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세상 영광을 취하지 말라.
세상의 영광과 영예를 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영광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야 한다, 오직 내 속에 계신 예수님만을 위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다 묻어버리고 주님의 마음을 가질 것이다. 내 생각을 갖고 내 생각대로 가면 죽음과 멸망뿐이다. 내 생각대로 가면 멸망하고 영영히 죽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고 영리한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고 하셨다. 미련한 놈, 미친 놈, 어리석은 자라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에게 나타나신다. 세상 사람들은 몸에 문둥병이 들까 무서워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병들이 들어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병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고 고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우리는 주님께 병 고쳐주시기를 빌어야 한다. 오직 주님이라야 그 병을 고쳐주신다. 이 병 고침을 받아야 우리의 심령이 정결해진다. 정결한 심령을 가져야 온전한 사람이다.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 들어갔어도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막으시니 사자가 어떻게 하지 못했다. 무슨 고생이나 병도 다 내 죄 때문이다. 육체의 병도 그렇다. 그러니 남을 원망할 수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없다. 내 죄로 당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 원망할 것이 없다. 법정에 끌려가도 내 죄로 끌려가는 것이다. 징역을 받아도 법관을 원망하지 말고 감옥을 원망하지 말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만 되어 심부름을 하는 것이다. 징역을 받아도 감옥을 원망하지 말 것이다.
주님은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다.(눅18:8) 개미에게 물려도 개미 탓이 아니다. 개미를 탓할 수 없다. 내가 개미에게 물려죽어야 마땅한데 어찌 개미를 야단치겠는가. 개미는 나보다 선하다. 나무에 눈을 찔려도, 돌멩이에 발을 다쳐도 모두 내 탓이다. 내 죄로 당하는 것이거늘 누구를 원망하랴. 이 고생 당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이다. 육체의 고난을 받음으로 죄에서 벗어나고 마음이 선해진다. 죄만 뉘우칠 뿐이다. 세상에 무엇을 바라랴. 죄를 뉘우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무슨 행복을 바랄 것이 없다. 세상의 행복은 오히려 재앙이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하나님의 손이 도우신다. 죄만 없으면 산다. 바위 끝에 가서도 살고 뜨거운 불 속에서도 살 수 있다. 추운 눈 속에서도 의인들은 살고 뜨거운 불 속에서도 의인들은 산다. 아무것도 원망 말고 부러워 할 것도 없다. 세상 영광은 취할 것이 없다. 하나님 원하시는 일만 하여라. 그러면 산다. 염려할 것 하나 없고 죄만 뉘우칠 뿐이다. 산에를 가도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은혜가 가득하다. 우거진 푸른 풀을 봐도 알 수 있다. “세상 법이 아니면 세상 악마들은 너를 몇 번 욕심내어 살해했으련만 은혜의 시대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법이 너를 보호했으니 너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 그러면서 풀을 쓰다듬었다. 너울거리는 풀잎 하나라도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사가 아니라면 살 수가 없다. “너도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는구나.”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자
다른 사람을 해하기는 쉬워도 이롭게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나만 죽으면 다 해결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해야 된다. 저 사람이 알아듣거나 못 알아듣거나 바로 전하는 것이 내 책임이다. 감당치 못할 것이라 생각해서 바로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감화하시면 알아듣고 깨닫게 된다. 무식한 사람이라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명령대로 바로 전해서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 책임이지만 바로 전하지 못하면 내 책임이 된다. 만일 알고도 그대로 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흘린 피가 내게로 돌아온다.(겔3:16-21)
예수님은 의인의 친구가 아니라 죄인의 친구가 된다고 하셨다. 미련한 이의 친구다. 모르는 중에 다 쏟아놓고 은혜를 구할 것이다. 그래야 맞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한 것이 지혜가 된다. (고전1:15-25)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으로서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걸인에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가라.” 하시며 고쳐주셨다. 참 구제의 모습은 디모데 전서 6장 18절에 나온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이가 되게 하라.”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것은 선한 행실이다. 우리는 선한 행실을 보일 것이며 예수님의 행실을 나눠주어야 한다.
예수께서 어느 집에서 가르치실 때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었다. 사람들이 문 밖에 많이 있어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사람을 시켜서 찾는다고 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시고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인가?”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이가 참된 내 어머니요 형제요 누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가르치기를 계속하셨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누어주고 듣기를 즐겨하였다. 마리아는 듣는 이요 마르다는 나누어주는 이였다. 마르다는 활동가였다. 부지런히 선을 행하는 이였다. 연보는 내 몸을 희생하는 것이 참된 연보다.
죄도 모르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그 영광을 버리시고 제물과 생축이 되셔서 희생하심으로 그 영광을 다 나에게 맡겨 주셨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다. 이 시간도 그이의 영광이 아니면 나는 살수가 없다. 나는 부끄럽고 살 힘이 없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 그 풍성한 영광을, 넘치는 영광을,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주심으로 내가 살 힘을 얻은 것이다.
경책의 뜻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그런즉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가난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빌1:29)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된다. 그리 하여야 하나님께서 예수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갖다 주실 수 있다. 이것이 경책의 뜻이다. 하나님의 교훈이다.
옛날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바알에게 가서 물었다. 사람들은 중병이 들어도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묻는 것이 되는가. 낫게, 좋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죽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살려다가 고생 당했다. 예수와 같이 죽었으면 영광이고 평안했을 것이다. 살려는 것이 죽는 것이 되었다. 복을 구하는 것은 화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이 바알에게 묻는 것이 된다. 이 뜻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 도리어 슬프게 하는 것이 된다. 신구약 어디에 연락宴樂하는 것이 있느냐? 연락하면 바알에게 묻는 것이 된다.
병이 나면 약 쓰는 것이 죄냐고 묻는다. 신구약 어디에 병나면 약 쓰는 것이 죄라고 했느냐 묻는다. 병이 나면 의의 약을 쓰라고 부탁하셨다. 나무뿌리나 풀잎사귀를 쓰라는 데를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 약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위생이다. 겉으로 정결해도 죽고 병난다. 그러나 신령한 말씀을 따라가면 부활이요 영생이니 얼마나 좋은 위생이냐. 이 약은 의심 없다. 세상 약 쓰는 것은 꼭 나을지 모르니까 미신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낫는다고 믿는 병원으로 가나 못 낫는 수도 있고 죽기도 한다. 기도들은 하지만 하나님께서 안 들으신다. 엘리사가 나아만 문둥병자에게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하여 순종함으로 나았다. 신령한 물에 목욕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물에 목욕하자 다 나았다. 꼭 나았다.
목사나 장로들이 흔히 와서 성경 묻는 것은 당신들 속에 있는 것과 씨름 부쳐보는 것이요 알아보실 마음으로 묻는 것이 아니다. 듣는 이는 조심해서 들을 것이요 판단하지는 말 것이다. 눈감고 고요히 생각하고 상고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기만 할 것이다. 판단은 말 것이다. 신구약간에 말씀을 살펴서 증거 삼을 것이 요긴하다.
예수께서 내 짐은 가볍고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셨다.(마11:25) 내가 무엇을 갖고 있으면 무겁고 다 버리면 아주 쉽고 가볍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에 순종하느냐?”(골2:20) 의문의 뜻이 무엇인가. 그릇된 학문, 곧 음란치 말라는 뜻이다. 창세기에 아담에게 말씀하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이 나를 패망케 하는 의문이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창1:6) 하나님께서 위의 물과 궁창 아래 물로 나누어 주셨다. 궁창 위의 물은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이다. 생명이다. 목숨이요 영생이다. 궁창 아랫물은 마귀가 주는 물로 세상의 명예와 부귀공명이다. 세상의 명리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3:5) 의문은 죽은 것이다.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유익하나 육신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무익하다. 원수 쫓아버리는 데는 무익하다. 육체 꾸미느라 괴롭기만 하고 생명에는 무익하다. 위엣 것을 생각할 것이다.
결혼에 대하여
부부결혼은 진정으로 하나가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가 죽어도 하나는 잘 산다.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시니 한분이 죽는다면 다 죽고 한분이 사시면 다 산다. 염통을 생각해 보라. 염통과 육체는 하나이니 염통이 죽으면 몸도 죽는다. 이 세상 부부는 하나가 못된다. 참 부부는 예수와 우리다. 그러므로 예수가 죽으면 교회도 죽고 예수님이 사셨으니 하나 된 교회도 산다. 세상 의문은 죽은 것이요 멸망뿐이다.
이제부터 믿는 것은 증거가 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은 만유의 후사를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하셨다. 만물이 하나님의 후사를 보고 기뻐하고 춤을 춘다.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짝지었으니 나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를 몰라서 함부로 짝지을 수 없다. 잘못 만나면 평생 원망이기 때문이다. 자기 죄로 색만 고르다가는 큰 실수한다. 그러나 생남생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는 것이라 하셨다. 당신 종을 시켜서 종들에게 생남 생녀케 하여 구원하신다. 이방인에게 구원을 전하셨다. 바울선생은 시집가는 것이 죄는 아니나 안 가는 것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고린도 전서7장이다. 과부가 시집가는 것이 좋으나 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셨다. 예수 믿는 것이 더 좋은 일 하는 것이다. 더 좋은 복을 구하는 것이다. 혼자 살면, 혼인 하지 않고 혼자 살면 성신을 받은 줄 안다고 하셨다. 시집가도 믿는 이에게 가라고 하셨다. 예수 믿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더 좋은 복을 구하는 것이다. 이 세상 종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거리낀 데가 없어야 주의 종이 된다. 주의 종이 되고 율법의 종이 되지 말 것이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않으리라 하셨다. (고전6:12)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주를 위하여 있다. 생명은 몸을 위하여 있다. 네 마음을 거룩하게 하라. 창기의 지체를 만들지 말 것이다. 주와 합하는 이는 한 성신을 이룬다.
누구나 평등하게 대하자
다른 사람을 압제하지 말라. 그러면 압제를 받지 않을 것이다. 아들 있다고, 아내 있다고, 남편 있다고, 없는 이를 압제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압제를 받지 않을 것이다. 부자가 오면 쓸고 닦고 맞아들이고 가난한 이가 오면 보통으로 한다. 이것이 압제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안 하는 것이요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도 압제를 받을 것이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한다고 하셨다. 영화로운 이름을 훼방하고 너희를 끌고 법관에게 가지 않느냐 하셨다. 내게 사자의 입을 막을 능력이 없다. 그러나 능력을 받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훼방하지 않고 제재 받지 않을 능력을 얻어야 한다. 내가 죽을지언정 내 자랑 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않겠다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셨다. 아가야 지방에서 이 자랑을 막을 이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사람들이 미워는 하나 거슬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말씀대로 안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허술히 본다. 헌 누더기를 입고 출입을 해도 허술히는 안 본다. 관청에 가도 그렇다.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듣지 말라는 뜻은 자기 마음대로 서로 옳다고 주장하고 부르짖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성신 뜻대로 아니하면서 자기들이 옳다고 한다. 교인들의 마음속에 적그리스도가 담겨있다. 자기를 낮추려는 마음이 없다. 희생심 봉사심이 없다. 그리스도의 피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양을 잡아서 문설주에 뿌리고 재앙을 면하고 나왔다. 여리고성이 망할 때 라합의 집 문에 붉은 줄을 드린 것과 같이 한국에도 그런 풍속이 지금 남아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명하여 심판하실 때에 붉은 피가 있는 집은 넘어가신다. 여리고성 망할 때에 붉은 줄 있는 것이 라합의 집이라는 표적이 있었기에 그 집에든 사람은 다 구원해 내고 그 밖에 멸망시키셨다. 우리나라도 동짓날이 되면 팥죽 물을 문과 온 집안의 보이는 데마다 뿌리는 것은 그 뜻이다. 신령한 뜻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시켜서 심판하실 때에 그 마음에 예수님의 피가 없는 마음 즉 통회하는 마음이 없는 이를 멸하신다는 뜻이다.
가라지 비유
좋은 곡식은 모아서 곡간에 드린다는 것은 선한 마음씨는 구원을 얻을 것을 가르치신 말씀이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사르신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뉘우칠 기회에 뉘우칠 것이다. 선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번제 단 동편에 제물의 똥을 버리듯이 악심을 버리고 선심을 붙잡아야 된다. 고약한 마음씨를 버리면 양심과 희생심이 열렬해질 것이다. 뜨거운 사랑이 솟아날 것이다. 시기심과 미워하는 것은 마귀의 마음이다. 교회 목사들 마음가운데도 시기하는 마음 자기 자녀만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사탄의 생각이다.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무서운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첫 심판은 영과 육이 갈리는 때요 둘째 심판은 영이 하나님의 판단 내리심을 받을 때이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이 힘을 얻어 군대를 이룬 것은 우리의 마음과 육체가 심령의 새로워짐으로 의로워질 것을 가르치심이다. 아무 의도 행할 능력이 없고 아무 선에 대해 행할 소망도 없는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 움직일 때, 선하신 손이 우리 마음에 움직이실 때 우리의 심령은 힘을 얻어 떨치고 일어나서 선한 행실이 나올 것이다. 죽은 이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 그 때다. 듣는 이는 다 사망에서 나와 영생으로 들어가리라. 예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하실 때에 무덤 속에 있는 의인들이 나와서 부활하신 후에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천사에게 보이셨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이에게는 의의 영생이 있다. 선한 마음이 있다. 악독과 시기와 분쟁과 탐심과 자기 이익만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생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고 남을 해하려는 마음은 짐승의 마음이다.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하여 가르치신 말씀들은(롬8:1-2 롬8:26-29 고후5:17) 우리가 새로워질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유전(상속)법
남편 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선은 우리에게 상속되었다. 우리에게도 죄에 대하여 죽음이 있다. 악을 버리게 된다. 부활하셨으니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다. 의의 상속을 받은 것이다. 예수와 한 몸을 이룬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없는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가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할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을 것이다. 고생을 당하신 예수,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가 죽으면 예수를 따라가자. 의심 말고 따라가자. 저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가 지금 받는 고난이 세상에서 죄 안 짓고 사는 것과 오는 구원의 영광과는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 예수를 따라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살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는 다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5:17) 거듭나야 그 심령이 항상 찬미한다. 늘 기도할 것이다. 심령으로 기도하고 선한 마음으로 찬송할 것이다. 영으로 기도하라. 그것이 진정한 기도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는 기도다.
신령으로 기도할 것이다. 이것이 합리적 예배다. 참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 나에게 베푸시는 일을 찬송하는 것이다. 의식이 아니요 말만이 아니요 소리 나는 곡조만이 아니다. 우주의 곡조에 맞추는 찬송이요 우주의 공법에 합당한 기도다.
사람의 생긴 것이 계란과 흡사하다. 밖으로는 전부 계란껍질 같이 싸였다. 성자는 마음이시다. 내가 창조 때에 도편수가 되셨다고 말씀하셨다. 잠언에 성자는 말씀이시다. 성자는 마음의 모든 경륜이시요 성령은 경륜의 통변이 되신다. 성자와 성부와 성신은 한 하나님이시다.
나를 죽이자
마음속에 “나”라고 하는 것을 죽여 버려야 한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는 이 넓은 우주 공정한 공법 밑에서 될 일이 아니다. 내 뜻 내 고집 내 생각 내 지혜는 아낌없이 버리자. 성자의 뜻에 순종하자. 내 마음은 그의 성전이 되며 그의 경륜이 이루시도록 비워드릴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 창조 때에 도편수가 되셨다. 나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마음속에 나라는 것은 죽이고 아드님 말씀만 잘 듣고 순종할 것이다. 속에 것은 성령에게 배울 것이다. 아담의 죄지음을 받은 내 속에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우리는 새삼스레 방언에 힘쓰지 말고 통역에 힘쓸 것이다. 예언에 힘쓸 것이다. 성령의 뜻을 표현할 것이다. 행동으로 드러낼 것이다. 방언은 소리는 나지만 내 속에 생명을 죽여 버린다. 생명은 죽이고 자기만 나타내면 무슨 빛이 있겠느뇨?
신사참배
매일 신사참배를 하고 무서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보다 자기 배를 위하여 자진해서 하고 있다. 강제로 신사 나가는 것이 더 큰 죄인가, 아니면 자신이 정욕에 굴복하는 것이 더 큰 죄인가?
내 안에 생명을 위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생명을 위하지 않는 것이 죄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다고 바리새인들이 책잡았다. 예수님은 신랑이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아도 일없다고 하셨다. 그 당시는 예수가 계시면 금식 안 해도 좋다. 지금은 성신으로 계시니 성신이 내 안에 계시면 금식 안 해도 좋다는 말씀이다. 신사참배 하라고 권하는 그들의 마음에도 우리 주님은 계신다. 그들을 축지 박지 말 것이다. 옳지 않은 소리 하는 것은 죄를 모르고 성령을 근심시키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다. 신이 아닌데 엎드리는 것은 성령을 엎지르는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생명은 멸할 수밖에 없다. 생명이 죽으면 에덴동산에서 어리석게 지은 죄로 종의 직분을 하게 된다. 우리 의지를 굽히는 것이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다. 의지의 주인공, 마음의 경륜, 생명의 도편수 되시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다.
나를 죽이자. 내 욕망을 어디까지나 죽이자. 살려는 마음을 버리면 살 것이다. 오른 편 강도같이 죽는 것이 마땅한 줄 알면 다시 살 것이다. 우리 배우자 되시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내가 거기서 벗어나왔다. 내가 죽어야 죄가 안 나온다. 주님은 종의 직분을 온전히 끝까지 하셨다. 나를 죽여야 한다. 내가 죽어서 죄와 영영히 갈라져 버릴 때 죽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오신다. 헛된 것이 안 죽으면 생명의 명을 어긴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갈리면 불효자식이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갈리면 불효막대가 된다. 시작이 어리석고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잘 해 가다가 실수를 한다. 나는 죽어야 마땅하지 살아서는 안 된다. 점점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지 내가 올라가면 안 된다. 우리 시조가 죄를 지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인하여 종과 같이 순종하시고 죽으셨다.
성부는 왜 성자를 보내셨을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소유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보내셨다. 잃어버린 생명 찾으려고 보내셨다. 선한 것이 상하지 않게 생전에 영생을 이루시라고 보내셨다. 죄를 위하여 보내셨다. 누구든지 제 생명을 아끼는 이는 죽고 주를 따라 죽고자 하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선을 찾을 것이다.
핑계하지 말고 그저 순종하자
내가 어리석어서 죄를 짓는다. 그런데 자기의 어리석은 것을 드러내지 않고는 핑계를 댐으로 죽는다. 뱀의 시킨 것은 뱀의 직분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생, 하나님의 대표가 되어 가지고 짐승의 말을 듣고 짐승 핑계를 한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며 짐승을 인도할 책임이 있는 이가 도리어 뱀에게 복종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끄러워하고 무서워서 피했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것은 죄로 인해서다. 사망은 부끄러운 것이다. 어두움을 빛을 부끄러워한다. 바알이 하나님과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원수는 아담 자신이다.
저 사람이 꾀는 것은 저 사람 잘못이 아니다. 꼬임을 받는 나의 죄가 잘못이다. 꾀는 것은 뱀의 직책이다. 남 원망 말고 자기를 책망하고 선한 이치를 따라 행하며 진리의 종이 되어 발악하지 말고 그저 죽으면 새 사람이 된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성자가 발악하셨으면 이치에 닿지 않는다. 예수께서 유다더러 친구라 하셨다. 끝까지 친구라고 하셨다. 나를 해하려는데 미워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그 사람을 사랑하셨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물어야지 나대로 있으면 반항하는 것이요 등지고 있는 것이다.
정성으로 기도하고 깊이 생각하자
묵상 명상은 하나님께 나의 생각과 의지를 온전히 부합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성신으로 하고 마음으로 할 것이다. 진정으로 간절함으로 할 것이요 정성으로 철저히 할 것이다. 애걸복걸 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원수가 되어 있으니 이것을 퇴각 시켜야만 한다. 우주와 일치하는 사색을 붙들어야 한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옅게 파다가는 너 죽는다.
막힌 담을 헐라
담을 헐어야 한다. 모든 담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셔서 헐어버리셨다. 우리는 형제간이다. 자매간이다. 세상 편으로도 그렇고 하나님 편으로도 그렇다. 영육 간에 형제자매다. 그런데 욕심 때문에 원수가 되었다. 휘장이 생겼다.
법의 모양을 버릴 것이다. 율법의 참 뜻은 너나가 없는 것이다. 옷을 입었으니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법의 모양뿐이다. 속의 죄가 부끄러운 것이다.
노아는 포도원 농부가 되었다. 함은 아비가 술 취해서 벗고 누운 것을 보고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함은 아우 야벳에게 말했다. 동생은 뒤로 걸어가서 옷으로 아버지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런데 형 함은 저주를 받았다. 죄가 부끄러운 것이다. 옷은 모양뿐이다. 예수님 운명하실 때 휘장이 찢어졌다. 법의 휘장이 죄다. 육체적인 법을 헐어버린 것이다. 생명과 나 사이에 이 장애가 있다. 죄의 담이 있다. 이것을 헐어버리면 생명과 나는 하나가 된다.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법을 버리면 생명이 나타난다. 옷으로만 가리고 죄를 지으면 원수를 맺게 된다. 법의 모양만 취하여 원수를 맺는 것이다.
옷만 입고 남녀가 무례히 행하면 죄다. 법의 모양만 취하여 원수가 안 되려 하나 죄 지으면 원수가 된다. 사람과 내 마음이 원수 되었다. 법의 모양으로 원수만 안 되려고 하나 헛수고다. 자식이 부모 몸뚱이 보는 것은 죄가 아니다. 내 몸도 부모 몸과 같다. 죄를 드러내는 것이 실수다. 옷을 벗으면 세상 법은 죄라고 인정은 하나 마음이 새롭게 되기 전에는 그것조차 없어서는 문란하게 되니 그렇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성경 보지 않고는 부모 자식 간에 옷 벗음을 보고 부끄럽게 안다. 그것이 죄다. 죄 지은 후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이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죄 지은 후에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 지어 입었다. 사망의 열매다. 죽고 사는 것이 생겼다. 모르고 죄 지으면 늘 근심이다. 이것이 죄 되는 줄 알면 안 할 것이다. 결과는 죽는 일이다. 신사 참배 안 하면 왜 법은 죄로 정하는가? 마음 참배는 하고 세상 영광 취하면서 모양만 버리려 하는 까닭이다. 죄 없는 척 하는 까닭이다. 참배 안 할 수 없다고 내가 엎드리는 것이 내 속에 의지를 엎드리는 것이다. 내 속에 계신 예수를 엎드리는 것이다. 우리 욕심 때문에 예수를 신사 앞에 엎드리게 한다. 마치 경관이 억지로 사람을 신사 앞에 엎드리게 하는 것은 자기 월급으로 자기 가족 먹여 살리려고 엎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죄가 엎드리게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우상
마음의 우상을 쫓아내면 보이는 우상은 부끄러워 물러간다. 내 속에 어두운 것이 있어야 어두운 것이 가까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내 속이 밝으면 어두운 것이 물러나고 가까이 못 오는 법이다. 옛날 법에 머리 깎으면 죽이는 법이다. 목 베면 육체가 죽는 법이다. 우리의 머리를 숙이면 죽은 것이다. 죽임을 당한 것이다. 예수님이 대신 값 주고 사신 생명을 내가 죽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허락 하셨다. 과거에 우상 섬긴 죄로 예수가 죽으시고 우리에게 대신 생명을 주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생명을 몰라서 이것이 하나님의 것인지 아닌지를 모르니 하나님에게 물어본 것이다. 세상 영광은 세상에게 돌려주어라. 생명은 하나님에게 바쳐라.
죄와 죽음
예수는 십자가를 기쁘게 여기셨다. 달게 지셨다. 이 세상은 죄에 매여 있다. 죄와 관계를 끊으면 세상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죄에서 떠나는 것이 죽는 것이다. 죽으면 세상과 관계없다. 세상이 상관 안 한다. 죄에게 다 갚아주셨다. 그러므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부르짖을 수 있다. 죄의 권세는 법이다. 법의 권세는 사망이다. 사망만 이기어 버리면 법에서 벗어난다. 법에서 벗어나면 사망은 떠난다. 사망에서 뛰어나 영광의 생명의 자유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이뇨?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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