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5·6교실/한국신학사상사 교실

[스크랩] 이공 이세종과 맨발의 성자 이현필

류성련 2016. 6. 19. 00:55

 

다음 달 7월 15일 월요일에 장신대 서문 앞에서 공동체지도자훈련 프로그램이 있어

그곳에서 기독교공동체에 대해서 발제를 부탁받았습니다.

구약성경 분야가 아닌 한국의 기독교공동체 동광원에 대해 발제하기로 했습니다.

공부하다가 좋은 글이 있어서 동역자들과 나누려고 여기에 실어 봅니다.

파일도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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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이공과 이현필.hwp

개신교 최초의 토착 수도 공동체 동광원

근래 들어 한국기독교에서 ‘동광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동광원 수도회’가 창립되는 등 한국교회사학회 및 동광원에 관련된 논문과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수도 공동체인 ‘동광원’은 ‘맨발의 성자’요 한국의 성 프란시스코로 불리어지는 이현필과 그를 따랐던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한국개신교회 최초의 토착적인 수도공동체이다.

이현필을 소개하자면 그의 스승이였던 이세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세종 또한 ‘호세아를 닮은 성자’로 엄두섭 목사는 책으로 그를 소개하는데, 그가 복음을 접한 후 성경 말씀에 따라 순결을 지키기 위해 부인에게 남매지간으로 지낼 것을 요구했으나 부인이 이를 거부하고 두 번씩이나 개가하였고, 그때마다 지게로 직접 살림을 져다 주었으며, 부인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는 아무 말 없이 받아 준 것에서 비롯되어 부쳐진 이름이다. 이세종 선생이 살아 계실 당시 감리교신학대학 교수였던 정경옥 박사는 신앙잡지에 “한국에 성인이 나왔다”고 이세종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세종은 한 때 동광리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나 복음을 접한 후 성경말씀에 따라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평생을 청빈과 순결, 미물까지도 존중하는 생명외경사상을 가지고 살았다. 이러한 이세종의 삶속에 승화된 토착 수도원적 모습은 그의 제자들 중 하나인 이현필을 통해 전수 되었으며, 이때부터 하나의 공동체의 모습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현필은 191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세 때 읍내에 있는 일본인 목사 관파(官波)에게 전도되어 복음을 접한 후, 1928년 광주농업실습학교 학생 때 강순명 목사를 통해 알게 되었던 도암의 ‘이세종’을 만나게 된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은 생전에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내 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뿐이다”라고 하였다. 이현필은 자신이 성화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자신의 제자들 중에 성화된 인물이 있길 바랬기 때문에 이세종과 달리 많은 제자를 두고 훈련시켰다.

이현필은 나이 30세 전후 주로 개인적으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였고, 특별히 소명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는 서리내라는 곳과 그 앞선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는 동산이 이현필운동의 발상지 이다. 이곳에서 행해진 교육은 보름씩 산중에서 행해졌으며 경건생활과 노동이 엄격하게 병행되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생활을 훈련시켰다. 그 자신 스스로가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 벌 옷과 불을 때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내며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였다. 그는 식사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을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 일체 침묵하였고 다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또한 생명외경사상으로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세종으로 부터 전수된 순결사상은 남녀유별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엄격했다. 이현필도 23세에 결혼을 했으나 그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처럼 남매지간으로 지낼 것을 권유하고 실천했다. 후일 이현필 선생의 부인은 개가했다. 이러한 순결사상은 그를 따르는 결혼한 제자들에게는 참 견디기 힘든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결단하여 순결생활을 지켰으며, 때로는 많은 사람이 남편과 집을 놔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동광원에 들어와 산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이현필 선생이 한 번 지나가면 온 동네, 도시가 난리가 났다. 자신의 부인과 생이별하는 일이 벌어지거나 잠자리를 거부하는 일이 생기자 여러 곳에서 비난이 잦아졌다. 특히 전라남도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이 대부분 빠져 나가 이현필을 따라 다니자 그를 ‘산중파’, ‘금욕주의자’라 비난하며 그를 이단시하였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를 찾아와 대면한 목사들은 “이 길이다! 이 길이다!” 소리쳤다.

이현필은 말년에 후두결핵으로 고생하다가 1964년 3월 53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그는 죽기 전 깨달은 바 있어 제자들에게 고기국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자들은 평생 채식주의자였으며, 자신들에게도 채식주의를 가르친 스승의 말에 놀라면서도 임종 직전이라 고기국을 끓여 들였더니 두 숟갈을 떠 드셨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파계’이다. 그의 스승 이세종 선생은 ‘파’를 만들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현필은 자신을 쫓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사라지고 이현필 자신이 걸어 왔던 삶을 쫓지 않을까 염려하여 ‘선행위주’의 삶을 회개하고 “예수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임종했다.

이현필은 복음의 삼덕을 순결, 청빈, 순명으로 보았고 이를 위해 수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청빈’ 곧 가난에 대해 이해함에 있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자족의 방법과 나눔을 통한 삶을 말했다. 그 실천적 장이 되었던 것이 바로 ‘동광원’이다. 동광원은 수도 공동체로서 본원은 남원에 있고 분원으로서 진도분원, 지지리분원, 함평분원, 도암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소화자매원, 전북 진달래의 집,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산, 갈원 등지에서 약 80여명이 수도하고 있다. 이 분원들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된다.

첫번째 부류는 산골짜기에서 노동하며 수도하는 분원이며, 둘째 부류로 광주 귀일원, 소화자매원, 전북 진달래의 집처럼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분원들이다.

물론 사회복지시설에서 봉사하는 동광원도 대부분 산속에서 수도생활을 경험한 젊은 사람들이 나가서 봉사하는 곳이다. 수도공동체들은 대부분 산골에 위치해 있으며, 집들은 여느 시골 사람들이 사는 집과 다름이 없다. 동광원이란 간판도 없고 경계를 짓는 담도 없다. 또한 수도를 상징하는 수도복장이나 장식도 몸에 걸치지 않는다. 시골 사람과 다름없는 모습 속에서 세상과 격리되기보다는 세상과 구분되어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이다.

동광원은 경제적으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다. 새벽기도를 시작으로 농사짓는 생활과 하루 두 번의 기도 모임을 갖고 있으며, 농사일이 없는 겨울철에는 성경공부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이모든 것에는 강요나 강제가 없다. 연중행사로는 1월 초와 8월 중순의 두 차례에 걸쳐 약 일주일씩 집회를 갖는데 이때가 동광원의 모든 식구가 모이는 날이다.

봉사 단체인 귀일원은 이현필 선생이 한때 탁발전도단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신앙훈련과 전도훈련을 시키다가 여순사건과 6. 25전쟁으로 인한 고아들과 유리하는 자들이 많아지자, 탁발수도를 그만두고 이들을 돌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귀일원은 애초에 10명을 돌보던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금세 600명으로 늘어났다. 당시에는 자체 수입이나 국가 보조가 없던 터라 귀일원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졌고, 이현필과 제자들은 길거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시장통에서 떨어진 푸성귀를 모았으며, 새벽기도 후에는 광주시내에 나가 똥지게를 지어 농사를 지어 식량을 공급했다고 한다. 64년에 시작한 일작(日勺)운동은 밥을 지을 때 자기 몫에서 한 숟가락씩 떠서 모으는 운동으로 일작씩 걷어 귀일원으로 갈 곳 없는 이들에게 하룻밤씩 보내자는 운동이 시작되면서 사방에서 양식이 들어 왔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도 확산 되었다.

현재 귀일원은 1백여 명의 정신장애인을 돌보는 곳과, 60여명의 정신지체장애인을 돌보는 귀일 민들레 집으로 나뉘어져 있다. 귀일원에 소속된 자매들은 정신지체장애인과 정신질환자를 돌보면서 수도하고 있다. 이들의 헌신적인 24시간의 돌봄이 2000년 사회복지시설 종합평가에서 우수 기관으로 지정되었다.

동광원에 관심있는 이들은 직접 수도원으로 찾아가면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을 만나 ‘맨발의 성자 이현필’과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이세종’의 이야기를 생생히 전해들을 수 있다.

<책 : 맨발의 성자 이현필,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이세종 엄두섭 저 은성출판사>

<논문 : 한국교회사 속의 영성운동 연구, 양홍석, 2000학년도 감신대 신학대학원>

I. 이공의 생애와 사상

1. 예수를 몰랐던 시절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동광원의 창시자인 이현필 선생의 스승이 바로 이공李空 이세종 선생(1880-1942)이다. 이공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형님 밑에서 자라났다. 남의 집 머슴이 되어 일만 알고 글을 배워본 적이 없었지만 어떻게 한글을 깨쳤다. 정직하고 충직해서 틈틈이 짚신을 삼아서 형님께 드리고 일 년 품삯을 형님께 양도하였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난리가 나서 다 못살아도 그이만은 살 것이라고 칭찬했다.

장성해서는 형님들을 가까이 모시고 도와드렸는데 형님들의 가산이 차츰 늘어나 살만큼 되자 그제야 결혼을 생각했다. 나이 30세에 14살의 시골처녀와 결혼하였다. 살림을 차린 후 지게를 맞추고 “이 지게가 다 닳도록 일해서 그간에 살림을 이루리라” 결심을 하고 이른 새벽부터 일을 나섰다. 겨울이면 콩 잎사귀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저축하고 형님 댁의 살림도 보살펴 드렸다. 마침내 그 마을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마을 사람치고 그에게 빚을 지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전답도 늘었지만 잘 입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고 살았다. 이렇게 이공 자신은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면서 일가친척들은 자주 도와주었다. 그 동안 얼마나 지게를 지고 일을 했던지 지게가 다 닳아져 어린애라도 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 후 15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자식을 보고 싶은 소망에 무당을 불러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무당이 하라는 그대로 복종을 하면서 정성과 지성을 다해 아들 낳기만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무당의 지시에 따라 산당을 짓고 공을 들였지만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리 지성껏 공을 들여도 헛됨을 알고 그 해 이사를 했다.

2. 성경과의 만남과 회개

이공 이세종은 우연히 붉은 거죽의 한글로 된 책을 보았는데 하나님을 찬송하는 책이라 하니까 첫눈에 마음에 들어 빌려다 읽고, 얼마 후 “또 다른 책은 없는가?” 묻자 그들이 구약을 빌려주어 성경을 보게 되었다. 이공은 구약을 창세기부터 자세히 읽어 가는 중에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보게 되었는데 자신이 이제까지 신당을 짓고 상을 차리고 촛불을 켜고 떡을 차리고 백지로 꾸며 복을 비는 그 제도가 구약시대 성전의 제사의식과 흡사함이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신구약 성경을 공부하던 그이는 마침내 아들 낳게 해달라고 무당에게 공들이고 복비는 것이 헛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죄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의 미신 행위를 청산하고 산당에 꾸며놓은 모든 제사 기구들을 불살라 버렸다. “너희는 너희의 복이라 타라” 하시며 모든 것을 버렸다.

그 동안 공들이는 데 쓰던 모든 기구들을 다 일소한 후에 무당에 공들이던 그 열성을 하나님께로 돌려 정성을 바쳐 기도하며 말씀을 살폈다. 머슴들의 휴식처인 사랑방에서, 창세기 일장 일절부터 하루 밤에 한 절씩 암송하기를 몇 달을 하고, 성경 읽는 산당까지 마련하여 탐독하다가 복음에 통하였다. 밤이면 기도하고 낮에는 말씀을 읽곤 하는 생활을 수개월 동안 계속 하였다. 마침내 그이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진실한 신자가 되었다. 아들을 낳겠다는 마음도 깨끗이 사라졌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식들을 얻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만 열심히 섬기며 전도도 하였다. 그이의 전도로 마을 사람들이 다 믿게 되었다. 이웃마을까지 전도하고 간증도 하고 어떤 때는 식사도 잊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하자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그이를 보고 미쳤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동리마다 전곡을 나눠주고 길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모두 대접해 보냈다.

3. 모든 빚을 탕감해줌

그이는 그에게 빚진 자들을 낱낱이 다 불러들였다. 그리고 갚을 수 없는 빚들은 다 탕감해주고 빚 문서인 차용증서는 그 자리에서 불태워 없이한 후에 “빚은 다 받았으니 안심하라.”며 위로했다. 빚진 자들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고 나서 이제 그에게 빚진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물건을 꾸어간 사람들에게도 “그냥 다 가지라.”했다. 일대 희년을 선포한 것이다. 그 마을에서는 전무후무하게 희한하고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꿈처럼 믿을 수 없는 그런 일이 사실이었다. 모두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고 기쁨이 넘쳤다.

그리고 산에나 들에 나가서 일군들이 흔히 하는 대로 남의 콩 한 포기라도 뽑아먹었던 기억이 있으면 그 임자에게 찾아가 자복하고 다 갚았다.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구차한 대로 무엇이나 다 도와주었다. 곡식은 모아두었다가 노인과 어린이가 있는 가난한 집에 나누어주었다. 당신 자신은 콩 잎사귀 얼마도 아까워 못 먹고 살면서 그렇게 했다.

그러자 일년에 으레 한 두 번은 아프던 몸도 모든 병이 물러가 건강해지고 기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경이 아니면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어라”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따라 믿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에서는 그의 선심에 감동하여 그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신도들과 함께 나와서 오직 하나님만 공경할 것과 자기의 명예는 나타낼 것이 없으니 비석을 당장 넘어뜨려라 했다. “내 손으로 이 사람들을 시켜서 비석을 없앨 수는 있으나 당신들이 세워놓은 비석을 차마 그럴 수 없으니 당신들 손으로 무너뜨리시오” 하고 권유했다. 면장과 면민들은 “이왕 비용을 들여서 세운 것이니 그대로 두자” 하며 말을 듣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안 무너뜨리면 그이 자신이 없애겠다고 완강하게 나오자 할 수 없이 면민들은 그 자리에서 땅을 파고 묻었다.

4. 오직 말씀으로

그는 배부르기를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에게는 금식이 더 좋은 식사였다. 성경을 들고 있으면 해가 뜨는지 해가 지는 지도 몰랐다. 밤이나 낮이나 분간이 없었다. 어쩌다 병이 나면 곡기를 끊었다. 병중에는 죽이나 숭늉이나 미음도 먹지 않았다. 평소에는 쑥 범벅이니 콩잎사귀 죽 같은 아주 거친 음식이 주였는데 병중에는 아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병석에서 일어나기까지 금식했다. 그이는 아파도 매양 약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죽고 싶다고 하지만 병이 나면 약을 쓰는데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약이다. 의의 약이다. 이 약을 쓰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 썩어도 썩지 않는 생명의 몸으로 부활한다. 몸은 아무 때 썩어도 썩는 것이니 그대로 버려두라.” 그이는 오래 아프면 “이제 죽을 것이라” 하고 죽음을 기다렸고 회복되면 살려주신 것을 감사했다.

5. 신비체험

어느 해 겨울 이상한 중병이 나서 두어 달을 아팠다. 열병에 신음하면서도 병원에도 가지 않고 약도 먹지 않았다. “예수보다 좋은 의사가 어디 있으며 신약보다 좋은 약이 어디 있느냐?”하며 버텼다. 열흘 이상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 하루는 밤에 제자 이상복에게 산에 있는 예배당에 데려가 주기를 바랐다. 죽어도 산당의 기도실에서 죽겠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소원이라 생각하고 들어 드리자 해서 업고 가는데 가죽과 뼈만 남아서 가볍기가 나무 같아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추운 겨울인데 불도 없이 차가운 냉방에 뉘여 놓았다. 이상복은 당시 20대의 청년인데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팔 다리를 주물러 달라 해서 주무르는데 여의치 않았다. 한 밤에 이공의 몸은 반쯤 굳어지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이공은 제자에게 자기 몸을 힘껏 흔들어 달라 했다. 잠시 후 정신이 돌아오자 그의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제자에게 뜨거워서 못 견디겠으니 연못의 얼음을 깨 오라 했다. 물을 떠다 머리를 축이고 몸을 문지르라고 한 후 다시 몸을 일으켜서 못 가로 갔다. 못 가로 가서 옷을 벗고 얼음을 깨뜨리고 퍼낸 물을 온몸에 끼얹었다. 몸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이렇게 세 차례나 얼음물로 샤워를 했다. 의아해 바라보는 제자에게 “이제야 정신이 드는군.” 했다. 그때 이공은 건너편에 이상하게 빛나는 광채를 보았다. 이공은 이상복에게 “저기 정자나무 밑에 무엇이 안보이시오?” 하고 물었다. 제자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럴 것이요. 영의 눈이 열려야 보이지 육안으로는 안 보일 것이요.” 이렇게 말하는 이공의 얼굴에는 감격과 기쁨이 가득했다. 초자연적인 힘이 쏟아짐을 체험했다. 그의 열병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옷을 입고 뛰어 나와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이 사는 것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증거 하였다.

6.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라

명예나 칭찬은 마귀의 대접으로 알고 똥처럼 피하였다. 칭찬을 마귀의 시험으로 알고 남이 높이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고 심지어 마음이 교만해질까봐 상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싫어하였다. 도움을 받은 이들이 감사의 사례라도 하면 “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저에게 감사하다고 하시오? 저를 시험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였다. 걸인에게 무엇이라도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하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으면 내 먹을 것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당신들에게 줄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그이는 사람을 대접하는데도 차별이 없었다. 거지에게 대접해도 꼭 당신 집에서 잡수시는 대로 대접했다. 누구나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 꼭 같이 접대하였다. 그것이 주는 이에게 복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주는 것이 오히려 화가 된다고 가르쳤다. 이런 바른 가르침이 곧 사랑이라 하였다.

7. 겸손과 사랑

당신은 또 절대 교만을 몰랐다. 옷만 다른 사람보다 낫게 입어도 마음이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을 낮추어보게 된다고 낡은 검정색 무명옷만 입었다. 먹는 것 입는 것이 거지만도 못하였다. 한번은 어떤 분이 식혜를 갖다 드리면서 선생님께서 잡수시고 싶어 하신 음식이라 올렸다고 했더니 두어 번 떠 잡수신 후에 숟가락은 놓고 “이놈이 진즉 나무끄렁에라도 치어죽지 않고 이때껏 산 것이 이것을 못 잊어 못 죽었는가?” 하며 통곡하였다. 또 찰밥을 해오자 찰밥을 붙들고 가난한 사람들 생각이 나서 잡수시지 못하고 눈밭을 누비며 찰밥을 할 수 없으리만큼 가난한 집들을 찾아다니며 나눠주셨다. 올기쌀[찐살]이 생기면 가난해서 농사도 짓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다 돌려주신 다음에야 비로소 당신 입에 넣으셨다.

그이는 언제나 세상의 명리를 뜬 구름처럼 생각하고 어디를 가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꽃 한 송이를 볼 때도 탐이 나서 가면 허방에 빠져 넘어지고 다리가 부러질 것으로 생각했다. 남에게 덕을 베풀기를 좋아하였고 빼앗기는 것을 얻는 것보다 즐거워하였다. 일가친척들이 와서 빼앗아 가고 행패를 부려도 그들의 요구보다 더 많이 베풀었다.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고 송사하여 속옷을 갖고자 하는 이에게는 겉옷까지 주고자 했다. 한번은 그이의 살림살이를 욕심내서 빼앗고자 위조문서를 세우고 위증을 내세워 그의 살림살이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섰다. 그러나 그는 일언반구의 반론이나 변론도 없었다. 그이는 오직 탄식하며 말하길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당도한 것이라” 했다. 길을 가다가 훼방하는 이가 있으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리다가 그 사람이 허락해야 길을 떠났다. 핍박과 능욕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으로 생각했다.

8. 정직과 진실

겉꾸밈이 없었다. 속이고 외식하는 자는 예수와 원수가 된다고 믿었다. 남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으로 알고 자기밖에는 추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아무리 나환자라도 추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악수하고 반가운 듯 하지만 속에는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것을 보고 한탄하였다. 오직 진실만을 사랑하였다. “내가 주는 밥은 죄가 안 될 것이다.”하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겉으로 주면서 속으로 아까워한다거나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안과 밖이 전혀 다름이 없다는 것이 그이의 즐거움이요 자랑이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실천하시며 속을 다스리는 것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길이라 믿었다. 남이 나를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고 욕하며 해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진실성이 없는 것을 더 두려워하였다. 남이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의 거짓이 나를 해치는 원수라고 알았다.

9.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이는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몸도 자기 것이 아니고 마음도 자기 것이 아니었다.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다 버리고 오직 주님께 의탁하였다. 밤중이라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면 어디든지 따라 나섰다. 한번은 밤중에 감동이 있어 집을 나가서 십리나 떨어진 마을의 뒷산에서 날이 새기까지 쪼그리고 앉아있다 왔는데 얼마 후 예수의 이름이라고는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그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도 그이가 밤새 앉아 있었던 바로 그 앞집이었다.

재산도 모두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믿었다. 누가 손해를 끼쳐도 주님께서 알아서 처분하신 걸로 믿었다.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했다. 화초와 꽃나무를 심고 잉어를 기르면서 무척 기뻐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꺾어가고 파가고 잡아가는 것을 보고 인심의 악독함에 한탄하며 울었다.

마음과 뜻을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몰두했다. 목사 장로들이 와서 믿음의 도리나 덕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한없이 기뻐하고 좋아하였지만 말이 희미하게 세상이야기나 쓸 데 없는 이야기로 되면 같이 담론을 하다가도 낯빛이 침울한 모습이 되어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언제나 주님의 도리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옮기지도 않았다. 누가 와서 궂은소리를 해도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누가 곁에서 말하면 무슨 상관이냐 책망하시며 그저 듣고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리면 된다고 하였다.

10. 만물을 한 몸처럼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미물들을 다 사랑하였다. 산길을 가다가 칡넝쿨을 만나도 사람들의 발에 밟혀 다치지 않게 다 치워주며 걸었다. 풀포기 하나라도 뽑지 않고 마당의 잡초도 뽑지 않았다. 물에 빠진 쥐를 보면 막대기를 놓아서 나오게 해주었다. 하루는 독사가 부엌에 들어와 웅크리고 있으니 부지깽이로 조심스레 몰아서 산으로 내보내며 다른 사람에게 보였으면 큰일 날 뻔 했으니 앞으로는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하루 밤은 어둔 데서 무엇이 그를 물었다. 불을 켜고 보니 큰 지네였다. 조심조심 종이로 싸서 돌 틈으로 돌려보내며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했다간 큰일이 날 터이니 앞으로 다시는 사람들 틈으로 나오지 말라고 일렀다. 무엇이나 사람을 해치는 것이 나옴은 사람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번은 산이 무너지는 듯한 호랑이 울음소리에 사람들이 놀랐다. “범이 무슨 짐승이기에 만물의 영장이 되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가?” 하면서 밤새도록 “만물의 영장이 네놈에게 져서야 되겠느냐?” 소리를 지르며 호랑이를 쫓아 보내느라 산을 헤맸다. 사람이 해칠 마음이 없으면 어떤 짐승도 해치지 못하는 법이며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사자라도 사람을 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파리, 모기 등 해충이 나오는 것도 사람의 잘못 때문이라 했다. 파리가 생기기 전에 예방할 것이지 파리가 생긴 뒤 죽이려고만 힘쓰지 말 것을 설명하였다. 욕하고 미워하고 죽이는 죄를 짓지 말라 하였다.

마을을 지나가다 보면 어린아이들이 욕을 하며 어덕뱅이니 문둥이니 손자놈이니 손가락질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러면 죄 된다 웃는 낯으로 타일렀다. 그래도 계속 욕을 하면 그것도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나에게 들려주시려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했다. 내 육체에 문둥병은 없지만 어린아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 안의 문둥병을 가르치신 것으로 알았다. 세상에서 어덕뱅이는 아니지만 날마다 하나님께 빌어먹으니 어덕뱅이도 옳은 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끝없이 너그러우며 관대하였고 또한 인자하였다.

11. 찬양과 자비와 기도

그이는 길을 가다가 개미 한 마리만 밟혀도 길을 멈추고 돌아보며 “하나님 앞의 행위로 보아서는 내가 너한테 밟혀 죽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네가 나에게 밟혀 고생하는구나!” 하며 슬퍼하였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포기를 보며 기뻐하였고 산에 올라가 우거진 모습을 보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만물들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자.”하면서 큰 소리로 찬양하였다. 죄인들을 보면 앞에서는 꾸지람을 하지만 뒤돌아서서는 울었다. 한 사람이라도 믿음에서 떨어지면 밤새도록 울었다. “하나님 이 죄인을 잊지 마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해치는 이가 있으면 그이는 이 세상에서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연민을 가졌고 무엇을 훔치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가’ 하면서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는 걸음마다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하나님, 이 불쌍한 백성과 죄인들을 잊지 말아 주옵소서.” 하고 기도했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탁하였다. 언제나 부지런히 말씀을 전하며 말씀하는 시간에 밥상이 들어와도 공사부터 먼저하고 사사는 뒤로 하자며 말씀을 계속하였다. 마음에 항상 진리의 말씀만을 생각하였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다. 길을 가다가 피곤하여 쓰러져도 하늘만 쳐다보며 우리가 움직이려면 위에서 힘을 주셔야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언제나 욥기를 생각한다고 했다. 야고보서[5:11]에 욥의 말씀이 있어 좋다고 하였다. 병으로 앓는 이를 보아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고 식사 때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병자를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며 우리가 사는 힘은 밥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에 있다고 믿었다. 어디를 간다 해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길을 떠날 때 기약이 없었다. 사람들이 물으면 “모른다. 가다 어찌될 지 오다가 어찌될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맡기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이 없었다.

12. 의의 옷을 입자

그는 입은 것이 남보다 조금이라도 낫다고 생각되면 곧 바꿔 입어야 마음이 편안했다. 하루는 새 옷을 입고 나갔다가 어떤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를 보자 곧 바꿔 입고 돌아와서 “음식이야 다른데서 얻어먹을 수도 있지만 거지가 옷을 어디서 얻어 입겠는가.” 하였다. 그이의 모자는 다 쭈그러진 검은색 중절모였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이 모자만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고 어떤 분이 그 모자를 몰래 아궁이에 불태워버리고 자기의 모자를 드렸더니 좋은 모자는 마음이 불안해서 쓸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이는 두루마기는 입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좋아하는 의복은 덕행이었고 의의 두루마기를 입고자 하였다. 그리고 정직의 허리띠를 동여매고 살았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고 의의 두루마기를 입고 정직의 허리띠를 매고 오직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자 힘썼다.

13. 예수를 잘 믿으려면

그이는 예수를 믿은 후 남들이 자기를 이공이라 불러주기를 바랐는데 이것은 철저한 자기부정의 정신이었다. 이공李公이 아닌 이공李空으로 자기가 없다는 뜻이다. 하루는 제자 오복희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을 수 있을까요?”하고 묻자 즉석에서 대답하길 “빌어먹어라” 했다. “예수 잘 믿으려면 거지 오장치 짊어지듯 믿어야 한다. 물에 빠지듯 풍덩 빠져서 믿어야 된다.”하고 가르쳤다. 개구리가 물에 뛰어들 듯 믿음의 바다에 풍덩 빠지라는 것이다. 그이는 진실로 진리의 바다에 몸을 바쳐 풍덩 빠졌다. 그리고 그가 풍덩 빠질 때 나던 그 소리는 지금도 영원한 울림으로 퍼지고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에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14:26-27]

14. 순결생활

남녀의 순결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더 큰 은혜라고 하였다. 복음을 받은 후 하나님과 부자유친(父子有親)하게 되자 부인과는 남매처럼 살았다. 부부관계를 끊고 순결의 삶을 살았다. 나이 어린 아내가 참지 못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그러자 아내의 살림도구를 손수 지게에 지고 갖다 주며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다. 그 아내가 얼마 못 가서 되돌아왔을 때 말없이 받아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매로 살았다. 아내가 다시 참지 못하고 두 번째 집을 나갔다. 이공은 신령으로 정성으로 기도를 했다. 며칠이고 기도한 후 찾아가서 돌아오라고 권했다. 그 아내는 다시는 안 돌아갈 것이라며 온갖 악담을 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여기를 찾아 왔느냐?” 하면서 물을 끼얹고 야단을 했다. 그이는 심한 냉대를 받았지만 온유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여인의 간부에 대해서도 선하고 관대한 태도로 대하며 그 여인을 데리고 살아도 유망할 것이 없으니 돌려보내라고 권유했다. 머지않아 그 집에 재앙이 닥쳐 아내는 할 수없이 다시 되돌아왔다. 그는 한글도 모르는 아내에게 한글을 깨우쳐주고 성경을 읽게 하였다. 그리고 찬송을 가르쳤다. 그 아내도 마침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그리고 그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정성으로 보살폈다.

15. 마지막 가는 길 - 고난 받은 종의 노래

그이가 세상과 작별할 시간이 가까워 옴을 알았다. 그리고 세상 떠날 준비를 착실히 하였다. 믿는 이들에게 모든 진리를 아낌없이 풀어서 가르쳐 주었다. 모든 재산을 다 나눠주었다. 집도 전답도 다 없이하였다. 곡식 한 톨까지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 지방에 보일 증거는 다 보였다 생각해서 그 마을을 떠났다. 그를 받아들이고 모셔드리는 데는 세상에서 한 군데도 없었다. 그이는 산으로 들어갔다. 고요히 운명할 장소를 택한 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보릿가루 콩가루 도토리가루로 연명하면서 분량을 점점 줄여갔다. 마침내 마지막 40일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물도 마시지 않았다. 공기로 연명하면서 바람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기운이라 했다. 최후 마지막 일주일간은 더없이 장엄하였다. 들어내 갈 수 있도록 손수 나무로 만든 틀, 즉 상여 위에 요를 깔고 누워서 세상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과 육체의 땀 나는 고통 속에 일주일을 보냈다. 임종시간이 가까웠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유언을 남겼다. 부인에게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부탁하고 젊은 남녀들에게는 정욕을 극복하라 하고 장년들에게는 가정에 얽매여 진리·사랑을 소홀히 할까 염려하라 경계했다. 어떤 이에게는 가시덤불 속에서라도 성경을 볼 것을 부탁하였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양 발과 머리를 붙들라 하였다. “놓치면 죽는다, 단단히 붙잡아서 높이 들라” 하고 소리를 높였다. 높이 들어 올리자 그때 말씀하였다. “누가 나를 받들어 올리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로다.” 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제자들은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을 생각하였다.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높이 높이 솟아오르리라.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우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본 사람도 없다.[사52:13-15]

II. 이공의 가르침들 중에서

1. 결혼에 대하여

결혼하면 부부가 하나라고 하는데 결혼은 진정으로 하나가 못된다. 그러므로 하나가 죽어도 하나가 잘 산다.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짝지었으니 나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는 알기가 어렵다. 함부로 짝지을 수가 없다. 한번 잘못 만나면 평생 원망이다. 그래서 바울 선생은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니나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다. 더 좋은 일을 하게 된다. 예수 믿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 나는 그이가 성신을 받은 줄로 안다. 혼인하면 주님의 종이 되기보다 율법의 종이 되기 쉽다. 남편의 종이 되고 아내의 종이 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전 6:12]

2.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구하라

세상의 영광과 영예를 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영광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야 한다, 오직 내 속에 계신 예수님만을 위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다 묻어버리고 주님의 마음을 가질 것이다. 내 생각을 갖고 내 생각대로 가면 죽음과 멸망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고 영리한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고 하였다. 미련한 놈, 미친 놈, 어리석은 자라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에게 나타나신다. 세상 사람들은 몸에 문둥병이 들까 무서워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병들이 들어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병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고 고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우리는 주님께 병 고쳐주시기를 빌어야 한다. 오직 주님이라야 그 병을 고쳐주신다. 이 병 고침을 받아야 우리의 심령이 정결해진다. 정결한 심령을 가져야 온전한 사람이다.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 들어갔어도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막으시니 사자가 어떻게 하지 못했다. 무슨 고생이나 병도 다 내 죄 때문이다. 그러니 남을 원망할 수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없다.

개미에게 물려도 개미 탓이 아니다. 개미를 탓할 수 없다. 내가 개미에게 물려죽어야 마땅한데 어찌 개미를 야단치겠는가. 개미는 나보다 선하다. 나무에 눈을 찔려도 돌멩이에 발을 다쳐도 모두 내 탓이다. 우리가 육체의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오히려 행복하다. 육체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은 선해지고 죄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겠느냐. 오직 죄를 뉘우칠 뿐이다. 죄를 뉘우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세상이 주는 행복은 바랄 것이 없다. 세상의 행복은 오히려 재앙이다.

3.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라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도우신다. 죄만 없으면 산다. 죄만 없으면 물 속에 들어가도 좋고 불 속에 들어가도 좋다. 의인들은 어디서나 산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원망할 것이 없고 아무것도 부러워할 것이 없다. 세상의 영광은 취할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만 하여라. 그 무엇이나 원망하지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고 죄를 뉘우칠 뿐이다. 들에 가득히 우거진 풀만 봐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지 않는가. 우리가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악마들의 틈새에서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겠는가. 풀잎 하나라도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손길이 아니면 있을 수 없다.

4. 말씀 전하는 책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해야 된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감화하시면 알아듣고 깨닫게 된다. 무식한 사람이라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명령대로 바로 전해서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 책임이지만 바로 전하지 못하면 내 책임이 된다. 예수님은 의인의 친구가 아니라 죄인의 친구가 된다고 하였다. 미련한 이의 친구다. 모르는 중에 다 쏟아놓고 은혜를 구할 것이다. 그러면 받는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한 것이 지혜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으로서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

연보는 내 몸을 희생하는 것이 참된 연보다. 죄도 모르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그 영광을 버리시고 제물과 생축이 되셔서 희생하심으로 그 영광을 다 나에게 맡겨 주셨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다. 이 시간도 그이의 영광이 아니면 나는 살수가 없다. 나는 부끄럽고 살 힘이 없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 그 풍성한 영광을, 넘치는 영광을,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주심으로 내가 살 힘을 얻은 것이다.

전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뜻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입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오늘날에는 행동으로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

5. 악심과 탐심을 버려야

뉘우칠 기회에 회개하고 선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꺼지지 않는 불길 속에서 슬피 울게 될 것이다. 똥을 버리듯 악심과 탐심을 다 버리고 선한 마음을 붙잡아야 된다. 고약하고 나쁜 마음을 내다 버리면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솟구칠 것이다.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탄의 마음이다. 시기하는 마음,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마음, 이런 마음은 아무리 목사라도 사탄의 마음이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심판 받고 새로워져야 된다.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들이 힘을 얻어 군대를 이루었다 함은 우리의 마음과 육체가 심령의 새로워짐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가르침이다. 아무 의도 없고 선도 없고 행할 능력도 없는 나에게 하나님 아들의 말씀이 움직일 때, 주님의 선하신 손길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실 때, 우리의 심령은 힘을 얻어 떨치고 일어나서 선을 행하게 된다.

6. 십자가와 부활

죽은 이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지금이 바로 그때라. 듣는 이는 다 사망에서 나와 영생으로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이에게는 의의 영생이 있다. 악독과 시기와 분쟁과 탐심과 자기유익만 구하는 것은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들의 영이 없는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가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할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의 부활을 입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는 길을 갈 때 우리도 의심 말고 예수를 따라가자.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 할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7. 말씀에 순종하자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 앞에 있는 이는 모두 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거듭난 신령으로 항상 찬미 찬송 기도할 것이다. 신령으로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기도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하나님께서 합당히 여기시는 기도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공변되고 넓고 큰 우주 앞에서 나라고 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 내 뜻 내 고집 내 생각 내 지혜는 다 갖다 아낌없이 버려라. 오직 성자의 뜻에 따르자. 마음속에 나라고 하는 생각을 죽이고 주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할 것이다. 내 속에 오신 주님의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8. 죽는 것이 사는 것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다. 신사참배를 하는 사람들은 누가 시켜서라기보다는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욕에 굴복하는 것이 더 큰 죄가 되지 않는가. 신이 아닌데 엎드리는 것은 성령을 엎는, 성령을 엎어버리는 일이다. 그 속에 있는 생명이 멸할 수밖에 없다. 자기 안의 생명을 위하지 않는 것이 죄다.

나를 죽이자. 살려는 마음을 버리자. 살려는 마음을 버리면 살 것이다. 내가 죽어야 죄가 안나온다. 나를 죽여 버리면 죄와 영원히 갈라지고 죽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오신다. 부모와 자식이 갈리면 불효자식이다. 우리가 주님과 갈리면 불효 막대가 된다. 누구든지 제 생명을 아끼는 이는 죽고 주를 따라 죽고자 하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9. 죄의 핑계를 대지 말라.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지 않고 핑계를 된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이 죽는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 뱀이 시켰다고 핑계를 댄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짐승의 핑계를 댄 것이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며 짐승을 인도할 책임을 가진 이가 오히려 뱀에게 복종을 한 것이다. 그리고 부끄럽고 무서워서 하나님을 피했다.

꾀이는 것은 뱀의 직책이다. 꼬임 받은 내가 어리석은 것이다.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를 책망하고 회개하여 진리의 종이 되면 새사람이 된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해치려는 유다를 보며 친구라 했다. 그를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시며 끝까지 사랑하였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뜻에 따른 것이다.

10. 성경말씀을 깊이 파라

기도 묵상은 신령으로 해야 된다. 진정으로 간절함으로 하고 정성으로 철저히 할 것이다. 애걸복걸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됨을 퇴각시키고 우주와 일치하는 사색을 붙들어야 한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다가는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어라.

성경은 마음의 거울이다. 성경은 그 사람의 믿음의 정도대로 밖에 안 보이는 법이다. 사람들이 성경이 이렇고 저렇고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성경을 들고 말하는 것만 가지고는 모른다.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 [잠10:29] 하는 말씀처럼 정직한 자는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소화시켜 유익을 얻으나 악인은 도리어 성경에 걸려 넘어진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우선 자기를 깨끗이 해야 한다.

11. 막힌 담을 헐라

우리 사이의 담을 헐어야 한다. 우리는 형제간이요 자매간이다. 영으로도 그렇고 육으로도 그렇다. 그런데 욕심이 들어오면 담이 생긴다. 욕심 때문에 원수가 된다. 욕심으로 칸막이가 생긴다. 법의 참 뜻은 너와 나가 없는 것이다.

생명과 나 사이에도 장애가 있다. 죄의 맘이 장애다. 이것을 헐어 버려야 생명과 내가 하나가 된다.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죄를 버리면 새 생명이 나타난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휘장이 찢어졌다. 죄라는 법의 휘장을 헐어버린 것이다.

12. 가장 큰 행복

하나님께 순종하고 십자가의 도를 믿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참 비밀을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고생과 환난은 사실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 받고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고난을 겪으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면 주 안에서 그 부활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III. 이공의 제자 이현필과 동광원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숨이 가라앉는 듯 하다가도 다시 돌아올 때마다 “이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고 외쳤다.

환희의 물결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성령의 기쁨이.... 임종 수일 전부터 기쁨이 밀려와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제 절정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먼저 갑니다. 다들 다음에 오시오!” 하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얼굴은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53세로 생을 마감한 성인 이현필 선생의 임종 시의 모습이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그린 성화의 모습이나 같았다고 한다.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은 191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세 때 읍내에 있는 일본인 목사 관파(官波)에게 전도되어 복음을 접한 후, 1928년 광주농업실습학교 학생 때 강순명 목사를 통해 알게 된 도암의 ‘이세종’을 만나게 된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은 생전에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내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세종과 달리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제자들을 훈련했다. 이현필 선생을 가장 초기부터 따랐던 분으로 당시 남원 읍내에서 목공소를 하고 있던 오북환 집사였다. 오북환 집사는 이현필을 만나 그 감화력에 동화되어 목공소를 내놓고 집회장소로 삼았다. 그는 일생 이현필을 본받아 하나님의 충직한 종으로서 동광원을 가꾸며 헌신했다.

이현필은 나이 30세 전후 홀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다. 화순의 화학산과 남원의 지리산에서 수년씩 홀로 기도생활을 했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였고, 특별히 소명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는 서리내(仙人來)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는 동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제자들과 생활하면서 기도 및 경건생활과 노동 그리고 성경공부 등을 통해 제자훈련을 시켰다. 남원 지방의 독신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자 산으로 모여든 것인데 이것이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어머니 강남순과 딸 김금남 두 모녀는 그때부터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 그때 김금남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진로문제를 놓고 날마다 고민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하는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진로 문제를 놓고 갈보리에서 백일기도를 했는데 이 기도를 통해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자나 깨나 산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에 마음에 응답되기를 일생 동정을 지켜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때 교육은 보통 보름씩 산중에서 행해졌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생활을 배우게 했다. 성경을 배워주고 겸손과 사랑의 실천, 그리고 양심훈련을 시켰다. 먹을 것이 없던 때라 주로 풀뿌리와 쑥을 먹었다고 한다. 그 자신 스스로가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옷과 불을 때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냈다.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인 것이다.

서래내는 남원 수지면에서 지리산을 등산하는 도중에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곳인데 이현필은 그곳의 우거진 솔밭이나 갈대밭 속에 한 번 엎드리면 꿈적도 않고 일어날 줄 몰랐다고 한다. 산에 사는 까마귀가 송장인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 까악’ 하고 울다가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찔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을 통해 겸손과 자비와 청빈의 수도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닮아갔다.

이현필은 1948년에 훈련시킨 제자들과 함께 광주 YMCA로 가서 봉사했는데 이때 이들의 모습을 본 당시 YMCA 총무 정인세는 깊은 감동을 받아 바로 이현필을 따르게 되었다. 정인세는 말하기를 그가 만난 인물 중에서 이현필 선생 만큼 그릇이 크고 깊은 인물은 없었으며 이현필 선생의 그 깊은 속은 자기로서 도저히 측량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현필의 전기를 쓴 엄두섭 목사는 “보통 생각하기를 이현필 선생은 예수를 본받으려고 하신 분이고 하나님만 사모한 분이니 그것밖에는 다른 일은 관심이 없는 분인 줄 짐작하지만 그의 포부는 세계적으로 넓었고 애국심에 불탔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분”이라고 전한다.

이현필은 식사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했는데 꼭 저녁에만 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도 많았다. 또한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고 꿈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비심으로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누가 아프다고 그이의 기도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오.”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아프다는 이에게는 “아프게, 더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오.” 하였다.

이세종으로부터 전수된 순결사상과 남녀유별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엄격했다. 이현필도 27세에 결혼을 했으나 그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처럼 남매지간으로 지낼 것을 권유하고 실천했다. 후일 이현필 선생의 부인은 개가했다. 이러한 순결사상은 그를 따르는 결혼한 제자들에게는 참 견디기 힘든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결단하여 순결생활을 지켰으며, 때로는 많은 사람이 남편과 집을 놔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동광원에 들어와 산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이현필 선생이 한 번 지나가면 온 동내, 도시가 난리가 났다. 자신의 부인과 생이별하는 일이 벌어지거나 잠자리를 거부하는 일이 생기자 여러 곳에서 비난이 잦아졌다. 특히 전라남도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이 대부분 빠져 나가 이현필을 따라 다니자 그를 ‘산중파’, ‘금욕주의자’라 비난하고 그를 이단시하였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를 찾아와 대면한 목사들은 “이 길이다!”하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이분은 참 믿음의 사람이다. 참 사랑의 사람이다. 성경말씀대로 살면 이렇게 된다. 이런 것이 믿는 것이요 사랑이다.” 하고 감격했다.

여순반란사건 이전에는 주로 경기도 능곡을 중심으로 농사와 탁발훈련과 전도활동을 했다. 그리고 복음전도대로서 그들은 또한 남원 순천 여수 강진 해남 광주 등 남부지방을 돌며 탁발하고 전도활동을 펼쳤다.

해남 교회에서 당시 청년 김준호는 의사를 지망하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현필 선생을 만나 평생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김준호는 당시 교회 내에서 살면서 손수 교회청소를 담당하고 혼자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하루는 그 교회 집사가 “우리 교회에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올 것이오. 그는 광주에 사는데 목수 일을 하고 시래기죽만 먹으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사는데 항상 기쁨이 충만하여 종일 하나님만 찬양하는 사람이라오.”하고 말해주었다. 그때가 1946년 가을이었다. 강단의 책상 위에 국화를 꺾어다 화병에 놓고 예배를 준비했다. 트럭을 타고 두 분이 내려왔는데 모두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한 분은 톱 망치 등 목수연장을 담은 걸망을 지고 내렸다. 이현필 선생과 오북환 집사라 했는데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청년 김준호는 속으로 ‘저런 분이 어떻게 믿기에 잘 믿는 사람일까’ 하고 있었는데 이현필 선생이 설교하러 책상 앞으로 나와 앉았다. 그런데 그가 책상 위 화병에 놓여있는 국화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아주 슬프고 안타까운 음성으로 “어찌하여 이 꽃을 꺾었습니까? 꽃은 꺾지 마시고 피어있는 그대로 두고 보셔야 되는데...” 하시며 한참을 말없이 슬픈 표정으로 그 꽃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순간에 김준호는 이현필 선생의 그 말씀과 그 모습을 통해 온 몸을 울리는 한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애틋함과 온 우주를 껴안는 깊은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을 따르면서 스승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현필은 제자를 사랑하여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맨발로 30리 50리 산길을 달려갔다. 6·25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살리기 위해서 갖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거나 차를 탈 때면 언제나 제자들에게 가장 나중에 타자며 다른 사람들이 다 탄 후에야 차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다 먼저 구원을 받은 후에 자기는 맨 마지막으로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겠다는 철저한 이웃사랑이요 보살정신이었다.

이현필은 말년에 후두결핵으로 고생하였는데 생을 마감하기 전에 뜻하는 바가 있어 제자들에게 고깃국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평생 채식주의자였으며, 자신들에게도 채식주의를 가르친 스승의 말에 놀라면서도 임종이 가까운지라 말씀대로 생선국을 끓여 들였더니 겨우 두 숟갈을 넘겼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파계’이다.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사라지고 이현필 자신이 걸어 왔던 삶을 율법적으로 좇지나 않을까 염려하였고 또 결핵을 앓고 있는 제자의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는 또 제자들에게 선행위주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으로 가르쳤다.

이현필은 복음의 삼덕을 순결, 청빈, 순명으로 보았고 이를 위해 수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청빈’ 곧 가난에 대해 이해함에 있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자족의 방법과 나눔을 통한 삶을 말했다. 그 실천적 장이 되었던 것이 바로 ‘동광원’이다. 동광원은 수도 공동체로서 본원은 남원에 있고 분원으로서 진도분원, 지지리 분원, 함평 분원, 도암 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소화자매원, 전북 진달래의 집,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산, 갈원 등지에서 그 제자들이 수도하고 있다.

출처-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http://www.diakonie.co.kr/

 

출처 : 한신 임마누엘
글쓴이 : 밝은영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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