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톤
카리톤의 글에 제시된 기도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는 지극히 단순하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상태이다. 로스토프의 성 디미트리(St. Dimitri of Rostov, 17세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란 정신과 생각을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며, 동요함이 없이 하나님을 응시하며, 경건한 두려움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섬' 이라는 개념은 테오판에게서 거듭 등장한다.
"주요한 일은 마음 속에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며 삶을 마칠 때까지 밤낮 쉬지 않고 계속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만일 '마음 속에 정신을 가지고서 하나님 앞에 서는 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거라'라고 말하는 것은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의 의미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 안에 문제의 본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상태에는 말이 동반될 수도 있으며, 말없이 진행될 수도 있다: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께 말을 하지만, 어떤 때는 말없이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분이 우리 가까이에 계시다는 것, 우리 자신의 영혼보다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의식한다. 테오판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적인 기도란 단순히 그의 임재 안에 머물러 있는 것, 또는 간구와 감사와 영광을 표현하면서, 마음 속에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성 디미트리는 '정신을 가지고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에 대해서 말하지만, 테오판은 보다 정확하게 '마음 안에 정신을 가지고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한다. '마음 안에 정신을 가진다'는 개념은 기도에 대한 정교회 교리의 기본 원칙이다. 이 말이 함축하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정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아야 한다.
『기도의 기술』(The Art of Prayer)에서 테오판 및 여러 저자들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세 가지 요소-몸, 영, 혼-에 대해서 말한다. 테오판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몸(body)은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이며. 살아 있는 혼(soul)이 부여되어 있다. 혼 안에 영(spirit). 즉 하나님의 영이 불어 넣어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공경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맛보고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소유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혼은 생명의 기본 원리, 즉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 없는 살덩어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해 주는 것이다. 혼은 주로 자연적인 차원에서만 존재하지만, 영은 우리로 하여금 신적 실재들의 질서와 접촉하게 해준다. 영은 인간에게 있는 가장 고등한 기능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영은 삼위일체 중 제 삼위이신 성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 둘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그 둘이 동일한 것은 아니며, 그 둘을 혼동하면 범신론에 이른다. 몸과 혼과 영은 각기 특별한 앎의 방법을 소유한다. 몸은 오감을 통해서, 혼은 지적인 추론을 통해서, 영은 인간의 일반적인 추론 과정을 초월하는 신비한 인식, 양심을 통해서 앎에 이른다.
몸과 영과 혼이라는 요소와 병행하여, 이 분류에 속하지 않는 또 하나의 본성적인 양상이 있는데, 그것은 곧 마음(heart)이다. 마음은 정교회의 인간론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오늘날 서방에서 마음이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일반적으로 정서와 감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 및 정교회의 수덕적인 글에서 마음은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지닌다. 마음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인 인간 존재의 주요한 기관이다. 그것은 우리의 활동과 포부를 결정하는 원리, 즉 생명의 중심이다. 마음은 분명히 감정과 정서를 포함하지만, 그 외의 많은 것들도 포함한다. 결국 마음은 우리가 한 '사람' 이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마카리우스의 설교집에서는 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개념을 전개한다:
"마음은 육체적인 유기체 전체를 다스리고 지배한다. 은혜가 마음의 영역들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은 모든 지체와 생각을 지배한다. 이는 마음 안에 정신이 있고, 혼의 모든 생각과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은혜는 몸의 모든 지체 안에 침투한다.‥‥ 마음 안에는 측량할 수 없는 깊음이 있다. 그곳에는 응접실과 침실, 문과 현관, 사무실과 복도가 있다. 그곳에는 악의 작업실과 의의 작업실이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안에 죽음이 있다.‥‥ 마음은 그리스도의 궁전이다.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성인들의 영과 함께 안식하러 그곳에 오셔서, 그곳에 거주하시며, 그 안에서 걸어 다시니며. 그곳에 자기 나라를 세우신다." (마카리우스의 신령한 설교 15: 20. 32. 33)
"마음은 작은 배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용들과 사자들이 있고, 해로운 피조물들과 악이 소중히 여기는 온갖 보물들이 있다. 그곳에는 거칠고 평탄하지 않은 길들이 있고, 깊은 구렁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고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빛과 사도들. 거룩한 도시들. 은혜의 보물 등 모든 것이 있다." (마카리우스의 신령한 설교 18:7)
이처럼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때, 마음은 인간 안에 있는 세 가지 요소-몸과 혼과 영-중 하나에 해당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것들 모두와 연결된다.
(1) 육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음(심장)은 유형적인 차원에 존재하는 것, 몸의 일부, 우리의 유기체의 중심이다. 마음이 지닌 이 유형적인 측면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정교회의 수덕적인 문헌에서 마음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은 '육적인 마음', '근육으로 이루어진 육의 일부'를 의미하므로, 상징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2) 마음은 인간의 심적인 구성 요소, 즉 인간의 혼과 특별한 방법으로 연결되어 있다. 만일 심장이 고동을 멈춘다면, 우리 몸 안에 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3) 이 책의 현재의 목적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마음이 영과 연결되어 있다는것이다. 테오판의 말에 의하면, "마음은 인간에게서 가장 심오한 부분, 즉 영이다. 이곳에 자의식, 양심, 하나님에 대한 개념,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개념, 그리고 영성생활의 영원한 보화들이 놓여 있다. "그는 '마음'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속사람' 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안에는 속사람이 있고, 베드로의 말을 따르자면 마음의 숨은 사람이 있다. 그것은 최초의 사람에게 불어넣어진 하나님을 닮은 영으로서, 타락 이후에도 계속 우리와 함께 머문다.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와 러시아의 저술가들은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시 64:6)"는 말을 즐겨 인용한다. 이 '깊은 마음'이란 인간의 영과 대등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핵심, 혹은 정점을 의미하는데, 라인란드와 플랑드르 지방의 신비가들은 그것을 '영혼의 근저'라고 말한다. 이곳에서, 즉 '깊은 마음'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대면한다.
이제, 테오판이 기도를 "마음속에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서서는 것"이라고 정의한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도자가 머리(두뇌) 속에 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 자원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며, 이 차원에서는 결코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을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두뇌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 수 있겠지만, 하남님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지극히 큰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있을 수 없으며, 그러한 사랑은 두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전인, 즉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자는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가야 한다. 지적인 능력들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이성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정신을 가지고 마음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는 처음에는 본성적인 마음으로 내려가고, 그곳에서 다시 '깊은 마음', 즉 육에 속한 것이 아닌 마음의 골방으로 내려간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 그는 처음에는 성삼위께서 창조 때에 인간 안에 심으신 '하나님을 닮은 영'을 발견하며, 그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을 알게 된다. 비록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신자들이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신자들의 내면에 거하신다. 어떤 면에서 보면, 수덕 생활과 신비 생활의 완전한 목표는 세례의 은혜를 재발견하는 데 있다. 내적인 기도의 길을 따라 가려는 사람은 이 방법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오며' 내면에 있는 천국을 발견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피조된 것과 피조된 것이 아닌 것들 사이의 신비한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2. 기도의 세 단계
인간 안에 세 가지 요소가 있듯이, 기도에도 세 가지 주요 단계가 있다:
(1) 구송 기도, 또는 육체적 기도
(2) 정신의 기도
(3) 마음의 기도(또는 마음 안에서 드리는 정신의 기도) : 영적인 기도.
테오판은 이 세 가지 구분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말로만 아니라 정신으로 기도해야 하며, 정신만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정신은 기도하면서 한 말을 분명히 보고 이해하며, 마음은 정신이 생각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 모든 것이 결합하여 참된 기도를 이룹니다. 만일 그것들 중 하나라도 부재하면, 당신의 기도는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하거나,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첫 단계의 기도 -구송기도-는 입으로 하는 기도, 무릎을 꿇거나 서거나 부복한 자세로 특정한 기도문을 읽거나 낭송하는 기도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입으로만, 혹은 몸으로만 이루어진다면, 그러한 기도는 진정으로 기도라고 할 수 없다.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 외에, 내적으로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에 집중해야 한다. 즉 정신을 우리가 드리는 기도문 안에 가두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첫 단계의 기도는 자연히 두 번째 단계로 발전한다. 구송기도가 '기도'라는 명칭에 합당한 것이 되려면, 어느 정도 내적인 기도, 또는 정신적인 기도가 되어야 한다.
기도가 내적인 것으로 성장하면, 입으로 기도하는 것은 점차 중요치 않게 된다. 입술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여 내적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때로 정신은 전혀 말을 형성하지 않고서 기도한다. 그러나 기도에 크게 진보한 사람이라도 이따금 평범한 구두 기도를 원할 때가 있다. 그 때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구두 기도인 동시에 정신으로 드리는 내적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째 단계의 기도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기도가 머리 속에, 지성이나 두뇌 속에 머물러 있는 한, 기도는 불완전하다. 두뇌에서 마음으로 내려가야 한다. "마음의 장소를 발견하며", 정신을 마음 속으로 끌어내리며, 정신과 마음을 결합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진실로 '마음의 기도'가 될 것이다. 한 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행하는 기도가 아니라, 전인으로 드리는 기도, 즉 영과 혼과 몸으로 드리는 기도가 될 것이다. 우리의 지성, 본성적인 이성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 접촉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영의 기도가 될 것이다.
마음의 기도는 영과 혼의 기도일 뿐만 아니라 몸의 기도이기도하다. 마음(심장)이 육체의 한 기관을 의미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기도할 때에 몸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다볼 산에서 모습이 변화되신 것처럼 기도할 때에 신적인 빛에 의해 외형이 변화된 정교회 성인들의 삶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마음의 기도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기도하기 위해 사람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기도이며, 또 하나는 기도가 저절로 존재하며 작동하는 기도이다. 노력을 필요로 하는 첫 단계의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아 의식적으로 노력하여 드리는 기도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기도가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누군가가 기도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이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끌어간다." 이 단계에서는 더 이상 기도자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의 내면에서 기도하신다. 선물로 주어지는 기도는 이따금 임할 수도 있고, 쉬지 않고 임할 수도 있다. 쉬지 않고 임할 경우에, 기도자가 표면적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의 내면에서는 기도가 계속되며, 말하거나 글을 쓸 때에도 진행되며, 꿈속에서나 아침에 깨어 일어날 때에도 기도가 계속된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기도는 일련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가 된다. 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명령을 성취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시리아의 성 아이작(St. Issac the Syrian)은 이렇게 말했다:
"성령께서 사람의 내면에 거처를 정하시면, 그의 내면에서 항상 기도하실 것이므로, 그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된다.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그의 영혼에게서 기도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먹고 마실 때, 자리에 눕거나 어떤 일을 할 때, 심지어 깊이 잠들어 있을 때에도, 기도의 향기가 자동적으로 그의 마음에 주입될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내가 잘지라도 마음을 깨었다"(아 5:2)고 표현한다.
이때부터, 마음의 기도는 좁은 의미에서의 '신비적 기도'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테오판은 이것을 관상기도, 또는 '의식의 한계를 초월하는 기도' 라고 표현한다. 테오판은 "관상의 상태란, 정신과 시각이 지극히 압도적인 영적 대상에 의해서 완전히 사로잡혀, 표면적인 일을 완전히 망각하며, 의식이 완전히 부재하게 되는 상태이다. 정신과 의식이 관상하는 대상 안에 완전히 몰입되므로, 의식이나 정신이 전혀 없는 것처럼 된다"고 말한다. 테오판은 이 관상의 상태를 '몰아의 기도' (prayer of ecstacy)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카리톤의 글에서는 이와 같은 고차원의 기도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한 기도를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책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3. 정욕과 상상력
구송기도의 단계에서 마음 안에서 드리는 정신의 기도로 전진하려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주요한 장애물-정욕과 상상력-에 직면한다. 테오판은 "기도자가 해야 할 수덕적인 일 중애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정욕적인 움직임에서 멀리 하는 것, 그리고 정신을 정욕적인 생각에서 멀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정교회 저자들이 말하는 정욕이란 단순히 분노나 욕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넓은 의미로서, 마귀가 사람들을 죄에 빠지게 하려 할 때에 사용하는 악한 갈망과 욕구를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정욕은 여덟 가지 악한 생각으로 분류되어 왔다: 탐심, 욕정, 탐욕, 비탄, 분노, 나태, 허영, 교만. 이 여덟 가지 악한 생각들은 자애(self-love), 즉 자기 자신을 우선적인 위치에 두고 하나님과 이웃은 다음에 두는 생각에서 생겨 나온 것이며, 그 중에서 교만이 가장 근본적인 악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 :8)
하나님을 보는 것과 청결한 마음은 서로 병행한다. 그러므로 정욕을 대적하여 끈질기게 싸우지 않는 사람은 기도의 사다리를 올라가려는 소망을 품을 수 없다. 테오판은 "출발점은 하나이다. 즉 정욕을 길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깨끗한 기도에 이르는 길은 의지와 성품의 훈련을 포함하는 도덕적인 길이다. 이런 까닭에『기도의 기술』(The Art of Peayer)에서 "정욕과의 전쟁"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다.
도덕적인 훈련과 더불어 정신의 훈련도 이루어져야 한다. 내적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정욕적인 생각뿐만이 아니다. 정욕과 관련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모든 심상(image)들도 기도를 방해한다. 동방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상상력-정신적인 영상을 형성하는 기능-은 기도라는 작업에서 대단히 제한된 위치를 차지한다. (테오판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상상력은 기도를 하는 데 있어서 전혀 유익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테오판의 가르침에 의하면, 기도할 때에 우리는 "주님과 우리의 정신 사이에 어떤 심상도 두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만물 안에 계시는 것처럼 당신 안에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기 전에도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보시며 당신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당신을 아신다고 확신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속사람을 바라보신다는 의식에 시각적인 개념이 동반되어서는 안되며. 다만 단순한 확신이나 느낌에 머물러야 한다."
"어떤 개념이나 심상이나 환상도 허락해서는 안된다", "정신에서 모든 심상을 몰아내라", "기도하는 가장 단순한 규칙은 어떤 사물의 심상도 형성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은 동방 교부들의 표준적인 가르침이다. 어느 동방 교부는 "기도 안에서 아무 것도 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본다"고 표현했다. 정상적으로 활동할 때에는 광범위하게 다양한 생각과 개념들을 섭렵하는 우리의 정신을 통일시켜야 한다. 다양성에서부터 단순성으로 복귀시켜야한다. 모든 정신적인 영상이나 지적인 개념들을 제거하여,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게 되어야 한다. 정교회 저자들은 이 상태를 '깨끗한 기도' (pure prayer)라고 묘사한다. 죄악된 생각들만 아니라 모든 생각을 깨끗이 씻어낸 기도를 말한다. 이것과 부분적으로나마 대등한 개념을 서방에서 찾으려면 '사랑의 집중기도'(prayer of loving attention), 또는 '단순한 관심의 기도'(prayer of simple regard)를 들 수 있다.
『기도의 기술』에 수록된 테오판을 비롯한 여러 저자들은 모든 심상들을 배제하라고 주장하지만, 느낌 (feeling)과 관련해서는 그 만큼 가혹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들은 마음의 기도는 느낌의 기도라고 강조하는데, 이것이 그것과 정신의 기도를 구분해 주는 것들 중 하나이다.
테오판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 느낌들 중에 특별히 흥미로운 것들은 다음과 같다:
(1)마음 속에 "쓰라림"을 느낌. 주로 회오의 감정, 즉 가책, 마음이 찔리는 느낌을 말하는 듯하다.
(2) '다정함' 이라는 감정. 여기에도 가책, 인간적 무가치함의 느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사랑스럽고 응답적인 기쁨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3)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따뜻함을 느끼는 것이다. 즉 우리 안에서 '영이 타오르는 것',마음 속에 '은혜의 불'이 켜졌음을 느끼는 것이다. 변용의 신비에 들어간 많은 정교회 성인들이 신적인 빛을 본 것은 이러한 불의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기도의 기술』에서는 이것에 대해서는 암시하여 언급하는데 그친다.
'느낌', '따뜻함', '빛' 등의 언급은 반드시 비유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물질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서도 안된다. 성인이 자기 주위에서나 내면에서 보는 빛, 마음 속에서 느끼는 따뜻함 등은 감각을 통해서 경험되는 진정한 객관적인 빛이요 따뜻함이다. 동시에 그것들은 우리가 정상적으로 보거나 느끼는 자연적인 따뜻함이나 빛과는 종류가 다른 영적인 빛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신적인 은혜에 의해서 감각이 변화되고 정화된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다.
테오판은 느낌을 크게 중시하면서도, 잘못된 느낌을 추구하는데 따를 수 있는 위험을 예리하게 의식한다. 본성적인 느낌과 영적인 느낌을 세심하게 구분해야 한다. 본성적인 느낌이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특별한 가치가 없으며, 또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기도할 때에 임하는 느낌들이 조금이라도 육욕적인 즐거움에 오염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방심하는 사람은 쉽사리 영적 쾌락주의에 빠져 기도하면서 '기분 좋음'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를 원하게 된다. 이것은 한층 위험한 형태의 망상이다. 기도의 주된 열매는 따뜻함이나 기분 좋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다.
4. 예수기도
이론적으로, 예수기도는 내적인 기도를 획득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기도는 정교회 내에서 큰 영향력과 인기를 획득했으므로 내적인 기도와 거의 동일시된다. 영적 저서들은 예수 기도는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에 도달하는 '신속한 방법'이라고 여기며, 주의를 집중하며 정신을 마음 속에 두기 위한 가장 훌륭하고 쉬운 방편이라고 권장한다. 물론 예수기도를 '쉬운' 기도라고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된다. 영과 진리 안에서(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는 '기도는 금욕적인 투쟁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그나티 주교는 그것을 '감추어진 순교'라고 표현했다. 예수기도는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쉽다.
일반적으로 예수기도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죄인"이라는 단어를 덧붙일 수도 있고, 복수형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할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기도할 수도 있다. 어쨌든 모든 형태의 예수기도가 지닌 일관적이고 근본적인 기조는 거룩하신 이름에 기원하는 것이다. 예수기도를 낭송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묵주를 사용하기도 한다. 정교회의 묵주의 형태는 서방의 묵주와 다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양털이나 끈으로 매듭을 만든 것으로서 구슬로 된 묵주를 사용할 때와는 달리 소리가 나지 않는다.
구송기도, 정신으로 드리는 기도,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등 일반적으로 구분하는 기도의 세 단계가 예수기도에도 적용된다.
(1) 첫째, 예수기도는 다른 기도와 마찬가지로 구송기도이다. 소리를 내서 기도하거나. 또는 입술은 움직이되 소리는 내지 않고 기도한다. 동시에 의도적인 의지의 작용에 의해서 그 기도의 의미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이 첫 단계를 진행하면서, 주의를 집중하여 기도를 반복하는 것은 어렵고 심신을 지치게 하며, 겸손하게 인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2) 시간이 흐르면, 예수기도는 점점 더 내적인 것이 되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은 채 정신이 기도를 반복하게 된다. 이렇게 기도가 내면화되면, 주의를 집중하기도 더 쉬워진다. 예수기도는 서서히 그 나름의 리듬을 획득하며,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지를 발휘하지 않아도 거의 자동적으로 내면에서 기도가 이루어진다. 파르테니(Parthenii) 원로가 표현한 것처럼, 우리는 내면에 "속삭이는 작은 시냇물"을 소유한다. 이 모든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세번째 단계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식이다.
(3) 마지막으로, 예수기도는 마음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지배한다. 기도의 리듬은 점점 마음의 움직임과 동화되어, 마침내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된다. 처음에는 기도하기 위해서 고통스럽고 힘들게 노력해야 했지만, 이제 기도는 끝없는 기쁨과 평안의 근원이 된다.
의도적으로 노력하면서 기도해야 했던 초기 단계에서, 기도자는 하루 중 특정한 시간을 따로 떼어 기도시간으로 배정한다. 처음에는 15분이나 30분 정도로 시작하여, 점차 원로의 지도를 받아 시간을 늘려갈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동안, 기도자는 다른 활동은 완전히 중단한 채 오로지 예수기도를 반복하는 데만 집중한다. 그러나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표면적으로 다른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예수기도가 내면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테오판의 표현을 빌자면, "두 손으로는 일하지만, 마음과 정신은 하나님과 더불어 활동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방심하지 않고 예수기도를 낭송하기 위해서 되도록 많은 시간을 배정하려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수기도의 기원은 신약성서 시대, 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특별히 공경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위격의 확장이요, 존재의 계시요, 능력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이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기독교도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성육하실 때에 취하신 이름인 "예수"를 존중했다. 이와 관련하여 특별히 중요한 신약성서의 본문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1) 주님이 마지막 만찬 때에 선포하신 말씀: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2) 베드로가 유대인들 앞에서 엄숙하게 선포한 말: 그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한 후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선포했다(행 6:10,12).
(3) 바울의 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 9-10).
이러한 성경 구절을 토대로 하면, 예수기도를 할 때에 예수의 이름에 호소하는 관습이 어떻게 발달되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이름 외에, 예수기도를 형성하는 다른 부분도 성경적인 토대를 지닌다. 복음서에 기록된 두 가지 기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 소경의 기도이며(눅 18:38), 또 하나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애통해 한 세리의 기도이다.(눅 18:13)
기독교에서 "다윗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죄 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예수기도의 공식은 완전히 성경에서 취한 것이다.
물론 이 기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분명히 신약성서 안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결합되어 하나의 기도를 이루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초대 교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예배했다. 그들이 계속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는지, 그렇다면 어떤 형태를 사용했는지는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예수기도는 4세기에 이집트에서 수도원운동이 발흥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막 교부들은 계속적인 기도라는 이상을 강조했으며, 수도사는 항상 '은밀한 묵상', 또는 '하나님을 기억함'을 내면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을 돕기 위해서, 그들은 짧은 기도 공식을 채택하여 반복하여 사용했다. 예를 들면, "주님, 도우소서", "오, 하나님, 속히 나를 구원하소서. 오 주님, 서둘러 나를 도우소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인간으로서 범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신 당신께서는 불쌍히 여기옵소서" 등이다. 수도원 운동의 초창기에는 이러한 짧은 기도문을 변형한 것이 무척 많았다.
예수기도가 발달된 배경은 위와 같다. 초기에는 예수기도는 많은 짧은 기도 공식들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다른 기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점, 즉 거룩한 이름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다른 기도 공식보다 이 기도를 더 선호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게다가, 정교회는 자유로운 종교이므로, 원래의 다양성이 완전히 중지되지는 않았다. 테오판은『기도의 기술』에서 다른 짧은 기도 공식들을 추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능력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느낌 안에 있다. "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거룩한 이름에 특별한 효력이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은 기도의 본질의 아니라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말은 대단히 강력하고 효과적인 도구이다. 왜냐하면 주 예수의 이름은 구원의 원수들에게는 두려운 것이요.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예수기도도 다른 모든 기도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지극히 능력 있는 우리 구주 예수의 이름에 의해서만 다른 모든 기도보다 강하다."
예수기도가 분명한 형태로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인가? 가장 초기의 수도원운동에 관한 전거들(4세기)은 다른 기도의 공식들은 언급하지만 예수의 이름에 호소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예수의 이름에 호소하거나 기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언급한 작가는 5세기의 인물인 포티케의 디아도코스(St. Diadochos)와 안키라의 닐로스(St. Neilos of Ancyra)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도가 어떤 형태를 취했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완전한 본문은 얼마 후(6-7세기)의 저서인 이집트의 은수사 필레몬의 전기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6세기 전에는 완전히 발달된 형태의 예수기도의 존재를 뒷받침해주는 분명하고 명확한 증거가 없다. 그러나 예수기도의 기원은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이름에 경의를 표한 데 있다.
곧 예수기도를 중심으로 하여 "헤시카즘"(Hesychasm)이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가르침이 형성되었다. 이 가르침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헤시카스트라고 불린다. 6세기 이후로, 예수기도의 이 생생한 전통은 정교회 내에서 중단됨이 없이 지속되어왔다. 그리스 선교사들에 의해 슬라브 국가들에 전달된 이 기도는 정교회 세계 전체의 영적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수기도가 특히 열렬히 실천된 시기가 세 차례 있었다. 첫째는 14세기 비잔티움에서 헤시카스트 운동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그레고리 팔라마스(St. Gregory Palamas)가 활동한 헤시카즘의 황금시대이다. 다음은 18세기말로서, 성산의 니코데무스(St. Nicodemus of the Holy Mountain)와 『필로칼리아』(Philokalia)를 배출했다. 마지막으로, 19세기 러시아이다. 이 시기에는 성 세라핌(St. Seraphim), 성 크론스타트의 존(St. John of Kronstadt), 은둔자 테오판, 이그나티 브리안카니노프 등이 활동했다. 보다 최근에 들어와서 우리시대에는 러시아 이민들, 특히 평신도들 사이에서 예수기도가 널리 실천되어왔다. 물론 1936년에 카리톤 신부의 책이 출판된 것이 부분적으로나마 여기에 기여했다. 그러나 주된 원인은 서방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유민들과 접촉함을 통해서 예수기도를 알고 사랑하게 된 데 있다. 예수기도 안에는 특별한 논평이 필요한 것, 그리고 그것이 특별히 폭넓은 호소력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된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예수기도는 짧은 문장 안에 기독교 헌신의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인 경모와 가책을 제시한다. 경모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에 표현되어 있으며, 가책은 그 뒤에 이어지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에서 표현된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죄가 예수기도 안에 생생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한 감사의 행동이며, 우리의 연약한 반응에 대한 애통함의 표현이다. 즉 예수기도는 참회의 기도인 동시에 기쁨과 사랑의 확신이 가득한 기도이다.
둘째, 그것은 매우 기독론적인 기도-성육하신 주님의 위격에 초점을 두며 그분의 지상생활(예수 그리스도)과 신성(하나님의 아들)을 강조하면서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이 기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적 계시의 중심에서 계신 역사적인 분을 상기하며, 성육신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거짓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한편, 예수기도는 기독론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삶에서 발생한 특별한 사건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예수기도에서도 다른 형태의 기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이미지와 지적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강력하게 억제한다. 테오판은 "정신 속에 시각적인 개념이나 영상을 품지 말고 주께서 그대를 보고 그대의 말을 들으실 것을 믿으면서, 의식과 주의력을 마음 속에 두고 서서 쉬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치라"고 가르친다.
세번째로, 예수기도는 지극히 단순한 기도이다. 그것은 누구든지 택할 수 있는 기도 방법이다.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으며, 세심하게 준비할 필요도 없다. 최근 어느 작가는 우리가 해야 할일은 "단지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먼저 당신의 내면에 평안과 평정을 확보하며, 성령의 감화와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그리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산책을 하려면 첫걸음을 내딛어야합니다. 수영을 하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경모와 사랑을 가지고 그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 기도에 매달리며, 반복하십시오. 당신이 예수의 이름에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말고, 다만 예수님만 생각하십시오. 천천히 부드럽고 고요하게 그분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테오판은 이 단순성이라는 요소를 여러 번 강조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단순하다: 그것은 자녀가 교활하게 머리를 쓰지 않고 단순히 아버지에게 말하는 기도이다‥‥예수기도의 실천은 간단하다‥‥기도의 실천은 하나의 '기술' 이라고 불리며 매우 단순한 것이다. 의식과 주의력을 마음 속에 두고 서서 쉬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치라."
그러므로 초보자는 천천히 부드럽고 고요하게 예수기도를 반복하라고 권한다. 서두르지 말고 평정한 상태에서 쓸데없이 강조하지도 말고 각각의 단어를 발음해야 한다. 예수기도는 애써 노력하거나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 "비록 내적으로라도 예수의 이름을 난폭하게 외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항상 내적으로 주의를 집중하여 기도해야 하며, 긴장이나 스스로 유도한 열심이나 인위적인 감정 등을 느껴서는 안된다.
한 번 기도를 끝내고 다시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쉬는 것이 좋다. 그것은 정신 집중에 도움이 된다. 이그나티 주교는 30분 동안에 예수기도를 100번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더 오랫동안 기도한다. 예수기도를 더 빨리 할 수도 있다고 제시하는 문헌들도 있다. 19세기의 책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저술한 『순례자의 길』(Way of Pilgrim)에서, 순례자는 스승으로부터 처음에는 하루에 3,000번 예수기도를 하고, 다음에는 6,000번, 그 다음에는 12,000번 하고, 그 후에는 회수를 세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이처럼 예수기도의 회수가 많아지는 것은 브리안카니노프가 추천한 것보다 더 빨리 기도하라는 의미이다.
예수기도를 행하는 이와 같은 기본적이고 단순한 규칙 외에, 헤시카스트들은 집중을 돕기 위해 '육체적인 방법'을 발전시켰다. 특히 고개를 숙이고 턱을 가슴에 닿게 하고 시선은 심장이 있는 곳에 두고 호흡도 세심하게 규제하는 자세를 권장했다. 이와 같은 육체적인 훈련들은 『주의집중과 기도의 세 가지 방법에 관하여』(on the three methods of attention and prayer)라는 저술에 처음으로 분명히 기술되었다. 이 책은 신 신학자 시므온(St. Simeon the New Theologian, 11세기)이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의 저술이 아니라 14세기의 인물인 독거자 성 니케포로스(St. Nikephoros the solitary)의 저술로서,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된 관습을 기록한 것이다.
『기도의 기술』의 여러 곳에서, 테오판과 이그나티는 이러한 호흡법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그들은 호흡법에 대해서는 거의 부정적인 태도로 언급하며, 상세한 묘사를 삼간다. 이와 같이 상세한 묘사를 억제했기 때문에 많은 서방의 독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그들은 헤시카즘 안에서 일종의 기독교적 요가를 발견한다. 최근에 많은 비 정교회 신자들이 예수기도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적인 훈련 때문이다. 그러나 이그나티와 테오판은 내면의 기도에 대해 그런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호흡법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간주했다.
육체적인 방법의 역할을 인식하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것이 세가지가 있다:
첫째, 호흡 훈련은 부속품에 불과하다. 즉 마음의 평정을 확보하기 위한 보조 방법으로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호흡 훈련은 예수기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없어도 예수기도를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
둘째, 호흡 훈련은 매우 신중하게 활용해야 한다. 잘못된 방법으로 호흡 훈련을 행하면 크게 해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호흡훈련 자체는 지극히 건전한 신학적 원리-인간은 단일한 통합된 전체, 몸과 영혼의 연합체이므로 기도의 사역에서 몸은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육체적인 방법을 잘못 적용하면 건강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거나 정신이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정교회 작가들은 육체적인 방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으로 노련한 사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지도자가 없을 때에는 교묘한 육체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단순히 예수기도를 실천하는 편이 훨씬 낫다. 이그나티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면에 이러한 육체적인 방법이 저절로 자리잡지 않는 한, 이러한 방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 말라‥‥기계적인 방법 대신에, 서두르지 말고 한 번 예수기도를 마친 후에는 잠시 쉬면서 고요히 숨을 고르게 쉬며 정신은 예수기도의 말 안에 두는 것도 좋다."
세번째로, 예수기도를 실천하려면 완전하고 활동적인 교인이 되어야 한다. 혹시 예수기도를 쉬운 방법이라거나 신속한 방법이라고 묘사한다고 해서, 그 표현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예수기도 때문에 기독교적 삶에서 행해야 하는 정상적인 의무를 회피해서는 안된다. 테오판 및 『기도의 기술』에 등장하는 여러 저자들은 자기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세례를 통해서 교인이 되어 규칙적으로 성찬 예배에 참석하며 자주 죄고백을 행하는 정교회 교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이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기도를 사용하라는 제안을 받는 사람이라면 이미 교회의 표준적인 가르침을 제대로 받았을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서방에서의 상황은 다소 상이하다. 예수기도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적인 삶을 전혀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정상적인 교회 생활에서 친숙해져 있는 관습들은 답답하고 감동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데 반해 예수기도는 신선하고 흥미롭고 이국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기도는 지름길이 아니다. 기초를 닦지 않고는 집을 지을 수 없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균형 있고 규칙적인 성례전적 생활은 예수기도를 실천하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저스틴(Justin) 주교는 "주님의 몸과 피의 교제 다음으로 주님과 연합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내적인 예수기도이다"라고 기록했다. 성찬의 교제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예수기도이다. 예수기도는 성찬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예수기도는 짧고 간단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행할 수 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정원이나 부엌에서 일하면서, 옷을 입을 때나 걸어갈 때, 잠이 오지 않을 때, 고민이 있거나 정신적으로 괴로워서 다른 기도를 할 수 없을 때에, 예수기도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오늘날처럼 긴장이 고조된 시대에 특히 적합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수도사에게 적합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온갖 일에 종사하는 평신도들에게도 적합한 기도이다. 그것은 은수사나 은둔자들을 위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환자를 돌보거나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죄수들을 방문하는 등 사회사업에 적극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적합한 기도이다. 그것은 영성생활의 기초 단계에서부터 가장 고등한 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 적합한 기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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