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
김홍기 교수
(감신대 교회사)
교회의 순교사는 로마의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되었으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순교는 그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무장시키고,기독교를 온전히 지키며 전파하는 최
고의 방법이었다. 로마에서의 순교는 스스로 자기 신앙을 점검하고 세속권력에
맞서 자 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요,최선의 예배였기 때문이다.
1. 박해의 원인
로마제국의 황제들이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정
치적 이유였다. 로마의 평화(Pax Romama)를 외치면서 세계를 제패하고,세계를 통
일하기 위한 정치적 결집력을 형성하기 위해 로마 황제를 주님(kupios)이라고 부
르도록 강요하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에 대한 최대의 도전,생명과 바꾸는 환난이 다가오게 된 것이
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못박히신 예수가 다시 부활하여 죄를 사하여 주고 구
원해 주는 그리스도임을,자신들의 생명과 같이 고백하여 왔다(행2:36,마16:16).
곧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일하고 예수를 위해 봉사하고,예수를 위해 선
교하다가 예수를 위해 죽는 것이 그들의 인생의 목적이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은 그들의 인생의 주인이시요,주님이셨다(롬14:7-8). 예수 이외에 어떤 사람도
그들의 주인이 될 수 없고,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들의 주님(kupios)이시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 황제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었
고,존경과 숭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여기에 교회와 국가의 미묘한 관계,정치와 종교의 심각한 갈등이 표출되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충직한 신앙고백을 로마제국의 반동분자,혁명세력으
로 정치적 해석을 하기에 이르렀다. 시카고 대학교의 교회사가 마틴 마티(Martin
Marty)도 로마제국이 정치적 불안정과 공포 때문에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고 해석한다(A Short History of Christianity.
Philadelphia:Fortress Press. 1987. P.44)현대세계사,특히 한국현대사에서도 독
재정권이 정권유지가 위태롭고 불안정할 때마다 정치적 탄압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 과거나 오늘이나 비슷한 역사의 현상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순교를 당해 가면서까지 기독교를 변증한 변증가 저스틴(Justin Marty)에 의하
면,초대교회 성도들은 무신론자(atheist)로 취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서
[제1의 변증론](First Apology)에서 황제숭배를 거절한 기독교인을 무신론자로
취급하는 네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다. 첫째 크리스천(가가가가가가가가가s)이라
는 이름이 의혹의 상징이 되었다. 로마황제의 사람이기보다 그리스도의 사람이였
기 때문이다. 둘째 크리스쳔은 비종교인과 무신론자들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무리들이라는 것이다. 셋째 야성적이고 감정적인 예배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넷째 국가에 불충성하는 무리로 오해받았다. 그러나 저스틴은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참유신론자들이라고 하면서 로마제국을 위해 하나님을 예배드린다고 주장하
였다. 황제의 권세를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로마의 멸망을 원치 않으나,황제숭
배는 사탄적이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에 거부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
다.
그 외에 기독교인들은 식인종으로 오해받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성만찬 때에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성적으로 문란한 집단으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그들이 예부 후에 나누어 먹는 공
동식사가 사랑의 예찬,곧 아가페(가가가가가)였기 때문에 음란한 사람들로 오해
받았고,심지어 동성연애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순교의 형장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고,신앙을 지키기 위해 로
마의 치외법권지대인 지하 무덤 동굴 카타콤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의 이름
하나 때문에 박해를 받아 손이 잘리고,발이 잘리고,여러가지 상처를 입은 크리스
쳔들이 성만찬을 나누면서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가가가가가가 가가가가가가가 가가가가 가가가가 가가가가)의 희랍어 첫
알파벱을 모은 물고기 (가가가가 : 가가가가가)르 그들의 암호로 사용했다.
2. 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의 대립
네로 황제는 로마 시데 대형 화재를 일으켜 놓고(AD.64년 7월 19일) 그 책임을
크리스천에게 물었다. 장차 세계가 불로 심판받는다고 믿는 크리스천들이 로마를
불질렀다고 누명을 씌워,원형경기장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밥,짐승의 밥,혹은 십
자가에 매어 달려 많은 구경꾼들 앞에서 죽임을 당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네로는 그의 정원 뜰에 기둥을 박고 성도들을 매달아 기름을 뿌리고 불
을 붙여 그 타는 불꽃 속에서 그 불빛으로 저녁 파티를 갖기도 하였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네로를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베드로와 바울 사도도 이때에 순교
당하였다. 요한게시록은 이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사도 요한
은 밧모 섬에서 로마제국을 짐승의 세력-열 뿔 달린-으로 묘사하면서 불의한 로
마제국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예언자적 통찰력을 갖고 요한계시록을 저술하였
다. 로마의 평화는 불타 버리지만 그리스도의 평화의 왕국은 최후 승리하고 완성
된다는 예언의 소리였다.
도미티안 황제(Domitian :AD.81-96)는 자신이 "주님과 하나님"(가가가가가가가
가가 가가가가가)으로 불리워지기를 원했다. 그렇게 부르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국가에 대한 반역범,혹은 무신론자로 취급당하였다. 그당시 크리스쳔들은 대부분
하류층 민중들이었는데 점차 상류층까지 복음이 전파되어,도미티안 황제의 사촌
인 잡정관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그 부인 프라비아 도미틸라도 크리스천이 되었
다. 그래서 사촌 황제의 박해를 받아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도 도미티안에 의해 처
형당하였고,그의 아내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귀향살이를 가게 되었다.
트라쟌 황제Trajain:AD.98-117)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칭찬받는 황제 중의 하
나였는데,국부(국부)라는 명예까지 얻었다. 그는 모든 비밀단체와 조직에 대하여
임하게 조치하는 법을 다시 살렸다. 당시에 정치적,혁명적 목적으로 개인 비밀
정치집단과 조직들이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방관리들은 그 법을 크리스쳔들에게도 적용하였던 것이다.
버티니아(Bithynia) 총독 플리니(Pliny)는 황제에게 보고하기를 "이 우상(기독
교) 종교는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느데,도시뿐만 아니라,소아시아 마을까지 모든
계층과 성별과 연령층을 넘어서고 있어서,성전(호마제국신들에게 예배드리는)들
이 폐쇄되고 희생의 제물들이 팔리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총독 플리니는
이것을 막기 위해서 크리스쳔들을 처형할 것을 황제에게 호소하였다. 황제트라쟌
은 크리스쳔들을 처형하되,만일 자신이 크리스쳔이었음을 부인하고 로마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행동을 보여주는 자는 살리도록 하였다. 이라하여 기독교는 잠정
적 혁명세력의 비밀연합조직으로 오해되어 박해를 받게 되었다. 특히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이 심한 박해를 받았다.
예루살렘의 감독 시므온(Symeon)이 120세에 십자가형을 받게 되었고(AD. 107),
같은 해에 유명한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시우스(Ignnatius)가 로마로 끌려가 콜로
세움 원형 경기장에서 여러 관중이 보는 가운데 사자밥이 되었다. 삽시간에 사자
들이 그의 살과 피를 뜯어 먹어 몇 개의 뼈c에 남지 않았다. 그는 평소 열심히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감독이었으면서도 피 흘려 순교해야만 만족하리 만큼 순
교에 대한 열정적 열망이 있었다. 그는 황제 트라쟌 앞에서 "나는 내 가슴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부름꾼(theophrus)입니다"라고 고백
하였다. 그는 로마의 신들 앞에 제물을 드릴수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와 함께
동행한 신앙의 동지들이 그날 밤 꿈에 이그나시우스를 보았는데,마치 열심히 노
동하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땀을 흘리면선 그리스도 옆에서 있었다고 하였다.
하드리안 황제(Hadrian : AD.117-138)는 로마국가의 종교에 헌신한 사람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동시에 바개하였다. 그는 유대교 성전의 자리에 희랍신 쥬피
터의 신전을 짓고,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신 자리 위에 희랍신 비
너스의 신전을 우뚝 세워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을 함께 모욕하였다.
그런 반면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Autonius Pius :AD.137-161)는 잔인한 폭력
으로부터 기독교인들을 보호하였다. 그는 아시아 도시들의 지방 총독들에게 크리
스쳔들의 무죄함을 시험토록 하였다. 그러나 어떤 지방 총독들의 처사에 대해 황
제 자신도 제어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소아시아 지방의 총독 스타티우스 콰드라
투스(Statius Quadratus)는 서머나의 유명한 감독 폴리캅(Polycarp)의 신앙을 시
험하게 되었다. 재판관이 황제를 두고 맹세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하겠다
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폴리캅은 고백하기를 "86년 동안 나의 왕이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한 번도 저버린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
풀어 주신 나의 왕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화형기둥에 올라갔고 화형당하는 불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였다. "순교자의 수에
들어가게 하시고,그리스도의 고난의 잔을 마시게 하시며,성령으로 썩지 않AA
영과 몸으로 영원히 부활게 하시니 찬양드립니다."후대 서머나교회의 편지에 나
타난 전설에 의하면 그 불꽃이 성자의 몸을 해치지 않기를 마치 불 속에 있는 황
금같이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아름다운 향기를 맡았다고 증언하였다.
처형관이 그의 몸에 칼을 던지자 핏줄기가 흘러나와 불을 꺼버렸다. 시체를 로마
의 관습대로 화형한 후 뼈는 교회가 보관하였는데 황금과 다이아몬드보다 더욱
값지게 취급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시체가 타고 남은 재 속에서 비둘기가
날아갔다고 전하기도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AD. 161-180)는 교육 수준이 높
고 정의롭고 친절하고 사랑이 많은 황제였으나 자신을 믿는 스토익 학파
(Stoicism)의 철학자였다. 이러한 철학적 신앙 때문에 기독교를 비합리적이고 환
상적인 우상으로 간주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해 냉정하기에 이르렀다.
데시우스 트라쟌 황제 (Decius trajan :AD.249-251)는 가장 열심히 정열적으로
옛 로마정신을 일깨운 왕이다. 그는 AD250년에 모든 지역의 총독들에게 칙령을
내리는 등 조직적이고 잔인한 박해를 가하였다. 그것은 전 로마제국을 휩쓰는 박
해였고,가장 많은 순교자를 만든 박해였다.
특히 감독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혹심한 핍박이 임하였다. 로마의 감독 파비
아누스(Fabianus),안디옥의 감독 바비라스(Babylas),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
(Alexander)등이 순교하였다.
바레리안 황제(Valerian : AD.253-260)는 크리스쳔들에 대해 초기에는 부드러
웠다. 그러나 AD257년 이후 그의 마음이 강팍해지면서 유능한 평신도와 성직자들
을 귀향보냈다. 이 당시에 가장 잘 알려진 박해는 박해는 카테이지(Carthage)의
감독 카프리안(Cyprian)의 순교다.
카프리안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역설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
고 로마 감독이 다른 지역의 감독보다 우월하지 않음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키프리안은 로마신들과 로마법들을 원수로 취급하였고,많은 무리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스스로 벌거 벗고 두 눈을 가리운 채,한 평신도 장로로 하여금 두 손을
묶게 하고 처형관에게 금 25개를 지불한 후,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도록 하기 위
해 목베임을 당하였다. 그는 "은혜로 우신 하나님"이라고 외치면서 숨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역사가 기본(Gibbon)은 "그의 순교는 가장 예절 바
른,정중한 죽음"이었다고 묘사한다.
디오클레티안 황제(Diocletian :AD.284-305)는 노예의 아들 출신으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권좌에 오른 왕이다. 그의 부인 프리스카,딸 발레리아,대부분의 내
시들,궁녀들이 크리스쳔이었거나 기독교에 호의적이었으나,황제 자신은 이교도
우상숭배자였다.
쥬피터 케피토리누스(Jipter Capitolinus)의 대리자로 추앙해 주기를 원했다.
그는 자칭 세계의 주인이었다(Master and Lord). 그 앞에는 아무도 무릎을 꿇지
않은 자세로 나타날 수 없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마는 땅에 대고 있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신적 숭배에 거슬리는 기독교도와 교회들을 파괴하였다. 니코메디
아의 웅장한 교회당,영국과 스페인을 제외한 모든 로마제국의 교회당을 파괴하였
다. 또한 시장바닥에서 성경책들이 태워졌으며,성직자들이 붙잡히고 고문당하고
원형극장에서 짐승의 밥으로 찢겨져 갔다. 죽어가면서 순교자들은 전능하신 하나
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리고 감사를 드렸다. 성경책을 버림으로써 박해를 면한 배
교자들(Traditor)이 이 당시에 많이 나왔느데,그 중에는 성직자들과 심지어 감독
들까지도 있었다.
박해 후 도나티스트(Donatist)들은 자신들의 순결을 강조하면서 교회는 쭉정이
가 제거되고 알곡만-성결된 성도-의 교회가 되어야 하고 배교한 감독과 성직자들
에 의해 집행된 안수식이나 성례전-세례와 성만찬-도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러
나 어거스틴은 교회의 재건과 일치를 위해 알곡과 쭉정이를 함께 포함하고 있는
교회상을 주장하며 성례전의 타당성은 성직자의 도덕성이 아니라 성례의 사건(ex
opere operto)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크리스쳔들은 3세기 동안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였고,시민권을 가질 수도 없었
다. 그들은 폭동이나 혁명으로 이레 대항하지는 않앗으나 다만 순교로써 진리를
사수하고 신앙을 지켰다.
순교는 혁명이나 폭동보다 더욱 값진 큰 도전이었다.
3. 순교당한 평신도들의 이야기
한편 평신도들의 순교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블란디나는 노예 출신의 처녀로서
가장 잔인한 고문 속에서도 놀라운 초인적 강인함과 끈질김을 보여 주었다. 결국
그녀는 그물속에 있는 사자에 던져져 사자의 밥이 되었다.
처녀 포타미아이나는 고운 마음씨와 순결함을 갖춘 보기 드문 미인이었는데,죽
이는 것보다 더욱 잔인하게 무서운 짐승들에 의한 위협을 받았고,잔인한 고문을
당한 후에 끓는 가마솥에서 그의 어머니와 함께 서서히 뜨거운 물에 삶겨져 죽어
갔다. 모녀를 형집행한 군인들 중에 바실리데스가 그 아름다운 순교의 장면에 감
동을 받아 뜨거운 연민의 정에 사로잡힌 후에 마침내 크리스천이 되었으며,결국
그도 참수형으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는 죽기 전에 포타미아이나가 밤에 그
리스도와 함께 나타나서 그의 머리에 순교자의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고 하였다.
대체로 평신도들의 순교 이야기들 속에는 남성보다 여성 성도들의 순교사화가
역사 속에 더 많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대부분의 순교 여인들은 하류층 여인들
이었는데,순교자 페르페튜아만은 귀족 출신의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교도
신자인 동갑 남편에게 갓난아이를 맡기지 않고 그녀의 젖가슴에 아이를 껴안은
채 희생의 제물로 바쳐졌다. 노예 펠리시타스는 그녀의 아이와 함께 감옥에 던져
졌다. 천국에서 곧 다시 만날 희망을 안고 이별의 키스를 뜨겁게 나눈 뒤,마침내
사나운 짐승들의 밥이 되었다.
4. 해방의 의미
크리스천은 역사 속에서도-역사 저 너머의 종말론적 승리뿐 아니라-최후의 승리
를 경험하게 된다. 고난 속에서도 영광을 창조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좁고 험한
고난의 길을 걸음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도 역사속에서 누리게 된다.
약 250여 년간 겪은 기나긴 박해 속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끝까지 신앙의 지조
를 지키고,교회의 생명을 이어오고 아픔 속에서 널리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AD.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계기로 지하에서 해방되어 지상으로 올
라오게 된 것이다.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제패를 위해 막센티우스와 밀비안다리
에서 일대 혈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는 전날 밤에 P()을 꿈꾸고 그리스도 이름으
로 전쟁에 나가 AD.312년 가을에 대승리를 거두게 되고,AD.313년 밀라노 칙령
(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게 되어,교회는 박해에서 벗어나 마침내 로마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승리는 결국 기독교를 세속화시키고 생명력을 잃고 국가는 교회를 이
용하고 교회는 국가를 이용하는 갈등이 심화되게 되었다. AD.590년 중세가 시작
된 로마 감독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의 교황 취임 이후,AD.800년 프랑크
왕국의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Charlemagne)의 왕관 대관식을 교황 레오 3
세가 집행했다. AD.1077년 교황 그레고리 7세가 독일 황제 헨리 4세를 독일 성직
자 임명권 때문에 파문시킴으로 카놋사성에서 3일 간 눈 속에서 참회함으로써 파
문에서 해방되는 사건이 있었으며,교황 인노센트 3세는 AD.1198년 교황직에 오르
면서 교황을 반신직(Semi-God:반신) 존재로,황제는 팔이요 교황은 태양으로 해석
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세속 권력과 문화 위에 교회가 군림하는 오류를
범하면서,로마의 평화를 그리스도의 평화로 굴복시키고,그리스도의 평화라는 이
름으로 교회와 역사를 타락시킨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타락시키고
부패하게 만들었으며,정의를 상실한 그리스도의 평화는 마침내 7차에 걸친 십자
군 원정(AD.1074-1291)을 하는 역사적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5. 나오는 말
그리스도의 평화의 이름으로 세속권력 위에 군림한 교회사를 보면서 우리는 마
틴 루터처럼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외쳐야 한다. 그러나 경건주의 시대처럼 정치
에 무관심하거나 비정치화되는 교회가 되어서도 안되며,초대교회처럼 정치권력과
투쟁하고 대립하는 관계만 가져도 안된다.
리차드 니버가 그의 책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서 지적하였듯
이 교회는 종교개혁 시대처럼 국가와 문화의 변혁자(transformer)가 되어야 한
다.
거짓 로마의 평화가 지배하는 역사가 아니라,참 그리스도의 평화가 교회뿐 아니
라 국가 속에서도 실현되는 역사의 도래를 위해 교회는 역사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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