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현대 교회사
최근 경건주의 운동의 기원을 연구하는 이들은 경건추의와 청교도 운동의 연계성을 기정사실화 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에 따르면 영국의 청교도주의는 경건주의 운동을 태동시킨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퍼킨스를 경건주의 운동의 원조로 보고 경건주의자 퍼킨스와 더불어 시작되어 역사적 실체로서 드러나게 되었다.
칼빈주의의 칭의론에 기초한 청교도들의 회개. 성화. 자기 경건은 경건주의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퍼킨스를 비롯 청교도들은 '신학이란 영원히 축복된 살아 있는 학문'이라고 보았다 자기 부정을 통한 성화를 강조하고 참 성도다운 삶을 소유하는 것을 생명으로 생각하였다. 청교도들의 경건서적은 추상적인 전문서적 보다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성도의 현재적 삶을 다루고 있다. 청교도들이 성결한 삶 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모델로 삼은 것은 세상과 결별한 산 속에서의 수도원적 생활이 아니라 삶 속에서의 수도원적 이상' 의 실현이었다. 이런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은 곳이 화란이다. '화란교회는 청교도의 삶을 잘 보존하는 것을 하나의 이상으로 여겼다. 때문에 화란 교회의 칼빈주의적 삶을 가리켜 제2의 청교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별히 윌리암 퍼킨스의 제자들인 보에티우스 탈링크 에임스에 의하여 영국의 청교도주의는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영국의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유학하는 동안 지도교수였던 퍼킨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아 본국에서 청교도 운동을 전개했다.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 화란에서 발생한 이런 운동을 가리켜 청교도적 경건주의 혹은 '개혁파 경건주의'라고 칭하기도 한다. 화란의 개혁파 경건주의는 우트레히트 대학 교수였던 히스베르트 보에티우스와 독일 출신으로 화란의 라이덴 대학교수였턴 요한네스 콕세이우스에 와서 절정에 달한다. 생명있는 신학을 강조하였던 보에티우스와 콕세이우스의 신학은 독일의 개혁파 경건주의 운동에 적 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개혁파 경건주의 운동의 창시자인 운데어아익은 보에티우와 콕세이우스의 제자였다. 그는 1654년부터 57년까지 우트레히트 대학에서 유학하는 동안 네덜란드의 청교도적 경건주의에 매혹되었다. 운데어아익온 그의 저서 (할렐루야)에서 보에티우스와 콕세이우스를 가장 중요한 두 선생으로 묘사한다. 그는 보에티우스에게서 '경건'을. 콕세이우스에게서 '신학'을 전수받았다. 이 두 사람을 통하여 청교도적 이상에 기초한 화란의 개혁주의 독일의 개혁파 경건주의의 원형이 되었다. 독일의 개혁파 교회의 많은 학생들이 화란에 유학하여 보에티우스와 콕세이우스에게서 수업을 받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본국에 돌아와 화란의 청교도적 경건주의 운동을 확산시켰던 것이다. 당시 화란 교회는 '독일 개혁파 교회의 신학적 방향을 주도'하였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개혁파의 영향이 컸던 화란과 인접한 독일의 북서부 지방에서 두드러졌다. 이리하여 영국의 청교도주의는 화란 교회에, 화란의 청교도적 경건주의는 독일 개혁파 경건주의의 모형이 된 셈이다. 에일머가 지적한 것처럼 17세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종교, 정치 및 사회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특별히 제임스 1세(1603-25)의 즉위부터 윌리암 3세와 메리 2세(1689-1703)까지 86년간 영국의 정치는 청교도 운동과 떨어질 수 없는 관련을 갖고 있다. 때문에 청교도 운 동을 종교적인 현상에 국한시켜 좁은 의미에서만 해석할 수 없고 포괄적인 해석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할러가 해석한 것 청교도 운동은 교회정치 문제, 목회자들의 개혁투쟁. 분리주의 그이상의 문제였다. 그것은 현존하는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다. 궁극적으로 지성의 자세. 행동규범, 심리 학, 표현방식, 기성의 신앙양심을 포함한 전 영국문명을 변혁시키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이 변혁과 개혁의 시대에 영국이 배출한 인물들은 종교적인 지도자들만이 아니었다. 이시대가 낳은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백스터, 존 오웬을 비롯한 수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영국인의 종교적인 삶과 과학적인 삶을 새로운 방향에서 수정한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과학자 아이삭 뉴톤과 철학자 존 로크가 있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의 발달과 합리주의 청교도 운동이 한 시대 속에 어우러져 있었다. 절대 왕정에 대한 의회의 승리는 질서 정연한 진보와 평화적 개혁 을 촉진시켰으며. 그 결과 영국에는 민주주의의 장이 열렸고 영국을 더욱 근대로 몰아넣었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영국인들의 신대륙 이주, 특히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주로 17세기에 이르러 신대륙에는 청교도 정신이 종교 .사회.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주한 이들 필그림들에 의해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청교도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다.확실히 17세기 말엽과 18세기 초엽의 신대륙은 1세기 이전의 청교도 선조들이 갖고 있던 개혁주의 사상이나 후커와 카튼이 제시했던 청교도 사상에서 어느 정도 이탈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서 청교도 전통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라는 사명감을 부여받았다. 이런 전통적인 청교도 사상에서의 점진적인 변천을 우려하는 이들은 한편으로 유럽에서 밀려오는 자연신론의 도전을.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일어나는 알미니안주의의 발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던 청교도 사상에서 인간에게 보다 많은 책임을 부여하려는 알미니안 바람이 신대륙에 불어오기 시작했던 것은 이처럼. 18세기 초엽 점차 근대화하는 환경 속에서 신대륙 이주자 들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예무역은 가장 어두운 청교도 운동의 단 면을 대변한다. 영국과 다른 나라에서 온 이주민들이 늘어나 노동력 이 부족하자 이것을 악용하는 사례가 18세기에 시작되었다.
그것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붙잡아다 신대륙에 파는 소위 노예무역이었다. 1562년 존 호킨스에 의해 엘리자베드 치하에서 시작되었던 이 노예무역이 18세기에 신대륙에서 번창하였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갔던 이들에 의해 참으로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던 노예들의 선교를 위해 엘리아스 누, 카튼 마터 등을 세우셔서 이들을 통 해 백인들의 죄악된 모습을 각성시키셨다. 이 노예 문제가 지난 수 세기 동안 미국교회의 일치를 저해한 가장 큰 요인이며 교회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천년왕국 건설 이라는 거룩한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가장 비인간적인 노예무역이 이 시대에 성행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개신교 정통주의는 16세기의 위대한 유산들을 체계적으로 정리. 발전시킴으로써 개신교 신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신학의 객관적 집대성과 분석은 개신교 정통주의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객관적인 권위의 존중. 성경의 영감론의 정립. 그리고 신학의 교리적 배열 등은 정통주의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이었다.
그러나 정통주의의 이런 객관적인 권위가 후대에 가면서 생활과 동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대두되었는데. 첫째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로 합리주의는 17세기와 18세기 프랑스와 영국에서 위력을 떨 쳤고 곧 이어 독일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두번째 반응은 경건주의 운동이다.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합리주의와 경건주의는 시대적인 순서로 볼 때 거의 동시에 일어난 운동이라고 볼 수 있지만. 국가 마다 시대적 순서를 달리한다. 영국에서는 합리주의가 경건주의 보다 앞서 일어난 반면 독일에서는 경건주의 운동이 먼저 일어나고 뒤에 합리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때문에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다루어야 하는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유럽의 전체적인 국면과 칸트 이후의 사조의 변천을 고려할 때 합리주의를 먼저 다루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학과 철학이 분리되고. 신학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일반화되었으며, 신앙이 인간의 이성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외에도 계몽주의는 종교적 당면 관심사를 초자연적인 면에서 도덕적인 면으로 바꾸었다. 또한 계몽주의 시대에는 르네상스와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 개인주의 사상이 배태되고 인간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인간의 자율에 대한 강조는 정치적인 자율을 요구하게 되고, 이것이 급기야는 불란서 혁명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진보주의 신학이 인본주의 토양 속에서 태동되었다. 리빙스톤이 지적한 것처럼, 자율적 이성과 양심에 대한 호소 정치적, 경제적 불의에 대한 불만족, 낙관주의 인생론. 자연과 보편에 대한 지나친 의존 그리고 신앙의 관용 및 반교리주의 현상 이 모두는 중세 문명과 개신교 정통주의와의 단절을 반영하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는 결국 그 수명을 다하게 되었고, 낭만주의로 대변되는 후계몽주의의 등장으로 자연, 인간, 신에 대한 계몽주의의 이해는 수정과 보완을 필요로 하였다.
경건주의 운동이 확산되고 있을 때, 죄의 두려움과 회개 경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뜨거운 종교를 강조했던 경건주의 지지자들 때문에 경건주의자들이 '열광주의자들'로 기성교회 에 비추어졌지만, 그렇게 무분별한 이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정통주의자들에게 결여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특히 선교의 열정, 찬송가 발전, 그리고 선행의 실천은 이들이 후대 에 미친 긍정적인 공헌들이다. 경건주의자들은 선교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다. 1705년에는 할레-덴마크 선교회의 후원을 받아 처음으로 선교사 두 사람을 극동 지역에 파송하였다. 나중에 헨리 뮐 렌 베 르 그는 북미 대륙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서 북미로 출발하였다. 특히 세계의 미전을 경건주의에서 찾았던 모라비안인들은 해외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종말 신앙이 선교열을 촉진시켰듯이, 경건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재림신앙과 천년왕국 사상이 선교열을 가속화시켜 선교의 붐이 일어났다. 경건주의 운동은 또한 찬송가 발전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경건주의자들 가운데 명성을 날렸던 탁월한 설교자는 없었지만 널리 알려진 찬송가 작가들은 적지 않았다. 독일어로 되어 있든지 또는 영어로 번역되어 있든지 간에 폴 게르하르트 와 요아킴 네안더 그리고 게르하르트 테르스테겐의 찬송가들은 교회의 가장 값진 유산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경건주의자들의 선행에 대한 강조는 할레에 유명한 고아원을 설립하는 것과 적극적인 항태로 나타났다. 다른 소중한 단체들이 할레를 비롯하여 독일 내 여러 지역에 잇따라 설립되었다. 그것들은 실업자들을 위한 작업장, 미혼모들을 위한 보호소. 병원과 진료소. 그리고 귀머거리, 벙어리, 망인, 정신병자들을 위한 수용소 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스페너에게 있어서 사회사업과 영혼 구제는 상호 보완적인 것이었다. 경건주의는 나폴레옹 시대에 독일에서 부활되어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가서 스코틀랜드의 흘데인 형제단과 스위스의 모노 형제단의 사역에 영감을 주었고, 또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1세의 이상주의와 신성동맹(1816)에 자극을 주었다. 경건주의가 독일에서 부활한 후 활약했던 지도자들로는 바로네스 폰 크뤼데너와 네안더가 있다.
루터교도인 네안더는 개종한 유대인이었으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신앙으로 동시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네안더의 제자로서 그의 따뜻하고 헌신적인 경건주의 정신을 물려받은 프리드리히 톨룩을 통해 경건주의는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구 루터교'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그것은 교회가 복음 전도와 헌신과 자선을 베푸는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감화를 주었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에른스트 헹스텐베르그를 대표로 하는 '신 루터교의 고백적 정통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 스페너와 그의 계승자들을 공격한 알브레히트 릿출로 대표되는 급진적 합리주의와 제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주의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제국에서 계속 번창하여 그곳의 복음 전도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노르웨이가 특히 경건주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곳에서는 스페너와 위대한 대중 찬 송가 작가인 한스 브론슨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한 편, 영국에서는 형제단과 고아원 설립으로 유명한 조지 뮐러, 침례교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젼, 케스윅 컨벤션 운동, 그리고 구세군의 윌릭엄 부츠등의 가르침에서 경건주의가 중요한 요소가 되었 다. 미국에서는 경건주의의 영향이 좀 더 많은 변화를 일으키며 널리 확산되었다. 그것은 1730년대의 개혁교회 중에, 특히 테오토르 프릴 링휘슨( 1691~747)이라는 인물에게 존재하였다. 경건주의는 조나단 에드워드와 대각성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19세기의 성결과 부흥운동. 특히 찰스 피니의 사역에 강력한 힘이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경건주의는 오순절 부흥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최근의 신오순절파 하우스 교회 운동의 많은 특징들도 기본적으로는 경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스페너의 유산은 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주의는 이론적인 지성주의를 배격하고 개인적인 경험의 산 신앙을 강조하였고 성경의 기본적인 교리를 강조하였으며 제도적인 국가 교회에 속해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스페너의 표현대로 '진지하게 기독 신자가 되고자 하는 자' 또는 프랑케가 말하는바 '회개하는 자' 또는 진젠돌프가 말한 바 '주를 사랑하는 자들' 혹은 분리주의자들이 말한바 '성령에 충만한 자'들이 교회 안에 따로 모여 모임 을 가졌다는 점에서 근대교회의 영적 갱생운동이었다. 그러나 경건주의 운동이 긍정적인 평가만 받은 것은 아니다. 역사 속의 모든 운동처럼, 경건주의 운동 역시 일부 극단적인 추종자들로 말미암아 극단적인 성향으로 기울어지기도 하였다. 초기 경건주의 지도자들이 기성 교회를 비판하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경건주의가 모욕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고, 경건주의자들은 광신자요 흥을 깨뜨리는 사람들이라는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비텐베르그 대학 신학교수인 도이치만은 1695년에 이단 교리를 가르친다는 283개 항의 죄목으로 스페너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경건주의를 공격하여 경건주의 운동은 사실 이상으로 과도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건주의가 처음 운동을 제창할 때의 의도와는 달리 지나친 형식주의로 치우침으로써 비판을 받았다. 처음 경건주의자들이 진정한 개혁운동을 제창했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경건의 능력 보다는 경건의 모양을 중시하는 풍조가 생겼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었다.
원래 스페너가 겅건주의 운동을 제창할 때의 궁극적인 관심은 영적 갱생이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경건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말미암아 경건의 모양이 경건의 실천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고, 그 결과 '종교적 교만과 경건에 대한 자랑'이 경건주의 이면에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말씀과 성령, 믿음과 칭의 와의 전통적인 관계도 변화를 겪었다. 이 때문에 경건주의가 부정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생명 없는 형식 에 대항하여 진정한 교회 갱신을 외쳤던 경건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최대의 적으로 생각했던 형식주의에 빠져 세인의 비판을 받았던 것 이다. 신학적인 불균형과 교회관의 길함에도 불구하고. 경건주의가 경직된 개신교 정통주의와 계몽 사조의 합리주의와 관념론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리와 실천을 강조해 영적 각성운동을 촉진시키고 실천적인 삶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초부터 신대륙에서 발흥하기 시작한 제 1차 대각성 운동은 폭넓은 의미에서 대륙의 경건주의와 무관하치 않다. 특히 1730년대 미국의 제 1차 각성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테오도르 프럴 링휘슨. 조나단 에드워드, 요한 웨슬리와 동시대 인물 조지 휫필드 등은 직접 간접으로 대륙의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웨슬리를 이해하는 나장 중요한 열쇠는 그의 사상을 형성한 역사적 상황과 배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 웨슬리의 생애는 일편된 사상 속에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뚜렷한 발전단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성장배경 젊은 시절 그가 접한 작품들을 통한 경건의 도전. 조지아 선교와 모라미안들과의 만남. 올더스게이트가의 회심. 영국 모라비안 공동체 방문, 칼빈주의 감리교도 휫필드와의 갈등. 감리교 부흥운동과 감리교 조직 영국 감리교 협회와 미국감리교운동의 성격과 견해차이 모든 것은 당시 웨슬리의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은 미친 중요한 사건들이다 웨슬리의 사상이 항상 통일성이 있었던 아니다. 그는 변천과 변화를 거치면서 자신의 신학을 형성해 나갔다. 따라서 우리는 웨슬리의 사상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조명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웨슬리의 사상의 핵심은 교리와 삶이 이원론적으로 존재해서는 안되며 둘은 절대적인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신앙 속에서 경험되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신학으로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는 전형적인 감리교 모토가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의 생애 속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이런 경험론적인 신앙 이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후대 한국의 감리교 신학 특히 정경옥의 사상 속에서 우리는 웨슬리의 전항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이 형이상학 적으로나 학문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실존 속에서 경험론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경험론적인 신앙이해가 주관주의적 신앙을 태동시키기 쉽고 종교의 권위를 성경과 같은 계시에 두기보다는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에 위치시킨 나머지 쉴라이어마허 같은 현대 신학자들에게 찾아 볼 수 없는 낭만주의 신학이나 종교적 권위를 신비적인경험에 위치시키는 중세신비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흐르기 쉽다는 점이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을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 속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의 책임과 의무 속에서 이해한 나머지 전통적인 은총론을 평가절하 시키기 쉽다는 점이다. 독립혁명 후 미국은 확실히 전환기를 맞았다. 정치적인 독립과 함께 낙관주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어울려 전통적인 청교도의 하나님 주권 신앙이 쇠퇴하고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의 역동성을 긍정하는 잭슨 층의 신앙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런 전환기의 변화를 촉진시켜 준 것이 2차 대각성운동이었다. 유럽의 계몽주의가 계시 중심의 기독교를 이성 중심의 기독교 감정중심의 낭만주의 기독교로 세속화 시켰다면 미국의 독립혁명과 2차 대각성운동은 전통적인 칼빈주의풍 신앙관을 근대 문화변혁과 일치하는 부흥신앙이라는 모토아래 낙관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신앙관으로 세속화시켰다. 또한 부흥운동이 교회성장과 선교를 촉진시켰으나 교회의 분열, 이단의 발흥, 자유주의의 발흥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독립혁명과 2차 대각성운동 이후 시작된 세상의 문화적 변화와 과학적 발달에 친화하려는 자유주의 경향과 전통적인 종교적 유산을 계승하려는 보수주의 경향이 19세기 말부터 더욱 표면화되기 시작했다.1861년에 발흥한 남북전쟁과 그 후에 가시화된 근본주의대 현대주의 논쟁은 대표적인 실례들이다. 지금까지 1648년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 이후 유럽의 근대교회사 와 개척시대부터의 미국 근대교회사를 조명하면서 몇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종교적인 차이에 대한 관용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으로부터 1789년의 불란서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의 근대교회사와 1766년의 미국독립혁명시대부터 1861년의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근대교회사는 정도의 차이 는 있지만 확실히 이성과 자율이 지배하는 시대였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기독교가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한 인간사고의 변천, 신률보다 는 인간의 이성과 자율을 근간으로 하는 계몽주의와 자연신론의 등장으로 결국 불란서 혁명이라는 혁명의 시대로 귀결되었듯이 미국의 기독교도 한편으로는 유럽의 영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친 낙관주의 세계관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청교도주의에서 떠난 새로운 사조 즉 자연신론, 유니테리안주의, 뉴디비니티, 칼반주의의 수정, 독립 혁명으로 특징되는 시대를 맞았다. 삼위일체와 같은 전통적인교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이성을 근간으로 하는 인본주의적 기독교를 설파했던 유럽의 소시니안주의나 계몽주의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유니테리안들도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하고 계시의존적인 기독교가 아닌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독교 자연과학과 일치하는 기독교를 모토로 삼았다. 둘째: 유럽의 근세사나 미국의 근세사 모두 이성과 자율로 특징되지만, 유럽의 기독교에 비해 미국의 기독교에는 복음주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경건주의가 유럽. 특히 독일 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나 유럽의 기독교는 정통주의 시대 이 후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전통적인 계시 의존 신앙이 붕괴되고 자연 신학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반면 영미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이성과 자율이 지배하던 유럽의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과 달리 청교도 전통에 기초한 복음주의 신앙이 저변에 흐르고 있었다. 약간의 세속주의적 경향이 대륙의 청교도들의 신앙에 위협을 가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7세 기 말엽 미국기독교가 낙관주의 사회상이나 인생관과 편승하면서 미국내 청교도 전통은 조금씩 그 영향력을 상실했고 교회도 정체 상태 에 놓이게 되었지만, 1차 대각성운동이 발생하여 칼빈주의 신앙이 복고되어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영국에서는 요한 웨슬리와 조 지 휫필드에 의해 전통적인 청교도 신앙이 영국에서 복음주의 부흥 운동 형태로 소생했다면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드를 통해 개척 시대의 청교도 신앙이 좀더 칼빈주의적 부흥운동 형태로 복고되었던 것이다. 칼빈주의는 1차 각성 운동을 통해 미국기독교의 주체세력임 을 확인할 수 있었다. 1차 각성운동의 지도자들과 당대 교인들은 신앙의 정체성을 일단 칼빈주의 체계 속에서 찾았다. 이시대에 형성된 소위 에드워드 풍 칼빈주의는 전통적인 칼빈주의 사상이 각성운동과 얼마던지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차 각성운동의 지도자들은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했고. 심지어 각성운동 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셋째, 독립전쟁으로 종교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문제가 더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미국의 기독교는 전통적인 청교도 신앙에 서 서서히 이탈하고 좀더 인본주의적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18세기 말엽 2차 각성운동이 교회에 다시 활력을 불어 넣었으나 결과는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2차 각성운동을 통해 전통적인 칼빈주의 사상이 좀더 인본주의적인 방향으로 수정되었고. 그 결과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앙이 쇠퇴하고 새로운 낙관주의적 인간관이 형성되었다. 그 전형적인 인물이 찰스 피니다. 1차 각성운동의 지도자들이 각성운동과 인간의 회심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본 반면 2 차각성운동의 지도자들은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선물은 개개인의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에드워드식 칼빈주의가 찰스 피니식 칼빈주의, 즉 알미니안주의 풍 칼빈주의로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이름 뉴디비니티 신학은 전통적인 칼빈주의가 좀더 알미니안주의 방향으로 수정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런 경향은 당시 발흥하기 시작한 감리교 운동과 상당히 연관을 가지고 있다. 계시 의존 신앙이 자연신론이나 자연신학으로 대치되면서 유럽 기독교가 세속화 되었듯이 2차 각성운동 후 미국의 기독교도 신율적인 신앙에서 좀더 자율적인 신앙으로 변천되면서 세속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이나 미국의 근대 기독교사는 이성과 자율 의 시대였다. 따라서 19세기부터 전개되는 미국의 현대교회사는 전통적인 신앙을 보존하려는 복음주의자들과 현대사조와 친화하려는 현대주의자들과의 갈등과 대립의 역사로 진행된다. 이런 현상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계몽주의 이후 계속된 구 자유주의 세력 앞 에 더 이상 그것이 유럽의 희망일 수 없다고 판단한 일련의 지도자 들은 종교개혁과 구 역사적 전통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의 사조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칼 바르트로 대변되는 신정통주의는 구 자유주의에 대한 혁명이었다. 유럽에서 기원된 이 바르트주의 는 1930년대 미국의 기독교가 근본주의대 현대주의 논쟁으로 종교적 공백기를 맞던 시기에 미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 종교적 공백기에, 현대주의에 식상한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유럽에서 기원된 바르트주의는 미국의 기독교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적 대 안처럼 보였다. 그 후 적어도30여년 동안 신정통주의는 미국의 대교단들과 신학교들을 장악하여 주도적인 신학사조로 떠올랐다. 한편 근본주의가 분리주의와 반지성주의로 흘러 미국의 풍부한 복 음주의 유산을 간과하자 일련의 젊은 복음주의 신앙인들이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0년대부터 복음주의 운동이 등장했다. '전통적인 신앙을 이 시대에'라는 모토를 내걸 고 등장한 복음주의자들은 곧 미국의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
교회사를 볼 때 어떤 이는 화석으로 이해하고 어떤 이는 열매로 이해한다.
교회사가 화석인가? 화석으로 묻혀 지는 박제화된 것인가? 아니면 열매인가?
이것이 바로 교회사를 이해하는 key word이다 경직된 눈으로 경직된 마음으로 교회사를 보면 화석으로 보이게 된다 여기에는 능력이 없다.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과 이 땅, 이웃, 교회를 볼 때 우리의 입장은 살아있는 열매를 맺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것이 교회사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여Fthl가 된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의 나무를 심도록 하자. 하나님 니라의 샬롬의 평화가 가득해질 것이다 예수님의 심장 예수님의 시각을 가지고 화석이 아닌 열매를 향한 vision이 중요한 틀이며 안경이다
성경의 기록과 사도의 활동은 성경시대로 끝났고 계시의 현존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니라의 사역을 멈춘 적은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도 주의 성령은 주의 자녀를 격려하고 감동하여 동기부여를 해서 주의 나라를 이끌어간다.
교회사를 볼 때 역사를 볼 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묵상하지 못하면 일반학자들의 역사관과 다르지 않다 화석에 입각한 해석이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주 재창조하시는 주의 자녀를 부르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교회사를 공부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역사를 통해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역사를 잘 보면 하나님나라와 연관되는 program이 이 세상에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이 말하기를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시되는 극장과도 같다”라고 했다.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지고 그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항상 개혁되고 항상 열매 맺는 신학으로 가도록 하신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마당 그 무대가 바로 교회사이다. 성경의 모든 인물은 많은 실수와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교회사의 어떤 사람도 실수와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본다. 덩시에 인간의 연약함과 함께 ...이렇게 교회사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 붙잡히지 않으면 실패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은총을 사모하고 그러한 눈으로 이웃과 옆 사람을 봐야한다 이렇게 인간을 바라볼 때 긍휼과 사랑이 필요한 대상자로 보게 된다. 이것이 교회사를 배우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겸손과 관용을 교훈하는게 산상보훈의 핵심이다. 교회가 주는 한결 같은 교훈은 하나님은 교만 강성한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이 없는 자들은 낮추시며 연약하고 작고 부족하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힘을 주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사를 통하여 기독교 공동체를 어떻게 세우는가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연약하여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공동체를 계속해서 세우시고 강하게 하셔서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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