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교회사2 교실

[스크랩] 교회개혁사 서론 및 독일의 종교개혁사

류성련 2014. 8. 13. 23:33

 

 

 

 

 

교회개혁사 서론 및 독일의 종교개혁사

이상규 교수


--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를 간명하게 기술한 교회개혁사는 루터, 쯔빙글리, 칼빈, 존 낙스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개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앞으로 매주 단위로 책의 내용을 차례로 연재할 것이다. --

제 1장 교회개혁이란 무엇인가?

1. 교회개혁의 이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젊은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그곳의 대학교회의 문 앞에 95개항의 논제(Die 95 Thesen)를 내건 사건은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 등 당시 교회가 가르치는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학문적인 토론을 열 계획이었지 교회개혁이라는 세계사적인 변혁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은 95개항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가 아니라 식자들만이 알 수 있는 라틴어로 작성되었던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10월 31일, 그 날을 하나의 분명한 시발점으로 하여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교회개혁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헤겔은 그의 책 「역사철학강의」에서 종교개혁을 "중세기 끝에 여명을 띄우고 솟아나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이라고 했는데, 이 표현은 어두운 중세를 퇴각시키고 근세의 새벽을 밝히는 시대의 근본적인 개혁에 관한 표현으로 교회개혁운동을 정신사적으로 정리해준다. 사실 루터 이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의 개혁을 위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는데, 15세기의 후스(John Hus, 1373-1415)가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교황의 지상권(至上權)을 부인하고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주장했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415년 화형을 당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후스가 마지막으로 한 말 "그대들이 지금은 작은 새를 불사르지만 이제 100년 후에는 큰 황새가 날 터인데 그때는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는 예언적인 선언이 있은 지 꼭 102년 만에 루터는 유럽의 역사 한 가운데로 인도되었다.


루터 자신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거사를 의도하지 않았으나 10월 31일의 95개조 사건은 루터 자신도 예견하지 못했던 교회개혁이라는 세계사적 변혁을 가져오고 말았다. 개혁의 때는 성숙되었으므로 교회개혁은 역사의 필연적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이 역사의 물줄기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적, 도덕적 부패와 타락, 국가주의(Nationalism)의 대두, 인문주의의 발흥, 그리고 중세교회의 이론적 뒷받침이었던 스콜라 철학의 붕괴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교회개혁은 이루어져야만 했고 루터는 이 개혁운동의 한 동기를 부여하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루터는 교회를 새롭게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수종들었던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랑케(Ranke)는 그의 「교회개혁의 역사」에서 루터의 출연은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었으므로 "그의 마땅히 이 세상에 오지 아니하면 안되었다."(Luther musste kommen)라고 했다. 결국 루터의 95개조를 통한 파문은 불과 한 달이 못되어 민중의 묵시적 동의를 얻으면서 전 유럽에 파급되었다. 티르나겔(T.S.Tiernagel)의「교회개혁시대」(The Reformation Era)에 의하면 16세기 당시 독일의 신분계층은 귀족이 10%, 성직자가 5% 그리고 민중이라 할 농민, 노동자 등 피지배층이 85%였다고 한다. 후에 좀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85%이상을 차지하는 민중들은 역사의 변혁을 기대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교회개혁의 일조를 담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개혁운동은 기독교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일대 변혁적 사건이 된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라고 불리는 마이네케(F. Meinecke)는 서구 역사에 영향을 끼친 가장 큰 정신적 혁명으로 두 가지를 말했는데, 그것은 역사주의(Historismus)와 교회개혁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서양에서는 교회개혁을 '더 레포매이션'(The Reformation)이라고 말한다. 개혁(Reformation)이란 말은 보통명사이며 추상명사이지만 그 앞에 정관사(the)를 붙여 쓰면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 것은 개혁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교회개혁은 단순히 종교적 영역이나 종교생활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서구의 역사와 문명 전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오해가 있어 왔다.
첫 번째 오해는 '종교개혁'이라는 용어이다. 우리는 16세기 개혁운동을 흔히 '종교개혁'(宗敎改革)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제도와 신학에 대한 개혁운동이었으므로 사실은 교회개혁(敎會改革)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일본의 영향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영어의 'The Reformation'을 '종교개혁'이라고 번역하였으며, 우리는 일본을 통해 서양사학을 배웠으므로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을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첫 인물은 호주선교사였던 왕길지(Gelson Engel, 王吉志)였는데 그는 종교개혁사를 '교회갱생사'(敎會更生史)라고 불렀다. 이런 점들은 고려해 볼 때 '교회개혁'이라는 표현이 '종교개혁'보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오해는 개혁을 단순히 교리적인 개혁운동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다. 사실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은 교리적인 개혁(Reform)만이 아니라 영적 부흥운동(Revival) 혹은 영적 쇄신 운동의 성격이 있다. 교회개혁운동이 상당한 박해 속에서도 계속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적 삶에 동력을 주는 영적 부흥의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적 개혁으로만 이해되었던 것은 당시 교회의 교리적 탈선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교리적인 개혁이 영적 쇄신운동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것은 이념화 혹은 이데올로기화되기 쉽고, 반대로 영적부흥운동이 건전한 교리적 기초를 지니지 못하면 신비주의적 혹은 주관주의적 운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개혁은 교리적 개혁과 영적부흥의 성격을 동시에 지녀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16세기 개혁은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 번째 오해는 개신교회는 16세기에 천주교회 곧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모교회(Mother Church)라고 생각하고, 신교는 분열된 교회라고 보고 있다. 이런 인식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프로테스탄트 신학, 혹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16세기에 와서 비로소 생겨난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개혁운동은 원시교회의 신앙전통을 회복하자는 것이었지, 교회전통과 단절된 어떤 새로운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 복음주의 신학을 새로운 신학(New Theology)이라 하고 개신교회를 새로운 교회(New Church)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적 기독교와의 관련성, 곧 역사적 정통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를 '새로운' 어떤 것이라고 지목했던 것은 프로테스탄트운동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현실성만 부각시키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단의 특징은 역사성은 없고 현실성만 있다. 말하자면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개신교 운동은 사도적 기독교와 관련성 없는 이단운동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개신교의 복음주의 신학 혹은 개혁주의 신학은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의 개혁자들이 창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어거스틴이 가르친 것이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었다. 단지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가톨릭의 교권 체제하에서 가려져 있었을 따름이다. 중세 교권체제 하에서도 면면히 이어온 복음주의 신앙은 16세기에 와서 다시 부흥한 것이지 16세기에 와서 비로소 생성된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다. 마치 비가 많이 오면 물은 지표면으로 흐르지만 가뭄이 심하면 물이 땅속으로 흐르는 것처럼, 가톨릭교회의 조직적인 탄압 하에서도 개혁신앙은 미미하나마 유지, 계승, 발전되어 오다가 16세기에 다시 부흥한 것이다.


교회개혁에 대한 네 번째 오해는 개혁을 오직 16세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다. 즉 교회개혁은 오늘의 현실과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개혁은 과거적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똑같은 의미를 주는 계승된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개혁자들 특히 베자(Theodore Beza)는 "교회는 개혁되었으므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지만 사람들로 구성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못하고, 항상 부패,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부단한 자기개혁을 시도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개혁의 정신이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개혁이 시작된 지 4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교회개혁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교회개혁의 의의

그러면 교회개혁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보여준 의미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교회개혁이란 원시 그리스도교 회복운동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개혁이란 그리스도 교회의 본래적인 신앙과 생활에서 이탈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형식화된 의식적 생활에서 떠나 이탈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형식화된 의식적 생활에서 떠나 본래적 기독교 혹은 사도적 교회에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성례적적인 제도(Sacramental system)와 공적(功績)사상 등 교회적 율법주의(Ecclesiastical legalism)와 비복음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근본의 기독교 혹은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개혁에서 어거스틴의 은총의 신학과 함께 사도 바울의 이신득의(以信得義)교리의 부흥을 보게 된다.

교리적(신학적) 개혁(Reform)으로서의 교회개혁

종교개혁의 의의를 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개혁의 첫째 구호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다. 개혁자들은 로마교황의 권위나 모든 세속적 전총에 항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내세웠다. 개혁자들은 중세교회의 부패의 근본적 원인을 성경에 대한 무지로 보았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경의 절대권위를 강조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가 우선시될 때 교회개혁은 불가능하게 되며 성경의 절대권위는 종속적 권위로 전락하고 만다.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개혁의 토대이자 출발점이었다. 개혁자들은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춘다."는 '오직 성경'의 원리와 오랫동안 교회에 만연되어 왔던 문자적(文字的), 혹은 여자적(如字的, Literal) 해석이나 우의적(寓意的), 혹은 풍유적(Allegorical)해석 그리고 경건주의적(신비주의적) 해석의 약점을 극복하고 역사적-문법적-신학적 성경해석 원리를 확립하였다. 이것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Scripture Interprets Scripture)."는 주장이다.


16세기 개혁이 가져온 또 하나의 커다란 신학적 성취는 구원관에 있어서 복음주의적 체계이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 혹은 행위(works)나 공로(merits)에 의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였다. 신앙의인(信仰義認)의 교리, 더 정확히 말하면 은총을 통해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인(義認)교리는 개혁운동의 근간이다. 이 신학은 교회 내에 오랫동안 있어 왔던 소위 '신인협동설'(神人協同設)을 극복하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포하였다. '오직 믿음'과 함께 '오직 은혜'(Sola Gratia)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이며 양자는 다 같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니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한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알미니안들의 주장처럼 받을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교회개혁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성취는 '만인 사제직'(Universal priesthood of believers)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한 중세적 교권체제에 대한 거부이며 가톨릭의 사제주의(Sacerdotalism)를 개혁한 것이다. 교회개혁의 큰 의의는, 신부(성직자)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신자(평신도)의 영혼을 책임지고 신자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한다는 사제주의(司祭主義)의 그릇된 가르침을 극복한 것이다. 칼빈주의가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가톨릭의 사제주의를 개혁하고 모든 사람은-그가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지나치게 구분하고 성직자를 평신도보다 우월한 특권층으로 보려는 사고는 로마 가톨릭적이다.


로마 가톨릭은 7성례를 동반한 사제주의로 교권체제를 유지해 왔으나 개혁자들은 이것을 부인하고 하나님과 사랑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며 마리아도, 성자도, 교황(신부)도 중보자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만인사제직의 발견이다.

영적 부흥운동(Revival)으로서의 개혁

교회개혁은 은혜의 교리를 재발견하고 사도적 교회로의 회복을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진 오랜 역사의 침체에서 벗어나 영적 부흥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런 점에서 캠브릿지 대학의 피터 뉴만 브룩스(Peter Newman Brooks)교수는 "교회개혁의 본질적으로 목회적 성격을 띤 운동이었다."라고 평하였다. 즉 개혁활동은 의식과 제도의 강보에 쌓여 냉랭한 스콜라주의적 이성으로 오도된 교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당시의 백성들에게 영적 소생의 빛을 주었다. 이런 점에서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의 저술과 성경강해, 성경주해와 설교는 다 목회적 동기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한 가지는 영적 부흥에 대한 갈망이었고 이 영적 갈망은 교회개혁운동의 내적 동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스콜라철학으로 무장된 제도화된 교회와 의식적 종교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부흥을 희구했던 바 이 갈망은 개혁을 통해 구체화되어 갔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 부흥 없는 개혁은 공허한 것이며, 교회적 개혁 없는 부흥은 무의미하다. 진리에 대한 고통스러울 정도의 재검토 없이, 그리고 진리에 복종할 각오 없이는 영적 부흥은 있을 수 없다. 교회사상에 있어서 부흥운동은 항상 시대적 제약성과 한계성 그리고 보편적 원리가 될 수 없는 어느 정도의 약점을 지니지만 16세기 개혁은 신약교회의 부흥운동과 가장 가까운 영적 부흥이었다.

16세기 개혁에 있어서 교리적 요소가 영적 부흥의 측면보다 더욱 분명하게 부각됐던 이유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의식이 성경에서 지나치게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과 예배의식, 교회적 생활에 있어서 성경적 원리들이 재 규명, 재 진술되는 일이 보다 시급하고 긴박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교회개혁은 독일에서는 루터를 통해 시작되었지만 스위스에서는 취리히를 중심으로 쯔빙글리(U. Zwingli, 1484~1531)에 의해서,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불어 사용지역에서는 칼빈(J. Calvin, 1509~1564)에 의해 추진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개혁자들에 의해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종교개혁사에 있어서 루터, 쯔빙글리, 칼빈의 개혁운동이 주류(主流)이며 정통이라고 한다면, 재세례파(Anabaptists), 신령파(Spiritualists), 복음주의적 합리론자(Evangelical Rationalists)들은 비주류 혹은 잠류(潛流)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윌리암스(G. H. Williams)는 전자를 관료적 혹은 행정적(Magisterial) 개혁이라고 하고, 후자를 급진적(Radical)개혁이라고 명명하였다.


3. 교회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때가 찬 경륜

1400년대를 마감하고 1500년대가 시작되는 한 시대의 변혁기에 유럽에서는 실로 엄청난 정신적 변화가 조용한 혁명을 예비하고 있었다. 이 변화는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다. 정치질서나 문화현상, 세계관뿐만 아니라 교회중심의 구조(ecclesiastical structure)는 새로운 개편을 요청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던 중세문화가 붕괴되고 서구문명의 새로운 단계의 중요한 양상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6세기에는 이전 시대와는 선명하게 구별되는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등이 유럽의 들판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지식을 매개로 한 것으로써 이 변화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인물은 콜룸부스(Columbus), 바스코 다 가마(Vasco de Gama), 그리고 코페니쿠스(Copernicus)였다.


콜롬부스는 1492년 10월 12일,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구라파 중심의 세계질서에 충격을 주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와서 1498년 인도와 중국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지리상의 발견은 세계관의 변화를 주기에 충분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폴란드인으로서 교회법학자이자 의사였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設)은 천동설 중심의 우주관에 매여 있던 중세의 마당에 떨어진 폭탄이었다. 천체의 움직임과 지동설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단순히 물리학자의 발견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업과 무역, 도시화와 새로운 사회계급(bourgeoisie)의 대두, 그리고 사상적 혁명과 사회구조의 변혁을 가져왔다. 니콜라우스 카자누스(Nikolaus Casanus, 1401~1464)와 야콥 뵈메(Jacob Böhme)같은 학자들의 자유로운 학리(學理)이론 역시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의 새로운 단계의 중요한 양상들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16세기 초, 유럽의 언덕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세계사적인 사건들은 후론하게 될 교회 내외의 변화의 동인들과 더불어, 소위 '중세'(the middle ages)라고 불리는 장구한 교황 중심의 질서를 서부 유럽의 서편으로 퇴각시키는 역사의 동력이 되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종교개혁은 우선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이었다. '때가 차매'(갈 4:4) 그 아들을 보내셨던 하나님께서는 교회개혁의 때가 충만했을 때 루터의 역사의 한복판으로 불러내신 것이다. 당시 루터는 작센지방의 작은 도시였던 비텐베르크의 무명의 교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은 겨우 2천명의 인구를 가진 한적한 지방 도시로서 루터 자신의 표현대로 '문명세계의 끝'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루터는 교회개혁을 의도하거나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그 시대의 변혁을 이끌어간 사건들을 태동시킨 첫 인물이 되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루터가 제기한 '95개의 항의'는 한 달이 못되어 유럽의 주요 도시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때로부터 유럽을 격동시킨 힘들은 한 개인의 의지나 노력과는 비견할 수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점들은 교회개혁이 바로 그 시대적 요청이었으며 개혁의 때가 성숙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개혁은 누군가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역사의 필연이었다.


역사에 있어서 모든 동인(動因)은 하나님의 섭리에 있음을 고백할 때 교회개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시대 시대마다 신실한 사역자들을 세우시고 일해 오신 하나님께서는 16세기에도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셨다. 개혁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이었다.

우리는 역사의 발전을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 설명하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회개혁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 없다. 교회개혁의 원인에 대한 토론은 오늘날까지도 쟁점으로 남아 있다. 이미 불크하르트(Jocob Burckhardt)가 말한 바처럼 그 어떤 설명으로도 개혁의 원인을 완벽하게 기술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여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중세교회의 부패

종교개혁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개혁을 가능케 했던 직접적인 요인은 중세교회의 부패였다. 특히 중세 후기의 교회는 세속권력과의 야합,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크게 속화되어 있었고 성직자들의 영적, 도덕적 부패는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오도된 신학과 교리적 탈선, 불의한 제도와 이교(異敎) 의식 등 교회의 타락과 종교생활의 폐해는 심각했으므로 개혁은 불가피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천주교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개혁운동기의 초기 교황이었던 아드리아누스 6세(Adrianus Ⅵ, 1522~1523)는 신성 로마제국의 뉘른베르크 국회(1522~1523)에 파견한 교황사절 프란체스코 치에레가띠(Francesco Chieregati) 추기경에게 보낸 훈령에서 "루터 이단으로 교회가 받은 어려움의 책임은 성직자들, 특히 교황청과 그 성직자들에게 있다."라고 시인하였다.


소위 '돈 만드는 천재'(financial genius)로 알려진 교황 요한 22세(John ⅩⅩⅡ, 1316~1334)는 각종의 징세제도를 창안하여 돈을 모았고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가 창안한 징세제도는 교회질서를 극도로 문란하게 했고 교황청의 사치를 가중시켰다. 교황 비오 2세(Pius Ⅱ, 1458~1464)나 이노센티우스 8세(Innocentius Ⅷ, 1484~1492) 등은 도덕적으로 방종하여 사생아까지 두어 세인의 지탄을 받았던 교황이었다. 교회개혁 직전의 교황이었던 알렉산더 6세(Alexander Ⅵ, 1492~1503)의 타락은 그 이전의 교황과는 비견할 바가 못 된다. 그는 당시 교회의 관행과 규율을 무시하고 방종한 생을 살았던 악명 높은 교황이었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이미 몇 사람의 정부와 3남 1녀의 자녀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후에 7명의 자녀를 더 얻었다. 그는 1492년에 교황이 되었는데, 이때도 그는 경쟁자들을 금품으로 매수하였다. 그의 폭식, 음란은 극에 달하였고 일단 파티를 열면 녹초가 되기까지 먹고 마시고 즐겼으므로 역사가는 그의 ‘살인적 파티’(lethal dinner parties)를 유명한 일화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들들도 ‘천재적인 난봉꾼들’(Virtuosen des verbrechens)로 알려져 있다. 플로렌스에서 교황청의 부패와 통박하고 교회개혁을 주장했던 도미니칸 수도사 사바나롤라(Savanarola)를 처형한 것도 알렉산더 6세였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의 콘스탄츠 교구의 경우 연간 1500명에 이르는 사제(신부)들의 사생아가 태어났다는 기록만 보아도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 더욱 더 가관이었던 것은 당시 교회는 사생아를 둔 성직자들에게 취첩과 아이 양육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세금(concubinagefee)을 물게 하여 성직자들의 비행을 묵과하는 동시에 부를 축적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루터가 95조개를 게재할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Leo Ⅹ, 1513~1521)는 사냥과 오락을 즐겼던 인물로서 매우 세속적인 교황이었다. 그는 교회 내에 여러 개혁의 요구, 곧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 로이힐린(J. Reuchlin, 1455~1522), 훗텐(Ulrich von Hutten, 1488~1523)의 개혁 요구를 묵살하고 교황권을 남용했을 뿐만 아니라 면죄부를 발행, 판매케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발달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니콜라스 5세(Nicholas Ⅴ, 1447~1455)에서 레오 10세에 이르는 10명의 교황을 르네상스 교황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이름 그대로 르네상스시대의 영향을 받았던 자들로서 교회의 재산과 영토를 사유화하고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족벌체제화한 과오를 범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영적, 도덕적 지도자라기보다는 불의한 세속군주였다.

교리적 탈선

교회개혁의 원인에 대하여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되는 점은 교회의 부패를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보다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문제는 교회의 신학적 혹은 교리적 탈선(doctrinal deviation)이었다. 특히 구원관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크게 이탈하였다. 이 교리적 탈선은 교회생활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다. 예컨대 교직자들이 여러 직책을 맡고 그 수입과 성직록(聖職錄)을 독점하였던 소위 ‘겸직제도’나,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장소(성당)에 있을 수 없으므로 겸직제도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었던 ‘부재직임제도’(不在職任制度, absenteeism)등과 같은 제도는 교리적 탈선의 결과였다.


당시 교회에 편만해 잇던 각종 미신과 잡다한 이교적 풍습 또한 교리적 탈선을 예증하고 있다. 루이스 스피츠(Lewis Spitz)에 의하면 교회의 각종 신조들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회가 시행하는 미사나 예배의식은 이교적 관습과 혼합되어 있었다고 했다.

이 시대의 신학적 혼란은 새로운 신학운동, 곧 비아 모더르나(via Moderna)라고 불리는 윌리암 옥캄(William of Occam, 1300~1349)을 따르는 유명론자들(唯名論者, nominalists)과 비아 안티꾸아(via Antiqua)라고 지칭되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ns Aquinas, 1224~1274)를 따르는 실재론자들(實在論者, realists)간의 대립으로 더욱 가중되었다. 신앙과 이성을 융합하려는 토마스의 합리주의적 신학은 13세기 이래 교회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14세기에서부터 프란체스코 신학자들은 토마스의 이성주의(理性主義), 곧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이 최고의 기능이라는 견해에 대립하여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던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5~1308)의 신학을 주창하였다. 스코투스는 토마스의 이성(理性)에 대한 의지(意志)의 우위성을 강조하였는데 이 견해는 프란체스코 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이들은 후에 신앙과 이성을 완전히 분리해 높음으로써 합리주의적 스콜라 사상의 기초를 붕괴시켰다.


실재론자인 토마스는 실재론적 철학에 근거하여 신학과 교회의 구조를 설명하였는데, 개체(個體, individuals)는 우주적 실재(宇宙的 實在, Universals)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고 교회나 국가는 다수 개체의 집합체가 아니라 이보다 우선하는 보편적 실재에 근거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신학자들의 전통 속에서 성장한 옥캄은 장구한 세월 동안 교회의 이념적 기초였던 토마스의 스콜라 신학(Scholasticism)에 반기를 들고 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개체뿐이며 보편은 이름뿐이라고 하여 소위 유명론(nominalism)을 주장하였다. 당시 교회는 토마스의 철학에 근거하여 개체보다 우선하는 보편의 실재를 믿는 보편교회를 주장해 왔으나 옥캄과 그 추종자들은 보편은 시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므로 당시 교회 곧 전 구라파를 포용하는 거대한 조직체는 이론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중세교회의 붕괴에 기여하였다.


루터는 옥캄의 유명론을 따랐던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1420~1485)의 저서를 통해 비아 모더르나 신학을 공부하였다. 비록 그는 옥캄의 개인주의적 유명론 철학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보편은 이름뿐이며, 실재하는 것은 개체라고 주장했던 옥캄의 신학(via moderna)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프란짼(A. Franzen)과 돌란(J. Dolan)은 「교회사요론」(A Concise History of the Church)에서 루터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사상은 옥캄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정도다.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대두와 교회체제의 붕괴

교회개혁의 역사적, 혹은 정치적 배경으로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를 들 수 있다. 이미 14세기 무렵부터 민족국가 (nation state)들이 교황청과 제국 하에서 이룩된 서부 유럽의 통합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중세는 하나의 국제적인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국가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교회가 하나의 국가로서의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대두는 중세의 보편적 교회중심체계에 균열을 가져왔다. 중세 말에 이르러 국가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점차로 발달하게 되자 영국, 프랑스, 에스파니아 등 서유럽 국가들은 인종, 언어,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는 민족적 연대감을 기초로 왕권의 확립을 가져왔고 이러한 양상은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대두를 촉진시켜 주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왕권과 교황권의 대립과 갈등을 초래하였는데 그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프랑스 왕 필립 4세(Philip IV)와 교황 보니페이스 8세(Boniface VIII)의 대립을 들 수 있다.


필립 4세가 전쟁비용 확보를 위해 교회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게 되자 교황은 1296년(Clericis Laics)과 1302년(Unam Sanctam)교서를 발표하고 교황의 허가 없는 징세를 금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위협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필립왕과의 대결에서 패배하였다. 이것은 국가주의의 대두로 말미암아 의회가 필립왕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황권은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프랑스왕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1305년 교황에 취임한 끌레멘스 5세(Clemens V, 1305~1314)는 프랑스 출신으로서 로마에 있던 교황청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때로부터 1377년까지 70년간 아비뇽에 머물렀다. 이것은 교황이 프랑스왕의 통제 하에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이 기간동안의 일곱 명의 교황, 곧 끌레멘스 5세, 요한 22세(John XXII, 1316~1334), 베네딕또 12세(Benendictus XII, 1334~1342), 우르바누스 5세(Urbanus V, 1362~1370), 그레고리오 11세(Gregorius XI, 1370~1378)는 다 프랑스인이었다는 점만 보아도 분명하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단테(Dante, 1266~1321)와 인문주의자 페트라카(Francesco Petraca, 1304~1374)는 아비뇽 교황들을 프랑스왕의 포로라고 하면서 “교황의 바벨론포로”라고 비꼬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점들은 민족주의의 발흥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교황권의 퇴보와 중세 질서의 붕괴의 한 원인을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감으로써 아비뇽시대는 끝났으나 그의 사후 추기경단이 분열되어 후임 교황선출이 지연되다가 1378년 우르바누스 6세(Urbanus VI, 1378~1389)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누스가 추기경들과 불화를 빚게 되자 프랑스와 에스파니아 추기경들은 교황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프랑스왕의 사촌인 제네바 대주교 로베르(Robert) 추기경을 다시 교황으로 선출(끌레멘스 7세, 1378~1394)하였고, 그가 아비뇽에서 취임하게 되자 교황청은 분열되었다. 이때로부터 1417년까지 40년을 ‘교황청의 대분열기’라고 부르는데 이 기간에 교황의 권위가 극도로 실추되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1409년 이탈리아 피사(Pisa)에서 열린 공의회는 당시 로마교황인 그레고리오 12세(Gregorius XII, 1406~1415)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또 13세(Benedictus XIII, 1394~1422)의 퇴임을 전제로 하고 알렉산더 5세(Alexander V, 1409~1419)를 선출하였으나 곧 사망하므로 다시 요한 23세(John XXIII, 1410~1419)를 선출하였는데 앞의 두 교황이 퇴임을 거부하므로 결국 교황은 세 사람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와중에서 교회는 극도로 분열되었고 세 교황은 각기 정통성을 주장하여 반대자들을 서로 파문함으로써 당시 교회는 대부분 파문 상태에 있었다.


이상과 같은 민족주의의 대두 등 정치적 상황은 극도의 혼란과 분열 가운데 실추된 교황권과 더불어 개혁의 필요성을 확신시켜 주고 있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교회개혁의 배경이 되었던 또 한 가지 요인으로 인문주의 운동이었다. 흔히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새로운 문화운동은 1350년 북부 이태리에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5~16세기 영국, 에스파니아, 헝가리, 폴란드, 네덜란드 등 구라파 전역으로 확산된 운동인데 중세적 인간관과는 달리 인간성을 고양하는 새로운 인간관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인본주의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불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한마디로 ‘인간의 발견’(discovery of man)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때의 르네상스운동을 다른 인문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르네상스 인문주의’(Renaissance Humanism)라고 일컫는다. 이 운동은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고전문학, 곧 희랍, 로마문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이들은 1세기의 라틴어체, 곧 키케로(Cicero)의 라틴어를 복구하려고 했다. 인문주의는 고전어 연구를 촉진시켰고 고전어 연구는 성경원전에 대한 연구와 함께 문헌학(Philology)을 발전시켰다. 이 점은 교회개혁을 예비하는 값진 봉사를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7-1457)였다. 그는 문헌비평학을 도입하여 오랜 세기동안 교황권을 지원해 주는 자료로 사용되었던 소위 ‘콘스탄틴 기증서(Donation of Constantine)'가 콘스탄틴 황제 당시에 작성된 문서가 아니라 8세기에 조작된 위조문서임을 고증함으로써 당시 교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고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적씩 고백한 문서라는 루피누스(Rufinus)의 설명이 허구임을 규명하였다.


특히 발라는 어거스틴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당시 읽혀지는 어거스틴의 작품 중 40%정도는 후대의 첨삭으로 변조되어 있음을 밝혀냄으로써 충격을 주었다. 말하자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중세는 ‘역사적 관점’(Historical Perspective)을 갖지 못했다. 문헌학 자체가 ‘역사적' 학문임을 생각해 볼 때 르네상스 운동은 새로운 과학적 방법인 ‘역사적․비평적 방법’을 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방법은 원천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는 바 ad fontes, 곧 ‘원천에로의 복귀’(Back to the source)는 인문주의 운동의 중요한 이념이었다.


결국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연구 뿐만 아니라 교회개혁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인문주의가 중세교회와 스콜라신학을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역사 비평적인 문헌학 연구는 교황권과 스콜라신학의 붕괴를 촉진시켰으며 종교개혁을 위한 예비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 이들이 교황과 교직자들의 부도덕과 사치를 비판하고 풍자한 일은 개혁의 대중적 동의를 가능케 했다. 이 당시 인구의 90%가 인문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보고를 참고해 볼 때 인문주의자들은 루터에 앞서 개혁의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와 쯔빙글리를 비롯한 당시 개혁자들도 인문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회 경제적 배경

당시의 사회 경제적 상황 또한 교회개혁의 원인이었다. 경제적 상황은 직접적으로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고 사회 구조와 경제체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교회개혁을 이끌어간 중요한 원인이었다.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12-13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상업과 도시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왔고 15세기말엽에는 부르조아 집단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하였다. 또 종래의 중세 봉건 제도에 완전히 적응하고 있던 교회는 기득권 곧 기존의 계급체제 및 행정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500년대의 유럽 인구는 6천 5백만 내지 8천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약 60명이상의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대주교 등 교회지도자들이 지배계급으로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었고, 농민과 노동자들은 매우 빈곤한 상태에 있었다. 앞서 티르나겔에 의하면 15세기 말엽에는 적어도 85%이상의 백성들이 피지배계급으로 심각한 경제적 빈곤 가운데 있었다.


스피츠에 의하면 단시 유럽 토지의 3분의 1은 교회의 소유이거나 교회의 통제아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산물 중에서 70-80%를 지대(地代)와 세금, 헌금 등으로 영주나 교회에 바쳐야 했으므로 농민들의 생활상은 비참할 지경이었다.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1524년 폭발된 농민전쟁 때 루터의 동정을 구하기 위해 루터에게 제출한 12개 신조(1525년)에 잘 반영되어 있다.


루터는 부(소유)는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핍절된 이웃을 위해 분배되지 않은 제물은 ‘소유의 본질’(nature of possesion)을 상실한 것으로 규정하고 설교했으나, 이기적인 악적 자본가들의 고리대금업은 그치지 않았고 소유하지 못한 계층을 더욱 깊은 가난의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교회 또한 물질적 탐욕에 깊이 젖어 있었다. 아마도 이와 같은 배금사상, 곧 황금은 영혼을 천국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사상에서 면죄부까지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형편에서 설교가 존 게일러 (Johannes Geiler von Kaysersburg, 1445-1510)는 “성직자들의 영혼을 낚는 어부 대신 영지를 낚는 어부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했다. 어떤 사회든지 소수의 지배계층이나 특권층은 보수적 경향을 지니지만 피지배계층은 사회변혁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농민들과 노동자 등 대부분의 백성들은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 요구는 개혁 운동의 확산에 소위 민중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교회개혁은 독일의 남부 지역보다 더 후진적이고 가난했던 독일 북부 지역에서 더욱 큰 호응을 받았던 점은 이상과 같은 사회, 경제적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영적 갈망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이 개혁의 원인이 되었고 개혁을 이끌어간 힘으로 작용했지만 구라파 전역에 범람하는 물처럼 흘러 들어간 영적인 갈망만큼 강렬한 동력이 되지는 못했다. 특히 14세기 이후 중세는 여러 가지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빈번한 기근, 유럽 인구의 5분의 2가량의 생명을 앗아간 14세기 중엽(1347-48)의 흑사병, 1453년에 이르러 끝이 난 영국과 프랑스간의 100년 전쟁, 후스 전쟁(1419-1435)과 장미 전쟁(1455-1485),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회교도들의 계속적인 위협 등과 같은 정치적 불안은 경제적 빈곤과 함께 사회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교회는 도덕적, 영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새로운 영적 운동을 갈망하고 있었다. 세속화된 교권 체계나 냉냉한 스콜라주의, 의식적 종교는 영적 기갈을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상황에서 나타난 현상이 소위 ‘마술적인 경건’(margical piety)이라고 불리는 성자숭배, 성물 혹은 성자들의 유품 숭배, 성지 순례 등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신앙 부흥 운동이었다. 이런 오도된 경건은 정당한 의미에서 영적 기갈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종교적 열정은 뜨거웠으나 이것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영적 계도력은 상실되어 있었고, 프랑스 교회사가인 델루메오(Delumeiax)의 말처럼 성직자의 수는 많았으나 성직자의 질적 수준은 한없이 낮았다.


14세기에 나타난 신비주의 운동 혹은 신비 신학은 일면 종교적 갈망의 표현이었다. 교권적 체제를 벗어나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을 추구했던 이 일련의 신앙 운동은 교회개혁의 의미가 있었다.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 타울러(Johann Tauler, 1300-1361)등에 의해 기원된 신비주의는 독일, 특히 라인강 지역에서 크게 전파되었고 후에 프랑스, 네덜란드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신령한 영적 생활을 갈망하던 노력은 네덜란드에서 헤에르트 흐루테(Geert Groote, 1340-1384)에 의해 ‘오늘의 헌신’(Devotio Moderna)운동으로 나타났고 후일 ‘공동생활 형제단’(Fratres communis vitae)으로 발전되기도 했는데, 이런 일련의 활동은 바로 영적 갈망의 표현들이었다.


이와 같이 15세기 유럽에서는 새롭고도 참된 종교적 부흥을 고대하였으나 당시 교회는 이 범람하는 여구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따라서 영적 갈망은 개혁의 원인이 되었고 개혁운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유럽의 들판에 영적 가뭄으로 인한 기갈이 심화되고 있을 때 교회개혁이라는 복음주의 신앙운동은 유럽의 대지를 촉촉히 적셔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6세기 개혁자들은 그 이전시대부터 미미하게나마 계속되어 오던 교회개혁의 의지들을 유산으로 하여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을 위해서 부름에 응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 2장. 루터와 독일에서의 개혁운동

비록 루터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변혁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 개혁운동은 1517년 루터의 ‘95개조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루터는 이때로부터 거의 30여 년 간 이 개혁운동의 주도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교회개혁사에 관한 산책을 독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1. 개혁자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Eisleben)이란 곳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다음날, 곧 성 마르틴(St. Martin)일 피터교회(Peter's Church)에서 영세를 받게 되었으므로 그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루터의 가족은 1484년 봄 만스펠트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루터의 학교교육이 시작되었다. 루터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만스펠트(Mansfeld, 1488~), 마그데부르크(Magdeburg, 1497~), 그리고 아이제나흐(Eisenach, 1498~)등 세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세 지역에서 루터에게 중세교회의 경건과 함께 라틴어 등 기본교육을 받았다. 루터가 14살 되던 해인 1497년 그의 사촌형과 함께 마그데부르크로 옮겨갔는데 비록 그는 이곳에서 1년간 체류하며 교육을 받았지만 이른바 ‘공동생활 형제단’(Brueder vom gemeinsamen Leben)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01년 5월에 루터는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은 1392년에 설립된 명문대학으로 특히 문과와 법과, 그리고 신학부는 독일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 당시 이 대학은 유명론 철학(Occamism, 곧 Via Moderna)으로 유명했는데 루터는 이 대학에서 옥캄의 후예인 비엘(G. Biel)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이 시기 루터의 지성은 유명론 철학에 의해 형성되었다. 1502년에는 이 대학으로부터 학사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57명중 13등으로 졸업했다고 한다(그러나 루이스 스피츠는 42명중 30등이었다고 쓰고 있다). 3년 뒤인 1505년에는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때는 17명중 제2위의 성적이었다고 한다. 문학석사 과정을 마친 루터는 그해 5월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 에르푸르트대학에서 법률공부를 시작했으나 그리 만족스러운 연구가 되지 못했다.


1505년 7월 2일 에르푸르트 근방 스토턴하임(Stotternheim)이라는 곳에서 한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한 루터는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때로부터 이 주일 후인 7월 17일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입단했다. 루터가 법률공부를 포기한 것은 죄의식 때문이었고,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죄의식과 더불어 죽음의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짧은 견습의 과정을 마치고 1506년 수도(修道)의 맹세를 했고, 그 이듬해 곧 1507년 2월 27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에 루터 자신이 읽었던 서약문은 가톨릭교회의 예배의식, 교리, 교회의 제 규정에 관한 것으로서 루터 자신도 “이 서약문에 너무도 감동된 나머지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술회했다. 가톨릭교회를 위해 전 생애를 바쳐 헌신하기로 서약하고 신부가 되었으나 후일 이 교회를 사악한 교회로 규정하고 교회개혁의 봉화를 들게 된 것은 그의 생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수도원에서 루터의 생활은 신학수업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교리사, 교회사, 그리고 조직신학 공부에 몰두하였고, 이때에 주로 탐독했던 책은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00~1160)의 센텐치아(Sentencia)와 아퀴나스의 제자로 유명한 학자였던 에기디우스 로마누스(Aegidius Romanus)의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에 관한 연구서 그리고 비엘(G.Biel)의 신학서적들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이지만 루터는 비엘을 통해 옥캄의 유명론 철학을 배웠는데, 비엘과 옥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구원을 위한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영역을 탐구할 때 인간이성의 제한성을 강조하면서 교리문제에 있어서는 교회의 권위를 중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인간에게는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조건적인 공로를 얻게 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예비적 은혜(prevenient grace)에 힘입어 거룩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하였다. 정리해서 말하면 성화된 생활과 선한 행위, 즉 온전한 공로에 기초하여 인간은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이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수도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고해성사를 드려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번민할 때 그에게 영적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 수도원 원장이자 비텐베르크대학 교수였던 스타우피츠(J. Staupitz)였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스타우피츠는 루터의 이런 번민의 날들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다. 스타우피츠는 루터를 뛰어난 지력과 종교적 열심을 갖춘 유능한 청년으로 인정하고 비텐베르크대학에 교수가 되도록 선제후 프레데릭에게 천거하였다. 비텐베르크대학은 1502년 설립된 신설 대학으로 당시는 소규모의 대학이었다. 루터는 1508년부터 이 대학 강단에 서게 된 것이다. 1508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강의를 시작으로 하여 1509년 3월 신학사(Baccalaureus Biblicus)학위를 수여받은 후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센텐치아」 등을 강의하였고 1509년에서 1511년 사이 에르푸르트에 잠시 거주한 일 외에 루터는 그의 대부분의 생애를 비텐베르크에서 보냈다.


1512년 10월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박사(Dokter der Theologie)학위를 받았다. 또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Licentia Magistralis)을 얻은 후 정식으로 비텐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제 루터는 성경을 교수할 수 있는 자유와 의무를 지니게 되었고 이때로부터 루터의 대부분의 강의는 성경신학 분야였다.


루터는 대학 동쪽에 위치한 어거스틴파 수도원의 작은 연구실에서 연구와 숙식을 하였는데, 이 작은 공간은 루터의 생애를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시대의 역사를 이끌어간 개혁의 선구자로 인도해 갔던 교회개혁의 진원지가 되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구원에 관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였고, 이 고민을 성경연구를 통해 복음적 진리,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소위 ‘탑 속의 경험’(Turmerlebnis)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루터가 언제 오랜 이 번민과 갈등의 터널을 통과하고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인 복음적 구원관을 터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견(異見)이 상존하고 있다. 그렇지만 1515년에서 1516년 사이에 저술한 「로마서 강의」에 보면 1519년에 쓴 「갈라디아서 강의」와 완전히 일치하는 복음주의 신학을 펼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루터의 ‘탑 속의 경험’은 1515년까지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로서 처음에는 시편을 강의하였고(1513~1515), 1515년에서 1516년에는 로마서를 강의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강의를 위한 연구를 통해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과 통찰력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전환점은 로마서 1장 17절을 주해하면서 일어났다. 이제까지 루터는 ‘하나님의 의(義)’를 능동적이고 보복적이며, 인간들에게 모든 율법을 다 지키도록 하는 본질적인 의(essential righteousness)로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의’가 수동적인 의로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시는 ‘덧입는 의’(imputed grace)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깨달음은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고 루터의 사상적 우산 아래 있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혁명적 진실이었다. 루터는 후일 이 새로운 발견의 때를 회상하면서 "…나는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때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은 감격을 체험하였으며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루터는 1516~1517년에는 갈라디아서를, 1517~1518년에는 히브리서를, 1519년에는 다시 시편을 강의하였다. 이제 루터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명확한 논리로 그의 신학을 전개하였는데 이 새로운 진리의 발견은 수많은 학생들과 동료들을 매료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1516년 루터는 시편 강해와 로마서 주석을 끝냈는데 이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의 성경연구와 어거스틴 연구는 대학 전체의 관심사였으며 하나님 곧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계속 전개되어 갔다. 이제 스콜라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러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했는데 정말 이때는 가까이 오고 있었다.


2. 면죄부 논쟁

1517월 10월 31일은 루터 개인에게는 물론이지만 서구 역사에서의 커다란 변혁의 시작이었다. 루터는 이 날 소위 ‘95개조’라고 불리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신학적 토론을 제안하는 문서를 그가 봉직하는 비텐베르크 대학 게시판에 부착한 것이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X)는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 증축을 위해 전임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Julius II, 1503~1513)때 공포된 면죄부 판매령을 시행하여 1515년부터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다. 사실 면죄부는 이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면죄부의 역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십자군 전쟁, 교황 클레멘트 6세의 칙서(Unigenitus, 1343)등을 통해 강조되어 왔고, 교황 칼릭투스(Calixtus)는 1457년 연옥에 있는 영혼들도 면죄부에 의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선언하였고,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는 1476년 공포한 칙서를 통해 연옥의 고통해제의 대상을 죽은 자만이 아니라 산 자에게도 확대시켰다. 이러한 배경에서 면죄부판매는 종교개혁 당시 거의 유럽전역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당시 교회는 1343년 교황 클레멘스 6세가 내린 칙서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피의 공로, 마리아의 공로, 그리고 성자들의 공로는 마치 은행에 예치된 무한한 자본과 같아서 다른 사람의 형법을 보상해 주고 남는다고 하는 소위 ‘잉여공로설’을 믿고 있었다. 이 잉여공로설의 요지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자들의 선행(善行)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형벌(Poena)을 속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점차로 돈이 개재되었는데 처음에는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이 돈을 냄으로써 형벌을 면케 되었으나 급기야는 세속화되어 면조부의 공개적인 판매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교황 레오 10세는 독일지역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위해 마인쯔(Mainz)의 대주교였던 알브레히트(Albrecht, 1490~1545)에게 위임하였는데 그는 여러 성직을 겸임한 자로서 면죄부판매 수입으로 교황에게 진 빚을 갚도록 내락 받았다. 루터가 활동하고 있던 비텐베르크와 인접한 지방에서는 요한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이라는 도미니크 수도사가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 앞에서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성을 설교하였고, 마인쯔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와 브란센부르크의 대주교 슐츠(Schultz)등에게 편지하여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나 변화가 없자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의 성격, 효과, 부당성, 문제의 심각성 등에 대한 토론을 제시하는 95개조를 게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선한 열매’(Opus bonum)로 구원받는다고 설교한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루터가 10월 31일에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조를 게시한 것은 그 다음날인 11월 1일에 작센(Sachsen)지방의 전 제후들과 귀족들, 신부들이 비텐베르크대학 교회에 모여 면죄부 발행의 타당성을 결의하는 대규모의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작성된 95개조의 내용은 면죄부가 신자의 영혼구원과 성화(聖化)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과 진실로 회개한 자에게는 면죄부 없이도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 글은 면죄부제도의 해악을 지적한 기념비적인 문서가 되었다.


루터의 95개조는 불과 2주안에 독일 전역에 퍼졌고 한 달만에 전 구라파에 보급되었다. 루터가 의도하였던 토론은 열리지 못한 채 심각한 논쟁이 일어났다. 11월 1일의 대규모의 행사를 주관했던 테철은 이 행사가 루터의 95개조 사건으로 무산되자 자기의 스승이었던 코흐(Konrad Koch)박사를 찾아가 루터와 대결할 학문적인 준비를 서둘렀고, 이듬해인 1518년 1월 도미니칸수도회 총회에서 106개조에 달하는 항목으로 루터를 정죄하고 이단으로 몰아 교황에게 파문을 요청키로 결의하였다. 이때 루터는 브란덴부르크의 슐츠 주교를 찾아가 95개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시 피력하고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요한 마일 엑크(Johann Mayr Eck, 1486~1543)는 루터의 절실한 친구이자 신학이념을 같이 했었으나 도리어 테첼 편에서 루터를 공격하였는데 이것은 루터에게 깊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잉골스탓트(Ingolstadt)대학 교수였던 엑크는 이때로부터 루터의 가장 집요한 적수가 되었는데, 그는 오벨리스크(Obelisks)라는 책을 써서 루터의 95개조를 비판하고 루터는 후스(John Hus)의 사상을 따르며 교황의 수위권을 반대하는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루터는 인쇄용어로 별표(*)란 의미를 지닌 「아스터리스크」(Asterisks)라는 이름의 책을 써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였는데 이것은 두 사람간의 신학논쟁의 시작이었다. 교황은 어거스틴파 수도회 책임자인 가브리엘 볼타(Gabriel Volta)를 통하여 스타우피츠에게 루터문제 해결을 지시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도록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에서 모인 어거스틴파 수도회 총회에 40개 항목의 논제를 제출하고 토론에 임했는데, 이것이 흔히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이라고 한다. 여기서 루터는 바울과 어거스틴 신학에 의존하여 스콜라주의적 주지주의(主知主義)신학을 비판하였다. 이때 제출된 루터의 논제는 그가 1513년 시편강의를 해온 이후 형성된 그의 성경 주석에 근거한 교리적 작품으로 루터의 복음주의 신학의 총화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이 토론에서 많은 사람들을 설복시키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후일 그와 함께 교회개혁운동의 동료가 된 세 사람의 젊은 신학자를 얻게 된 일은 루터에게 커다란 기쁨이었다.
마르틴 부쩌(Martin Bucer 혹은 Butzer)는 그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의 도미니크수도회 소속이었으나 아퀴나스의 신학을 버리고 인문주의를 따르던 인물이었다. 그는 루터의 논쟁을 보고 복음주의 신학자가 되었다. 그는 후일 스트라스버그의 개혁자가 되었고 칼빈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된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요한 브렌츠(Johann Brentius)였는데 그는 독일 남부지방에서 루터의 신학을 보급하였고 슈바벤(Schwaben)지방의 개혁자가 되었다. 다른 한사람은 빌리카누스(Theodore Billicanus)로써 그는 뇌르틀링겐(Nördlingen)의 개혁자가 되었는데, 이들 젊은 루터파 신학자들을 통해 복음주의 신학은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돌아온 루터는 「95개조항에 대한 해설」(라틴어 원제는 Resolutiones disputationum de indulgentiarum virtute)이란 글을 써서 교황에게 보내며(1518년 6월) 교황의 권위에 순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때는 교황청은 루터에 대한 조사를 마친 직후였는데 루터의 범죄가 뚜렷하다고 보여져 루터는 이단과 교황 모독죄로 고소되었다.


그해 8월 7일에는 루터는 로마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고, 교황은 독일주재 교황 대사인 카제탄(Thomas Cajetan, 1465~1534) 추기경에게 루터를 체포하도록 지시하였다. 카제탄은 1518년 7월 7일 아우그스부르크(Augusburg)에 도착하여 국회를 통해 정치적으로 루터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루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교황은 황제 막시밀리아누와 견제가 필요했기 때문에 선제후들의 지지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선제후 프레드리히(Frederich)의 요청을 받아들여 루터가 로마로 가지 않고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카제탄과 변론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카제탄은 교황의 지시사항 세 가지, 곧 모든 것을 취소할 것을 약속할 것, 이단적 교리를 가르치지 말 것, 거룩한 가톨릭교회의 평화를 도모하겠다고 약속할 것 등을 요구했으나 루터는 자신의 잘못이 없음을 주장하고 카제탄과 신학논쟁을 전개하였다.


이 때 루터는 성경의 권위에 의존하여 교황의 권위, 공로사상, 성례관 등에 대해 그의 사상을 전개하였고 카제탄은 교회의 권위에 근거하여 그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논거에서 이론을 전개했으므로 논쟁을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 토론에서 위험을 느낀 루터는 10월 20일 밤 몰래 아우그스부르크를 떠났다.

이와 같은 신학적 토론과 개혁운동 과정에서 정치적인 변화는 루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19년 1월 12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아누스는 사망하였고, 그의 손자인 찰스 5세(Charles V)가 1519년 6월 18일 황제로 취임하였다. 찰스 5세는 1500년생인 그는 약관 19세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일어를 모르는 스페인 사람으로서 독일내정에 깊이 개입할 수 없었다.


1519년 7월에는 라이프찌히에서 엑크와 루터, 그리고 칼슈탓트 사이에 신학토론이 전개되었는데 이 토론을 흔히 ‘라이프찌히 논쟁’(The Leibzig Debate)이라고 부른다. 엑크는 이미 1500년에 잉골스탓트 대학에서 교의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대표적인 학자였고 루터와 비견되는 학자였다. 칼슈탓트(Carlstadt)는 안드레아스 보덴슈타인(Andreas Bodenstein)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 루터의 박사학위논문 심사위원이 기도했고 루터를 훌륭한 학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이태리에서 어거스틴 연구를 마치고 돌아온(1516) 이후 1518년에 151개 항목의 논제를 써서 엑크에게 도전한 바 있는 학자였다.


후일 루터의 후계자가 된 멜랑히톤도 참가하였는데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세 가지, 곧 교황의 신적 권위, 연옥교리, 면죄부와 고해성사였다. 이 논쟁에서 루터의 최고의 권위는 성경이므로 성경보다 교황의 우위성을 말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고, 교황의 신적권위를 주장하는 엑크를 공격하였다. 엑크는 콘스탄스 회의(Constance, 1415)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위클리프와 후스의 이단이 루터를 통해 다시 나타났다고 주장하고 후스를 버리든지 콘스탄스 교회회의의 권위를 부인하든지 양자택일을 요구하였다. 루터는 교회회의도 과오를 범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후스를 처형한 것은 오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 토론에서는 루터는 ‘오직 성경’이라는 성경권위와 성경중심사상에서 논쟁을 이끌어 갔고 교부들의 권위보다도 성경의 권위가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제 개혁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밝아오는 역사의 대낮과 함께 오랜 세월동안 어두움 속에 묵인되어 왔던 교회의 절대권, 공로사상, 성례전적 미신들은 심한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교황청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교서, 곧 Exsurge Domin를 공포하였다. 이 문서는 “주여 일어나셔서 당신의 소송사건을 재판하소서”라는 말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말인데 준 파문적 경고의 교서였다. 루터는 1520년 6월에 쓴 「로마교황청에 관하여」(On the Papacy at Rome)에서 41개의 오류를 지적하였는데 교황청은 60일안에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면서 불응 시에는 파문장이 효력을 발생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이에 불응하였다. 어떤 도시에서 자기 저서를 불태운다는 소식을 접한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 교황의 교서를 다른 가톨릭 법전들과 함께 불태웠다. 이것은 만용에 가까운 용기였다. 그리고 루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대들은 진정으로 교황의 지배에서 떠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악한 세대를 향해 내가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완수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양심에 짐을 지우는 것 보다 차라리 모든 위험을 참고 견디려 합니다.

그의 말처럼 루터는 그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더 많은 날들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1529년은 독일 종교개혁 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해였다. 각종의 신학토론과 출판이 계속되었고 교회개혁의 불길은 인쇄술에 힘입어 전 구라파로 신속히 전파되고 있었다. 이 격렬한 논쟁의 와중에서 루터가 1520년에 썼던 세 가지 문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이라는 소논문인데, 이 책에서 루터는 교회개혁의 책임은 성직자들에게 있으나 그들이 이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의 귀족들은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교회를 개혁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음을 말하고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는 세 가지 벽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곧, 영적 문제에 있어서 교황의 절대권,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 교황만이 교회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하였다. 이 소책자는 1520년 8월에 출판되었다.


두 번째는 「교회의 바벨론 감금」(Von der babylonischen Gefangenschaft der Kirche)이라는 책인데 이 책은 루터가 쓴 가톨릭의 성례전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톨릭이 가르치는 7성례 중 성경적 근거가 없는 다섯 가지, 곧 견신례(confirmation), 고해성사(penance), 종유식(extreme unction), 서품식(orders), 혼인예식(marriage)을 비판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성례는 세례와 성찬뿐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찬식에서 신자들에게 잔을 돌리지 않는 것과 미사를 희생제사로 가르치는 것을 비판하였다. 특히 루터는 이 글에서 성찬에 있어서 공재설(共在設)을 주장하였다. 이 글은 1520년 10월에 출판되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인 자유에 관하여」(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라는 글인데 이글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얻는 자유에 대해 논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아무 것에도 종속되지 아니한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만민에게 봉사하며 섬기며 모든 것에 종속된다.”라는 두 가지 명제를 제시하였는데 이 글에는 루터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나타나 있다. 이 글에서 루터는 참된 신앙은 영적 노예상태에서 신자를 해방시키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다하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상의 세 편의 글을 흔히 종교개혁의 삼대 작품이라고 말하는데 위의 세 편의 글 외에 1520년 5월에 쓴 「선행에 관하여」(Von den guten Werken)도 귀중한 작품이다. 이 책에서 루터는 믿음과 선행의 관계를 설명하고 공로사상을 배격하였다.

루터가 자기의 입장을 취소하지 않고 교회의 교서를 불태웠을 때 무서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즉 1521년 1월 3일 교황은 루터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최후의 파문장, 곧 Decet Romanum Pontificem을 공포한 것이다. 이제 루터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홍해를 건넜고 교회개혁의 출애굽 사건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3. 루터의 파문과 바르트부르크성에서의 은거

1521년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은 루터는 이제 황제의 심판석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의 국가 교회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복잡하게 얽혀 있던 정치적 이해관계는 루터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터를 보름스(Worms) 제국의회에 소환하기로 한 것이다. 교황은 루터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황제와 독일 영주들의 도움이 필요하였으므로 각종의 정치적 책략과 술수를 동원하였고, 황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의 정치적 대립 때문에 루터를 미끼로 하여 교황 레오 10세를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결국 1521년 3월 6일 루터를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하는 문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독일정부는 신변보장을 약속하였으나 루터의 지지자인 선제후 프레데리히 등은 과거 요한 후스의 경우를 거울삼아 보름스에 가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복음을 불경건한 자들의 조소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보름스로 가기로 작정하고 4월 2일 비텐베르크를 떠나 보름스에 이르는 약 700㎞의 긴 여정에 올랐다. 보름스에 도착했을 때는 4월 16일이었고 이때는 이미 제국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루터가 제국회의에 출두한 날은 그 다음날인 17일이었다. 제국회의에는 황제인 찰스 5세, 일곱 명의 선제후들, 추기경 등 교회지도자들, 이 지역의 관리들, 외국의 대사 등 지도적 인물들이 대거 참여한 회의였고, 약 5000명에 달하는 군중들이 회의장 안팎에 운집하고 있었다. 이 회의는 루터의 사활문제가 판가름 나는 법정이나 다를 바 없었다.

트리에르(Trier)의 주교 서기인 요한 엑크(루터의 라이프찌히에서의 논적이었던 요한 엑크와 동명이인임.)는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는 제국의회 석상의 탁자 위에 수집해 둔 책들이 루터자신의 저서들임을 인정하는가? 둘째는 그 책의 내용을 철회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루터는 그 책들이 자신의 저서임은 인정하였으나 두 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요청하였다. 24시간을 허락받은 루터는 하루를 보낸 후 4월 18일 제국회의에 출두하였다. 그는 자신의 책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 뒤 교리적, 혹은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 결코 자신의 입장을 취소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따라 확신을 갖게 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교회 회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입니다……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양심을 거역하는 일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에 관한 아주 오래된 초기 기록에는 루터는 독일말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그의 답변을 끝냈다고 기록하였다. 즉 루터는 “내가 여기 섰습니다. 나는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Hier stehe ich. Ich kan nicht anderst. Gott helffe mir. Amen)."


비록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았으나 군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보름스에 도착하였고, 4월 17, 18일 양일간의 제국의회에서는 두려움 없이 자신의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의 행동과 그의 양심은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의 대답은 이 확신에 대한 내적 고백이었다. 그래서 그는 1천년 동안이나 구라파교회를 지배해 오던 국가권력과 교황의 권위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프로테스트(protest)할 수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양심이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양심이었다. 한국의 많은 신자들은 코람데오란 말이 칼빈의 용어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루터가 즐겨 표현했던 용어로서 ‘…앞에서’란 뜻의 라틴어 Coram은 ‘…와 함께’라는 뜻의 Cum과 ‘입’이란 뜻의 or의 합성어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양심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입, 곧 고백이었다.


루터의 답변이 있은 다음날인 4월 19일 황제 찰스 5세는 스스로 작성한 연설을 통해 일천년 동안 신봉해 온 로마교회의 전통을 수호할 것과 루터를 억압할 것을 천명하였다.

우리는 어제 루터의 연설을 들은 후 그를 처단하는데 주저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그의 말을 다시는 듣지 않겠습니다.……금후 나는 그를 공공연한 이단자로 간주할 것이며, 여러분도 신자로서 여러분의 의무를 이행하기 바랍니다.

이로써 제국의회의 형세는 결정되었다. 그러나 ‘보름스칙령’이 발표된 것은 이로부터 40여일이 지난 후였다. 즉 5월 6일 보름스국회에 파송된 교황사절 알레안더(Aleander)에 의해 작성된 최종적인 초안이 의회에 제출되었으나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지연되다가 루터를 정죄하기를 원하는 이들의 서명을 받고 5월 26일 공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칙령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루터는 교회를 더럽히고 참회를 무시한다.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부정하였다.……수도사의 복장을 한 이 악마는 지금까지의 모든 과오를 모아 놓은 자이며 그는 ‘열쇠의 권위’를 부정하고 평신도로 하여금 성직자의 피로 손을 씻도록 격려하고 있다. 그가 가르치는 교리는 반란, 분열, 전쟁, 살인, 강도, 방화 및 교계의 붕괴를 조장한다. 그는 짐승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교령(敎令)을 불태웠다…….


그는 4월 15일부터 시작하여 21일간의 유예기간을 부여받았다. 루터는 이제 유죄판결을 받은 이단으로 간주된다. 그 이후에는 아무도 그에게 무슨 일이든지, 어떤 처소도 제공해서는 안 된다. 그의 추종자들도 그와 같은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루터의 저술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야 한다.

보름스 칙령은 루터에게 거처를 제공하거나 음식물을 제공하는 행위나 어떤 형태의 도움을 주는 행위를 금하였고 이를 거역하는 자에게는 황제 모독죄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루터를 ‘주님의 포도원의 야수’라고 했던 교황 레오 10세는 즉각적인 처단을 기대했으나 루터는 이제 무명의 수도사가 아니라 구라파 전역에서 직․간접적인 지원과 후원을 받고 있었고, 지식인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묵시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밤사이에 보름스시내 도처에 루터를 지지하는 농민들의 대자보가 붙는 일이 적지 않았다.


4월 26일 루터는 보름스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안전보장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루터를 지지했던 선제후 프레데리히는 은밀히 루터를 빼돌려 아이제나흐 주변에 있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으로 데리고 갔다. 루터 일행을 비밀리 체포하였던 이곳을 오늘날 Lutherhuche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선제후 프레데리히는 신성로마제국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루터는 선제후 프레데리히로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후원을 받고 있었다. 영주는 자기 백성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는 중세적 신념을 굳게 고수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프레데리히는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통해 루터를 교황과 황제 양측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였고, 1518년부터 1521년여간의 정치적 발전들은 루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개혁운동을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루터는 이번에도 프레데리히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이때의 루터를 보호하기 위한 계획이 치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명한 화가였던 알프레드 뒤러(Alfred Dûler)까지도 황제의 앞잡이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갔을 루터의 운명을 슬퍼했을 정도였다. 사실 루터는 보호받기 위해 체포되었고 감금되었을 따름이었다.


루터는 1521년 12월에 잠시 비텐베르크를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1522년 3월까지 10개월 동안 이곳에 체류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기사(騎士)로 변장을 하고 ‘융케르 게올그’(Junker Georg)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유명한 화가 루카스 그라나흐의 1521년도 작품인 ‘융케르 게을그’는 바로 루터에 대한 작품인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루터는 이곳에서 지내는 10개월 동안 신학적 논쟁이나 토론 등 복잡한 환경을 떠나서 잠시 동안이나마 자신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개혁운동의 확산을 위해 준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축복된 날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기간 동안 루터는 건강이 좋지 못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우울증(Anfectungen)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K.S.Latourette, Christianity through the Ages, p.172). 그러나 루터는 열두 권에 달하는 책을 썼으며 에라스무스(Erasmus)가 편집한 헬라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때 쓴 대표적인 저술로는 시편 22편까지의 연구인 「시편연구」(Operationes in Psalmes), 「교회설교집」(Postilles ecclesiasliquoe), 「수도원서약에 관하여」(De votis monaticis) 등이다.


무엇보다도 이 기간 동안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일은 독일민족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준 가장 위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교회부패의 근본적인 원이이라고 보았던 루터는 성경번역의 긴박성을 깨닫고 이일을 착수하였던 것이다. 비록 루터의 번역본이 최초의 독일어 역은 아니었을지라도 “천재적이고 독창적인 업적이었다”(Lortz). 번역은 1522년 2월에 완성되었고, 그 이듬해인 1523년 9월에 출판되었다. 신약번역을 끝낸 후 루터는 여러 히브리어 교수들의 도움을 얻어 구약성경을 번역하였고 1534년에는 성경전서가 독일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여러 차례 다듬어진 그의 완역성경은 그 후 표준적인 독일어 성경의 위치를 점해갔고, 그 표현의 장중함과 적절함으로 인해 독일문학사상(文學思想) 획기적인 업적이 되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은거해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즉 루터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욱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복음적인 예배의식과 함께 미사의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하였고 성상(聖像)의 사용이나 독신제의 서원을 정죄하였다. 그 결과 그 도시에는 흥분한 군중들의 대대적인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과격한 행동은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었다. 이와 같은 급진운동의 지도적 인물은 칼슈탓트(Carlstadt)와 쯔빌링(Gabriel Zwilling, 1487-1558)이었다. 쯔빌링은 어거스틴파 수도사 출신이었는데 이 수도원의 40명의 수도사 중 수도사의 서원을 포기하고 이곳을 떠난 30명중의 한사람이었다. 프레데리히 선제후가 염려스럽게 여러 차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1521년 가을에는 더욱 과격한 개혁이 감행되었다. 결국 비텐베르크 시의회가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터는 비록 미사의 폐지나 성상제도, 독신제도의 부당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으나 점진적인 개혁을 원하고 있었다. 루터는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이 무렵에 쓴 루터의 작품이 「미사의 남용에 관하여」(On the Misuse of the Mass, 1521, 11)이다. 이 책에서는 미사제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고 로마교적 미사교리를 비판하였고 ‘희생제사’(Sacrificium)와 ‘은혜(beneficium)의 구별을 분명히 하였다.


루터가 없는 비텐베르크에서는 과격한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는데, 특히 1521년 12월말 경에는 소위 ‘쯔비카우의 예언자들’(Zwickau Prophets)이라고 불리우는 니콜라스 스토르히(Nicholas Storch), 마르크 쉬튀브너(Mark Stiibner), 토마스 드레히젤(Thomas Drechsel) 등이 비텐베르크에 와서 칼슈탓트 등과 합세하여 큰 소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쯔비카우는 종교적 혁명 발상지로 알려진 곳인데 1462년에는 27명의 왈도파신자들을 재판하고 탄압했던 곳이기도 하다.


쯔비카우의 예언자들은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강조하였고 기록된 말씀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을 강조하는 내재주의적, 주관주의적 신비주의적 운동을 전개하였다. 모든 신부주의가 그러하듯이 이들은 매우 과격하였고 혁명을 통한 신국의 도래를 열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멜랑히톤은 루터에게 비텐베르크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521년 12월 4일 비밀리 베켄베르크를 방문하였던 루터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하기 전날 밤 학생들과 시민들은 성당에 들어가 미사를 방해하고 사제를 끌어내리는 등 폭력행위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곳의 개혁운동은 오도된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루터는 곧장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돌아갔고 이때 집필한 소책자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진지한 권고, 소요와 난동을 막아라」(A Sincere Admonition to all Christians to Guard Themselves against Tumult and Revolt. 1521. 12)는 글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국가론에 관한 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국가의 존재이유를 신학적으로 조명한 작품으로서 종교개혁은 칼슈탓트와 같은 인간적 행동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하고 이 같은 행동은 국가의 힘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글은 루터가 1520년에 쓴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보다는 국가관에 있어서 보다 덜 낙관적이다.
이제 루터는 더 이상 바르트부르크성에 은거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를 아끼는 선제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10여개월동안 은거해 있던 이곳을 떠나 1522년 3월 6일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였다. 이때로부터 1546년 그가 죽기까지 거의 대부분을 비텐베르크에서 보내며 교회 개혁운동을 이끌어 갔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오도된 개혁운동의 실상을 보면서 8편의 연속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에서 루터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고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루터가 기록된 말씀을 강조한 이유는 열광주의자들이 기록된 말씀, 곧 외적인 말씀(exteral word)보다는 성령 혹은 내적인 말씀(inner word)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과격파들은 성령이 하나님께로부터 믿는 자의 영혼 속에 말씀하신다고 주장하여 기록된 말씀과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계시를 소홀히 여겼던 것이다. 루터는 또한 어떤 조건이나 동기에서든지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는 바울이 아덴에서 이방종교의 신당과 제단들을 대했을 때의 태도를 예로 들면서 폭력의 사용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또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내가 설교하고 가르치고 쓴 글 가운데서 아무에게든지 폭력으로 사람을 제제하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면죄부와 교황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힘으로나 완력으로 한 일은 없었다.”고 했고 “나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기술한 것뿐이다. 그 밖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하였다.


비텐베르크에서 행한 루터의 설교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것(diaphora, essentials)과 비본질적인 것(adiaphora, nonessentials)을 구별하였다는 점이다. 복음, 계시, 이신칭의 등과 같은 기독교 복음의 근본진리가 본질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예배의식, 수도원 입단을 위한 서원, 성상(聖像) 등은 비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루터는 후자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았고, 이름 그대로 환경과 시대와 장소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루터의 입장 때문에 루터파(Lutheran)는 가톨릭의 여러 가지 의식이나 요소들을 그대로 전수하는 보수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칼쉬탓트는 주로 이 후자의 것을 개혁하기 위해 과격한 행동이나 폭력을 사용했었다. 루터와는 달리 개혁파는 루터가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보았던 것에 대해서도 성경적 원리에 따라 철저하게 개혁함으로써 교회생활 전반에 성경적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혁파교회(Reformed church)는 루터파보다 더 성경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지도력 하에서 ‘쯔비카우의 예언자’들은 비텐베르크를 떠났고 이 도시는 다시 평온을 회복하였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치고 설교도 하고 집필도 계속하였다. 새로운 샘물을 근원에서 마시기 위해 독일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루터는 더 이상 보름스칙령에 매여 있지 않았다. 루터의 개혁운동은 점차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고 가톨릭에 대한 항거 또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판 신약성경이 1522년 9월에 출판되었고 루터의 작품들이 인쇄술의 힘을 입어 각처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1521년 12월에 출판된 멜랑히톤(Melanchton, 1497-1560)의 「신학요의」(Loci Commues) 또한 루터파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4. 교회개혁과 농민전쟁

교회개혁운동은 단순히 교회내적 개혁운동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계층의 사회적 요구가 분출되고 있었다. 당시 독일사회에서 불만 계층으로는 기사계급(Knights)과 노동자들(the working people) 그리고 농민들(the peasants)이었다. 이들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제후들과 중산층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따라서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농민들이었고 이들의 생존투쟁이 농민전쟁(1524-1525)이다.


농민전쟁이 있기 이전에 ‘기사들의 항거’가 있었다. 즉 인문주의자였던 훗텐(Ulrich von Hutten)과 지킹겐(Sickingen)을 지도자로 하여 트리에르(Trier) 대주교의 영지를 공격했으나 이들은 실패하였고 지킹겐은 1523년 4월 살해되었다. 훗텐은 스위스로 도피했으나 그도 그해에 세상을 떠났다. ‘기사들의 항거’보다 더욱 거센 사회적 요구가 농민들의 전쟁을 통해 분출되었다.


독일에 있어서 농민전쟁은 이때 갑자기 일어난 운동은 아니다. 이미 100여년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농민들의 불만이 농축된 대규모 민중봉기였고, “독일 역사상 최대의 정치적, 사회적 집단운동”(W. J. Fuchs)으로 발전하였다. 농민전쟁 배후에는 중세기 봉건제도 밑에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신음하던 일반농민들의 원한과 불만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더욱이 독일 남부의 농민들에게는 더욱 심각했다. 농민들은 노동하는 짐승과 같았고 중과세에 짓눌려 있었으며 혁명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524년 6월 지방영주들에 대한 작은 반란을 계기로 일어난 농민전쟁은 1525년 2월에는 독일의 서부, 남부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역사상 보기 드문 대규모의 농민전쟁(Bauernkrieg)으로 발전되었다. 그해 2월 27일부터 3월 1일 사이에는 쉬바비아(Swabia) 농민들에 의해 12개조(Zwlf Artickel)의 요구조건이 제시되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이 12개 조항은 재세례파 인물인 휴프마이에르(Balthasar Hubmaier)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조 개 교회의 목사 청빙권은 개 교회 교구민에게 주어져야 한다.
2조 곡물의 10분의 1세는 바쳐야 될 것이지만 각종의 세금제도(십일조)는 폐지되어야 한다.
3조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자유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농노는 폐지되어야 한다.
4조 사냥과 고기잡이는 허용되어야 한다.
5조 산림(山林)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6조 강제 노동은 제한되어야 한다.
7조 농민들에 대한 과중한 부역은 피해야 하며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할 시는 농민들의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8조 집세 혹은 토지세는 공정해야 하고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9조 재판은 성문법에 의거해야 하며 사형(死刑)은 폐지되어야 한다.
10조 불의하게 점유한 토지는 반환되어야 한다.
11조 유산을 물려받을 과부나 고아가 사망했을 경우 저들의 유산을 사망세(death due)란 이름으로 빼앗아 가서는 안 된다.
12조 이상의 조항중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내용이 있으면 즉시 철회될 것이다.

농민전쟁의 배후에는 루터의 만인 사제직론(Priesthood of believers)과 기독자의 자유가 곡해된 것이 사실이고 이들 농부들은 루터의 복음주의적 설교와 교황청에 대한 비판이 자기들의 혁명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루터를 환영하는 편이었다.


물론 이들이 루터의 복음주의 신학을 정당하게 깨달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루터의 개혁운동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고 보았으며 저들의 12개에 서명해 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루터는 서명을 거부하고 「평화에로의 권면: 슈바비아의 농민들이 채택한 12조항에 대한 대답」(An Admonition to Peace; A Reply to the 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s in Swabia, 1525. 4)이라는 권고문을 발했다. 이 글은 루터가 1520년에 쓴 「독일귀족에게 보내는 편지」 및 기사들의 반란에 자극을 받고 쓴 작품인 「국가권력에 관하여」(On the Temporal Authority)와 더불어 루터의 국가관을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루터는 이 권고문에서 교회 영주들의 학정을 비난하고 동시에 농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강력히 촉구하였다.


이 글의 전반부는 농민혁명의 책임이 우선 국가에게 있는 점을 들어 제후들을 비판한다. 루터는 제후들이 복음을 모독하였고 농민들을 착취했다고 비판했다. 나아가서 그는 농민들의 봉기와 뮌쩌같은 혁명적 개혁자의 등장은 제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결코 자기의 신학이 농민전쟁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고 제후들에게 폭군노릇을 버리고 농민들을 잘 다스릴 것을 권고하고 있다.


후반부에서 그는 농민들을 향하여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로마서 13장에 기초하여 국가 혹은 세속권력은 하나님이 그의 섭리를 위해서 제정하신 신적 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국가권력에 대한 항거는 곧 하나님의 권위에 항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루터는 통치자가 아무리 악해도 이것이 혁명을 일으킬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이것은 결국 국가자체가 하나님의 칼을 들었으니 지배자 계급의 악행은 이 국가의 칼에 의해서 처단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루터는 하나님이 주신 이 세속통치권을 박탈하려는 농민들도 강도요, 농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국가의 관료들도 강도라고 하였다. 끝으로 루터는 개혁이란 혁명이 아니라 설교된 말씀의 능력에 힘입은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농민전쟁은 복음의 진수와 너무 거리가 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되자 결국 농민들은 뮌쩌(Thomas Müntzer)와 같은 과격주의 개혁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뮌쩌는 농민전쟁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인간의 평등과 재산의 공유와 균등한 분배를 역설하였고 이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의 사용을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결국 그의 신학적인 개혁의 의지는 사회혁명적 의지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는 슈바벤(Schwaben) 튀링겐(Thueringen) 뭘하우젠(Mühlhausen)등 여러 도시를 왕래하며 농민들의 단합과 결속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옛 선동지역인 튀링겐과 만스펠트(Mansfeld)로 돌아와서 혁명군을 조직하고 그 선두에 서기도 했다.


루터의 평화에의 권고가 있었으나 농민들의 분노의 행동은 그치지 않고 삭소니지방까지 파급되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지 루터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그는 농민들을 신랄히 비판하고 1525년 5월에 「강도와 살인을 일삼는 농민에 반대하여」(Against the Robbing and Murdering Hordes of Peasants)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루터는 제후들의 학정을 비판하면서도 악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정치질서를 파괴하는 폭동은 용납할 수 없다며 칼로서 폭도(농민)들을 진압할 것을 촉구하였다. 어떤 조직이나 기초적 훈련 없이 싸웠던 농민들의 봉기는 도처에서 영주군에 의해 숙명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1525년 5월 15일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에서는 1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의 무리들이 헷세(Hesse), 작센(Saxony) 및 부룬스빅(Brunswick)의 연합군(국가측)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때에 5천명 정도가 들판과 거리에서 죽었고, 300명은 법정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반란의 도시 뮐하우젠은 1525년 5월 19일에 함락되었다. 이렇게 농민전쟁에 희생된 사람은 10만명에 달했다.


전투가 막바지에 달했을 때 농민운동의 지도자였던 뮌쩌는 어떤 집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사기가 빠진 뮌쩌는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1525년 5월 27일 처형되었다.


농민전쟁은 루터에게 많은 손실과 오해를 안겨 주었다.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소극적인 태도와 농민들에 대한 탄압에의 권고는 많은 지지 세력을 상실했다.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제세례파로 떨어져 나갔고 급진주의자들로부터는 소극적이며 세속적 국가권위 의존하는 개혁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루터의 국가관, 혹은 ‘두 왕국설’이 세상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약화시켰고, 그의 복음주의 신학이 세계와 역사에 대한 정당한 관심을 소홀히 했다는 점에서 농민들이 흘린 피에 대해 루터는 무관할 수 없다.


농민반란이 거의 종결되던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케더린 본 보라(Katharine von Bora)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다. 가톨릭의 수녀였던 그녀는 25세의 나이로 루터보다 16년 연하였다. 루터의 결혼은 당시 많은 사람의 비난거리가 되기도 했다. 에라스므스는 “비극으로 시작된 개혁운동이 희극으로 끝났다.”고 까지 했고 가톨릭의 비난은 이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제 미혼으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신부들의 결혼은 이미 1521년부터 감행(?)되었고 수녀들은 수도원을 떠나 여성으로서의 길을 갔던 것이다.


루터는 1526년 6월 7일 첫 아들을 얻은 후 5남매를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민전쟁은 루터의 개혁운동사에 있어서 일대의 전환점이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농민이 중심이 된 하층민의 민중운동으로서의 개혁의 요구는 크게 압박되었고 루터 개인으로는 대중적 지지 기반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였다. 루터에게 실망한 다수의 농민들은 재세례파로 넘어갔고 일부는 다시 천주교로 복귀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농민전쟁의 영향으로 루터의 교회관은 1526년을 전후하여 국가교회(Volkskirche)에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농민들의 투쟁을 종식시키기 휘한 루터와 지방 영주들과의 동맹은 결국 프로테스탄트적 영방교회(領邦敎會 Landes Kirchen, territorial churches)를 형성하게 했는데, 이것은 영적 교회(ecclesia spiritualis)의 약화와 함께 제도적인 국가 교회에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비록 국가의 제후들이나 관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할지라도 국가와 교회는 법적으로 상호 유기적인 관계성과 통일성을 갖는다는 국가교회관은 이미 1515년에서 1546년 사이의 루터의 「로마서 강의」에서 암시된 ‘두 왕국설’에 기초하고 있고, 또 세상나라를 낙관적으로 보았던 그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은 루터의 견해는 교회와 국가는 법적으로 독립 내지는 병립하는 것이라고 보는 개혁파 교회들과 다른 개신교 교회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이렇게 볼 때 농민전쟁 이전의 루터의 교회관이 보다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농민전쟁 이후의 발전

이제 1526년 이후의 루터파의 발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농민전쟁이 끝난 후 교회문제는 정치화되었고 제국회의에서 종교문제와 교회개혁의 문제는 새롭게 토의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를 정죄하는 칙령을 발표했으나 시행되지 못했고 1523년 뉘른베르크(Nürnberg)에서 다시 제국회의가 소집되었을 때도 보름스칙령의 수행 요구는 묵살되었다. 이때 교황과 황제가 보낸 대표들이 보름스칙령을 따라 루터의 개혁운동을 제제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루터파에 대한 융화 정책을 결의하였다. 당시의 정치적 배경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유리하게 인도해 가고 있었다.

1526년에는 슈파이에르 제국회의(the Diet at Speyer)가 소집되었다. 다시 황제 찰스 5세는 프랑스의 프란소 1세(Francis I)와 대결하고 있었다. 사실 찰스 5세와 프란소 1세와의 대결은 전후 40년간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는 숙명적 적수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황제는 오토만 터어키의 습격으로 인한 위협 중에 있었기 때문에 이 회의에서도 루터파를 탄압할 여력을 지니지 못했다.


당시 유럽의 제국은 종교적인 문제로 양분되어 있었다. 즉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제후들은 1524년 7월 ‘라티스본 동맹’(Ratisbon League)을 결성하여 루터파의 확산을 저지하려고 하였고, 이에 맞서 루터파를 지지하는 헷세의 필립, 삭소니의 선제후 요한 등은 1526년 6월 ‘토르가우 동맹’(League of Trogau)을 체결하여 루터파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터어키의 위협 앞에서 양측은 타협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526년의 슈파이에르 국회는 타협적 회의가 되었고 루터파의 확장에 유리한 결정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비록 1555년 ‘아우구스브르크 평화협정’(the Peace of Augusburg)에서 확정됐지만 ‘그 땅이 속한 자에게 종교도 속한다' (cujus regio, ejus religio). 곧 ‘그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의 종교로’ 하는 지역별 종교선택의 자유의 원칙이 확립된 것이다.


이제 이 원칙에 따라 독일의 여러 지역들은 그 지역을 통치하는 제후의 종교에 따라 가톨릭 혹은 루터교도가 되도록 한 것이다. 만일 어떤 지역 제후가 루터교도이면 그 지역민들은 루터교 신자가 되어야 하고, 반대로 제후가 가톨릭교도이면 그 지역 백성들은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이것은 루터파가 로마 가톨릭과 동등한 법적권한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독일남부 지방의 영주들은 로마 가톨릭을 선택하였고 다른 지방에서는 루터파의 교회개혁을 받아들였다. 이제 루터파는 공식적으로 그 지역을 확대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원칙은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하였으나 ‘종교 복수주의’(pluralism), 곧 한 지역에서 신앙고백을 달리하는 다원(多元)적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재세례파 교회는 여전히 박해를 받았고 루터파 외의 개신교파들은 아직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유럽에서 종교와 신앙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1648년의 베스트팔리아(Westphalia)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리해서 말하면 황제 찰스 5세가 프랑스의 프란소와 1세,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대립하고 있을 때 황제는 루터파의 지지가 필요하였고, 이런 정치적 이유 때문에 슈파이에르국회는 보름스칙령을 철회하고 독일 영주들의 종교적 선택권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어떻든 1526년 슈파이에르 국회의 결정은 루터파의 확산에 매우 유리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불화 관계에 있던 황제와 교황은 화해를 한 뒤였고 황제 찰스 5세와 프랑스와 프란소와 1세도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 때문에 제2차 슈파이에르 국회에서는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브롬스칙령을 재확인 하였고 1526년의 슈파이에르 국회의 결정사항을 번복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것은 루터파에 대한 황제와 로마 가톨릭측의 일대 반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상황은 달라졌고 루터파와 로마 가톨릭 지지 세력간의 일시적 휴전은 대결의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되자 개혁을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은 1526년 제 1차 슈파이에르 제국회의에서 부여받은 자유를 위반하는 1529년의 제2차 슈파이에르 국회의 결정에 대해 항의, 곧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용어가 사용되게 되었고 또 항의 문서를 제출하였다.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지했던 복음주의자들은 작센의 요한, 헤세의 필립, 프란덴부르크와 안스바하(Ansbach)의 게오르크, 브른비스크와 루네부르크의 에른스트 그리고 안할트(Anhalt)의 볼프강 등 5명의 군주들과 독일 고지대의 14개 도시들(스트라스브르크, 뉘른베르크, 울름, 콘스탄츠, 린다우, 메밍겐 등)의 대표자들이었다. 이들이 연합하여 황제와 로마 가톨릭 지지자들에게 항거했으나 이들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항의자들, 곧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란 용어가 사용되게 되었다. 이날이 1529년 4월 19일이었다. 1529년 이후에는 개혁신앙을 소개할 수도 없고 영원히 로마 가톨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결정에 '항의한 자들'이라는 뜻의 프로테스탄트란 용어는 이때부터 신교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이 때는 보름스제국의회 이후 개혁운동의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들의 연합과 협력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6. 성만찬 논쟁

루터의 지지자였던 헤세의 필립(Philip of Hesse)은 우선 비텐베르크와 독일 고지대 사이에 존재하는 교리적 차이를 해소하려고 힘썼고, 더 나아가서는 스위스의 개혁운동까지 포함하는 연합적인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당시 루터와 쯔빙글리간에는 성찬론에 관한 견해차가 분명하였다. 이 차이만 해소될 수 있다면 독일과 스위스 지역의 개혁운동이 연합할 수 있고, 연합된 힘으로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독일과 스위스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들의 연합은 긴박한 요구였다. 독일과 스위스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은 근본적인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었으나 실제에 있어서 몇 가지 차이점이 노정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첨예한 의견의 차이를 보인 것은 성찬에 관한 견해였고, 이 견해차는 루터와 쯔빙글리간의 현격한 이견(異見)을 나타내고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마태복음 26장 26절의 성찬식사(Words of Institution, 聖餐式辭)인 “이것은 내 몸이다”(Hoc est corpus meum)는 말씀에 대한 해석 문제였다. 루터나 쯔빙글리 양자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tiation)에 대해서는 반대, 비판하였으나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상의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성찬의 떡과 포도즙과 함께(with), 그 안에(in), 그 아래에(under) 그리스도께서 임재한다고 보았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편재설에 근거하여 실재론적 견지에서 자신의 실재임재(physical presence)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반면에 쯔윙글리는 화란인 호엔(Hoen)의 영향을 받아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할 때 ‘이다’(est)는 실제로는 ‘의미한다’(significat)라는 뜻으로 보았다. 즉 그는 “이것은 내 몸이다”는 말씀은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보았다. 따라서 쯔빙글리에 있어서 성찬의 떡은 갈보리에서 단번에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의 요소 속에 ‘육체로' 임재하신다는 루터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드디어 쯔빙글리는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상이한 두 사람의 견해를 해소하고 하나의 연합을 이루어 보기 위해 헤세의 필립공은 1529년 10월 양측의 인사들을 독일의 마부르크로 초청하였다.


그래서 그해 10월 1일부터 3일까지 계속된 이 회담을 마부르크 회담(Marburg Colloguy)이라고 부른다. 이 회담에 루터측에서는 루터 자신과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 요나스(Justus Jonas), 오시안데르(Andreas Osiander), 브렌티우스(Johannes Brentius), 아그리콜라(Stephanus Agricola)등이 참석하였고 스위스 신학자들로는 쯔윙글리, 외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 마틴 부쪄(Martin Bucer, 1491-1551), 헤디오(Caspar Hedio, 1494-1553) 등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3일간 대화와 토론을 전개했으나 견해차를 해소할 수 없었다. 특히 부쪄의 계속된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견해를 양보하지 않았다. 쯔빙글리는 “이것은 내 몸이다”는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This signifies my body)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성만찬은 ‘기념 식사’(a memorial meal)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간의 상이한 견해 때문에 결국 루터와 쯔윙글리 양측은 결별할 수밖에 없었고 해세의 필립이 의도했던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항한 개신교 동맹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성찬론에 대한 신학적 차이점 때문에 후일 루터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루터파(Lutheran)를 형성하게 되었고, 쯔빙글리와 칼빈 등 스위스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개혁파(Reformed)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만일 루터와 쯔빙글리가 성찬론에 관한 신학적 일치를 견지할 수 있었다면 루터파와 개혁파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복음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형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앞서 살펴본 바처럼 루터의 견해에는 다소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 그는 비록 가톨릭의 주장인 화체설, 곧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그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제로 임재하시고 성례적으로 신비스럽게 연합하신다는 주장은 다소 신비주의적이다. 이점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과거 루터가 신비주의 단체였던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성찬론에 대한 견해차 때문에 루터와 쯔빙글리가 연합하지 못하고 각기 입장을 달리하는 루터파와 개혁파로 나뉘어졌다고 할 때 오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만찬관은 그 당시로는 심각한 문제였다. 성만찬을 중시해 왔던 로마 가톨릭의 오랜 전통과 성경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는데서 온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성찬론에 대한 루터의 융통성 없는 고집스러운 주장에 대해 “가톨릭의 오도된 성찬론을 개혁하려는 열정과 성찬론과 같은 중대한 교리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였다”는 변명은 어느 정도 진실일 수도 있다.


7. 루터파의 성립과 발전

독일에서 루터주의는 1526년 제 1차 슈파이에르 제국회의를 전후하여 예배의식을 발전시켜갔고, 교회조직을 갖추어가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전통적인 예식문(liturgy)을 이용하여 독일어 찬송가 가사를 지었으며 음악과 찬송, 가정생활과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이 명백하게 금지하지 않는 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전해오던 관습은 반드시 부인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행정당국자들에게 각자의 권한 안에서 예배와 교회의 조직과 운영을 규제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리하여 독일 안에는 영방교회(領邦敎會, Landeskirchen)가 생기게 되었고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는 국가교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1521년 당시만 해도 루터는 외롭게 보름스제국회의 앞에서 정죄를 받았으나 1529년 제 2차 슈파이에르 제국회의 당시는 결코 루터가 외롭게 심판대 앞에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은 하나의 커다란 조직을 갖추면서 독일 내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키며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1529년 슈파이에르 제국회의에서 ‘로마 가톨릭 신앙만이 유일한 합법적 신앙’이라고 선언했을 때 5명의 군주(제후)들과 14개 도시의 대표들이 루터를 지지하고 제국회의 결정에 ‘항의’(protest)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530년은 루터파의 역사와 신앙에서 볼 때 중요한 해였다. 황제 칼 5세는 오랫동안 불화관계에 있던 교황과 프랑스왕과 화해하였고 1530년 2월 24일 볼로냐(Bologna)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제 그는 독일에서의 종교적 분쟁을 해결할 여력을 얻게 되었고 그 자신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파와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9년 만에 독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1530년 6월 20일 제국회의가 아우그스부르크(Augusburg)에서 공식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로마 가톨릭측은 교회에 ‘반역한 무리’들이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할 것을 황제에게 요구하였고,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그들의 문제가 편견 없이 공정하게 취급될 것을 요청하였다. 또 한편 다수의 인사들은 이 회의를 통해 양측의 화해와 타협을 기대하였다. 멜란히톤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타협적으로 로마교회 측과 프로테스탄트진영 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었다.

황제 칼 5세는 그간의 사건의 전개와 더불어 양측의 신앙상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교도들에게 그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다른 점들을 분명하게 밝혀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루터의 동료이자 후계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은 1530년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 The Augusburg Confession)이다. 남부독일의 바덴(Baden)지방에서 출생한 멜란히톤은 당대 최대의 히브리어 학자였던 요한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 1455-1522)의 영향을 받았던 유명한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언어적 재질과 함께 학자로 명성을 얻었는데 로이힐린의 천거로 비텐베르크대학의 헬라어 교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미 그는 1521년에 신학요의(Loci Communes)를 썼는데, 이 책은 최초의 개신교 조직신학서로 알려져 있다.


부연하자면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외에도 그해 7월 8일에는 쯔빙글리가 작성한 신앙고백서(신앙의 이유, ratio fidei)가 제출되었고, 이로부터 사흘 후에는 스트라스부르크, 콘스탄츠, 멤밍겐, 린다우 등 4개 도시의 신앙고백서, 곧 ‘4도시 신앙고백서’(Confessio Tetrapolitana, Tetrapolitan Confession)가 부쩌(Bucer)와 카피토(Capito)에 의해 제출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문서가 제출된 후 다양한 입장의 신학적 견해가 논의되었던 것이다.

멜란히톤이 작성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조는 후일 루터파의 가장 중요한 공식문서가 되었고 1517년부터 1648년까지의 교회개혁 기간 중에 나타난 첫 신앙고백문서가 되었다. 어떻든 이 문서는 루터주의의 복음적 신앙을 표현하면서도 로마 가톨릭과의 어느 정도 화해를 의도하였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을 자극할만한 교황수위권의 문제, 연옥설 등 7개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스토페르(Richard Stauffer)의 말처럼 사실 멜란히톤은 이 문서를 통해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가톨릭의 기본적 신앙’에서 이탈되지 않았음을 보이려고 시도하였고 따라서 가능한 한 비텐베르크와 로마를 갈라놓은 교리적 차이들을 축소시키려 애쓴 흔적이 있다. 또 복음주의 교회에 도입된 개혁적 조치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폐습들을 교정하려는데 있었음을 지적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신앙고백서는 루터파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고 교회의 폐습들을 개혁하는 한편, 프로테스탄트신앙을 천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전 28장으로 된 문서인데 1장에서 21장까지의 제 1부는 ‘신앙과 교리’로서 루터파의 기본적 신앙을 진술하였다. 즉 하나님, 원죄, 세례와 같은 교리는 따랐지만, 칭의, 성찬, 선행 등에 대해서는 로마 가톨릭과 견해를 달리하였다. 22장에서 28장까지의 제2부 ‘개정된 폐단들에 대한 논의’에서는 당시 교회의 폐단들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데, 성찬식을 행할 때 평신도들에게 분잔 하지 않는 일,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한 일, 미사, 고해, 수도원 서약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제국회의에서 정죄를 받아 법의 보호를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우그스부르크에는 가지 못하고 코부르크(Coburg)까지만 갔고 멜란히톤이 루터파의 대표단을 이끌고 아우그스부르크 제국회의에 참석하여 이 신앙고백서를 제출하였다. 이 문서는 제국회의 본회의장에서는 낭독되지 못했으나 1530년 6월 25일 황제의 개인접견실에서 200여명의 고위성직자들이 자리한 가운데 삭소니지방 선제후의 고문이었던 크리스티안 바이어(Christian Beyer)에 의해 약 두 시간에 걸쳐 낭독되었다.


비록 이 문서가 유화적이고 화평을 의도하였으나 제국의회의 과반수이상을 차지했던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제국회의는 멜란히톤과 에크를 대표자로 하는 양측의 위원회를 임명하였고, 로마 가톨릭측은 루터의 적수였던 에크로 하여금 멜란히톤에게 응전토록 하였다. 그래서 에크, 파베르, 코흐레우스 등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대한 반박서’(Confutatio Confessionis Augustanae)를 제출하였고 그해 8월 3일에 채택케 하였다. 그래서 멜란히톤이 제출한 신앙고백서와, 로마 가톨릭측이 제출한 반박서를 중심으로 타협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타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 멜란히톤은 타협의 길을 모색하여 루터파와 로마 가톨릭파의 다른 점은 미사에 있어서 독일어를 사용하는데 불과한 극히 작은 것이라고 보는 데까지 이르렀고, 교황권 자체를 승인하려는 데까지 타협적이었다. 반면에 루터는 교황이 그의 지위를 폐지하지 않는 한 그와의 평화를 도모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결국 제국회의는 1530년 11월 회의를 끝내면서 로마 가톨릭측이 제출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대한 ‘반박서’를 교회의 공적인 대변서를 받아들이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는 루터와 그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던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결정을 재확인하는 것으로써 신·구교간의 문제를 종결지었다. 다시 말하면 루터파의 지도자들에게 로마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헷세의 필립, 작센의 요한, 브른스빅-루네부르크의 에른스트 등은 이 명령에 불복하였다. 멜란히톤은 한때 로마 가톨릭과의 타협을 시도하였으나 타협이 결렬되자 다시 루터주의의 신학입장을 강하게 변호하였다. 그것은 코부르크에 와 있던 루터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멜란히톤은 그가 작성한 신앙고백서를 변증하는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 변증서’를 1531년 5월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독일어로는 그해 가을에 출판되었는데, 이 변증서는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신학적인 해설서로서 신앙고백서보다 4배나 많은 분량이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제출할 때만 해도 로마 가톨릭과의 타협을 희망하였고 고백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 점을 밝히고 있으나 이러한 희망이 좌절되자 변증서에서는 현실을 시인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을 보다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신앙고백서에서는 침묵을 지켰으나 변증서에서는 교황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고 7성례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황제는 제국회의를 마감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1531년 4월 15일까지를 시한으로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무력행사를 불사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만일 황제가 스페인 병력과 독일내의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영주들의 군대를 동원한다면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영주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루터주의를 지지하는 영주들은 동맹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러나 황제에 대항하여 정당방위로써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라고 결론짓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은 소위 쉬말칼텐동맹(League of Schmalkald)을 체결하였다. 이번에도 정치적 변화는 루터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미 1529년 9월 비엔나를 공격했던 터키군은 이전의 실패를 설복할 기회를 찾고 있었고 터키인들의 발칸 진입을 저지하는 일은 제국의 가장 긴박한 과제였다.


프랑스왕 프란소 1세도 다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강력한 대항세력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프로테스탄트의 지원이 필요했으므로 황제는 1531년 7월 23일 뉘른베르크 평화회의(The Peace of Nürenberg)를 통해 프로테스탄트와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그래서 아우그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의 황제의 시한부적 항복요구는 일단 유보되었고 그 대신 프로테스탄트들은 터키에 대항하여 황제를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제 루터주의는 새로운 정치적 변화 속에서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어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지역으로 확산되어 갔고 교회개혁을 통해 나타난 양대 교파의 하나인 루터파교회로 발전되어 갔다. 1517년 교회개혁이 시작된 후 30년간 개혁의 최전선에 서 있던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아이스레벤에서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8. 루터의 개혁운동과 문서의 역할

루터의 개혁운동에 관한 우리들의 긴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인쇄매체가 개혁운동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던가를 정리해두고자 한다. 비록 루터는 그 시대를 이끌어간 사건들을 태동시킨 인물이지만 그 뒤를 이어 온 유럽을 격동시킨 힘들은 한 개인에 비할바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 중요한 매체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뒷받침된 문서의 역할이었다. 이 문서들을 통해 가장 짧은 기간 내에 가장 심오한 정신적 혁명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일반 대중들에게 대규모적으로 사상이나 정신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문서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때가 차매…"(갈 4:4)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하나님께서는 개혁운동이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전역에 전파될 수 있는 외적 여건이 갖추어진 때에 루터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 일하셨던 것이다. 1517년 95개조의 게시로부터 루터파가 정식으로 법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회의까지 약 40년간은 신․구교간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이름 그대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개혁정신은 문서를 통해 확산되었고 루터에게 유리한 여론이 형성되어 갔다.


구텐베르크(1394/99~1468)에 의한 활판 인쇄술의 풀현은 세계사의 여러 가지 발명중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서 군사사(軍事史)에 있어서의 화약의 출현과도 비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4, 15세기는 흔히 발견과 발명의 시대로 일컬어지고 있다. 지리상의 발견이 유럽인의 시야를 대서양 너무 미지의 대륙에까지 넓혀주었고 지적 세계의 끝없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면 인쇄물의 발명은 이 가능성을 실현토록 뒷받침해 주었다. 따라서 16세기에서부터 룻소에까지 이르는 스스로 갈등하며 자유로운 지성의 출현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 마인쯔시의 귀족 가문 출신의 금은세공(金銀細工) 기술자인 구텐베르크는 정치적 이유로 1440년경 스트라스부르크에 망명한 이후부터 인쇄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마인쯔로 돌아간 후에 1450년에는 수동식의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기술의 발명에 성공하였다.


그가 자신의 인쇄소에서 최초로 출판한 활자본은 후일 「42행성서」(The 42-lines Bible)라고 불리게 된 성경본이었다. 이 책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소를 시작한 1452년(혹은 53년)에 활자조립을 시작하여 1456년 8월 이전에 출판되었으므로 실로 4년이나 소요된 인쇄였다. 이때로부터 100년 사이에 활자본 인쇄술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그래서 개혁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던 15세기 말경에는 독일에 52개소, 이탈리아에 약 80개소, 프랑스에 약 40개소, 네덜란드에 21개소,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는 31개소의 인쇄소가 설치되었다. 전 유럽을 통해서는 300여 처에 1,000여 인쇄소가 세워져 있었다. 수도원에서는 1480년부터 이 신기술을 도입했다. 그래서 1500년경에는 이미 40,000종 이상의 서적들이 나돌고 있었으며, 총수량은 천만 권 이상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우후죽순처럼 각 지역에 문을 연 인쇄소는 주로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각종 고전, 교부 문서, 경건서적 등 종교, 신학관계 출판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였으며 사용된 언어는 거의 라틴어였다.


1500년 이후 교회개혁까지 한 인쇄업자가 연간 발행하던 서적 종류는 평균 40종에 달하고 있었지만, 일단 교회개혁의 물결이 밀어 닥치자 이 숫자는 무려 연간 500종으로 급증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루터의 개혁운동에 있어서 문서의 역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명은 슈펭글러가 정의했던 바처럼, "서적 및 독서문화의 시기가 유럽역사에 전개되게 하였고" 이 혁명적 도구가 개혁의 전파와 확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결과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내걸었던 95개조는 불과 한 달이 못되어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다. 루터는 더 이상 비텐베르그 대학의 무명의 교수일 수 없었다. 이젠 교황도 그를 "술주정뱅이 독일인이며, 술이 깨면 달라질 것이라."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 당시 문서들은 대개 8페이지나 16페이지. 혹은 32페이지 정도의 소책자들이었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그 당시 대중성 있는 판형이었다.


루터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이런 소책자들이었고 또 그는 주로 독일어로 글을 썼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라틴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식자층의 언어였고 일반민중의 언어는 되지 못했다. 인문주의자들이 교양 있는 식자층에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면 개혁자들은 일반평민을 상대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점도 특이할 일이다. 1518년에 루터는 「면죄부와 은혜에 대한 설교」를 독일어로 썼는데 이것은 3년 만에 무려 23판까지 출판되었다.(Hans J. Hillerbrand, The World of Reformation, 1973, p.32). 이 후에 나온 루터의 대부분의 소책자들도(특히 독일어로 쓴 글들) 똑같은 인기를 누렸다. 그 당신 10판, 15판, 20판 등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1524년까지 약 100만부의 루터의 소책자가 배포되었다고 한다. 1518년부터 1522년 사이에 독일에서의 출판물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는데 세속적인 책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종교가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교황대사 알레안더(Aleander)가 1521년에 남긴 글을 보면 "독일어와 라틴어로 된 루터의 소책자가 매일 쏟아지고 있습니다. 루터의 소책자 외에는 여기서 아무것도 팔리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또 베아투스 레나누스가 쯔빙글리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루터가 쓴 책들은 인쇄기에서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라고 전하고 있다. 1519년 바젤의 인문주의자이며 출판업자였던 요하네스 프로벤(J. Froben)이 루터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가 나아있다.

우리는 내가 출판한 당신의 전집 600권을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발송했습니다. 이들은 파리에서 판매되어 소르본느에서 읽히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파비아(Pavia)의 서적 도매상 클라부스도 상당한 양을 이태리 전역에 팔기 위해 가져갔습니다. 영국과 브라방(Brabant) 지방에도 이들을 발송하였으며 현재 재고는 10권뿐입니다. 나는 이제까지 서적출판을 통해 이처럼 돈을 번 적이 없습니다.(Froben to Luther, February 14, 1519, in Martin Luthers Werke: Briefweehsel vol 1, Weimar, 1930, vol 1, p.332)

이와 같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루터의 사상이 그 당시 상당한 공명을 얻었고, 문서를 통해 그의 개혁의지를 전파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520년에 루터는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 「교회의 바벨론 감금」, 「기독자의 자유」등 소위 종교개혁의 3대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세 작품은 종교개혁 정신이 표명된 중요한 작품이다. 이 루터의 글이 개혁운동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 문서를 여러 도시에 공급하기 위해 세 개의 인쇄소가 동시에 책을 출판한 일도 있다. 수요가 공급에 훨씬 앞질렀기 때문이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이해(1520)에 독일에서는 208종의 인쇄물이 나왔는데 그 중 133종이 루터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루터의 개혁운동 가운데 최대의 업적은 그의 성경번역임은 이미 말한바 있다. 그가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 1521년 5월부터 발트부르크성에 은거하는 동안 헬라어 원문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착수하였다. 그는 1521년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 제2판(1519년판)을 대본으로 번역하여 1522년 9월에 출판하였고 1536년까지 16회 수정판이 나왔고 계속해서 50판이 나왔다. 구약을 원어로부터 번역하는 작업은 그가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후 친구의 도움을 얻어 1534년에 완성하였다. 루터의 성경번역은 종교개혁운동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독일어의 통일과 문화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루터의 성경번역을 영어를 포함한 기타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도록 자극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루터의 다양한 저술과 성경번역이 종교개혁에 준 영향은 문서의 역할과 중요성을 예증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루터는 1517년 이후 1546년 사이에 약 400여 편의 논문을 썼는데, 이는 평균 한 달에 1편 이상씩을 집필한 셈이다.


보름스 제국의회 당시 제국의 황제였던 챨스 5세와 교황의 사절 알렉산더는 제국의회 책상 위에 놓인 모든 책들을 루터가 썼다는 사실을 의심할 정도였다. 루터의 문서들은 쮜리히를 비롯한 스위스 여러 지방에 전파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이미 동조자들을 얻고 있었다. 화란에도 일찍이 루터의 문서들이 전해지고 읽혀졌다. 이곳에서는 재세례파나 칼빈파보다 훨씬 앞서서 루터의 글들이 소개되었는데. 당시 루터의 문서를 배포하거나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트윕에서 400부가 켄트에서는 300부가 불태워지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1519년에서 1522년 사이에 루터의 문서들이 밀반입되었고 이곳의 개혁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에서의 개혁운동의 지도자인 르페브로(Jacques Lefevre, 1455~1536)는 1530년에 불어로 서경을 번역했는데, 이것은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이 준 자극의 결과이기도 했다.


복음주의 운동은 종족과 언어를 초월하여, 노동자에서부터 영주들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고 16세기 유럽의 역사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고 있었다. 문서를 통한 전파가 이 혁명적 역사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구의 역할을 한 결과였다.


르네상스시대의 프랑스왕 루이 12세는 활판 인쇄술의 발명을 가리켜 "그것은 인간적이라 보다는 오히려 신적인 발명"이라고 감탄했는데, 루터는 "인쇄술이야말로 복음의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최대의 선물"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의 개혁운동과정에서 얻은 생생한 체험으로부터 나온 확신이었다.

교회개혁사(성광문화사, 1997)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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