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성화 교실

[스크랩] 칼빈의 칭의론과 한국교회 / 강웅산 교수

류성련 2016. 9. 10. 00:18

출처 청교도 개혁신앙 | 주안에
원문 http://choys0000.blog.me/10188306603


칼빈의 칭의론과 한국교회 
조직신학개혁신학회 2009 봄학술세미나 강웅산 교수 발제 



칼 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며 개혁신학회(회장 김인환 목사)는 "칼빈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2009년 봄 학술 세미나'를 지난 3월 개최했다. 총신대학교에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는 모두 17명이 칼빈을 주제로 발제했다. 다음은 강웅산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조직신학)의 "칼빈의 칭의론과 한국교회" 발제 전문. 

I. 도입 


  흔히 한국교회는 칭의론은 잘 가르쳤는데 성화는 안 가르쳤다고 말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강한 반면, 삶 속에서 구원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지 않는 괘리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필자는 문제의 원인이 칭의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  한국교회가 이해하는 칭의 개념은 다분히 루터란적인 성향이 많다종교개혁의 큰 틀에서 보면, 루터나 칼빈이나 이신칭의를 말했다.  그러나 칼빈의 칭의개념은 루터의 칭의개념이 보이고 있는 취약점을 보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루터에게서의 취약점은 바로 오늘날의 현실적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성화가 약해되는 반율주의적(antinomian) 삶을 낳는데 반해, 칼빈의 칭의론은 구조적으로 그런 문제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이론적 근거는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틀 안에서 칭의론을, 크게는 구원론 전체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의 논지는 칼빈은 칭의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의 틀에서 설명하고 있음을 입증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신학적 의미(ramifications)로써,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서정(ordo salutis)의 일면이 아니라, 신학적 틀로써 구속사(historia salutis)와 연결시켜주는 방법론적 기능을 한다는 점에 그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칭의와 성화가 구분은 되나 분리되 않도록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의 실천적 의미는, 구원은 받았으나(칭의) 구원의 삶을 보이지(성화) 않은 일이 있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칼빈의 후예임을 차처하는 우리가 칼빈의 칭의론을 바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이 분명히 복음의 능력을 드러낼 것이다. 

  본 논문은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우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떻게 칼빈의 칭의론의 신학적 틀이 되는지 살펴보고, 그것에 근거하여 순서대로 그리스도의 의가 갖는 신학적 의미, 칭의와 믿음의 관계, 칭의와 삶의 관계를 살펴 볼 것이다.  특별히 본 논문은 한국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개진해 갈 것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칼빈의 입장에 근거하여 교회의 현실을 반추하는 작업을 겸할 것임을 서두에 밝혀 둔다. 


II. 칼빈의 칭의론의 신학적 구도 


A. 그리스도와의 연합 


  칼빈은, 크게 볼 때 구원론도 마찬가지이지만, 칭의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틀 안에서  설명하고 있음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그의 주석들과『기독교강요』를 보면, 여러 수사적 표현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가 얼마나 밀착된 관계인지 설명하고 있다.  “전적으로 그[그리스도]에게 적합한 언어가 머리와 지체 사이의 친밀한 교통의 결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또한 “머리와 지체가 함께 연합하는 것, 즉 우리 가슴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는 것, 즉 신비적 연합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써,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made ours)이 되심으로써, 그가 받으신 선물들을 우리가 공유하게 된다.”  칼빈이 연합을 통해서 강조하는 의미는 연합(unio) 속에서 교통(communio), 공유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러한 교통을 “놀라운 교통”(mirifica commutatio)라고도 하였다.  연합이 전제될 때, 그 안에서 칭의의 교통이 있는 것이다. 

  이 연합은, 칼빈의 구원론의 강한 특징으로써, 신비적 연합으로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이루시는 연합임을 칼빈은 강조한다.  “그[그리스도]는 오직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연합하신다.  같은 영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가 그의 지체가 되고, 우리를 자신 아래 두심으로써 우리가 그를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을 이루시는 성령이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칼빈은 간과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없이 성령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마찬가지로 성령 없이 그리스도만 받을 수 있다고 꿈꾸는 것도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것이다.  둘은 함께 믿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관계에 비례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으며, 그리고 그에게, 그 이유에서, 머무신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주 여호와의 신이 내가 임하셨다”(사 61:1, 눅4:18).  그러나 그리스도도 그의 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고 모든 능력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연합을 통해서 칼빈은 어떻게 그리스도와 성령이 우리의 구원에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며 관여하시는지 강조하는 내용이다.  즉, 연합을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이 칼빈 구원론의 강한 특징인데, 마찬가지로 칭의 개념도 같은 구도에서 설명된다.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그들[성도]의 유일한 소망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있음으로써, 값없이 의롭다 여겨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질 때 의롭게 여겨지는 것이다. 

  칼빈은 연합의 구도를 통해 구원을 설명하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구원서정(ordo salutis)을 직선적인 개념으로 이해했던 것과는 다르게, 구원체험에 대한 입체적이며,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이해를 가능케 한다.  그 증거가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이중은혜(duplex gratia)이다.  이중은혜라 함은, 하나는 연합 속에서 지속되는 생명의 교류의 결과인 변화(transformative)의 효과, 즉 성화를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합의 관계로 인해 달라진 신분상의 법정적(forensic) 효과, 즉 칭의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누리게 되는 은총, 은혜, 혜택, 또는 효과를 대표적으로 칭의와 성화로 압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칼빈은 이 이중은혜 중 어느 한 쪽을 더 또는 덜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는 것을 다른 것보다 먼저 강조하지도 않는다.  좀 더 기술적으로 말한다면, 구원서정(ordo salutis)의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교통을 총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구원의 사역(구원론)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기독론)과 접목되는 것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히 구원서정의 한 국면이 아니라, 구원서정 전체를 묵는 하나의 틀(framework) 또는 방법론이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어야 할 부분이다.  칭의 다음에 성화가 오는 식의 설명은,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데로, 심각한 삶의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칭의에 대한 확신이 강한 반면, 성화의 삶이 따르지 못하는 것은, 단적으로 지적하면, 칼빈주의보다는 루터란에 더 가깝다.  어떻게, 어떤 방법론에 의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냐는, 흔히 “예수천당!” 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화하고 도식화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 한국교회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어야 할 부분은,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정말로 칼빈의 후예라고 생각한다면, 칼빈의 방법론이다.  칼빈의 방법론-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떤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B.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갖는 구원론적-구속사적 의미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은 구원론(ordo salutis)이 구속사(historia salutis)와 매우 밀착된 관계에서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특별히 그의 기독교강요 제3권에서 성령의 사역의 논의를 그가 어떤 정서에서 시작하고 있는지 보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칼빈이 여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in-Christ)” 개념이 앞으로 개진해 나갈 구원론의 내용의 중요한 방법론이요, 구조요, 틀이라는 강조가 우선되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연합 외에도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적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이 때 제2위와 제3위 하나님의 관계는 구속사적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칼빈의 구원론은 좁게는 구속사 틀을, 넓게는 삼위일체 구도를 배경하고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위일체를 배경으로 한 구속사가 객관적(objective) 근거가 되어 개개인에게까지 그리스도의 구원은총이 임하는 주관적(subjective)/개별적 적용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접목되기 어려운 이 두 차원의 것을 연결시켜 준다.  객관적 사건과 주관적 체험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구속사와 구원서정이, 2000년 전의 일이 현재 나의 일로, 연결이 가능한 것은 하나의 가상이나 간주가 아니다. 

  칼빈은 이 별개의 차원의 것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연결시키고 있다.  구원서정적 측면에서 볼 때, 흔히 성령이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중생의 결과로 믿음을 주셔서 믿음의 반응으로 칭의되고 성화되어 영화에 들어 간다고 말한다.  틀린 설명은 아니겠지만, 이런 접근방법은 다분히 2차원적(two-dimensional) 설명이다.  17세기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 이후,  개혁주의 전통은 왕왕 구원서정의 문제를 2차원의 구도에 놓고 논리의 선후관계와 그 정교성을 추구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성경의 내용이 지나치게 단순화, 또는 확대 해석이 되는 경향이 생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적 논리체계가 논의의 동력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다분히 구원서정 가운데 한 면만 강조되거나, 구원체험의 주관화 또는 내면화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사실이다.  신학의 정교함을 추구하다보니 칭의와 성화를 예리하게 나누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역동적 삶은 상실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복음제시의 방법론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칼빈은 이 문제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극복해 나가고 있다.  구원서정의 문제가 지엽적 논의로 빠지지 않고, 항상 구속사의 객관적 근거와 일관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후대의 구원서정 논의가 잃어버렸던, 역사성의 차원을 살리고 있다.  이것은 구속사적-언약사적 역동성이 살아난다는 의미이다.  구속사적-언약사적 측면에서 성도의 구원(칭의)가 갖는 생명력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구원(칭의)의 구속사적 근거와 구원서정의 의미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for)” 하신 것이 우리 “안에(in)” 가져다 진다.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역이 우리에게 “주관적” 차원에 적용된다.  “절대적(absolute)”인 복음이 우리의 반응을 묻는 “조건적(conditional)” 성격을 띤다.  “일방적(unilateral)”으로 완성된 구원이 “쌍방적(bilateral)” 모습으로 낮아지셨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칭의(구원)의 논의를 평평한 2차원의 그림이 아니라 살아있는 3차원의 것이 되게 한 것이다.  연합을 통해서 역사성을 회복할 때, 구원의 삶에도 생명력을 되찾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구원의 소식(ordo salutis)을 전할 때, 그리스도와의 연결 고리를 상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건(historia salutis)을 전할 때, 구원의 일이 진행될 것이다 (눅 24:44이하). 

C. 실재적 영적 연합 


  우리에게 주어지는 다음 질문은, 연합의 특성에 관한 질문이다.  성부가 그리스도에게 부활을 통해 부여하신 구원의 완성(redemption accomplished)이 어떻게 우리의 것(redemption applied)이 되느냐이다.  즉 이 질문의 답으로써 칼빈은 실제적이며 영적인 연합을 제시하고 있다.  “강조컨대, 그리스도를 취한다는 의미는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희생이 되심을 믿는 것 만으로가 아니라, 그가 우리 안에 거할 때, 즉 그가 우리와 하나가 될 때, 우리가 그의 몸의 지체가 될 때 (엡 5:30), 구체적으로 우리가 그와 더불어 한 생명과 한 몸(본체)으로 일체될 때(incorporated with him into one life and substance),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실제”(real) 또는 “본질”(substance) 용어를 종종 사용한다.  칼빈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연합이 상징 또는 가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한 몸이 되는 일체됨에 그 의미가 있다는 강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연합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적 연합이면서 동시에 실제로 하나라는 사실적 의미를 갖는다.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단순히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사이의 친밀한 관계 같은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는 생명과 본질을 나누는 심오한 교통이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같은 사상이 칼빈의 에베소서 5:31 주석에 강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칼빈이 말하는 실제적, 사실적 의미의 연합을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존재론적 혼합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 점에 대해서 이미 칼빈은 루터란 신학자 안드레 오시엔더(Andrea Osiander)와의 논쟁을 통해 분명히 한 바 있다.  오시엔더는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에 “본질적 의”(essenatial righteousness)의 교류를 말하며, 신성에 속한 의가 존재론적으로 교류로 되는 것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칼빈이 강조하는 실제 또는 사실적 의미는 오시엔더의 신적 속성의 투입과는 다른 “신비적” 연합이라는 말로도 표기된다.  이때 그가 사용하는 “신비적”의 의미는 불가지론적 의미에서의 신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익숙치 않은 실제 연합이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신비라는 의미를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성령이 하시는 이 연합을 이성이 아닌 믿음만이 수용할 수 있다는 강조를 하는 것이다.  신비적이지만 분명히 실제이고 사실인 연합은 이미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서 확인된 바 있다.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아무리 이성이 수용하기 어려운 신비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연합은 사실이고 실제의 연합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연합이 실제의 연합인 것은 성령에 의한 영적이며 신비적인 연합이기에 가능하다.  “영적”이나 “신비”는 단순히 상징이나 수사가 아니다.  칼빈에게는 “실제”(real)와 “영적”(spiritual) 이라는 말은 동일한 사실(reality)을 지칭하는 것이 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언약적 실제(covenaltal reality)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언약의 실제라는 의미를 칼빈은 너무도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 됨으로써, 우리가 그가 받은 선물들을 공유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의미에서 수용하고 있는가?  과연 그 연합을 실제의 사실의 것으로 믿는가, 아니면 수사적 강조라고만 생각하는가?  때로는 연합을 강조하는 것이 오해를 받게 되지나 않을까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러한 현실이 안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칼빈이 말한 연합의 의미를 그대로 전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칼빈처럼, 그리스도를 “나의 것”이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스스로를 칼빈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복음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를 다시 회복하는 것은 약해져가는 강단사역을 회복하는 첩경이라 생각한다. 

  칼빈의 칭의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을 살펴 보았다.  칼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의도하는 구속사적, 언약신학적, 기독론적 완성의 의미를 전제하며 칭의의 개념에 들어가고자 한다.  


III. 칭의 개념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A. 칭의의 정의 


  칼빈의 칭의 개념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칼빈은 칭의의 궁극적인 의미는 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며 용납하시는 데 있다고 본다.  심판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칭의가 복음인 것이다.  성도의 칭의에 대해, 칼빈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1)죄가 사해지고 (2)의롭게 여겨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칼빈은 칭의를 (1)법정적 개념으로, 그리고 (2)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결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칼빈은 우선 칭의 개념이 법정적(forensic) 개념임을 분명히 한다.  법정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칼빈은 우리가 논하는 의의 기준은 인간 법정이 아닌 하늘의 법정임을 상기시키며, 그 하늘의 법정에 대해서는 우리의 상상에 맞기지 않고 성경에서 찾도록 하였다.  『강요』 3:11:3에서 칼빈이 성경의 칭의 단어들의 용례를 열거하는 것을 보면, 누가 7:29에서 칭의 동사(dikaio,w)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했고, 7:35은 추상명사인 지혜를, 16:15에서는 바리세인을 18:14에서는 세리를, 즉 사람에게 쓰임을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칼빈은 왕상 1:21의 예를 들며 정죄의 개념이 칭의의 반대 개념으로 역시 법정적 개념임도 밝히고 있다.  칭의를 논함에 앞서 칼빈의 강조는 우선 법정적 개념에 있다.  특별히 임박한 심판이 있고 그 심판이 사실이기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칭의되는 것만이 구원이고 복음인 것이다.  
  
  칭의가 인간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이라는 강조는 상대적으로 칼빈이 얼마나 인간의 의를 부정하고 있는지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심판대 앞에서 인간의 의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욱 보잘 것이 없다.  “인간의 모든 의를 모아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더라도 단 하나의 죄도 보상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만큼 공로가 될 만한 뭔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게 자신의 의를 추구하는데서 나오는 교만함이다.”  결국 인간의 의와 그리스도의 의는 대칭적 구도에 있으므로, 칼빈이 볼 때, 인간의 의를 강조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삭감하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해 의롭다 여김을 받을만한 근거가 없는 인간은 자신의 의가 아닌 타자의 의, 즉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되어야 하는 필요성이 성립된다.  여기에서 루터 이후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의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타자의 의, 또는 외부의 의(iustitia aliena)로 불러 왔다.  칼빈도 그리스도의 의를 루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와 구분하는 점에서는 공통되는 바가 있지만, 그러나, 루터를 능가하는 데가 있다.  칼빈은 루터와 달리 그리스도의 의가 연합을 통해서 나의 것이 됨을 강조한다.  이것은 칼빈의 신학의 틀이 되는 언약사상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써, 나와 구분되는 그리스도의 의가 연합을 통해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이 칼빈이 루터와 다른 점이며, 칼빈의 칭의론 이해에 있어 중요한 특징이 된다. 
  
  내용상으로는 분명히 칼빈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근거하여 죄인이 칭의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정의하는 부분에서 칼빈은 다소 모호하게 보여 오해될 소지가 있다.  『강요』 3:11:2에서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자로서 당신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그 자체”라고 하면서, 바로 이어 칭의가 “죄 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이루어졌다” (justification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고 말하고 있다.  어떤 때는 칭의를 단지 “죄 사함”으로 단정하기도 한다.  첫 번째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칼빈 이후 개혁신학은 칭의를 죄 사함만으로 보는 것을 정당한 복음 제시로 보지 않는 부분이다.  특별히 17세기 프란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과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칭의를 죄 사함으로만 말하는 무리들을 심하게 정죄한 바 있다.  에드워즈의 경우 칭의를 의인됨의 의미를 간과한 채, 죄 사함만을 말하는 것은 알미니안 신학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우리의 죄를 사해 준 것 뿐이고, 이제는 우리가 자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다.  둘째 오해의 소지는 칼빈이 칭의의 근거로 의의 전가를 들고 있는 것이 분명하면서도 칭의의 결과로 죄 사함과 의의 전가를 말하는 점이다.  논리적으로, 근거가 동시에 결과가 되는 셈이니 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칼빈의 칭의 개념 전체를 살펴 볼 때, 그리스도의 의가 칭의의 근거인 것은 분명하고 일관되다.  칼빈을 직접 인용하면, 


  Therefore, 'to justify' means that nothing else than to acquit of guilt him who was accused, as if his innocence were confirmed.  Therefore, since God justifies us by the intercession of Christ, he absolves us not by the confirmation of our own innocence but by 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 so that we who are not righteous in ourselves may be reckoned as such in Christ. 

  비록 칼빈이 우선적으로 칭의란 죄 사함이라고 말하긴 하였지만, 그 근거로 “그리스도의 중재로”(by the intercession of Christ)라는 말과 “그리스도의 의로”(by 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라는 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여겨진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전제하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칼빈이 칭의의 결과로 의의 전가를 열거했던 것은 의의 전가가 칭의의 근거임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칼빈의 전체적인 문맥은 의의 전가의 결과로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이 분명하다.  칼빈이 어떤 때는 “죄 사함”만을 언급하는 것도 “의인 됨”을 간과한 것이 아니라, 그 둘을 뗄 수 없는 관계에서 특히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의 전가)을 전제할 때 가능한 말임을 우리는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그래서 투레틴에 이르러 보다 더 명시적이 된다.  투레틴은 칭의의 의미를 사함(absolution)과 양자(adoption)됨으로 설명하였으며, 그 특징은 에드워즈에게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 본 논문의 결론은, 칼빈-투레틴-에드워즈 그리고 그 후 핫지 등으로 이어지는 개혁신학의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칼빈의 설명은 강조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개혁주의 칭의론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칭의를 소극적 측면에서 죄 사함과 적극적 측면에서 의인 됨을 동시에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크리스찬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죄만 사해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인되게 하셨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살아나셔서 우리를 위해 의가 되셨다.  예수 안에 있음으로 의인이라는 강조가 절실히 필요하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사하셨으니 우리가 의인이 됐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제 삶 속에서 스스로 의인임을 입증해야만 의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율법을 완성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의가 되어 주신 것이다.  칭의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의는 바로 이 의이다.  칼빈을 비롯 그의 후예들은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의인이라는 강조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교회는 대사회적 기능, 즉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실할 것은 자명하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칭의의 근거가 되기 위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려 한다. 

B. 그리스도의 의: 구속사적 의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칭의의 근거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어떤 의미를 갖기에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이 말을 뒤집으면, 칭의의 죄 사함과 의인 됨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는 것인가?  그것은,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의가 구속사적 의미(redemptive-historical significance)를 갖기 때문이다. 

  앞서 이미 말했듯이, 칼빈이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만이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을 통해서 설 수 있다.”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의 의만이 필요한 것은, 칼빈이 볼 때, 그리스도의 의가 구속사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즉 구속사의 완성의 의미를 함축하는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approved)될 수 있는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 우리를 위한 의와 생명이 있기 때문임”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즉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구속의 일을 성취하시고 우리를 위해 사신(purchse) 것이 바로 이 “의”이고 “생명”이라는 말이다.  이 의와 생명이 우리에게 전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의 중보를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칭의된다.  이 말은 사람이 스스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칼빈이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우리를 위해 구원의 가능성만을 확보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가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의를 얻도록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의가 되시기(고전 1:30) 위해 보내지신 것이다.”  “고로 당신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접붙이는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하늘의 상속자, 의에 참여자, 생명의 소유자가 된다 . . . 당신은 공로를 획득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갖게 되는데, 그 모든 것이 당신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구속사역을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공로가 의로 설명되고 있으며, 그 의의 범위는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하신 모든 사역-고난과 부활-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육을 입으시고 중보자 되심의 의미에 대해 칼빈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의가 되셨다는 말로 압축하고 있다. 

  육으로 우리를 아버지께 화해시키시며 우리에게 의를 주신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자신이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그렇지 않고서야, 중보자의 사명들이 그에게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 . . 만약 이것이 신성에 속한 일이라면, 그 의는 삼위간 상호의 의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의 일이 아니라 성부 성령도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 .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의가 되게 하셨다. . . . 이것은, 비록 신성적 의미를 베제할 수 없지만, 분명히 중보자에게만 국한 된 일이며, 바로 그 고유의 기능 때문에 중보자가 성부와 성령과 구분되는 것이다. 

  성자가 육신을 입은 것은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구분되는 일이다.  우리를 위해 중보자가 되는 그리스도가 하신 모든 일을 칼빈은 우리를 위해 의가 되셨다(고전 1:30)는 말로 압축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구속사적 의미를 종합하는 말로써, 우리에게 중보자가 필요한 모든 의미가 “의”라는 말로 함축된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가 구속사적 완성 즉 객관적 성취의 의미를 갖는 것은 주관적 차원에서 개별적 적용의 근거가 된다.  즉 칼빈은 개인의 칭의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헤르만 바빙크도 칼빈의 바로 이 점, 즉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사역이 칭의라는 주관적 적용의 근거가 됨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스도가 신인(Deus-homo)으로 오신 것은 바로 이 점을 가능케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칼빈이 이해하는 기독론과 구원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속죄의 희생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된다. . . . 이 이유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을 위해 사신 의와 구원을 확증하셨을 때, 그는 그의 육체로써 분명한 담보가 되셨다. . . . 하나님은 당신 안에 감춰있고 알 수 없었을 것을 중보자를 통해 기꺼이 드러내셨다.  고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열려 있는 샘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안 그랬다면 그 깊고 비밀스런 샘에 갇혀 무익할 뻔 했던 것을, 즉 중보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을, 우리는 들이키게 된다.  이런 방법과 의미에서 나는 신-인으로서 오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칭의하시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칼빈은 중보자가 신-인으로 오셔야 하는 것은 그래야 우리를 위해 구속의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구속의 일을 통해 세워진 그 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전가될 때,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여겨지게 되는 것이 칼빈의 이해이다.  칼빈은 주관적 차원에서의 칭의를 객관적 차원의 구속사적 의와 너무나도 잘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의 인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인성을 통해서, 물론 신성과 한 순간이라도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전제하며, 이루신 사역의 의미를 충분히 세울 때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심을 이해할 수 있다.  칼빈은 이 점에 대해 소극적이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C. 의의 전가 


  칼빈이 의의 전가를 말할 때, 우선적으로 구별되어야 할 것이 전가의 개념이 투입(infusion)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뿐만 아니라 루터란 신학과도 칼빈의 전가개념이 구분되는 특징이다.  전가의 개념을 분명히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칭의와 성화의 구분을 분명히 하는 것과 직결되며, 결국 종교개혁의 의미와 직결되는 것으로, 복음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기에 칼빈이 어떻게 전가의 개념을 이해하는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중요하다. 

 의의 전가가 의의 투입이 아닌 것은 전가된 의가 피터 롬바드(Peter Lombard)가 말하는 생성된 은혜(created grace)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름을 칼빈은 지적한 바 있다.  롬바드에 의하면, 칼빈은 지적하길, 칭의는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우선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칭의하는데, 이 때, 우리 안에 사랑이 일어나 우리를 의롭게 만들고, 둘째, 그 사랑을 통해 점차 죄가 제거된다는 것이다.  칼빈이 롬바드에게서 문제를 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구속사적 의로써 단회적 전가를 통해 우리의 신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내면적 속성으로 지속적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이해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단번에 의가 되신 것으로 충분치 못하고, 지속적인 근거가 되어야 하는 부담이 남는 것이다.  칼빈은 롬바드의 그런 이해를 칭의를 성화로 오해하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다.  그래서 루터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의가 아닌 외부적 의(iustitia aliena)라고 하였던 것은, 그런 점에서, 적어도 의의 전가가 단회적 의미를 상실하고 내면화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루터의 나름대로 순수한 의도를 모든 루터란 신학자들이 이해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루터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의와 구분하는 면에서는 잘 하였지만, 칼빈처럼 언약 구도에서 보지 못하는 약점이 있음을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아마도 이 점을 오시엔더는 나름대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 같다.  언약의 구도에서 볼 때, 구속사적 의가 머리와 몸의 관계인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전가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루터와 마찬가지로 오신엔더는 그렇게 보지 못했던 것이다.  대신 그는 의의 전가를 구속사적 의가 아닌 “본질적 의”(essential righteousness), 즉 신성의 의의 공유 또는 교류로 본 것이다.  의가 없는 죄인을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시엔더가 볼 때, “법적 허구”(legal fiction)였다.  즉 칭의가 사실성이 결여된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의가 교류되는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극복하려 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말하는 의의 전가는 신성의 교류를 통해 그 의가 내면화될 때, 사람이 신화됨으로써(deification)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고 있다.  결국 칼빈이 볼 때, 오시엔더의 전가의 개념은 존재론적 변화를 낳는 것으로 결국 법정적 칭의 개념을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이 말하는 전가의 가능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전가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언약신학적, 구속사적, 기독론-구원론적, 의미를 담고 있어, 바로 이 연합을 통해 구속의 객관적 완성이 개인의 주관적 구원의 체험으로 옮아가는 일이 가능케 된다고 앞서 말한바 있는데, 이것이 전가(imputation)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가 “법적 허구”가 아닌 것은 연합 속에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법정적 칭의는 전가를 통한 실제적 사실에 근거를 둔다는 말이다.  칼빈은 이 연합의 의미를 아무리 생생하게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만큼 사실적이며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성의 강조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내면적 의가 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가이제 사실적으로 실제적으로 우리의 의인 것은 연합 속에서 이 전가가 사실적이며 실제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가상이나 인지적 조작도 아니다.  칼빈의 강조가 매우 인상적이다. 

  Therefore, that joining together of Head and members, that indwelling of Christ in our hearts ? in short, that mystical union ? are accorded by us the highest degree of importance, so that Christ, having been made ours, makes us sharers with him in the gifts with which he has been endowed.  We do not, therefore, contemplate him outside ourselves from afar in order that his righteousness may be imputed to us but because we put on Christ and are engrafted into his body ? in short, because he deigns to make us one with him.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의미에 대해, 칼빈은 우리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덧입고 그의 몸에 접붙여졌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 그가 우리를 그와 더불어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 가운데는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사람들이 많다.  이 점에 대해 소극적일 때, 자신이 누리는 구원 자체에 대해 불명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찾지 못하는 구원은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구원의 객관적 완성의 의미를 확고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객관적 근거를 분명히 하지 못한 채, 내면의 주관적, 체험적, 신비적, 요소들을 추구하는 것은 건전한 구원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칼빈의 신학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이념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본질에 얼마나 충실하느냐의 문제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우리가 믿음으로 칭의되는 것을 어떻게 가능한 것으로 보는지 살펴보려 한다. 


IV. 칭의와 믿음의 관계 


A. 믿음과 연합 


  오직 믿음으로 칭의된다는 것은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교리이다.  루터는 로마서 3:28의 dikaiou/sqai pi,stei를 그의 독일어 성경에서 “gerecht werde . . . allein durch den Glauben”라고 번역하였다.  필립 멜랑톤도 Apology of the Augsburg Confessions에서 sola fide를 강조하였다.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칼빈의 특징은 오직 믿음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구도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믿음 그 자체가 칭의하는 힘을 갖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를 영접할 뿐이다.”  전가가 객관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와 연결시킨다면, 믿음은 주관적 차원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이신칭의 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믿음을 그리스도와의 연합하는 동작으로 본다는 점이다.  에베소서 3:17을 주석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것이 되었으며 . . . 멀리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듯하게 끌어안음으로써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가능케 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다.”  칼빈이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믿음으로 칭의된다고 할 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므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어 그 전가된 의에 근거하여 칭의되기 때문이다.  즉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의 것을 내 것으로 누리는 데는 믿음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즉 같은 맥락에서, 칭의는 오직 믿음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혹 믿음을 과대 해석하는 것을 경계한다.  “믿음의 역할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우리 것이 되게 한다. . . .[그러나] 믿음은 우리 안에 부어진 일종의 덕목이나 질로써 우리를 깨끗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결함을 받는 것이다.”  믿음의 강조가 자칫 우리의 내면적 성질의 것으로 투입(infusion)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루터란과 성찬 논쟁을 염두에 둔 문맥에서, 믿음을 아예 그리스도의 내주로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한 바 있다.  믿음이 연합을 이루지만 믿음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믿음의 강조가 흔히 성령의 강조로 연결 되어 정작 그리스도를 약화시키는 경향은 그 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배제하며 성령만 강조하는 식의 믿음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제까지의 말을 종합하면, 믿음이 우리를 칭의시키는 것은 믿음이 갖고 있는 어떤 힘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 즉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이 칼빈의 강조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그 의로 말미암아 성부 앞에서 의롭다 여겨지는 것이다.  칼빈이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만이 칭의의 근거가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 강조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즉 믿음의 강조는, 칼빈에게 있어서, 결국 그리스도의 의만이 칭의의 근거임에 대한 강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강조는 믿음의 도구성과 연결된다. 

B. 믿음의 도구성 


  웨스트민스터 신
앙고백도 믿음을 칭의의 유일한 도구라고 적고 있다.  그것은 신앙고백(Confession)이 칼빈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믿음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고, 유일하게 믿음으로만 우리가 하나님께 화해된다.”  칭의에 있어서 이처럼 믿음의 독특한 기능은, 칼빈에게는, 유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의를 얻게 하는 동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이 칭의한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이 어떤 가치가 있어 우리를 위해 의를 획득(merit)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거져 그리스도의 의를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도구(instrument)이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도구성의 의미는, 후대 논의처럼 칭의와 믿음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가 우리와 가장 가깝게 하는데 있다.  특별히 우리가 “거져” 그리스도의 것을 받는 데에 그 도구성의 의미가 있다.  즉 믿음은 기독론적 결과가 구원론적 효과가 되는데 가장 직결적이다.  믿음의 도구성은 구속사적(historia salutis) 완성이 구원서정적(ordo salutis) 적용이 되는 데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만(Christ alone)이 근거임을 강조하는 장치이다.  고로 칼빈에게 있어서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라는 말이다믿음의 도구성은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다른 어떤 것의 개입이나 중재도 없는 연합을 강조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는 것이 된다. 


  믿음의 도구성은, 칼빈에게 있어서, 조건성으로 표현된다.  즉 “믿음으로(by faith)”는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참여 구도를 나타나는데, 칼빈의 경우,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구도 또는 언약관계를 반영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하면,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그 관계를 절대적(absolute) 또는 일방적(unilateral)이라고 한다.  그러나 칭의는 인간이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관점에서 말하면, 조건적(conditional) 또는 쌍방적(bilateral/mutual)이라고 한다.  절대적-일방적 측면은 구속사적 측면을 보다 더 반영한다고 할 수 있는 반면, 조건적-쌍방적 측면은 구원서정적 측면을 더 반영하고 있다.  즉 믿음은 양면을 연결시키는 기능을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결과에 대해 인간의 참여가 거부되지 않음을 보장하는 언약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말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져 주신 진리에 근거하는 것으로,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드러내시고 가슴에 확신케 하신 것이다.”  믿음의 사역은 성령에 속한 것이나, 믿음의 좌소는 우리 마음이고 가슴이다.  이 둘을 유지하는 것이 칼빈 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성령이 하시는 칭의의 일이 인간의 믿음을 배제하지 않는 것은 언약구도 때문인 것이다.  “믿음이 응하지 않고서는 언약이 세워진 것이 아니다.”  

  “믿음은 성령의 대표적인 일”이라고 말할 때, 칼빈은 다분히 은혜의 절대적-일방적 측면을 우선 의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칼빈도 왜 믿음이 마치 칭의의 원인인 것처럼 특별한 취급을 받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한 적이 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적 용어로 답을 하긴 하지만, 그의 강조가 어디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칼빈은 믿음이 단지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일 뿐임을 강조하였다.  주된 원인(principal cause)은 하나님의 우리를 값없이 용납하시는 자비하심 뿐이다.  칭의됨이 어떤 내면적 질(quality)이나 상(reward)도 아니요 단지 믿음으로 거져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칼빈은 이신칭의 자체가 얼마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강조하는 구도인지를 역설하였다.  

  믿음의 도구성의 의미는, 칼빈에게 있어서, 결국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 성령의 초자연적 교통에 칭의의 확실성을 두고 있음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땅 위에 있는 우리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가 연결되어, 하늘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작용이 있는 것이다.  고로 우리가 믿음으로 칭의 될 때, “우리는 이미 영생을 소유하였고, 소망가운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믿음은, 칼빈의 구도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단회적(once-and-for-all) 사역의 결과를 종말론적(already-and-not-yet) 구도에서 누릴 수 있게 하는 기능인 것이다. 

  오늘날 믿음에 대한 강조는 나무랄 수 없을 만큼이나 충분한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의 강조가 믿음의 대상을 붙잡는 것이 되지 못한 채, 믿음 자체만을 강조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믿음 자체를 강조하는 믿음은 맹신(blind faith)이고, 칼빈이 말하는 믿음과는 분명히 다르다.  칼빈이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강조는 바로 그리스도의 강조이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는 “오직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상실한 믿음의 강요는 그리스도를 상실한 종교성의 추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상실한 기독교는 힘을 상실한 종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칼빈이 “믿음으로”(by faith)를 강조한 것이 어떤 신학적 정교함이나, 내면적 체험추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추구한 것이었음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신칭의의 교리가 복음의 핵심이고, 종교개혁의 핵심이라는 것이, 그것이 구원의 삶의 전부라는 말은 아니다.  칭의와 성화는 분명히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고, 우리는 칼빈이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들을 필요가 있다. 


V. 칭의와 삶의 관계 


A. 율법과 복음 


  이신칭의 교리
를 지키느냐의 문제는, 한 마디로 압축하면, 믿음 속에 행위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막아내느냐의 문제이고, 결국 이것은 종교개혁을 지키느냐의 문제가 된다.  그 의미는 칼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칭의의 근거가 되는 의가 믿음에 의한 의이냐, 행위에 근거한 의냐에 따라, 칼빈은 전자를 “믿음의 의”(복음의 의) 후자를 “행위의 의”(율법의 의)라고 불렀다.  이 둘의 관계는 명백히 상호배타적(antithetical) 관계이다.  흔히 이 대조를 복음과 율법의 대조로 구분한다.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칼빈이 율법과 복음을 어떤 관계로 설명하는지 간략하나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칼 빈은 무엇보다도 율법과 복음의 대조를 구속사적 구도에서 이해하고 있다.  “무엇이 율법과 복음의 구분하는가?”  칼빈이 볼 때, 율법과 복음의 대비는 결국 각각이 제시하는 구속사적 약속의 차이에 있다.  전자는 의가 행위에 근거하는 율법의 약속이고, 후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는 복음의 약속이다.  결국 이것은 행위와 믿음의 대비로 대변된다. 

  The law, he says, is different from faith.  Why?  Because works are required for law righteousness.  Therefore it follows that they are not required for faith righteousness.  From this relation it is clear that those who are justified by faith are justified apart from the merit of works ? in fact, without the merit of works.  For faith receives that righteousness which the gospel bestows 

  칼빈에게 있어서, 율법의 의는 행위를 요구하는 반면, 믿음의 의는 행위의 공로를 배제한다는 차이가 율법과 복음의 구속사적 대비이다.  그리고 구속사적 차이는 행위칭의와 이신칭의라는 칭의의 방법론적 차이를 낳는다.  칼빈의 갈다디어서 3:11-12 주석을 참조하면, 칭의의 방법론적 차이가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행위에 의한 칭의와 믿음에 의한 칭의가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은 철저하게 구속사적 구분이 전제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율법과 복음의 대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볼 때, 한층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즉 율법의 사역과 복음의 사역의 구속사적 대비는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것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이 서로 밀접하게 같이 가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칼빈은 로마서 7:4 주석에서 그리스도의 속죄(atonement) 사역이 우리를 율법으로 자유롭게 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였다는 논리를 말하고 있다. 

  Christ, by the glorious victory of the cross, first triumphed over sin; and that he might do this, it was necessary that the handwriting, by which we were held bound, should be cancelled.  This handwriting was the law, which, while it continued in force, rendered us bound to serve sin; and hence it is called the power of sin.  It was then by canceling this handwriting that we were delivered through the body of Christ ? through his body as fixed to the cross. . . . Christ, in order to join us to his own body, made us free from the yoke of the law.  For though Christ subjected himself for a time of his own accord to the law, it is not yet right to say that the law ruled over him.  Moreover, he conveys to his own members the liberty which he himself possesses.  It is then no wonder that he exempts those from the yoke of the law, whom he unites by a sacred bond to himself, that they may be one body in him. 

  칼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본 것처럼, 언약구도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 언약구도의 진행이 바로 구속사이며, 이신칭의의 유효성은 바로 구속사적 구분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믿음에 행위를 희석시키는 것은 구속사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율법을 배제하는 것은, 칼빈은 분명히 율법의 의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 폐기된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완성해야만 하는 의는 이제 우리 죄인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우리의 한계를 아시고, 대신하여 율법을 충족시킴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연합할 때, 그 안에서 칭의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이 칼빈이 말하는 구원의 개념이다. 

  고로 칼빈으로부터 우리는 믿음 속에 행위의 개념을 희석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막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한다.  성화의 삶이 약한 이유를 칭의의 믿음(justifying faith)이 행위를 배제하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칭의의 믿음 속에서 행위를 말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그러나 믿음 속에, 어떤 모양으로라도, 행위를 포함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오직 믿음으로 칭의되는 것은 구속사의 신비이다.  성화의 삶을 칭의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성화로써 강조되어야만 마땅하다.  

B. 칭의와 성화의 관계 


  칼빈이 행위를 배제한 오직 믿음으로의 칭의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칭의의 삶은 성화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박국 2:2에 대해, 로마서 1:17도 마찬가지로, 루터 이래 많은 사람들이 칭의만을 강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말씀이 불경건하고 타락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즉 주님이 그들을 믿음으로 돌리시고 칭의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신자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즉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는 뜻이다”며, 칭의보다는 오히려 성화 쪽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행위는 분명히 칭의의 근거로써는 배제되지만, 행위가 배제된 칭의의 삶은 없다는 입장이다.  즉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분하면서도 칭의와 성화의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중요시여기고 있다. 

  무엇보다도, 기독론적 강조가 칼빈의 구원의 삶을 유기적 관계로 보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강요』 3:14:9에서 칼빈은 우선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케 되고 의롭게 여김(칭의)을 받았음을 분명히 하고는, 그러나 그 칭의가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면서 끼치는 다른 은총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죄에 대하여 죽고(mortification), 성화되고, 점점 율법에 순종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과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삶에서 칭의 하나만이 개별적 은총으로 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에서 어떤 구원서정의 순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하나의 유기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최종적 목표로 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칭의가 되셨을 뿐 아니라, 성화도 되셨다는 것이 칼빈이 강조하는 바다.  결국 믿음으로 칭의된다는 것은 성화를 배제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을 수 없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 모두를 누리는 것이다. 

  Why, then, are we justified by faith?  Because by faith we grasp Christ’s righteousness, by which alone we are reconciled to God.  Yet you could not grasp this without at the same time grasping sanctification also.  For he “is given unto us for righteousness, wisdom, sanctification, and redemption” [1 Cor. 1:30].  Therefore Christ justifies no one whom he does not at the same time sanctify.  These benefits are joined together by an everlasting and indissoluble bond, so that those whom he illumines by his wisdom, he redeems; those who he redeems, he justifies; those whom he justifies, he sanctifies. . . . Although we may distinguish them, Christ contains both of them inseparably in himself.  Do you wish, then, to attain righteousness in Christ?  You must first possess Christ; but you cannot possess him without being made partaker in his sanctification, because he cannot be divided into pieces [1 Cor. 1:13].  Since, therefore, it is solely by expending himself that the Lord gives us these benefits to enjoy, he bestows both of them at the same time, the one never without the other.  Thus it is clear how true it is that we are justified not without works yet not through works, since in our sharing in Christ, which justifies us, sanctification is just as much included as righteousness. 

  “우리가 행위로 칭의되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 없이 칭의되는 것은 아니다”는 칼빈의 말이 결코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위배하는 것이 아니다.  칭의를 강조하는 만큼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도 중요한 은총임을 잘 알고 있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이중 은혜라고 부르고 있다. 
Christ was given to us by God’s generosity, to be grasped that possessed by us in faith.  By partaking of him, we principally receive a double grace: namely, that being reconciled to God through Christ’s blamelessness, we may have in heaven instead of a Judge of gracious Father; and secondly, that sanctified by Christ’s spirit we may cultivate blamelessness and purity of life. 

  칭의와 성화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나 그 둘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칼빈이 이를 태양에 빗대어 한 말이 인상적이다.  “태양의 밝기를 그 열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면, 지구가 그 빛으로 데워지고 그 열로 밝아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칼빈을 통해서 칭의와 성화의 구분이 유지되는 가운데, 그러나 그 둘의 불가분적 관계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칭의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단회적 선언이라면, 성화는 하나님이 죄인을 지속적으로 거룩하게 변화시켜 나가는 일이다.  이 칭의와 성화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칼빈의 이해의 특징인 것이다.  다른 것 없이 하나만을 얘기하지 않는 것이 칼빈이 취하는 방법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처럼, 칭의를 강조하는 것이 성화의 삶을 배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고, 성화를 칭의 속에서 찾으려는 것도 잘못이다.  칭의는 우리의 신분의 변화와 관련있는 것이고, 성화는 우리의 상태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는 구분이 유지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가 성화가 약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구원제시에 커다란 결함이 있었다는 말이다.  칭의에 대해서는 확실한데 성화가 없다는 말은, 칼빈이 볼 때, 성립한다고 하기 어렵다.  칼빈에게는 성화없는 칭의는 없고, 칭의없는 성화도 있을 수 없다.  과연 우리는 칼빈에 더 가까운지 아니면 루터에 더 가까운지 겸허하게 집어볼 필요가 있다.  칼빈이 어떤 방법론으로 구원을 제시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방법을 따르려고 노력할 때에 비로소 칼빈주의가 되는 것이다. 

VI. 결론 


  이제까지 본 논문은 칼빈의 칭의론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틀에서 개진되고 있음을 입증하여 보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한 구원서정의 한 국면이 아닌, 칭의론을 개진해 나가는 방법론으로 작용함을 살펴보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특별히 구원서정이 구속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진행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즉 구원론과 기독론 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을 볼 수 있었고, 그 관계의 역동성은 언약신학의 구조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또한 성령의 구원서정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서 진행이 되는지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칭의론을 개진해 가는 큰 틀이며 방법론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칼빈이 칭의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틀을 통해 개진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큰 유익이 됨을 기회가 될 때마다 지적한 바 있다.  다시 그 말을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만, 본 논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칼빈의 방법론에 우리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단편적으로 칼빈을 좇겠다는 것은 무리가 따르고 성공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그러나 칼빈의 방법론,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충분히 숙지 한다면, 한국교회는 교인들의 삶과 관련하여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를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구원제시에 관하여 우리는 다른 대안을 제시할 별 여지가 없다.  적어도 다른 대안은 바른 복음제시가 아닌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칼빈을 따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는 부분적인 모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칼빈의 방법론에 일치하느냐에서 이미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제 글을 마치며, 칼빈주의라는 말이 더 이상 하나의 교권적 슬로건이 아니기를 희망한다.  실제로 칼빈의 방법론을 따르는 것만이 우리가 칼빈의 후예임을 입증할 것이다.  

강웅산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http://blog.naver.com/noemisuh/220084348769


출처 : 브니엘
글쓴이 : noemisuh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