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실리우스
짧은 생애동안 신학 작업 전념
그는 처음부터 격조 높은 신학자가 될 비범한 자질을 타고난 인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사목자였고, 짧은 생애 동안 신학 작업에 전념할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발렌스 황제의 개입으로 온 교회가 아리우스주의 논쟁으로 말미암은 위기에 처하게 되어, 그는 두 편의 뛰어난 교의신학 작품을 저술하게 되었다. 철저한 아리우스주의자인 에우노미우스에 대한 반박인 「에우노미우스 반박」과, 신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 「성령론」이 그것이다.
「성령론」은 성령의 신성을 확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령께서 신앙과 전례, 그리고 교회의 일상 생활을 통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뛰어나게 묘사하고 있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리우스주의에 동조하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하고 유배를 보내겠다는 발렌스 황제의 위협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재산 차압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유배가 무엇인지도 나는 모르니, 어느 한 지역에 묶여있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온 세상은 하느님께 속해 있고, 나는 바로 이 세상에 체류하는 사람이다』(「신학적 연설」, 43, 49).
사회활동에 뛰어든 운동가
바실리우스는 저술과 실천 양면에서 교회의 사회활동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인물이다. 가난이 심화되고 있던 제국은 세금으로 식민지와 가난한 민중을 억누르고 있었고, 고리대금업으로 황폐해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 모든 인격은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 소수의 탐욕과 축재를 제한하기 위해 부는 재분배되어야 한다는 것, 사회의 부정부패와 이웃의 비참한 현실은 필경 종지부를 찍어야만 한다는 것 등을 끊임없이 외쳤다. 그는 말로만 가르치지 않고 몸소 사회 활동에 투신하여 「바실리아데」라고 불리는 구빈기관을 만들었다. 수도 공동체를 중심으로 노인의 숙소와 병원, 직원과 일꾼들의 숙소 등을 두루 갖춘 이곳은 노동자의 마을인 동시에 경제적으로 자립한 마을로서, 정녕 「복음적 해방구」라 불릴 만 했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는 이곳을 「새로운 도시」라 불렀거니와, 바실리우스는 복음의 내적 충동으로 움직인 최초의 사회 활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수도 생활의 아버지
위대한 회심자들이 거개 그러하듯, 그 역시 회심하는 순간 수도승이 되었다. 후에 「바실리우스 규칙서」라 불리게 된 일련의 수행(修行) 저술을 통해 교회가 얻은 가장 중요한 수도 교부 중 한 분이 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그의 「도덕집」, 「수덕집(asketicon)」 및 편지들을 읽노라면, 놀라우리만큼 참신한 복음적 감각에 늘 놀라게 된다. 한 편으로는 신자 대중과 성직 계층의 신앙이 일반적으로 해이해진 현상과, 다른 한 편으로는 극단적 엄격주의와 영적 엘리트주의로 치닫던 수도승 운동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던 당시 상황의 원인은, 바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복종의 결핍이었음을 바실리우스의 혜안만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말과 행실은 성서에서 토대와 길잡이를 얻어야 한다는 것, 성서야말로 수도자들을 포함해 모든 신자들을 위한 유일한 「규칙」이라고 본 「성서중심주의(biblicismus)」는 바실리우스 사상의 가장 큰 특징으로써, 이것은 세례 받은 신자들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거룩하고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유일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독신(獨身)이라는 요소를 제외하고는 수도자라고 해서 다른 신자들과 원천적으로 그 신분이 구분되지 않는다. 수도자들의 경우 「독신」이 형제 공동체 생활의 친교(코이노니아)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되니, 독신과 코이노니아, 이 두 가지야말로 수도 생활의 두 기둥이다. 그의 삶과 저술은 오늘날 쇄신을 갈망하며 원천으로 돌아가고자 애쓰는 교회와 수도 공동체에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