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5·6교실/한국신학사상사 교실

[스크랩] 현석칠 목사는 누구인가?

류성련 2016. 6. 15. 17:14
현석칠 목사의 삶과 신앙

이덕주(한국교회사)

오늘 대한민국 정부는 그 정통성을 1919년 9월 탄생한 상해 임시정부에 두고 있다. 그런데 상해 임시정부는 그 정통성을 이보다 5개월 앞선 4월 23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 조직에 두고 있다. 한성 임시정부는 삼일운동 직후 이를 계승할 독립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전국 13도 대표자들을 선정하고, 그들 명의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이승만을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 조직을 대내외에 알렸는데, 이 한성 임시정부 조직을 주도한 인사 중에 우리 감신 선배 현석칠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현석칠 목사는 민족운동사에 한성임시정부 수립 공로자로 그 이름이 분명하게 기록되었다.
현석칠(玄錫七) 목사는 1880년 1월 23일 평남 용강에서 출생했다. 선비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사서삼경에 능통하고 유교의 흥망을 꿰뚫어 알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으나 18세 때 낯선 전도인이 준 성경책을 읽다가 그 안에서 “현묘한 도리와 대도”를 깨닫고 개종했다. 그 후 매서인이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성경책을 팔면서 전도하였고 1911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제 1회로 졸업하였으니 전덕기 ․ 최병헌 ․ 현순 ․ 정춘수 목사 등이 그 동기다.
신학을 졸업한 이듬해 목사를 안수를 받았으며 이후 서울 동대문교회, 평양 남산현교회, 공주읍교회(현 공주제일교회), 영변읍교회, 강서교회, 신창교회, 평양 신양리교회, 유동교회 등지에서 목회하였고 수원지방과 영변지방, 신창지방 감리사도 역임했다. 1935년 자원 은퇴한 후 한 때 평양에서 여관을 경영하였지만 오래 하지는 않았고 만주로 건너가 1939년 목회 일선에 복귀하여 사평가교회를 담임하던 중, 중풍으로 쓰러져 용정에서 요양하던 중 1943년 9월 23일 별세하였다. 그의 묘는 용정 교외(동산) 기독교 공원묘지에 있다.
현석칠 목사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목회자였다. 평범하다는 말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래서 그동안 역사 속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목회자였다는 뜻이다. 그는 서울 동대문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만주 사평가교회에서 마칠 때까지 교회 안에서 남의 이목을 끌만한 그런 획기적인 일을 벌이거나 업적은 남긴 것은 없다. ‘조용한’ 목회자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바로 이러한 조용한 목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목회가 그의 장점이자 그를 ‘비범한’ 목회자로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는 자신이 앞장서서 일을 계획하고 주도하면서 교인들의 복종을 요구하는 그런 ‘지휘자형’ 목회보다 교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행동을 유도하는 그런 목회를 추구하였다.
그는 교인들이 스스로 은혜를 체험하고, 그 받은바 은혜에 감격하여 전도하고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기 위해 새벽기도와 사경회, 성경 읽기 등 신앙 훈련 프로그램만 성실하게 실천하였다. 시간은 좀 걸리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런 식으로 목회하면서 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를 목격하였다.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목회할 때 그런 변화의 역사가 가장 강하게 일어났는데, 한 예로 1916년 7월 9일 주일에 학습 142명, 성인 세례 66명, 유아 세례 15명이 한꺼번에 나왔다. 그 날 새로 믿기로 작정한 이가 27명이었고 예배에 참석한 교인이 1,250명이었으니 요새처럼 ‘총동원주일’ 행사를 치른 것도 아니고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절기도 아닌 평범한 날에 이만한 결과를 얻은 것은 <기독신보>의 표현대로 “조선에 드문 일”이었다. 정작 현석칠 목사는 이런 놀라운 현상을 소개하면서 “이는 다 남녀 교우 수 십 인이 금년 1월 1일 새벽부터 교회 진흥하기 위하여 기도한 결과”라고 설명하여 교인들의 신앙과 열심에 그 공을 돌렸다.
이런 식이었다. 그리스도의 겸비가 그의 목회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어 자신을 드러내고 주장하기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내세우는 그런 목회자였다. 오히려 그럼으로 그는 교계와 일반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사가 되었으니, 훗날 그의 묘비에 기록된 대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였으며 교역자들을 동정하였으니 그 융화의 덕은 과연 모범이요 사표가 될 만 하였다.” 요즘 와서 더욱 그리운 목사의 모습이다. 목사의 영적 권위(charisma)는 그리스도의 겸비를 얼마나 목회 현장에서 실천하는가 그 정도에 달려 있음을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현석칠 목사의 지도력은 교회 밖, 일반 사회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민족운동이 나왔다. 그의 독립운동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째, 삼일운동 때 만세시위를 이끌어냈다. 삼일운동 당시 그는 공주읍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기 교회 교인들이자 감리교 계통의 영명학교 교사, 학생, 졸업생들을 동원하여 4월 1일 공주읍 만세 시위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이 일로 그도 체포되어 공주 형무소에서 4개월 옥고를 치렀다. 둘째, 앞서 언급한대로 한성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했다. 그는 1919년 3월 중순께부터 공주 영명학교 교감 출신인 이규갑 등과 연락을 취하며 인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는데, 운동에 필요한 자금 600원을 부담하였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 선포문과 취지서 등 유인물을 직접 목판으로 인쇄하였다. ‘궂은 일’이 그의 몫이었다. 셋째,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항일 비밀결사 조직에 참가하였다. 공주 감옥에서 나온 직후 그는 평양 남산현교회로 임지를 옮겼는데 그곳에서 여성 교인들이 중심이 된 애국부인회와 감리교 목회자들이 중심 된 ‘애국단’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들 조직은 모두 상애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만세 시위와 군자금 모금을 주도하던 비밀결사였다. 이 일로 그는 1920년 봄 다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여름 출옥한 후에는 외견상 목회에 전념하였지만 변하지 않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교회 학교와 절제회, 청년회를 통해 야학과 한글교육 등 민족계몽운동을 계속하였다. 일제말기 평양에 있을 때나 나중에 중풍으로 쓰러진 후 거동이 불편했던 용정 시절에도 늘 한복 두루마기를 벗지 않고 지냈다는 사실에서도 그의 변함없는 나라 사랑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겸비를 바탕으로 교회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소박한’ 목회자를 배출하였다는 것만으로도 감리교회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
출처 : 한국교회사학회
글쓴이 : 이덕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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