리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서 영국의 경제와 정치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마르크바르트는 강조한다.17)
필자도 이러한 새로운 웨슬리의 경제윤리 해석의 노력에 동참하는 신학적 시각으로 본 연구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학문적인 독창적 공헌이라면 지금까지 어떠한 유럽과 미국의 웨슬리학자들 중 아무도 웨슬리를 희년과 희년경제와 연결시켜 해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새로운 해석의 시도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희년경제를 한국의 IMF위기상황과 통일운동상황으로 끌여들여 재해석하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학문적 시도이다.

I. 존 웨슬리 경제윤리의 신학적 근거

A. 행동주의 신학

웨슬리의 행동주의 신학은 루터의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와 정숙주의(quietism, stillness)를 비판하면서 형성된다. 웨슬리의 올더스케잇 체험은 마르틴 루터와 강한 연속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웨슬리가 루터주의 경건운동파인 모라비안 교도들의 올더스케잇거리 집회에 갔다가 모라비안 청년 -William Holland 로 역사가들이 추측함- 이 읽는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다가 마음이 이상하게 뜨겁게(strangely warmed)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회심이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루터적 신앙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y)신학에 의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의 동생 챨스도 모라비안 목사 피터 뵐러(Peter Bohler)에 의해 그보다 먼저 회심하였고 뵐러와 가장 많은 신앙상담을 존 웨슬리도 하고 있었다. 또한 회심하자마자 뵐러와 함께 Fetter Lane Society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에 관하여"(On God's Vineyard)에서 루터의 구원론을 비판한다. 루터가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성화에 무관심하였다고 비판한다. 루터는 의인화만을 강조하다가 성화에 관심 없었으나, 로마 천주교는 성화를 강조하다가 의인화에 무관심하였다고 웨슬리는 지적한다.18)
특히, 웨슬리는 루터주의 경건운동파인 모라비안교도들의 센터 Hemhut 을 방문한 후, 루터적 모라비안주의의 신앙지상주의(solafideism), 정숙주의(quietism), 법적 의인화(imputed justification), 율법폐기론적 경향(antinominianism)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에게서 선행은 의로워진 크리스천의 자동적 결과이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저절로 맺히듯이,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면 선행의 열매는 저절로 맺힌다고 루터는 해석한다.19)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선행과 사랑은 저절로 맺히는 열매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적 참여에 의해 신인협조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그래서 루터는 로마서를 강조한 나머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복음이라고 평가절하 하였으나, 웨슬리는 로마서의 신앙과 함께 야고보서의 선행을 동등하게 중요시 여긴다. 웨슬리는 해석하기를, 로마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75세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의 믿음이요, 야고보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행함은 그후 25년 후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의 행함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서의 행함은 로마서적 믿음을 전제한 행함이지 믿음 이전의 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20)
따라서, 웨슬리는 도덕적 행동을 강조하는 산상수훈도 야고보서처럼 중요한 설교본문으로 선택하였다. 산상수훈 설교는 그의 성화신학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의 기록된 설교 152편중 무려 13편이 산상수훈 해설 설교다. 그가 브리스톨에서 제일 처음 옥외설교를 할 때에(1739년), 예수님도 예배당 밖 옥외산상에서 설교하였듯이 자신도 옥외에서 설교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산상수훈을 본문으로 선택하여 설교하였다. 특히, 그는 산상수훈 강해에서 사회적 성화개념과 지상의 하나님 나라 실현을 아주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렇게 산상수훈 등을 성화생활의 기준으로 생각한 것은 칼빈의 율법이해와 상통한다. 칼빈은 루터보다 율법을 적극적으로 이해하였다. 루터는 율법의 제1용법, 즉 죄를 깨닫게 하는 역활과 제2용법, 즉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악한 무리들을 다스리는 공민법적 역할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제3의 역할(tertius usus legis)로써의 성화생활의 채찍질과 선생을 말한다. 곧 율법을 통해 자아부정과 영성훈련을 실천함으로써 더욱 경건하고 성화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율법이해가 웨슬리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웨슬리의 구원론의 핵심은 성화다.아직도 한국교회는 신앙 우선을 강조한 나머지 사랑의 선행은 제2차적인 것으로, 신앙에 의해 저절로 따라오는 열매로만 생각하고 있다.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성화의 원동력이며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원천임을 한국기독교인들은 웨슬리에게서 배워야할 것이다.

B. 개인적 성화(personal sanctification)와 사회적 성화 (social sanctification)

웨슬리의 구원론의 핵심은 성화다. 회개는 종교의 현관(porch)이요, 믿음은 종교의 문(door)이라면 성화는 종교자체(religion itself)이다.21) 그런데 이 성화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다. 웨슬리의 개인적 성화는 성결적 요소(holistic factor)로써 히브리어 카도쉬( kadosh )와 희랍어 하기오스( )로 표현된다. 곧, 세속성과 죄악성으로부터의 분리(separation)와 성별을 뜻한다. 그것은 외적 행위 죄들(actual sins)뿐 아니라 내적 죄(inner sin)까지도 사함 받는 죄 없음(sinlessness)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둘째로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는 성육신적 요소(incarnational factor)로 세속성으로부터 분리된 성별의 힘을 갖고 세속을 찾아가는 성육신의 참여 곧, 사랑의 적극적 행위를 세상 속에서 실천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결은 소극적 성화의 방법이고 사랑은 적극적 성화의 방법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이 산 믿음이다.
웨슬리는 이 산상수훈 설교에서 그의 사회적 성화 개념과 하나님 나라 개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는 동생 찰스와 함께 1739년에 출판한 찬송가 Hymns and Sacred Poems의 머리말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이지 않은 종교를 모른다. 사회적 성결 아닌 성결을 모른다"(The Gospel of Christ knows of no religion but social; no holiness but social holiness)고 강조했고, 산상수훈 설교 중 세상의 빛과 소금을 해설할 때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다.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이다."(Christianity is essentially a social religion; and that to turn it into a solitary religion, is indeed to destroy)고 힘주어 말한다.23) 또한 그는 "민족을 개혁하는 것"(to reform the nation)에서 그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교육시킬 때, 우리의 선교 목표는 "민족을 개혁하는 것"임을 힘주어 강조했다.24) 웨슬리는 "감리교도라고 불리는 설교가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우리는 합법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 어떤 새로운 종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개혁하는 것(to reform the nation), 특별히 교회를 개혁하는 것, 그리고 온 땅에 성서적 성결을 널리 퍼트리는 것"이라고 말한다.25)

C.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

성화의 완성(Perfection 혹은 entire sanctification)이 죽기 전에 가능하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악성의 깊이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은총의 높이가 크시기에 크신 은총으로 지상의 완전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절대적 완전은 죽음 후에 영화(Glorification)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지상의 완전은 의식적인 죄(voluntary sin)는 범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인 죄(involuntary sin)의 가능성은 남아있고,26) 무지(ignorence), 실수(mistake), 유혹(temptation), 연약(weakness)의 상태는 남아있기에 상대적 완전이다.27) 그리고 완전은 정착된 상태가 아니고 계속적인 과정(continous process)속에 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계속 달려가는 것이 완전이다.28) 또한 이것은 개인적 완전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회적 완전도 뜻한다.

D. 희년사상

은총의 낙관주의에 의해서 사회적으로도 지상의 천국을 실현할 수 있다고 웨슬리는 믿는다. 물론 절대적 신국의 모습은 초월적, 미래적 이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 웨슬리는 지상의 천국을 믿는다. 그것이 곧, 그의 희년사상(jubilee)으로 나타난다. 웨슬리는 희년실현을 위해 세금제도의 개혁, 고용제도의 개혁, 노예해방, 여성해방, 청지기 의식에 의한 경제적 분배와 나눔, 재산상속 반대, 광부와 농부와 산업노동자의 노동조합운동 등을 실천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감리교를 반대하는 존 프리박사(Dr.John Free)에게 감리교를 변증하는 편지에서 감리교가 발전한 New Castle, Cornwall, Kingswood 지역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wonderful work), 위대한 일(great work)을 이미 지상에서(upon earth) 시작하신 희년사회가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실현될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믿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브리스톨에서 옥외설교를 시작한 첫날(1739년 4월 1일) 산상수훈강해를-예수께서도 옥외 산상에서 설교하신 것처럼-설교하면서 하나님나라의 현존을 실존적으로 사회적으로 경험하는 복음을 선포하였고, 둘째 날(1739년 4월 2일) 옥외 하이웨이에서 눅4:18-19의 본문을 설교하였다. 그는 가난한 자, 눌린 자, 고통 당하는 자, 갇힌 자, 병든 자, 나그네, 고아, 과부, 신체장애자들을 해방케 하는 희년의 복음을 브리스톨 탄광지역의 민중들에게 선포하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그의 [신약성서주해](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에서 눅4:18-19절을 해석하기를 u은혜의 해e는 희년이라고 풀이한다. 모든 빚진자들과 종들이 자유를 얻는 희년이라고 말한다.29)
그래서 그의 현재적 천국개념과 희년사상은 그의 완전교리와 연결된다. 역사 속에서도 완전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는 신앙은 모든 창조의 개혁과 재창조의 꿈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감리교("성서적 기독교")는 완전한 사랑의 승리를 믿는다고 강조한다.


때가 찼음을 생각하라...전쟁은 지상에서 끝나고 다시는 형제가 형제를 대적하지 아니하고 나라와 도시가 나뉘어지지 아니하고, 다시는 가난한 자를 강탈하지 아니하며, 도적도 강포도 불의도 없으리라,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소유한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리라(시85:10) 정의가 땅에서부터 흘러 넘치고 평화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다... 아무도 그가 소유한 것이 그의 소유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는 아무도 궁핍한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의 이웃을 그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이다.30)

웨슬리는 레위기 25장에 나타난 희년의 모습대로 웨슬리는 빚진 자를 탕감하고, 포로 된 흑인노예를 해방시켜 주고, 굶주린 민중들에게 먹을 것을 제대로 나누어주고, 상속할 재산의 대부분은 사회에 환원하고(자녀들에게 필수적인 것은 상속할 수 있지만), 가난한 민중에게 힘에 겨운 세금을 부과하지 말고, 부자들이 사치하게 음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하며, 일거리 없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제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31) 또한 희년생활은 마25:35-40의 소자에 대한 사랑-갇힌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헐벗은 자, 나그네 등-임을 역설한다. 또한 눈먼 자에게 눈이 되어 주는 것, 발 없는 자에게 발이 되어 주는 것,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는 것,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32)

II. 존 웨슬리의 복음적 경제윤리(Evangelical Economic Ethics)

사회복지가 가장 바람직하게 이루어지는 희년사회의 실현을 위해 웨슬리의 구체적인 희년 경제윤리를 다음과 같이 복음주의적 시각에서 강조하고 있다.

A. 청지기경제윤리

하늘과 땅의 소유주이신 창조주가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에 소유주가 아니라 청지기로 세상에 보내셨다고 웨슬리는 믿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영혼과 모든 재산은 우리의 것이 아니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먹고 옷 입는 것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아내, 자녀 그리고 우리 집에 딸린 사람들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 그런데 더욱 안일하고 편리하게 그리고 사치하게 살도록 돈을 써서는 안되고 꼭, 필요하고 필수적인 것을 위해서만 돈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식구들을 위하여 돈을 사용하는 것 이외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위해 돈을 사용하기 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돈을 사용해야 한다. 그는 우리가 모든 영혼, 몸, 그리고 본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함을 설교하였다.33)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빚지고 있다. 빚진 자는 그가 받은 것을 갚아야할 의무가 있다. 주인과 함께 계산하는 날이 다가오기까지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의 자유이지만, 그는 청지기정신대로 사는 것은 아니다. 청지기는 오직 주인의 기쁨을 위해,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는 일을 위해 돈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34)
그리고 그는 명령한다."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되 십분의 일도, 십 분의 삼도, 십 분의 오도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께 갚아야 한다."고 강조한다.35)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임하시기를 우리에게 맡기신 돈으로 마25장의 말씀대로 굶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나그네 된 자를 돕고,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며, 그리고 모든 인류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도록 부탁하셨다는 것이다.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여 빼앗는 것이라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는 설교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은행에 수 백만원을 저금하고도 가난한 자에게 그것을 나눠주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도 가난한 사람이다. 인간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가장 많은 소유를 가진 사람들은 가장 많은 액수를 나눠주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웨슬리는 유대인은 자기소유의 1/10을 나누어주고, 바리새인은 자기소유의 2/10를 나눠주지만, 참 크리스천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나눠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필수적인 의식주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나누어주라는 것은 아니다. 필수적인 것은 해결하고 그후에 남는 것은 모두 나누어주라는 것이다. 필수적인 의식주와 편리한 생활(the plain necessaries and conveniences of life)을 위해 돈을 사용하되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누어주는 청지기가 되라는 것이다.37) 웨슬리는 "The Danger of Riches"에서 1/10, 2/10 뿐만 아니라 1/2, 3/4, 아니 전부를 나누어주라고 권면한다. 38)

웨슬리는 그의 설교 "더욱 좋은 길"(The More Excellent Way)에서 다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옥스포드에서 감리교도라고 불리우는 한 청년이 년수입 30파운드 중에 28파운드를 자기 생활비로 쓰고 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고, 그 다음 해 년수입 60파운드 중에 역시 자기 생활비로 28파운드만 쓰고 3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세 번째 해에 년 수입 90파운드 중에 역시 자기 생활비로 28파운드만 쓰고 6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고, 네 번째 해에 년 수입이 120파운드가 되었는데 역시 자기 생활비로 28파운드를 쓰고 9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39)

이 청년은 존 웨슬리였다고 Tyerman은 해석하고 Green은 John Clayton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웨슬리 자신이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추측한다. 그래서 그는 초대교회 속에 나타난 원시적 공유사회를 존경하였다.

그러므로 부자가 구원에 이르려면 나사로 같은 거지를 돌보고 나눔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소유가 전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나누어주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부의 증가의 위험" (Danger of Increasing Riches)이라는 설교에서 재산을 증식시키고 상속하려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삭케오처럼 재산을 상속하지 않고 그 재산을 필요에 따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함을 주장하였다.

오! 그러나 부자들이 그들의 마음을 재물에 두고 있음을 누가 확신시킬 수 있습니까? 반세기(50년) 이상동안 나는 나의 명백한 권위로 이러한 중요성에 관해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효과가 얼마나 적습니까! 나는 항상 50명의 구두쇠에게 그들의 탐욕스러움을 회개하도록 지적해 왔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확실하게 묘사되어지고, 가장 강한 색채로 그려졌을 때, 누가 이것을 그에게 적용했습니까? 하나님과 그를 아는 이들이 누구에게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까?
만약 그가 현재 함께 있는 당신중의 어떤 이에게 이야기한다면, 오 제발 당신의 귀를 막지 마십시오! 차라리 삭게오와 같이 말씀하십시오: '보십시요! 주님, 저는 저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돈을 사랑하는 당신들에게 명합니다. '가서 이와 같이 행하시오 !'40)

이 "재물축척의 위험성" 이란 설교는 웨슬리 사후에 Bristol에서 발견된 웨슬리생애의 마지막 설교집인 u알미니안 매거진 제14권e(Arminian Magazine XIV)의 서문에 언급된 설교 네 편 중 마지막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웨슬리 생애 마지막 설교로 추정된다. 그 끝에는 "Bristol, Sept, 21, 1790"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해 8, 9월 동안에 웨슬리가 Bristol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었다는 일기의 내용과 딱 맞아떨어진다.
그는 50년 동안에 "탐욕으로 얼룩진 욕심쟁이" 50명도 채 변화시킬 수 없었다고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이것은 책망과 호소가 결합된 파토스(pathos)임이 분명하다: "희미한 눈으로, 떨리는 손으로, 비틀거리면서도 죽기 전에 나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충고합니다."(6절)

B. 돈사랑의 위험

웨슬리는 빈번하게 사도바울의 말씀을 사용하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복을 돈 사랑 속에서 추구하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욱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웨슬리도 이러한 바울의 사상을 받아들여,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을 더욱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한다. 사람들이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할지라도, 그들이 더욱 만족하지는 않는다고 웨슬리는 지적한다. 금이 사람의 마음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웨슬리는 강조한다. 웨슬리는 경고하기를 "너희 부자들이여! 너희에게 다가올 곤경을 위해 울어라"라고 경고한다.41)
돈 사랑의 위험을 웨슬리는 그의 설교 u부에 관하여e(On Riches)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성화생활에 방해됨을 지적한다.
첫째로, 돈 사랑은 무신론(atheism)의 유혹을 받을 위험이 있다. 부는 자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잊어버리게 만든다. 부유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들 속에는 방탕의 기술이 얼마나 큰 가를 감탄한다.42) 세상 오락과 향락이 너무 즐거워서 하나님을 마음에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경고한다. "어리석은 자여,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당신을 볼 수 없다고 상상하는 가? 웃어라! 놀아라! 노래하라! 춤추어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당신을 심판하실 것이다."43)
둘째로, 돈 사랑은 무신론에서부터 우상숭배(idolatory)로 쉽게 전이됨을 웨슬리는 지적한다. 참 하나님을 예배드리지 않는 자들은 거짓 신들을 예배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손으로 만든 어떤 것을 사랑하게 된다.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피조물을 사랑하게 된다.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에 빠지게 된다. 부자들이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유혹에 빠져들어 가는가! 탄식한다.44)
셋째로, 돈 사랑은 안목의 정욕(the desire of the eyes)에 휩싸이게 한다고 강조한다. 부자들은 눈을 즐겁게 해주는 새것과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심미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아름다운 집, 우아한 가구들, 호기심을 끄는 그림들, 멋진 정원들 속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시와 역사와 음악과 철학과 예술과 과학 속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으려한다고 비판한다.45)
넷째로, 돈 사랑은 이 생의 자랑(the pride of life)속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런던시 전체가 a부a(rich)와 a선a(good)을 같은 의미의 단어로 사용한다고 비판한다.46) 런던 사람들은 "그(부자)는 선한 사람이다. 그는 10만 파운드만큼 값어치가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47) 또한 웨슬리는 그의 설교 "북아메리카에서의 하나님의 후기 사역" (The Late Work of God in North America)에서, 그리고 u부에 대하여e(On Riches)에서 동시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일천 파운드는 이만 파운드 질(qualities)의 수요를 공급한다."48) 부자가 교만에서부터 벗어나기가 심히 어려움을 웨슬리는 지적한다. 물질적인 것 때문에 남으로부터 칭찬 받는 것은 일반적으로 영혼에 해독을 끼치는 것이다. 칭찬을 받으면 받을 수록 치명적으로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헌금이 그의 수입에서 몇 퍼센트을 차지하는 가를 묻지 않고 다만 헌금의 액수를 가지고 헌금많이 바치는 교인은 선하고 믿음 좋은 교인이요 헌금의 액수는 적어도 그의 수입에서 많은 퍼센트를 바치는 교인은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다.
다섯째로, 돈 사랑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거슬리는 자기의지(self-will)와 이기주의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여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예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될 터인데,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웨슬리는 이렇게 질문한다. "당신들이 가난했을 때 자기를 부인한 것만큼, 지금 부자로써 자기를 부인하고 있는가? 당신들이 오 파운드의 값어치도 없을 때만큼, 지금도 기쁜 마음으로 노동과 고통을 견디고 있는가?....당신들은 전에 금식했던 만큼, 지금도 금식하고 있는가? 당신들은 전에 아침 일찍 일어났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일어나는가? 당신들은 추위와 더위, 바람과 비등을 전에 기쁨으로 견딘 것처럼 지금도 견디고 있는가? 은혜가 감소되는 것 없이 상품을 증가시킬 수 있는가? 더 이상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써 어려움을 견디지 않기 때문이다."49) 웨슬리는 이 설교에서 성화(sanctification) 곧, 성결(holiness)의 삶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돈 사랑을 지적한다. 돈 사랑이 성화의 걸림돌이 되는 이유를 믿음의 방해물, 믿음의 첫 열매인 하나님 사랑의 방해물, 하나님 사랑에서 솟아 나오는 이웃사랑의 방해물, 겸손의 방해물, 온유의 방해물이 됨을 지적한다. 또한 돈 사랑은 우리에게 경건하고 성결된 성화의 성품을 주기보다 불경건하고 성스럽지 못한 속성과 기질을 우리에게 심어주는 데, 예를 들면 무신론과 우상숭배와 이 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만을 불러 일으켜 성화에 이르지 못하는 악한 기질과 속성만을 주는 것이다. 처음 감리교회가 시작할 때는 부자가 하나도 없어서 가난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다녔는데, 이제는 부유해짐으로써 그 성화의 속성을 상실하였다고 아주 날카롭게 책망하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 모습을 웨슬리가 와서 보면 무어라고 말씀하실까? 똑같은 염려를 하시면서 똑같은 설교를 강한 어조로 말씀하실 것이다. 한국교회가 자본주의의 나쁜 병페를 너무 많이 받아들여 물량화, 기업화, 돈 사랑의 유혹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아닌가? 영국 감리교회가 웨슬리의 책망을 끝까지 외면하고 회개하지 않음으로 결국 중산층화, 상류층화 되면서 점점 쇠퇴하여 갔고, 미국 감리교회도 역시 U.M.C.(United Methodist Church)가 U.M.C.(Upper Middle Class)로 되면서 점점 교인들이 줄어들고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성령이 떠난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 한국교회도 웨슬리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돈 사랑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똑같은 역사의 과정을 밟지 않을까? 역사는 완전히 회귀(circulation)하지는 않지만, 나선형적으로 반복하는 역사의 법칙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한국교회는 희년의 나팔소리를 듣고 깨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위에서도 언급한대로 웨슬리의 생애에 가장 마지막으로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부의 축적의 위험성" 이란 설교에서 거의 절망스러운 어조로 감리교인들의 신앙상태를 염려한다. 그는 50년 동안 50명도 그가 생각하는 크리스쳔 경제관으로 개혁시키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한다.50) 이 설교의 마지막 문단에서 종말론적 신앙으로 감리교도들에게 호소한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할 수 있는 한 모두 나누어주고 있습니까?(Do you give all you can?)
당신들은 일년에 500파운드를 법니까?
그리고 그 중에서 200파운드를 생활비로 사용합니까?
그리고 300파운드를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확실히 당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300파운드를 도둑질하는 하는 것입니다.
일년에 200파운드를 벌어들이는 당신들이 100파운드로 생활하고 나머지 100파운드를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않는다면 당신들도 하나님께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말합니다, a내 소유로 내 마음대로 쓸 수 없습니까?a 여기에 바로 당신들의 실수의 뿌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
당신들은 당신들이 죽은 후에 1만 파운드를 남겨 두시렵니까?
신발과 부츠 1만 켤레를 남겨 두시렵니까?
오, 당신 뒤에 아무 것도 남겨 두지 마십시오.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더욱 좋은 세상으로 보내십시오.
그것을 빌려주세요. 주님께 빌려드리세요.
그리하면, 그것을 다시 돌려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실패할 위험이 있습니까?
그 진리는 천국의 기둥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서두르십시오, 서두르십시오, 나의 형제들이여, 서두르십시오!
당신이 가진 것을 이러한 안전보장에 정착시키기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은 이것을 다 행한 후에 담대히 말하기를 '지금 죽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행할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시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의탁하나이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빨리 오시옵소서'51)


웨슬리는 그가 죽은 후에 감리교회가 성령 떠난 교회가 될까봐 염려한 것만큼 돈 사랑의 시험에 빠질까봐 심각하게 염려하였다. 결국 영국감리교회는 웨슬리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고 물량화 되고 부를 축적함으로써 성령이 떠난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웨슬리가 다시 온다면 똑같은 경고를 아주 높은 어조로 외칠 것이다.

C. 하늘나라의 저축

웨슬리는 그의 설교 28번 산상수훈설교VIII(Sermon on MountVIII)에서 "너희 자신을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역설했다. 이것은 개인적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부를 사용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저축하는 것은 헌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구제하고 나누어주는 것을 뜻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52)

그대는 남은 재물을 이 세상에 두는 것 보다 안전한 곳에 저장하십시오. 그대의 재물을 하늘의 은행에 저축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다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미련 없이 순순한 심정으로 가난한자를 도우십시오. 그러면 그만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53)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주님께 꾸어 주는 것이고 주님은 다시 그에게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해석한다.54) 주님께로부터 거저 받았기에 거저 주어야한다는 것이다. 베고픈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 등 마 25:34-46의 소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베풀기 위해 항상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억눌린 자를 변호하고 고아를 위로하고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어 마음속에서 기쁨의 노래가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둘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며 재물을 해쳐 가난한 사람을 돕고 굶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옥에 갇힌 자에게 구호의 손길을 펴십시오. 병자를 고쳐주되 기적으로 보다 도, 그대가 제공하는 필요한 물질적 도움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십시오. 눌린 자를 변호하고, 고아를 돕고, 과부를 감싸주어 위안을 얻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곤궁에 쪼들려 사경에 해매는 사람들의 축복이 그대에게 임하도록 저들을 힘써 도우십시오.55)

웨슬리는 설교 "더욱 좋은 길"(The More Excellent Way)에서 세상은행에 저금하는 1파운드도 하늘나라에서는 이자를 받을 수 없고 상급을 받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1파운드도 하늘의 은행에 저금하는 것이 되고 영광스러운 이자를 받게 될 것이라고 역설한다.56) 그는 그의 평신도 설교자들에게 더욱 부유해지기를 추구하는 부자들을 경고하는 설교를 해야 함을 가르쳤다.

D. 재산상속의 반대

웨슬리는 부동산 상속의 권리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경제적 분배운동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재산의 청지기 원리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재산에 대한 신성한 권리를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재산에 대한 권리는 그 재산의 올바른 사용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필요한 필수적인 것은 나누어주되, 청지기정신에 따라 그 나머지는 모두 사회에 환원해야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무익한 비용으로 낭비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낭비는 돈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당신 뒤에 남겨두려고 비장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비장은 돈을 땅에 묻어 두는 것과 같습니다. 돈은 우선 당신의 가족과 당신자신의 정당한 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57)

웨슬리의 재산에 대한 관심은 농장 독점화를 반대하고, 대지의 재분배를 권장하거나 강요하는 수단으로서 어떤 농장도 일년에 백 파운드 이상에 세 주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명하게 그는 어떤 상황하에서는 정부의 재산공유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58) 웨슬리의 재산에 대한 견해는 감리교 속에 협동적 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가난한 자들 속에 감리교도들은 가난, 실업, 그리고 노동문제에 그의 신학적 원리를 응용하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III. 존 웨슬리의 대안적 경제윤리(The Third Alternative Economic Ethics)

웨슬리의 경제윤리는 복음적 경제윤리를 넘어서 대안적 경제윤리로 발전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인정하면서도 자본주의의 독점화와 이기주의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경제적 나눔과 재분배와 더불어 사는 상생을 강조함으로서 제3의 대안을 제시한다. 북한은 경제적 자유가 인정되지 않고 재산의 사유화가 없어서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못하기에 자연히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되었고, 남한은 경제적 자유가 넘친 나머지 경제적 정의와 평등과 나눔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IMF위기가 다가왔다. 이러한 민족경제의 위기상황에서 우리는 웨슬리의 대안적 경제윤리를 배울 필요가 있다.

A. 시장경제의 부당성

왜 달걀, 닭고기 그리고 돼지고기가 비싼가? 왜냐하면 큰 농장이 시장들을 독점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작은 농장들을 가진 농부들은 닭과 돼지들을 많이 소유할 수 없다. 큰 농장들은 상대적으로 부를 많이 축적하게 되고, 작은 농장들은 상대적으로 부를 적게 축적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59) 웨슬리는 시장경제(laissez-faire)에 의한 자본의 독점화에 대해 분노하였다.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돈과 음식을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참 크리스챤 사랑이 계속하는 한, 초대교회는 모든 소유를 공유할 수 있었다. 18세기에 크게 영향을 미친 칼빈주의적 자본주의의 윤리를 비판하였다. 웨슬리는 시장경제이론을 비판했다. 웨슬리는 경쟁을 부추기는 자유무역과 시장경제 체제를 거절하였다.60) 막스 베버(Max Weber)는 웨슬리를 자본주의 신학자로 단순화하였다. 막스 베버는 웨슬리의 신학과 윤리가 단순히 한 개인이 가진 소유의 양이 한 개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미친 크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부정확하게 주장한다.61) 웨슬리는 아담 스미스와 아담 페르구손(Adam Ferguson)의 시장경제이론(laissez-faire)이론을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실업의 증가, 가난, 사회적 불평등, 시장독점화와 부동산 독점화현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빈곤의 조건을 증대시키는 현상을 정부가 콘트롤하고 분배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웨슬리는 믿었다. 웨슬리의 경제적 아이디어가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특별한 이론이나 치유방법 때문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정신 때문에 20세기 교회가 본받아야 할 정신이 된다. 웨슬리의 경제 아이디어는 인간요구에 대한 깊은 동정에 기초하고 있었다.
웨슬리는 그의 논문 "식량의 현재적 궁핍에 관하여 논함" (Thoughts on the Present Scarcity of Provisions)에서 고용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는 식량의 궁핍상태를 지적하고 그 원인이 고용체제에 있음을 강조하고,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안 줌으로써 물가가 오르고 물가가 오르는 원인을 술 제조에 있음을 주장한다.
식량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한 기가 막힌 빈곤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우선 국가의 전역에서 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가?를 묻는다. 나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그 사실을 내 눈으로 목격했다. 나는 매일 매일 보잘 것 없는 식사 한끼밖에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나는 런던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이(그 사람은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가장 편안한 삶 을 살던 사람이다) 냄새가 나는 똥더미 속에서 생선을 꺼내 그녀와 아이들을 위한 식량으로 가져가고 있음을 안다. 나는 또 다른 사람을 아는데 그는 구차한 삶을 연장하기 위해 개들이 먹다가 남긴 뼈들을 모아 국을 끓여 먹고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꾸밈이 없는 제3의 소리를 듣는다. 정말로 나는 몽롱하고 힘이 없어 걸을 수조차 없다..........
우리 집 강아지는 집안에 먹을 것이 없게 되자 밖에 나가 근사한 뼈다귀를 물고 들어 왔다. 나는 강아지 입에서 그것을 빼앗아서 저녁식사를 만들었다. 그런 사실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 즉 생활필수품, 편리품, 사치품들이 넘쳐나는 이 땅에서 살고있는 대다수 사람들의 현실이다.62)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이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는가? 그들이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고기가 없는 간단한 이유는 그들이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일자리를 구해 주는 고용 제도의 개혁이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 더욱 중요함을 지적한다.
식량의 궁핍의 원인은 비싼 술 제조와 세금과 부자들의 사치와 낭비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가장 기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려면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구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 한국의 IMF위기로 인하여 대거 실업자들이 생겼다. 한국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도 고용제도의 개혁이 시급하다. 일자리를 실직자들에게 마련해 주는 일이 급선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일등만 살아남도록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 상대적으로 중소기업을 무산시키고 많은 실직사태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일찍이 웨슬리는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시장경제를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분배와 나눔과 평등의 사회구조를 만드는 중요한 경제의 3대원리, 돈 사용의 3대원리를 그의 설교에서 강조하고 있다.

B. 돈사용의 3대 원리

그의 설교에서 돈사용의 세 원리를 설교하였다. 제1원리는'열심히 벌어라'(gain all youy can)는 것이다. 웨슬리는 크리스천 들이 금을 사는 것 없이,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것 없이 자신의 사업을 위해 이웃의 사업을 해치는 것 없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웨슬리는 이웃을 삼키면서, 그들의 고용인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돈벌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다. "그것이 사람들의 피가 아닌가?... 피, 피가 거기에 있다. 기초와 마루바닥과 벽과 지붕에 온통 피로 물들어 있다!. 너 피의 사람아, 네가 가장 사치스러운 자주 빛 아마포로 옷 입었다 할지라도, 너의 피 밭을 너의 후손에게 물려주기를 희망할 수 없다. 네가 몸과 영혼을 모두 파괴시킨 네 고용인들처럼 너의 기억과 함께 너도 멸망할 것이다."63)
웨슬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재능을 사용하여 부지런히 돈 벌기를 또한 제안한다. "어떠한 일도 결코 내일까지 미루지 말라! 오늘 할 일을 오늘에 하라!"
제 2의 원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save all you can!)는 것이다. 웨슬리는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맛을 즐기는 기쁨을 더하기 위해서, 집을 사치스럽게 장식하기 위해서, 그리고 값비싼 그림과 책을 사기 위해서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설교하였다.64) 자녀들 위해 돈을 지나치게 낭비하는 것은 돈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다고 웨슬리는 비판한다.
제 3의 원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주어라" (Give all you can!)는 것이다. 제 1원리와 제 2원리는 제 3원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웨슬리는 제3원리를 가장 중요시 여겼다. 열심히 노력하여 돈을 모으고 저축한 것이 올바른 일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위해 바르게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웨슬리는 강조한다. 경제적 재분배가 가장 중요하다. 인간이 모으는 것과 저축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이 모든 소유가 아무 의미도 없게 되어 버린다. 만일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나누어주지 않으면, 돈을 바다에 던지거나 땅에 파묻어 버리는 것이 된다.


C. 경제악의 치유

어떻게 이 악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가?
첫째로, 가난한 민중들을 위한 상품을 확장시켜 가는 시장들을 확보함으로써 고용주가 고용인들을 더 많이 쓸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러 가야 한다.
둘째로, 기본적 필수품-음식을 포함하여-의 가격이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상품도 구할 수 있도록 감소해야 한다.65)
세째로, 웨슬리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곤경을 지적하는 일에 경성하고 있었다. 웨슬리는 평범한 민중들의 분노를 표현하였고 그 고통에서의 해방을,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1775년 8월)에서 호소하였다.
넷째로, 웨슬리는 상속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다. 상속재산은 가장 큰 악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상속재산) 그것을 받는 사람들을 해치기 때문이다. 후손에게 필요한 만큼을 제공해 주고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뜻 있는 일-특히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누어주는 일-에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66)
다섯째로, 이 상황의 다른 국면은 웨슬리의 직업에 대한 가르침과 태도이다. 그의 원천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어떤 정신으로 당신의 사업을 경영하고 있나? 세상의 정신으로, 혹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당신은 매사를 희생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뜻에 당신의 뜻을 포기함으로써, 행해야 한다. 끊임없이 향락이나 부에 목적을 두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만 목표를 두어야 한다."67) 그리하여 웨슬리는 모든 사업과 노동의 영역에 크리스챤 윤리가 실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D. 고용체제의 개혁

웨슬리는 그의 논문들과 설교문들 속에서 가난과 실업은 18세기의 사회적 불평등체제의 결과라고 보았다.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악하고 악마적인 거짓말이라고 선포한다. 웨슬리는 더욱 정직한 평가는 백성들이 일할 일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가난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68) 웨슬리가 그 당시의 가난과 실업에 대한 원인을 분석한 것이 Lioyd's Evening Post의 편집자에게 보낸 1772년 12월 편지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 다음달에 쓴 논문 "Thoughts on the Present Scarcity of Provisions"에서 확장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는 전쟁, 높은 물가, 흉년 그리고 일반적인 빈곤 등으로 특징지어 진다. 그는 그의 논문에서 "왜 그들이 육식을 못하는가 하면 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실업율이 늘어나기 때문에 필수품, 특히 음식물의 물가가 상승하고 있다... 과거에 50명을 고용했던 고용주들이 이제는 겨우 10명을 고용하고, 과거에 20명을 고용했던 고용주들이 이제는 겨우 한 명 혹은 아무도 고용 못하는 실정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69) 그리하여 웨슬리는 경제적 빈곤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잘 조직된 고용체제를 만드는 사회변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부자들의 낭비 때문에 썩어 버리는 음식이 많아서 식료품 값이 비싸다고 보았다. 영국에서 산출되는 밀의 반 가량이 부자들의 낭비에 의해 버려진다고 지적한다.70)

E. 세금제도의 개혁

그는 세금제도의 개혁도 주장한다. 불, 물, 대지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므로 세금이 증가할 뿐 아니라 높은 세금의 원인 중에 국가적 빚도 포함시키고 있다. 70년 전에는 국민전체의 일년 소비액이 3백만 파운드였는데, 지금은 국가의 빚의 일년 이자만 4백만 파운드라고 탄식한다. 어떻게 세금을 낮출 수 있는가? 국가 빚을 변제함으로써, 불필요한 은퇴금을 없앰으로써, 낮은 세금을 지불하기에 익숙한 영국의 부자들과 정치가들에게 더욱 큰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민중들이 세금의 과중한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곡식과 대지의 착취로 인한 물가상승이 높은 세금의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가난한 민중들이 세금부담에서 자유하고 국가경제가 가난한 민중을 위해서 발전해야 함을 강조한다.71) 웨슬리는 "식량의 현재적 궁핍"에서 다음과 같이 세금문제에 대하여 언급한다.
어떻게 세금이 인하될 수 있는가? (1) 국가 부채의 반을 갚으면 가능한데 저축이라는 단 하나의 수단으로도 일년에 이백만 파운드 이상을 갚을 수 있다. (2) 쓸데없는 모든 연금을 폐지함에 의해 가능한데 현재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죽어야 한다. 그것은 특히 요새 혹은 성의 총독으로서 수백의 게으름뱅이들에게 주어지는 터무니없는 연금이다. 그 요새들은 까마귀들의 은신처 이외는 지난 백 여년 이상 동안에 어떠한 일도 한 적이 없다. 이 부분에서 일 백 만 파운드 이상을 절약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과연 이것이 이루어질까?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단시일에 이루어지리라고 희망할 어떤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종교를 그렇게 심하게, 공공연하게, 철저하게 경멸하는 이와 같은 나라는 그것이 기독교든, 마호멧트교든, 혹은 이교도이든 간에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내가 보거나 들었거나 읽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나라에서 우리가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마치 하나님께서 단시일 내에 당신의 운동을 일으키시고 주장하실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들의 편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 우리가 붙어야 하지 않겠는가?


IV. 한국의 희년경제운동과 한국교회의 재정의 갱신

이러한 웨슬리의 희년적 꿈은 통일희년의 꿈과 통한다. 바로, 이러한 신학적 통찰이 한국의 희년경제운동의 신학적 기초가 될 수 있다. 웨슬리가 오늘 한국에 다시 온다면 그는 이런 희년사회가 실현되기 위해 열심히 통일운동에 앞장설 것이다. 이런 희년운동의 프락시스를 한국적 상황 속에 다시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웨슬리는 단순히 내면적 개인적 성화만을 강조한 부흥사가 아니라 외향적 사회적 성화운동까지 전개한 사회복지운동가이다. 그의 사회복지운동은 사회봉사만 아니라 더욱 나아가 사회변혁까지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회변혁을 위한 성화운동은 철저히 개인구원에 기초한 운동이었다. 독일의 경건주의는 개인의 변혁을 통한 세계변혁을 희망하였으나, 개인구원에 더욱 집중함으로써 세계변혁에 아무런 기여도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내세지향적, 현실도피적, 비정치적, 이원론적 신앙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러나 웨슬리의 경건주의는 개인적 성화와 동시에 사회적 성화를 함께 중요시 여겼기에 18세기 영국의 심령부흥운동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사회변혁운동까지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불란서 역사가 할레비(Elie Halevy)와 칼라일(Thomas Carlyle)은 불란서혁명 같은 혁명의 위기에서 감리교운동은 영국을 구원하였다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감리교운동은 신앙운동으로만 끝나지 아니하고 사회변혁운동으로 진보한 운동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개인구원과 사회변혁의 신학적 기초는 성화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교회의 재정은 청지기정신을 상실하고 있다. 교회의 재정은 교회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재산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쓰기보다는 교회의 집단이기주의를 만족시키는 데 더욱 많이 쓰여지고 있다. 교회의 재정이 집단이기주의의 도구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여 있고, 일부 목회자의 사유재산화할 위기에 처하여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재정은 예배당만 잘 짓는데 쓰여질 것이 아니라 사회복지센터를 예배당과 함께 지어서 복지운동에 쓰여야 할 것이다. 다양한 노인복지, 장애인 복지 등에 교회의 재정이 쓰여져야 한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저축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앞장서는 교회가 되어야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다.
또한 웨슬리의 건전한 복음주의, 민족개혁운동과 은총의 낙관주의에 의한 희년운동은 오늘의 한국적 통일운동의 실천 프로그램으로 다시 응용할 수 있다. 웨슬리가 외치고 실천했던 경제의 3대원리 청지기정신, 하늘나라의 저축운동, 재산상속반대운동, 세금제도개혁, 고용체제개혁, 시장과 대지의 독점화 반대운동 및 경제의 재분배운동은 남북통일을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프로그램들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도 -gain all you can과 Save all you can- 분배하는 삶-give all you can-을 외친 웨슬리의 가르침은 확실히 공산주의(경제적평등은 강조하지만 경제적 자유를 상실한 제도)와 자본주의의 모순 (경제적 자유는 강조하지만 경제적 평등을 잃어버린 제도)을 극복해 가는 제3의 길(Third alternative)이다. 웨슬리의 가슴속에 붙은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불이 오늘 한국 감리교인들, 더욱 나아가 전국민의 가슴 속에 다시금 붙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노숙자와 실직자들과 나눔과 분배와 평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교회의 재정이 쓰여야 한다. 통일을 위해 굶어 죽어 가는 북한주민 살리기를 위해 쓰여야 한다. 독일통일을 위해 서독교회는 예산의 42%을 동독살리기를 위해 썼다.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 재정을 그렇게 써야 한다는 의식이 거의 전무하다.
21세기 한국교회는 IMF위기를 극복하고 통일을 실현하는 희년경제운동을 위한 역사적 사명을 위해 다시 거듭나야 한다. 교회재정은 그러한 희년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쓰여져야 한다. 그렇게 교회재정이 쓰여질 때 더 많은 헌금이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의 재정으로 하늘나라에 저축할 때에, 소자들 곧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고아, 과부, 신체장애인, 독거노인, 노숙자, 실직자, 북한주민을 위해 쓰여 질 때 사회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선교의 문도 훨씬 크게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의 경제윤리의 빛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한국교회의 자기변혁과 한국교회재정의 갱신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웨슬리처럼 루터가 무관심하였던 성화론을 구원론의 중심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구원의 출발-의인화와 거듭남-보다도 오히려 구원의 과정과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의미하는 성화를 더욱 중요시 여겨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무시해 왔던 부분이다. 영적 탄생의 부흥 운동은 많이 일어났으나 영적 성장과 성숙의 부흥 운동은 약화되었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성화를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웨슬리는 수직적, 수동적 의인화(justification: imputation)와 수평적, 능동적 성화(impartation)가 변증법적으로 조화를 이룬 성화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참 거룩함(righteousness & true holiness)을 닮아 가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엡 4:24)운동에 한국교회가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웨슬리의 경건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경건주의가 강조해온 수동적 의인화에는 익숙해 있지만 웨슬리의 능동적 성화이해는 부족하기 때문에 신앙의 행동화, 생활화, 사회화, 문화화, 그리고 역사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72)
둘째, 물량주의와 성공주의의 신앙에서 십자가 신학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역사적 책임을 지는 한국교회가 될 수 있다. 역사의 소외와 빈곤과 억눌림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지는 십자가의 한국교회가 될 때 한국 역사의 바른 방향에 설 수 있고 역사에 앞장서 가는 교회가 될 수 있다. 특별히 자기교회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집단이기주의를 버리고 실직자들과 노숙자들과 기근에 허덕이는 북한 백성들을 위해 함께 아파하고 더불어 나누어 갖는 책임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웨슬리의 의인화와 거듭남과 성화와 완전의 중심은 십자가의 복음이였다.
셋째, 신앙지상주의 혹은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에서 행동주의 신앙으로,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는 산 신앙으로 거듭나야 역사 창조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신앙의 행동화가 일어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경제적으로 섬기고 나눔을 실천하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등이 안 무너지는 사회를 만드는데, 더 이상 중소기업이 망하지 않고 실직자와 노숙자들이 늘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한국교회가 기여하여야 한다.
넷째,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이원화에서 벗어나서 총체적인 구원을 말하는 한국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복음화와 인간화의 총체적 선교를 수행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역사적 과제이다. 그래서 복음선교 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에도 앞장서 나가야 한다. 앞으로 21세기의 한국사와 세계사는 한국교회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되어지기 위해서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를 총체적으로 이루어 가야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협의회가 헌장도 개정하고 새롭게 보수적 교단들도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민족사적 사명과 세계사적 사명을 위해 하나가 되는 교회로 거듭나야할 것이다.
다섯째, 자본주의 병폐인 이기주의적 신앙에서 더불어 살고 더불어 나누어주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민주화와 통일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웨슬리가 가르친 청지기정신에서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나누어주는 정신'으로 속회헌금 및 구역예배헌금을 통일기금화 하는 운동을 일으켜야할 것이다. 만약 1천만 기독교도들이 일주일에 1천 원씩 52주를 헌금한다면 일년에 5천 2백 억이 될 것이고 그것을 10년만 하면 5조 2천억을 북한 돕기를 위해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우리 한국기독교인 들은 청지기정신으로 재산상속을 반대하는 켐페인을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소유의 1/3 혹은 1/4은 자녀들에게 상속하고 그 나머지 2/3 혹은 3/4은 사회에 환원하는 운동을 벌어야 한다. 우리사회는 재산상속의 문제로 심각하게 병들어 가고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일곱째, 앞으로의 한국교회는 자유와 평등이 변증법적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로 거듭나야한다. 큰 교회는 작은 개척교회들을 돕기 위해 교회재정을 쓸 수 있어야 하고, 도시교회는 농어촌교회를 위하여 교회재정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도시교회와 큰 교회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작은 교회들과 나누어 쓰는 평등과 상생의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여덟째, 웨슬리가 강조한대로 성육신적인 정신으로 역사 속에서 섬김으로 사회적 성화를 열심히 이루어야 한다. 앞으로 21세기는 섬김(service)정신을 요구한다. 많은 21세기를 얘기하는 미래학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말은 섬기는 서비스정신이다. 세계화와 국제화시대에 살아남는 사람이 되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하고, 살아남는 교회가 되려면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하고, 살아남는 국가가 되려면 섬기는 정신을 생활화하는 국가가 국제 경쟁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교회의 재정은 세상을 섬기는 일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나오는 말 >

지금까지 웨슬리의 경제윤리는 오늘의 IMF위기와 통일 희년운동에 큰 교훈을 주고 있음을 지금까지 살펴 보았다. 웨슬리가 외치고 실천했던 경제의 3대원리 청지기정신, 하늘나라의 저축운동, 재산상속반대운동, 세금제도개혁, 고용체제개혁, 시장과 대지의 독점화 반대운동 및 경제의 재분배운동은 남북통일을 위해 복음적 경제윤리요 대안적 경제윤리이며, 우리가 실천해야 할 프로그램들임을 가조하였다 .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도 -gain all you can과 save all you can- 분배하는 삶-give all you can-을 외친 웨슬리의 가르침은 확실히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해 가는 제3의 길(the third alternative)이다. 웨슬리의 가슴 속에 붙은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불이 오늘 한국 교인들과 더욱 나아가 전국민의 가슴속에 다시금 붙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냉전의 희생양으로서 분단되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으로서 그들 자신의 범죄로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되어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제국주의 36년 통치하에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다가, 갑자기 분단되어야 할 세계사적 정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자본주의 강대국 미국과 사회주의 강대국 소련의 야욕에 의해 일본군 무장해제를 이유로 다시 분단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냉전죄악의 마지막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는 민족이 되었다. 현대세계사의 죄악의 짐을 우리가 대신 짊어지고 있다.
그러한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가? 함석헌은 그의 책 [뜻으로본 한국역사]에서 여기에 한국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있다고 해석한다. 함석헌은 그의 책을 영어로 번역한 uQueen of Sufferinge에서 한국을 십자가에 달린 늙은 여인, 창녀로 비유한다. 그리고 그 늙은 여인을 오른 손은 중국이 왼손은 일본이 머리는 러시아가 다리는 미국이 잡아당기고 있다고 묘사한다. 한국의 고통이 온 세계의 고통이요, 온 현대사의 고통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고통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계사를 정화시키고,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그는 믿는다.73)
한국의 고난은 세계사를 정화하고 성화시킨다. 세계사적 짐을 짊어짐으로써 한국인 스스로를 성화 시키고 스스로를 구원하며 또한 동시에 세계를 성화 시키고 세계를 구원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인은 세계사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승화시키는 지구적 사명(a global mission)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통일은 한국사의 문제만 아니라 세계사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구에 사는 모든 인류는 한국의 통일희년운동을 지지하고 도와야 한다.
그런데 함석헌은 특별히 우리가 통일을 이룰 수 있고 세계사의 주인이 되는 원동력은 군사의 힘도, 정치의 힘도, 경제의 힘도 아닌 신앙의 힘이라고 강조한다. 반만년의 고난의 역사를 통하여 신앙으로 훈련되어온 우리민족이 그 신앙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고 더 이상 십자가에 매어 달리고 가시관을 쓴 여인이 아니라 여왕의 왕관을 쓴 세계사의 주인으로 부활할 것을 함석헌은 예언한다. 이 여인이 세계사의 죄악들을 속죄하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저지른 죄악들을 속죄하고 다시 부활하는 통일의 그날, 세계사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동방의 등촉 그 빛을 발휘하는 날, 아세아뿐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할 날이 다가올 것이라고 한다.74) 그리하여 21세기 태평양시대, 동북아의 시대에는 한국이 더 이상 세계사의 하수구 노릇을 하지 않고 세계사에 앞장서 가는 민족, 새로운 세계사를 창조하는 민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일이 하지 못한 세계사의 새로운 창조를 분단 마지막 국가인 한국이 이룩할 것이다. 교회의 재정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지구적 사명을 완수하는 일을 위하여 쓰여질 수 있어야 한다.


주) 1) 찰스 핸디 지음. 노혜숙 옮김. [헝그리 정신]. (서울: 생각의 나무, 1998). 25-27.
2) 핸디, 256-257
3) 송병락, [자본주의의 웃음 자본주의의 울음], (서울: 김영사, 1998),234.
4) 송병락, 236
5) 송병락, 197.
6) Theodore W. Jennings, Good News to the Poor. (Nashville: Abingdon Press. 1990) 97-118
7) Theodore W. Jennings, Jr., Good News to the Poor- John Wesley's Evangelical Economic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0) 97-99
8) Douglas Meeks. "sanctification and Economy: A Wesleyan Perspective on Stewardship." Rethinking Wesley's Theology.(Nashville: Kingswood Books. 1998) 83-98.
9) 더그라스 믹스 지음, 홍근수, 이승무 옮김. [하느님의 경제학], (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8). 145-146
10) 더그라스 믹스, [하느님의 경제학], 146-147.
11) 더그라스 믹스, [하느님의 경제학], 149-150.
12) 더그라스 믹스, [하느님의 경제학], 117-118
13) 더그라스 믹스, [하느님의 경제학], 119
14) Douglas Meeks. "God and the Economiy of Gift in Wesley's Theology." (Lecture at 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 in Seoul. Oct. 20,1998). 9
15) Meeks. 9.
16) Meeks. 9.
17) Manfred Marquart. John Wesley's Social ethic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2). 35.
18) John Wesley."On the God's Vineyard. "The Works of John wesley. VII. ed. Thomas Jackson.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86), 204. 이하 Works로 표기함.
19) Martin Luther. "The Freedom of a Christian." ed. J.M.Porter. (Philadelphia: Ortress Press. 1974). 34-35.
20) Works.VIII. 205.
21) Works.VIII. 472.
22) Leon O. Hynson. 이희숙 역. [웨슬리의 윤리 사상] (서울: 전망사. 1987).
23) Works. vol. V. 296
24) Leon O. Hynson. To reform the Nation (Grand Rapids, MIchigan: Francis Asbury Press. 1984). 9-10.
25) Works. vol VIII. 299.
26) John wesley. "On Perfection." Works. V. 46-61.
27) John wesley. "Christian Perfection." Works. VI 2-4.
28) John Wesley.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London: Epworth Press. 1985). 11. 이하 A Plain Account로 표기함.
29) John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 (London: Epworth Press. 1976). 216.
30) John Wesley. "Scriptual Christianity." Works. vol. V. 46
31) John Wesley. "Thoughts on Press Scarcity of Provisions." "Thoughts on Slavery." Works. vol.XI 등에서 이러한 제도적 개혁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32) Wesley. "The Important Question." Works. vol. VI. 500.
33) Works. VIII. 360-361.
34) Wesley. "The Good Steward." The Works of John Wesley. Bicentennial Edition.(Nashvill: Abingdon Press. 1980). vol. 2. 283. 이하 The Works로 표기함
35) Wesley. "Good Steward." The Works. vol. 2. 133-135.
36) Works. VII. 9-10.
37) "The Danger of Riches." The Works. vol.3. 237
38) "The Danger of Riches." The Works. vol.3. 239
39) "The Danger of Riches." The Works. vol.3. 275-276
40) 웨슬리. "부의 증가의 위험." 김홍기 편저. [존 웨슬리의 희년사상].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1996). 339.
41) Wesley. "Danger of Riches." Works. VII. 10.
42) "On Riches." The Works. vol.3. 523.
43) "On Riches." The Works. vol.3. 524.
44) "On Riches." 524.
45) "On Riches." 524-525.
46) "On Riches." 525.
47) "On Riches." 525.
48) "On Riches." 525. 600.
49) "On Riches." 527-528.
50) Wesley. "The Danger of Increasing Riches." The Works. vol.4. 177.
51) Wesley. "The Danger of increasing Riches." 186.
52) 웨슬리. "산상수훈 VIII"(Sermon on Mount.). 김홍기 편저. [존 웨슬리의 희년사상]. 285.
53) 웨슬리. 285-286.
54) 웨슬리. 285.
55) 웨슬리. 286-287.
56) Wesley. "The More Excellent Way." The Works. vol.3. 275.
57) 웨슬리. "선한 청지기." 김홍기 편저. [존 웨슬리의 희년사상]. 259.
58) Wesley. The Leters of John Wesley. vol. V. (London: Epworth Press. 1931). 352-354. 이하 Letters로 표기함.
59) Wesley. Letters. 56.
60) T.W.Madron. "John wesley on Economics." Sanctification and Liberation. ed. Theodore Runyon (Nashville: Abingdon Press. 1981). 113.
61) Max Weber.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tialism.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76). 142-143.
62) 존 웨슬리. "식량의 현재적 궁핍에 관하여 논함." 김홍기 편저. [존 웨슬리의 희년사상]. 421.
63) Wesley. "Use of Money." works. VI. 129.
64) Wesley. "Use of Money." works. VI. 131.
65) Wesley. "Use of Money." works. VI. 55.
66) Wesley. "Use of Money." works. VI. 55.
67) Wesley. "Use of Money." works. VI. 131-133.
68) John Wesley. "thoughts on Present Scarcity of Provisions." Works. XI. 54. 이하 "Thoughts on Present Scarcity...."로 표기함.
69) "Thoughts on Present Scarcity...." 54.
70) "Thoughts on Present Scarcity...." 55.
출처 : 감신대원 2003년 Mdiv
글쓴이 : 쿠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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