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론을 제대로 알고 비판해주면 좋겠다.
칭의 교리가 경건한 삶에 방해가 된다? 이 논리는 바로 중세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에게 퍼부은 비난이었다. 칭의를 법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할 때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교인들을 방종과 나태에 빠지게 하는 무율법적인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가장 주력한 것이 칭의론이 이런 식으로 오해될 수 있는 여지를 철저히 차단하는 치밀한 논증을 펼친 것이었다. 한국교회에서 잘못 이해되고 가르쳐지는 칭의론이 마치 종교개혁의 칭의론인 것처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칼뱅은 칭의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이해했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이중적인 은혜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에서 뿐이지 우리의 경험에서는 아니다. 아무도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할 수 없다.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이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지체 없이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이는 동시에 반드시 거룩해진다. 그것은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칼뱅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화 없는 칭의로만 구원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믿음이 회개와 성화를 동반함 없이 칭의의 효력만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믿음은 행함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이 참되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칭의 뿐 아니라 성화까지 취하게 된다.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행위 없는 구원은 없다. 결론적으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되어”있으며 신앙생활 전 과정에 걸쳐 항상 함께한다.
칼뱅은 칭의론은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기보다 오히려 참된 경건의 유일한 바탕이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를 밝히 드러내며,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 감사와 찬양과 확신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우리를 죄책감에서 자유케 하며 감사하는 마음과 자원하는 심령으로 선을 행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칭의론은 경건의 참된 바탕과 다이내믹인 감사와 확신과 자유 함을 제공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비록 칭의가 종교개혁의 주요점이며 핵심교리이지만 그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니라 참된 경건의 바탕이며 출발점이다. 칼빈의 실제적 관심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이었다. 성결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와 열망이 그의 가르침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칼 바르트(Karl Barth)같은 신학자도 칼빈을 “성화의 신학자”라고 불렀다.
칭의 교리가 바르게 전파될 때마다 교회가 생명력으로 왕성해지고 건강하게 성장하고 부흥하였다. 개혁교회에서 칭의 교리는 구원 메시지의 심장이며 심오한 영성의 바탕이고 복음의 젖줄이며 고통당하는 양심의 위안이었다. 또한 칭의의 복음이 타락한 교회를 돌이키는 가장 강력한 은혜의 방편이며, 영적 회복의 바탕을 제공한다. 교회가 부흥할 때마다 다시 부활했던 메시지가 타락한 당신의 백성이 돌이키면 단번에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칭의의 복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흥을 고대하는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도 칭의의 복음이 부활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영적인 침체와 윤리적인 타락은 종교개혁이 정립한 칭의와 성화의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은데서 기인한다고 진단할 수 있다. 그럼에도 종교개혁의 칭의론 자체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어 한국교회에 윤리적인 해이와 방종을 불어왔다고 오진하는 것은 칭의론의 왜곡만큼이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진귀한 신앙의 유산이 그 진가도 모르는 이들에 의해 자칫 잘못하면 폐기처분 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에 만연한 잘못된 구원론이 얼마나 종교개혁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지조차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종교개혁의 유산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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