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투스 논쟁
도나투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은 초기 교회사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이 논쟁으로 인해 초기 어거스틴의 신학이 좀 더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아래에 자세히 도나투스와 어거스틴 논쟁의 초점을 언급하였다.
도나투스파는 4세기 초, 곧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가 끝날 무렵에 일어났다. 이 파는 일찍이 몬타누스파와 노바티아누스파가 가지고 있던 청교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이들 역시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도나투스파가 직접 생긴 원인은 박해 기간 중에 강압이나 두려움에 의해 성경을 버리거나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는 교회는 이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범죄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떠난 교회이므로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저지른 지도자들로부터 세례를 받거나 가르침을 받는 것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대부분의 감독들은 관용 정책을 써서 박해시에 범죄한 자들을 비호하고 반대로 도나투스파와 같은 강경론자을 탄압했다. 그래서 강경론자들은 새 감독을 세웠는데 316년에는 도나투스가 카르타고의 강경론자들이 세운 새 감독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되어서 카르타고에는 두 사람의 감독이 있게 되었고 북아프리카의 교회는 그후 약 100년간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도나투스파는 급속히 발전하여 로마 제국의 다른 지방에도 전파되었다. 그들은 콘스탄틴 황제에게 자기들을 보호하고 후원해 달라고 호소하였으나 콘스탄틴은 처음에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박해를 당하자 도나투스파는 더 광신적인 열정으로 세력이 확장되었다. 그러자 콘스탄틴은 태도를 바꾸어 321년에 그들에게 완전한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주는 새 법을 선포했고 카톨릭에 대해서는 인내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하라고 권고했다.
도나투스파는 우선 엄격한 교회 규칙의 적용과 교인의 순결 유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러고 세속적인 사람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는 것을 절대 반대했다. 교회 일에 대해 세속 권력자가 간섭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러나 제도는 카톨릭적인 감독 정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그들도 카톨릭의 일반적인 관습을 따라 세례에 의한 중생 곧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인정했고 유아세례도 시행했다.
하지만 정작 어거스틴과 도나투스의 논쟁이 바로 세례와 성례전에 관한 사항이었다. 로마의 박해가 한참이던 시기에 기독교를 버리고 배교한 무리들이 다시 교회에 돌아오는 것에 반대하며, 특히 배교한 성직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라며 다시 세례를 받으려는 도나투스파와 세례는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성호로 받는 것이니 베풀어진 세례는 유효함을 논증한 어거스틴(히포의 어거스틴)과의 논쟁을 말한다. 당시 어거스틴과의 논쟁에 의해 도나투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이단이라고 하기 보다는 교회의 또 다른 모습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마치 신사참배로 인해 갈려진 기장과 예장의 모습이 연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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