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과 트라우마
출처: 소방방재청 재난심리상담정보센터
저자: 박성우 국립방재교육연구원 교수/철학박사
하루가 멀다 하고 방송이며 신문에서는 사고와 재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라고 안심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나에게 재난이 닥칠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재난은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밤중에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침몰하던 천안함에서 극적으로 구조된 58명은 물론, 비행기나 자동차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가족 중의 누군가가 자살한 사건을 경험한 이들, 사랑하는 아이가 납치되는 사건을 겪은 이들처럼 충격적인 재난과 사건을 체험한 이들의 내면은 일반인들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너무도 깊은 상처가 도사리고 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사자들의 마음속에서는 재난이 끝나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트라우마
이번 천안함 침몰사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진료한 국군수도병원장은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생존자들 가운데 심리가 불안하고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조절 능력이 떨어져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급성 스트레스 장애환자가 6명”이라며 “향후 후유증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 추적 관찰이 필요한 고위험군은 14명, 정신적 사고후유증인 중위험군은 17명, 후유증이 낮은 정도의 저위험군은 21명”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일부 환자는 불안과 불면증, 죄책감, 악몽, 기억문제 등 심리적인 압박을 갖고 있다”며 “앞으로 전개될 사고원인 분석과 선체 인양 결과에 따라 다양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며 절대적으로 심리적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굳이 전문가의 진료 결과가 아니라도 천암함 함장이 언론 브리핑 도중 “살아 돌아와 면목이 없다”고 하거나 해군 관계자가 “함장이 배와 함께 가라앉는 것은 영화에서나 있는 일”이라며 함장을 변호하던 상황을 보면 살아남은 사람들이 느끼는 죄책감과 자괴감 등의 심리적 상처가 매우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상처는 재난을 겪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야기한다. 탤런트 최진실씨의 자살에 충격을 받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생 최진영씨의 경우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성인의 90%는 일생 동안 적어도 한 번 이상 치명적인 사고나 화재, 홍수, 자연재해, 전투경험, 강간, 강도, 폭행, 타인의 사망이나 심한 부상 등을 목격하는 것과 같은 정신적인 충격을 경험한다고 한다. 이처럼 충격을 받은 사람들의 가족이 받을 2차 충격까지 감안하면 결국 재난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와 같은 사실은 9.11 테러가 발생한 이후 사고 장면을 TV로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한 사례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충격의 파편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
정신의학에서는 전쟁, 천재지변, 화재, 신체적 폭행, 강간, 자동차·비행기·기차·선박 등에 의한 사고와 재난이 발생하여 인간의 정신이나 신체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커다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 때 피해자의 내면에서 그 충격이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증세로 발현되고 있다고 분석하고, 이를 ‘외상(外傷)’, ‘트라우마(trauma)’,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외상(trauma)’이라고 하면 뼈가 부러지거나 상처가 나는 것과 같은 상태를 떠올리지만, 정신의학에서는 외상이라는 용어를 ‘심리적 충격’의 개념으로 본다. 따라서 ‘외상’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그 사건 때문에 인간이 받는 정신적 영향을 표현하는 개념인 것이다.
외상의 증세는 개인에 따라 충격 이후에 곧바로 나타나거나 수일에서 수년이 지난 후에 나타나기도 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급성의 경우 비교적 예후가 좋지만 만성의 경우 후유증이 심해서 환자의 30% 정도만 회복되고 40%는 가벼운 증세, 나머지는 중증도의 증세와 함께 사회적 복귀가 어려운 상태가 되기도 한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군인들이 전쟁터에 가지 않은 군인들에 비해 자살이나 살인을 일으킬 확률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 같은 조사는 군대에 가기 전에는 평범한 군인이었는데 전쟁에 수년간 참전했다가 돌아온 후 쉽게 흥분하거나 난폭해졌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실패하여 사회 적응에 어려움이 많았다는 사례들이 알려지면서 그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충격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미국 외교안보 분야 연구기관 ‘랜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아프간 및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예비역 군인 3만 명 중 20%에 해당하는 6.000여 명이 정신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알코올 중독, 가정폭력, 파산 등으로 나락에 빠져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2003년 이라크 전쟁 개전 이후 지난해 말까지 미군 내 알코올 남용 건수가 2배로 늘어났으며 미군 1,000명 중 11명이 알코올 남용 및 중독 증상을 보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이라크·아프간 참전미군회(IAVA)는 지난해 “참전군인 3명 중 1명이 정신적인 장애를 겪고 있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2007년까지 이라크에 파병된 미군 병사는 총 150만 명에 이르는데, 이중 50만 명 이상이 우울증과 정서불안, 자살 충동 등의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 조사결과에 의하면 참전군인의 가족들은 그들에 대해 “사람이 달라져서 돌아왔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참전군인들은 늘 긴장하고 편안하게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차고에서 쭈그리고 자거나 군대의 비상식량을 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특히 가족에게도 화를 자주 내고 집에서도 늘 총기를 휴대하고 있으며 알코올이나 마약에 취하는 일이 잦은 이들도 상당수로 알려졌다.
전쟁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끔찍한 전투에 장시간 노출되고 잔인한 죽음의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면 아무리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걸릴 확률은 매우 높아진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아펠과 비비는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군인이라도 전쟁터에서 200일에서 240일 가량을 계속해서 지내게 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겨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은 “전투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전투에의 노출강도와 지속시간은 전쟁 신경증의 발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만큼 전투는 매순간 긴장의 연속이다”라고 말했다.
전쟁터에서 총알과 파편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군인들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충격의 파편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고 결국 정신적인 장애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사라지지 않고 반복 재생되는 충격
압도적인 충격을 경험했을 때 인간의 두뇌는 그것을 경험했을 당시의 이미지, 신체 감각, 맛과 냄새, 소리, 생각들을 모두 그대로 내면에 저장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충격의 기억은 시간이 경과난 후에도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어 당시의 신경망에 고스란히 남게 되는데, 뇌의 정보처리시스템에 마비를 일으켜 일상의 기억이 저장되는 해마의 기능을 억제하고 부정적 기억들과 감정이 저장되어 있는 편도체를 활성화시키게 된다. 즉 그 충격의 기억은 우측 뇌의 편도체에 내재적 기억의 형태로 저장되는데, 통합적인 이야기 기억으로 전환되지 않고 강렬한 신체 감각들과 이미지, 그리고 정서의 상태로 조각조각 분리된 채 그대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라우마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고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지게 되는데 이는 시간의 개념이 없는 내재적 기억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충격적인 경험의 기억이 반복적으로 재경험을 유발하게 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은 이러한 재경험의 증상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직도 지하철을 편하게 타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재경험의 증상 때문이다. 지하철역을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당시의 지옥 같은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강도의 두려움과 공포심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재경험은 깨어있는 동안에는 어떤 이미지나 잔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플래쉬백의 형태로, 잠을 자는 동안에는 반복적인 악몽을 통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데, 대개의 경우 원래의 외상기억과 비슷한 자극을 받을 때마다 재현된다고 한다.
삶을 파괴시키는 트라우마
재난의 충격은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여러 가지 형태의 후유증을 남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 식욕부진, 불안, 공포, 우울, 기억상실, 집중력 감퇴, 무기력감, 이명현상, 대인기피 등의 증상들은 흔히 말하는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트라우마로 인해 생겨난 증상인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트라우마 환자들은 감정을 흥분시킬만한 어떠한 자극과도 부딪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항상 주변 상황과 자신을 유리시킴으로써 최소한의 스트레스까지도 받지 않으려 피하게 되는데, 사회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대인관계마저도 외면하고 은둔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증상은 그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생존전략’이다. 자신의 삶을 아주 무미건조한 상태로 만들어 반복 재생되는 기억으로 인한 고통을 마비시키려는 것이다. 이른바 감정의 마비라는 이 방어기전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게 되면 그들은 불안과 공포 같은 감정은 물론이고 신체적인 통증조차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 나아가 내 자신이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인증, 현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비현실감이 생겨나게 된다. 조금이라도 과거 자신이 경험한 충격의 기억을 자극하는 일과 부딪치게 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이러한 방어기전이 작동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어기전이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 따라서 술이나 마약의 힘을 빌려 정신을 몽롱하게 만듦으로써 자극에 둔감해지려 하고 그렇게 정상적인 삶을 파괴시키게 되는 것이다.
강력한 트라우마는 세상이 안전하다는 믿음과 올바른 질서와 의미가 존재한다는 기본적인 신뢰감을 한순간에 파괴한다. 트라우마에 의해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이 무너지게 되면 인격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로 인해 정신적 방황과 극도의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본래의 자신과 단절되고, 믿어왔던 세상과도 단절되고, 자연과 신의 질서와도 단절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 이르면 트라우마 환자들은 “세상은 안전하지 않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으며, 내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라고 여기고 “이 세상에는 정의나 질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벌레만도 못한 더럽고 하찮은 존재”라고 절규한다.
트라우마의 사회적 책임
재난과 사고로 인한 엄청난 충격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외상이 발현되는 정도는 저마다 각기 다르다. 전문가들은 그 충격으로 인한 후유증이 피해자들의 내면에 얼마나 깊고 오래 남을 것인가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 즉 가족이나 친구, 연인, 배우자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이해와 지지, 그리고 함께 아파해주는 공감이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이해와 지지, 공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 트라우마는 보다 더 강력해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피해자들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때문에 가족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 모두가 트라우마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다. 실제로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서베이스프릿호 기름유출 사고와 같은 대형재난의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트라우마의 경우 매우 심각한 증상으로 발전된 사례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며, 많은 경우 심약한 정신의 탓으로 치부해 왔다는 것이다. 이른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엄청난 재난의 충격으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를 고립시켜온 피해자들을 우리 사회가 더 고립되게 소외시켜온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수많은 사건과 재난을 겪어 왔다. 그리고 같은 피해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과 대응체계를 갖추기 위해 힘써 왔다. 하지만 재난의 정신적 후유증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은 미흡한 실정이다. 소방방재청은 이러한 현실에 주목하고 2007년부터 재난이 발생한 지역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심리적 재활 활동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막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수준에 불과하다. 재난피해자들을 위한 전문적인 재활기관의 설립과 같이 후유증에 대한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접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재난은 더 이상 그것이 야기한 인적, 물적 피해로 국한되지 않는다. 재난의 충격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한 재난은 끝나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지난 대구지하철화재사고를 일으킨 김대한은 자신의 신병을 비관해온 지체장애2급의 우울증 환자로 우리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이었다. 2007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 사고로 33명을 숨지게 한 조승희도 어릴 때 이민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겪었으며 왕따, 외톨이, 우울증, 피해망상증에 시달리던 정신적 장애자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트라우마에 의해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 사회가 적극적으로 돌보는 일은 그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이자 더 큰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고 우리 스스로를 재난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내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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