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
(The Relationship between Christ and the Church)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 머리와 몸, 목자와 양무리, 포도나무와 가지들, 모퉁이 돌과 돌들 등 상징적·영적으로 묘사했다.
Ⅰ. 신부로서의 교회(The Church as the Bride)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성도들)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묘사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Jesus Christ is the bridegroom of the church and the church is the bride of Jesus Christ)라고 하였다(고후 11:2 엡 5:23-32; 계 21:9;).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깊은 관계를 상징적, 비유적, 영적, 신비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이다. 진실로 교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들 중 하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호칭이다. 교회는 회심시(at conversion) 이미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으며, 또 한편 약혼녀도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고찰할 때에는 그리스도와 약혼한 관계이다.
1. 그리스도의 역할(Christ’s Role)
에베소서 5:22-29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성도들)를 어떻게 사랑하시며, 다스리시며, 정결케 하시며, 양육하시며, 보호하시는지를 교훈 한다.
(1)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Christ loves the church<엡 5:25, 28>)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기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① 아가페 사랑(avga,ph love): 사랑이란 애정에 대한 깊은 느낌·헌신·호의이다. 헬라어 원문에 아가페 사랑은 “필레오”(file,w) 사랑과 “에로스” (evrwj) 사랑과 구별되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사랑, 필레오 사랑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친구에 대한 사랑이요, 에로스 사랑은 이성간의 사랑을 말한다. 인간의 사랑은 필레오 사랑, 에로스 사랑을 넘지 못한다. 아가페 사랑은 순수한 사랑, 고귀한 사랑, 무조건적 사랑, 희생적 사랑, 구속적 사랑, 무한한 사랑을 다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가페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신다.
② 무조건적 사랑(unconditional love): 무조건적 사랑이란 조건 없는 사랑, 절대적 사랑(love without condition or absolute love)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성도들)가 사랑받을 만한 신분이나 자격이나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 실제상 교회는 세상과 짝하여 음행하고, 주님을 늘 배반하고, 불순종하며 곁길로 달음질치는 자들이었다(약 4:4). 그러한 우리들을 그렇게 사랑하시니 사람들의 사랑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③ 희생적 사랑(sacrificial love): 희생이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래함이니라”(마 20:28, 막 10:45)” “나는 선한 목자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느라”(요 10:11) 바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사랑이라고 하였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엡 5:2). 에베소서 5:25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셨다”, 곧 에가페센 카이 파레도켄(hvga,ph sen kai. pare,dwken; loved and gave)이라는 말씀은 부정과거 시상(aorist tense)으로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이미 바치신 사랑으로 역사적 기정 사실을 가리킨다.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이미 바치신 사랑은 희생적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폭넓은 이해와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참 사랑이다. 누구든지 사랑한다고 하면서 시간·재물·몸·정성 등을 바치지 않고 말로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참된 희생적 사랑이 아니다.
④ 구속적 사랑(redeeming love): 구속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구출·해방하는 것을 뜻한다. 구속에 있어서 대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생명이다(레 17:11).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심으로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신 구속적 사랑이시다. 죄인의 구속을 위한 주님의 근본 동기는 사랑이시다. 그 사랑의 역사가 죄인을 구속하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독특한 사랑이시다.
로마서 5: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15,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
⑤ 무한한 사랑(infinite love): 무한이란 끝이 없는(endless), 제한 없는(unlimited), 측량할 수 없는(unmeasurable)이라는 뜻이다. 주님의 사랑은 무한 방대하여 측량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엡 3:18-19 참조)고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정결케 하심
(Christ purifies the church(엡 5:26, 27>)
에베소서 5:26,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물”(water)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엡 5:26; 약 1:18; 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을 물이라고 비유한 이유는 물은 씻어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더럽고 추한 모든 죄를 씻어 깨끗케 하는(세탁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말씀”(레마, r`h/ma; word, saying; 말씀·구두로 전파한 말씀)은 산 음성(living voice)을 가리킨다(엡 6:17; 롬 10:8, 17; 벧전 1:25). 이 단어는 신약에 약 70회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56번은 말씀(word)으로, 9번은 구두로 전하는 말씀(saying)으로 번역되었다. 말씀이라는 또 다른 한 단어는 로고스(lo,goj; Word)로서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에는 레마로, 그 다음에는 로고스로 귀결되었다. 우리는 로고스(기록된 말씀)를 레마(구두로 전하는 말씀)로, 즉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씻는다”(루오, lou,w; to bathe, wash the body; 목욕하다, 몸 전체를 씻다)는 말씀은 몸 전체를 목욕한다는 의미이다. 몸의 어느 한 부분만 슬쩍 씻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한 마지막 간구 중의 하나는 “주의 말씀으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요 17:17)라는 말씀이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성화의 방편이 되어 우리의 먹보다도 더 검은 그리고 피보다 더 붉은 죄와 허물을 정결케 씻어 주신다.
“깨끗하게 한다”(카다리조, kaqari,zw; to cleanse, to make clean; 정결케 한다, 정화하다, 맑게 하다, 순결케 하다, 오염이 없게 하다)는 말씀은 도덕적 의미에서 “죄의 오염으로부터”(from the defilement of sin) 그리고 “범죄로부터”(from the guilt of sin) 정결케 씻는다는 말씀이다. 씻는다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죄사함을 가리킨다.(행 15:9; 고후 7:1; 엡 5:26; 히 9:14; 요일 1:7)
요한복음 1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모든 죄 사함받았다. 이는 마치 온 몸을 씻은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의 몸에는 아직도 죄의 성질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말씀으로 씻어 정결케 하는 일(성화의 역사)을 이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3)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양육하심(Christ nourishes the church)
에베소서 5:29,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양육하고 보호하시기를…”
“양육한다”(에크트레포, evktre,fw; to nourish; 양육하다, 자양분을 준다)는 말씀은 영양분 있는 음식을 공급하여 키운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양분이다. 주님은 우리를 항상 말씀으로 양육하시므로 우리의 영이 강건하고 장성한다. 사람은 육신을 위하여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중생한 영을 위해서는 영의 양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의 양식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허약해지고, 쇠잔하고, 병이 들고, 심지어는 죽는다. 이와 같이 우리 속사람은 영의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허약해지고 병이 든다.
(4)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호하심(Christ protects the church)
“보호하신다”(달포, qa,lpw; to heat, soften by heat, keep warm; 따뜻이 하다, 가열하다, 열(온기)로 부드럽게 하다, 온화하게 하다, 보온하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송장 같은 찬 상태에 놓여 있는 완악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열시켜 녹여 주신다. 이는 마치 어미 새가 깃털로 새끼 새들을 감싸고 따뜻하게 하듯이(신 22:6), 사람이 옷을 입어 몸을 따뜻하게 보호하듯이,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2. 신부의 반응(The Response of the Bride)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으니 참으로 존귀한 신분(exalted position)이 되었다. 신부로서의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며, 신앙의 정조를 지키며, 순복하며, 전적으로 헌신하며,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한다.
(1)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것.
성도들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요한일서 4:19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은 먼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신 6:5; 10:12; 11:1; 13:3; 19:9; 30:6, 16, 20 마 22:37;). 마음·목숨·뜻(heart, soul, and mind)은 자신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2) 신앙의 정조를 지킬 것.
일반적으로 “정조”란 여자의 순결한 절개를 말한다. 신앙의 정조는 거짓 스승들의 이단사설에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정통 신앙을 가리킨다. 약혼녀나 신부는 정조를 지켜야 하듯이, 성도들은 신앙의 정조를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정조를 버리고 사신우상을 섬기고 타락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더 이상 나의 아내가 아니라고 책망하셨다(호 2:2, 14-20).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앙의 정조를 지켜야 한다. 교회는 순수한 처녀로서 신랑 되시는 그리스도께 안내되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11:2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함이로다”라고 하였다.
신앙의 정조를 버리고 영적으로 간음하는 교회를 성경은 영적인 바벨론(Babylon), 음녀(harlot) 또는 창기(prostitute)라고 하였다(계 17:1, 5, 15, 19:2). 순수한 처녀는 정조를 지키듯이, 순수한 교회는 믿음의 도리를 힘써 지켜야 한다.
(3) 신랑 되신 예수님께 순복할 것.
에베소서 5:24에 교회는 그리스도께 순복하라고 말씀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시요, 주인이시요, 상전이시요, 영적 신랑 되시니 주님께 순복해야 한다.
“순종하다”(휘파쿠오, u`pakou,w)라는 단어는 밑에서(휘포, u`po; under)와 귀담아 듣는다, 주의 깊게 듣는다(아쿠오, avkou,w; to hear, listen)로 구성된 합성어이다. 따라서 순종이란 분부하는 말씀을 밑에서 정신 차리고 주의 깊게 귀담아 듣는 것을 뜻한다. 순종은 자기 의지를 그리스도께 굴복시키고 기쁜 마음,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행위이다. 순종은 행위를 수반한다.
(4) 신랑 되신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것.
로마서 12:1, “너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였다. 구약시대는 흠 없는 제물을 잡아 죽여서 드렸다. 이는 자신의 모든 혈기와 죄의 못된 성질을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 신약시대 성도들은 몸을 산 제물(living sacrifices)로 드리라고 하신다.
“몸”(쏘마, sw,ma; body, instrument of life)은 몸·육체·생명의 도구를 가리킨다. 몸(육체)은 물론 몸 안에 있는 마음·뜻·재능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드리라”(파라스테사이, parasth/sai; present, offer)는 바치라, 증정하라, 드리라는 말씀이다.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성령에 의한 중생한 새생명의 영적 활동을 가리킨다. 산 제물로 드리는 제사(예배)는 한갖 의식적 행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여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께 일찍 죽임을 당하사 보배 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시고 심령 좌소에 내주하시면서 감화·인도·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 뜻과 정성이 담긴 헌신, 감사의 예물로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돌려야 한다.
(5) 신랑 되신 예수님 맞이할 준비를 할 것.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이테, grhgorei/te; watch, awake; 주의하라)는 말씀은 현재시상의 계속적 행동으로서 계속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그 날과 그 시”(the day and hour)는 인자(the Son of man)가 다시 재림하시는 날과 시간을 말한다. 인자가 다시 재림하실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재림의 정확한 날과 시간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시고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셨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깨어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날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날이요,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다.
Ⅱ. 몸으로서의 교회(The Church as the Body)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사람의 머리(케파레, kefalh,; head)와 몸(쏘마, sw,ma; body)으로 묘사하였다(엡 1:22, 23; 4:15; 5:23; 골 1:18).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를 몸으로 말씀하신 것은 비유적 언사로서 신비적 실체(a mystical reality)의 한 표현이다. 상징적 표현은 문자적 화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신령한 영적 진리들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으므로 사도 바울은 상징적 화법을 사용하여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였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고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몸이라 함으로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동일시하였다. 그 이유는 교회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연합체이기 때문이다(엡 4:16). 교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개교회들과 현재·과거·미래의 모든 성도들로 구성된 우주적 교회를 다 포함한다. 그리스도는 이 전체 우주적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다.
그리스도를 머리(head)라 함은 진정한 의미에서 왕(king)이라는 뜻이다. 머리 또는 왕이란 권위·권세·통치의 개념(a concept of authority, power and rule)을 뜻한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 함은 머리가 온 몸과 지체들을 주관하고 다스리듯이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사신 교회를 능력과 권세로서 주관하고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요, 합법적인 왕이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은 만세 전부터 피택된 죄인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도성인신하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결과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세이다(골 1:18).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바로 그 공로와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죄인으로) 삼으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후 5:21). 그리스도는 부요한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하여금 부요케 하시기 위함이었다(고후 8:9).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계 5:9) 바로 그 이유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만왕의 왕이 되셨다.
1. 머리의 통치(Rule of Head)
(1)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심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왕·주권자·주인·통치자로서 몸된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께서 몸된 교회를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① 말씀(Words)으로 다스리신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통치자)로서 그의 몸된 교회와 몸된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들을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God’s powerful Words)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신·구약 성경 66권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② 성령(Holy Spirit)으로 다스리신다: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몸된 교회와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들을 그의 성령으로 다스리신다. 그의 영은 성령이시다(행 8:39; 16:7; 롬 8:9; 갈 4:6; 벧전 1:11).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의 영(성령)을 통하여 다스리시는가? 성령께서 중생한 성도들의 심령좌소에 내주하시면서 인격적으로 감화·감동·인도·역사하심으로 다스리신다. 성령께서는 인격적 존재로서 우리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꺾으면서까지 여하한 물리적 힘으로는 다스리지 않으신다. 따라서 우리는 온전히 성령의 다스림을 받도록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엡 5:18). 성령충만이란 성령의 감화·인도를 많이 받음을 뜻한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하여 간구하며 성령께서 우리를 자유로이 다스릴 수 있도록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전폭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다.
③ 사역자들(Ministers)을 통하여 다스리신다: 구약시대는 왕·선지자·제사장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려 왔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교회는 아담이 범죄한 직후에 구속을 허락하신 날로부터 성립되어(창 3:15; 6:18) 여러 세대에 여러 모양으로 계속하여 신약시대에 까지 이르렀다.
신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도들(일시적 비상직원들)과 감독들, 장로들을 통하여 몸된 교회와 몸된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들을 다스리신다.
사도행전 20:28, “… 성경이 저들 가운데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지게 하셨느니라”
“감독”(에피스코포스, evpi,skopoj; overseer, supervisor, protector)은 문자적으로는 감시자·감독관·보호자를 가리키며,
“장로”(프레스부테로스, presbu,teroj; elder)는 연령·지식·경험·지혜·권위를 지닌 자를 가리킨다.
④ 개교회의 치리기관(governing body)을 통하여 다스리신다. 개혁 신앙과 신학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다스리는 기관은 총회ㆍ대회 또는 노회와 같은 상회(上會)가 아니라, 개교회의 당회이다. 당회는 지교회 목사와 치리장로로 구성된 최고의 대표기관이다. 그러므로 개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개교회의 치리기관인 당회의 다스림을 받는다. 그리고 당회는 노회나 총회의 지도와 관할을 받는다. 만일 노회나 총회와 같은 상회가 타락할 경우에 개교회는 바른 신앙을 보전하기 위하여 신앙의 자유의 원리에 입각하여 상회를 탈퇴하고 독립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자들을 다스리신다.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들”(엡 1:21)은 일반적으로 모든 영적 존재들(spiritual beings)을 가리킨다. 영적 존재들이란 주로 천사들을 가리킨다. 천사들은 비물질적 존재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수종 드는 선한 천사들(good angels<엡 3:10; 골 1:16; 2:10>)과 사단에게 수종드는 악한 천사들(evil angels<고전 15:24; 골 2:15>) 모두를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3:22에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굴복하니라”고 하였다. 다만 악한 천사들의 활동들은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하에서의 허용적 활동들이다.
(3)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다스리신다
에베소서 1:22, “또 만물을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이 말씀은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라는 시편 8:6의 말씀으로 고린도전서 15:25-27; 히브리서 2:8-9에도 기록되어 있다.
“만물”(panta, all things)은 피조물세계 전체를 가리키며, “발아래 복종케 하시고”는 지배와 통치를 가리킨다. “복종케 한다”(후페타젠, u`petazen; subjected)는 단어는 군사적 용어로 그 뜻은 놓다, 배열하다, 직위에 앉히다, 복종하다(to place, or rank under, subject)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물 세계를 복종하는 자리에 앉히고 복종케 하신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들은 그리스도께 순종·굴복할 따름이다. 그리스도의 완전 통치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심으로써 장차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나, 만물이 그리스도께 복종토록 결정한 하나님의 작정과 목적은 창세전에 이미 결정되었다.
2. 몸의 지체들의 특성들(Characteristics)
몸의 지체들의 관계에서 적어도 3가지 중요한 진리들, 곧 교회의 통일성, 다양성 · 상호협력 · 성장(unity, diversity, mutuality, growth) 등을 깨닫게 된다.
(1) 지체들의 통일성(일치성; Unity): 몸은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한 몸인 것같이 교회도 많은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하나이다. 지체들은 많으나 몸은 하나인 것같이 성도들은 많으나 우주적 교회는 하나뿐이다. 성도들은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교회의 통일성 속의 다양성을,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육체에는 많은 지체들(눈·코·입·귀·손·발…)이 있고 그 지체들마다 각기 상이한 기능들을 발휘하여 한 몸을 섬기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신령한 몸인 교회, church-a spiritual body)에도 성도들마다 각기 받은 바 은사대로 상이한 기능들을 발휘하여 한 몸·곧 교회를 섬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도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4-6)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적 은사들을 논하면서 은사들은 여러 가지이나 성령은 한 분뿐이라고 말씀했다. 은사들은 여러 가지이며 은사들을 받은 사람들도 많으나 은사들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Lord)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각 사람에게 각기 상이한 은사들을 선물로 나누어 주신다(고전 4-11절).
(2) 지체들의 다양성(Diversity): 몸이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같이 교회도 다양한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몸의 많은 지체들이 각기 상이한 기능들과 임무들이 있는 것같이 교회의 성도들도 받은바 은사들에 따라 각기 상이한 기능들과 직분들이 있다.
지체들의 기능들(functions)도 각기 상이하다. 그러므로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고전 12:17)라고 하였다. 지체들의 힘(strength)도 각기 상이하다. 강한 지체들도 있고 약한 지체들도 있다(22절). 지체들의 영예(honor)도 각기 상이하다; 더 귀히 여기는 지체들도 있고 덜 귀히 여기는 지체들도 있다(23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은 각기 상이하나 그리스도의 몸에 모두가 다 필요하다. 우리는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발견한다.
(3) 지체들의 상호 협력(Mutuality): 각 지체들의 분량대로 역사함으로써 그리고 서로 협력함으로써 자신을 세워가며 몸을 세워 간다. 각 지체들은 분량대로 역사함으로(엡 4:16) 몸이 성장한다. 각기 “자기 분량대로”(엔 메트로 헤노스, evn me,trw e`noj; in measure of on e)라는 말씀은 각 지체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함으로”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교회도 교회의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자기가 받은 은사를 분량대로 역사함으로써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가져온다. 각 지체들은 머리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하므로 몸이 성장한다. 각 지체들이 “서로 연결함으로”(쉬날모로구메논, sunarmologou,menon; being fitted together)라는 말씀은 마치 실로 뜨개질하여 무엇을 만들 때 실들이 서로 엇물리고 연결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이와 같이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몸인 교회를 중심으로 서로 맞추고 합하여 하나가 됨으로써 성장한다. 독불장군은 모든 것을 다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도들도 자기 혼자만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성장·발전시킬 수 없다. 성도들은 존재와 기능적인 면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4) 지체들의 성장(Growth): 각 지체들이 서로 협력함으로써 몸이 성장한다. 몸의 지체들은 상호 협력하며 살고 성장한다. 각 지체들은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교회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상호 협력하며, 상호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줌으로써 성장한다. “그에게까지 자랄지니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자라난다”는 말씀은 영적 성장(spiritual growth)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고 그를 바라보며 계속 전진하는 신앙생활의 지구성과 계속성을 가리킨다. 갓난아이가 자라나듯이 성도들도 중생한 영이 인격적으로 자라나야 한다.
“그에게까지 자랄지니라”는 말씀은 성도들이 자라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은 물론 아니다. 지상의 성도들은 온전케 되기 위하여,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늘나라 상급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고 자라나야 한다.
(5) 몸의 성장(Growth):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으나 그 지체들이 각기 상이한 직분들에 충성하며, 서로 협력할 때 몸의 성장을 가져온다. 지체 없이 몸이 있을 수 없고, 몸 없이 지체가 있을 수 없다.
3. 몸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Different Interpretation of Body)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Body of Christ)”이라고 할 때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상징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교회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로마 천주교의 입장이며,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수 복음주의 교회들의 입장이다. 문자적 해석을 취하는 로마 천주교에서는 “교회는 도성인신의 연속(extension of incarna- tion)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의 생활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 것처럼, 지금 자신을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나타내신다”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교회를 동일시하였다.94)
브롬(Brom)은 언급하기를 “영원히 살아 계신 신인(神人)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나타내신바(현현)되므로 교회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라고 하였다. 특히 고린도전서 12:12의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라는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와 교회는 동일한 사명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95)
로빈손(Robinson)도 “…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가장 담대한 주장들을 가지고 있다(고전 12:12). 거기에서 그는 결정적으로 교회를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몸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진실로 … 그리스도를 교회로 대치하는 것은 우연적 사건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는 일치한다는 것은 의도적이다”라고 하였다.96)
상기와 같이 로빈손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성을 변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하나의 역사적 계승(a historical continuity)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벌카워(G.C. Berkouwer)는 말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은 로마 천주교의 심장이요, 본질이다”라고 하였다.97)
천주교는 이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교회를,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를 동일시함으로써, 교회에 순복하는 것을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것으로 간과한다. 그들은 그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황의 권위와 무오성이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대치시켰다. 그들은 “개신교 사람들이 교회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라고 한다.98) 그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서 계속 중보사역을 감당하여 죄 용서하는 권리가 있음과 같이, 교회도 죄를 용서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베푸심과 같이 교회도 은혜를 베푼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영적 연합 대신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유형적 공동체(교회)와의 연합을 강조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교리요, 교리적 이단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의 비성경적 교리들과 활동들을 반대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동일시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어느 범위까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동일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나 그리스도와 교회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넬슨(Nelson)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상호관계를 잘 진술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로서 몸과 분리되며, 또한 몸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를 자신과 연합시키고 있으나, 자신을 몸인 교회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의 영은 교회에 생명과 방향을 제시하나, 그리스도가 교회의 영(soul)은 아니다… 오직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도구로서 필요하므로 교회는 본질상 종속적 위치에 있다. 몸은 머리로부터 능력을 받아 산다. 그러나 몸이 머리와 동일하지는 않다”고 하였다.99) 교회를 신적(神的)인 위치에 놓는 것은 인간을 높이는 인본주의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이지 그리스도 자신은 결코 아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때 존귀해진 위치를 기억하며, 우리는 겸손과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Ⅲ. 양무리로서의 교회(The Church as the Flock)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무리로 묘사하였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씀이다.
구약은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shepherd)로(시 23:1; 28:9; 78:52, 53; 80:1-2; 사 40:11; 렘 31:10; 겔 34:11-12),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양무리(flock)로 표현하였다(렘 13:17).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였다(시 23:1). 구약에서 목자에 대한 특별한 의미는 메시야 개념(concept of Messiah)이다. 즉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참 목자가 죽임을 당하므로 죄인들의 구원이 성취됨을 예언하였다(사 53장).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그리스도인들의 목자로 묘사하였다(마 26: 31; 막 14:27). 그리고 목자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선한 목자(요 10:11, 14), 위대한 목자(히 13:20), 영혼의 목자(벧전 2:25), 목자장(벧전 5:4)이라고 하였다. 신약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라고 칭한 곳은 한 곳도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제자들을 가리켜 적은 무리들(little flock)이라고 하셨다(눅 12:32).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를 양무리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양들로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양무리는 곧 교회를 가리킨다.
1. 목자는 양들을 소유하심(The Ownership of Sheep)
선한 목자, 위대한 목자, 영혼의 목자, 목자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양들(성도들)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받기로 예정된 죄인들을 자신의 고귀한 피, 곧 보혈로 값주고 사셔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다(요 10:11; 행 20:28; 엡 1:7; 계 1:5). 보혈로 값 주고 사셨다는 말씀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고 그 대가로 구속하셨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나의 어린양들, 나의 양들(My lambs, My sheep)이라고 하셨으며(요 10:14; 21:15, 16), 양들 전체를 가리켜서 양무리(flock)라고 하셨다. 이는 양들 중에는 영적으로 어린양들도 있고, 장성한 양들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양들을 나의 양들 또는 나의 양무리라고 함으로써 양들은 그리스도 자신의 소유이심을 분명히 하셨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그의 기르는 양들이다.
2. 목자는 양들을 모으심(The Gathering of the Flock)
목자의 임무들 중의 하나는 흩어진 양들, 방황하는 양들을 모으는 일이다. 이리들(wolves)이 양들을 약탈하기 위하여 기습하면 양들은 흩어지게 마련이다. 목자 없는 양들은 흩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목자가 양들을 부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요 10:3-5, 16). 일반적으로 양은 양무리들 가운데 약 8-10년이란 긴 세월을 같이 생활하므로 목자가 양들을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을 복음으로 부르시고 모으신다.
3. 목자는 양들을 연합시킴(The Unity of the Flock)
(1) 그리스도 자신과 하나님께 연합시키신다.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양들을 자신과 하나님께 연합시키신다. 이 연합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속함을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연합이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내면적ㆍ영적ㆍ신령한 신비적 연합이다(롬 12:5; 고전 12:12-13; 엡 1:22, 23; 4:4-6; 5:23). 이 연합은 그리스도와 성도들과의 연합이니 수직적 연합(vertical unity)이다.
(2) 양무리들을 서로 연합시키신다. 이 연합은 양무리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과로 이루어지는 연합이다. 이 연합은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 사이의 연합이니 수평적 연합(horizontal unity)이다. 주님은 울타리 안에 들어 있는 양들과 울타리 밖에 있는 양들을 모두 한 무리로 연합시키신다. 주님은 요한복음 10:16에서 “또 우리(fold)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울타리 안에 들어 있는 양들과 울타리 밖에 있는 양들도 있음을 지적하시고,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과 밖에 있는 양들을 모아 하나로 연합시키심을 말씀하셨다.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해석하기를
① 울타리 안에 들어 있는 양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울타리 밖에 있는 양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100)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심으로(엡 2:14)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없이 하시고(롬 10:12), 이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 실제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다.
② 영적으로는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은 말씀 안에 있는 신자들을, 울타리 밖에 있는 양들은 말씀에서 떠나 유리방황하는 신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③ 어떤 주석가들은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은 이미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을 울타리 밖에 있는 자들은 앞으로 그리스도께 속할 자들을 가리킨다고도 했다.101) 따라서 모든 양들은 한 무리(one flock)로서 한 목자(one shepherd)에게 있게 했다.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다 하나이다(갈 3:28). 이것이 신령한 영적 연합이다.
4. 목자는 양들을 돌보심(The Tending of the Flock).
“양을 친다”(포이마이노, poimai,nw; to tend, shepherd; 돌본다, 친다)는 단어는 단순히 양을 친다, 먹인다는 뜻보다는 훨씬 더 많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
“양을 먹이다”라는 단어 ‘보스코’(bo,skw; to feed; 먹이다)는 먹이는 것만을 가리키는 반면에 양을 친다라는 단어 포이마이노(poimai,nw)는 양들을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며, 음식을 마련해 주며, 보살피며, 보호하는 일 등 목자의 임무 전체를 가리킨다.10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을 돌본다, 친다고 말씀하실 때 “보스코”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포이마이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5.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심(The Leading of the Flock)
요한복음 10:4,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팔레스타인의 목자는 양들을 치고, 인도하기 위하여 항상 먼저 앞장서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간다.
선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인도하는 지침(指針)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그리고 양들을 위험한 곳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앞서 가신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시며 보살피시는가를 묘사한다.
6. 목자는 양들을 먹이심(The Feeding of the Flock)
선한 목자는 살찐 꼴을 마련하여 양무리들에게 먹인다.
“살찐 꼴”은 영의 양식(spiritual food)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며,
“먹인다(to feed)”는 말씀은 가르친다, 교훈한다(to teach, instruct)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살찐 꼴은 균형을 이룬 양식, 즉 바른 교리를 교훈(instruction)하고(딤후 3:16; 딤전 1:3), 죄를 책망(reproof)하며(딤전 5:20; 딤후 4:2), 잘못을 바르게 함(correction, 딤후 2:25; 4:2)을 포함한다.
목자에게 있어서 양들을 살찌우고 건강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목자는 양들에게 필요한 꼴을 만들어 제공해야 한다. 온 정성을 다하여 최상의 음식을 만들어 제공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계속적으로필요한 영의 양식을 만들어 먹여야 한다. 양들이 먹기를 거부할지라도 유익된 것이면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양들을 돌보는 원리요, 양들을 사랑하는 증거이다. 사람의 육신은 흙으로 되었으므로 흙(땅)에서 나오는 소산물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우리의 중생한 영(靈)은 영의 양식을 먹어야 살고 장성한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육을 위한 양식, 영을 위한 양식이 다 필요하다.
7. 목자는 양들을 다스리심(The Governing of the Flock)
목자는 양들을 계명으로 다스리시며, 사랑으로 다스린다. 다스리는 것은 치리(discipline)를 가리킨다. 목자는 양들을 다스리고 감독하는 영혼의 감독자이다(행 20:28). 양들은 매우 연약하고 아둔하며 곁길로 가기 쉬우므로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 따라서 양들은 목자에게 순복해야 한다.
8.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심(The Protecting of the Flock)
동물들 중 양처럼 연약하고 아둔하고 무능한 짐승은 없다고 한다. 양은 목자의 도움이 없으면 길을 잃어 방황하고,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들에게 희생될 수밖에 없다.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두 가지 장비, 즉 막대기와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
“막대기”(rod)는 골프채처럼 약 3피트 가량 길고, 끝이 좀 크고 둥글고 단단하게 만들어졌으므로 그것으로 양들을 해치려는 야생짐승이나 도둑을 물리친다.
“지팡이”(staff)는 길고, 끝 부분이 굽어져서 그것으로 방황하는 양들이나 산비탈 같은 위험한 곳에 떨어진 양들을 잡아 끌어올린다. 선한 목자는 이렇게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격(attack)과 방어(defence)를 모두 겸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경고하기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29-30)라고 말씀하였으며, 바로 그 이유로 사도 바울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경고하였다(행 20:31). 그런데 본문에 언급된 “흉악한 이리들”(savage wolves)은 “거짓 스승들”(false teachers)을 가리킨다. 거짓 스승들이 양무리 안에 들어와 진리를 왜곡하고 신앙을 파괴하는 일을 하고 연약한 양들을 약탈한다.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는 성도들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혼의 감독자가 되셔서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사나운 이리들이 공격해도 양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요 10:12, 28, 29). “빼앗는다”(할파조, a`rpa,zw; to snatch away; 잡아채다, 움켜쥐다, 강탈하다)는 단어는 도둑질한다는 단어와 관계된다. 고로 잡아채지 못한다는 말씀은 빼앗지 못한다, 강탈하지 못한다, 공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9.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심(The Giving Life)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17, “내가…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18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상의 말씀들은 주님의 대리적 속죄의 죽으심을 가리키는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이기도 하다. 옛날 팔레스타인 지방 야산들이나 거친 들판에는 사자ㆍ표범ㆍ곰ㆍ이리ㆍ여우ㆍ하이에나 등 맹수들이 있어서 흔히 양들을 해쳤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맹수들과 싸워야 했으며, 때로는 생명의 위험을 느낄 때도 있었다. 실례로 다윗은 목동 시절에 사자와 싸웠고 또한 곰과도 싸운 일이 있었다(삼상 17:34-37). 선한 목자, 충성된 목자는 이리떼들이 사방으로 맹공격해와도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서 양들을 보호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생명도 바친다. 이와 같이 주님은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선한 목자이시다. 주님의 죽으심은 전적으로 자원적이다.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진실로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순교하셨다. 목회자들은 목자장 밑에서 일하는 목자들(Undershepherds)로서 주님의 양들을 잘 보살피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큰 상급을 받을 것이다(벧전 5:4).
Ⅳ. 가지로서의 교회(Church as a Branch)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성도들)의 관계를 하나의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로 묘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성도들은 포도나무 가지(요 15:1-6)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성만찬을 드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교훈하신 말씀들 중의 하나이다. 마지막 작별의 직접적 언급은 요한복음 13:1의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떠나야만 할 때가 온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태어날 교회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1. 연합의 성질(The Nature of Unity)
요한복음 15:1-5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1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과실을 맺을 수 없나니(4절),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5절),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거한다”(메노, me,nw; to attach, stay, abide; 접붙는다, 머물다, 거하다)(요 15:4, 5, 6, 7, 9, 10)는 말씀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음을 뜻한다. ‘거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말씀을 굳게 붙잡고,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거한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와의 파괴되지 않은 우호관계(unbroken fellowship)를 의미한다. 상기 말씀들은 그리스도와 성도들과의 깊은 관계를 하나의 전체적 유기체로 제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성도들)와의 연합은
(1) 신령한 영적 연합(spiritual unity)이다. 신령한 영적 연합이란 세속적 의미와는 반대된다.
(2) 내적 연합(inward unity)이다. 내적이란 내부에 관한 것, 정신과 마음에 관한 것을 가리킨다. 외형적 연합이 아니다.
(3) 인격적 연합(personal unity)이다. 인격이란 품격, 자격, 지ㆍ정ㆍ의의 총체를 가리킨다.
(4) 유기적 연합(organic unity)이다. 유기적이란 제기관의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리킨다.
(5) 생동적 연합(vital unity)이다. 살아 움직이는(약동하는) 연합이다. 무생명적이 아니다.
(6) 무형적 연합(invisible unity)이다. 무형적이란 조직적, 기계적, 인위적이 아니다.
(7) 분리할 수 없는 연합(inseparable unity)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가장 아름답고도 심오한 연합의 진리를 말씀하였다.
2. 연합의 특성들(The Characteristics of Unity)
(1) 영원 자존자와 유한자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는 영원 자존자이시다. 시간과의 관계에서는 무한(infinite)하시므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이시다. 그리고 공간과의 관계에서는 편재(immensity)하시므로 자신이 창조하신 어느 곳에도 자신의 주권과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시다(요 1:1; 8:58; 17:5, 24; 골 1:15, 17; 사 9:6). 그러한 영원 자존자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유한자와의 연합이므로 유한자가 영원 자존자와 연합되면 그 순간부터 영생을 얻는다. 그러나 유한자가 영원 자존자로 되는 것은 아니다.
(2) 전지자와 무지자의 연합이다. 그리스도는 전지하셔서 영원부터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것을 동시에 즉각적으로 완전히 아신다(마 9:4; 16:21; 눅 6:8; 요 1:48; 4:29; 21:17). 무지자가 전지자와의 연합으로 신령한 진리를 부분적으로나마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된다. 그러나 무지자가 전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3) 능한 자와 약한 자의 연합이다. 그리스도는 전능자이시다. 그리스도는 천국의 모든 권세, 지상의 모든 권세, 지옥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그 위에 역사하신다(마 28:18, 20; 막 5:11-15; 요 11:38-44; 눅 7:14; 엡 1: 22; 히 1:3; 계 1:8; 19:15; 사 9:6). 약자가 강한 자와의 연합으로 영육이 아울러 점점 더 강건하여진다. 그러나 약한 자가 전능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4) 완전자와 불완전자와의 연합이다. 불완전자가 완전자와 연합함으로 점점 더 온전한 자리로 나아간다. 그러나 불완전자가 완전자로 되는 것은 아니다.
(5) 거룩한 자와 죄인과의 연합이다. 그리스도는 완전, 거룩하신 자이시다. 그는 절대 거룩한 자이시므로 모든 도덕적 악과 죄로부터 성별되신다(히 7:26; 벧전 1:19; 2:22; 히 4:15). 죄인이 거룩한 자와 연합함으로 거룩을 점점 더 닮아 나아간다.
(6) 영생하는 자와 죽을 자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생명의 원천(근원)이시다(요 1:4; 5:21, 26; 14:6; 11:25). 죽을 자가 영생하는 자와 연합함으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된다.
(7) 구속주와 멸망 받을 자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구주이시다. 멸망 받을 자가 구속주와 연합함으로 죄와 사망, 사단의 권세에서 우리의 영이 구속받았다(요 3:16; 14:6; 롬 10:9-10). 우리의 육체는 주님 재림시 구속받을 것이다.
3. 연합의 결과(The Result of Unity)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1) 생명(영생)이 있다. 주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요 1:4).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생명이 있고, 예수님을 떠나면 생명이 없다. 이는 마치 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음과 같다.
(2)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나무가 몸통을 통하여 뿌리로부터 빨아올리는 자양분(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자양분을 공급받고 힘을 얻는다. 주님을 떠나서는 자양분(말씀과 새 힘)을 공급받지 못하므로 힘, 능력, 영력이 없다.
(3)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 15:2, 4, 5, 8). 포도나무의 유일한 가치와 주요 임무는 열매 맺는 일이다. 포도나무는 소나무ㆍ월넛나무ㆍ참나무 등과 같은 아름드리가 크고ㆍ높고ㆍ단단한 목재용이 아니다. 포도나무로는 가구도 만들 수 없고 집도 지을 수 없다. 포도나무는 목재용으로는 아무 가치가 없다. 포도나무의 유일한 가치는 열매 맺는 일이다. 기계는 일은 많이 하지만 생명이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생명 있는 나무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영국 런던 근교 햄프톤 법원(Hampton Court)에는 약 1,000년이 넘은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포도나무 뿌리 하나의 두께가 적어도 2피트(feet)나 된다. 그리고 어떤 가지들은 약 200피트나 길다. 그리고 그 한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생산량은 해마다 몇 톤씩 된다. 그리고 200피트나 되는 큰 가지에 붙어 나온 작은 가지들에서는 더 많은 열매들을 맺는다.103)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는 가지들을 절단해야 한다(요 15:2). “절단한다”(카다이레이, kaqai,rei)는 말은 치워버린다(take away), 들어올린다(lift up), 제거한다(remove)는 뜻이니 불필요한 가지들을 제거하여 치워버림으로 열매 맺을 가지들이 햇빛을 더욱 많이 받게 되고, 영양분도 더 많이 공급받게 된다. 우리도 불필요한 가지들(육신의 소욕들)을 절단함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절단하는 목적은 과실을 항상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함이다(요 15:16). 불필요한 가지를 절단함으로써 나무가 더욱 아름답게 보이며 더 많은 영양분을 공급받게 된다. 만일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① 아무것도 할 수 없고(요 15:5) ②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요 15:4) ③ 말라서 죽고 ④ 잘리우고 ⑤ 버리며 ⑥ 불사른다.
열매 맺지 못하면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겔 15:2-5).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 열매의 성질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 22-23 에서 잘 묘사하였다. 감사의 열매, 찬송의 열매, 성별의 열매, 평안의 열매, 기쁨의 열매, 사랑의 열매, 인내의 열매, 친절의 열매, 충성의 열매, 온유의 열매, 절제의 열매, 관용의 열매, 연합의 열매 등을 많이 맺어야 한다.
Ⅴ. 건물로서의 교회(The Church as a Building)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성도들)와의 관계를 하나의 거대하고도 웅장한 빌딩(one great building)으로 묘사하였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말씀이다. 이 빌딩은 흙ㆍ돌ㆍ시멘트ㆍ목재 같은 건축 재료들로 짓는 이 세상 건물이 아니라, 만세 반석 되시고,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건축하는 우주적ㆍ영적ㆍ무형적 빌딩(a universal, spiritual, invisible building)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 거대하고도 웅장한 영적 빌딩을 가리켜서 신령한 집, 영적 성전이라고 하였다(벧전 2:5; 엡 2:21).
이 거대하고도 웅장한 우주적ㆍ무형적ㆍ영적 빌딩(영적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터는 무엇이며, 건축 재료들은 무엇인가? 성경은 그리스도를 터(기초)ㆍ모퉁이 돌ㆍ산돌이라고 하였으며, 성도들을 산돌이라고 하였다.
1. 터(기초; Foundation)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견고한 터(기초)라고 말씀하였다(고전 3:11). 터는 건물이 들어서는 곳(장소)을 말한다. 터는 견고한 것을 특성으로 한다. 만일 터가 견고하지 못하면 비가 오고 강한 태풍이 불어 닥칠 때 무너지기 쉽다. 예수 그리스도는 견고한 터 곧 거대한 암석(Rock)이시다(롬 9:33; 벧전 2:4; 사 28:16). 이 터는 성도들의 구원의 터·기초이다(행 4:12). 성도들의 구원은 굳건한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근거하였으므로 요동하거나 상실될 염려가 없다.
2. 모퉁이 돌(Conerstone)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모퉁이 돌이라고도 말씀하였다(엡 2:20; 벧전 2:6, 7; 마 21:42; 롬 9:33; 시 118:22; 사 28:16).
(1) 모퉁이 돌은 건물의 모퉁이에 놓는 돌이다.
옛 건축법상으로는 모든 돌들은 이 모퉁이 돌로부터 시작하며 이 모퉁이 돌에 의존한다. 모퉁이 돌은 빌딩 건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건물 전체가 주로 모퉁이 돌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만일 모퉁이 돌이 작고, 견고하지 못하면 건물 전체가 안전성이 없어 무너지기 쉽다. 그러므로 집을 지을 때 각 모퉁이마다 크고 견고한 돌들을 놓는다. 모든 모퉁이는 물론 건물 전체가 모퉁이 돌에 의존하듯이, 모든 성도들은 모퉁이 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영적 건물(성전)을 건축해야 한다.
(2) 모퉁이 돌은 양면 벽, 즉 건물의 이쪽저쪽을 다 연결시킨다.
에베소서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
모퉁이 돌이 건물 양면의 연결을 가져오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 돌로서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연결시키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모퉁이 돌로서 이편의 유대인들, 자유인들, 남자들 … 을 저편의 이방인들, 종들, 여자들, 동서고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서로 연결시키신다. 그리고 상호 교통하도록 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
(3) 모퉁이 돌은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다.
모통이 돌은 죄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도록 예비 되어 있고, 성도들이 상호 교통하도록 양편 모퉁이에 계신다. 그래서 이 세상의 죄인들이 이 모퉁이 돌을 바라보고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구원을 받아 누려야 한다.
3. 산 돌(Living Stone)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산돌이라고도 말씀하였다(벧전 2:5). 그리스도를 산돌이라고 말씀한 곳은 이곳뿐이다. 그리스도는 산돌이시니 만큼 그리스도 자신 안에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창조되지 않은 생명(uncreated life) 곧 영생(eternal life)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과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시고 …”(요 5:26). 이 생명은 또한 모든 생명의 근원(source of all life)이시다.
4. 산 돌들(Living Stones)=성도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을 가리켜 산 돌들(living stones)이라고 하였다(벧전 2:5).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우리의 영혼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생명 없는 죽은 돌들이었다(엡 2:1).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그 속에 주입시켜 산 돌들이 되게 하셨다. 산 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자마다 새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이 생명은 영생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요 5:24)라고 하셨다. 산 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이 영생을 이미 선물로 받았다(요 3:16).
5. 건물의 건축(The Construction of the Building)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
에베소서 2:19-22,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산돌들의 중요 임무는 견고한 터, 만세 반석 위에 거대한, 웅장한, 우주적, 영적 신령한 건물(하나님의 집,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크고 작은 산돌들로서 영적 성전 건축에 절대 필요한 영적 건축 재료들이다. 성도들은 산돌들로서 각자 산 돌 자신의 영적 성전(spiritual temple)을 건축하면서 동시에 산돌들 전체의 영적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
(1) 터(기초, 반석) “위에” 영적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
“위에”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피(evpi,; upon)로서 “접하여 위에”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실제적 의존(a real resting upon)을 암시한다.104) 그러므로 이 단어는 돌들과 기초의 밀접한 관계를 지적한다. 산돌들은 견고한 터, 만세 반석 “위에” 밀착되어 영적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 이 터와 밀착되지 않거나 또는 다른 터 위에는 신령한 영적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
(2) 모퉁이 돌, 산돌을 “중심으로” 영적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
옛날 집을 지을 때에는 견고한 집터를 마련하고 그 터 위에 크고도 단단한 모퉁이 돌을 세우고 그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돌들을 좌우로 그리고 위로 쌓아 올려 집을 지었다. 이와 같이 모퉁이 돌, 산 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자유자와 종,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부한 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들이 서로 영적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벨전 2:4,6.)
(3) “서로 연결함으로” 영적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
“서로 연결하여”라는 말씀은 “쉬날모로구메네”(sunarmologoumenh; being fitted together)로서 서로, 함께, 같이 연결하여 맞추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옛날 그리스에서 큰 건물을 지을 때의 건축 방식을 연상케 한다. 각 산 돌들마다 다른 산돌들과 잘 연결하여 맞게 하기 위해서 거친 면, 모난 면들을 갈고 닦아야 한다. 우리의 거친 면, 모난 면들 그대로는 다른 산돌들과 연결하여 맞출 수 없다.
(4)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는 “쉬노이코도메이스데”(sunoikodsmei/sqe; are being built together)로서 서로 함께 같이 건축하는 것을 가리킨다.
상기 단어들의 접두어 쉰(su,n; with)은 “서로, 함께”라는 뜻으로 영적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는 산돌들 하나하나가 서로 함께 연결하고 서로 함께 건축해야만 한다는 진리를 가르친다. 산돌들 하나하나가 서로 함께 연결하여 맞추지 않으면 자신의 영적 성전은 물론 산돌들 전체의 영적 성전도 건축할 수 없다.
이 거대하고도 웅장한 영적 성전의 터는 고정되어 있으되 성전 건축 공사는 산돌들이 주님 앞에 설 때까지 항상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는 질적으로 계속 성장해야 하며, 양적으로도 계속 성장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더욱 합당한 성전이 되도록!
6. 하나님의 거주(The Habitation of God)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1) 하나님은 회막(tabernacle)에 거하셨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는 자기 백성들과의 영적 교제를 목적으로 회막에 영(Spirit)으로 거하셨다. 회막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회막) 너희와 만나겠고,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들과 만나리라”(출 29:42-43)고 하셨다.
① 만남의 회막(tent of meeting): 회막은 하나님께서 영으로 그의 백성들과 만나고 거하시며 교제하는 장소이었으므로 만남의 회막이라고 하였다.
② 증거의 회막(tent of testimony): 회막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will)을 알리는 계시의 장소이었으므로 증거의 회막이라고도 하였다.
③ 제사 드리는 곳: 회막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장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물과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곳, 곧 제사(예배)의 장소였다.
(2) 하나님은 성전(Temple)에 거하셨다.
솔로몬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 하나님은 성전의 지성소에 영으로 거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소(temple)와 지성소(holy of holies)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하나님은 지성소에 영으로 임재하셨다. 그리고 회막에서의 모든 일들은 성전 제사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모든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단번에 온전한 희생의 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폐지되었으며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로마 군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된 이후로는 제사장들에 의한 제사 제도는 영원히 종식되었다.
(3) 하나님은 신약의 성전(temple of the N. T.)에 거하신다.
신약의 성전이란 성령의 역사로 중생한 성도들의 영의 좌소(seat of soul)를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건물로서의 교회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건축하신 영적 성전 곧 중생한 자의 중심 좌소에 영으로 거하신다. 그러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동시에 성도들 전체로 구성된 우주적 교회가 또한 하나님의 거대하고도 웅장한 성전이다(고전 6:19; 3:16-17; 엡 2:21-22). 성령 하나님은 이 영적 성전에 거(居)하신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성경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전 3:16, 17)고 하셨다.
Ⅵ. 피로 사신 교회(The Church Purchased
by His Own blood)
성경은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본문은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오게 하고 그 장로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본 절에 “너희(you)”는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인 디모데와 장로들을 가리킨다(행 20:17).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교역자들,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친다.
“삼가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프로세케테”(prose,cete; to take heed)로서 그 뜻은 자신이 “깨어 삼가 조심하라”는 뜻이다. “조심하라”는 말씀은 그 시상(tense)이 현재 명령형이므로 계속 조심하라, 계속 주의하라, 계속 삼가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젊은 교역자 디모데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교역자들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분부이시다. 누구를 위하여 계속 조심, 계속 주의, 계속 삼가야 하는가? 먼저는 자신을 위하여, 다음은 양떼들을 위하여 계속 조심, 계속 주의, 계속 삼가야 한다.
1. 자신을 위하여 삼가라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는 교역자들에게 먼저 자신이 삼가기를 계속하라, 조심하기를 계속하라, 주의하기를 계속하라고 명령하였다. 교역자들은 항상 분주하여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 소홀하기 쉽다. 자기 자신을 소홀히 하고 어찌 다른 사람들 곧 양떼들의 구원을 위한 영혼 문제를 신중히 다룰 수 있겠는가?
목회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본이 되어야 한다. 교역자는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이므로 모든 일에 실수와 범죄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삼가 조심하여야 한다.
목회자는 먼저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켜야 한다.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을 부단히 계속해야 한다. 이것이 영적으로 바로 서는 길이요, 또한 양떼들을 바로 키울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키지 못하는 자가, 자신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지 못하는 자가 어찌 양떼들의 신앙을 지도할 수 있겠는가?
목회자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가까이 가도록 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빛이 되어야 한다.
2.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교역자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양떼들과 생사를 같이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교역자는 예수님의 피로 얽혀 지고 사랑의 줄로 매여 있는 자들이다. 교역자는 양떼들의 지도자요, 인도자요, 보호자이므로 양떼들은 교역자를 바라보고, 그의 인도를 받는다. 그러므로 교역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양떼들의 관심의 표적이요, 주목거리이다. 교역자의 작은 허물 하나는 양떼들에게 있어서는 크게 보이며, 반면에 교역자의 모범적 행위는 양떼들의 관심과 귀감이 된다. 교역자는 먼저는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양떼들을 위하여 항상 삼가 조심해야 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양떼”라는 말은 “모든 양 무리들”(판티 토 포임니오, panti. tw/ poimni,w; all flocks)이니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포함한 무리 전체를 가리킨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양떼는 수적으로 많은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연합된 무리(united flock)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양떼는 크고 작은 양들, 좋고 나쁜 양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양들, 길 잃어 방황하는 양들을 다 포함한다.
“저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택하고 또 택하여(우리를) 감독자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정하시고 때가 되매 부르셔서(일반 소명)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하여(특별 소명), 교육과 훈련, 연단을 시키시고 기름을 부어 감독자로 세우신다.
“감독자”는 “에피스코포스”(evpi,skopoj; overseer, bishop, guardian, superintendent)로서 감독관, 감독, 보호자, 관리자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구별 없이 지칭한 직분상의 명칭이다. 감독자는 모두의 안전을 위하여 높은 망대에 올라가 졸지 않고 주의 깊게 경계하는 자이다. 사도 시대는 장로와 감독의 구별이 없이 이 명칭들을 교대적으로 사용하였다.
감독자는 한 곳에 거처하는 공적 직분자로서 집합체의 감독자, 보호자, 조사관이며, 양떼들 전체를 돌보는 자이다. 이 직분은 하나님께서 임명한 직분이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에 감독이 “에피스코포이”(evpi,skopoi)인 복수로 명시되어 있음은 교회의 감독자는 한 명 이상임을 의미한다. 감독은 에베소 교회, 빌립보 교회, 그레데 교회 등에서 사용한 명칭이다(빌 1:1; 딤전 3:2; 딛 1:7; 벧전 2:25). 감독은 특히 양떼들의 영혼 문제를 감독하는 자이므로 “영혼의 감독자”(벧전 2:25)라고 하였다.
“삼고”: 이 위대한 직분, 곧 감독자의 직분은 인간의 투표에 의한 것이 아니요, 인간의 노력과 경험에 의하여 수행될 일도 아니요, 세상의 군주나 왕이 하사한 것도 아니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취함도 아니요, 인간 배경에 의하여 세워진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사람들 같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연약한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을 선택하여 감독자로 삼으시고 세상에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강한 자들을 굴복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 진실로 우리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특별히 택하여 신학 교육을 받게 하시고 감독자로 삼으심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들로서는 최대의 영광이요, 명예가 아닐 수 없다.
3.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자기 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교회를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귀한 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신성(deity)과 인성(humanity)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피이다. 이 피는 능력이 있어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엡 1:7; 벧전 1:18, 19; 히 9:12-14; 요일 1:7).
“사신 교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소유권(ownership)은 그리스도께 있으므로 내 양(My sheep)이라고 하셨다(요 21:15).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를 치다”라는 말씀은 “포이마이네인”(poimain ein)으로서 먹인다(feed)라는 뜻이요, 먹인다는 말은 가르친다, 교훈한다(teach)는 의미이다. 본문은 양떼와 교회를 동일시하였다. 그리고 목자들(감독자들)이 하는 일은 양무리들(교회)을 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살진 꼴, 생명의 꼴, 영의 양식을 때를 따라 먹이는 것이다. 목자는 양들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그것을 마련하여 주어야 한다.
Ⅶ. 제사장으로서의 교회(The Church
as the Priesthood)
“신자마다 대제사장”(Every believer a High Priest)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은혜로만 구원”과 더불어 종교개혁의 3대 원리이다.105) 신자마다 대제사장이란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근본적 교리였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는 구별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었던 것처럼 신약시대 교회(신자들)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벧전 2:9; 계 1:6; 5:10). 신자마다 대제사장이란 신자마다 공통적 존엄성, 구원을 위한 소명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특권을 공유하고 있다는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신약시대 신자들마다 대제사장이므로 하나님 앞에 제사(예배)드릴 어떤 중보자도 필요 없다.
1. 제사장의 자격들(Qualifications of Priest)
(1) 제사장은 백성들 중에서 선택함을 받은 자들이었다(히 5:1).
하나님은 많은 나라, 많은 민족들 중에 특히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민족 12지파 중에 레위 지파, 레위 지파 자손들 중에 아론의 자손들, 아론의 자손들 중에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자손들만이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출 28:1, 41; 29:9, 29-30). 아론의 아들들 중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여호와 앞에 제사를 드렸으므로 죽임을 당하였다. 다른 불이란 번제를 드리는 제단에서 불을 가져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가져온 불이라고도 하며, 이상한 불로서 불결한 불이라고도 한다(출 30:9; 레 10:1-2; 민 3:4).
대제사장은 한 사람이 있었고 그는 아론의 계승자로 간주되었다. 대제사장(High Priest)이란 다른 제사장들보다 높은 계급의 제사장 곧 대제사장(Chief Priest)을 뜻한다. 제사장직은 아론의 계통에서 계승되어 왔으나 후대에는 제사장 직분이 다른 지파들에게도 주어졌으며, 로마 제국 통치시대에는 모세의 법이 무시되어 몇 명이 동시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106)
(2) 제사장은 신체적으로 흠이 없는 자(온전한 자)이어야 했다.
아론의 자손들 중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자손들이라도 다 제사장에 임명되거나 성전에서 봉사한 것은 아니다. 레위기 21:17-23에 의하면 소경ㆍ절뚝발이ㆍ코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발 불구자ㆍ손 불구자ㆍ곱추ㆍ난쟁이ㆍ눈에 상처가 있는 자·얼굴에 버짐이 있는 자·괴혈병자·불알 상한 자 등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오실 메시야의 그림자·예표·모형·상징이었기 때문이다(히 4:15; 7:26; 9:14).
(3) 제사장은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는 자이어야 했다.
제사장은 처녀와 결혼한 자의 아들이어야 했으며(레 21:13), 이혼당한 여자나 과부 또는 창녀로 몸을 더럽힌 여자와는 결혼을 금하였다. 제사장은 죽은 사람의 시체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도덕적 무흠과 그 자손을 백성 중에서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레 21:11-15).
(4) 제사장은 성별된 자이어야만 했다.
제사장으로 위임받은 후보자들은 온 몸을 씻고, 베실로 짠 옷을 입고, 머리 위에 기름을 부어 제사장으로 삼았다.
① 온 몸을 씻었다: 제사장 위임식 때 몸을 씻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제사장을 임명하기 위한 위임식 때 아론과 그 자손들을 회막 안으로 데려다가 온 몸을 씻었다(출 29:4). 이것은 영적 정화와 성결을 상징하는 외적 표였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 제사장들인 성도들도 영적 정화와 성결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온 몸을 정결케 씻어야 한다(엡 1:7).
② 옷을 입었다: 제사장은 베실로 짠 옷을 입었다(출 28:39-41). 제사장들은 물론 회막에서 수종드는 자들까지도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옷을 입지 못하도록 금하셨다(신 22:11). 이것은 영적 순수성을 상징하는 외적 표였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혼방 옷을 입지 못하도록 금하신 이유는 순수성과 성결을 위함이다. 양털은 동물에서 취한 것이요, 베실은 식물에서 취한 것이다. 동물성과 식물성은 종류상 전연 상이하다. 전연 상이한 재료들로 섞어서 짠 혼방 옷은 영적 순수성과 성결에 반대되므로 금하셨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 제사장들인 우리는 사람이 만든 옷(인본주의)이나 신인(神人) 협동의 옷을 입지 아니하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만을 믿음으로 받아 입어야 한다(고후 5:21; 롬 3:20-28; 4:5)
③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이 기름은 감람유(olive oil, 4 quarts)에 몰약 500세겔(121/2 pounds), 육계(계피) 250세겔(61/4 pounds), 창포 250세겔(61/4 pounds) 그리고 계피 500세겔(121/2 pounds)을 섞어서 향기롭게 만든 관유이다(출 30:22-25). 이 관유는 출애굽기 30:26-30에 언급된 것 외에 어떠한 목적에도 사용되지 않았다. 이 관유는 회막과 그 안에 있는 성물들(증거궤·상·등대·물두멍 등)에 바르고,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제사장직을 임명할 때 머리 위에 이 기름을 부었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 제사장들인 성도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성령과 교통이 있음을 상징한다.
④ 양의 피를 뿌렸다: 수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제단의 뿔(horns)에 붓고, 두 번째는 수양을 잡아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고, 세 번째는 수양을 잡아 그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제사장들)의 오른 귀부리(tip)와 오른손 엄지(thumb)와 오른발 엄지(big toe)에 발랐다(출 29:20). 이 말씀의 영적 교훈은 신약시대의 제사장들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받고, 그 말씀을 지키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직전 애굽에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인 죽음의 재앙이 임하였을 때 문설주 위와 그 양면에 양의 피를 바르고 문설주 밑에는 문설주 위에 바른 피가 떨어져 문설주 사면에 모두 피가 묻게 하였던 것과 관련된다. 이 말씀의 영적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만 죄사함 받고 성결케 됨을 교훈한다. 사도 베드로는 신약의 제사장들을 가리켜 “…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 1:2)이라고 하였다.
2.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신약시대의 제사장
(Priests of O.T. and Priests of N.T.)
(1)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드렸다.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 시대에는 가장(家長)이나 지파의 우두머리들이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였다(창 8:20; 22:13). 모세시대부터는 제사장 제도가 설정되고,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다(레 1-6장).
그러나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영적 이스라엘(참 그리스도인들)에게로 이전되었다. 영적 이스라엘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말한다. 따라서 참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제사장(a holy priesthood), 왕 같은 제사장들(a royal priests)이 되어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직접 드린다(벧전 2:5, 9; 계 1:6). 따라서 신약시대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은 있어도 제사장 직분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참된 기독신자들은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사장 직분을 교회 안에서 찾는다면 실망할 것이다.
(2) 구약시대에는 제사장과 제물이 상이하였다.
구약시대에는 소ㆍ양ㆍ염소ㆍ비둘기 같은 짐승들의 피를 제물로 드렸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제사장과 제물이 동일하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고 동시에 온전한 희생의 제물이 되시어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렸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가 영원한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히 10:19, 29; 13:20). 이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 받은 성도들을 왕 같은 대제사장으로 삼으시고,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도록 하신다.
(3) 구약시대에는 흠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눈먼 것·저는 것·병든 것·흠 있는 것·악질 있는 것들은 제물로 드릴 수 없었다(신 15:21; 레 1:3, 10; 3:1; 22:20; 신 17:1; 말 1:8).
이와 같이 신약시대 제물들도 흠없는 제물, 온전한 제물, 거룩한 제물을 드려야 한다. 신약시대 제물이 무엇인가? 우리 몸이다. 우리는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흠없는, 온전한, 거룩한 제물들이 되어야 한다(롬 12:1; 벧전 2:5). 우리의 몸이란 육체만이 아니라 전인격을 가리킨다.
(4)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날마다, 대제사장은 해마다 제사를 드렸다.
구약시대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예표였으므로 실체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반복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 하나님께 드렸다(히 7:27; 9:12, 26, 28; 10:10, 12).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는 말씀은 “구약시대 끝에”(at the end of the O. T. ages)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계속 반복되던 구약시대 모든 동물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 예표였으므로 실체(實體)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자 폐지되었다.
(5)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반드시 잡아 죽여서 드렸다.
이것은 육신의 모든 죄, 정욕을 장사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시대는 아무리 흠없는 제물이라도 산 것은 제물이 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정욕, 죄의 성질을 제거해야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이 된다.
반면에 신약시대는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산제물(living sacrifice)로 우리 자신들을 드린다(구약시대 제물과는 달리). 로마서 12:1에서는 “너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다. 산 제물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우리의 중생함을 받은 산 영(living soul)이 능동적으로 활동함을 의미한다.
(6) 구약시대에 제사는 회막에서, 성전에서 드렸다.
구약시대에는 회막(tabernacle)에서, 그 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회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기 위하여 모세가 만든 한 천막(오두막; a tent, a boath)이며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회막에서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성전이 건축된 솔로몬 시대부터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회막 제사가 그대로 성전 제사로 이전된 것이다. 성막(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그 사이에는 휘장이 쳐 있었다(출 26:31-33). 이 휘장은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사이를 구분하는 상징이었다. 그런데 성소에는 제사장들만이 들어가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으며,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씩 들어가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레 16: 14; 히 9:2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만든 지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님이 계시는 참 하늘에 들어가셨다. 신약시대에는 예배를 어디에서나 드린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1, 24)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시대에는 예배드리는 자가 어디에서 드리는가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가 중요하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가, 아니면 형식과 비진리로 예배드리는가가 문제이다. 중생한 영이 주체가 되어 진리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받으신다.
(7)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먼저 자기 죄를, 그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므로 자신을 위하여는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고 다만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단번에 제사를 드렸다. 따라서 신약시대 성도들은 죄사함 받기 위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제사,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
3. 제사장 직분의 이전(Transition of Priestly Office)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이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로 이전되었다. 출애굽기 19: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였으며, 어떤 의미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들이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의 기능을 수행한 것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었다(출 19:5).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치 않았으며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았다(호 4:6; 요 1:10-11).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제사장 직분이 민족적 이스라엘로부터 영적 이스라엘로 이전되었다. 영적 이스라엘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은 중생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제사장 직분이 신약시대에는 영적 이스라엘로 옮겨졌으므로 신약시대에는 성도마다 왕 같은 대제사장이 되었다(벧전 2:9; 계 5:10). 이 얼마나 높아진 신분인가!
4. 성도마다 대제사장(Every Believer a High Priest)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모든 민족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고귀한 신분을 신약시대에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에게 적용시켰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① “택한 족속”(에크레크톤 게노스, evklekton ge,noj; a chosen race; 택한 족속, 선택한 민족)은 선민(選民)을 가리킨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신 7:6-7). 이 말씀은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되었다(신 7:6-7; 사 43:10, 20; 44:1-2).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택한 선민임을 자랑하였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지혜를 자랑하고, 로마인들은 그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강대국의 시민권을 자랑하였다.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족속을 자랑하는 또는 족보를 자랑하는 본능이 있다.
그러나 신약시대, 은혜시대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택한 족속이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선민이 민족적 이스라엘로부터 영적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이전되었다. 그리스도 안에는 차별이 없이 다 하나님의 택한 족속이 되었다(엡 1:4; 벧전 1:2).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2:10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였다. 신약시대 성도들이야말로 이 죄악 세상에서 구출된 자들일 뿐 아니라, 동일 민족 가운데서도 선택된 하나님의 선민(택한 백성)이 되었다. 이 얼마나 감사한가!
② “왕 같은 제사장”(바실레이온 히에라크튜마, basi,leion i`era,kteuma; a royal priesthood),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 곧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출애굽기 19:6을 인용한 말씀이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사 61:6).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 나라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였다. 구약시대 제사장은 많은 민족들 중에 이스라엘민족, 이스라엘 12 지파 중에 레위지파→아론의 자손들→엘르아살과 이다말의 자손들→남자들만→30세 이상→육체적으로 흠이 없는 자→도덕적으로 무흠한 자들이 제사장들이 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도들을 “거룩한 제사장”(a holy priesthood) 또는 “왕 같은 제사장”(a royal priesthood)이라고 불렀다(벧전 2:5, 9; 계 1:6). 신약시대 성도들은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하에 있는 거룩한 제사장,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의 권위. 이신칭의와 더불어 성도마다 대제사장(universal priesthood of belie- vers)을 강조하였다. 성도들은 칼빈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인 대제사장들이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왕정(왕이 통치하는 정부)의 제사장, 즉 하나님의 왕국의 제사장 또는 왕이요, 제사장(king/priest)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왕이요,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을 회상시킨다(히 7:1 이하). 그러나 신약시대 성도들은 신령한 영적 왕국의 왕들이요,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신약시대는 교회 내에서 목사·장로·감독·집사 등은 찾아 볼 수 있어도 제사장 직분은 찾아 볼수 없다. 그 이유는 성도마다 대제사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로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6).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제사장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로 드려야 한다.
③ “거룩한 나라”(에드노스 하기온, e;qnoj a[gion; a holy nation)라는 말씀도 출애굽기 19:6의 “너희는 …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에서 나왔다. 신명기 28:9“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거룩한 나라는 거룩한 공동체(교회)를 말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인들의 도덕적 불결들(impurities)로부터 성별된 거룩한 나라였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그들의 내적 불결 때문에 “거룩한 나라”라는 특권을 하나님은 거두어 가셨다. 그런데 그 고귀한 신분이 신약 은혜의 시대에는 성도들에게로 이전되었다.
성도들은 거룩한 제사장들이니 먼저 자신들이 거룩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성도들을 중생시키실 때 자신의 거룩한 성향을 성도들에게 심어 주시고(벧후 1:3) 성도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벧전 1:16)라고 거룩을 요구했다. 성도들이 지상에서 완전한 거룩을 성취할 수는 없으나 생활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거룩을 향하여 거룩의 진보가 있어야 할 것이다.
④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라오스 에이스 페리포이에신, lao.j ei,j pe ripoi,hsin; a people for<God’s own> possession)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백성”(lao.j; people; 국민)은 나라의 국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 나라의 백성(국민)을 가리킨다(신 4:20; 7:6; 14:2; 사 43:21; 말 3:17).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하나님께 속한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란 참으로 귀한 백성(precious people)이란 뜻이다.107)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주고 우리들을 사셔서 하나님 자신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셨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요, 따라서 긍휼을 얻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긍휼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백성(벧전 2:10),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 2:9), 나의 백성(롬 9:25; 고후 6:14-16; 행 15:14; 18:10)이라고 하였다. 진실로 신약시대 성도들은 높은 지위에 올라간 특별한 존재들이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이 되었다.
5. 제사장의 특권(Privileges of Priests)
(1)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특권
구약시대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 뜰이 있었고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분리되어 있었다(출 26:31-33; 히 9:2-3). 그런데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죄인들을 위하여, 그리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출 30:10; 레 16:34; 히 9:7). 지성소에는 대제사장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죄인들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도,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다시 말하면 자신을 영원한 제물로 단번에 드리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았던 성전 휘장(temple curtain)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마 27:51).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짐으로 하늘의 참 지성소가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렸으며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들이 감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소유한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만이 열어주시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힘주어 권면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히 4:16)라고 하였다. 은혜의 보좌!(the throne of grace)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보좌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보좌이다. 하나님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용서를 나타낸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의 보좌(a throne of justice)에만 계시고 은혜의 보좌에는 계시지 않으신다면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은 은혜의 보좌에도 계시므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① 담대히 나아가자!: 비록 우리는 허물과 죄가 많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② 참 마음으로 나아가자!: 히브리서 기자는 또 권면하기를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자!”(히 10:22)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의 취할 자세와 태도이다. “참 마음”(a true heart)은 허위, 거짓이 없는 진실된 마음을 가리킨다.
③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온전한 믿음”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이나 동요가 없는 신앙의 전적 확신(full assurance of faith)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는 진실된 마음의 소유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전적 확신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는 이 특권은 어떤 특권 계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다 주어진 특권이다. 이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2) 하나님 앞에 직접 제사 드리는 특권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만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도 없었고 직접 제사를 드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도마다 대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 직접 담대히 나아가서 계속 반복되던 희생의 제사가 아닌 몸의 제사, 감사의 제사, 찬미의 제사를 직접 드리게 되었다. 여기서 제사란 예배를 가리킨다. 이 얼마나 높아진 신분이며 특권인가!
① 몸의 제사(A sacrifice of body):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하였다. “몸”(body)이란 중생한 사람 전체(totality, entire person)를 가리킨다. 사람 전체란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와 지·정·의를 포함한 인격적인 면 전체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몸의 제사란 전인(全人)의 제사(헌신)을 가리킨다.
구약시대 제물은 흠없는 짐승의 희생제물(피)이었으며, 한 번 드린 제물은 또 다시 드릴 수 없었다. 아무리 흠없는 제물이라도 산 것은 제물이 될 수 없었다. 반면에 신약시대의 제물은 “산 제물”(a living sacrifice)이어야만 한다. 죽은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신다. 산 제물이란 중생한 영이 주체가 된 자아(evgw,)를 가리킨다. 신약시대 성도들은 모두가 제사장이 되어 자신들을 산 제물로 항상 드려야 한다.
“드리라”(파라스테사이, parasth/sai; present, offer, yield; 바치라, 드리라)는 말씀은 중생한 영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며 능동적으로 활동함을 뜻한다. “드리라”는 말씀은 현재 명령형이니 항상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능동적으로 활동하라는 말씀이다.
② 감사의 제사(A sacrifice of thanksgiving): 시편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성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감사의 제사는 마음 중심에서부터 진심으로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감사의 제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감사의 제사는 여하한 동물의 제사와도 비교가 안된다.
“감사”(thanks)는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또는 고마움의 표시(an expression of appreciation or gratitude)이다. 감사는 은혜를 베푸신 분에게 감사 또는 고마움을 드리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낸 단어는 영어의 thanksgiving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머리를 숙여 조용히 그리고 곰곰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 감사할 제목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말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조목조목 나열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값진 선물들을 많이 받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③ 찬미의 제사(The sacrifice of praise):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계속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글리손 아처(Gleason L. Archer)는 말하기를 “찬미와 감사의 제사는 신약시대 우리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제사이다”라고 하였다.108) 신약시대 성도들은 구약시대 성도들처럼 피의 제사는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가 영원한 희생의 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히 9:26; 10:19; 13:20). 그러므로 신약시대 성도들은 피의 제사 대신에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
히브리서 기자는 찬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마치 구약시대에 희생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표현하였다.
“찬미”(아이네시스, avi,nesij; praise; 찬미, 찬양)는 천사들이 하나님께(눅 2:13),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함에 항상 사용되었다(눅 2장; 19:37; 24:53; 행 2:47; 3:8, 9; 롬 15:11; 계 19:5). 찬미의 제사를 “입술의 열매”라고 한 이유는 우리의 입술을 벌려 찬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찬미의 제사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이다. 찬미는 구속함을 받은 자들의 특권이요, 위대한 임무이다. 감사의 제사와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시 69:30, 31).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항상 찬미해야 한다(엡 5:19; 골 3:16). 찬미는 성도들이 영원히 부를 노래(찬양)이다.
6. 복음의 제사장 직무(A Priestly Duty)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택한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목적들 중의 하나는 우리를 흑암에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다(벧전 2:9)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롬 15:16)라고 말씀하므로 구약시대 제사장에 비유하였다. 구약시대 제사장의 직분들 중 하나는 여호와께서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사자(messenger)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의 입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찾았다(레 10:11; 신 33:10; 말 2:7).
이와 같이 신약시대 성도들은 복음의 제사장적 직무를 맡은 자들이다. 복음의 제사장 직무란 하나님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권하는 직무를 가리킨다. 사도 베드로는 신약시대 제사장의 임무를 “이는 너희를 흑암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이를 선전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9)라고 하였다. “선전하게 하려 함이니라”(evzaggei, lhte; you may tell out, proclaim, declare)는 말씀은 말하다, 선포하다, 선언하다라는 뜻이다. 참으로 성도들은 흑암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선전하는, 선포하는, 선언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속의 은총을 천하 만민에게 선전하는 것이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다. 신약시대 제사장들인 성도들은 복음의 제사장적 직무를 충실히 잘 감당하고 주님 앞에 서도록 복음의 제사장적 직무에 진력할 것이다.
Ⅷ. 진리의 기둥, 터, 방파제로서의 교회
(The Church as the Pillar, Foundation and Bulwark of the Truth)
디모데전서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ㆍ존 칼빈ㆍ메이천ㆍ맥킨타이어ㆍ박형룡 박사 등 신앙의 수호자들이 중요시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교회의 성질·본분·사명이 무엇인가를 밝히 가르치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젊은 교역자 디모데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고 이단의 교훈을 방지하도록 에베소 교회에 파송하였다(딤전 1:3, 4). 바울은 마게도니아에 머물면서 속히 디모데를 방문하기를 원하였다(3:14, 15; 4:13). 그 기간에 바울은 이 서신을 디모데에게 보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은 만일 내가 에베소(교회)에 도착하는 일이 지연된다면이라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1차 석방되어 동방을 전도 여행하는 도중 A. D. 63-64년경 그의 생애 말년에 최후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기 직전, 로마에서 또는 마게도니아에서 이 말씀을 기록하였다. 바울은 속히 에베소 교회로 돌아가기를 기대하면서도 복음전도의 일로 다소 지연될 가능성을 감안하여 믿음의 아들 젊은 교역자 디모데와 온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할 것을 서신으로 교훈하였다. 그러므로 디모데서는 목회를 위한 교과서이다.
교회를 진리의 기둥ㆍ터ㆍ방파제라고 말씀하신 곳은 이곳뿐(딤전 3:15)이다. 이 말씀은 교회의 본분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교훈한다. 이 말씀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원수들에 대항하여 진리의 증거자, 변호자, 옹호자, 방수자의 사명이 있음을 교훈한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주신 것은 초대교회에 사상적 동요가 있었기 때문이다(딤전 1:4-9; 4:13; 6:3-5, 20; 딤후 2:23-26; 3:1-5; 딛 1:10-13; 3:9). 따라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디모데서를 기록한 목적이 있다.
1. 교회는 성도들이 모인 단체이다
(Church is an Assembly or Congregation of Believers).
교회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모인 단체이다. 교회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죄 중에 빠져 있던 사람들을 죄 가운데서 불러내어 나와서 주님의 이름으로 따로 모인 사람들, 사단의 권세하에 있던 사람들이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이름으로 따로 모인 사람들, 사망의 권세하에 있던 사람들이 사망의 권세에서 구출되어 주님의 이름으로 따로 모인 사람들을 가리킨다. 헬라어 원문에 교회(에클레시아, evkklhsi,a; church; 교회)라는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무리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와 성도들을 동일시하였다.
2.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다
(Church is the House of the Living God).
본문은 교회(에클레시아)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와 하나님의 집은 동일한 내용의 상이한 명칭이다. 즉 교회가 곧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집이 곧 교회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집은 예배드리는 장소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성도들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가리킨다.
집은 거하는 처소(dwelling place)를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의 중생한 영(심령) 좌소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indwelling)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 우리의 죽은 영을 (초자연적 능력의 역사 로) 중생시키신 바로 그 인격적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의 좌소를 집(거처)으로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생각해 보라.
옛날 예루살렘 성전을 “히에론”(i`ero,n)이라 하고 그 안에 지성소(holy of holies)를 “나오스”(nao,j)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지성소에 거하셨다. 나오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주님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히에론이라 하지 않고 나오스 곧 성전의 지성소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는 더 이상 성전의 지성소에 임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임재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다.
우리의 몸은 성령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이 영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고린도전서 3:17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라고 명하였다. 로마서 12:2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 타락된 세대, 죄악이 관영한 세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아야 한다. 내 몸은 피로 값주고 사신 바 된 주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성전이니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3. 교회는 진리의 터이다
(Church is the Foundation of Truth)
“터”(헤드라이오마, e`drai,wma; steadfast, foundation, basis, support, stay; 견고함ㆍ터ㆍ기초ㆍ버팀)는 견고하고 튼튼한 것을 특성으로 한다. 터는 건물이 와해되지 않도록 고정시킨다. 견고한 터 위에 집을 세우듯이, 교회는 견고한 진리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
건축가들이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터를 견고히 한다. 터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터(지반)를 조사하고(geotecknical survey) 터의 상태에 따라서 썩지 않도록 기름을 바른 크고 단단한 나무 기둥이나 또는 철근을 넣어 만든 시멘트 기둥을 땅속에 박고 진흙 같은 것은 다 제거하고, 자갈 섞인 흙으로 덮어 채운 후 지반을 견고히 하고 그 위에 시멘트로 콘크리트를 한다. 그리하여 터(foundation, 기초)를 견고히 하고 그 위에 건물을 짓는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7:24-27에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그 집의 무너짐이 심히 크니라”라고 하였다.
교회는 진리의 터(기초)이다. 교회는 진리에 근거를 두고 세워져야 한다(마 16:18). 그 이유는 교회의 모체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수가 많거나 건물이 웅장하거나 역사와 전통이 오래되었다고 튼튼한 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터 위에 세워졌으므로 견고하고 튼튼하다. 교회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교훈(교리) 위에 세워졌는데 그 교리가 파괴된다면 교회가 어떻게 설 수 있는가? 참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며 거짓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아니다.
4.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다(Church is the Pillar of Truth)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질문하였다(요 18:38). 진리(알레데이아, avlh,qeia; truth, reality; 진리ㆍ진실ㆍ참ㆍ실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요 17:17).
“기둥”(스트로스, stu,loj; pillar, column; 큰 기둥)은 나무 기둥이 아니라, 크고도 견고한 대리석 기둥 같은 것을 가리킨다. 기둥은 힘과 버팀(strength and support)의 개념을 수반한다.
기둥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기둥은 건물을 지탱하는 일을 한다. 교회를 진리의 기둥이라 함은(기둥은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을 견고히 떠받드는 것같이) 교회는 영구불변한 진리인 66권 하나님의 말씀을 견고히 떠받드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으로서 진리를 떠 받드는(sup- porting), 증거하는(testifying), 높이는(exhorting) 진리의 증거 단체이다. 교회는 진리를 보전하고 전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 각종 불신앙의 교리적, 신앙적 이단 사조가 진리를 공격할 때 교회는 그것들과 싸우며 진리를 보존하는 사명이 있다. 각 교회는 신앙고백과 경건 생활로 진리를 전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므로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는 진리를 전파하고… 진리와 교회는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기둥이 약하고, 구부러지고, 썩으면 제 구실을 못하므로 건물이 붕괴되는 것처럼 교회가 타락되면 성령의 역사는 떠나고 진리는 땅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5. 교회는 진리의 방파제이다
(Church is the Bbulwark of Truth)
교회는 진리의 터라고 하였는데, 이 터라는 단어(헤드라이오마, e`drai,w ma)의 또 다른 한 의미는 방파제 또는 요새(bulwark or fortress)라는 뜻이다.
방파제는 노도광풍이 엄습할 때 포구 안에 있는 배들을 보호해 주며, 요새는 적군이 맹공격을 해도 난공불락으로 견고히 방위하듯이, 교회는 진리의 방파제, 진리의 요새지로서 온갖 이단사조, 자유주의, 그릇된 신비주의, 무신론 공산주의, 육신의 부패성, 사단의 권세 등 신앙의 원수들을 대항하여 견고히 진리를 파수하는 것이 사명이다. 그 옛날 에베소 교회는 로마의 신화들과 끝없는 족보 이야기(자신들의 족보를 이스라엘의 유명한 조상들과 억지로 연결시켜 자랑), 그노시스 이단 사상 등이 위협을 하였다. 골로새 교회는 헛된 철학과 허탄한 이야기, 사람들의 전통, 천사 숭배 등이 팽창하였다(골 2:8, 18). 그러나 성경은 우상숭배를 금하였다(출 20:3, 4; 계 22:8, 9).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이단을 경계하도록 각별한 주의를 주었다. 그 교훈대로 준행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받은바 은사를 등한히 여기지 말고 사용하라.
오늘날 이 시대는 옛날 초대 에베소 교회의 영적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타락되었다. 불행하게도 금일의 다수의 교회들이 배교와 불신앙으로 타락되어 교회는 하나님의 집, 진리의 터, 진리의 방파제, 진리의 요새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망각하고 있다. 그런 교회들은 배교와 불신앙의 무리들을 쫓아내는 대신 오히려 그들을 상석(high seat)에 앉히고 참된 교회들을 무참히 공격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용기 분발하여 진리의 기둥·터·방파제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조영엽 박사/교회론/언약출판사/2010년 6월
'교회론 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침례교회의 교회론 (0) | 2017.02.15 |
---|---|
[스크랩] - 루이스 벌코프,『조직신학』 (0) | 2017.02.15 |
[스크랩] 교회론 (0) | 2017.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