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교실

[스크랩] - 루이스 벌코프,『조직신학』

류성련 2017. 2. 15. 00:23











화체설, 공재설, 상징설, 그리고 영적임재설




성찬시에 임하는 성례적 연합 혹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의 문제- 이 문제와 더불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오랫동안 의견의 차이를 보여 왔고 지금도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문제에 접하게 된다. 표징과 표징이 의미하는 것의 관계 곧 성찬시의 그리스도의 임재의 성질의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본적이 없었다. 여기서 네 가지 견해를 다루어 보기로 하자.






1. 로마교회의 견해(transsubstantiatio).


로마 교회는 성례적 연합을 물질적 의미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의 성례적 연합 이론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 표현에 따르면, 적절한 의미의 연합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징은 의미하는 것과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길을 터주기 때문이다.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라” (hoc est corpus meum)는 예전문을 낭독할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로마 교회는 말한다. 물론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난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모양과 맛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들의 본질은 변할지라도 속성은 그대로 남는다.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인 몸과 피가 임재한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성찬 제정의 말씀과 요6:50이하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앞구절은 요14:6, 15:1, 10:9등과 같이 비유적인 표현임이 분명하며, 뒷구절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성찬을 먹는 자마다 하늘에 가지만 성찬을 먹지 못하는 자는 누구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53,54절) 로마 교회 자체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더욱이 63절은 분명히 영적인 해석을 지칭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떼신 떡을 그 떡을 다루는 몸과 동일시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해석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본질이 변화된 것으로 가정된 떡까지도 그대로 떡이라고 부른다(고전10:17,11:26-28). 이와 같은 로마 교회의 견해는 인간의 감각에도 맞지 않는다. 실체와 속성의 분리를 믿는 것과 물리적인 몸이 동시에 여러 곳에 임재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체를 높이고 숭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2. 루터파의 견해(consubstantiatio)


루터는 화체설(transsubstantiation)을 거부하고 그것을 공재설(consubstantiation)로 대체했다. 루터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남아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고 그 아래,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몸과 피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인격이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재한다고 한다.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성찬시에 장소적으로 임재(local presence)한다고 주장한다. 루터파는 때때로 자신들이 성찬시에 그리스도께서 장소적으로 임재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장소적(local)이라는 단어를 달리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본질이 장소적으로 임재한다는 말은 모든 다른 몸들이 같은 공간으로부터 배제된다는 뜻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디에나 있지 않다는 것, 예컨대 하늘에는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자성이 자석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하고 영혼이 육체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육체적 본질이 성찬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소위 입으로 먹는 것(manducatio oralis)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성찬시의 빵과 포도주에 참여하는 자들은 단순히 믿음을 통하여 주의 몸과 피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체의 입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이다. 합당하지 않은 자도 성찬을 받으나 그에게는 정죄밖에 안 된다. 이 견해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견해와 별반 다른 것이 없는 견해이다. 이 견해가 속성의 변화없는 본질의 변화의 반복적인 기적을 포함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속성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채 본질만이 변화하는 기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것이 내 몸에 동반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 더욱이 이 교리는 주의 영광스러운 인성이 편재한다는 불가능한 교리를 가르치게 되는데, 이 점은 루터파들도 부인하는 교리이다.






3. 츠빙글리의 견해


츠빙글리의 성찬론에는 아주 결함이 많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고, 이와 같은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성찬이란 하나의 표징 또는 상징으로서, 영적인 진리와 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상징들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의 표(badge)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이 스위스의 개혁자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가 한 말 가운데 일부는 그에게 있어서 성례란 단순한 기념의식으로서 신자들이 서약하는 표지와 상징일 뿐이라는 사상을 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는, 보다 깊은 성찬의 의미를 전달하고 성찬을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하시는 일에 대한 인 또는 보증(pledge)으로 간주하고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상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기의 생각을 조금씩 바꾸어 간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하여 그가 생각했던 내용을 정확히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가 성찬론에서 모든 반지성적인 신비주의를 제거하고, 소박하고 단순하게 성찬을 표현하려는 경향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종종 성찬은 단지 주의 죽으심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성찬은 인 또는 보증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 같은 생각을 충분히 전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성례에서 하나님이 보증하신 것보다는 신자들이 서약한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먹는 것과, 그를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을 동일시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성찬시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신자의 믿음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다만 그의 신성으로만, 그리고 성찬에 참여한 신자들의 이해에만 임재하실 뿐이다.








4. 개혁파의 견해(praesentia spiritualis sive virtualis)


칼빈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츠빙글리의 성찬론을 반대했다. (1) 이 견해는 성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을 희생시키면서 신자들의 행위를 강조한다. (2) 이 견해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을, 그의 이름을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칼빈에 의하면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의 사역 곧 (츠빙글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죽으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 사역 곧 영광 중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도 관계가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물론 육체적으로 그리고 장소적으로 성찬시에 임재 하시지는 않지만, 몸과 피를 포함하는 전인으로서 임재하시며 또한 향유된다고 말한다. 그는 신자들과 구주의 전인격과의 신비적인 연합을 강조한다. 그의 표현은 아주 명료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에 임재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만 장소적으로 임재할지라도, 신자가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 생명을 주는 감화를 그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 감화는 실재적인 것이면서도,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신비적이요, 성령을 매개로 하여 전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받는 믿음의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친교(communio)를 가능케 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수찬자가 믿음을 통하여 자신이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로 들어올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감화를 수찬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Dabney는 마치 수찬자가 성찬시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 자체를 받아 먹은 것처럼 말한 칼빈의 표현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것은 분명히 칼빈의 표현에서 애매한 부분이다. 어떤 때는 문자적인 의미의 육체적인 몸과 피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말은 성례적으로 곧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와 같은 칼빈의 견해는 우리의 신앙 고백서에서 발견된다(비교- 벨기에 신앙고백 35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5,76문;성찬집례모범). 이와 같은 칼빈의 교리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다만 실질적으로(virtually) 임재한다는 것이다. Hodge 박사의 말을 빌리면 “십자가에 달려 희생된 구주의 몸이 가져오는 덕과 효과는, 자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른 도구로서 성찬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합당한 수찬자에게 임하고 전달된다”.




- 루이스 벌코프,『조직신학』(서울:크리스찬다이제스트,2001),pp.915-8



출처 : 알프스의 눈동자. 데보라의 세계여행
글쓴이 : 알프스의 눈동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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