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화론
발표자 : 이 종 석 (조직신학 Th. M. 3학차)
서론
1. 문제제기
주변에서 죄인의 단회적인 칭의의 선언만으로 마치 구원이 완성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거나 성화를 마치 보상이 있는 행위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볼 때마다 “칭의의 시작”과 “칭의의 지속적인 진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부분은 누수현상을 넘어 침몰 직전에 있는 듯한 위기감마저 든다. 보상이나 공로로서의 성화가 아니라 성령과 말씀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삶으로서의 성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그렇다면 칼빈은 성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가르치는가? 우리는 어두워져 가는 한국교회의 윤리적 위치를 볼 때 칼빈으로부터 올바른 성화의 길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칼빈은 중생은 곧 성화로 이어진다고 보았으며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또한 칼빈은 성화는 보상을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령의 성화사역을 통해 말씀의 비추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므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2. 연구목적 및 범위
칼빈의『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59) 1-3권을 범위로 칼빈이 “성화”와 “거룩하게 하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본문 중심으로 앞뒤 문맥과 중심 주제를 염두에 두고 칼빈이 다른 주제들과 성화를 어떻게 관련지어 설명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성화와 칭의의 긴밀한 관계와 성화와 행위의 관계를 칼빈의 성화론을 통해 다시 정리해보고자 한다.
A. 『기독교 강요』에서의 “성화”라는 용어의 분포와 용례
칼빈은 자신의 성화론을 자신의『기독교 강요』3권 14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칼빈은 14장에 “칭의의 시작과 칭의의 연속적인 과정”(The Beginning of Justification and Its Continual Progress)1)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이것은 칼빈이 칭의와 성화의 긴밀한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성화론을 다루는 3권 14장에서 성화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할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긴밀한 연결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다는 칼빈 자신의 칭의와 성화 이해의 반영인 것 같다.
a. 용어의 분포
칼빈의『기독교 강요』에서 “성화”를 가리키는 용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문판 기독교 강요에서 “성화”를 나타내는 명사 “sanctification”과 “거룩하게 하다”라는 동사 “sanctify”를 찾아보면, 명사 “sanctification”은 63회 나타나고 동사 “sanctify”는 58회 나온다. 칼빈은 그 사용들 중에 정작 성화를 다루는 3권 14장에서는 명사“sanctification”을 3회 사용하고 동사 “sanctify”도 3회만 사용한다. 기독교 강요 전체를 볼 때 이 사용 횟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횟수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칼빈은 정작 성화를 다루는 14장에서 이와 같이 총 6회라는 적은 횟수만을 사용하고 있는가? 특히 “성화”와 “거룩하게 하다”라는 용어는 교회론에서 주로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칼빈이 3권 14장 이후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성화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음을 보여준다.
1 권
창조자 하나님
2 권
구속자 하나님
3 권
성령: 구속의 적용
4 권
교회: 구속받은 공동체
총계
14장이전
14장이후
성화
sanctification
2
8
17
14
22
63
거룩하게 하다
sanctify
1
13
4
12
28
58
합계
3
21
21
26
50
121
b. 용어의 용례들
“성화”를 나타내는 명사 “sanctification”과 “거룩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sanctify”를 『기독교 강요』1-3권에서 그 용례들을 중심으로 아래의 페이지들에서 하나씩 살펴 볼 것이다.
B. 칼빈의『기독교 강요』3권 14절의 “성화”라는 용어 중심에서 본 칼빈의 성화론
1. 그리스도와의 연합
드디어 칼빈은 칭의론에 이어 성화론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칼빈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떠나서는 성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악한 나무들임이 분명하다. 즉 그들은 보기에 아름답고 잘 생기고 심지어 맛이 달콤한 열매들을 생산할지라도 결코 좋은 열매를 생산할 수는 없다”2)고 말한다. 칼빈은 사람들의 유형을 크게 네 가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교회 공동체 밖의 불신자,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이 교회 공동체 안의 타이틀로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위선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있는 중생된 그리스도인으로 분류한다. 위의 발췌문을 볼 때 칼빈은 중생된 그리스도인을 제외하고 앞의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함께 다룬다. 그 이유는 칼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다는 점에서 그들을 하나의 공통된 사람들로 보기 때문인 것 같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연합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보인다.
2. 공로를 배제시킨 행위
칼빈은 “베드로는 성령의 성화가 ‘순종을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뿌려짐을 위해’(벧전 1:2) 효험이 있다고 단언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오직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깨끗하게 하는 사역을 시작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우리의 더러움을 씻게 된다”3)는 말씀한 것을 칼빈이 보충 설명한 것이다.
칼빈은 또 다시 율법과 행위 그리고 성화의 관계를 설명한다. 칼빈은 “어떤 아주 악한 사람이 율법의 의무들 중에 하나나 또 다른 하나를 수행하자마자 곧 그 사람은 그 행위가 자신에게 의로 계산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께서는 마음(heart)이 우선 잘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행위로부터 성화가 획득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4)고 말한다. 칼빈은 성령의 성화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마음이 정결케 된 사람만이 율법 준수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성화의 수단으로서의 율법
칼빈은 “주의 율법 안에서 거룩하게 된 사물들이 악한 자들의 오염으로 오염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는 입장을 주께서 취하신다. 부정한 손이 신성한 어떤 것에 손을 대므로 그 신성한 것을 더럽히기 때문이다”5)라고 말한다. 여기서 칼빈은 주께서 지정하시는 구별된 사물들이 모두 성화 즉 거룩하게 되었다는 견해를 암시한다.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많은 것들이 일반적인 사물이지만 성별되므로 즉 성화되므로 구별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좀 더 과정된 표현으로 주의 손길이 닿아 지정하는 것마다 성화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칼빈은 “아직 진실로 거룩하게 되지 못한 사람들 안에 심지어 최고의 영광을 명백히 드러내는 행위들조차 주님 앞에서는 그 행위들이 죄로 계산될 정도로 의로부터 멀다”6)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있는 중생된 사람들의 의를 설명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죄의 은혜로운 사면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시며 한편으로 그분의 은혜가 그분의 성령을 통해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주하시고 그분의 능력을 통해 우리의 육체의 정욕들이 매일 점점 더 죽임을 당하는 그런 자비와 연결된다. 우리는 참으로 거룩하게 된다. 즉 율법에 대한 순종을 향하도록 형성된 우리의 마음과 함께 참된 순수한 삶 가운데 주님께 성별된다”7)고 말한다. 여기서 칼빈은 성화를 초점으로 중생된 그리스도인의 변화를 총체적으로 정리해 놓는 것 같다.
C. 칼빈의『기독교 강요』1-3권에서의 성화와 원리적 주제들과의 관계
칼빈의『기독교 강요』1-3권에서 여기 저기 산재되어 있는 “성화”와 “거룩하게 하다”라는 용어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단독적인 발췌문은 앞뒤 문맥이 없으며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발췌문 앞에 간단한 배경적인 설명을 덧붙일 것이다. 또한 하나의 발췌문이 제시되면 뒤에 핵심적인 요약을 추가할 것이다. 물론 발췌문들은 적절한 범주 아래 모아질 것이기 때문에 각각의 주제가 끝나는 곳마다 간략한 결론들을 제시할 것이다.
1. 성화와 그리스도의 관계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 중에 행하신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백히 드러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 즉 신성에 대해 언급하는 중에 “경건한 마음은 그 스스로 자극되고 조명되고 보존되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고 느낄 때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거의 하나님을 만진다”8)고 말하므로 칭의와 성화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기 위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부정하는 마니교도와 마르시온주의를 반박한다. 칼빈은 마니교도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속한 육체(heavenly flesh)를 입었다”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마르시온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단순한 환영(appearance)이라고 공상했다”9)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므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부여하신 모든 좋은 것이 우리에게 전가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인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증거로 칼빈은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자신이 또 다른 곳에서 ‘나는 그들을 위하여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요 17:19)”10)고 직접 말씀하신 구절을 인용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대속을 위해 참된 인성을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요 3:34) 성화의 과정을 겪으셨다는 것 같다. 계속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반박하는 자들에게 “이런 의미에서 그는 또한 ‘성화의 작자(Author)와 성화되는 자들이 모두 하나의 기원을 갖고 있다’(히 2:11상)고 말한다”11)고 말하므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좋은 것을 전가받는 자들이 동일한 인간의 본질을 가졌다고 그들을 반박한다. 칼빈은 성화를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인성과 우리의 인성이 동일하다고 증거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참된 인성을 취하셨으나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주장을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흠 없으심을 부정하거나 그런 주장을 오해하여 남자 없이 여자에게서만 출생하였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오류들을 지적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는 오로지 남자와의 관계(copulation)없이 그분의 어머니에게서 출생되셨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출생이 아담의 타락 전에 진실했었을 법한 것처럼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도록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든 오점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12)고 말하므로 죄인인 마리아에게서 나셨을지라도 성령으로 잉태되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되셨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인 마리아를 통해 타락후 아담의 몸을 갖고 태어나셨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실 때에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되셨기 때문에 타락전 아담의 상태 즉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로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신 까닭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의 그리스도의 무흠하신 인성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후 아담의 몸을 취하시므로 죄와 싸워야 했기 때문에 무력함을 느끼시거나 분투하셔야 했던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으로서 전능성을 포기하시고 자기를 비어 피조물과 같이 되신 한계 즉 인간이라는 한계 안에 자신을 두시므로 그 무력함이나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싸우셨다는 결론이 따라 오는 것 같다. 칼빈은 “나는 그들을 위해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요 17:19)는 “요한복음 17장이 말씀하는 성화도 신성(divine nature) 안에서는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13)라고 말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 인성 안에서의 성화임을 확언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삼직 즉 선지자, 왕, 제사장이심을 설명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를 위한 중보자 즉 대제사장이라고 한다. 칼빈은 “우리의 죄를 씻어버리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범죄와 악행의 부정함이 우리를 제외시키는 그 은혜를 우리를 위해 획득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와 우리의 기도들은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한다”14)고 말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대제사장 즉 중보자가 되셨다고 말한다. 칼빈은 “‘나는 그들을 위해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요 17:19)는 그리스도의 진술의 의미”15)가 바로 제사장의 역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한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능력을 옮겨 부으시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적인 생명으로 북돋우시고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분의 몇몇 은혜의 은사들로 자신의 교회를 장식하고 자신의 보호를 통해 모든 해로운 것으로부터 교회를 안전하게 지키시고 그분의 손의 강력으로 자신의 십자가의 적과 우리의 구원의 적을 억누르시며 결국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차지하시기 위해 높은 곳에 앉아 계신다”16)고 말하므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의 한계를 넘어 택자들을 성화시키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라고 본다.
칼빈은 “어린 암소의 피가 육체의 정결로 거룩하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훨씬 더 죽은 행위들로부터 여러분의 양심을 깨끗하게 합니다”17)(히 9:13-14상)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대리속죄를 설명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열매를 다른 사람에게 주셨고 자신을 위해 어떤 공로를 세우지 않았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중시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그들을 위해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요 17:19)고 확언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18)라고 말하므로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인용한다.
2. 성화와 성령과의 관계
칼빈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성령의 하나님되심 즉 신성이 입증된다고 진술하는 중에 “우리의 칭의는 그분[성령]의 사역이며 능력, 성화(cf. 고전 6:11), 진리, 은혜, 그리고 생각될 수 있는 모든 선한 것이 그분[성령]으로부터 존재한다”19)고 말하므로 칭의와 성화가 성령의 사역이라고 지적한다.
칼빈은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 이유 때문에 베드로도 신자들이 ‘성령의 성화 안에서 순종을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위해 선택받았다’고 말한다”20)고 말하므로 성화가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켜 영원한 기업의 소망으로 소집하기 위해 성령을 받으셨다고 한다. 칼빈은 “그분은 ‘성결의 영’(cf. 살후 2:13; 벧전 1:2; 롬 1:4)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류와 그 밖의 나머지 살아있는 피조물들 양쪽 모두 안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으로 우리를 북돋우시고 양육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늘에 속한 생명의 뿌리와 씨이시기 때문이다”21)라고 말한다.
3. 성화와 자유의지의 관계
칼빈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경건한 부모에게서 타락을 이어받는 것은 있을 가망성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렇다면 오히려 그 자손이 자신의 부모의 순수함에 의해 거룩하게 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cf. 고전 7:14)”고 주장한 내용을 반박하는 중에 “범죄(guilt)는 자연(nature)에 속하지만 성화는 초자연적인 은혜(supernatural grace)에 속한다”22)고 말하므로 신자의 자녀이든 불신자의 자녀이든 출생할 때는 모두 죄인으로 출생하기 때문에 자녀들도 초자연적인 은혜에 속한 성화가 주어져야 거룩성에 참여한다는 것을 언급한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성화의 유전이 불가능하니 타락 곧 죄의 유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칼빈은 타락한 인간은 모두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하였으며23)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제거되었고 자연적인 은사들은 죄로 부패되었지만24) 성령께서 인류의 공동의 선을 위해 창조의 법칙에 따라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탁월한 은사들을 나눠주신다25)고 말한다. 그런데 칼빈은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로지 신자들 안에만 거주하신다(롬 8:9)는 진술이 성화의 성령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성화의 성영을 통해 성전들로서 하나님께 성별되기(고전 3:16) 때문이”26)라고 말하므로 성화의 성령께서는 오직 신자들 안에만 내주하신다고 단언한다.
칼빈은 자유의지 논쟁에서 “우리가 죄의 지배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 순종하지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한다는 말로 죄를 정당화시킬 수 있으므로 노예의지 주장은 잘못이라고 반박하는 노예의지 반대론자들에게 “성령만이 오로지 성결하게 하는 직무를 스스로 주장할지라도 사실상 우리는 종종 우리 스스로 모든 불결함을 깨끗이 제거하라고 명령받는다”27)고 말하므로 성화는 오로지 성령의 직무이지만 성령을 통한 중생(요일 5:18) 이후에 신자는 적극적으로 성화에 동참하라고 명령받는다고 주장한다.
4. 성화와 언약과의 관계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언약은 하나이며 동일한 언약이지만 시행방식의 차이가 있다28)는 말로 구약과 신약의 유사성을 설명한다. 하지만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형상 즉 그림자로 표현된 구약과 실체 즉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신약이라는 예표와 실재의 관계로 설명한다. 칼빈은 “왜냐하면 동물의 희생제물들을 통해 죄를 없애지도 참된 성화를 가져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장차 오는 좋은 일들의 그림자’가 율법 안에 존재했고 ‘실체 그 자체들의 생생한 형상’은 그 안에 없다고 결론짓는다(히 10:1)”29)고 말하므로 참된 성화를 가져오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며 구약의 예표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칼빈은 계속해서 “율법은 보다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인이자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자리를 넘겨드리기 위해 종결되고 폐지되어야 한다(cf. 히 7:22).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에게 단번에 영원한 성화들을 전해주시며 율법 아래 머물던 택자들의 죄과들을 덮어 숨기신다”30)고 말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보증과 중보자로서 택자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성화들을 언급한다. 이 영원한 성화들은 미래적인 즉 완전한 성화를 현재로 가져와 이야기하는 것 같다.
5. 성화와 칭의의 관계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오시안더(Osiander)를 반박하기 위해 칭의와 성화를 설명한다. 칼빈은 “우리는 그리스도에 참여하므로 주로 이중적인 은혜(double grace)를 받는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무흠하심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어 한 분의 심판자 대신에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하늘에 소유한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룩하게 되어 삶 속에 흠 없음과 순결함을 배양한다”31)고 말한다. 칼빈은 “참으로 나는 중생에 대해 즉 이 은사들 중에 두 번째 은사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 것 같다”고 말한다. 칼빈은 중생 곧 성화라는 이해를 보여준다. 칼빈의 주장은 중생은 곧 성화로 이러지지 않는다면 중생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 같다. 칼빈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의 주입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실질적으로 의롭게 된다”고 보는 “본질적인 의”의 주입이라는 견해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의 본질의 혼합 또는 결합이라는 문제를 일으키는 오시안더가 칭의 곧 죄 용서와 중생 곧 성화를 혼동한다고 지적한다. 칼빈은 “사람들의 악행 중에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그 사람들을 그들이 존재했던 본성 그대로 남겨두시는지 어떤지”를 묻는 오시안더에게 “그리스도께서 부분부분으로 쪼개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합된 것으로 인지하고 있는 이 두 가지 즉 의(righteousness)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다”32)고 대답한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가 구분될지라도 분리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칼빈은 또한 “성경은 비록 그것들[칭의와 중생/성화]을 연결시키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우리에게 보다 더 잘 드러나도록 그것들을 여전히 분리하여 기록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와 성화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바울의 진술은 과하지 않다(고전 1:30)”33)고 말하므로 칭의와 성화가 분리된 듯 보이는 것은 그 은혜를 보다 더 돋보이게 하려 함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또한 오시안더의 견해를 반박하여 “비록 의가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y)의 은밀한 샘(wellspring)으로부터 우리에게 나오기는 하지만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성의 본질에 따라 우리에게 의이다라는 주장이 따라올 필요는 없다”34)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은혜들 즉 성화와 의가 다르다는 점을 나중에 적적한 곳에서 살펴보자”고 한다. 또한 “이런 이유로 의롭다 하는 능력이 믿음에 돌려질 때 영적인 행위들조차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따라온다35)고 말한다. 칼빈은 칭의를 위한 믿음조차도 행위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의 교리도 오시안더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위에 호소하는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도 비판을 가한다.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의를 위한 모든 신뢰거리들을 인간에게서 제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전속시키는 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도 여전히 성화 아래 은혜를 포함시킨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성화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으로 거듭난다는 주장이다”36)라고 지적한다.
칼빈은 칭의 교리를 비판하는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을 반박하기 위해 칭의와 선행의 문제, 그리고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다룬다. 칼빈은 “그렇다면 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가?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성화를 붙잡지 않으면 역시 이 그리스도의 의도 붙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의와 지혜와 성화와 구속을 위해 주어지시기 때문이다’(고전 1: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거룩하게 하지 않은 사람을 동시에 의롭다 하지도 않으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하고 파기할 수 없는 끈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지혜로 조명하는 사람들을 구속하시고 구속하는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하지만 그 문제는 오직 의와 성화에 관계되기 때문에 이것들을 머물러 두자. 비록 우리가 의와 성화를 구분할 수 있기는 하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 안에 의와 성화 양쪽 모두를 분리할 수 없도록 담고 계신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획득하고 싶은가? 당신은 우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은 그분의 성화에 참여하는 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분을 소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조각조각으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13). 그러므로 누리는 것은 오로지 주께서 우리에게 이 은혜들을 주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심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주께서 동시에 의와 성화 양쪽 모두를 제공하시며 하나가 없으면 결코 다른 하나도 없다. 이와 같이 우리가 행위 없이가 아니라 단지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명확한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기 때문에 의가 포함된 만큼 성화도 포함되어 있다”37)고 말한다.
6. 성화와 선택 교리(예정 교리)의 관계
칼빈은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 예정 교리를 설명한다. 칼빈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선택과 그 안에서의 개인의 선택에 대해 설명한다. 칼빈은 “그들[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신 7:6)으로 선택받았기 때문에 성화가 그들에게 명령된다”38)고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도를 위해 선택한 민족도 구별되었으므로 성화를 명령받는다고 설명하는 것 같다. 여기서도 칼빈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께서 구별하시는 것은 어떤 피조물이든지 성화된다는 개념을 제시하는 것 같다. 칼빈은 “주께서 그분의 택자들을 부르심과 칭의로 인치시는 것처럼 그분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나 그분의 성령에 의한 성화로부터 유기된 자들을 닫아버리시므로 주께서는 이러한 표지들을 통해 일종의 어떤 심판이 그 유기된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계시하신다”39)고 말한다. 칼빈은 유기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성령에 의한 성화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 같다.
칼빈은 예정 교리 안에서 선택 교리를 설명하면서 부르심에서는 “일반적인 부르심”과 “특별한 부르심”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나는 이 구절(마 22:11-13)이 신앙의 고백으로 교회에 들어왔지만 그리스도의 성화로 옷 입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40)고 말한다. 칼빈은 마 22:11-13에서 혼인 잔치에 합당한 의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을 모욕스럽게 여겨 주인이 추방하는 내용에서 이와 같이 설명한다. 칼빈은 일반적인 부르심과 특별한 부르심을 이해시키기 위해 여기서 일반적인 부르심에 의해 초청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특별한 부르심과 함께 선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고 설명한다.
7. 성화와 믿음의 관계
칼빈은 “믿음은 성령의 주된 사역”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성령의 성화와 진리에 대한 믿음 안에서’(살후 2:13)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았다고 말하는 곳에서 믿음 자체가 성령 이외에 다른 원천을 갖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간략히 알려주고 있다. 요한은 이것을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부터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안다’고 보다 명확히 설명한다”41)고 말한다.
칼빈은 믿음의 근거는 허구나 무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화해(고후 5:18-19)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비하신 아버지이시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와 성화와 생명으로 주어지셨다는 사실을 알 때 구원을 받는다”42)고 말한다.
칼빈은 학파들 사이에 논의되는 형성된(formed) 믿음과 미(未)형성된(informed) 믿음을 구분하는 일은 무가치한 일이라고 반박한다. 칼빈은 “믿음은 아버지에 의해 우리에게 제공된 분(cf. 요 6:29)으로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께서 의와 죄의 용서와 평화를 위해 제공될 뿐만 아니라 성화(cf. 고전 1:30)와 생명의 물의 원천(요 7:38; cf. 4:14)을 위해 제공되기 때문에 성령의 성화를 이해함이 없이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정당하게 알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성령의 성화를 떠나서는 알려질 수 없다. 믿음은 경건한 경향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따라온다”43)고 말한다.
8. 성화와 몸의 부활의 관계
칼빈은 마지막 부활에 대해 설명하면서 “영혼이 지금 입고 있는 몸이 아니라 새로운 다른 몸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반박한다. 칼빈은 몸의 부활을 설명하면서 “이상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전으로서 하나님 자신께 드려졌던(고전 3:16) 몸들이 부활의 희망도 없이 오물 속으로 내던져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하다! 그 몸들이 또한 그리스도의 지체들(고전 6:15)이라는 사실은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그 몸의 모든 부분들을 그분께 거룩하게 되게 하라고 명령하신 사실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들의 혀로 찬양되게 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사실은 어떠한가? 깨끗한 손들이 그분 자신께 들려져야 한다(딤전 2:8)는 사실은 어떠한가? 희생제물들이 드려져야 한다(롬 12:1)는 사실은 어떠한가?”44)라고 반문한다. 칼빈은 영지주의적 인간이해를 갖고 있는 마니교도, 마르시온주의, 16 세기의 신령주의나 방종주의의 견해를 반박하므로 인간의 몸의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D. 칼빈의『기독교 강요』1-3권에서의 성화와 실천적 주제들과의 관계
1. 성화와 회개의 관계
칼빈은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을 다루면서 회개와 죄 사함은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고 믿음으로 획득된다고 말한다. 칼빈은 “첫째로, 성령께서 불결함과 오염에서 깨끗이 되도록 우리를 하나님의 의의 순종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화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셨다. …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에 의해 방해받는 한에 있어서는 많은 악행과 연약함에 의해 포위공격 받기 때문에 성령의 성화에 의해 깨끗이 된다”45)고 말한다.
칼빈은 온전한 복음은 회개와 죄의 용서라는 이 두 가지 표제 아래 포함된다고 말한다. 칼빈은 그렇다면 “주님께서 자신의 소유된 사람들을 그분의 성령의 성화를 통해 참된 의로 회복시키기 위해 은혜로 그들을 의롭다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않는가?”46)라고 반문하므로 칭의의 목적이 성령의 성화를 통한 참된 의의 회복임을 보여준다.
칼빈은 두 번째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말의 의미는 고의적으로 불경건한 태도를 보이고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거부하는 자들이 다시 되돌아올 기회를 상실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고의적인 불경건으로 성령의 빛을 질식시키고 하늘에 속한 은사의 맛을 울컥 토해내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성령의 성화로부터 잘라내고 하나님의 말씀과 오는 세대의 능력들을 짓밟을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47)고 말하므로 유기된 자가 구원을 저버리는 보편적인 반역을 보여주는 불경건 중의 하나가 스스로 성령의 성화로부터 자신을 잘라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로마교회의 스콜라 신학자들이 잘못된 회개를 가르치는 대표적인 사례로 고해성사와 면죄부를 지적한다. 칼빈은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 안에서 또 다른 구매 값을 확립한다. ‘단 한 번의 드려짐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 오셨다’(히 10:14)”48)는 말씀을 인용한다. 계속해서 칼빈은 “면죄부는 그 밖의 다른 것으로는 불충분한 성화는 순교자들에 의해 완전하게 된다고 선언한다. 요한은 ‘모든 성도가 어린 양의 피로 … 자신들의 옷을 세탁했다’(계 7:14)고 말한다”49)고 말하므로 로마 가톨릭주의의 잘못된 성화론을 비판한다.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권위 있는 사람들이 순교자의 피 즉 공로로 죄 용서 받는다는 가톨릭주의의 교리를 반박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그들이 잘못된 교리를 통해 순교자들의 아까운 피를 그리스도의 피와 섞는다고 비난한다. 칼빈은 “이런 교리는 그리스도를 여럿 가운데 거의 구분될 수 없는 또 다른 통상적인 작은 성인(saintlet)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께 오로지 이름만 남겨놓는 것 외에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이어서 칼빈은 “그분, 오직 그분만이 선포될 가치가 있고 오직 그분만이 세우심 받고 오직 그분만이 이름이 불리고 죄의 용서와 속죄와 성화를 얻는 문제가 존재할 때 오직 그분만이 바라다보였다”50)고 답한다.
2. 성화와 율법과의 관계
칼빈은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주고 각 사람에게 불의함을 경고하고 알리고 깨닫게 하고 정죄한다”51)고 말하므로 율법의 첫 번째 기능을 말한다. 또한 율법의 정죄의 기능이 우리를 절망 속으로 내몰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설명한다. 그 뿐만 아니라 칼빈은 공공 단체의 안정된 질서유지와 보호를 위해 율법이 주어졌다52)고 말하므로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을 말한다. 칼빈은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조차 그들이 부름받기 전에 그리고 그들이 성화의 영이 없는 동안에(롬 1:4), 그들이 육체의 어리석음 안에서 제멋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한에서는 이러한 보호감독(tutelage)을 견디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53)라고 말하므로 중생 이전이라서 성화의 영이 없는 택자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유익하다고 지적한다.
칼빈은 “참된 경건의 특징”과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도덕법54) 특히 십계명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는 출 31:1355)의 말씀을 인용하며, 에스겔 20:12의 해설로서 “에스겔은 영원한 표징을 여전히 보다 더 충분히 표현하지만 에스겔의 진술의 개략은 이와 같다. 즉 안식일은 하나의 표징(sign)이며 이스라엘은 그 표징에 의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거룩하게 하는 분(sanctifier)이라고 인정할 것이다”56)라고 말한다. 또한 “만일 우리의 성화가 우리 자신의 의지를 억제하는데 있다면 그렇다면 매우 밀접한 일치가 외적인 표징(sign)과 내적인 실체(reality) 사이에 나타난다”57)고 결론짓는다. 칼빈은 여기서 안식일은 표징으로서 “영적 안식의 예표”58)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심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그 백성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간음하지 말라”(출 20:14)는 일곱째 계명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주께서는 자신이 결혼제도를 제정하셨을 때 이 문제 안에서 우리에게 충분히 준비해 두셨으며 그분의 권위로 시작된 결혼의 교제를 또한 자신의 축복을 통해 거룩하게 하셨다”59)고 말하므로 하나님께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셨다고 말한다. 칼빈은 성화론을 다룬 이후에 4권에서 성화의 도구로서의 가정을 별도의 주제로 다룬다. 칼빈이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에서 결혼제도를 다루는 것은 칼빈이 가정의 성화 즉 하나님께서 거룩한 경계를 두시므로 그 울타리를 통해 가정을 보호하시기를 원하신다고 본 것 같다.
3. 성화와 선행의 관계
칼빈은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공로에 대한 생각을 빼앗아버린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선을 행하려는 욕구로부터 떠나도록 유혹받을 것”60)이라는 반론을 반박한다. 즉 칼빈은 칭의 교리가 사람들의 선행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반론에 “우리는 불결함으로 부름받지 않았고 단지 거룩함으로 부름받았다(살전 4:7). 왜냐하면 우리가 불법적인 욕망들로부터 삼가는 이것 즉 우리의 성화가 하나님의 뜻이기(살전 4:3) 때문이다”61)라고 답변한다. 칼빈은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하라’(요일 3:3)는 요한의 말을 들을 때보다 거룩에 대해 보다 더 강력하게 소환될 수 있을까?”62)하고 질문한다.
칼빈은 고넬료를 사례로 들어 여전히 선행을 통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반박한다. 칼빈은 그들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 의를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라는 베드로의 말과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었다”(행 10:31)는 천사의 말을 근거로 선행의 열심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칼빈은 “이미 고넬료는 사실 지혜의 영에 의해 조명을 받았다. 왜냐하면 고넬료는 참된 지혜 즉 하나님께 대한 경외로 옷 입혀졌기 때문이다. 고넬료는 동일한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고넬료는 사도가 성령의 가장 확실한 열매(갈 5:5)라고 가르친 의를 준수하는 자였기 때문이다”63)라고 말한다.
4. 성화와 보상의 관계
칼빈은 보상의 약속과 관련하여 “마치 우리의 행위들이 이와 같은 보상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행위들의 가치를 인정하신다고 생각하지 말자”고 한다. 칼빈은 영생을 보상이하고 부른다고 말한다. 칼빈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하늘나라의 영광에 접근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사람들이 그 나라의 폭로로 인도받는 길이라고 간주한다면 어떤 것도 부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롬 8:30)은 하나님의 선하신 즐거움이기 때문이다”64)라고 말한다. 칼빈은 보상을 바라고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화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선행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5. 성화와 기도의 관계
칼빈은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또한 기도하는 것이 다방면에서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65)고 말한다. 칼빈은 주기도문의 첫 항을 해설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게 하소서’(마 6:9; 눅 11:2)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말하자면 그 성화를 추구하여 열심히 굶주려하고 목말라해야 한다”66)고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이름의 구별됨이 우리의 기도에서는 우리의 성화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칼빈은 성자들의 중보 교리를 반박한다. 칼빈은 “우리는 또한 중보의 직무에 적합한 것은 그리스도께만 고유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기도는 이 중보자께서 그 기도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67)고 말한다. 칼빈은 기도의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즉 칼빈은 우리의 기도는 본래 속될 수밖에 없으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해 거룩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칼빈은 “바울에게 있어서 바울이 그것들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된다’(딤전 4:5)고 증거할 때 동시에 말씀과 기도 없이는 그것들이 결코 우리에게 거룩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고 암시한다”68)고 말한다. 여기서도 칼빈은 개인의 기도가 말씀 곧 믿음과 기도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살아간다고 말하는 것 같다.
6.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관계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루면서 자유를 칭의의 부록69)이라고 부른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로 “신자들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칭의의 확증을 추구하는 중에 모든 율법의 의를 잊고 율법을 넘어서 위로 올라가고 전진해야 한다”70)고 말한다. 칼빈은 율법의 실천을 통한 의를 추구하지 않고 율법을 뛰어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말하는 것 같다. 칼빈은 두 번째로 “양심이 율법의 필연성에 의해 강제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71)라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일종의 경건의 실천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화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살전 4:7; cf. 엡 1:4; 살전 4:3)”72)라고 말한다. 칼빈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경건의 실천을 통해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세 번째로 칼빈은 “대수롭지 않은 외적인 일들”73)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사들의 관계를 다룬다. 칼빈은 “이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사들 중에 아무것도 감사함으로 받지 않지만 바울은 이 감사함으로 인해 오로지 모든 것들이 우리의 용도를 위해 거룩하게 된다(딤전 4:4-5)고 증거한다”74)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함으로 받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사들은 좋은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구별하여 사용하실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용을 위해 구별되이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7. 성화와 자기부정의 관계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자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을 떠올린다. 칼빈은 자기부정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언급하고는 이웃에 대한 합당한 태도와 이웃과 실질적인 소유물들을 나누는 실천을 지적한다. 칼빈은 “만일 하나님의 은사들이 오직 우리가 그 은사들을 그 은사의 작자(Author) 자신께 우리 손으로 드렸을 때 우리에게 거룩하게 된다면 이와 같은 헌신의 맛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타락한 남용임에 분명하다”75)고 말하므로 하나님의 모든 선물들이 거룩하게 되는 방식은 그 소유물들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을 부자로 만들 수 없으니 이웃과 나누므로 구별되게 사용된다고 말한다.
8. 성화와 안식과의 관계
칼빈은 6일 창조와 관련하여 “인간의 이성은 믿음의 순종에 순복하여 일곱째 날의 성별이 우리를 초대하는 그 평온함을 기르는 법을 배우기까지는 불평한다”76)고 말하므로 창조의 완성으로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을 지적한다. 이것은 성화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날들도 구별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E. 결론
칼빈은『기독교 강요』1-3권에서 “성화”와 “거룩하게 하다”라는 용어를 1권으로부터 4권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사용빈도를 늘려나가고 있다. 이것은 칼빈이 자신의 성화론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3권 14장 이후의 내용을 모두 성화와 관련지어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 같다. 특히 4권에서의 사용빈도수가 압도적인 것은 교회론과 성화론의 긴밀한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성화”와 “거룩하게 하다”라는 용어를 『기독교 강요』전체에 산재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성화론이 신학의 여러 주제들과 다방면에서 관련되어 있는 주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므로 성화론을 단독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관련주제들과 연계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많이 오해되거나 오류로 이해되기 쉽다는 것을 신학의 역사가 잘 보여준다.
칼빈은 성화를 중생과 함께 시작되며 칭의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선언적 칭의에만 중점을 두는 구원론 이해를 타파하고 칭의와 성화를 항상 함께 다루는 구원론을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칼빈은 성화라는 개념을 개인의 칭의와 성화의 범주를 넘어 교회 공동체의 성화, 가정과 국가 등의 기관의 성화에도 관심을 갖는 것 같다. 특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소환하신다면 모든 피조물이 성화의 차원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카이퍼의 영역주권 사상과 연계한다면 개인과 공동체의 성화뿐만 아니라 우주적 성화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하고 생각해 본다.
--------------------------------------------------------------------------------
1) III. 14. 1. 라틴어 1559년 최종판에는 “Quale initium iustificationis et continui progressus”라는 제목을 14장의 타이틀로 달아놓았다. 참고로 영문판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 ed. John T. McNeill,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4)과 한글판 존 칼빈,『기독교 강요』3하, 고영민, (서울: 기독교문사, 2009)에서는 14장 1-21절의 각 절마다 절별 제목들을 달아놓았으나 라틴어판에는 장별 제목들만 존재하고 절별 제목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2) III. 14. 4.
3) III. 14. 6.
4) III. 14. 7.
5) III. 14. 7.
6) III. 14. 8.
7) III. 14. 9.
8) I. 13. 13.
9) II. 13. 1.
10) II. 13. 1.
11) II. 13. 2.
12) II. 13. 4.
13) II. 13. 4.
14) II. 15. 6.
15) II. 15. 6.
16) II. 16. 16.
17) II. 17. 4.
18) II. 17. 6.
19) I. 13. 14.
20) III. 1. 1.
21) III. 1. 2.
22) II. 1. 7.
23) II. 2. 1.
24) II. 2. 12.
25) II. 2. 16.
26) II. 2. 16.
27) II. 5. 11.
28) II. 10. 2.
29) II. 11. 4.
30) II. 11. 4.
31) III. 11. 1.
32) III. 11. 6.
33) III. 11. 6.
34) III. 11. 12.
35) III. 11. 14.
36) III. 11. 15.
37) III. 16. 1.
38) III. 21. 5.
39) III. 21. 7.
40) III. 24. 8.
41) III. 1. 4.
42) III. 2. 2.
43) III. 2. 8.
44) III. 25. 7.
45) III. 3. 14.
46) III. 3. 19.
47) III. 3. 23.
48) III. 5. 2.
49) III. 5. 2.
50) III. 5. 3.
51) II. 7. 6.
52) II. 7. 10.
53) II. 7. 10.
54) II. 8. 1.
55) II. 8. 29.
56) II. 8. 29.
57) II. 8. 29.
58) II. 8. 29.
59) II. 8. 41.
60) III. 16. 2.
61) III. 16. 2.
62) III. 16. 2.
63) III. 17. 4.
64) III. 18. 4.
65) III. 20. 2.
66) III. 20. 6.
67) III. 20. 27.
68) III. 20. 28.
69) III. 19. 1.
70) III. 19. 2.
71) III. 19. 4.
72) III. 19. 2.
73) III. 19. 7.
74) III. 19. 8.
75) III. 7. 5.
76) I. 14. 2.
'칭의와 성화 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칼빈의 칭의론과 한국교회 / 강웅산 교수 (0) | 2016.09.10 |
---|---|
[스크랩] 제 9강 칼빈의 칭의론 (0) | 2016.09.06 |
[스크랩] 제 9강 칼빈의 칭의론 (0) | 2016.09.06 |
[스크랩] 칭의(의로다 하심)에 대한 이해 (0) | 2016.07.16 |
[스크랩] 칭의(의로다 하심)에 대한 이해 (0) | 2016.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