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1·6교실/교회사1교실

[스크랩] 교회사 강의

류성련 2014. 8. 13. 23:46

 

 

 

 

 

(교회사)    

초대 교회사

 

* 범위와 시대 구분

․외형적 기간 - 예수가 탄생하던 주전 4C~로물루스 아우구스의 황제 폐위시기인 로마 제국의 멸망인 476년까지

․내적 기간 - 예수 탄생~그레고리1세 즉위 전까지 기간

 

제 1 부 초대 교회 배경

 

제 1 장 초대 교회의 역사적 배경

1. Greco-Roman 배경

* 헬라시대 - 헬라가 정치, 문화적 영향을 준 시기

 1기 ; 330 BC 알렉산더~200 BC

   → 헬라 문화 형성, 팽창기 : 지중해에 절대적 영향을 미침.

          ; 해외진출, 헬라 문화 확장, 하나의 통화 정책, 헬라어의 확산, 사상체계의 수용,

            고등교육, 헬라 신 확산, 철학과 삶의 융합, 개인주의 발흥 등

 2기 ; 200 BC 후 ~ 30 BC까지

  → 이집트, 팔레스틴, 시리아, 아시아의 토착문화 발흥 ; 헬라적 요소들이 움추러 들게 됨.

*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 ~콘스탄틴 대제까지 : 로마가 지중해 지역을 지배했던 시기

 1기 ; AD 2C

 2기 ; AD 2C ~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할 때

  → 로마제국은 AD 2C에 최고 정점. 2C 이후 바바리안 족이 침입하면서 쇠퇴

1) 로마제국 ; 지리적 및 정치적 환경

* 로마의 지리적 배경 : 지중해 중심의 거대한 내륙 수로 구조

* 로마의 역사 : 예수가 태어났을 때 이미 750년의 역사를 지님

* 로마의 형성 : 티베르 강에서 시작한 마을이 국가로 형성 - 시실리,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칼타코, 스페인 등 광대한 영토형성

* 27 BC 까지의 로마는 공화국의 통치형태 - 강력한 로마시 의회에 의해 개인의 통치권 장악은 없었다.

* 27 BC 이후 : 100년간 지속된 내란으로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개인 통치가 시작됨 - 영향 : 정치적, 경제적 번영, 교통의 발달, 정치적인 평화(약 200년 간)

2) 헬라적 배경

*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가 지중해를 지배했다.

(1) 초기의 헬라 철학

* 탈레스 ~ 파르메니데스까지

* 세계의 본질에 대한 고민

(2) 소크라테스

* 인간의 자질에 관심

* 철학은 종교 : 삶의 방식으로 그 목적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

(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 세계를 전체로 이해하려는 철학적 관심과 소크라테스의 인간이해를 연합

* 플라톤 : 두 개의 세계

   - 이데아 세계 : 본질적 실체, 사물의 참된 본질, 초월적 개념, 보이지 않는 세계

   - 현상의 세계 : 느낄 수 있는 물질(산, 나무, 사람 등)로 된 가시적 세계

* 아리스토텔레스 : 인간의 지고의 선은 이성적 삶

   - 행복은 지적 미덕과 도덕적 미덕을 포함한 삶이다.

(4) 중기 플라톤 주의

* 1 BC ~AD 2C까지의 플라톤 주의

   - 플라톤 사상이 스토아의 윤리와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 신피타고라스적 형이상학과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

    : 우주와 신의 문제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조화시키는 것이 가능

* 지존자의 절대적 초월성 강조

3) 스토아 주의

* 로고스 : 말씀, 말씀의 의미, 사고적인 구조 - 실체에 대한 보편적 법칙을 의미

* 로고스는 : ① 자연법으로 모든 자연이 운행하는 원리 - 신적인 존재, 창조적 능력

            ② 도덕법 - 인간에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

            ③ 실체를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

(1) 스토이즘의 역사 개관

* 초기(BC 300 ~200) : 대표 학자로는 제노, 크린테스 등이 있다.

  -  제노 : 참된 덕을 소유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 중기(BC 150 ~ 기독교가 시작되던 시기) : 파나에티우스, 포시도니우스 등.

  - 파나에티우스 : ① 이 세상에서 삶과 성장, 차이점들의 근원은 태양이다.

                  ② 세상의 모든 부분들 사이에는 공감의 관계

                  ③ 우주는 등급별 존재로 이루어진 질서의 세계

 

* 후기(세네카 ~ 아우렐리우스-AD 180)

  - 세네카 : 심리학과 형이상학에서 스토아의 일원론을 플라톤적 이원론으로 수정

             절충주의적, 인간의 경험 상식에 의해 윤리가 조절됨

  - 에피테투스 : 우주는 신의 섭리의 산물이며 세상의 질서와 조화 속에 계속적으로 나타남.

(2)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

① 유물론 : 비물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 세계, 언어도 물질이다.

② 범신론 : 만물에서 신적 실체 발견

           하나님은 세계의 영혼이며 세계는 하나님의 몸이다.

③ 일원론자 : 모든 실체가 하나의 궁극적인 존재 형태로 구성

* 중기, 후기의 스토아는 윤리적이고 실천적으로 진행.

* 후기 : 세계의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며 인간들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선 베풀기를 열망.

(3) 스토아주의와 기독교

* 퍼거슨 : 스토아주의에서 사용된 용어인 영, 양심, 로고스, 미덕이 성경에 사용.

          사회구성단위와 성경적 권면들은 사회내의 지위와 관련된 형식과 내용이 유사.

          인류의 지속적인 악, 자기 반성의 필요, 인류와 신과의 유사성.

          세상적인 가치의 부인, 외적 환경으로부터 내적 자유에 대한 강조

*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의 다른점

  - 스토아 철학은 인격이 없는 내재적인 신을 이야기하며, 범신론을, 창조-종말로 이어지는 역사관, 세계관이 부재하며, 로고스는 신적 이성이며, 자기 존중을 도덕적 원천의 본질로 이해한다.

  - 기독교는 신은 인격이 있으며, 유일신관을, 우주는 시작, 목적, 끝이 있고, 로고스는 성육신으로 묘사하며, 이웃을 향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희생과 능동적인 사랑을 도덕으로 들고 있다.

4) 필로(20 BC~ AD 40)

*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스토아 철학과 중기 플라톤주의를 융합

① 고대 헬라 사상과 유대 주의 사상이 동일한 원천에서 나왔다고 보고 둘을 종합

② 헬라 사상과 유대주의 사상의 연속성을 확신 - 구약의 상당 부분을 우화적으로 해석

③ 헬라의 신관,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와 구약의 하나님을 동일 선상에서 이해 - 선의 이데아와 구약의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로서 자신과 이 세상과는 직접적으로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중간존재가 필요 : 이 중간 존재로서 로고스(말씀 or 이성)를 들고, 하나님 다음의 권세자이며, 신적 권능을 지닌 자로 이해

* 필로의 기독교 이해는 초대 교회사가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자세한 사항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보면 알 수 있다^^).

 

2. 유대주의 배경

1) 다윗에서 알렉산더까지

* Is은 1000B.C. 전에 다윗에 의해 설립. 다윗은 960B. C.까지 통치

* 솔로몬 : 다윗의 아들로서 930B. C.까지 다스림 - 솔로몬 이후 다윗 왕국은 2개로 분열

* 북 Is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포로

* 남 유다 : 586B. C. 년에 바벨론의 포로가 됨.

   - 539B. C. :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Is로 돌아가기 원하는 포로를 돌려보냄

   - 돌아온 포로들은 성전을 제건

   - 에스라(제사장임) : 율법을 회복 → 바리새인 발생

* 334B.C. 323B.C. 사이에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가 그리스, 인도의 동부, 남쪽의 이집트까지 정복함.

   323B. C 이후 : 알렉산더 이후 제국 분할

* 198B. C. 프톨레미(이집트)의 통치

  198B. C. 이후 셀류시드에 의해 팔레스틴 통치

2) 마카비

* 프톨레미 왕들은 유대인들에게 자유로이 신을 섬기도록 허락

* 셀류시드 왕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포기하도록 강요

* 141B.C.에 유대인들은 셀류시드를 몰아내고 독립국가가 됨.

* 63B.C. 팔레스틴 내란으로 로마 정부의 팔레스틴의 권력 장악

3) 회당과 산헤드린

* 586B.C. :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 이전 예배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 포로 후 : 거주하던 지역 공동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회당에서 예배

* 회당 : 성전을 빼앗긴 후 기도, 성경낭독, 가르침의 목적으로 모이게 됨.

* 산헤드린 : 유대인의 통치 기구 - 대제사장 지도 아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구성

   -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민족 및 종교적인 문제는 유대인 스스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다스림

* 종교적 문제에 있어서는 팔레스틴 밖의 유대인들도 산헤드린의 권위를 인정

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 마카비 시대 이후의 유대 지도자들

* 사두개인 : 제사장, 율법사

  - 구습 선호, 변화를 싫어함.

  - 종교적으로는 부활과 영생, 천사와 영혼의 불멸을 부정.

  - 영혼이 육체와 함께 사멸 : 내세가 없다.

  - AD 70년 예루살렘 몰락과 함께 사라짐

 

* 바리새인 : 평범한 유대인, 율법사

  - 율법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함을 강조

  - 지독한 민족주의자 : 헬라나 로마 등의 외세 반대

  - 부활, 내세의 삶, 상벌 사상을 믿음

  - 다소 오래 존속되었으나 유대정부 몰락과 함께 사라짐

5) 분산된 유대인

  - 전쟁 포로, 상업적 성격 등으로 흩어짐

  - 분산된 주요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였다.

 

3. 제국의 종교

① 자연종교 : 초자연적 능력을 산, 호수, 강, 나무, 태양, 달, 동물, 사람에서 찾음

  - 자연의 힘을 강조, 인간의 운명 지배하는 조상, 선, 악령, 잡신을 믿음

② 신비종교 : 인격적이고 고통당하는 현실에서 초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종교

  - 신과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줌

③ 국가종교 : 강력한 정치적인 특징

  - 황제를 위해 희생 제물을 드림

  - 신과의 교제, 연합, 구원이 없는 종교

 

제 2 부 2세기와 초대 교회 사상의 정초

 

제 2 장 초대 기독교 박해

* 기독교의 핍박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숭배한다며, 무신론자로, 황제 숭배의 거부로, 반국가적 행위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1. 1차 박해기간(AD 64-96)

1) 네로 황제 이전

* 네로 황제 이전의 박해는 부분적이고 간헐적이었다.

* 이 당시의 황제는 티베리우스, 가리우스 칼리굴라, 글리우디오 등이었다.

2) 네로 황제의 박해

* 네로는 글라우디오와 아그리파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 아그리파나는 글라우디오 독살이 성공한 후 네로를 왕으로 세웠다.

*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가 악화됨

* AD 62년 자신의 아내 옥타비아를 살해

* AD 64년의 로마의 대화제 사건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

  - 대화제 사건이 자신이 저지른 것이라는 소문의 무마를 위해서 기독교인들에게 화재의 원인을 전가함(일반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 견해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 이 시대에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함

* 네로는 30세에 자살함

# 네로 사후 1년간의 내란을 겪은 후 베스파시안(AD 69-79)이 로마 황제가 됨 : 경제적 안정, 중앙 정부에 대한 자신감, 지방 정돈을 통한 질서 회복

# 베스파시안 → 티투스(AD 79-81) → 도미티안(AD 81-96)

3)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 집정하자마자 많은 원로원 귀족들을 처형

* 죽은 황제들에게 헌사되었던 ‘주와 신’을 강요

* 아내 도미틸라를 유배

* 집정관이었던 조카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그의 두 아들 살해

  - 죄명 : 무신론, 유대인의 관습들

* 사도 요한 밧모섬으로 유배(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사후까지 살아 있었다)

* 말년에 교회에 대한 핍박을 그만 두게 함

# 도미티안 이후의 왕들 : 도미티안 이후에 다섯 명의 황제들은 선했다고 알려짐

# 도미티안 → 네르바(AD 96-98) : 과도적 인물, 트라얀을 양자로 삼음

# 250년 데시우스 황제의 칙령 발표 전까지는 네로마 도미티안 같은 박해는 없었다.

  - 다만 지엽적으로, 국부적으로 진행되었다.

 

2. 2차 박해 기간(AD 98-249)

1) 트라얀 황제 치하의 박해

* 트라얀(98-117) →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 황제의 통치 말엽까지는 의도적인 기독교 색출은 금지되었다.

* 소위 2차 박해기간이라 알려진 이 기간은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박해가 진행되었다

  -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드러나도 신앙을 부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짐

* 트라얀의 칙령

① 의도적인 색출을 금함

②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 것

③ 과거에는 기독교 인이었지만 현재는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된다.

* 아그나티우스(안디옥 감독) : 트라얀 시기에 로마에서 순교

2) 하드리안 통치 하의 박해(AD117-138)

* 국경선과 본토의 안정 추구

*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독교인을 처벌하지 말라고 명령

# 하드리안 이후의 통치

# 하드리안 → 안토니우스 피우스(AD138-161)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박해(160-180)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명상록’의 저자, 스토아 철학의 마지막 대변자

  - 처음에는 기독교에 우호적 경향 → 후에는 박해함

  - 게르마니쿠스와 서머나의 폴리갑이 순교함

  - AD 165년 저스틴 순교

  - 177년 고울 지방에서 심한 박해 일어남

# 이후 250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 박해가 일어남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202-233)

- 내란을 평정하고,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혼합절충 정책을 수행함

- 그러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그의 혼합정책에 대해 반발함

- 세베루스는 두 종교의 확장을 막기 위하여 이교도가 유대교나 기독교로 개종하면 사형에 처했다.

- 셉티무스 세베루스 칙령(202) : 개종자들과 전파자들을 향한 박해가 가해짐

  → 이레니우스 순교, 오리겐의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함

  →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다른 지방으로 피신함

  → 셉티무스의 칙령은 일반적으로는 수행되지는 않았다.

- 그 후 박해가 중단됨(이유는 밝혀지지 않음)

- 211년 카라칼라(Caracalla)가 셉티무스 세베루스를 계승하여 잠시 박해를 함

  → 북 아프리카에 제한됨

* 막시미누스

  - 알렉산더를 계승함

  - 막시무스는 교회의 지도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림 → 오리겐 순교

  - 3년이 되는 해에 공개적으로 어느 곳에서든 희생제사를 드려야 하며, 부지런히 이를 실시하도록 함.

  - 3년간 통치함

# 2차 박해 요약

* 고발된 경우에만 행함. 지엽적이고 간헐적이고 산발적으로 진행

* 어느 정도 법적인 지위가 주어짐

 

3. 제 3 차 박해기간(AD 249-313)

* 2차 박해와는 달리 제국 전역에서 진행

* 전국적인 박해 발생 원인 :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제국의 경제 및 도덕의 쇠퇴, 로마제국 창립 1000주년 임박, 교회는 국가 내에 국가이며, 따라서 로마제국의 위협적 존재라는 로마지도자들의 견해, 로마의 쇠퇴가 로마 신들이 기독교의 성장을 싫어했기 때문에 내린 벌이라는 견해

1)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이 박해

* 필립(기독교에 관용적이었음)의 뒤를 이어 데시우스가 왕이 됨

* 데시우스(250-253)

 - 로마의 옛 영광을 수복학고자 하였던 전통적인 로마인

 - 데시우스 종교 정책의 기반 : 로마의 전 국민들이 옛날의 신들을 다시 섬긴다면 제국에 은혜를 베풀 것이라 생각함(로마의 시민들이 옛날의 신들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

   → 옛 영광을 다시 복구하기 위하여 옛날의 종교를 수복하는 것이 필요

 - 데시우스 칙령은 남아 있지 않으나 제국 전역에 로마 옛신들에 대한 숭배를 의무화

   → 250년 지방 관료와 행정관에게 정해진 날에 필요한 장소에서 제사 후 제사 증명서를 사람들에게 발급 : 증명서가 없으면 황제의 칙령을 어긴 범죄자로 간주됨

   → 기독교신자들의 일부는 황제의 명령에 순종하고, 일부는 버티다가 체포되어 제물을 분향하며, 일부는 위조 증명서를 매입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신앙을 지킨 자들도 있었음

   → 데시우스의 목적은 기독교 신자들의 살해가 아니라 신들을 숭배하는 데 있었으므로 실제 순교자들의 숫자는 미미하다

 - 오리겐이 투옥, 고문당함

   → 이 박해에서 신앙을 지킨 자들을 “고백자들”이라는 칭호와 신들과 황제에게 제물을 바친 자들을 배교자라고 불렀다(이로 인해 시프리안과 노바티안의 논쟁이 발생함)

  - 데시우스는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함 - 박해가 잠시 중단됨

* 갈루스

  - 데시우스의 뒤를 이었으나 2년 만에 제거됨

* 발레리안과 갈리에누스

ⅰ) 발레리안(253-260)

  - 처음에는 이례적일 정도로 우호적

  - 257년부터 박해 시작

  - 기독교인의 재산 몰수, 계속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을 경우는 목숨을 빼앗음

  - 프리스쿠스, 말쿠스, 알렉산더가 순교, 키프리안이 칼타고에서 순교

 

ⅱ) 갈리에누스

  - 기독교에 대한 박해 억제

2)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 20년동안 박해 하지 않음 : 프리스카(부인), 발레리아(딸)도 학습교인이었음

* 303년 2월 3일 경고없이 박해 시작

* 디오클레티안 칙령

① 상류층 기독교인들의 공직 박탈, 기독교를 부인하지 않는 왕궁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며 기독교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모든 교회를 파괴하며, 성경을 불태워 버린다.

② 모든 교역자나 교회 지도자들을 투옥한다

③ 투옥된 모든 사람들을 이방신에게 제물로 드리거나 끊임없는 고문을 통해 불구로 만듦

④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들에게 제사를 드려야 함

* 칙령 발표후 자신의 아내와 딸들까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살해함

* 디오클레티안이 305년 황제직을 사임 한 후 박해가 잠시 중단됨

3) 갈레리우스 황제 박해

* 디오클레티안의 사위로서 통치하는 지역에서도 박해 발생

* 박해 시작한 지 8년 만에 박해를 완화함

* 10년이 되는 해 박해를 완전 종식

* 관용의 칙령

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생존할 수 있는 생존권을 공식적으로 허용

②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의 처소를 마련할 권리를 정부적인 차원에서 제공함

 

4.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 콘스탄틴은 콘스탄티누스(브리튼, 고울, 스페인을 통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 맥시미안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하여 입지를 강화

  - 맥시미안의 아들 막센티우스와 로마의 권좌를 놓고 다툼

*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 사이에 동맹을 맺음

  - 동맹 후 콘스탄틴의 누이를 리키니우스의 아내로 맞음

*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을 공포

  - 밀라노 칙령은 공식적으로 교회에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최초의 선언임

*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공인과 함께 기독교인들에게 재산권에 대한 구체적인 자유를 보장

 

5. 요약 : 교회 생활의 변화

*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 공인 후의 세 가지 방향의 전개

① 긍정적인 면에서 기독교 공인으로 말미암아 지하종교에서 공인된 종교를 바뀌게 되었다

  - 외형적으로 새로운 교회 건물이 들어서고, 교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음

② 반대적인 면으로는 정교와 밀착이 이루어져 영적인 생명력이 상실되었다.

  -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 발생

③ 예배의 형식이 성도의 영적인 교통에서 형식 위주의 예전으로 탈바꿈하게 됨

 

제 3 장 속사도

* 속사도란 열두 제자 이후 초기 기독교 저자들로서 속사도 시대라고 불리는 1C 말부터 2C까지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 속사도들은 신약성경과 2C 후반 저작활동을 했던 변증가들 사이에 교량역할을 함으로 사도들의 사상을 후대에 계승하는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

 

1. 로마의 클레멘트

* 1C 말엽 로마의 3개 감독(바울, 베드로 이후의 리누스, 아넨클레투스의 뒤를 이어 감독이 됨)

* 클라멘트는 70인경을 비롯한 성경에 상당한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보임(바울 서신, 특별히 고린도 저서에 익숙한 것으로 보임).

* 클레멘트 서신의 특징 : 장로와 감독을 구별하지 않고, 상호 동의어로 사용하며, 헬라적 요소와 스토아적 요소가 드러난다.

* 클라멘트의 사상의 특징

  - 하나님을 만물의 절대적 지배자라고 보면서도 창조와 관련해서는 플라톤주의와 같이 하나님을 데미우르게(하나님을 대신하여 창조를 대신한 자)로 묘사한다.

  - 신관은 삼위일체적이다 : “한 하나님, 한 성령님, 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부어 주기를 기원한다”

  -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였다 :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 칭의론 : 클레멘트 서신의 32장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임을 강조함

  - 믿음과 순종은 불과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

  -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는 모든 천사들보다 탁월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도 모든 천사들의 이름보다 더욱 우월하시다”

  - 그리스도의 선재 :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선재 하셨다면 당연히 교회도 선재 하였다.

  - 클레멘트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육체와 영, 원본과 복사판이라는 이원론적 용어를 통해 상호관계를 설명한다. 육은 영의 복사판이기 때문에 복사판을 더럽히는 자는 원본을 원래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 교회론 : 교회를 유기체적인 관계로 이해

            강한 자와 약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교회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해야 할 윤리적인 차원이 있다. 따라서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돌봐야 하고 약한 자는 강한 자를 존경해야 한다.

 

2.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 클레멘트와 동 시대 인물임

* 시리아 안디옥의 제 3 개 감독임

* 트라얀 황제 재위 기간에 체포당하고 순교함(AD 108)

* 로마로 호송되어 가는 동안에 에베소, 마그네시아, 트로이, 로마, 빌라델비아, 서머나인들에게와 폴리갑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록함.

  - 이 편지들에서 두드러진 점은 순교에 대한 예찬을 들 수 있다.

  - 교회의 일치에 대한 관심 : 교회의 일치 강조

     → 감독직에 대한 강조, 이단에 대한 경고, 성만찬 강조

  - 감독의 중요성을 역설, 단일 감독제를 맨 처음 주장

    ․ 단일 감독제 : 어느 일정한 도시에서 단 한 사람의 감독이 삼중적 사역을 총 관장함

    ․ 삼중 사역 : 감독직, 장로직, 집사직

     → 교회에는 한 명의 감독과 장로들과 집사들이 이어야 함을 말함

  - 성찬은 기독교적 일치의 상징이며,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참여하는 것

    ․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강조하는 의식(가현론자들에게 맞섬)

  - 분열을 야기시키는 이단적인 운동을 폭로함

    ․ 이단적인 요소 : 첫째, 기독교의 유대주의화, 둘째, 가현설

    ․ 기독교의 유대주의화에서는 유대교의 틀 안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단순한 선생으로 전환시키며, 마지막 예언자로 보는 유대인들을 향해 그리스도가 “하나님” 이라고 강조함

    ․ 가현설에 대한 반대로, 그리스도의 육체적 성육신,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며, 동시에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은 몸과 영혼을 갖고 있음을 역설

  - 로고스의 성육신은 기독교의 설정 근거

  -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처럼 마땅히 남을 사랑해야 되 것을 강조함.

 

3. 폴리갑(AD 80-165)

*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음

* 서머나의 감독으로 피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

* 자신이 사도들로부터 배운 것, 교회가 전해준 것, 참되고 유일한 교리를 가르쳤다 함

* 폴리갑의 중요성

  - 말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인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을 정통주의로 회심시킴

  - 이그나티우스 보다 폴리갑은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을 잘 알고 있음

  - 칭의론 :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주장

 

4. 기타 속사도 문헌들

* 로마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서머나의 폴리갑 외에 바나바 서신과 디다케를들 수 있다.

* 바나바 서신 : 하르낙은 순수성을 부정하였으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라멘크와 오리겐은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로 인정함

  - 신학사상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소 거리가 있고 우화적인 요소들이 있음

  - 교리적 부분(1-17)과 실천적인 부분(18-21)으로 구성

  - 교리적 부분은 우화적 해석이 특징이며, 실천적인 부분은 두길문서가 핵심부분이다.

  - 저자는 구약의 이해와 관련하여 구약 전체를 비유적으로 해석한다.

  - 바나바 서신은 신구약을 연속적으로 해석하려는 흔적을 나타냄

    → 이삭을 희생제사로 드린 것, 양을 광야로 보낸 것, 등

  - 기독론적 측면 : 그리스도는 선재하셨으며, 창조에 관여하고, 유대인을 정죄하시기 위해 오셨다.

  - 심판은 멀지 않은 장래에 역사속에서 실현될 것이라 확신함.

* 헐마스의 ‘목자’ : 그리스도인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개의 환상과 12개의 명령과 10개의 비유를 수집

  - 5개의 환상 : 회심을 촉구하는 권면과 박해시 신앙을 굳건히 지킬 것을 권함

  - 12계명 : 기독교인의 의무를 요약한 것으로 이들을 순종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고 확신

  - 10개의 비유 :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다.

* 디다케 : 1873년 필로데오스 바이레니오스가 발견함

* 중요한 주제

  - 첫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의 차이 :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될 방식을 설정하여 생명의 길을 설명

  - 둘째, 세례 예식에 관한 당대의 동향을 제시하여 주고 있음

  - 셋째, 훈련 지침이다.

 

5. 요약

* 속사도들의 중요성

  - 소아시아 신학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것

  - 로마의 신비종교, 영지주의, 유대주의가 속사도 신학에 반영되면서도 실천적 목회적 관심이 작품 속에 반영

  - 인물과 기록장소, 문장 스타일의 다양성 속에서도 작품들에서 몇 가지 공통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

* 속사도 문헌들에 대한 비평

  - 성경에서 떠난 전통들이 형성됨 : 선행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세례에 대한 잘못된 사상

    → 속사도들은 의가 갑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의 합당한 행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함

  - 칭의론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헬라주의적 유대주의적 경향, 스토아 주의적 도덕 교훈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 세례 후의 죄 용서 문제로 구원의 사역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 알레고리칼한 성경 해석은 성경의 원래 가르침을 왜곡하기도 한다.

 

제 4 장 기독교 변증가

* 변증가 : 2C 당대의 이단들과 정부 지도자들 및 지식인들에게 기독교의 훌륭함과 진정한 철학임을 변호하면서 기독교를 수호하려는 저술가들

* 활동시기 : 130년부터

*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공격 : 유대인을 공격한 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교도들을 공격한 것은 기독교의 복음을 이질화시켰기 때문이다.

* 이들이 기독교를 변호하는 방법은 “공개적인 편지”를 통해서였다.

* 이들이 편지를 쓸 수 있었던 이유

  - 우상숭배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황제와 제국에 충성스러운 일등 시민이었다

  -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의도적인 색출이 금지된 시기였다

    → 즉 박해 완화 시기

 

1. 아테네의 콰드라투스

* 변증가의 아버지 : 최초의 변증가

* 약 125년 경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에게 공개적인 변증서를 썼던 인물

* 푸블리우스 감독(순교함) 후임으로 아테네 감독이 됨

 

2. 아리스티테스

* 로마 황제 피우스(138-161)에게 변증서를 썼던 인물

* 하드리안에게 변증서를 썼다고 유세비우스가 전함

*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기독교인들만이 진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봄

* 기독교인들만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섬김은 그들의 도덕성에 의하여 확증된다고 주장

*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동자로 보았으며, 인간을 위해 만물을 만드셨다고 이해함.

*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이웃에 대한 존중이 불과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설명

 

3. 저스틴 마터(100-165)

* 사상은 당대의 철학과의 만남, 기독교와의 만남을 통하여 형성됨

*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황제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사용한 최초의 이방인

* 기독교 변화를 강화시킬 목적으로 유리피데스, 크세노폰, 플라톤의 글을 인용함

* 제 1 변증서

  - AD 150-155년 사이에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그의 양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시우스 베리우스에게 헌정된 책이다.

  - 이교도의 여러 가지 비난과 몰이해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함

  - 기독교가 새로운 창작품이 아니라 헬라 철학들보다 시대적으로 앞서가는 구약 성경의 구체적 실현이라고 주장

  - 68장으로 구성, 머리말과 기독교에 대한 일부 비난을 논박(4-13),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지닌 도덕적 힘과 이교의 비이성적 우화들을 대조시킴.

* 트리포와의 대화(160년 경에 기록)

  - 마르투수 폼페이수스라는 인물에게 헌사된 책

  - 일부 학자들은 이 글이 기독교의 우월성을 보여 줄 목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생각.

  - 율법, 금식, 할례, 음식물 금지, 안식일, 제사 의식 등이 유대인들의 반역적 성질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주장

  - 모형론의 개념을 이용하여 다수의 구약 성경들에서 예시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예, 노아의 방주의 나무 : 십자가의 나무, 레아 : 회당, 라헬 : 교회, 여호수아 : 예수 등)

* 제 2 변증서

  - 15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기록연대는 160년 경

  -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건의 부당한 소송 사건에, 항의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 저스틴 작품의 특징

  - 신학사상은 전반적으로 성경에 근간을 두었으나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면이 있음

  - 하나님의 로고스 씨앗이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뿌려짐으로써 인간은 진리에 대한 반응력을 소유하게 된다고 주장

  - 아담의 죄 안에서 인류가 연대성을 지닌다는 바울의 강조점을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들의 생명에 대해서 논하지 못하였으나,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들이며 부도덕하고 인육을 먹는다는 비난은 성공적으로 논박하며,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보여주었다.

  - 말시온 및 영지주의자들과 대조적으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

 

4. 타티안

* 저스틴의 제자로서 앗시리아 출신

* 저스틴 순교 후 165년 경에 로마에 자신의 교육기관을 설립

* 수년 후 로마를 떠나 시리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이단적인 색채가 강한 학파를 설립함

  - 고대 학자들은 그가 세운 분파를 엔크라티테스라는 이단으로 보기도 함

* “헬라인들에게 고함”

  - 헬라인들이 가지고 잇는 종교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야만족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

  - 헬라인들이 섬기는 신은 정상적인 경건한 신이 아니라 방종하고 음란한 신들이다.

* 로고스 사상

  -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로고스는 불과 같다.

  - 로고스는 이 세상을 지으신 조물주이지만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한 것은 아니라고 봄

  - 지존자만이 시작과 끝이 없으신 분이라 이해

* 사복음대조 : 대조복음서

  - 사복음서들을 대조하여 한 권으로 간추림

  - 전체 구문의 구성을 바로 잡기 위해 사도들의 표현을 바꾸기도 함

 

5. 기타 헬라 변증가들

* 아테나고라스

  - 티티안과 동시대 인물

  - 기독교인을 위한 청원(177) : 기독교에 대해 근거 없는 혐의에 대한 반박

    → 기독교인에 대한 혐의, 무신론, 티에스티안 잔치, 근친상간 등에 대한 반박

  -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 변호

  - 로고스 이해 : 태초에 하나님의 마음 안에 로고스가 존재

    → 로고스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특별히 서부와 성자의 관계를 주종의 관계로 보지 않고 동격이나 일체의 관점에 서 보았다.

* 데오필루스

  - 안디옥의 감독

  - 아테나고라스 보다도 더욱 구체적인 삼위일체 개념을 제시

  - 아우툴리쿠스에게 헌정한 책 3권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

   → 1권 : 하나님, 2권, 구약성경의 해석과 시인들의 오류, 3권 : 기독교의 도덕적 탁월성

  - 로고스 :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 나신 분

*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

  - 저자와 연대 미상

  - 변증가들의 작품들 중 가장 까다로운 것으로 평가

  - 헬라 철학과 유대적 예언을 모두 경시함

  - 신적인 출발이 역사적 결정이라는 ‘역사신학’이라는 관점에서 기술

  -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묘사가 불과분의 관계로 표출

  -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이나 희랍인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며 그 구분되는 증거는 그들의 삶이라 단정

  - 신론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께서 직접 이 세상에 성육하신 것이라고 생각함

  - 현재와 종말을 단순한 이원론적인 구조속에서 틀에 맞추지 안으면서 현재와 종말적인 신앙을 연결시킴

* 사르디스의 멜리토

  - 유대주의와 기독교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이 둘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연결

  - 이스라엘 역사의 상당 부분을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으로 봄

   → 그 중의 대표적인 것으로 출애굽과 유월절 제도를 듦.

  - 구약의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해석함 : 둘 사이에 구별이 없다

 

6. 요약

* 속사도들처럼 신학의 통일성을 헬라 변증가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 헬라 사상과 기독교 사상 사이에 모종의 연속성이 있음을 봄

* 로고스는 변증가들에게 진래의 안내자, 혹은 진리의 교사로 이해

  - 로고스 : 진리의 궁극적인 저자, 기독론의 핵심을 이룸

            성자와 동일시하면서도 하나님의 첫 피조물이라고 이해함

* 헬라 철학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변호함

 

제 5 장 이단의 발흥과 발전

 

1. 이단의 역사적 배경

* 이단에 대한 판단 기준

  - 사도요한 당시 :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로 정죄

  - 이레니우스 : 이단을 표준교리에서 벗어나는 자

  - 어거스틴 : 신앙 자체를 해치는 하나님에 관한 잘못된 신앙

  - 저스틴 : “사탄의 교리”라 정의함

  - 터툴리안 : 철학과 이단을 상호 연계함

* 이단의 역사

  - 사도시대부터 시작되었음

  - 2C 중엽,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와 이단이라는 도전에 직면하게 됨

  -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이단 : 영지주의, 발렌티누스, 몬타니즘

 

2. 영지주의

* 2C 중엽은 영지주의의 시대 : 135년 예루살렘 2차 함락과 193년 세베르 왕조의 즉위로 구별되는 두 세대 동안에 교회는 점진적인 헬라화 과정을 겪음

* 130년에서 180년 사이에 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교사들이 기독교의 지적 생활을 지배하면서 영지주의의 영향력은 이탈리아, 로마, 소아시아, 론 밸리(Rhone Valley)까지 확장됨

* 영지주의는 실재에 대한 이원론적 해석, 금욕주의적 유리, 그리스도에 대한 색다른 이해, 죽음의 망각으로부터 구원해주는 능력으로서의 지식을 강조함

1) 영지주의의 성격과 특징

* 영지주의는 기독교, 헬라의 철학, 동양 바벨론의 우주적인 신화론, 페르시아의 이원론을 결합한 혼합 종교사상이다. 이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헬라의 이원론과 기독교와의 혼합이다.

   → 영지주의를 헬라풍 기독교라고 부르기도 함

* 영지주의의 최대 관심사 : 하나님은 누구인가, 악은 무엇인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이 어떻게 악에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 영지(gnosis knowledge) : 영지는 영계로부터 온 계시

*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단계의 지식과 믿음을 창조하셨으며, 성경 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비밀 구전이 있다고 주장함

* 영지주의의 특징으로는 영 육의 분리에 의한 철저한 이원론적인 사고이다.

  -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며, 때문에 구원은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다.

  -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 때문에 극단적인 금욕주의 아니면 자유방임주의로 흘러감

* 물질계가 악하다는 개념을 근거하여 창조주와 구세주를 구분한다.

  - 절대자는 악한 물질계를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중간자를 개입시켜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 여긴다.

  - 악은 물질에서 나왔고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물질세계와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것

2) 영지주의 자료

* 중요한 연구 자료들은 피스티스 소피아, 교부들의 작품들, 나그 하마니 문서이다.

*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hophia) : 발렌티누스에 대한 문헌이 담겨있다.

*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오리겐, 터툴리안, 에피파니우스 같은 교부들의 작품에도 영지주의에 대한 문헌이 담겨 있다

* 나그 하마디(Nag Hammadi) : 1946년 이집트 상부에서 농부에 의해 발견됨

  - 주후 400년 경에 매장된 것으로 보이며, 이 사본에는 50개의 작품들을 포함함

   → 진리의 복음(무지가 인간의 상실된 상태임을), 레기노스 서(부활이 육체적 사건이 아님을), 도마복음(예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114개의 어록을 수집한 것), 빌립복음(성례전), 요한묵시(우주의 기원), 아담계시록(아담이 노아가 홍수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셋에게 알려줌)이 들어있다.

  - 나그 하마디의 문서는 기독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3) 영지주의의 기원

* 영지주의의 원형은 기독교 이전부터 있었지만, 영지주의의 형태를 갖춘 사상체계는 기독교 이후에 형성됨

*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등은 영지주의가 플라톤 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 같은 헬라철학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봄

* 저스틴을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마술사 시몬(Simon Magus)를 이단의 원천으로 봄

4) 영지주의의 종류

(1) 이집트계

* 바실리데스 :  130년경에 로마에서 활약

  - 시몬의 사상을 수정하여 새로운 영지주의 체계를 만듦

  - 바실리데스의 이론들 : 나지 않으신 아버지가 마음의 처를 낳고, 마음은 이성을, 이성은 중용(프루덴스)을, 중용은 지혜와 권세를, 지혜와 권세는 미덕, 프린스, 그리고 천사를 낳았다. 그들에 의해서 첫 하늘이 만들어졌고, 그 후에 다른 하늘들이 만들어졌다. 총 365개의 하늘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함

  - 바실리데스는 인간의 육체는 본성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구원은 단지 인간의 영혼에만 국한시키고 있다.

  - 바실리데스는 박해 때 어쩔 수 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변절하여 신앙을 버리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침

* 카르포크라데스(Carpporates) : 영지주의라는 또 다른 이단의 창시자

* 발렌티누스(Valentinus) : 135-160까지 활동(아나세투스 시대까지 삶)

  - 하나님을 단일한 초월자로,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무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일자에서 기원한 존재로 봄

(2) 시리안계

* 새투르니누스(Saturninus) : 120년경 안디옥에서 활동

* 시리안 영지주의의 특징

  - 자유 방임주의 삶을 대표

  - 구세주와 유대인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해 구주는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육체와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음

  - 유대인의 하나님이 천사 중의 하나라는 것

(3) 폰틱계

* 말시온 :  폰틱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 구약의 하나님을 전쟁을 즐기는 악마의 협잡이며, 일관성 없이 심판을 일삼는 자기 모순적 존재라며 신성모독을 함

  -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보다 우월한 아버지로부터 온 예수를 예찬함

  - 그리스도 탄생이 생략된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만을 인정

  - 반유대주의, 신구약의 구분, 신구약의 불연속성을 특징

  - 구원을 영적인 영혼의 구원만으로 한정함

(4) 유대주의계

* 에비온파(Ebionites)

  -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라는 뜻의 ‘evionim'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예루살렘 선지자들에 대한 경칭이었음

  - 유대주의와 기독교 요소들을 자신들의 사상에 혼합시킴

  - 마태복음만을 사용

  - 양자설 :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탄생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공의, 신중성, 지혜 등 모든 면에서 보통 인간들보다 탁월한 존재로 여김

   →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이해하며, 예수와 모세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함

  - 세례 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 형태로 임하셨다가, 십자가상에서 예수에게서 떠나갔다 라는 것을 주장함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선재성은 부인함

  - 인간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 사상이나 부활과는 관계가 없다

  - 지상에 천년 왕국이 이 땅에서 실현되며, 예수의 재림 시에 최초로 이 땅에서 구원이 가시적인 실재로 나타난다는 생각임

  - 율법적인 삶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함 : 관습을 지키며, 예루살렘을 숭배함

* 케린투스(Cerinthus)

  - 관능적 쾌락들을 보다 우아하게 표현하는 것(축제와 희생제사를 통해, 식욕과 정욕을 만족)을 즐김

  - 세상이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 보다 위이신 주권자와는 동떨어지고 어떤 먼 덕에 의해서 지어진 것으로 표현

  - 예수에 대한 이해는 에비온 파와 비슷하다 : 요셉에게서 나온 아들이지만, 다른 이들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하며, 세례 후에 주권자에게서 그리스도가 비둘기 모양으로 그에게 강림하셨다가 말년에 그리스도가 달아나셔서 인간 예수만 남게 되었다고 주장

5) 영지주의 평가

* 2C 초엽에 영지주의가 기독교인들에 관심을 끈 이유

  -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강조함

  -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교리나 가르침이 기독교와 유사하기 때문

*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차이

  - 본질적으로 계시관, 신론과 구원관의 차이가 있다.

  - 성경 외에 특별한 계시가 있다고 믿으며 성육신을 부인함

 

3. 영지주의 대표적 실례

1) 발렌티누스

*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로마에서 가르치다 160년에 세상을 떠남

* 교회의 일원이었으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했음

* 기독교 가르침을 헬라 사상 및 동양 사상과 결합

* 그의 가르침은 이교도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기독교인이 이교도가 되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

* 역사적으로 기독교회의 영지주의 거부 이유

  - 지고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와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 세상의 창조가 절대자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열등한 신의 작품이다

  - 물질계는 악하다

  - 구주는 하나님도 사람도 아니다

  - 단지 몇 사람, 즉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

  - 부활이 없다

2) 말시온주의

* 영지주의와 말시온주의는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어지기도 함

* 사도 바울에게서 나온 특정의 사상들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급진적 재편과, 모든 유대주의 요소들의 제거를 시도함

* 말시온

  - 소아시아의 북부 해안 도시 시토페에서 감독의 아들로 태어났음.

  - 주후 140년경에 로마로 이주해 옴

  - 부유한 선주의 아들로서, 신학적 소양을 지닌 인물이었다.

  - 세르돈의 영향을 받아 영지주의를 받아들이게 됨

(1) 신약과 구약의 대립

*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고, 신약을 선호했다.

* 신약 모두가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은 아니라고 제시함

*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으로 구성된(디모데서와 디도서는 제외) 말시온의 정경을 만듦

*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은 절대적으로 구분되며 상호간에는 연속성이 없다

(2) 말시온의 기독론과 구원론

* 기독론은 전형적인 영지주의를 반영함

  - 그리스도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이해함.

  - 영혼만이 구속을 받으므로 육체는 부인되고 포기되어야 함을 주장

* 철저한 금욕주의 사상 때문에 성찬식에서 포도주 사용을 금지하며, 결혼을 악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3) 말시온의 영향

* 기독교를 헬라 철학 사상과 혼합시킴

* 영육의 분리 사상, 즉 이원론을 뿌리내림

* 말시온의 결과 : 정경의 형성과 사도신경이 발달했다

 

4. 몬타니즘

1) 배경

* 몬타누스에게서 출발하며 서부 소아시아 지역인 브리기아(Pyrigia)에서 172년부터 발흥함

* 몬타누스

  - 이교 제사장 출신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후 이교주의를 포기했으나 새 종교를 구 종교의 관습 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함

2) 가르침

* 몬타누스 자신을 통해 성령(Paraclete)의 시대가 왔다고 가르침

* 몬타누스와 두 여인(막시밀라, 프리스길라)은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공헌함

* 결혼은 한 번만 해야 하며, 영적인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것은 허락함

* 순교가 권장되며, 순교를 피하는 것이 죄이다.

* 여인이 교회에서 공직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됨

3) 몬타니즘과 교회

* 예언과 은사에 대한 강조는 이것들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만들었음

*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세상과 완전한 분리를 강조함

* 종말에 대한 강조로 몬타니즘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음

4) 영향 및 쇠퇴

* 몬타누스의 가르침이 50년이 지난 후부터 변화를 겪게 됨

  - 새 예루살렘이 임하지 않으며, 많은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았다.

* 새 예언의 실패 후에 몬타니즘은 엄격한 기독교 생활, 금식, 세상과의 분리,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고백, 신앙 때문에 고난 받을 것을 강조함

* 막시밀라와 프리스길라가 죽은 후 몬타니즘 교회는 조직을 갖고 역사적인 기독교와 병행하였지만, 초창기처럼 설득력은 강하지 않았다

 

5. 요약

* 영지주의는 정통주의 형성에 간접적인 촉진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 기독교의 신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정통 기독교 교리가 체계화되었다.

 

제 6 장 교회의 응전

* 2C의 교회는 사도들이 죽고 거짓 가르침과 박해가 교회를 위협하자 교회는 존재하지 않던 권위를 요청하게 되며, 자연히 사도신경을 비롯한 신경의 발달과 정경의 형성, 그리고 감독제도의 발흥이 촉진되었다

 

1. 신경의 발달

* 신경(creed)은 “나는 믿습니다”를 뜻한 라틴어 크레도(credo)에서 유래함

* 사도 바울에게서 시작한 고백이 클레멘트, 이그나티우스를 거쳐 저스틴에 이르러서는 발전된 고백 형태가 나오게 된다.

* 신앙률

  - 150년부터 200년 사이에 널리 사용

  - 교리적인 표준으로 사용하며, 세례 입문 교육의 기초를 제공하며, 성경 해석의 안내서

  - 이단에 대항하여 정통신앙을 변호하는 신학적 내용을 제공함

* 이레니우스의 신앙 고백

  - 전체적으로 사도신경과 내용, 윤곽, 체계를 같이 함

  - 성부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

* 터툴리안의 신앙율은 사도신경과 흡사함

* 사도신경

  - 전 내용은 주후 약 100년경에 기록된 신학적인 표현 형태에서 상당부분 발견됨

  - 원조는 2세기 말엽의 로마에서 발견된 신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로마신경의 초기 형식은 히폴리투스 신경, 마루셀루스가 쥴리우스 1세에게 제출한 신조, 루피누스의 주석에 보존됨

  -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과 같은 것은 5세기 경에 등장함

  - 710년과 724년 사이에 등장한 사도신경은 로마교회에서 처음으로 채택되어 서방교회의 신조가 됨

 

2. 정경의 형성

* 2세기에 일련의 성경들을 모은 모음집이 등장함

  - 복음서, 사도행정, 바울서신, 일반서신, 계시록 순으로 되어 있다.

* 정경을 결정하는 기준은 각 권이 사도들 또는 사도들과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 이로 인해, 마가복음(베드로와 협력)과 누가복음(바울과 협력)은 포함되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 2, 3서, 유다서가 정경의 결정에서 연기됨

* 현재의 신약의 정경 형성은 AD 367년 아다나시우스에 의해서이다.

  - 두 번의 힙포의 공의회와 힙포 레기우스에서, 칼타고 공의회(397)에서 현재의 정경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음

 

3. 감독제도의 발달

* 공동체의 응집력은 교리와 같은 신앙고백에 근거하며, 감독은 진정한 교리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이단에 대항하는 보호막이었다.

* 처음에는 장로와 감독이 동일한 권위를 지녔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감독들이 장로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 감독의 권위는 로마 카톨릭에서는 감독, 주교, 교황 등을 통해서 사도직의 계승을 말한다.

* 로마의 클레멘트 당시는 장로와 감독이 구분되지 않았었다.

* 이그나티우스는 감독은 사도적 전통의 전달자였다. 따라서 감독과 장로를 분리한다.

* 이그나티우스의 단일 감독제와 클레멘트의 사도직의 계승이 이레니우스에 의해 하나로 연합되면서 감독의 권위를 체계화시키면서, 로마의 감독이 다른 감독들보다 더 권위를 지닌다는 논리를 주장함.

 

 

 

 

 

제 3 부 3세기와 기독교 사상의 확립

 

제 7 장 이레니우스와 소아시아 신학

 

1. 이레니우스 생애

* 카톨릭 교의학의 아버지, 교회 최초의 조직신학자

* 교회의 전통, 구속사, 신구약의 권위 등과 영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의 중요성이 인정

* 130-140년 사이에 소아시아, 서머나에서 출생함

* 요한의 제자 폴리갑에서 수학.

* 고울의 리용에 있는 교회에서 장로가 됨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하의 박해로 177년 포티누스 감독 등 50명의 기독교인이 리용과 비엔나에서 순교함으로 포티누스를 계승하게 됨

* 202년 리용에서 순교함

 

2. 이레니우스 작품

* 이단논박

  - 5권으로 구성

   → 1권 : 영지주의의 해설, 2권 : 이성에 의하여 논박함, 3-5권 : 선지서,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에 기초한 성경으로부터의 논박

  - 발렌티누스의 제자인 프톨레매우스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공격함

* 사도 설교의 논증

  - 창조에서 최후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를 제시함

 

3. 이레니우스의 총괄 갱신

* 하나님의 형상이해 :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 형상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아들 속에서 완전히 찾을 수 있다.

* 창조는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니다.

*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성장해야 한다.

* 타락이란 인간 본래의 완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본래 가졌던 자신의 성장이 저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함

*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사랑의 섭리 4단계

  - 첫 번째 언약은 아담의 언약으로 아담에서 노아 홍수까지

  - 두 번째 언약은 노아의 언약으로 노아에서 출애굽까지

  - 세 번째 언약은 모세의 언약으로 모세부터 그리스도의 초림까지

  - 네 번째 언약은 그리스도의 언약으로 그리스도 초림부터 종말까지

*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 즉 계속성과 완성을 동시에 주장함

* 총괄갱신 :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새로운 인간상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의 일환이다.

  -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총괄하신다는 것은 인류를 회복하는 것이며 인류를 갱생하는 것을 의미

  -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 구원을 타락 이전의 낙원의 상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

  - 세례는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삶의 시작과 영생을 보장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

  - 성만찬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며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에 동참하여 실제적으로 영양분을 공급받고 마지막에는 최종적인 부활을 보장받는 것이다.

  -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와 인간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5. 이레니우스와 전통

* 이레니우스는 성서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보존한다는 입장과 함께 성경이 영감 되었고 권위가 있다고 믿었다.

  - 사도들의 가르침의 정확성은 그들의 가르침의 통일성에 의하여 확산된다고 믿음

  - 사도적 계승이란 안수 주는 자로부터 안수 받는 자에게로의 계승이 아니라 한 스승으로부터 다음 스승으로의 전수를 의미함

* 이레니우스는 사도들의 신앙의 계승이 반드시 감독을 통하여서만이 아니라 장로들을 통해서 내려오는 것으로 보았음

* 이레니우스는 자신의 사도적 계승으로부터의 논쟁에서 로마교회를 대표교회로 삼고, 사도적 신앙이 로마교회에서 전수되어 왔음을 확신함

* 이레니우스의 사상의 핵심은 사도 요한 신앙률로서, 로고스를 통해 만물이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를 통해 인류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 이레니우스는 최초의 구속사관을 제시한 신학자이다.

  - 창조와 구속을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함 : 구약과 신약을 통일시킴

 

5. 요약 및 평가

* 이레니우스는 최초의 교부로서 사도시대와 속사도 시대 그리고 변증가들의 시대를 요약하며 3세기와 4세기 교부들을 잇는 교차로에 섬

* 이레니우스는 실제적인 교회 목회자로서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 확립하는데 관심을 둠

* 이레니우스는 헬라교부이면서도 라틴신학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음

 

제 8 장 라틴신학

* 처음의 라틴신학은 로마보다는 칼타고에서 태동

* 칼타고와 북아프리카에 언제, 어떻게 교회가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0년에 이미 교회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음

 

 

 

1. 터툴리안과 서방 신학

* 터툴리안

  - 서방신학의 대변자, 라틴 신학의 아버지

  - 150년경 북아프리카 칼타고의 로마 주둔군 백부장의 아들로 태어남

  - 중류층 가정 출신으로 헬라어를 포함한 언어, 문화, 법, 철학 교육을 받음

  - 40세에 기독교로 개종함

1) 터툴리안과 몬타니즘

* 약 200년 경 칼타고 교회의 장로로 안수 받았으나 207년 몬타니즘에 합류함

*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에 합류한 가능성 가설

  - 몬타니즘이 터툴리안의 가르침에 대한 옹호 집단이었을 것

  - 몬타니즘의 금욕주의 신앙이 터툴리안의 생활과 일치

  - 당시의 교회가 회개와 관련하여 느슨한 관습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

* 21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몬타니즘의 일원이었음

2) 터툴리안의 작품

* 약 31개가 남아있으며 반 이상이 라틴어 저술임

* 변증론 : 첫 번째 중요한 작품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변호함(197-200년 사이 기술)

* <취득시효>, <프락세아스 논박>, <말시온 논박>, <헤르게네스 논박>,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하여>, <육신의 부활에 대하여> 등 : 이단논박서

  - 취득시효 : 최초의 영지주의 비판 논박서

   - 프락세아스 논박 : 삼위일체 정립에 공헌함

* 변증서와 반박서 외의 작품으로는 도덕적, 예전, 권징에 관한 것들이 있음

  - 세례, 기도, 인내, 회개에 관하여와 여자 옷에 관하여 등이 있음

3) 터툴리안 이성, 신학, 철학

* 전통적 견해로는 터툴리안이 철학에 관하여 부정적인 생각이나, 상당수의 학자들은 플라톤 주의를 거부하고 스토아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 터툴리안의 철학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인간이 믿는 것은 그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표현하는 비합리주의를 의미함

* 철학에 대해 터툴리안의 부정적 이유는 철학과 이단의 연계 의혹 때문이었다.

* 종말론 문제에서 터툴리안은 세대주의적 입장임

  - 구약은 성부, 성육신은 성자, 오순절 이후 성령의 시대이다

4) 터툴리안의 세계관

*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대립적인 구조로 이해하며 서로 간에는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봄

5) 터툴리안과 성서이해

* 고등성경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짐

* 두 권을 제외한 신약의 거의 모든 성경으로부터 직접 인용하며 신약성경들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둠

* 신앙의 규범 또는 신앙율이라는 것을 많이 언급함

* 라틴어 법전을 신학적 용어로 집대성함

 

2. 키프리안과 북아프리카 교회

* 캐실리우스 키프리안(Caecilius Cyprian)

  - 200년경 이교도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남

  -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수사학과 법학을 통달

  - 246년경 장로 캐실리아누스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

  - 안수 받은 후 얼마 안돼서 장로로 안수

  - 248년 칼타고 감독이 됨(248-258)

1) 키프리안과 데시우스 박해

* 3차 박해인 데시우스 박해 기간에 8년 동안 칼타고의 감독을 지냄

*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 시 키프리안은 지하로 숨어 편지로 목회 하는 방식을 택함

2) 키프리안과 교회의 일치

* 데시우스 박해 종결 후 변절한 교인들과 신앙을 지켰던 신자들과의 갈등이 생김

* 박해 후의 처리 문제로 교회의 분열을 느낀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을 저술

  - 교회의 일치를 변호함

*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키프리안의 확신은 감독직의 통일성 이론으로 확대됨

  - 교회 일치를 감독의 일치로 직결 : 교회가 하나이듯 감독직도 하나

*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 강조를 위해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됨에 호소함

3) 키프리안 대 노바투스

* 노바투스

  - 로마교회의 장로로서, 배교했던 사람들은 순수하고 참된 신앙고백을 위해 온갖 일을 다한다 해도 구원의 소망이 없다고 주장

* 대부분의 북아프리카와 로마의 감독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한 키프리안을 지지함

* 노바투스는 카타리(Cathari)라는 이단의 지도자가 됨

  - 이로 인해 큰 규모의 종교회의가 개최됨

* 로마의 신임 감독 코르넬리우스와 장로 노바티안과의 논쟁이 생기게 됨

  - 원인은 변절한 교인의 재가입을 허용하는가 이다.

  - 키프리안의 코르넬리우스 지지 : 자신의 중도적 입장과 비슷하며, 노바투스와 노바티안의 연계성으로 인한 것으로 알려짐

* 노바티안파는 분파주의적이고 극단적인 성향으로 치우쳐짐 - 이단으로 정죄

* 콘스탄틴의 326년 칙령의 발표와 함께 노바티안의 신앙의 자유도 인정되었다.

*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노바티안 성직자들이 카톨릭 교회로 돌아오면 그들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노바티안의 지나친 분파주의와 경직된 신앙노선에 많은 사람들이 공교회로 돌아오기 됨

  - 노바티안 교회의 감독이 시행한 세례의 가치에 대한 논쟁이 생기게 됨

4) 북 아프리카 교회와 로마 교회의 대립

* 노바티안 교회의 세례가치에 대한 로마 교회와 아프리카의 교회의 의견이 대립됨

  - 칼타고의 감독 키프리안은 제 2의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로마 감독 스데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임

* 255-256년 북아프리카 감독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그들의 제 2의 세례에 대한 관례가 정당한 것임을 천명함

* 257년 새로운 박해로 스데반이 죽자 교회의 결정은 연기됨

* 150년 후 세례 문제에 관한 유사한 사건의 발생 시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이 로마 교회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서 로마 교회의 견해가 지배적인 견해가 됨

 

3. 요약

*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요약한다면

  - 교회는 일차적으로 외적 조직체 속에서 통일성을 찾아야 하며, 이 가견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는 하나의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일성이 존재하며, 이 통일성은 감독들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보존되며, 이 교회를 떠나서는 결코 구원이 없다는 것

* 키프리안은 후에 발레리우스 황제시의 박해 때 숨지 않고 체포되어 집에 감금되었다가 교수형에 처해짐

 

제 9 장 알렉산드리아 신학

* 알렉산드리아는 헬라 적인 특성이 강했지만 유대인의 중요한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헬라 파 유대인들로 종교와 삶의 방식이 헬라 사상과 관습에 영향을 받음

*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 헬라화 된 유대주의가 알렉산드리아에 태동됨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트(Titus Flavius Clement) : 2세기 말엽부터 3세기 초엽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의 정초를 놓음

  - 150년경 아테네의 이교 부모 밑에서 태어남

  - 판태누스라는 학자의 영향을 받고 그와 함께 성경 연구에 전념함(약 180년경)

  - 판태누스가 죽고 그 뒤를 클레멘트가 계승함

  - 극단적인 금욕주의는 없었으며, 평교인으로 독립적인 길을 걸음

1) 클레멘트의 작품

* 대표적인 저서로는 <스트로마타(Stromateis, The Miscellanies)> 8권으로 된 책

  - 진정한 철학적 지식에 관한 주석집이라는 제목을 지님

  - 수많은 철학자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료들을 혼합함

  - <솔로몬의 지혜>, <히브리서신> 및 바나바, 클레멘트, 유다의 책들을 인용함

  - 티티안의 <헬라인들을 반박함>을 인용하고, 필로, 요세푸스 등의 글을 인용함

  - 자신이 사도들을 계승한 인물이라고 말함

* <교사> : 판태누스가 자신의 스승임을 밝히며 그의 견해와 그에게서 받은 전승들을 전함

  - 총 8권으로 되었음

  - 기독교 교리의 체계적인 강해를 담고 있음

  - 로고스가 우리를 어떻게 교화시키는가를 다룸

* 그 외의 <헬라인에게 권고>, <회심에의 권고>, <부자가 구원받는다면?>, <교회법> 등이 있음

  - 회심에의 권고는 문명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할 윤리 및 예의 범절들을 가르치기 위한 일종의 안내서

  - <잡문집> : 세 번째 작품으로서 로고스가 어떻게 우리의 지식을 완전케 하여 참 지식에 이르게 하는가를 설명함

2) 클레멘트, 철학, 이성

* 기독교 진리와 희랍 철학의 진리 사이의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함

* 기독교와 헬라 철학의 연합을 추구함

  - 로고스는 성육신 이전에 선재 하셔서 헬라인들에게 철학을,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연합이 가능하다고 믿음

* 헬라인들이 철학을 통해 습득한 지식은 기독교의 신앙을 심오하게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진정한 지식인만이 완전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함

* 클레멘트는 신앙과 지성을 구분하고, 지식이 신앙보다 우선한다는 입장을 가짐

3) 클레멘트의 성경해석과 신 이해

* 클레멘트의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우화적 해석으로 대별됨

  - 문자적 해석을 첫 번째 의미로 보고, 우화적 해석을 두 번째, 진보된 의미로 이해함

* 클레멘트의 신관

  - 플라톤의 영향을 따라 신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함

  - 그러나 플라톤의 신관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신관과 조화시키려고 함

4) 클레멘트와 역사이해

* 현대적 의미의 역사관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역사의 구심점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찾음

5) 클레멘트 사상 요약

*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론, 역사관의 구심점은 로고스이다.

* 클레멘트의 신학의 핵심은 기독론(로고스론)이다.

* 로고스론은 헬라철학과 성경을 연결하는 교량이며 역사를 전체적으로 통일시켜주는 원리이고 신구약을 총체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근본원리이다.

* 헬라철학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의 유일성을 제창하려는 내면적인 노력이 엿보임

 

2. 오리겐

*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Origenes Adamantius) : 185-254

  - 동방신학의 전통을 세워놓음

  - 로마 당국에 맞서 신앙을 변호하며 기독교 교육가로 활약, 유대인 사회에 대해 기독교를 증언하며,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 일함

1) 오리겐의 성장배경

* 오리겐은 기독교 가정에서 신앙 교육을 받으셔 성장

  - 부모는 원래 이교도였으나 오리겐이 소년시절 기독교로 회심함

* 아버지 레오니데스가 세베루스 황제 박해 시 순교함

* 부친으로부터 상당히 독실한 신앙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임

  - 헬라 문학을 배우기 전에 성경을 연구하며 암송함

  - 부친으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고 부친 사망 후 언어학에 전념함

* 18세에 데메트리우스 감독의 지명을 받아 알렉산드리아의 세례 지원자 학교를 관장함

*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극도의 빈곤 생활을 함

2) 오리겐의 활동

* 216년 알렉산드리아의 전쟁 발발로 인해 오리겐은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에 정착함

  - 그 곳의 감독들은 오리겐에게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메트리우스는 오리겐의 소환을 요구함

  - 정식으로 안수 받지 않고, 지나친 금욕주의 신앙을 퍼트려 물의를 일으킴

*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오리겐은 하던 일을 계속함(학교와 가르침)

* 230년경 폰티아누스가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제비누스가 안디옥 교회의 감독으로 있을 때, 오리겐은 교회문제로 인해 팔레스틴을 경유하여 안디옥으로 가게됨

* 여행 도중 오리겐은 가이사랴에서 지방 감독들에 의해 안수 받고 사제로 임명

*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메트리우스는 오리겐의 안수 소식을 듣고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오리겐을 파문하고 오리겐의 직위를 박탈함

* 250년 데시우스 황제 박해 시에 투옥 당해 고문을 받음

  - 고문의 후유증으로 3년 간 시달리다 254년 두로에서 죽음

3) 팔레스틴에서의 작품 활동

* 마지막 20여년 동안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처럼 유사한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과 집필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냄

* 히브리어 원어를 공부하고 할 수 있는 한 유대인들의 수중에 있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원본들을 모음

* 요한복음, 마태복음, 아가서, 로마서, 창세기, 시편, 대소 편지서, 바울 서신 등에 대한주석과 <원리>와 10권의 <스트로마타>를 저술함을 집필

* <스콜리아> : 성경 구절들에 대한 전문적 연구작

4) 제일원리

* <페르 아르콘(제 1원리에 관하여)> : 오리겐의 사상을 함축적이고 체계적으로 담음

  - 고대가 낳은 최초의 조직신학 교과서로 간주됨

  - 신론, 창조, 타락, 인간론, 윤리학, 성경의 역할과 성경 해석의 원리, 자유 의지, 부활 등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룬 제반 단락이 들어 있음

  -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는 오리겐이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선재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5) 오리겐의 신관

* 클레멘트의 신관과 유사하지만, 좀 더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체계를 담고 있음

* 성부와 성자의 가르침은 성자의 영원 전 나심의 개념으로 정립함

  - 성자 로고스와 아버지와 동질에 속함을 의미

* 삼위이해는 삼위의 위격을 구분하지 않지마 삼위가 서열상 동등하지 않고 능력에 있어서도 차등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성자의 성부 종속, 성령의 성부 및 성자 종속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함

5) 오리겐, 그 비판과 예찬

*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부가 직접 세상을 창조하기는 부적당한 것으로 봄

  - 신플라톤주의적 로고스 신학을 발전

* 모호한 기독교 교리들을 예리하게 다듬었으나, 새로운 교리를 태동시킴

  - 자유의지, 하나님의 선하심, 구약 성경의 가치 및 구약과 신약의 일치를 주장하며, 로고스의 인격성과 로고스의 영원 전 발생,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 하나님의 영성을 옹호함

* 만인 구원론 : 악한 자들과 이단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으로 믿음

* 오리겐의 영혼 선재설과 보편 구원론은 교회에 의하여 거부되고, 정죄를 초래함

* 오리겐 사후 553년 5차 콘스탄티노플 세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 오리겐의 수도원 운동의 기반을 닦음

 

3. 오리겐 이후 알렉산드리아 신학

*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아다나시우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대별함

  - 초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한 탐구 관심이었으나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삼위신과 성육신에 관심이 집중됨

*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성이 신성이 로고스와 연합함으로써 불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핵심이다.

*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그 중심이 로고스 사상이며, 로고스 사상은 구원론의 핵심을 구성한다.

 

제 4 부 4-5세기와 정통의 확립

 

제 10 장 삼위일체 논쟁

* 초대 기독교의 최대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와 관련된 문제는 초대교회 수 세기동안 쟁점이 됨

 

1.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적 배경

* 90-140년 사이에 활동했던 속사도들은 소위 신학적 의미의 삼위일체에 관한 분명한 교리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음

  - 속사도들은 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함

* 저스틴을 비롯한 변증가들은 종속설과 비슷

  - 로고스는 하나님 다음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아버지에 종속된다고 봄

* 삼위일체 개념은 교부들에 와서 체계화되기 시작함

* 이레니우스는 창조주가 성자이심을 고백함

* 터툴리안은 삼위의 한 본성, 본질, 그리고 삼위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 하나의 신적 본질이 있고, 아버지와 아들은 이 신적 본질을 공유한다.

  - 인격에 관한 한 성부와 성자는 분리되고 구분된다.

  - 따라서 한 신적 본성에 두 신적 위격이 존재한다.

  -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연관시킴

 

2. 단일신론

* 단일신론은 양태론적 단일신론과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나뉘며, 양태론적 단일 신론은 성부 고난설과 사벨리안주의로 나뉜다.

*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지도자들은 서머나의 노에투스와 프락시아스이다,

  -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각기 다른 이름과 형태만을 가진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고 봄

  -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인 동시에 동일 본체에 속하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서만 구별된다는 것

  - 성자가 성육신 하신 성부 자신이며, 성부 자신이 고난받으셨다는 성부고난설 주의자라고 불림

* 대표적인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사벨리안주의이다.

  - 사벨리안주의는 215년경 로마에서 활동하던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에게서 기원된 초대 교회의 이단중의 하나

  -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방법 또는 양식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시는데

   →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온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성부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

   →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온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성부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며

   → 하나님께서 구원 사역의 과업을 맡으셨을 대는 성부 하나님이 친히 성자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며, 아들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자 하나님은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

* 역동적 단일신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삼위를 구분하려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킴

  -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신성이 충만한 인간일 뿐이었음

  - 역동적 단일신론의 대표적 일파는 에비온파이다.

  - 역동적 단일신론의 대표적 인물은 데오도투스이다. : 원래 예수는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세례 시에 신으로서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양자설을 주장함

* 261년 사벨리우스의 교훈이 정죄됨에 따라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이단으로 정죄됨

* 286년 안디옥 회의에서 역동적 단일신론 역시 이단으로 규정

 

3. 아다나시우스 대 아리우스 논쟁

* 동방의 삼위일체 논쟁은 318년경 알렉산드리아의 교회 알렉산더 감독과 그 교회 장로 아리우스 사이에 발생한 논쟁에서 발달됨

* 아리우스는 성부와 성자가 기원상 차이가 있음을 주장

  - 아리우스는 성자가 사실상 피조물로서 모든 피조물의 장자라고 믿음

  - 성부만이 참 하나님으로 보며, 성부만이 시작이 없는 분으로 봄

  - 아리우스가 가르치는 로고스는 완전한 하나님도, 완전한 사람도 아니다

* 아리우스 논쟁의 중반에 등장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을 계승한 아다나시우스는(328) 아리우스 주의를 공박함

* 321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회의를 소집하고 아리우스 및 그의 동료들을 정죄하고 출교시켰으나, 아리우스를 따르는 세력은 적지 않았음

  - 그 이유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다신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유일성을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임

   →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와 수리아의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도 아리우스 편으로 기울어짐

*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도움을 받아 은신처에 거주하면서 편지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확산시킴

* 알렉산더 역시 동료 감독들에게 자신의 입장이 정당함을 알림

* 알렉산더와 아리우스와의 논쟁으로 인해 동방 제국의 통일성이 위협을 받음

  - 황제는 호시우스 감독을 시켜 이견조정을 시도함

 

4. 니케아 회의와 신조

* 호시우스의 이견 조정의 실패로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 해결을 위해 325년 5월 니케아 회의를 소집함

* 325년 5월부터 7월까지 열린 회의는 300명의 감독이 참석하였는데, 대부분은 동방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의 사상인,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다, 그는 무에서 피조되었다, 성자는 성부와 다른 본질이다는 것을 모두 거부함

*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파는 정죄되었으나, 니케아 회의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아리우스 주의로 기울이게 됨

 

5. 니케아 회의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 니케아 회의 이후 전개된 아리우스 대 아다나시우스 논쟁은 세 단계로 대별할 수 있음

  - 제 1 기는 콘스탄틴 대제의 사망시기인 337년 5월 22일 까지

  - 제 2 기는 콘스탄틴의 아들들이 황제의 직위에 오른 후부터 콘스탄티우스 1세가 죽던 361년까지

  - 제 3기는 줄리안이 즉위할 때부터 데오도시우스 1세의 통치까지

* 콘스탄틴 대제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니케아 신조는 진실한 신앙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었으나, 아리우스주의자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 의하여 유스티스, 아다나시우스, 마르셀루스 등이 유배를 당하게 됨

* 콘스탄틴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1세 즉위동안 로마 제국은 정치적, 교회적으로 극도의 혼란기를 맞게됨

* 341-342년 겨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세상을 떠나게 됨

* 342-343년 콘스탄스와 콘스탄티우스1세에 의해 불가리아 소피아인 세르디케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함

  - 아다나시우스와 알렉산드리아를 감독직에 복귀함

* 350년 콘스탄스가 고울 지방에서 마그넨티우스에게 살해당함

  - 이로 인해 콘스탄티우스1세와 마그넨티우스와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전쟁은 콘스탄티우스의 승리로 종결되었음

* 콘스탄티우스 1세는 밀란에서 일련의 종교회의를 열어 아다나시우스를 정죄함

* 361년 줄리안이 콘스탄티우스를 계승하면서 아리안주의는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함

* 쥴리안은 종교정책의 일환으로 니케아를 지지하는 자들을 박해하는 것을 중단시키며, 아다나시우스를 소환함

* 357-358년 “천사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질을 이해하면서도 성령의 동질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이설이라고 논박함

* 362년 아다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소회의를 소집함 : 혼란의 정리를 위함

* 아다나시우스는 367년 부활절 서신에서 신약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것을 확인함

* 아다나시우스의 니케아 정통주의가 발전되고 더욱 체계화 된 것은 3인의 갑바도기아인들 때문이다.

  - 이들은 대 바실(Basil the Great: 330-379 ; 가이사랴 감독),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4 ; 대 바실의 동생),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90)등

* 바실은 삼위일체를 위한 인정된 문구 즉, 한 본질과 삼위를 확정시킨 인물임

  - 바실은 373년 아다나시우스 사후 동방의 정통 신앙의 수호자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발렌스가 죽은 후 콘스탄티노플에서 청빙받아 그곳에서 니케아 정통신앙을 근거한 설교를 통해 정통신앙을 확산시킴

* 발렌스에 의해 추방당했던 니사의 그레고리는 발렌스 사후 그라티안 황제의 열광적인 지지 하에 니사로 돌아옴

  -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신학적인 영향을 미쳤고, 데오도시우스에 의해 니사의 교좌로, 정통신앙의 표준교좌로 인정받음

* 바실과 두 그레고리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 사용방법에 일치를 봄

  - “한 본체 안에 세 위격”

  - 이들은 삼위일체가 성서적 근거에서 출발한 것임을 발견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은 하나(일체)라는 것임

 

6. 콘스탄티노플 회의

*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신학은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즉위 때까지 뚜렷한 발전을 못함

*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79년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기독교를 삼았다.

*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다.

* 373년 아다나시우스 후 바실이 새로운 정통 지도자로 부상하며, 그레고리는 니사의 감독이 되며, 380년 나지안주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반아리우스 운동을 전개함

* 381년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니케아 신앙을 확인하고 그 신앙을 따르지 않으면, 이단으로 규정하고 벌을 가한다는 법령을 발표함

*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 회의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앙을 확인하고 아리우스 문제를 종결함

* 325-381년에 걸친 삼위일체론의 본질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

  - 현대적인 의미로의 총체적 정립, 발전된 것은 어거스틴에 와서이다.

 

제 12 장 기독론 논쟁

* 기독론 논쟁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계를 논의 한 것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nism)

* 아폴리나리우스는 4세기 초엽 시리아의 라오디게아에서 태어남

  - 시리안의 라오디게아의 감독으로 활동함

  - 아다나시우스의 절친한 친구로서 아리우스 논쟁에서 강력한 전통주의 옹호자로 활동

* 아폴리나리우스는 신인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보다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이해함

  - 인간 예수가 로고스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인간은 아니다

* 이러한 아폴리나리우스의 견해를 반대한 3명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 즉 완전한 인간적 본성과 완전한 신적 본성을 강조함

* 370년 갑바도기아의 바실이 아폴리나리우스를 논박하기 시작

* 377년 로마 감독 다마수스 지도 하의 회의에서 아폴리나리우스를 정죄하며, 382년에 확인

* 379년 안디옥의 한 회의에서 아폴리나리우스를 정죄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함

* 388년 데오도시우스 법전 이단 목록에 포함됨

 

2.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 네스토리우스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자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으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였으나,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어떻게 연합되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오류를 가짐

1) 논쟁의 발단

*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직을 놓고 여러 파에서 대립을 하자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안디옥 출신의 네스토리우스를 감독으로 부임하게 함

  - 마리아의 호칭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임

  - 한 쪽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한 쪽은 앤트로포토코스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임

  - 네스토리우스는 크리스토토코스로 부르기를 제안 : 해결함

* 같은 시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시릴을 황제에게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함

  - 황제는 이 문제를 네스토리우스에게 해결할 것을 요청함

2) 논쟁의 핵심

*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출발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로 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에서는 마리아는 하나님을 나신 분(데오토코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릴은 이 전통을 따라 데오토코스라고 주장한 반면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된다고 주장함

*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크리스토토코스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는 이유는 니케아 정통 신앙을 무시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극단을 피하고도 한쪽으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여 인성을 약화시키려는 극단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생김

* 412년 데오필루스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시릴은 네스토리우스의 세력을 견제하며,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후광을 단절시키려 함

*429, 430년 알렉산드리아 회의 중  세 번의 편지를 네스톨리우스에게 보냄

  - 429년의 편지는 단순히 친구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로 안부적인 성격의 서신

  - 두 번째 서신은 교리서한으로 알려짐 : 인성과 신성 사이의 속성의 교류를 거부하는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에 대한 정면 도전적 성격을 지님

* 로마감독 켈레스틴은 430년 8월 로마의 한 회의를 소집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함

* 시릴은 알렉산드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12개의 정죄문을 만들어 켈레스틴의 공문과 함께 11월 30일에 네스토리우스에게 전달함

  - 시릴이 작성한 12개의 파문조항은 안디옥의 양성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간에 그의 말씀과 행동을 구분하는 이원론, 등의 주장을 정죄함

3) 에베소 회의와 평화안

*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데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431년 에베소 회의를 개최함

* 431년 6월 22일 단독으로 에베소 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하고 후에 도착한 로마사절단들은 시릴의 결정을 승인함

  - 안디옥으로 추방되어 435년 애굽 사막으로 유배되어 고초를 겪다 450년경 이집트의 망명객이 되어 죽음

* 알렉산드리아의 안디옥 측은 네스토리우스의 파문과 12개 조항을 완전히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안디옥 전통을 융합시킨 통합 신조 곧 평화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함

  - 한 인격의 두 성으로 연합하여 결론을 내림

 

3. 유티키스주의(Eutychianism)와 단성론(Monophysite) 논쟁

*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시릴은 444년 생을 마감하고 그의 후임으로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감독이 됨

* 콘스탄티노플에서는 446년 플라비안이 감독이 됨

* 유티키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이었음

  - 그리스도가 성육신 이전에는 두 본성이었으나 성육신 이후에는 한 본성이라고 주장함

  - 그리스도가 몸을 소유하고 있지만 우리와 같은 몸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 양성이 하나의 성 즉 신인으로 연합된다고 믿음

* 플라비안은 유티키스의 견해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나 정치적인 논쟁에는 휘말리기를 원치 않음

  - 유티키안이 고소되어 오자 플라비안은 용의주도하게 심문을 하면서, 유티키스의 사상의 문제점을 밝힘 : 양성의 혼합 혐의를 받음

* 유티키스는 레오 1세와 알렉산드리아 감독 디오스코루스에게 호소함

  - 황제는 플라비안의 판단이 근거 있음을 생각하였으나 디오스코루스는 플라비안의 회의를 거부하고 황제에게 에큐메니칼 회의를 열 것을 요청

* 449년 황제는 에베소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함

  - 이 회의에서 플라비안이 유티키스를 정죄한 것이 정당한 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유티키스의 정죄를 반박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고, 플라비안은 정죄 당하고 유배를 떠남

* 추방당한 플라비안이 4일만에 옥중에서 세상을 떠남

  - 에베소 회의에 대한 인상이 부정적으로 흐름

* 로마의 레오 교황은 449년의 에베소 회의를 인정하지 않음

* 451년 마르시안과 펄체리아에 의해 소집된 칼케돈 회의에서는 448년 플라비안 지도하의 코스탄티노플 지방회의와 449년 디오스코루스 지도 하에 열렸던 회의를 심사함

  - 펄첼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아나톨리우스 감독은 449년의 회의의 모든 결정사상을 번복하고 유티키스를 정죄하며 플라비안과 유세비우스의 정통성을 확인됨

  - 칼케돈 신조 책정

* 칼케돈 신조는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안디옥 전통을 동시에 수용하는 모종의 타협안

* 칼케돈 신조의 교리사적 의의

  -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왔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네스토리우스주의, 유타키스주의와 단성론의 문제를 해결

  -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니케아 전통을 재확인

  -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이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 사이의 오랜 논쟁인 동정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로 확정함

 

 

 

4. 칼케돈 이후 기독론 논쟁

* 칼케돈에서 정죄를 당한 네스토리우스 주의자들과 유티키스를 따르는 단성론자들은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이지 못함

* 네스토리우스 주의자들은 페르시아로 거처를 옮겨 페르시아 정부의 보호 아래 자신의 신앙을 보존함

* 단성론자들은 칼케돈 이후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교회의 지도력을 장악하고,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산시켜 나감

*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칼케돈 이후 칼케돈 정통주의자가 물러나고 단성론자가 감독을 앉는 등, 칼케돈 이후 칼케돈 정통주의자들이 물러나고 단성론자들이 여러 교구에서 감독직을 차지하게 되었음

* 제노 황제는 단성론자들과 칼케돈주의자들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신조를 통합하려는 통합령, 헤노티콘(482)을 발표함

* 제노 황제 이후 동방황제들은 단성론을 옹호하는 선왕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저스틴 황제가 들어서면서 반 칼케돈 쪽으로 방향이 선회됨

* 저스틴은 543년 단성론자인 데오도라 황후의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 수용되어 오던 소위 3장을 정죄하는 칙령을 발표함

* 이 문제로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 5차 에큐메니칼 회의가 열려 칼케된 회의를 그대로 인정함

* 단성론 논쟁은 단의론 등장으로 새로운 단계에 들어감

  - 극단적인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

* 6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 6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고 단의론을 정죄하였음

  - 5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재확인함

 

5. 기독론 논쟁 요약

* 기독론과 관련된 모든 회의 핵심 논제는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과연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

* 기독론 논쟁과 교회 회의 관계 요약

  - 아폴로나리우스 주의는 “완전한 인성 문제”와 관련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그의 그리스도의 두 인격 교리가

  - 유티키스의 간성교리가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거부됨

  - 단성론 논쟁이 553년 제 5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칼케돈 신조를 재확인함으로 해결

  - 그리스도의 일의론이 제 6차 콘스탄티노플 회의(680)에 거부됨

 

제 5 부 초대교회 위대한 인물들

 

제 13장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들

* 340-350년 사이의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학적, 교권적, 예전적 초석을 놓았다.

  - 니케아 회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에베소 회의, 칼케돈 회의 등

 

1. 행정가 앰브로스

* 앰브로스(Ambrose:340-397)

  - 고울의 수도인 트레베에서 태어남

  - 13세가 되던 해에 부친의 사망이 있고, 그 후에 로마에서 교육을 받음

  - 30세네 이탈리아 상부의 통치자가 됨

  - 374년 감독 선출에서, 아리우스 파와 카톨릭의 경쟁에서 갑작스럽게 감독으로 선출됨

  - 373년 11월 24일 세례를 받고, 12월 1일에 감독직에 오름

  - 397년 세상을 떠남

* 앰브로스는 밀란(서로마의 수도)의 감독으로 그라티안 황제(375-383), 발렌티니안 2세 황제(375-392), 데오도시우스 황제(379-395)까지 영향력을 행사함

* 감독직에 오른 후 앰브로스는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와 사회에 바침

* 앰브로스는 감독으로서의 군림이 아닌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에게 항상 사무실을 열어 놓았으면서도 성경과 신학연구, 설교에 정성을 기울임

* 앰브로스는 전통적인 카톨릭의 입장으로서,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함

* 앰브로스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아닌 교회의 권위를 국가 위에 놓음.

 

2. 성경번역의 선구자 제롬

* 제롬(331-420)은 성경 번역과 함께 서방에 수도원 제도를 도입함

  - 이탈리아 북부 스크리돈 성읍에서 태어남

  - 로마에서 수사학과 문법을 공부함

  - 로마에서 세례를 받고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의 수도원에 가입했으나 수도원의 해체로 372년 팔레스틴으로 가게 됨

  - 40대에 시리아의 광야에서 은둔과 금욕적 생활을 하게 되고 히브리어를 공부함

  - 로마 감독 다마수스에게 발탁되어 시편과 복음서의 라틴어 번역을 의뢰 받음

  - 386년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수도원 운동과 성경번역 사업에 착수함

  - 405년 구약성경을 완역함 : 이것은 처음부터 라틴어 역본으로 인정받음

   → 13세기 전에는 구 라틴어 역본들과 함께 사용되었으나 13세기부터는 제롬의 성경역본이 공동역 벌게이트로 일컬어지게 됨

  - 성경 외에 150개의 서신 집을 남김

* 제롬이 남긴 서신 집은 당대의 문화, 사회, 종교에 대한 유용하고 풍부한 지식을 제공해 줌

  - 성격 : 성경해석과 관련 된 것과 수도생활의 이상을 변호함

* 제롬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헬비디우스와의 논쟁, 요비니안과의 논쟁에 휘말림

* 헬비니우스와의 논쟁에서 제롬은 마리아가 예수 탄생 이후에도 동정을 지켰다고 주장함

  - 마리아 숭배 사상의 근간이 됨

 

3. 요한 크리소스돔

* 350년 경 안디옥에서 태어남

* 386년부터 397년까지 안디옥 교회의 강단을 맡음

  - 설교는 매우 직설적이고 강렬하고 단순하며, 교리적보다는 도덕적이고 영적이었다.

* 안디옥의 전통을 따라 우화적인 해석보다는 문법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을 추구함

*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안두사(Anthusa)에 의해 양육됨

* 370년 모친의 사망 후 안디옥 교회의 산지에서 고행을 함

* 381년 집사로 안수 받음

* 플라비안 감독은 요한을 사제로 삼고, 사제로 있는 동안 요한은 ‘사제직’이라는 저서를 기술함

  - 사제직은 목회 사역에 대한 표준을 제시한 책

* 12년 동안 안디옥에서 성경을 강해함.

* 황제의 요청에 의해 398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를 임명받음

* 성직자, 수도승, 수녀, 유력한 평신도들 사이의 개혁을 시작함

  - 403년 칼케돈 근처의 오우크에서 크리소스톰을 해임하는 종교 회의를 개최함

  - 민중의 요구로 크리소스톰의 재소환을 요청했으나, 다시 재개된 반발로 인해, 404년 부활절 세례식에서 소위 ‘요한파’는 엄청난 희생을 당하고 쿠크수스라는 정착촌으로 유배당함.

* 407년 새로운 유배지로 가는 도중 코마나에서 사망함

* 사후, 재평가가 시작되고, 교황 이노센트 1세의 강력한 지지 하에 438년에 유체가 콘스탄티노플의 사도 교회에 재 매장됨

 

제 14 장 어거스틴 생애와 사상

* 동방교회의 전통을 거부하지 않고 그들의 기독교 전통을 정통주의화 하면서 서방교회의 신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중세의 스콜라 철학, 교황의 정치 및 교회제도 정립의 초석을 이룸

* 마니교와의 논쟁을 통하여 기독교를, 신 플라톤 사상을 통해 인식론을,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을 통하여 교회론을,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하여 죄와 은총을, 신국론을 통해 역사철학을 발전시킴

 

1. 어거스틴의 성장 배경

* 354년 11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지방 타가스테에서 패트릭과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남

* 키케로와 버질의 작품을 통하여 철학적 사유를 깨달음

  -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통해 철학과 진리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킴

 

2. 어거스틴의 사상적 배경

1) 마니교

* 373년 육체적, 지적 방황을 하던 어거스틴은 19살에 동방에서 기원된 마니교에 심취

* 3세기경 페르시아의 마니(215-73)로부터 유래된 마니교는 헬라화된 페르시화 종교로서 조로아스터 예언, 페르시안 종교의 예언자, 고대후반 세계의 영지주의 사상의 형태로 플라톤 주의를 혼합한 것

* 마니교는 세상이 빛과 선 그리고 어두움과 악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둘이 실재며 본질적이라고 가르침

*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몰입한 원인은 악의 기원 문제 때문이었다

* 마니교에서는 특별한 신이 각기 한 영역을 지배한다.

  -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으로 어두움과 악의 세계를,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빛과 선의 세계를 지배한다.

  - 인간의 영혼은 빛의 영역의 일원이지만 본질적으로 악한 육체와 물리적 세계에 속박되었다.

* 악은 하나님과 병존하는 본래적인 원리로서 하나님의 지배를 제한하는 독립적인 권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에 맞서서 싸우신다고 주장

* 구원은 인간 안에 있는 빛이라 부르는 영적인 것과 암흑이라 부르는 물질의 두 가지 요소를 다시 분리시켜 영혼이 순수한 빛, 광명의 영역으로 다시 귀환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 어거스틴이 10년 동안(19-29)마니교에 몰입한 이유

  - 마니교의 진리체계가 이론적이고 논리적이면서 실천적이면서 실존적이었음

  - 악한 원리에 의하여 사로잡힌 선의 요소들을 악한 원리에서 구하는 것이라는 마니교의 구원체계야 말로 참된 구속의 진리라는 것

  - 진리란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 속에 존재한다는 마니교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설득력 있는 세계관이라고 믿었기 때문

* 어거스틴이 마니교에서 나온 결정적 이유 : 플라톤의 사상, 천문학

  - 천문학은 별의 완벽한 움직임, 우주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요소를 보여줌

   → 이원론적인 원리가 불가능함을 말해줌

2) 신플라톤주의

* 어거스틴은 29살에 마니교를 청산함

  - 악의 기원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해 주지 못하자 마니교의 선생 파우스트와 대면하게 되나, 만족하지 못하자 마니교를 떠남

* 어거스틴이 29살에 383년 칼타고를 떠나 로마에서 밀란으로 진출함

  - 로마에서 잠시 수사학 교사로 활동하다가 밀란으로 옮겨서 수사학 교사가 됨

  - 잠시 아카데미의 회의주의에 빠져있었음

*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의 원조 플로티누스의 작품을 섭렵하기 시작함

* 신플라톤주의의 악의 원인은 선의 부재에 있다고 함

* 신플라톤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영적 완전성을 밝혔고 내적 명상을 통한 통찰력을 추구함

* 신플라톤주의는 하나님을 절대적이시고 불변의 선으로 모든 변화를 초월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 인식함

* 악은 결코 독자적인 원리는 아니며 악이 선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 아니다

  - 악은 하나의 부정적인 성질이며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선의 결핍을 의미

3) 어거스틴의 회심

* 384년 밀란으로 이주한 어거스틴은 앰브로스의 설교에서 기독교도 웅변적이고 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

*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으면서 완전히 기독교로 전향하게 됨

* 어거스틴은 회심 이전에는 신플라톤주의를 일차적 원리로 삼았으나, 회심 이후에는 기독교 신앙을 일차적 원리로, 신플라톤주의를 이차적 원리로 삼음

* 386년 기독교로 귀의, 387년 부활절에 세례 받음, 수년 후 히포 교회의 장로로 선출

* 395년 히포의 감독으로 선출

* 430년 임종함

 

3. 어거스틴의 사상

1) 어거스틴의 인식론

*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어거스틴의 노력은 세례 직후 저술한 <독백>, 394년 <참 종교에 관하여>, 395년 6월 완성한 <자유 의지론>, 416년 완성한 <삼위일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 기독교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 플라톤의 사상을 사용한 이유

  - 이성이 진리를 밝히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어거스틴의 확신 때문

  - 그러나 이성은 믿음보다 선행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이 이성보다 선행됨

  - 진리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 깨달을 때에야 계속 탐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이해케 하는 이성은 필수적이나 권위 면에서는 영원한 것을 이성보다, 계시를 철학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 위치시킴

  → “신앙은 찾고, 지성은 발견한다”

* 어거스틴은 사랑을 두 가지 개념-자기 사랑(amor sui)과 하나님 사랑(amor Dei)-을 통해서 설명함

  - 의지 중심이 세상적인 것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에서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음

2) 어거스틴의 교회관

* 도나투스와의 논쟁을 통해 교회관을 확립함

* 도나티즘(도나투스주의)

  - 도나투스에서 시작됨

  - 디오클레티안 박해 때 배교자들의 성직 임명을 무효라 주장하고 이들에 베푼 세려도 무효라고 주장함

  - 유아세례를 행하지 않음

* 어거스틴은 400년 도나투스의 문제점이 교회론과 성례론의 문제임을 발견

* 404년 칼타고회의가 도나투스파의 난폭한 행위로 미결되고 411년 칼타고 회의 이후 도나투스파와 어거스틴의 대립이 더욱 심화됨

*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의 세례를 카톨릭 교회의 세례와 완전히 동등시 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밝혀야만 했음

*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키프리안의 전통을 따르면서 성례관은 로마의 전통을 따름

  -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통일성을, 교회의 통일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순수성을 내세웠던 키프리안의 전통을 선별적으로 수용함

* 어거스틴의 교회관

  - 로마 교회의 성례관은 수용하면서 그것을 키프리안의 교회관 속에서 재해석함으로써 로마교회가 말하는 성례의 객관성과 키프리안이 주장하는 성례의 주관성을 하나로 종합

3) 어거스틴의 인간이해

*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은총론을 체계화 함

* 펠라기우스

  - 영국 아일랜드 수도승 출신

  - 400년에 로마로 와서 7, 8년 간 머물면서 활동함

  - 당시 로마 교회는 영적 침체와 로마 사람들의 부도덕과 방종한 생활을 하고 있었음

   → 계명 준수의 필요성을 느낌

  - 어거스틴의 고백론(인간의 책임을 약화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역설)과 코엘레스티우스(펠라기우스와 입장이 같음)를 만남이 원인이 됨

  - 사상의 특징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함

  - 가능성(posse), 의지(velle), 실천(esse)이라는 구조 속에 사상의 특징을 집약시킴

  - 원죄 부인, 선과 악이 선천적인 것이 아닌 후천적인 것이며 우리의 행위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고 봄

  - 410년 로마 멸망 후 411년 칼타고에서 가르침

* 어거스틴의 인간론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불가항력적 은총에서 출발함

  - 인간은 아담의 죄를 전가 받아 죄의 노예일 수밖에 없고 범죄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

  - 은총 없는 율법은 의미가 없고 은총 없는 율법은 성취될 수도 없다

  - 성령의 도우심 없이 인간의 자유의지만으로는 선행이 불가능함을 주장

   → 중생 전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예정론의 입장을 취함

   → 예정 받은 자들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 412년 칼타고종교회의에서 코엘레스티우스가 정죄됨

  - 정죄 이유 :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아담의 죄는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인간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음, 복음과 마찬가지로 율법도 하늘나라로 인도함,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죄 없는 인간이 있었다, 새로 태어난 유아는 타락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이 죽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모든 인간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유

* 412년 종교회의와 415년 예루살렘 회의, 디오스폴리스 회의에서 펠라기우스는 정죄를 모면하였으나 416년 북아프리카의 두 번의 지방 종교회의에서 펠라기우스가 정죄됨

  - 416년 교황 이노센트 사후 후임으로 조시뮤스가 펠라기우스를 지지했으나 417년 칼타고 회의에서 416년 펠라기우스 정죄가 유효함을 확인함

* 어거스틴은 <유아세례에 대하여>와 <영과 문자> 외에도 여러 저술로 반펠라기우스 운동을 주도함

  - 펠라기우스의 <본성에 대하여>의 반박문인 <본성과 은총에 대하여>와, 417년 <펠라기우스 기만에 대하여>를 저술

* 그 외의 어거스틴의 저술

  - 419년 <결혼과 육욕에 대하여>, 421년 <쥴리안 논박>, 428년 미완성 <논박서>

   → 배교자 쥴리안 반박에 대한 논박서

  - 413-426 <신의 도성>

 

4. 어거스틴의 역사이해

* 395년 로마 제국은 데오도시우스의 두 아들에 의해서 나누어짐

* 410년 서고트족의 침입을 시작으로 455년 게르만 민족에 의해 로마는 무너짐

*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마지막 황제로 로마 멸망

* 412년 어거스틴은 히포의 집정관 마르셀리누스의 요청으로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역사 철학에 대한 변증서인 <신의 도성> 집필

* 신의 도성

  - 이 세상은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으로 나뉘는데, 인간의 도성은 하나님의 도성을 섬기는 위치에 있어야 함

  - 로마의 쇠퇴는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음

* 어거스틴의 역사해석의 원리

  -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생명을 상실할 때 교회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흩으시고 개혁함

*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을 통해서 창조 이후 인간의 역사가 하나의 종말을 향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함

 

5. 요약 및 평가

* 이레니우스의 소아시아 신학, 알렉산드리아 신학, 라틴 신학이 어거스틴에 와서 하나로 종합됨

*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라틴 전통을 대립 구조 속에서의 이해가 아니라 하나의 전통으로 조화시킴

 

제 6 부 중세로의 준비

 

제 15장 수도원 제도의 발달

*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는 박해받는 종교에서 군림하는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 5세기가 끝나기 전 로마제국의 압도적 다수가 그리스도인들이라 고백하며 세례를 받고,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 집단적 개종의 촉진으로 교회의 기강이 해이해져 갔고,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의 이상과 실천의 간격을 벌어지게 되었다.

* 수도원운동은 콘스탄틴 대제 이후 나타난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일종의 갱생운동이라 볼 수 있다.

 

1. 최초의 수도승들

* 최초의 수도승은 애굽과 시리아의 광야에서 출현하였다

* 이집트의 지형과 기후는 수도사에게 적합하였기 때문에, 고행자들은 은신처가 없더라도 약간의 양식만 있다면 혼자 생활할 수 있었다

* 3세기가 지나기 전에 기독교 은둔자들이 이집트에서 발견됨

* 성 안토니(이집트 출신의 콥트, 256-356) : 아다나시우스가 전기를 집필함

  - 부유한 이집트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 교육을 받은 후 자신의 재산을 사회로 돌리고 자신은 사회와 동떨어진 사막에서 금욕주의 삶을 살음.

* 초기 수도승의 성격은 은자적인 성격이 강해 독립적으로 또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면서 기도와 명상을 함

*수도사들은 암자, 동굴, 초막, 또는 오두막을 짓고 수도 생활을 하였다

  - 바실 이전의 수도 생활은 금욕적이며 은둔적인 개인주의적 형태

* 시리아의 은자들은 자기 학대에 가까울 정도의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한 사람이 많았다

 

2. 파코미우스 수도원

* 개인주의적 수도생활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

* 수도원에 입주하여 수도원장과 일정한 규칙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최초의 수도 공동체

* 320년경에 시작됨

* 파코미우스 수도원은 나일 강변의 타벤니시(Tabennisi)에 안토니와 동시대 사람인 파코미우스(258-346)에 의해 설립되었다

*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반대하였다

* 약 22-40명이 한집에서 공동생활을 하였으며, 모임을 위한 공동실이 있었다.

* 군대식으로  파코미우스를 따라 수도승들이 완전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상급자에 대한 엄격한 복종, 질서 문란자들에 대한 징계, 순결과 청빈한 삶이 수도사들에게 요구되었으나 극단적인 금욕주의는 피했다

* 4세기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생한 경건주의적 탁발 수도승 집단메쌀리안파는 금욕주의적 명상과 기도만으로 사탄을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 수도승들은 문화 및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 그리고 정상적인 교회 생활도 등한시 함

* 4, 5세기에 접어들면서 수도원 제도는 보편화되었으며,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틴 및 시리아에 두드러지게 많아짐

 

3. 대 바실과 동방수도원

* 바실은 고립적인 고행 생활보다는 공동체적 수도생활을 강력히 선호함

  - 수도사들이 단순히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며 사회적인 목적을 등한시한다면 기독교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바실 이전의 수도사들은 개인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빈곤과 순결이 강조되었으나, 바실에 와서는 빈곤과 순결이 아닌 복종이 강조되었다

* 바실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에게 도움을 받아 직접 수도원을 설립함

* 기성의 교회와 수도원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연결함

  - 자신의 공동체들이 지교회 감독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함

* 바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눔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고 구체활 될 수 있다고 생각함

* 바실의 수도 공동체는 기도와 명상에 전념할 수 있는 지역에 세워졌다.

 

4. 서방 수도원의 발흥

* 투어스의 마르틴(Martin of Tours), 제롬, 요한 카씨안(John Cassian)에 의해 시작됨

  - 서방 수도원 운동은 베네딕트 수도원과 켈트 수도원에 와서 체계화 됨

* 마르틴 : 말무타이엘에 수도원을 창설(프랑스)

  - 겸손한 삶과 청빈한 기독교 정신을 소유했다고 후대에 전해짐

*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소프로니우스(Eusebius Hieronimus Sophronius)

  - 제롬으로 알려짐

  - 베들레헴에서 수도를 실현함

* 앰브로즈는 수도원 제도를 확대시킴

* 이탈리아 베르셀리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자신이 사원에 속한 성직자들이 규칙에 따라 살도록 요구

* 어거스틴은 성직자 가족단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수도원 이상을 실천함

* 5세기 말에 이르러 수도원 제도는 동방 및 서방 교회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음

* 5C 초 요한 카씨안 : 고울 남쪽의 마르세이유 및 르랭에서 수도원들을 시작함

  - 스키티아 지방 출신 수도사

  - 자제심과 신중성을 행사하여 수도생활이 극단으로 흐르는 것을 막음

* 베네딕트 수도원(540년 경) : 서방에서 가장 널리 알려짐

  - 창시자 : 베네딕트

   → 이탈리아 누르시아에서 태어나(480) 몬테 카시도에서 죽음(547)

  - 베네딕트 규범 : 기도와 노동을 강조함

  - 수도승은 수도원에게 거주하면서 수도원장에게 복종할 것을 가르침

  - 교회나 사회에 특별한 봉사를 하기 위한 수도원을 시작한 것은 아님

  - 수도사 : 대부분 성직자들이 아니라 이탈리아인 농부들과 고트족 출신의 민중들임

* 켈트의 수도원 운동(5C 말엽) : 이집트의 수도원 운동과 형태와 유사

 

5. 요약

* 수도원 운동은 각 시대에 따라 모습이 약간씩 달랐다

  - 이집트 : 지나치게 금욕적, 개인주의적

  - 파코미우스 : 집단적인 공동체 성격을 띰

  - 바실 : 교회와 수도원을 연합시킴

* 수도원 운동으로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으로 율법주의가 들어오게 되었다.

* 수도사들의 궁극적 관심이 자신들의 구원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

 

 

▶ 종교개혁자

 

【루터】

  1. 마틴 루터의 출생과 회심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광산촌 만스펠트 지역에 속한 조그마한 아이스레벤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르가레테 지글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을 체험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경험하면서 자랐다.  루터는 3년간의 아이제나하의 생활을 마치고 에르푸르트 대학 시절을 맞이 하였다.이 대학은 후기 스콜라학문에 속하는 스코투스 노선을 채택하였으며 오캄과 가브리엘 비엘로 이어지는 유명론의 전통에 서 있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출세를 보장하는 법학을 공부하기로 하였고 또한 자격을 가졌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사라져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 동기는 영혼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면의 확신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위한 영적 투쟁으로부터 출발해서 복음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다음에 로마 카톨릭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는 순서를 밟게된다.

 

 2. 수도원에서의 루터

    루터가 문을 두드린 수도원은 어거스틴파 운둔 수도회였다. 이 수도원은 당시에 가장 신선한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여기에는 후기 유명론에 입각한 스승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교황의 절대성 ,양심의 가책, 교황의 면죄부의 효력등을 엄격하게 주장하였다. 루터는 이런 유명론 신학에 서서 혼자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었고 스승들의 글을 읽도록 하였다. 루터는 성경 읽는 것이 금지 당한 채 자신의 죄를 찾아서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의 고해 성사는 수도원의 가벼운 규율을 어긴 데에 이르기까지 모든 죄를 찾아서 고백하고 또 고백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고백해야 할 죄를 찾지 못한 듯한 자책감 속에 있었다.

   이러한 루터의 고뇌를 알아차린 사람은 당시 교황청 대리인으로서 교황청을 방문했던 요한 스타우피츠였다. 그는 루터의 고민을 듣고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대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무능이 서로 상반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의롭게 될 때에 한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는 것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슈타우피츠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여 주었다. 하나님과 인간은 인격적인 신뢰를 통해서 서로 교제할 수 있으므로 믿음이야말로 의인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이었다. 루터가 이런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 후기 유용론적인 참회제도를 벗어나는데는 무려 2년이란 고뇌의 기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런 깨달음이 중세의 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대의 문을 열었으며 종교개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것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면죄부 반박문을 못박은 소리와 함께 중세인들의 귀에 울려 퍼져 나갔던 것이다.

 

  3.비텐베르크의 루터

    1512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중세적인 스콜라 강의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는 실천적인 힘이 있는 강의를 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공로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 신앙이란 그리스도 역사적 사역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러한 사면에 대한 깨달음이 성화의 시작이다.

 루터는 1515년과 1516년에 어거스틴과 중세의 신비주의를 더욱 연구하였으며 이때부터 중세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이때부터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비텐베르크 대학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루터의 종교개혁은 상호유익을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다.

즉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삼촌인 프레데릭의 신변보호가 필요하였고 프레데릭은 자신이 세운 대학을 명문대학으로서 성장시켜주는 명교수이며 명 설교자인 루터가 필요하였다.

 

  4. 95개논제를 못박기까지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면죄부였다. 중세의 참회제도에 의해서 사람은 완전하게 죄를 고백할 수 없으며 사제가 부과한 보속 행위도 완전하게 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교리 적으로 누구든지 영세를 받았으면 지옥에는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천국에도 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중세인들은 누구든지 연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연옥에서의 고통의 기간을 얼마나 단축시키느냐가 관심거리였다. 그래서 오직 자신을 위해서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서 면죄부를 사는 것은 중세의 미덕이었다.

    1513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 레오 10세는 전임자 율리오스 2세가 남겨놓은 재산을 탕진하였다. 르네상스 교황으로서 그는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교황청의 재산을 탕진해버린 그로서는 면죄부를 다시금 발매하기로 결정했다. 레오10세가 선포하고 브란덴부르크의 알버트와 마인쯔의 대주교가 징수를 맡고 도미니크파 수도자 요한테첼이 판매하였던 면죄부는 루터를 그대로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입성한 면죄부 판매인 요한 테첼은 “하늘문이 열리노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면죄부를 판매하였다. 다행히 비텐베르크는 프레데릭의 명령에 따라서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주민들이 인근 부근에까서 면죄부를 사오는 것을 보고 루터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매년11월1일 모든 성자의 날을 기해서 프레데릭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당에 보관중이던 유물을 무료로 개방하였으며 그날이 되면 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유물에 보관되어 있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에 달하는 면죄부 반박 논제를 못박아 게시 하였다.

 

  5. 라이프찌히 논쟁

    1517년 10월 31일의 95개조 발표가 하이텔베르크 논쟁과는 달리 대학과 대학 사이의 논쟁 구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하이텔베르크 논쟁은 그 총회의 성격상 Augustin 수도회 자체내의 사안이었던 만큼 노선이 다른 대학간의 논쟁은 처음부터 목적된 바도 아니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하이텔베르크 논쟁(1518년 4월 25/26일)이 일어 난지 약6개월 후 1518년 10월 12일, 로마교황의 사절 Jakob Cajetan(1469~1534)은 루터를 심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부터 통약 불가능한 관심과 입장 차이로 “취소하라” “취소할 수 없다” 는 식의 극단적 대립은 아무런 가시적 성과 없이 끝났다. 라이프치히에서 비로소 1519년 7월4일-14일, 상이한 노선을 걷고 있는 대학간의 논쟁이 실현되었다. Ingolstadt의 신학과 교회법 교수로 당대 최고 수준의 논쟁자였던 Johannes Eck와 비텐베르크의 두 교수, 칼 슈타트와 루터 사이의 논쟁이 라이프치히에서 1519년 6월27일~7월16일(이중 단독 루터와 에크의 논쟁은 7월4일-14일사이) 사이에 Pleissenburg성(城) 안에서 학생과 교수와 고위층 신분의 사람들 앞에서 개최되었다 논쟁의 주제는 루터와 에크 사이의 설전의 경우 “로마 교황의 수위권과 고해문제, 연옥, 은사, 사면과 관계된 사제의 권한 문제”였고 칼 슈타트와 에크 사이의 논쟁은 자유의지 및 종합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6.종교개력 3대 논문

    1)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루터는 이 논문에서 먼저 교회의 3가지 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첫째는 교회가 지닌 영적인 권한으로 인해서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특권,   둘째는 교황의 성경석권으로서 어느 누구도 성경을 통해서 교황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한 특권,  셋째는 회의 소집권을 오로지 교황에게만 국한시킴으로서 어느 누구도 회의로서 교황을 비판하지 못하게 한 특권.

    이상의 3가지 담이 지금까지 로마교회를 세속화 시켜 왔으며 교회를 지켜주는 특권이었는데 이제는 교회가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평신도를 통해서 교회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대원리 가운데 하나인 “만인제사직”이론을 주창하였다. 루터는 사제의 중재라는 중세의 대 원칙을 무너뜨렸다. 이상과 같은 루터의 만인제사직 이론은 중세인들을 사제의 공포와 전횡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와 의미를 되찾게 해 주었다.

 

   2)크리스챤의 자유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이 개혁되어야 할 사항들에 대한 문제제기였다고 한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루터는 기독인의 자유라는 논문을 통해서 종교개혁의 신학적 부분에 해당하는 구원론을 다룬다. 특히 중세의 공로 중심적인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반대하면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 이것이 기도교인들을 중세의 교리적 쇠사슬에서 풀어주는 자유였다.

    여기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3대 명제인 하나님의 말씀, 은총 그리고 신앙을 모조리 이야기한다. 그리고 루터는 여기에서 또 한번 만인제사직 이론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지금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일반 교인 사이의 차이는 각각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능을 가진 성직자인을 강조하였다.

 

   3)교회의 바벨론 포로

    여기에서 루터는 자신의 수도원 시절의 악습들을 간파하면서 중세인들이 사제의 중재라는 쇠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7성례전을 파기하고 성경에 근거한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세는 7성례전으로서 사람의 70년 인생을 묶어 버린다고 해서 바벨론 포로기 70년에 비유해서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루터는 희생설에 기초한 중세의 화체설을 부인하고 공재설을 주장함으로서 중세의 성례전 이론을 뒤엎었으며, 특히 성체성사 이론에서 일종성찬을 베푸는 중세의 악습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더 나아가서 참회제도를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7.농민소요와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 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윔스의회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랑히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금까지의 불만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럽의 농민들은 14세기부터 시작해서 16세기의 대 변혁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소요를 끊이지 않고 일으켰다. 그러면서 성직자의 착취를 언제나 언급하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전역에는 농민들의 권리회복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불만이 루터의 힘을 얻고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개혁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지금까지 루터 가장 강력한 지지를 입고 있는 프리디리힉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레데릭은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선제후와 농민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개혁운동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8.루터의 죽음

    루터적인 개신교를 지지하는 슈말칼트 동맹은 헤세의 필립이 이중 결혼으로 인해서 심각한 타격을 입기는 했어도 개신교측은 꿋꿋하게 버티어 나갔다. 그러나 챨스 황제가 1544년 프랑스와의 평화를 마무리 지음으로 이제부터는 독일문제를 원하는 대로 다룰수  있었다. 그래서 트렌트에서 총회를 개최하도록 명하였다. 그렇지만 개신교들은 여기에 따르지 않으려 하였으며 총회는 생각보다 지루하게 지속됨으로서 황제는 무력을 사용해서 개신교도들을 무찌르려 하였다.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루터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쯔빙글리】

  1.출생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7주 늦은 1484년 1월 1일 토겐부르크 자차주의 빌드하우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대로 부락의 촌장을 역임해 왔으며 외할아버지는 사제였다 삼촌은 베젠의 학장으로 취임함에 따라서 쯔빙글리의 신학교육을 전담하게 되었다. 삼촌은 새로운 학문조류인 인문주의를 받아들여 조카에게 전수해 줌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10세 때에 베젤에서 바젤로 옮겨서 라틴어 문법, 음악, 그리고 변증학을 배웠다.1498년에는 베른 대학에 입학해서 스위스 종교개혁의 기수로 알려졌던 하인리히 뵐플린에게 배웠다. 1500년부터 2년 동안 쯔빙글리는 비엔나로 옮겨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보호 아래에서 학문활동을 하였다.  1502년에는 다시금 바젤로 돌아와서 성마틴 대학에서 라틴어를 배웠으며, 1506년에는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 글라루스의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1506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사제로 임직되었으며 글라루스의 목회자가 되어 부임하였다 10년의 목회 활동을 하면서 헬라어를 공부했고 희랍과 로마의 철학자, 시인, 웅변가, 저술가들을 공부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에 에라스무스와 서신교환을 하면서 우정을 쌓았으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글라루스 목회자로서 자연히 용병으로 싸우는 글라루스 연대의 연대소속 목사로 두 차례나 이탈리아로 갔었다, 이때부터 쯔빙글리는 용병제도의 위대성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스위스의 죄악, 악덕, 불 신앙성, 외국숭배와 이것이 조국의 자녀들을 집어삼키는데 대해서” 와 “황소의 우화”을 통해서 스위스의 용병제도를 공격하였다.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상징적이며, 풍자적이었다. 이곳에서 쯔빙글리는 신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수사학자,인문주의자,도덕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아인지델른의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용병제도를 반대함으로서 교구민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1516년 4월 순례지로 이름난 아인지델른으로 목회지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설교가로 알려 졌으며, 교부들의 책을 읽었고, 면죄부의 해악성을 설교하였다. 동시에 그는 주민들에게 마리아가 아닌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가르쳤으며, 교황청의 악덕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1516년에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3) 취리히의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적이 많았다. 그것도 교리적인 면보다는 그의 자유 분방한 행동에 관한 성토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장일치가 아닌 다수에 의해서 1518년 12월 27일 쯔빙글리는 취리히에 도착하였다. 취리히에서의 그의 개혁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 루터가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하는데 반해서 설교의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였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전통으로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는 마태복음을 연속적으로 강해      하기 시작했다.

 -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인 베르나르딘 삼손이 도시에서 면죄부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에 도시 밖으로 추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 쯔빙글리는 1519년 8월 취리히에 페스트가 발생해서 많은 사람이 고생하게 되자 밤낮 쉬지 않고 환자를 돌봄으로서 9월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아프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 쯔빙글리는 십일조에 관한 공격적인 설교를 퍼부음으로서 십일조의 자발성을 강조하였다.

 - 쯔빙글리는 금식기간 동안에 육식을 먹어도 괜찮다고 선언하였다.

 - 쯔빙글리는 교황청에 파송 하는 용병과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연금의 잘못을 파악하고서 본인에게 지급되던 연금을 포기하였다.

 - 쯔빙글리는 공개토론회를 통해서 교황청의 각종 악덕을 지적하고 비난하였다.

 - 쯔빙글리는 안나 라인하르트와 결혼함으로서 지금까지의 비난과 물의를 일소 시켰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결혼하였다.  

 

 4) 쯔빙글리의 죽음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스위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나, 모든 곳에서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다. 삼림 자치주들은 개혁교회 스타일의 개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개신교 자치주에서는 산림자치주에 생활필수품을 공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삼림 자치주는 전쟁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1531년 삼림 자치주는 샤벨을 쳐들어 왔다, 쯔빙글리가 이끄는 취리히 군대는 1010월 11일 샤펠에서 교전하였으며, 쯔빙글리를 위시한 목회자 의회 의원 등 다수가 전사하였다. 47세의 인생의 황금기에 접어든 쯔빙글리는 개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끝내 숨지고 말았다.

 

 

【칼빈】

 1. 출생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피가르디 지방의 북부에 속하는 교회도시 노용에서 아버지 게라드 코뱅과 어머니 잔느 라 프랑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름 있는 법률 자문관으로 중․상위권의 생활을 누렸으며 이러한 아버지의 덕분으로 칼빈은 귀족의 집에 머물면서 일종의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14세가 되어서 드 몽트모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파리로 유학의 길에 나섰다.

    칼빈은 파리의 드 라 마르슈 대학에 입학해서  프랑스와 라틴어를 배우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그러다가 부모의 걱정에 못 이겨서 더 보수적인 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다. 여기서 토론술을 배웠다.

    1528년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칼빈은 오를레앙의 법과대학에 입학해서  일 년간 머무르다가 부르쥬로 옮겨서 국제 법학자 알키아트의 강의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칼빈은 오를레앙에서 인문주의를 그리고 부르쥬에서는 개신교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칼빈은 12세된 소년으로서  장차 칼빈의 동역자가 될 베자를 사귀었다.

    1531년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서 칼빈은 다시금 파리로 돌아와서 포르테 대학에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부데, 콥 등과 더불어서 인문주의의 모임에 가담하였다.

    1532년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라는 주석집을 발간하였다.

    이 무렵 칼빈은 이미 파리의 개신교 모임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그의 첫 저서가 출판됨과 동시에  왕 프린시스 1세는 개신교도인 휴그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사이에  1533년  칼빈은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주제로서 그의 취임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다. 소르본느에서는 이 연설을 국회에 이단으로 제소하였으며 국회는 이에 동의했다. 이와 더불어서 1534년 10월18일 밤에 열광적인 개신교도들이  혐오스럽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현수막을 파리 전역과 심지어는 왕실의 정문에  부착함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칼빈은 1533년부터 1534년 사이에 나바르의 여왕인 마가리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냈다. 이 기간동안에 칼빈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와 개신교주의의 대가인 르 페브르와 사귀었다.

    1534년 10월에 칼빈은 고국을 떠나서 스위스에서 은신처를 찾기도  하였다. 칼빈은 프랑스의 개신교도 망명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슈트라크 부르크를 방문하였으며 그곳의 목회자인 부처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서 바젤로 옮겨갔으며 거기에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저술하였다.

 

 2. 칼빈의 개혁

    파렐은 27세의 칼빈 보다도 20세가 더 많았다. 그러나 아직도 젊은 피가 끓은 사람으로서 칼빈과 한 마음이 되기에 충분했다. 칼빈은 성베드로 성당에서 매일같이 바울의 서신들을 가르쳤다. 그러는 사이에 1536년 10월 베른은 새로운 점령지역에 대한 개신교와 로마주의 사이의 대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칼빈은 이 자리에서 교부들을 낱낱이 열거함으로서 로마주의자들을 납작하게 만들었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더불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 1537년 1월에 칼빈은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만찬, 공중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교육, 결혼 등 4가지였다.

 - 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 것이 좋다.

 - 불합당한 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

 -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 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하였다. 성만찬은 일년에 4차례 집행하며 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3. 칼빈에 대한 배척

    제네바 시는 파렐과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파렐과 칼빈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 시의 간섭과 더불어서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빈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베른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으려고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꼬로우, 파렐, 칼빈은 제네바시를 떠날 것을 명 받았다.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를 떠났으며 칼빈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동안 개혁을 시도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 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 일에 전념  하였다.

 

 4. 칼빈의 회귀(回歸)

    파렐과 칼빈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오히려 악화되는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 하였으며,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빈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1539년 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칼빈은 윔스국회에 참석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 채 번민에 있었다 이 때 파렐의 충고가 크게 작용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빈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년 9월 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 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데 이르기까지 칼빈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5. 제네바의 개혁추진과 칼빈의 신학

  1)이단과 자유주의자.

 칼빈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 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을 맞이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2) 교리적 문제

 칼빈을 괴롭혔던 교리적인 문제는 미카엘 세르베투스 와의 신학적 논쟁과 그에 대한 처형에서 야기되었다. 칼빈은 그를 처형시킴으로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비난을 받아 왔지만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결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많은 형편이다.

 

 3)훈련을 강조하는 칼빈의 개혁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 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나라 였다 그래서 오히려 이것이 방종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제2세대 사람으로서 상당히 문란해 있던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다.

이 4가지 개혁안 중에서 교인들의 생활규범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이 가장 중요하였다.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 가는 듯하였으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강하게 요구하였다.

 

 (1) 생활규범 강조

칼빈이 제네바에서 훈련을 강조한 목적은 교회를 오염과 세속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교인들이 악한 자들과 접촉함으로서 타락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범법자들로 회개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케 하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3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훈련을 시키는데 첫단계는 개인적인 권면 둘째 단계는 공중 앞에서의 권면 세째단계는 주의 만찬에 참여치 못하게 했다.

엄중한 죄를 지은 자는 감독이나 목사가 개인적으로 출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전체의 회의를 거쳐서 출교를 명했다 그리고 회개하였을 경우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특히 칼빈은 목회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평신도들처럼 엄격한 훈련울 받아야 했다. 목회자는 선발에서부터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였다. 성경지식과 교인들의 교화능력 여부를 시험을 통해서 알아본 다음에 품행에 대한 심사를 통해서 선생이 될 수 있는가를 분석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선발되면 후보자를 소회의에 넘기고 소회의는 주민들 앞에서 설교케 한 다음에 주민들은 설교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받았다고 보고케 했다. 이렇게 3단계를 거친 심사에서 합격하면 목회자로 세웠다.

주민들의 교회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일년에 한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칼빈의 훈련은 방종에 빠진 제네바를 바로 잡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칼빈도 힘들었지만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델란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좋은 전통이다.

 

(2) 학교 설립

 칼빈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소요리문답을 작성해서 어린이들에게 교육시켰으며, 모든 목회자들이 책임을 지게 했다. 그러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559년 6월5일 제네바 아카데미라는 학교를 세우고서 유럽의 유명한 교수들을 초빙하였다. 이 학교는 일반학 과정과 신학과정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유럽의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요한 녹스가 있었으며, 네델란드의 아르미니우스는 베자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3) 칼빈의 목회와 그의 최후

 제네바에서 칼빈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에 임했었다.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1536년으로부터 3년간 의욕에 찬 목회를 감행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로 쫓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541년 다시금 제네바로 부임해서 처음14년 동안은 반대자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를 했다. 그러다가 1555년부터 1564년 사망 시까지 최후적으로 9년 동안 소신 있는 목회를 할 수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회 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1564년 4월25일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증언이 담긴 글을 남겼다.

하나님께 대한 송구스러움과 감사로 가득찬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선택,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 등을 부드럽게 표현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그치고 저 멀리 하고서 하늘나라를 바라본다고 하였다.

 

 

【웨슬리】

  1. 생애

 웨슬리의 아버지는 영국 성공회의 목사로서 열심 있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훌륭한 성격의 어머니 수산나 역시 성공회의 신자였으며, 웨슬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남매 중 15번째로 태어났다. 1720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입학한 웨슬리는 공부하면서 보다 철저한 경건을 추구하였다. 1725년 그가 성직안수를 받고 그 학교의 특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동생 찰스 웨슬리의 조직 신성클럽에 들어가 지도자가 되었고, 챨스는 기꺼이 형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2. 회심

웨슬 리가 "한 시대 후의 영국 사회 전반적인 풍조를 변화시킨“, 그리고 ”영국이 세익스피어 만큼이나 관심을 기울이는“ 그러한 인물로 사람들에게 각인 되어 있다. 그 분기점은 1738년 5월 24일에 있었던 올더스케이트의 체험이었다고 하겠다. 우리는 그것을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 이라고 부른다. 웨슬리 자신은 올더스케이트가 자신을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에로, 율법 아래에서 은혜 아래로, 그리고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으로 전환시킨 것으로 피력하였다.

또한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의 복음적 회심 외에 부흥운동의 힘을 형성케 한 기독교적인 운동들이 그 배후에 있었다. 웨슬리의 가계에 내적 유산으로 내려오던 청교도적 요소, 그리고 웨슬리를 회심으로 이끄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던 독일, 특히 모라비안 경건주의, 그리고 메도디스트들의 훈련을 위한 조직에 선례를 제공해 준 교회 전통의 “종교단체” 조직이 웨슬리 부흥운동의 출현을 필연화 했다. 웨슬리는 회심 후에 기대감을 갖고 찾아간 모라비안들에게 사회 윤리적인 부분에서는 실망을 하게 되었고, 끝내 그들과 결별한다.

 

 3. 감리교의 태동(Holy Club)

감리교는 형제인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0)의 지도하에 성장하였다. 1728년 존이 옥스퍼드에서 부친의 교구일을 돌보는 동안 동생 찰스는 옥스퍼드에 머물면서 커감, 모간 등 동료 학생들과 함께 성서 연구와 기도 생활에 힘쓰는 작은 클럽을 조직하였다. 형 존이 1729년 11월에 옥스퍼드에 다시 돌아왔다. 이 때부터 존은 작은 클럽을 “신성회(Holy Club)”라고 하고 지도자가 된다. 처음부터 이 모임을 전도를 목적으로 조직한 것이 아니고 좀더 경건한 성도의 교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 회원들은 거룩하고 정결한 생활을 하며 1주일에 한 번씩 성찬식을 갖고, 개인적으로 경건의 시간을 갖도록 하였다. 또 정치적으로 감옥을 방문하여 죄수들을 위로하였다. 존은 신성회 클럽이라 이름지었으나, 다른 이들은 신성회원들을 경멸하고 조롱하였다. 그래서 경멸하는 이름인 열심주의자, 성경벌레, 성찬 형식론자, 혹은 규격주의자라는 뜻으로 ‘메도디스트(Methodist)’라고 불려졌다. 이때의 메도디스트가 훗날 감리교의 이름이 된다.

 

 4. 감리교의 독립과 탄생

1760년 이후 성공회 내에서의 감리교의 분리의 경향은 더욱 활발해졌다. 계속되는 30년 동안에 독립조직을 목표로 하는 이 운동은 더욱 강하게 커져 나갔다. 그 복음운동의 한 줄기는 영국 성공회 생활에 남게 되었고 다른 한 흐름은 성공회 및 개신교 각 파를 탈퇴하고  오늘날 소위 감리교회로서 알려진 교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1784년, 당시 81세이던 존 웨슬리는 이 새로운 종교 단체를 위해 처음 목사를 안수하고 임명을 하였다. 이 행위는 메도디스트주의가 완전하게 독립, 분리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웨슬리 자신은 179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국 국교회의 적을 떠나지 않았다.

 

5. 감리교의 특징

웨슬리 사상은 보편적 교회의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1) 보편적 구원- 종교 개혁 후 선교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감리교 신학은 그 같은 신학적 모순을 극복하였다.

2) 완전한 성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과 그의 동료에게서 죄와 질병이 완전히 치유되는 것을 기대하도록 용기를 심어준다.

3) 성도의 교제- 그리스도인의 형제 됨의 증거는 서로 교제를 나누며 서로의 짐을 나누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것에 근거를 삼는다. 이들은 교인의 증거와     성례전의 준수나 목사에 대한 복종 또는 신조에 대한 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4) 그리스도인의 봉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부터 명령받은 봉사가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에 넓히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 중세 이후 네 가지 주요 사상(종교 개혁을 기점으로...)

 

【재세례주의】

 

 1. 재세례파의 기원

쯔빙글리의 스위스 종교개혁은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강조하며 성서에서 분명하게 보장되지 않은 옛 예배의식과 제도에 대한 것을 공격함으로 종교개혁에 대한 그의 태도는 루터보다 과격하였다. 1528년 찰스 5세는 일찍이 도나투스파 때문에 만들어졌던 재세례를 시행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기로 하고, 옛 로마법을 기초로 이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나타난 순교자의 수는 콘스탄틴 대제가 회심하기 전 3C 동안의 박해기간 동안 죽은 이들보다 많았다. 쯔빙글리의 노선이 보수적인 경향을 나타내게 되자 헬라고전을 연구하던 많은 젊은이들은 다른 이견(異見)을 갖게 되는데 그 중 취리히에서 가장 과격한 혁신자로 콘라드 그레벨( Conred Grebel 1448~1562)과 펠릭스 만쯔(Felix Manz ?~1527) 가 있었다. 이들은 쯔빙글리의 성경관 등 그의 개혁적인 자세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결정적으로 쯔빙글 리는 1925년 그의 신학적 저술인 The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에서 유아세례(infant baptism)에 대해서 1523년 1월의 논쟁과 10월의 논쟁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결정하지 않다가 1525년 1월의 논쟁에 와서 유아세례를 지지하기 시작하자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유아세례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스위스의 북경지방 발트슈트(Waldshut)의 설교자인 발타사르 후푸마이어(Balthasar Hubmaier 1480~1528)는 유아세례에 대한 성서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비평하였다.

이렇듯 기독교 국가 속에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불렀던 대중들과 자기들을 구별하겠다는 의도를 가지면서 루터와 쯔빙글리의 개혁의 미흡성을 주장하면서 재세례파의 기원은 시작되었다.

 

 2. 재세례파의 형성

쯔빙글 리가 자신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이 명백해지자, 분리되어 나온 이들은 신자들의 세례를 주장하였고, 오직 중생한 신자들을 중심으로 자기들이 교회를 설립할 수밖에 없다고 결정하였다. 전직 신부였던 조지 블라우록(George Blauaock 1480~1529)은 또 다른 형제 콘라드 그레벨에게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주도록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1525년 1월21일 취리히 중앙 광장의 분수대에서 그레벨은 블라우록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블라우록은 또 다른 몇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은 당시에는 침례를 시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주된 관심은 세례의 형식이 아니라 세례를 받기 위한 신앙의 필요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후 점차 더 신약의 가르침에 따르기를 주장하면서 이들은 몸 전체가 물 속에 들어가는 형태의 침례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이로 인해 이단으로 취급되었으며 이것이 첫 세례인 동시에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이라는 초기 교회가 구성되었다. 이들의 대적들은 이들을 가리켜 곧 “아나뱁티스트” 즉 재세례주의파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명칭도 사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재세례파는 원래부터 다시 세례주기를 주장한 것이 아니고 유아 세례가 무효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최초의 진정한 세례는 결국 신자가 공개적인 신앙고백을 한 후에 받아들이는 예식이라고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재세례파의 발전과정

 (1) 초기 재세례파

초기의 재세례주의자들은 유아세례에 대한 거부, 개인의 회심과 결단을 통한 세례만을 인정하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또한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다. 초기 재세례파를 대표하는 콘라드 그레벨은 신학의 근본 주제 및 예배의식과 교회 행정 모두에서 기독교의 신약성경적 회복을 강조하였다. 교회를 세속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자발적 공동체로 정의함으로써, 전통과 관습에 도전하고 있다.

재세례파의 대부분은 평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계층간의 반목과 위화감을 없애려는 이런 모습들은 여지없이 정부측에 의해 반역적인 처사로 박해를 피할 길이 없었다. 기원에서도 열거했듯이 독일에서도 찰스 5세는 오래 전 도나티스트들이 재세례파를 사형에 처하던 옛 로마법을 기초로 하여 재세례파들을 처형토록 명령했다. 1529년 슈파이에르 회의(루터란 영주의 항의로 말미암아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을 얻게된 회의)에서도 정죄되었다. 루터의 거주지 삭소니 지방에서도 그들을 이단 및 반역죄 즉 종교법 및 세속법 양자 모두에 의해 정죄되었다.

 

 (2) 혁명적 재세례파

초기의 평화주의적 노선은 박해 속에서 그 지도자들은 추방되거나 거의 처형당했다. 이렇게 되자 재세례파의 개혁운동은 박해에 대해서 적극적이니 저항으로 맞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일부 과격파들의 주도하에 움직여 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토마스 뮌처의 농민전쟁과 멜키오르 호프만(Mechior Hoffmann), 존 마티스(John Mattys)의 주도하에 일어난 뮌스터 왕국사건이라는 두 사건으로 크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두 사건은 재세례파로 하여금 광신자, 무정부주의자들의 악명으로 낙인 찍히게 만든 사건들이며, 결국 초기 재세례파 개혁운동의 성격을 이탈한 사건이 되었다.

 

 (3) 후기 재세례파

후기 재세례파는 극렬한 박해와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줄이고 초기의 평화주의 노선을 회복하였다. 후기 재세례파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은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이다. 후에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이름을 본따 “메노나이트(Mennonites)”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의 신학 추지 역시 초기와 마찬가지로 “세상과의 결별”이었다. 세례에서 선포하고 상징하는 개인적인 회심과 회개를 중시하는 것, 또한 초기 정신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다만 세례와 성만찬이 은혜를 전달하는 다른 통로가 아니며, 단지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발생하는 내면 적인 관계의 외적 표시로만 국한하였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세족식을 실천할 것을 독특한 첨가사항으로 강조하였다. 또한 맹세와 서약을 금기로 정하고, 성경에 대치하지 않는 한 당국에 복종할 것을 가르쳤지만 군복무를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에 반정부 경향을 띤 세력으로 오해받았다. 정부의 제도적 압박에 못 이겨 동유럽, 러시아 그리고 북아메리카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서도 군복무를 요구받게 되자 19, 20세기에는 남아메리카로 이주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서 메노나이트들은 16세기에 발생하였던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되고 메노나이트들은 계속 평화주의적 입장을 고수하였고, 사회 봉사사업에 공헌함으로 많은 이들의 찬사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4. 재세례파의 신학적 사상

 (1) 종교적 견해

  -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에 나타나 있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공통적 신론 수용.

  -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신학 반대하고 의지의 자유와 완전한 도덕적 책임을 주장.

  - 독자적 성서해석 권리를 강조하면서 구약에 비해 신약이 더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로서 권위와 존엄성이 있다고 주장

 (2) 정치적 견해

  - 국가는 종교적 임무 능력이 없으므로 선한 자를 보호하고, 악한 자를 벌하는 일만이 필요하다.

  - 순수하게 성서적인 근거에서(마 5:34) 어떤 상황에서의 맹세도 반대.

  - 전쟁을 인간 생명을 크게 파멸시키는 것으로 보고 강력히 반대

 

 5. 전체적 요약

  - 제3의 종교개혁이다.

  - 민중 중심의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 참된 신앙과 참된 교회의 모습으로 신앙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 개인의 의지적 결단 없이 진정한 교회와 성도가 만들어질 수 없다.

  -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성인세례를 강조

  - 구약성서보다 신약성서의 강조

  - 침례의 세례 형식 주장.

(특징)

  - 신약교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환원주의)

  - 유아세례 거부

  - 무저항주의 (고난과 순교를 인정)

  - 국가에 반대 (군대와 세금 거부)

  -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임

  - 예정론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자력으로 구원 얻음을 강조하기 때문

    (인간의 결단과 행동의 의지 필요)

  - 예배의 개혁을 촉구

 

 

【계몽주의】

 1. 계몽주의

    17~18세기에 일어난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은 철저한 합리주의로 특징 지워진다. 계몽주의는 당시 유럽의 지적 운동으로써 신, 이성, 자연, 인간 등의 개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합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계몽주의의 핵심은 이성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 진지를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특히 지식인들은 계시보다 이성을 더 중요시하기 시작하였다.

계몽주의는 신학 사상에 있어서 합리주의의 소산인 “자연신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초기 자연신론주의자였던 체버러의 허버트 경(Lord Herbert of Cherber)은 “하나님의 지식은 이성적으로 인지될 때에만 사람에게 구속력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자연신론은 복음주의기독교에 정면 공격을 시도했으며 인간의 타락과 전적인 부패,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말미암은 유일한 구원의 길의 필요성을 거부하였다.

    자연신론 사상으로 이 세상은 자연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며 수리적으로 분별되고 창조주와는 무관하다는 개념이 점차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들은 뉴잉글랜드에 청교도들이 세운 대학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청교도들의 지도권 마저 상실되는 일이 일어났다.

17, 18세기에 합리주의와 근대 과학의 발달을 바탕으로 성장한 계몽주의는 청교도들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청교도들이 세웠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대학들이 합리주의와 이성 중심의 과학적인 사고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면서 계시에 대한 순종을 바탕으로 하던 청교도들의 순수한 신앙이 퇴색하기 시작하였다.

 

 2. 계몽주의 운동과 근대과학

    종교개혁의 열풍이 일어난 지 200여 년이 지나서, 남유럽(프랑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에서는 성경으로 복귀가 아닌 인간의 이성으로의 복귀가 대대적으로 확산되었는데, 그것이 계몽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계몽주의 운동은 르네상스와 무관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계몽주의의 이상이 “이성, 본성, 행복, 진보, 자유”의 다섯 개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한다. 계몽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이성이란 절대적으로 신뢰 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합리적인 것을 지향할수록 인간의 삶과 정신은 점점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이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인간이 추구하려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학문, 과학, 사상의 발전은 모든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인간의 사회는 비록 문제가 많지만, 인간들 스스로에 의해 완전한 행복과 아름다움으로 전진하는 도중에 있는 것으로 비추어진 듯하다. 따라서 그 시대에는 무신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자연관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 karl. Marx의 “유물론”

 : 계몽주의자들은 일체의 전통을 거부하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여겼는데, 그 중에는 물론 기독교도 들어간다. 특히 강조된 유물론은 “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고, 그들의 계급투쟁이 역사는 끄는 힘”이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 작업에는 칼 마르크스의 공이 지대하다.

 3. 독일의 계몽주의

 ▶ 계몽주의 - 18세기의 비판적 합리적 정신, 영국의 이신론(Deism)자와 반대자의 활동. 프랑스에서 인식론의 급진적인 대중적 수정을 불러일으킴. 이 모든 것이 독일에 침투했고, 독일의 지적 분양가 황폐한 것을 발견하여 그 결과 독일 계몽운동이 급속히 확장되었다.

 ▶ 특 징

  -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것들을 배제.

  - 성서에서 오직 가치 있는 것은 자연종교 및 도덕성의 진리라는 견해를 널리 확산.

  - 예수는 신앙의 인격적 중심이라기 보다는 도덕 교사였다.← 합리주의

  - 18세기 독일에서 성서의 본문 및 역사연구가 현저하게 활발.

 

 4. 계몽주의시대에 있어서의 로마 카톨릭 교회

   롬 카톨릭 교회는 그 본래의 성격에 따라서, 프로테스탄티즘과 같은 정도로는 계몽주의에 대해서 그 문호를 열지 아니했다. 그러나 그것은 계몽주의에 대해서 완전히 그 문을 폐쇄할 수는 없었다. 계몽주의의 시대에 카톨릭교회는 계몽주의의 정치적 힘과 정신적 영향과의 깊이를 체험했다. 계몽주의는 독일의 카톨릭이즘의 가운데에도 침입해 왔다. 그것은 당당한 신앙을 갖고 있는 카톨릭교도를 약체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5. 메토디스무스(Der Methodismus)

     독일에서 계몽주의에 대한 싸움에는 관념론(der idealismus)과 낭만주의(Romantik-18 C말 독일, 문예 사상의 경향)가 선두에 있었다. 교회의 사람들은 계몽주의에 대해서 당분간은 조용히 참았고, 그 공격에 대해서 강하지는 아니했다. 이 사태는 해방전쟁 시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변화했으며 복음적 신앙각성운동에서 새로운 생명이 활동하여, 교회를 결박하고 있던 계몽주의의 주박을 타파했다. 이 신앙각성운동의 힘센 선례는 영국의 Methodist였다. 영국에서는 독일보다 빨리 계몽주의에 승리를 얻어서 각성운동이라는 커다란 발상을 일으켰다. 또한 영국 국교회에는 이미 고정화의 시대가 오고 있어서 사람들은 계몽주의에 대해 저항하고 신도간에는 종교적 무관심이 지배하고 있었다.

 

 

 

【정통주의】

 

  1. 루터교 정통주의

     17, 18세기 초기의 루터교 정통주의는 점차 성경전체와 성경에 근거한 모든 신앙고백서와 신학적 명제들에 대한 일치를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에서 많이 이탈한 것이다.

멜랑히톤은 본래 루터의 종교개혁신학에 뜻을 같이 하였으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사상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어서 점차 루터의 사상과 차이를 보이다가 1527년 루터의 노예의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표명하고,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가 협동적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신인협동설을 주장했다. 이 같은 견해의 차이는 점차 순수 루터 주의와 멜랑히톤 주의의 신학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양측의 충돌이 본격화 된 것은 루터 사후 루터교와 카톨릭을 연합시키기 위한 정치적, 종교적 차원의 협약인 ‘아우구스부르크 잠정 협정’이었다. 이것은 카톨릭 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루터교 신학자들이 여기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말칼트전쟁(1546)에서 승리한 찰스 5세의 압력으로 결국 멜랑히톤을 머리로 하는 비텐베르트의 신학자들은 이 아우구스부르크 잠정 협정의 수정판인 라이프치히 잠정 협정 에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멜랑히톤은 루터가 그리하였듯이 복음을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그 밖의 것들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순수 루터주의자들은 멜랑히톤주의자의 입장에 완강히 반대하였다. 이유는 지금의 상황이 루터 때와는 달리 비본질적인 것을 용납한 경우 본질적인 것, 즉 복음마저 위협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수 루터 주의자와 멜랑히톤주의자의 신학 논쟁 중에 종교개혁기의 마지막 위대한 신앙고백서인 콘코드 신조(Formula of Concord, 1577)가 작성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 유수한 신학자들에 의해서 수 없는 논의를 거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작성된 지 50년 만인 1580년에 완성되었다. 이 콘코드 신조의 특징은 여러 신학적 주제에 관하여 엄격한 루터주의가 아니라 중립노선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만찬에 관해서는 순수 루터 주의자의 성만찬론을 채택하였다. 이후로 루터교 전통의 특징중의 하나로 칼빈의 것과 다른 루터교 성만찬론이 있게 되었다.

    한편 순수 루터 주의와 제국의 카톨릭세력의 억압상황에서 멜랑히톤주의자는 점차 멜랑히톤주의자는 점차 칼빈주의로 넘어갔고 이로 인해 칼빈주의가 독일에 대거 침투하게 되었다.

    콘코드 신조 이전의 시대가 순수 루터 주의와 멜랑히톤 주의의 신학 논쟁에 의해서 특징 지워진다면, 17세기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대는 멜랑히톤의 신학방법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토대로 한 루터교 신학의 정교화 내지 체계화의 시대라고 설명된다.

 

 

 2. 개혁교회 정통주의

    루터주의와 병행하여 또 다른 개시교가 대두되며 발전하고 있었다. 이것은 대개 개혁주의(the Reformed)라고 불린다. 대체로, 개혁주의라는 말은 중세 로마 카톨릭의 경직되고 폐쇄된 성경이해와 해석에 대항하여 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를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으로 대표되는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서도 루터파와 구별되는 신학, 특히 요한 칼빈(1509~1564)과 그의 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신학을 일컫는 말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즉, 루터가 영향을 끼쳤으나, 기원을 보면 인문주의의 영향이 루터의 경우보다 강했으며 어느 한 지도자가 심오한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쯔빙글리 스위스에서 시작한 개혁주의 교회를 요한 칼빈이 그 누구보다 체계화하고 조직화하는 데 공이 컸다 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주로 개혁주의라는 말이 통용된 반면에, 영미계통에서는 칼빈주의라는 말이 사용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는 서로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으나 개혁주의라는 말이 더 많이 통용되고 있다. 개혁주의 교회들은 루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타락성과 하나님의 은총의 기이함을 인식했으나, 신앙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제공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노고를 통해,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왕국에 근접할 수 있는 것을 만드시리라고 믿었다. 이것은 선한 법령, 도덕률과 정부를 통해 문명화된 사회를 건설하려던 로마제국의 전통과, 중세의 위대한 교황들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 이룩하려고 했던 바와 유사하다. 개혁교회의 전통은 개혁주의 교회들의 요리문답이나 신앙고백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신앙고백(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 벨직 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1563),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 영국 교회의 39개조(1571), 네델란드의 칼빈주의 5대강령-도르트 교회회의(16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등은 개혁 신학의 정통에 속한다.

 

 

【경건주의】

 1. 경건주의(Pietism)

    경건주의는 17세기 독일 루터교 안에서 새로운 종교 개혁운동의 양상으로 시작되었다. 이 같은 경건주의 운동은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점차 여러 나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경건주의를 알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4가지의 성격을 알아야 할 것이다.

 (1) 경건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개인적으로 체험되는 내적 변화라고 확신한다. 개인적 신앙을 여타의 다른 것보다 더 중히 여기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2) 경건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는 것을 그 이상으로 삼고 있다.  즉 낡은 옛 생활을 깨끗하게 단절하고 새로운 삶으로, 거룩한 인격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경건의 훈련을 강조한다.

 (3) 경건주의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성경의 역할에 새로운 관심을 부여한다. 일반적으로 정통 교회에서는 성경을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근거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교리를 가르쳐 주는 규범도 되지만 영적 생활의 근거이기도 하다.

 (4) 경건주의는 기존 세력에 대한 하나의 저항 운동이었다.

 

 2. 경건주의의 역사

 (1) 경건주의의 배경

    경건주의는 30년 전쟁(1618-1648)의 산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물론 경건주의가 30년 전쟁 때 생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거기서 부터 무엇인가 새롭게 갱신되어야 한다는 강한 욕구가 시작되었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인구는 대폭 감소되었고 산업은 핍절 되었다. 교회는 불타 버렸고 거리에는 병자와 가난한 자들이 버려져 있었다. 물질문명의 폐허와 함께 영적, 도덕적 타락이 일어났다. 모든 국민은 술취함, 성적 물란, 도둑질, 탐욕 등에 빠져 어느 곳을 봐도 희망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목사나 평신도들이 실망을 하고 있었다. 저들은 위안의 방법으로 신비주의자들의 작품들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타울러(Tauler)의 설교집이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저서들을 즐겨 읽었다.

그리고 쉬벵크벨트(Schwenckfeld)나 바이겔(Weigel) 그리고 뵈메(Boehme)의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루터교와 칼빈파는 이 같은 신비주의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영혼의 피로를 이들의 작품 속에서 위안을 찾고자 하였다.

이때 영국 청교도주의도 영향을 미쳤고 리차드 박스터(Baxter)의 「이교도를 부르심」,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 1565-1631)의 「경건의 훈련」, 존 번연(Bunyan)의 '천로역정' 등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운동의 여파들이 경건주의를 탄생시켰다.

 

 (2) 필립 야곱 스페너 (Ph. J. Spener, 1635~1705)

     경건주의의 아버지 하면 대체로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 Jacob Spener:1635-1705)를 꼽는다.

스페너는 독일 알사스(Alsas)에서 출생하였다. 스페너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철저한 루터교 신앙의 분위기 속에 성장하였다.

스페너는 스트라스부르크와 제네바 등지를 유학하면서 칼빈파 교회들을 교제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리용에서 공부도 하고 독일의 여러 대학도 순방하였다.

1663년에서부터 1666년까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목회를 하면서 대학 강사 생활중 신학박사 학위를 얻는다. 1660년 프랑크푸르트 교회에 초청 받아 목회를 한다. 그는 여기에서 '경건의 모임들'(Colleges of Piety)이라 부르는 성경 공부 중심의 경건회 모임을 설립하였다.

스페너가 경건회 모임을 시작한 지 5년 후 1675년에 「피아 데시데리아」(pia desi-deria;경건의 욕망)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는 신자들의 경건성을 양육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진술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가 개혁되어야 함을 주장하였고 참된 기독교는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영적 생명력이 생활 속에 나타나야 된다고 하였다.

스페너는 이 책 속에서 현실 교회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목회자나 신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후보자들은 그들이 깊은 개인적인 신앙을 갖춘 진정한 기독교 신자인지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설교자들을 향해서는 지나치게 학문적이고 논쟁적인 것은 억제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또한 일반 평신도에게도 문제점들을 지적하였다. 술취함도 가벼운 죄로 예외 될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매음이나 간음, 우상숭배, 동성연애, 도둑질, 폭력이 근절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국가가 교회의 머리 노릇을 하면서 교회를 지배하려고 드는데 대해서도 담대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스페너의 '경건의 욕망'은 곳곳에서 열광적으로 수용되었으나 스페너의 개혁의 초점이 평신도에게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과 신학 교수의 학구적 신학 활동을 비판하는 개혁이라는 비난과 함께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반발에 부딪히자 스페너는 더욱 더 열심히 '경건의 모임들'인 성경 공부에 전력하였다. 그런데 스페너의 뜻과는 반대되게 성경 공부 모임은 분열되었다. 그들은 '교회 내의 작은 교회(little churches in the church)'로 분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너의 경건운동은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다. 보다 많은 집단과 귀족들까지 스페너의 경건 방법을 모방하게 되었다. 스페너는 경건의 훈련으로 카드놀이, 춤과 극장 출입을 금하고 음식과 의복에서 절제하는 규율을 가르쳤다. 매주일 오후에는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교리 문답교실을 인도하였다. 그리고 주일 오후에는 주일 아침의 설교를 정리하고 하나님의 신비에 관한 대화나 책을 읽도록 권하였다.

 

    스페너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그가 「신학 연구의 장애물들」(Impediments to Theological Study)을 펴낸 것이고(1690), 다음으로 또 중요한 일은 스페너의 후계자가 된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Franke)를 알게 된 것이다. 프랑케는 스페너의 후계자가 되어 제 2의 위대한 경건주의 지도자가 된다.  1691년 스페너는 베를린(Berlin)으로 옮겨간다. 스페너는 여러 논문을 모아 「신학사상」(Theologische Bedencken)을 펴낸다. 그리고 프랑케와 함께 '할레'(Halle)에 새로운 '할레 대학'을 세운다(1694).  할레 대학의 신학 교수진은 스페너와 프랑케의 영향으로 경건주의의 학문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스페너는 니콜라스 진젠돌프(Zinzendorf)가 세례 받을 때 대부(代父) 역할을 하였다. 스페너는 1705년 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스페너에게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스페너보다 나이가 아래인 프랑케에 의해서 더욱 크게 발전하게 된다.

 

 (3) 프랑케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ke:1663-1727)는 루벡(Lubeck)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키엘(kiel)에서 학생 시절에 스페너의 감화를 받고 경건주의자가 된다. 그는 라이프치히(Leipzig)대학교에서 학생으로서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는 중 특별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가 참석했던 모임은 성경연구를 통해 학문적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모임이었다. 그렇지만 프랑케는 성겨연구가 경건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라이프치히를 떠나 스페너를 따르게 된다. 프랑케는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가서 스페너 방식에 의한 새로운 성경 연구 운동을 시작하였다. 프랑케는 스페너처럼 경건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서는 프랑케를 싫어하는 세력이 많았다. 왜냐하면 프랑케의 경건주의를 기존 루터교나 칼빈파에서 매우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에 집착하였다. 그래서 루터파는 신앙인들의 태도보다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루터파는 인간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개인적 성결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칼빈파도 이와 유사한 점이 있었다. 칭의에 관한 이론은 루터파를 동의하였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노력해서 성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야만 사람이 성결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의 주장은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회나 일반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경건주의자들의 주장 때문에 기존 기성 교회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1694년에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선제후가 할레(Halle)대학을 세우면서 베를린을 강력한 영적운동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래서 독일의 종교적 지도권을 경쟁자인 작센(Saxony) 공으로부터 빼앗아 오려고 하였다. 그래서 경건주의자인 스페너를 불러 들였고, 스페너는 프랑케를 할레 대학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프랑케는 1698년에 할레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할레 대학은 경건주의의 소굴이 되게 되었다.

경건주의는 독일의 루터파 안에서만 국한되어 일어난 운동이 아니었다. 비텐베르그 대학이 루터파의 정통 운동이었다고 하면 경건주의는 할레 대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그 특징을 드러냈다.

 

 (4) 진젠돌프와 모라비안들

    경건주의는 스페너를 세례 때 대부로 삼았던 니콜라스 루드비히 진젠돌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1700-1760 -모라비아교회의 창설자. 그는 종교적 표현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고, 많은 찬송시를 썼는데 그 중의 일부는 영어로 번역되었다.) 에게 영향을 미쳤다. 진젠돌프는 열렬한 경건주의자들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경건주의 학교인 할레 대학에 보내어 프랑케 아래 수학하도록 하였다.

진젠돌프는 1710년부터 1716년까지 할레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그는 일찍이 대부였던 스페너로부터 매력을 느꼈었고 프랑케로부터는 큰 자극을 받았다. 진젠돌프는 14살 짜리 소년으로 '겨자씨 모임(Order of the Grain of Mustard Seed)'을 조직했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모든 인류를 사랑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루터파의 중심지인 비텐베르크에 가서 법학 공부를 하였다. 여기서 그는 교수들과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곤 하였다. 그후 화란과 프랑스를 여행하였다. 1721년에 색슨 공의 정부관리가 되어 드레스덴(Dresden) 궁정에서 일을 하게 된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그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모라비안(Moravians)을 만나게 된다(1722년). 모라비안들은 원래 모라비아에 살던 후스파(Hussites)들로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피난 온 난민들이었으며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 모라비안들은 진젠돌프가 제공한 사유지를 거류지로 정하고 보헤미안 형제단(Bohemian Brethren)을 조직하였다.

    모라비안들의 의식은 일반 교회와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소금'이라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믿는 교회는 세상의 평범한 교회가 아니라 참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로부터 비롯된 교회 안의 교회라고 믿었다. 그래서 국가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교파적인 일반 교회와는 다르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모라비안들의 삶을 보고 진젠돌프는 궁정의 직위를 사임하고 이들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라고 하였다. 이 헤른후트 공동체는 진젠돌프의 감독 아래 점점 독특한 모습으로 갱신된 모라비아 교회가 되었다.

진젠돌프는 '있는 그대로 나아오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기만 하면 된다' 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모라비안 교회는 크게 부흥되었다. 그러자 루터교회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진젠돌프는 1734년에 목사 자격을 얻었고 1737년에는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루터교의 계속된 압력 때문에 헤른후트를 떠나게 된다.  1749년에 진젠돌프는 다시 헤른후트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가 죽는 1760년까지 모라비안 교회를 관장한다. 이 모라비안 교회는 진젠돌프의 죽음과 함께 루터교 교단과 결별한다. 모라비안 교회는 많은 수의 교세를 자랑한 적도 없고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숫자의 선교사들을 파송 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19세기에 일어날 선교의 열정에 큰 자극을 주는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모라비안들이 존 웨슬레에게 미친 영향으로 인해 그것이 감리교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더욱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의 복음적 각성운동은 모라비안 형제단의 큰 영향을 받았다. 1755년에 영국 안에는 15개의 모라비안 형제단이 있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John Wesley)가 저 유명한 '올더스게잇의 참회 체험(Aldersgate Street Experience:1738)'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모라비안 형제단의 한 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웨슬레는 런던의 훼터 레인(Fetter Lane)에 있는 모라비아 교회에 가입하였다. 1738년 웨슬레는 그가 존경했던 사람들에게 배우기 위해 헤른후트로 여행을 하였다. 후에 웨슬레는 모라비안파로부터 떨어져 나오지만 그가 최초에 구원을 얻는 중생의 체험은 모라비안 형제단에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체험은 존 웨슬레만 아니라 찰스 웨슬레 그리고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까닭에 모라비안 형제단의 가치는 그들 자체 운동에 의한 파급 효과로 인해 세계 선교 열을 일으킨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미친 영향으로 인해 그 파장이 길게 연결된 것이다.

 

 4. 경건주의의 영향

  (1) 경건주의는 20세기 종교계에 성서신학을 출현하게 하였다.

경건주의자들은 교리나 신학보다도 경건한 삶에 관한 신학을 수립하기 위해 새로운 성서 연구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종교개혁 당시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여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기 위해 원전 연구를 많이 하였다.

또한 성경을 연구하되 성서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위한 새로운 성서 연구 방법을 만들어 놓았다.

  (2) 경건주의자들은 현대 에큐메니즘(Ecumenism)에 큰 공헌을 하였다.

스페너나 진젠돌프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놓는 교리나 신학적 차이 같은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저들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무엇이 다른가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무엇이 같은가를 찾아 연합시키려는 운동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교리학에 대한 단순화를 추진하였다.

  (3) 경건주의는 사람이 종교적인 인간이 됨으로써 저절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을 깨뜨렸다. 

종교나 종교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 애호가들의 주장이다. 참된 신앙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인격적 만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인격적 체험 신앙을 경건주의자들이  가르쳐 주었고, 그것이 현대에 와서 보편화된 진리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경건주의에 핵심을 이루는 내용은

  ① 개인적이고도 체험적인 것으로써의 종교

  ② 전 인격적인 참여에 의한 삶의 증거

  ③ 하나님 말씀에 의한 능력이 나타나는 생활

  ④ 영혼 없는 제도, 생명력 없는 몸, 내용 없는 형식 등에 대한 저항

 

 

▶ 다른 나라들의 종교개혁

1) 스위스의 종교개혁

*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에 의해서 진행됨

  - 1517년 아인지델른에 있는 동정녀 성공함으로 순례를 하면 “죄들의 사면”이 보장된다는 전통을 공격

  - 1522년 로마교회와 갈라섬

  - 독일보다 급진적으로 진행되었으나,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측의 주들 사이에 일어난 전투 때문에 쯔빙글리가 방해받게 됨

  - 칼빈이 쯔빙글리를 이어 종교 개혁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개혁운동을 지속시켜 나감

 

2) 스칸디나비아 왕국

*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가 한 정부를 구성

* 국왕 크리스티앙 2세가 루터의 사상을 일찍 받아들임

* 정치적 분쟁과 시민 전쟁이 한동안 종교 개혁을 방해하였으나, 루터의 견해를 받아들임

 

3) 프랑스

* 로마 카톨릭이 다른 나라보다 자유를 누림 - 로마로부터의 교회 독립을 덜 요구하였다

* 그러나 종교적 운동은 독일보다 프랑스인들 가운데 먼저 일어났다.

* 1512년에 르페브르(Jacques Lefevre d' Etaples, 1455-1536)가 “이신칭의”론에 관하여 글을 쓰고 설교를 하였다.

* 프로테스탄트 측은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의 대학살 때 치명적 타격을 입음

  - 거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측 지도자들과 교도들이 살육을 당함

 

4) 네덜란드

* 폴란드와 벨기에의 두 왕국으로 구성

* 종교 개혁이 시작될 무렵에는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음

* 종교 개혁의 가르침을 일찍 수용하였으나, 스페인 섭정자들의 간섭을 감내해야만 했다.

 

5) 저지대 국가들

* 종교개혁은 종교적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 스페인의 폭군은 사람들을 봉기로 몰아넣었다.

* 오랜 전쟁과 엄청난 수난 끝에 윌리엄(William the Silent)의 지도력 하에 있던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 → 윌리엄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1648년에 정식으로 인정받음

*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가 되었으나, 벨기에는 로마 카톨릭의 주류였다.

 

6) 영국

* 종교개혁은 정치적인 관계, 왕위를 계승한 왕들의 상이한 태도, 영국인들의 보수적 성향에 따라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면서 진행

* 종교개혁 운동은 헨리 8세 때 고전 문학과 성경을 공부하던 학생들과 더불어 시작됨

* 토마스 모어 같은 이들은 로마 카톨릭에 남아있기도 하였지만, 더러는 프로테스탄트로 옮겨감

* 틴테일(William Tyndale, 1494?-1536) : 프로테스탄트로 옮김,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함

*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 : 켄터베리의 대 주교, 프로테스탄트 화를 돕다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으로 철회하였으나, 화형 선고를 받았을 때 자신의 철회를 취소함(메리 여왕 치세)

* 헨리 8세 : 자신과 캐더린 여왕의 이혼을 교황이 인가해 주지 않자 로마 교회와 결별함,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영국 카톨릭 교회를 설립함 - 그러나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면, 로마 카톨릭이든지, 프로테스탄트이든지 모두 죽임

* 에드워드 6세 : 개혁운동의 부흥기

  - 크랜머와 그 일파의 주도하에 영국 교회 설립

  - 기도서는 풍부하고 운율적인 언어로 편집함.

* 메리 여왕 : 완고한 로마 카톨릭 신자, 박해를 감행하면서라도 옛 교회로 돌이키려 함.

* 엘리자베스(Elizabeth Ⅰ, 1533-1603) 여왕 : 가장 종교적인 시대

  - 감옥을 열고, 망명자들을 불러들임, 성경은 강단과 가정에서 영예로운 자리에 위치

  - 영국 교회가 재 설립됨

 

7) 스코틀랜드

* 처음에는 느리게 진행됨

* 비톤(David Beaton, 1494-1546) 추기경과 메리 여왕(1542-87, 스코틀랜드인)의 어머니 메리(Mary of Guise, 여왕의 섭정자)에 의해 철권으로 교회와 국가를 다스림

* 비톤 추기경이 살해되고 메리 섭정자가 죽고, 낙스(Knox, 1513-72)는 개혁운동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게 됨

  - 낙스의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견해와 결단력 등에 의해서 메리 여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의 흔적을 없앰

   → 영국보다 훨씬 나은 개혁이 실행됨

* 낙스에 의해 설계된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의 국교가 됨

 

정상운, 주승민, 이호우, 강령림, 김문기, 최재건 공저, 알기쉬운 교회사, pp199-203

 

 

▶ 유럽 제국에서의 종교 개혁

 

1) 프랑스(Frankrcich)

* 최초의 복음주의 운동은 휴머니즘과 결부되었다. - 이 휴머니즘의 제단체에서 프랑스어 성경이 나타났다.

* 강력한 프랑스 왕조는 종교 개혁에 대해서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 종교개혁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강한 탄압이 가해졌다.

* 박해에도 불구하고 ‘유그노의 사람들(동맹 자들)’은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 여기에 고위의 귀족 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가담하게 됨

  - 종교 운동은 정치적 당파 싸움 속에 말려들게 됨

  - 8회에 걸친 위그노 전쟁이 일어남.

   → 잠시 중단한 일도 있었으나 1562-1568까지 있었다.

   → 바돌로뮤의 밤(1572, 8, 23-24)에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가해지게 됨

* 결국 위그노의 지도자가 왕관을 쓰게 됨 : 헨리 4세(후에 그는 다시 카톨릭으로 역 전환하였다)

* 낭트 칙령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적 신념을 보장하는 일과 완전한 시민의 평등의 권리를 보증했다.

 

2) 화란

* 칼(Karl) 5세가 자신의 세습 영지에서 일체의 복음주의 활동을 억압

  -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얻기 위하여 싸우게 됨

* 칼과 그의 아들인 필립(Phillipp) 2세(1555-1598)의 탄압에 의해 해방전쟁이 발발하게 됨

* 알바(Alba)의 공포정치(1567-1573) 시기에 1만 8천명의 이단자가 처형당함

  - 그러나 에그몬트(Egmont)나 호른(Horn)같은 카톨릭 교도도 처형당함

* 해방 운동의 결과

  - 발렘(Willem)과 낫쏘 오란이엔(nassau-oranien, 발렘의 아들)의 모리쓰(moritz)가 승리를 거둠

  - 북부7주는 스페인에서 분리됨(1579)

* 1609년 북부 7주는 독립공화국으로서 자주성을 획득하게 됨

  - 최종적으로는 1648년 베스트파라야(Westfälische) 평화조약에서 확정됨

 

3) 잉글랜드(England)

* 처음에는 신앙운동과는 전혀 무관한 관계였다.

* 헨리 8세 : 아라곤의 카타리나(Katharina)와의 이혼을 신청하자, 당시 교황 크레멘스 7세(Clemens Ⅶ)의 거부로, 로마에서의 분리를 결정한 후,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고, 시녀 아나․발라인(Anna Baleyn)과 결혼함

  - 의회는 영국교회의 지상에서의 수장으로 왕을 승인함.

  - 반대운동은 탄압 당하고, 수도원은 몰수당함

* 에드워드(Eduard) 아래에서 칼빈이즘이 영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 마리아(Maria, 아라곤의 카타리라의 딸) : 강력한 재 카톨릭화를 수행(1553-1558)

  - 피에 미친 마리아라 불려졌음

* 메리 → 엘리자베스(Elizabeth, 안․보레인의 딸)가 왕위에 앉음(1558-1603) :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고, 온화한 칼빈이즘을 교리로 사용하며, 의식에서는 카톨릭 요소를 포함함.

 

4) 스코틀랜드(Schottland)

* 확실한 칼빈이즘의 성격을 지님

* 쥬네브(Genf) 이외의 땅에서 칼빈이즘(Calvinismus)이 스코틀랜드만큼 순수한 예배 양식으로 지켜짐

* 존 녹스(John Knox) : 1560년 개혁파 국교회가 세워짐

  - 마리아 스튜어트(Maria Stuart)의 카톨릭 부흥 시도는 폐위와 함께 끝남

5) 북구와 동구(Der Norden und der Osten)

* 서구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은 거의 칼빈이즘의 형태를 취했으나, 북구에서는 루터주의가 우세였다.

* 덴마크(Dänemark), 노르웨이(Norwegen) 또는 스웨덴(Schweden) - 루터주의로 옮겨짐

* 독일과는 다른 민중의 의지가 아니고, 봉건 영주의 희망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짐

* 국왕이 교회의 수장으로 됨

* 외적 형식에 있어서는 영국과 같이 보수적이다.

* 발트해 연안의 나라들에 있어서 대부분 루터주의였다.

 

6) 남구(Der Süden)

* 종교개혁은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 로마 카톨릭이 우세했음

* 스페인 왕가와 카톨릭 교회의 탄압에 의해서 종교개혁은 넓혀지지 못했다.

 

 

 

고대교회사 예상 문제

 

1. 고대 5세기 중반 삼위일체 이론이 생기기 이전(451) 있었던 기독론 논쟁에 대해 열거하고 특별히 1~2개의 논쟁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시오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nism) 논쟁

* 아폴리나리우스는 신인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보다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이해함 - 인간 예수가 로고스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인간은 아니다.

* 이러한 아폴리나리우스의 견해를 반대한 3명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 즉 완전한 인간적 본성과 완전한 신적 본성을 강조함

* 370년 갑바도기아의 바실이 아폴리나리우스를 논박하기 시작, 377년 로마 감독 다마수스 지도 하의 회의에서 아폴리나리우스를 정죄하며, 382년에 확인, 379년 안디옥의 한 회의에서 아폴리나리우스를 정죄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함

 

2.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논쟁

1) 논쟁의 발단

* 마리아의 호칭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임

  - 한 쪽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한 쪽은 앤트로포토코스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임

  - 네스토리우스는 크리스토토코스로 부르기를 제안 : 해결함

2) 논쟁의 핵심

*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출발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로 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에서는 마리아는 하나님을 나신 분(데오토코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릴은 이 전통을 따라 데오토코스라고 주장한 반면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된다고 주장함

*429, 430년 알렉산드리아 회의 중  세 번의 편지를 네스톨리우스에게 보냄

  - 429년의 편지는 단순히 친구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로 안부적인 성격의 서신

  - 두 번째 서신은 교리서한으로 알려짐 : 인성과 신성 사이의 속성의 교류를 거부하는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에 대한 정면 도전적 성격을 지님

* 로마감독 켈레스틴은 430년 8월 로마의 한 회의를 소집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함

* 시릴은 알렉산드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12개의 정죄문을 만들어 켈레스틴의 공문과 함께 11월 30일에 네스토리우스에게 전달함

  - 시릴이 작성한 12개의 파문조항은 안디옥의 양성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간에 그의 말씀과 행동을 구분하는 이원론, 등의 주장을 정죄함

3) 에베소 회의와 평화안

*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데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431년 에베소 회의를 개최함 - 431년 6월 22일 단독으로 에베소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파문

* 알렉산드리아의 안디옥 측은 네스토리우스의 파문과 12개 조항을 완전히 철회할 것을 요구함 -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안디옥 전통을 융합시킨 통합 신조 곧 평화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함

  - 한 인격의 두 성으로 연합하여 결론을 내림

 

3. 유티키스주의(Eutychianism)와 단성론(Monophysite) 논쟁

* 유티키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

  - 그리스도가 성육신 이전에는 두 본성이었으나 성육신 이후에는 한 본성이라고 주장함

  - 그리스도가 몸을 소유하고 있지만 우리와 같은 몸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 양성이 하나의 성 즉 신인으로 연합된다고 믿음

*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플라비안은 유티키스의 견해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나 정치적인 논쟁에는 휘말리기를 원치 않았으나 유티키안이 고소되어 오자 플라비안은 용의주도하게 심문을 하면서, 유티키스의 사상의 문제점을 밝힘

* 유티키스는 레오 1세와 알렉산드리아 감독 디오스코루스에게 호소함

   - 에큐메니칼 회의를 열 것을 요청

* 449년 황제는 에베소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함

  - 이 회의에서 플라비안이 유티키스를 정죄한 것이 정당한 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유티키스의 정죄를 반박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고, 플라비안은 정죄 당하고 유배를 떠남

* 451년 마르시안과 펄체리아에 의해 소집된 칼케돈 회의에서는 448년 플라비안 지도하의 코스탄티노플 지방회의와 449년 디오스코루스 지도 하에 열렸던 회의를 심사함

  - 펄첼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아나톨리우스 감독은 449년의 회의의 모든 결정사상을 번복하고 유티키스를 정죄하며 플라비안의 정통성을 확인됨 - 칼케돈 신조 책정

* 칼케돈 신조는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안디옥 전통을 동시에 수용하는 모종의 타협안

 

* 칼케돈 신조의 교리사적 의의

  -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왔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네스토리우스주의, 유타키스주의와 단성론의 문제를 해결

  -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니케아 전통을 재확인

  -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이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 사이의 오랜 논쟁인 동정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로 확정함

 

2. 3세기에 있었던 기독교 박해 2가지와 이 박해와 연결되는 콘스탄틴 대제 이후 박해가 끝나고 일어난 두 가지 분쟁을 서술하시오

 

1. 셉티무스 세베루스(202-233)의 박해

- 내란을 평정하고,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혼합절충 정책을 수행함

- 그러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그의 혼합정책에 대해 반발함

- 세베루스는 두 종교의 확장을 막기 위하여 이교도가 유대교나 기독교로 개종하면 사형에 처했다.

- 셉티무스 세베루스 칙령(202) : 개종자들과 전파자들을 향한 박해가 가해짐

  → 이레니우스 순교, 오리겐의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함

  →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다른 지방으로 피신함

  → 셉티무스의 칙령은 일반적으로는 수행되지는 않았다.

- 그 후 박해가 중단됨(이유는 밝혀지지 않음)

- 211년 카라칼라(Caracalla)가 셉티무스 세베루스를 계승하여 잠시 박해를 함

  → 북 아프리카에 제한됨

- 엘라가바루스(218-222)와 알렉산더 세베루스(222-235)는 셉티무스 세베루스와 유사한 혼합절충 정책을 추구하였으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혼합절충주의의 수용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 막시미누스 황제 아래 간헐적인 박해가 있었다.

 

2. 데시우스 박해

* 데시우스(250-253)

 - 로마의 옛 영광을 수복하고자 하였던 전통적인 로마인

 - 데시우스 종교 정책의 기반 : 로마의 전 국민들이 옛날의 신들을 다시 섬긴다면 제국에 은혜를 베풀 것이라 생각함(로마의 시민들이 옛날의 신들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

   → 옛 영광을 다시 복구하기 위하여 옛날의 종교를 수복하는 것이 필요

 - 데시우스 칙령은 남아 있지 않으나 제국 전역에 로마 옛 신들에 대한 숭배를 의무화

   → 250년 지방 관료와 행정관에게 정해진 날에 필요한 장소에서 제사 후 제사 증명서를 사람들에게 발급 : 증명서가 없으면 황제의 칙령을 어긴 범죄자로 간주됨

   → 기독교신자들의 일부는 황제의 명령에 순종하고, 일부는 버티다가 체포되어 제물을 분향하며, 일부는 위조 증명서를 매입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신앙을 지킨 자들도 있었음

   → 데시우스의 목적은 기독교 신자들의 살해가 아니라 신들을 숭배하는 데 있었으므로 실제 순교자들의 숫자는 미미하다

 - 오리겐이 투옥, 고문당함

   → 이 박해에서 신앙을 지킨 자들을 “고백자들”이라는 칭호와 신들과 황제에게 제물을 바친 자들을 배교자라고 불렀다

 

3. 변절자들에 관한 문제

- 데시우스 박해는 기간은 짧았으나 교회에는 커다란 문제를 발생시켰다.

  → 변절자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 모든 이들이 다 같은 정도로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음

  → 황제의 칙령으로 기꺼이 제사를 지낸 자들과 위조 증명서를 구입한 자들, 신앙이 일시 약화되었으나 교회로 다시 돌아온 인물들을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었음

  → 고백자들이 이 문제를 처리할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 교인들과 스스로 그러한 권위를 주장한 고백자들이 일부 변절자들을 다시 교회로 귀환시킴

  → 이러한 모습에 많은 감독들이 반발함 : 교회의 기존 체제만이 변절자들을 다시 받아들일 권위가 있으며, 오직 원래의 교회 조직만이 통일성 있고 정당한 방법으로 조처를 취할 수 있음

- 시프리안(키프리안) : 40세 때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였고, 그 후 얼마 안되어 칼타고의 감독으로 선출됨

  → 터툴리안을 존경하여, 수사학을 전공함

  → 박해 직전에 감독 직에 올랐던 시프리안은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안전한 곳에 피신하여 서신 왕래를 통해 교인들을 지도함

  → 이로 인해 권위가 실추됨

  → 고백자들과 일부 장로들은 변절자들이 회개를 표시하기만 하면 다른 절차 없이 교회로 귀환할 수 있다고 생각함 : 이로 인해 칼타고 주변 교회가 분열 양상을 띰

  → 시프리안은 지역 감독회의를 소집하여, 실제 제사에 참여함이 없이 증명서를 구입 혹은 취득한 신자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교회로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정함

- 노바티안 : 변절자들이 너무나 쉽게 다시 교회로 영입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당시 로마의 감독인 고르넬리우스와 정면으로 충돌함

  → 노바티안파는 분파주의적이고 극단적인 성향으로 치우쳐짐 - 이단으로 정죄

  → 콘스탄틴의 326년 칙령의 발표와 함께 노바티안의 신앙의 자유도 인정되었다.

 

3. 고대 교부들(신학자, 변증가) 중 한 사람을 택해서 생애와 사상에 대해 서술하시오.

 

1. 로마의 클레멘트

* 1C 말엽 로마의 3개 감독

* 클라멘트의 사상의 특징

  - 하나님을 만물의 절대적 지배자라고 보면서도 창조와 관련해서는 플라톤 주의와 같이 하나님을 데미우르게(하나님을 대신하여 창조를 대신한 자)로 묘사한다.

  - 신관은 삼위일체적이다 : “한 하나님, 한 성령님, 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부어 주기를 기원한다”

  -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였다 :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 칭의론 : 클레멘트 서신의 32장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임을 강조함

  - 믿음과 순종은 불과 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

  -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는 모든 천사들보다 탁월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도 모든 천사들의 이름보다 더욱 우월하시다”

  - 그리스도의 선재 :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선재 하셨다면 당연히 교회도 선재 하였다.

  - 교회론 : 교회를 유기체적인 관계로 이해

            강한 자와 약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교회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해야 할 윤리적인 차원이 있다. 따라서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돌봐야 하고 약한 자는 강한 자를 존경해야 한다.

 

2.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 클레멘트와 동시대 인물임

* 시리아 안디옥의 제 3 개 감독임

* 트라얀 황제 재위 기간에 체포당하고 순교함(AD 108)

* 이그나티우스의 사상 특징

  - 교회의 일치에 대한 관심 : 교회의 일치 강조

     → 감독직에 대한 강조, 이단에 대한 경고, 성만찬 강조

  - 감독의 중요성을 역설, 단일 감독제를 맨 처음 주장

    ․ 단일 감독제 : 어느 일정한 도시에서 단 한 사람의 감독이 삼중적 사역을 총 관장함

    ․삼중 사역 : 감독직, 장로직, 집사직

     → 교회에는 한 명의 감독과 장로들과 집사들이 이어야 함을 말함

  - 성찬은 기독교적 일치의 상징이며,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참여하는 것

    ․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강조하는 의식(가현론자들에게 맞섬)

  - 분열을 야기시키는 이단적인 운동을 폭로함

    ․ 이단적인 요소 : 첫째, 기독교의 유대주의화, 둘째, 가현설

    ․ 기독교의 유대주의화에서는 유대교의 틀 안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단순한 선생으로 전환시키며, 마지막 예언자로 보는 유대인들을 향해 그리스도가 “하나님” 이라고 강조함

    ․ 가현설에 대한 반대로, 그리스도의 육체적 성육신,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며, 동시에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은 몸과 영혼을 갖고 있음을 역설

  - 로고스의 성육신은 기독교의 설정 근거

  -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처럼 마땅히 남을 사랑해야 되 것을 강조함.

 

3. 폴리갑(AD 80-165)

*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음

* 서머나의 감독으로 피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

* 자신이 사도들로부터 배운 것, 교회가 전해준 것, 참되고 유일한 교리를 가르쳤다 함

* 폴리갑의 중요성

  - 말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인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을 정통주의로 회심시킴

  - 이그나티우스 보다 폴리갑은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을 잘 알고 있음

  - 칭의론 :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주장

  - 실천적인 인물

 

4. 저스틴 마터(100-165)

* 사상은 당대의 철학과의 만남, 기독교와의 만남을 통하여 형성됨

*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황제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사용한 최초의 이방인

* 기독교 변화를 강화시킬 목적으로 유리피데스, 크세노폰, 플라톤의 글을 인용함

* 제 1 변증서

  - AD 150-155년 사이에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그의 양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시우스 베리우스에게 헌정된 책이다.

  - 이교도의 여러 가지 비난과 몰이해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함

  - 기독교가 새로운 창작품이 아니라 헬라 철학들보다 시대적으로 앞서가는 구약 성경의 구체적 실현이라고 주장

  - 68장으로 구성, 머리말과 기독교에 대한 일부 비난을 논박(4-13),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지닌 도덕적 힘과 이교의 비이성적 우화들을 대조시킴.

* 트리포와의 대화(160년경에 기록)

  - 마르투수 폼페이수스라는 인물에게 헌사된 책

  - 일부 학자들은 이 글이 기독교의 우월성을 보여 줄 목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생각.

  - 율법, 금식, 할례, 음식물 금지, 안식일, 제사 의식 등이 유대인들의 반역적 성질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주장

  - 모형론의 개념을 이용하여 다수의 구약 성경들에서 예시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예, 노아의 방주의 나무 : 십자가의 나무, 레아 : 회당, 라헬 : 교회, 여호수아 : 예수 등)

* 제 2 변증서

  - 15장으로 이루어진 작품

  - 160년 경 기록된 작품

  -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건의 부당한 소송 사건에, 항의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5. 타티안

* 저스틴의 제자로서 앗시리아 출신

* 저스틴 순교 후 165년경에 로마에 자신의 교육기관을 설립

* 수년 후 로마를 떠나 시리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이단적인 색채가 강한 학파를 설립함

  - 고대 학자들은 그가 세운 분파를 엔크라티테스라는 이단으로 보기도 함

* “헬라인들에게 고함”

  - 헬라인들이 가지고 잇는 종교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야만족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 → 희랍의 종교가 야만인들의 종교보다 우월할 것이 없다

  - 헬라인들이 섬기는 신은 정상적인 경건한 신이 아니라 방종하고 음란한 신들이다.

* 로고스 사상

  -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로고스는 불과 같다.

  - 로고스는 이 세상을 지으신 조물주이지만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한 것은 아니라고 봄

  - 지존자만이 시작과 끝이 없으신 분이라 이해

* 사복음대조 : 대조복음서

  - 사복음서들을 대조하여 한 권으로 간추림

  - 전체 구문의 구성을 바로 잡기 위해 사도들의 표현을 바꾸기도 함

 

6. 이레니우스 

* 카톨릭 교의학의 아버지, 교회 최초의 조직신학자

* 130-140년 사이에 소아시아, 서머나에서 출생함

* 요한의 제자 폴리갑에서 수학.

* 고울의 리용에 있는 교회에서 장로가 됨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하의 박해로 177년 포티누스 감독 등 50명의 기독교인이 리용과 비엔나에서 순교함으로 포티누스를 계승하게 됨

* 202년 리용에서 순교함

* 이단논박(5권으로 구성)

   → 1권 : 영지주의의 해설, 2권 : 이성에 의하여 논박함, 3-5권 : 선지서,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에 기초한 성경으로부터의 논박

* 사도 설교의 논증

  - 창조에서 최후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를 제시함

* 하나님의 형상이해 :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 형상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아들 속에서 완전히 찾을 수 있다.

* 창조는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니다.

*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성장해야 한다. 따라서 타락이란 인간 본래의 완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본래 가졌던 자신의 성장이 저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함

*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 즉 계속성과 완성을 동시에 주장함

* 총괄갱신 :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새로운 인간상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의 일환이다.

  -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총괄하신다는 것은 인류를 회복하는 것이며 인류를 갱생하는 것을 의미

  -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 구원을 타락 이전의 낙원의 상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

  - 세례는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삶의 시작과 영생을 보장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

  - 성만찬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며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에 동참하여 실제적으로 영양분을 공급받고 마지막에는 최종적인 부활을 보장받는 것이다.

  -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와 인간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 이레니우스는 성서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보존한다는 입장과 함께 성경이 영감 되었고 권위가 있다고 믿었다.

  - 사도들의 가르침의 정확성은 그들의 가르침의 통일성에 의하여 확산된다고 믿음

  - 사도적 계승이란 안수 주는 자로부터 안수 받는 자에게로의 계승이 아니라 한 스승으로부터 다음 스승으로의 전수를 의미함

* 이레니우스의 사상의 핵심은 사도 요한의 신앙률로서, 로고스를 통해 만물이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를 통해 인류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7. 터툴리안

  - 서방신학의 대변자, 라틴 신학의 아버지

  - 150년경 북아프리카 칼타고의 로마 주둔군 백부장의 아들로 태어남

  - 중류층 가정 출신으로 헬라어를 포함한 언어, 문화, 법, 철학 교육을 받음

  - 40세에 기독교로 개종함

* 약 200년 경 칼타고 교회의 장로로 안수 받았으나 207년 몬타니즘에 합류함

* 21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몬타니즘의 일원이었음

* 터툴리안의 작품들은 약 31개가 남아있으며 반 이상이 라틴어 저술임

* 변증론 : 첫 번째 중요한 작품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변호함(197-200년 사이 기술)

* <취득시효>, <프락세아스 논박>, <말시온 논박>, <헤르게네스 논박>,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하여>, <육신의 부활에 대하여> 등 : 이단논박서

  - 취득시효 : 최초의 영지주의 비판 논박서

   - 프락세아스 논박 : 삼위일체 정립에 공헌함

* 변증서와 반박서 외의 작품으로는 도덕적, 예전, 권징에 관한 것들이 있음

  - 세례, 기도, 인내, 회개와 여자 옷에 관하여 등이 있음

* 전통적 견해로는 터툴리안이 철학에 관하여 부정적인 생각이나, 상당수의 학자들은 플라톤 주의를 거부하고 스토아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 터툴리안의 철학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인간이 믿는 것은 그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표현하는 비합리주의를 의미함

* 철학에 대해 터툴리안의 부정적 이유는 철학과 이단의 연계 의혹 때문이었다.

* 종말론 문제에서 터툴리안은 세대주의적 입장임

  - 구약은 성부, 성육신은 성자, 오순절 이후 성령의 시대이다

* 세계관 :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대립적인 구조로 이해하며 서로 간에는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봄

* 성서이해: 두 권을 제외한 신약의 거의 모든 성경으로부터 직접 인용하며 신약성경들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둠

 

8. 키프리안

* 캐실리우스 키프리안(Caecilius Cyprian)

  - 200년경 이교도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남

  -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수사학과 법학을 통달

  - 246년경 장로 캐실리아누스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

  - 안수 받은 후 얼마 안돼서 장로로 안수

  - 248년 칼타고 감독이 됨(248-258)

* 3차 박해인 데시우스 박해 기간에 8년 동안 칼타고의 감독을 지냄

*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 시 키프리안은 지하로 숨어 편지로 목회 하는 방식을 택함

* 데시우스 박해 종결 후 변절한 교인들과 신앙을 지켰던 신자들과의 갈등이 생김

  - 박해 후의 처리 문제로 교회의 분열을 느낀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을 저술

  - 교회의 일치를 변호함

*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키프리안의 확신은 감독직의 통일성 이론으로 확대됨

  - 교회 일치를 감독의 일치로 직결 : 교회가 하나이듯 감독직도 하나

* 키프리안의 교회관 : 교회는 일차적으로 외적 조직체 속에서 통일성을 찾아야 하며, 이 가견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는 하나의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일성이 존재하며, 이 통일성은 감독들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보존되며, 이 교회를 떠나서는 결코 구원이 없다는 것

 

9.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트(Titus Flavius Clement) : 2세기 말엽부터 3세기 초엽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의 정초를 놓음

  - 150년경 아테네의 이교 부모 밑에서 태어남

  - 판태누스라는 학자의 영향을 받고 그와 함께 성경 연구에 전념함(약 180년경)

  - 판태누스가 죽고 그 뒤를 클레멘트가 계승함

  - 극단적인 금욕주의는 없었으며, 평교인으로 독립적인 길을 걸음

* 대표적인 저서로는 <스트로마타(Stromateis, The Miscellanies)> 8권으로 된 책

  - 진정한 철학적 지식에 관한 주석집이라는 제목을 지님

  - 수많은 철학자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료들을 혼합함

* <교사> : 판태누스가 자신의 스승임을 밝히며 그의 견해와 그에게서 받은 전승들을 전함

  - 총 8권으로 되었음

  - 기독교 교리의 체계적인 강해를 담고 있음

  - 로고스가 우리를 어떻게 교화시키는가를 다룸

* 그 외의 <헬라인에게 권고>, <회심에의 권고>, <부자가 구원받는다면?>, <교회법> 등이 있음

  - 회심에의 권고는 문명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할 윤리 및 예의 범절들을 가르치기 위한 일종의 안내서

  - <잡문집> : 세 번째 작품으로서 로고스가 어떻게 우리의 지식을 완전케 하여 참 지식에 이르게 하는가를 설명함

* 클레멘트는 기독교와 헬라 철학의 연합을 추구함

  - 로고스는 성육신 이전에 선재 하셔서 헬라인들에게 철학을,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연합이 가능하다고 믿음

* 클레멘트는 신앙과 지성을 구분하고, 지식이 신앙보다 우선한다는 입장을 가짐

* 클레멘트의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우화적 해석으로 대별됨

  - 문자적 해석을 첫 번째 의미로 보고, 우화적 해석을 두 번째, 진보된 의미로 이해함

* 클레멘트의 신관

  - 플라톤의 영향을 따라 신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함

  - 그러나 플라톤의 신관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신관과 조화시키려고 함

* 역사의 구심점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찾음

*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론, 역사관의 구심점은 로고스이다.

* 클레멘트의 신학의 핵심은 기독론(로고스론)이다.

* 로고스론은 헬라철학과 성경을 연결하는 교량이며 역사를 전체적으로 통일시켜주는 원리이고 신구약을 총체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근본원리이다.

 

10. 오리겐

*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Origenes Adamantius) : 185-254

  - 동방신학의 전통을 세워놓음

  - 로마 당국에 맞서 신앙을 변호하며 기독교 교육가로 활약, 유대인 사회에 대해 기독교를 증언하며,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 일함

* 오리겐은 기독교 가정에서 신앙 교육을 받으셔 성장

  - 부모는 원래 이교도였으나 오리겐이 소년시절 기독교로 회심함

* 아버지 레오니데스가 세베루스 황제 박해 시 순교함

* 부친으로부터 상당히 독실한 신앙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임

  - 헬라 문학을 배우기 전에 성경을 연구하며 암송함

  - 부친으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고 부친 사망 후 언어학에 전념함

* 18세에 데메트리우스 감독의 지명을 받아 알렉산드리아의 세례 지원자 학교를 관장함

*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극도의 빈곤 생활을 함

* <페르 아르콘(제 1원리에 관하여)> : 오리겐의 사상을 함축적이고 체계적으로 담음

  - 고대가 낳은 최초의 조직신학 교과서로 간주됨

  - 신론, 창조, 타락, 인간론, 윤리학, 성경의 역할과 성경 해석의 원리, 자유 의지, 부활 등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룬 제반 단락이 들어 있음

  -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는 오리겐이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선재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 성부와 성자의 가르침은 성자의 영원 전 나심의 개념으로 정립함

  - 성자 로고스와 아버지와 동질에 속함을 의미

* 삼위이해는 삼위의 위격을 구분하지 않지만 삼위가 서열상 동등하지 않고 능력에 있어서도 차등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성자의 성부 종속, 성령의 성부 및 성자 종속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함

 

4. 고대교회 이단 또는 위기에 대해서 나열하고 약간의 설명을 하시오

 

1. 에비온파(Ebionites)

-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라는 뜻의 ‘evionim'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예루살렘 선지자들에 대한 경칭이었음

- 1세기 후반에 활동한 유대주의 형태의 영지주의

- 유대주의와 기독교 요소들을 자신들의 사상에 혼합시킴(유대적 기독교 분파 집단)

- 마태복음만을 사용

- 모세의 율법의 유효성을 신봉함

  → 율법적인 삶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함 : 관습을 지키며, 예루살렘을 숭배함

  → 율법을 지키며, 율법과 할례를 떠난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음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선재성은 부인함

  → 그리스도는 세례 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 형태로 임하셨다가, 십자가상에서 예수에게서 떠나갔다 라는 것을 주장함

  →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이해하며, 예수와 모세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함

- 인간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 사상이나 부활과는 관계가 없다

- 양자설을 주장

  →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탄생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공의, 신중성, 지혜 등 모든 면에서 보통 인간들보다 탁월한 존재로 여김

- 지상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천년 왕국이 이 땅에서 실현되며, 예수의 재림 시에 최초로 이 땅에서 구원이 가시적인 실재로 나타난다는 생각임

 

2. 영지주의

1) 영지주의의 성격과 특징

* 영지주의는 기독교, 헬라의 철학, 동양 바벨론의 우주적인 신화론, 페르시아의 이원론을 결합한 혼합 종교사상이다. 이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헬라의 이원론과 기독교와의 혼합이다.

* 영지주의의 최대 관심사 : 하나님은 누구인가, 악은 무엇인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이 어떻게 악에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 영지(gnosis knowledge) : 영지는 영계로부터 온 계시

*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단계의 지식과 믿음을 창조하셨으며, 성경 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비밀 구전이 있다고 주장함

* 영지주의의 특징으로는 영 육의 분리에 의한 철저한 이원론적인 사고이다.

  -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며, 때문에 구원은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다.

  -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 때문에 극단적인 금욕주의 아니면 자유방임주의로 흘러감

* 물질계가 악하다는 개념을 근거하여 창조주와 구세주를 구분한다.

  - 절대자는 악한 물질계를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중간자를 개입시켜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 여긴다.

  - 악은 물질에서 나왔고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물질세계와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것

* 영지주의의 원형은 기독교 이전부터 있었지만, 영지주의의 형태를 갖춘 사상체계는 기독교 이후에 형성됨

 

2) 영지주의 대표적 실례

* 발렌티누스(Valentinus) : 135-160까지 활동(아나세투스 시대까지 삶)

 -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로마에서 가르치다 160년에 세상을 떠남

 - 교회의 일원이었으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했음

 - 기독교 가르침을 헬라 사상 및 동양 사상과 결합

 - 그의 가르침은 이교도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기독교인이 이교도가 되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

 - 하나님을 단일한 초월자로,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무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일자에서 기원한 존재로 봄

   → 지고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와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 세상의 창조가 절대자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열등한 신의 작품이다

   → 물질계는 악하다

   → 구주는 하나님도 사람도 아니다

   → 단지 몇 사람, 즉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

   → 부활이 없다

 

3. 말시온주의

* 말시온(85-160)

  - 소아시아의 북부 해안 도시 시토페에서 감독의 아들로 태어났음.

  - 주후 140년경에 로마로 이주해 옴

  - 부유한 선주의 아들로서, 신학적 소양을 지닌 인물이었다.

  - 세르돈의 영향을 받아 영지주의를 받아들이게 됨

  - 폰틱계 영지주의자로 분류하기도 함

* 신약과 구약의 대립

  -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고, 신약을 선호했다.

  - 신약 모두가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은 아니라고 제시함

  -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으로 구성된(디모데서와 디도서는 제외) 말시온의 정경을 만듦

  -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은 절대적으로 구분되며 상호간에는 연속성이 없다

* 말시온의 기독론과 구원론

  - 기독론은 전형적인 영지주의를 반영함

    → 가현설을 받아들임(그리스도는 물질적인 세계와는 달리 비가시적인 영의 세계를 계시해 주는 것과 연관되기 때문)

    → 구원자의 모습은 순수한 영으로서 이 세상에 현존하듯이 보이는 환영 뿐이라 주장

    →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함

    → 인간의 실제 몸을 가지지 않고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고 말함

    → 영혼만이 구속을 받으므로 육체는 부인되고 포기되어야 함을 주장

  - 구원론은 바울의 구원관을 따름

    → 신앙과 하나남의 자유로운 은혜에 따라 주어지게 됨

* 철저한 금욕주의 사상 때문에 성찬식에서 포도주 사용을 금지하며, 결혼을 악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 말시온의 영향

  - 기독교를 헬라 철학 사상과 혼합시킴

  - 영육의 분리 사상, 즉 이원론을 뿌리내림

  - 말시온의 결과 : 정경의 형성과 사도신경이 발달했다

 

4. 몬타니즘

- 몬타누스에게서 출발, 서부 소아시아 지역인 프리기아(Pyrigia)에서 172년부터 발흥함

- 몬타누스

  → 씨벨레의 이교(여신전) 제사장 출신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후 이교주의를 포기했으나 새 종교를 구 종교의 관습 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함

  → 소아시아의 중앙에 있는 프리기아는 광신적이고 감성이 지배하는 미신적인 이방 종교도시로서 신비스런 황홀경이 유행함

- 몬타누스는 막시밀라와 프리스길라(남편을 버리고 그에게 온 여자들로 예언자라 불림)를 만나 활동 영역을 넓혀감

-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활동하였으나 지나친 성령의 사역 강조로 비판이 일어나자 교회와 분리하여 별도의 교회를 세움

  → 탈속주의와 금욕적인 엄정주의를 표방한 운동은 당시의 사회적 정황과 맞물려 급속히 전파됨

- 몬타누스의 가르침

  → 몬타누스 자신을 통해 성령(Paraclete)의 시대가 왔다고 가르침

  → 몬타누스와 두 여인(막시밀라, 프리스길라)은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공헌함

  → 결혼은 한 번만 해야 하며, 영적인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것은 허락함

  → 순교가 권장되며, 순교를 피하는 것이 죄이다.

- 여인이 교회에서 공직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됨

- 몬타니즘으로 인해, 교회는 예언과 은사에 대한 강조는 이것들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만들었음

- 종말에 대한 강조로 몬타니즘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음

- 몬타누스의 가르침이 50년이 지난 후부터 변화를 겪게 됨

  → 새 예루살렘이 임하지 않으며, 많은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았다.

- 새 예언의 실패 후에 몬타니즘은 엄격한 기독교 생활, 금식, 세상과의 분리,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고백, 신앙 때문에 고난 받을 것을 강조함

- 막시밀라와 프리스길라가 죽은 후 몬타니즘 교회는 조직을 갖고 역사적인 기독교와 병행하였지만, 초창기처럼 설득력은 강하지 않았다.

5. 스콜라 적인 방법을 활용해 연구한 두 신학자(교부)를 나열하고, 생애와 사상도 쓰시오.

    스콜라주의 신학은 기독교 이전 시대의 희랍, 로마세계의 사상을 사용했다. 이것은 주로 희랍철학을 말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주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신앙내용을 이성으로 검증하는 등 신앙을 철학과 연결시켰다.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고대교회에서 정통으로 확정된 교리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따랐다.

 

 ▶ 요한투스 스코투스

    1265년 스코틀랜드의 남부에서 태어났고, 십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프란시스칸이 되었다. 그는 아퀴나스가 세상을 떠날 즈음 어린아이였고, 알베르투스가 아직 살아 있을 때 프란시스칸이 되었다. 그는 파리와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았고, 파리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얻었으며, 1308년경 꼴로뉴에서 40대 초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퀴나스에 맞먹는 사상가의 위치에 올랐다. 이 두 신학자의 대립과 논쟁은 양승단 사이의 적대감과 경쟁심에 의해서 더욱 고조되었다. 스코투스는 어거스틴계 프란시스칸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보나벤투라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영향받았다. 스코투스는 이성과 신앙을 단절시킴으로써 이 둘을 종합하려는 전통적 신학체계를 붕괴시켰다. 그리하여 옥캄에 이어 1305년 이후 전개되는 후기 중세기 스콜라주의 신학을 종교개혁에 이바지하게 된다.

    스코투스는 기독교의 계시 진리들은 이성의 진리들에 의하여 증명될 수 없고 이성에 일치될 수도 없으며 단순히 성경과 교회의 전통에 따라 믿어질 뿐이라고 역설하였다. 즉, 이성보다 신앙을 강조했고, 기독교 이전 시대의 이성적 진리들보다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높였다.

특히 스코투스는 인간의 이성보다 의지를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지성 위에 놓게 되었다.

    스코투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유의지를 행사하시되, 이성의 제약을 벗어나 계시고 때로는 이성에 맞지 않게 행동하신다. 그의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한 주장은  인간의 이성이 알고 있는 차원을 훨씬 초월한다. 인간과 우주만물의 창조와 섭리는 하나님의 理性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意志에 의한 것이다.

    스코투스는 인간론에 있어서는 의지를 강조했다. 그는 원죄를 인정하면서도 타락후의 인간에게 의지의 결단이 남아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성육신과 속죄사건을 믿었고, 다른 프란시스칸들처럼 마리아에게 원죄가 없음을 믿었다. 하지만 그는 안셀름과 다른 이들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셨을진대,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보존하기 위하여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어야 하는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퀴나스는 성육신과 십자가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여겼으나 스코투스는 이것이 하나님의 자유의지를 제약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지혜로운 행동임을 거부하였다. 스코투스에 의하면 이모든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의지적 선택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일어난 것이다.

 

 ▶ 윌리엄 옥캄

    중세기의 전통적인 스콜라주의 신학을 붕괴시키는데 더 큰 공헌을 한 상징적인 인물은 불요불굴(不搖不屈)의 존경스러운 학자인 영국의 윌리엄 옥캄이었다. 그는 1300년경 옥캄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공부했고 프란시스칸승단에 들어가서 이 승단에 소속한 좀더 과격한 영성주의자들에게 합류했다. 그는 교황을 반대하여 황제를  편들었다. 그는 교황 요한 22세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와 사도의 완전한 청빈을 주장하다가 투옥되어 1328년에 출옥하였다. 그는 단테와 더불어 국가가 교회의 권위에서 완전히 독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교회의 권위나 구조에 관하여 전통적인 권위를 따르지 않았다.

    옥캄은 철학에 있어서 변형된 실재론을 주장하는 스코투스와 달리 유명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실재론이 중요시하는 보편 자들의 존재를 거부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개별자들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들을 통해서 우리 밖에 있는 대상들을 알뿐만 아니라 기쁨과 슬픔과 같은 우리의 내적 경험을 통해서는 더 확신 있고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옥캄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철학자로서 이 철학의 원리들을 두려움 없고 사정없이 적용하려 했다.

    옥캄의 신학을 보면 기독교적 신앙내용 중 그 어떤 것도 이성을 통해서 스콜라주의 철학의 논리에 의해서 증명할 수 없다. 옥캄은 신 존재 증명이 이성에 의해서 성취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우주론적 논증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옥캄은 신 존재와 영혼불멸 같은 기독교의 기본 주장들은 이성에 의해서 논증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전통에 의해서 가르쳐 왔고 성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에 의해서 수용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성과 신앙의 단절을 보인다. 옥캄은 인간의 지식과 하나님의 지혜의 화해를 포기한다. 곧 이성에게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적어도 희랍 계통에서 온 이성의 진리와 복음을 통해서 제시된 진리 사이에는 다리가 놓여질 수 없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이태리의 몬테카시노 근처에서 1224년 말 혹은 1225년 초에 태어났는데, 그는 천사와 같은 선생으로 알려졌다. 아퀴나스는 어린 시절에 베네딕트 수도원의 모체인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그의 삼촌의 지도하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성자 루이9세 하의 파리대학에서 공부했고, 3년 후에는 꼴로뉴 대학으로 갔고 이곳에서 알베르투스의 지도하에 공부했다. 그는 찬송들, 성경들, 그리고 신학 주석들을 썼고, Corpus Christi(그리스도의 몸)의 축제일을 시작하는 일에 공헌하였다. 그는 몸집이 컸으나 몸이 약하여 그의 천재성이 요구하는 모든 작품을 감당할 수 없어서 4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스콜라 신학은 절정에 오른다. 아퀴나스는 예리하고 종합적인 능력의 소유자로서 스콜라주의 방법을 신학에 적용하였고,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사용하여 로마 카톨릭의 표준신학을 형성하였다. 그는 기독교신학의 모든 주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용하여 반성적으로 숙고하였고 체계화시켰다. 아퀴나스에 있어서 자연과 초자연의 종합이 시도되는바 ‘자연’에 대한 지식은 이성에 의해서,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해서 제공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초자연)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한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아퀴나스는 플라톤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데아들 혹은 형식들이 실재라고 하는 플라톤의 입장을 거부했다. 그해서 그는 플라톤적 의미에서 실재론 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어거스틴과 신 플라톤적 의미를 벗어났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지식이란 감각들이 감지한 바에 근거한다고 본다. 감각들을 통해서 제공되는 자료들이 이성에 의해서 해석될 때 지식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기독교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들을 고수하면서도 그것들을 넘어섰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신앙 역시 진리에 이르는 길인바 이성에 의해서 도달되는 진리들(자연)은 신앙차원(초자연)에 의하여 연결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영역에 속하며 감성과 이성으로 진리들에 도달하는 이는 어디까지나 자연적 진리요, 초자연적 진리는 아닌 것이다.

   아퀴나스는 경험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실재론적 입장에 서 있는 신을 자명한 분으로 믿고 출발하는 안셀름의 존재론적 신 증명을 거부한다. 곧 존재의 유추에 입각하여 자연신학을 수용했다.

※ 다섯 가지 신 증명 제시

 - 모든 사물의 운동은 부동의 동작자에로 소급(遡及)한다.

 - 결과는 무원인의 원인에로 소급한다.

 - 우연한 실재들은 하나의 필연적 실재로 소급한다.

 - 질적인 정도들은 최고의 질에로 소급한다.

 - 합목적적 행위들은 궁극적 목적을 지향한다.

    따라서 아퀴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제1원인(causa prima)이요 순수행동이요, 절대적 실체로서 가장 완벽한 존재요 모든 것의 근원이요 목표이다.

    인간론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이분론적 인간론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론을 수용하였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는바, 영혼은 지성, 양심, 의지로 되어 있다고 본다.

    구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은 인간이 사죄를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선행을 통한 보상을 암시한다. 어거스틴의 구속론을 따라 전성화의 과정을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본다. 인간은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잉여공로1)에다가 약간 공헌함으로 구원을 얻는바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구원의 은혜의 시작과 완성은 선행하는 은혜와 인간의 협조로 이룩되는 것이다. 이는 중세적 경건을 구축하며 수도원적 삶의 이상에로 이어진다.

    아퀴나스에 있어서 은혜의 유일한 수단은 성례전이다. 인간이 세례를 통하여 신앙으로 원죄를 용서받아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있고, 원죄의 세력으로 죄에로의 성향이 남아 있기는 하나 은혜로써 이를 능히 극복하고 기독교적 덕목을 성취해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실제 죄들의 문제는 성찬과 특히 고해성사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하는데, 이 실제 죄들은 영원한 형벌을 가져올 수 없고 기껏해야 연옥으로 인도하며, 교회의 사제는 실제 죄들에 대한 지상적 형벌을 관리한다.

 

중세이후 예상 문제

 

1. 십자군 원정에 대해 논하시오

                                                                                     

1. 정치적 원인

  1) 이슬람의 동로마 침입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게 침략을 당했다. 서방에 원병을 요청했다. 1071년 동로마의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Manzikert 전쟁에서 패배하고, 투옥 당하였고, 그 다음 황제 미가엘7세(1071-1078)가 교황 그레고리 7세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1081년 알렉시우스 콤네우스라는 사람이 황제가 된 후 1086년 안디옥, 베데사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중심 도시를 빼앗겼다. 그래서 서방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레고리7세는 헨리4세와 서임권 논쟁을 하느라 성공을 시키지 못했으나 다음 교황이 성공을 시켰다.

 

  2) 이슬람 세계의 분열

 스페인 지역에서 1034년 회교 족장들의 싸움으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하던 칼리프 왕국이 멸망했다. 그래서 기독교가 스페인 지역을 탈환했다. 1060년 이후 시칠리 섬 탈환, 기독교인이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2. 경제적 원인

  1) 당시 영주의 장남이외의 아들들은 상속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2) 도시 상인들의 시장개척의 노력

 

3. 종교적 원인

   1076년부터 성지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점령당했다. 이들이 성지 순례를 방해했고, 교회는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황권이 강화되어서 동방교회까지 지배하고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십자군 전쟁은 한마디로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회가 개혁되고 신앙의 열정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운동이었다.  

 

4. 공헌한 사람들

 1) 우르반2세

  십자군을 정식으로 선포한 사람이다. 그는 클루니 수도원의 부원장까지 지냈던 클루니 개혁운동의 중심이었던 사람이었다. 교황권이 강화되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2) 은둔자 베드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꿈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성지를 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구라파로 돌아와서 열정적으로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설교를 했다. 그는 남 프랑스, 스페인, 로레인, 라인강 지역까지 나귀를 타고 맨발로 다니며 설교를 했다.

 

5. 경과

 1) 십자군의 선발대(민중의 십자군)

  1096년 출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은둔자 베드로였다. 이 십자군에는 많은 농민들이나  기사들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가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진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라인 강 유역에 가서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왜 유대인들을 학살했는가 하면 이들 중에는 유대인들에게 빚진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빚을 갚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이것은 반 셈족운동의 시원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서 니케아를  점령하러 갔다가 이슬람 족에게 전멸 당하고 은둔자 베드로만 살아 돌아온다.  

 

 2) 제1차 십자군 운동

  교황의 명령으로 로마의 귀족들이 참여했다. 3개의 부대가 개별적으로 진군을 했다. 이 부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십자군의 도덕적 영웅이었던 Godfrey였다. 가장 순수했던 마음으로 거룩한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 운동에 참여했던 운동이다.

1)로레인, 플란더스  2) 북부 프랑스  3) 남부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

1096년 겨울에서 1097년 봄까지 도착했다. 십자군 전설에 의하면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60만명, 기사만 10만 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타이어니의 책에 따르면 실제로는 8천에서 만2천명정도, 그리고 기사는 3천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 동방의 황제가 원한 것은 원병이었다. 병사들이 자신의 휘하에 와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했지만 십자군의 목적은, 단순히 동로마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성지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1097년5월 니케아를 점령하고, 10월에는 안디옥에 이르렀다. 안디옥에 이르러서 8개월 정도 고생하다 1098년 6월에 안디옥을 점령했다. 그 다음에는 이슬람의 반격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 성 안에서 그리스도를 찔렀던 창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반격을 가해서 승리를 했다. 이 사람들은 기분에 좌우되는 사람들이었다. 1099년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 당시 수많은 주민들이 처형당했다. 이 사람들이 점령한 다음에 이곳에 라틴왕국을 건설했다. 그 후 고드프리(Godfrey) 가 성묘의 수호자가 되었다. 고드프리가 1100년 죽은 다음 그의 동생이 왕위를 계승했다. 서방과 같은 봉건제도가 형성되었다. 종교도 라틴의식으로  재조정되었고, 많은 수도원들이 생겼다. 처음에는 이 왕국의 실권은 대제후의 모임이 가지고  있었다. 대궁정(High Court)에서 모였다. 그러나 아모르가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을 강화하고  대제후들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라틴왕국의 보호를 위해서 기사종단 들이 생겼다.

  ① 성전 기사 수도단: 이들의 목적은 시토회를 모방하고, 불신자와 싸우고, 성지를  지키고, 순례자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땅을 기증해서 성전 기사 수도단은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② 성 요한의 병원 수도단: 세례요한의 교회부근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순례자들을 진료하고 구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③ 독일 기사단 : 나중에 프로이센을 점령한 아주 악명 높은 기사단이었다.

 3) 제2차 십자군 운동

  1144년 이슬람이 에데사를 점령함으로써 1147년 클레르보의 버나드가 십자군을 주도했다.  

 4) 제3차 십자군 운동

  1187년 성지를 점령했으나 다시 패배하여서 예루살렘과 성지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5) 제4차 십자군 운동(1202 - 1204)

  성지를 공격하기 위해서 먼저 이집트를 공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집트 원정을 먼저 시작했다. 베니스의 상인들과 협력해서 헝가리에서 먼저 짜라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베니스의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1182년 콘스탄티노플에 폭동이 일어나서 많은 베니스의 상인들이 약탈 당했는데 이것에 대한 보복이기도 했다. 알렉시우스라고하는 왕자가 다른 알렉시우스3세라고 하는 자에게 왕위를 빼앗겼는데, 만약에 십자군들이 자신의 왕위를 되찾아 주면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십자군들은 정통왕조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1204부터 1261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중요한 부분을 서로마 제국에서 지배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에 라틴왕조와 라틴교회를 세웠다. 명목상으로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하나가 되었다. 1261년 동로마 제국이 남아있던 라틴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래서  라틴왕조와 라틴교회는 사라지게 되었다. 라틴왕조와 동로마 제국의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었고, 결국 1453년 이슬람 교도들에 의하여 동로마 제국이 멸망되었다.  

 6) 소년 십자군 운동 1212년

  프랑스에서는 스데반이라고 하는 12살된 목동이, 독일에서는 니콜라스라고 하는 10살 된 소년이 중심이 되어서 많은 어른들과 함께 일부는 마르세이유 항구까지 도착하였다. 이 어린아이들이 생각할 때는 마르세이유 항구에 도착하면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둘로  갈라져서 성지까지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다가 나누어지지 않았다. 상인들에게 유혹되어서 상인들의 배를 타게 되었는데 일부는 파선을 당하고 일부는 아프리카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다. 십자군운동이 얼마나 환상에 의한 것이고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7) 제5차 십자군 운동(1218 - 1221)

 8) 제6차 십자군 운동(1228 - 1229)

  황제 프리드리히2세가 십자군 서약을 했다. 1229년 이집트의  술탄과 계약에 의해서 1244년까지 예루살렘을 기독교가 보유하게 되었다.

 9) 제7차 십자군 운동(1248 - 1250)

  프랑스의 루이9세는 이집트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는 풀려난 뒤 1270년 다시 공격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성 루이  로 불렸고, 십자군에 온 생을 바쳤던 사람이다.

 10) 제8차 십자군 운동(1271 - 1272)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나중에 에드워드1세가 되었다) 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실패하고 돌아와서 그의 소원은 다시 십자군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291년 마지막 소유했던 땅까지 상실하였다.

  *1096년 시작되었던 십자군 운동은 1291년까지 약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루터 [터키인과의 전쟁에 대하여](1529)

  ① 터어키와의 전쟁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군이어서는 안 된다. 교황이 십자가의 깃발 아래 전쟁에 참여해서는 안되고 황제가 중심이 되어서 터어키인들의 침략적 행위를  저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② 터어키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앙 때문에 터어키 인들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터어키 인들이 유럽을 침략했기 때문에 그 침략에 대한 응징으로 터어키 인들을 공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지탈환, 이슬람군의 진출을 저지, 동로마를 지원함으로써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이루려는 목적은 실패했고, 제4차 십자군원정 때문에 동/서방교회 사이의 앙금은 더 깊어졌다.

 

6. 결과

  1) 귀족들이 전사를 하게 된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왕권 신장의 결과를 가져왔다. 근대 절대왕권 형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2)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황권이 절정에 올랐을 때 시작되었으나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1309년부터 1377년까지는 교황청의 바빌론 유수기이다. 교황청이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가서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던 시기이다. 1378년부터 1417년까지는 교회의 대분열 시기이다.

  3) 자신을 인문주의자로 자처한 타락한 교황이 나왔던 르네상스 교황의 시기이다. 십자군 전쟁 이후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 한명도 안 나왔다. 그래서 교황이 공공연하게 적그리스도라고 공격을 받았다.

  4)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던 상업의 발전 및 도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유럽 사회가 봉건 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발전하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유럽 사람들의 정신적 지평을 확장시켜 주었다.

  5) 4차 십자가 전쟁 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콘스타티노플에 있는 동방의 서적들과 학자들이 서방으로 유입되었다.

 

 

 

2. 서임권 논쟁에 대해 논하시오

    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전에도 황제들이 주교들의 임명에 영향력을 미쳤으며, 몇몇의 경우에는 직접 임명하기도 하였다. 프랑크 왕국에서 메로빙 왕조(486-751)와 칼롤링 왕조(751-987)의 왕들이 그들의 영토 안에 있는 주교들을 거듭거듭 임명하였으며, 심지어 성직자와 교구민들이 선출하게 되었을 때도 왕들은 미리 자신이 수락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였다. 세속 권력의 영향력은 로마시대가 끝난 뒤에 세워진 대수도원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훨씬 더 명백하게 나타났다. 즉 국왕의 토지 위에 세워진 모든 것에 관할권을 갖는다는 사사상을 힘입어 왕이 대수도원장을 추천하는 것을 관례로 만들어 놓았으나, 단 수도원 총회에서 원장선출을 예외였다. 오토가들과 프랑크 왕조는 그러한 권한들을 굳게 보유하고 있었다.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은, 광대한 정치적 권한들을 왕으로부터 얻게 됨으로 해서 속세의 귀족 사회와 다를 것 없는 영적 귀족사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왕으로서는 그러한 성직들을 세우는데 있어 결정적인 발언권을 보유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러한 왕의 권한이 교회의 본질적인  권리들을 침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다 옛날에는 추천과 인준이 왕의 칙령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그러나 후기 카롤링 왕조시대에는 선거의 유무에 관계없이 실질적인 임명식은 군주가 손을 내밀고 후보자가 선서를 하는 근엄하고도 이례적인 의식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오토 1세 이후 가장 상투적이었던 전임자의 목장(牧杖)을 주는 것이었으며, 여기에 헨리3세는 「주교반지」를 하사하는 것을 덧붙였다. 의식 전체는 속세의 봉신(封臣)을 임관시키는 의식과 흡사하였다. 아울러 그 의식은 왕이 영적인 관할권은 물론 속세의 관할권마저도 주교 또는 대수도원장에게 수여한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11세기부터 그 의식은 investitura라는 용어로 불려지게 되었다.

 

  1) 독일 내에서의 논쟁

    이러한 체제에 대해 처음으로 단호한 반대를 보인 것은 11세기의 교회개혁가들이었다.

그들이 반대는 우선적으로 성직 매매제도에 대한 것이었으나 곧 다른 일들에 주어졌다.

훔베르트르 추기경은 그의 논문<Adversus simonicos>(1057-1058)에서 평신도 서임권 (즉 왕의 서임권)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였다. 1059년과 1063년에 로마에서 있었던 교회회의들은 평신도들에 의해 소직책들이 임명되는 것을 정죄하였다. 1060년 비인과 두르에서 열린 교회회의들은 주교구와 대수도원에 대하여서도 똑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1068년 밀라노 교구좌를 임명하는데 이러한 원리들은 그대로 실행되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전의 제도를 처음으로 실질적으로 타파한 것은, 그레고리우스 7세가 1075년의 사순절 교회회의에서 독일 왕이 가지고 있었던 서임권을 직접적으로 부인하면서 그러한 반대를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하인리힌 4세는 어쩔 수 없이 1076년 보름스 교회회의에서 그레고리우스를 폐위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보임으로써 교황에 맞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46년 동안 계속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레고리우스를 비롯하여 그의 계승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였다. 1080년의 로마교회회의는 원시 기독교 관례를 근거로 하여 성직자들과 교구민들이 주교를 선출할 수 있게 하게 위한 적극적인 규정들을 마련하였으며, 이로 인해 교황은 그러한 전출의 유효 여부에 대하여 결정적인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빅토르 3세, 우리 바누스 2세 그리고 파스칼리스 2세도 똑같은 견해들을 하인리히 4세와 5세에게 강요함으로 해서 얻었던 성과 이상의 것은 거두지 못했다. 서임권 논쟁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은 오히려 문필을 통한 논쟁들에 의하여 마련되었는데 이러한 논쟁들로 인해 영적 직책과 속세의 권한들은 구별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화해에의 시도들이 행하여 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몇 차례의 실패가 있은 뒤 그러한 화해의 노력들은 1122년 하인리의 5세와 칼리스투스 2세 사이에서 보름스 협약은 서임권 논쟁을 종식시켰으며, 독일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후대 관례의 기반을 이루었다. 보름스 협약에 의하여 주교 및 대수도원장 선출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에서는 아무런 왕의 개임이 없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독일에서는 왕의 조언을 받아 경쟁선거를 통해 왕 앞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협정은 왕과 교황 어느 쪽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결국 교황은 이 협정으로 인해 최대한의 이익을 취한 셈이었다. 1198년의 황제 선출이 있은 뒤, 성직자 선출에 대한 황제의 영향력은 - 특히 이노켄티우스 3세의  능숙한 수완 덕택에 - 그 만큼 증가되었다.

  2) 프랑스 내의 논쟁

    11세기 동안 프랑스에는 독일에서와 대부분 똑같은 조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임권 논쟁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에서는 독일에서처럼 많은 원칙상의 문제라든가 신랄한 투쟁은 없었다. 프랑스 주교들은 속세의 권한을 독일 주교들처럼 엄청나게 갖고 있지는 않았으며 그들과 똑같은 정도만큼 영적 귀족 사회를 구성하지도 않았었다. 또한 왕은 단지 주교들 및 대수도원장들의 일부에 대해서만 서임권을 주장하였으며, 대다수의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은 왕의 봉신(封臣)들에 의해 추천되어 초엽에 폐지되었으며, 자유로운 선출이 관례로 되어졌다. 그러나 12세기 말엽까지 그리고 그보다 훨씬 늦게까지도 왕들과 몇몇 지방의 권력자들은 주교 또는 대수도원장 선출을 허가하고 확인할 권리를 계속 주장하였으며 또 왕들과 몇몇 대 귀족들은 계속 주교나 대수도원장에게 세속 권한들을 수여하였고, 그러한 자리가 공석일 동안에는 교구 또는 대수도원의 세속적인 재산들에 대한 조세권을 주장하였다.

  3) 영국내의 논쟁

    영국에서는 개혁파가 성공을 덜 거두었다. 앵글로 색슨 및 네덜란드 출신 왕들 시대에 주교 및 대수도원장들에 대한 임명권을 왕이 가지고 있었다. 노르만 왕가의 왕들은 서임권과 충성의 서약을 채택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가 발한 평신도 서임 금지는 이곳에서 통하지 않았다. 영국 내에서의 실질적인 서임권 논쟁은, 확실한 그레고리우스 지지자였던 안셀무스가 1101년 영국으로 되돌아와서 충성의 서약을 거부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논쟁은 1107년 왕이 반지와 지팡이와 함께 서임식의 의례를 포기함으로써 끝이 났으나, 왕은 충성의 서약을 비롯하여 그의 전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다른 권리들을 계속 보유하였다.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은 교회법에 따라 선출하기로 한 스테파누스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선출에 대한 영국왕들의 동의는 계속 결정적인 요인으로 남아 있었다. 영국 성직자들은 심지어 후기에도 완전히 자유로운 선거권은 갖지 못하였으나, 반면에 이노켄티우스 3세는 존 왕에게 교황이 황제의 영향력을 나눠 가질 수 있게끔 허락하도록 강요하였다.

 

3. 종합적으로 알고 있는 종교 개혁의 근본적 원인, 동기를 서술하시오.

(루터, 츠빙글리, 칼빈등)

 

 1) 역사적 원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의 결과로써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公議會)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어 피사․콘스탄츠․바젤 등지에서 공의회가 열렸으나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무위로 끝났다. 한편 프랑스․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 국민 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운동이지만 근대국가의 성립이라는 정치적 변혁과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었다.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M.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派)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운동은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

 

 2) 경과

  ① 독일

   종교개혁 운동의 횃불은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면서 신학교수인 루터가 <면죄부(免罪符)에 관한 95개조 논제>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대학의 성(城)교회 정문에 게시함으로써 올려졌다. 이 항의문은 마인츠의 대주교(大主敎) 교회의 알브레히트가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판 면죄부에 대해 루터가 그 성사적(聖事的) 효과를 신학적으로 문제삼은 것이었다. 이것이 루터 자신의 예상을 넘어 유럽 전체에 파급되는 대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루터가 이와 같이 가톨릭교회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4,5년 전 그가 수도원 생활의 악전고투 속에서 바울의 ‘하나님의 뜻’ 이라는 복음을 재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인간의 영혼 구원이란 인간의 선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가장 깊은 근원은 구원문의 정확성을 둘러싼 루터의 내적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95개조 논제>는 경제적으로 로마에 의해 많은 수탈을 당하여 온 독일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문제가 일개 수도사가 제기한 신학논쟁에서 독일 국민 전체의 정치적․경제적인 문제로 확산되어 갔다. 당초 교황 레오 10세는 이 문제를 경시하였다가 문제의 해결이 어렵게 되자 유화책을 강구하기도 하였으나 루터는 1519년의 J.에크와의 라이프치히 논쟁 때 결정적으로 가톨릭교회와 정면대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 논쟁에서 루터는 보헤미아의 후스를 본떠 교황과 교회회의의 가류성(可謬性)을 주장하고 그 권위의 절대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20년 6월 드디어 루터에 대한 파문(破門)이 단행되었다. 이어 21년에 루터는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황제의 심문을 받았는데, 여기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관철하였다. 그는 심문을 받고 돌아가다 작센의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 곧 신성로마제국의 제후 가운데 황제의 선거에 관여할 수 있었던 7명의 제후) 프리드리히 현공(賢公)의 호의로 바르트부르크성(城)에 보호되어 1년에 걸친 체재 중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 루터역 성서는 문학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독일 국민의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사이에 비텐베르크에서는 21년 카를슈타트(본명은 Andreas Bondenstein)가 지도하고 있던 과격분자들이 급격한 혁신운동으로 이른바  비텐베르크소요 를 일으키고 있었다. 미사의 폐지, 평신도에 대한 성배(聖杯) 부여, 성상(聖像) 파괴 등은 개혁운동의 논리적 귀결이라 하나, 원래 보수적이었던 루터는 이를 급속하게 실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요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돌아온 뒤 진정되었지만 그 여파는 22년의  기사(騎士)의 난  농민전쟁(1524~25)으로 발전하였다. 이 무렵부터 개혁운동은 제2단계에 들어가 루터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재세례파(再洗禮派)와 싸우는 양면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에라스무스와의  자유 의지론 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인문주의와도 결별을 하여야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정치정세는 복잡하여서 신성(神聖)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독일과 에스파냐를 지배하고 있던 카를 5세는 로마 교황과 손을 잡고 근대국가로서 급속히 부상한 프랑스와 싸워야 하는 한편, 동방으로부터의 투르크의 침입을 경계하여야만 될 어려운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카를 황제는 독일 국내 제후(諸侯)의 지지를 필요로 하여, 루터에게서 일어나기 시작한 개혁운동을 일방적으로 억제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 국내의 정치세력을 양분하는 결과가 되었다. 황제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양파의 화해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 프로테스탄트측의 제후와 도시는 31년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고 하나로 뭉쳐서 황제 및 교황측과 대결함으로써 이윽고 독일은 종교전쟁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의 내전에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사이 루터파 교회는 점차 발전하여, 루터가 죽은 뒤  순정(純正) 루터파 와 멜란히톤을 지지하는  필리피스텐(필립파) 으로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독일 각지에서 꾸준히 성장하면서 확산되어 갔다.

 

  ② 스위스와 프랑스

   루터의 개혁운동이 면죄부에 대한 신학적 문제 제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 에 따른 복음의 신앙이라는 종교 고유의 문제로부터 비롯된 데 반해서, 츠빙글리에 의해서 시작된 스위스의 개혁운동은 성직자의 결혼, 육식의 자유, 화상(畵像) 철거 등 휴머니즘적 동기에 바탕을 둔 가톨릭적 미신타파 운동으로 일어났다. 여기에 용병제(傭兵制) 폐지와 독립운동이라는 정치적 성격이 첨가되었다. 츠빙글리는 종군사제(從軍司祭)로서 스위스 용병제의 부패와 비극을 체험하였다. 또한 그는 성지순례(聖地巡禮)나 면죄부 판매 등의 부패상을 낱낱이 보고 교회개혁의 필요성도 통감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개혁운동의 기치를 든 것은 1523년의  취리히 토론 이었는데, 이로써 그는 취리히의 콘스탄츠 주교구(主敎區)로부터의 독립과, 여러 종교적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싸움을 개시하였다. 또한 그는 세속의 정치적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유래하는 것이지, 교회를 매개로 해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속권독립론(俗權獨立論)을 주장하였다. 츠빙글리의 주도하에 개혁이 이루어진 교회는 뒤에 제네바의 칼뱅파(派) 교회와 합동해서 개혁파 교회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 특색은 성서주의(聖書主義)와 간소한 예배에 있었다. 그에 비해 루터파 교회는 성화상, 기타 예배양식에 있어서는 가톨릭적 요소를 존속시키고 있다. 양파의 차이점과 분리는 29년의 마르부르크 회담에서의 논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회담은 독일과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결속을 시도하기 위해 이미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던 성찬문제(聖餐問題)에 관해서 루터와 츠빙글리가 회담한 것이었는데,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성체(聖體)의 현존(가톨릭적 해석)을 고수하였고, 츠빙글리는 그 상징설(프로테스탄트적 해석)을 양보하지 않았다. 이로써 루터파와 개혁파가 형성됨으로써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2대 세력이 되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르페브르, 파렐 등의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르페브르는 루터에 앞서 성서적 개혁사상을 품고 있었으나 루터의 개혁사상이 프랑스 국내에 유입된 이래 소르본대학 신학부를 중심으로 찬부 양론이 격렬하게 일었다. 그러나 1521년 4월 소르본측은 결국 루터가 이단임을 단정하고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25년 파리 교외 모에서 있었던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의 모임이 탄압 해산되자, 지도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이 가운데 파렐은 제네바에 가서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그의 개혁운동은 뒤에 칼뱅에게 계승되었는데, 이 칼뱅을 통해 세워진 제네바 교회가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도하게 된다. 칼뱅은 처음에 에라스무스를 숭배하는 인문주의자였으나 루터의 개혁사상에 끌려 복음주의로 전환하였다. 그는 36년《그리스도교 강요(綱要)》를 출판함으로써 일약 복음주의의 지도자로 부상하였고, 탄압을 피해서 스위스의 제네바에 자주 들렀다가 파렐의 설득으로 개혁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개혁운동은 복음적 신앙의 자유가 방종으로 오해되어, 개혁운동자들을 정치적․도덕적으로 민중을 속박하는 자들로 간주한 세력들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하였다. 칼뱅은 한때 스트라스부르에 피신하여 그곳에서 프랑스인 난민교회의 목사로 일했으나 40년 초청을 받고 다시 제네바로 갔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제네바에 머물면서 제네바를 프로테스탄트의 일대 근거지가 되게 하였다. 칼뱅은 루터의 의인론(義認論: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주장)을 계승하였는데, 이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 복음주의의 기반에 서 있었다. 그러나 칼뱅은 구원을 받은 자는 하느님의 도구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하여야 할 것(실천주의)임을 강조한 점에서는 루터와 다른 특색을 지닌다. 이와 같은 신앙은 뒤에 퓨리터니즘(청교도주의)에서 현세의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스스로 하느님의 예정을 확정하려 하는 독특한 직업윤리를 낳았다. 이같은 직업관은 근대 자본주의 성립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③ 영국

    위클리프 때부터 로마 교황의 세력권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헨리 8세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완전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이혼문제에는 국왕의 개인적 사정뿐만 아니라 내외의 정치적․종교적 정세가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그리하여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 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그 교의 내용은 여전히 가톨릭적이었다. 다음의 에드워드 6세 시대에 들어서자 개혁정책이 단행되어 교회는 현저하게 칼뱅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의 치하에는 다시 가톨릭교회에 대한 복귀정책이 취해져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이같이 영국은 국왕이 바뀔 때마다 그 교회체제에도 크게 변동이 있어 오다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 국운이 융성해지면서 일단 안정을 되찾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간입장인 중도적 방향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철저하지 못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장로주의(長老主義)의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1세를 맞이하여 보다 철저한 개혁의 실시를 청원하였으나 이들의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탄압을 받았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었던 개혁에 대한 기대는 잉글랜드 대 스코틀랜드의 전쟁을 계기로 촉발하여, 드디어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을 정점으로 하는 청교도혁명에 이르렀다. 이 혁명은 크롬웰의 주도하에 수습되었으나 이 혁명을 계기로 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파가 생겼다. 오늘날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청교도혁명으로 생긴 여러 파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3) 역사적 의의

   종교개혁은 루터의  하느님의 뜻의 발견 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교의 혁신운동이었으나,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도 세계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근대 세계와 근대인이 탄생하였다. 종교개혁 후에는 계몽주의(啓蒙主義)가 일어나, 언뜻 비종교적 합리주의가 근대사회의 특징이 된 것 같이 보였지만, 근대인을  마술 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킨 것은 단순히 자연과학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합리적․과학적 태도를 표출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다.

 

4. 경건주의에 대해 논하시오  

  경건주의의 기원은 17세기의 독일에서 찾을 수 있는데, 특히 경건주의는 역사상 기독교에 깊은 영향을 주었는데, 당시에 독일은 30년 전쟁의 여파로 정통적 교회의 대부분이 그 복음적 생동성(생명)을 잃어 버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파 목사인 스페너(P.J.Spener, 1635~1705))가 라틴어로 소개된 소책자 [경건을 동경함](Pia Desideria)을 통하여 기도와 성경 공부와 순결 등을 강조함으로써 경건주의 운동을 촉발시켰다. 스테너는 당시 개신교 교회의 형식주의적 냉랭함에 마음이 걸려 다음과 같은 5가지의 시정책을 제시하였다.

    (1) 하나님 말씀의 올바른 사용

    (2) 영적 제사장의 올바른 수행

    (3) 복음 전도

    (4) 토론에서의 사랑의 정신 구현

    (5) 신학도들의 경건 훈련

   이러한 스페너의 경건주의적 영향은 18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신앙적 부흥운동(감리교)을 동반했으며, 미국에서는 이 경건주의가 죠나단 에드워드와 같은 칼빈주의자와 합하여 신생국가의 교회에 큰 부흥을 가져왔던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기풍이 19세기와 20세기의 무디(D.L. Moody)의 경건주의적 경향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7세기 독일에서 발흥한 경건주의 운동은 19세기에 이르러 초창기에서처럼 큰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했지만 비텐베르그(Wittenberg)와 바젤(Basel)을 중심으로하여 그 당시 만연되었던 합리주의적 사고에 젖어 성경 비평을 일삼던 급진 신학자들을 비판하는 새로운 양상이 전개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상술한 장점과 함께 숱한 단점을 노출시키기도 했음을 관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경건주의의 단점을 기술하면 아래와 같다.

  (1) 경건주의의 체험에 대한 강조는 쉽사리 주관주의 또는 신비주의에까지 전락케 되는 위험을 주고 있다. 때로는 내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면, 개인의 주관적 체험과 경건한 감정을 강조한 프리드리히 슬라이엘마허(Friendrich Schleirmacher, 1768~1834)와 그 일파들을 통하여 주관주의 신학과 인본주의가 대두하게 된 것이다.

  (2) 경건주의에서는 감정이 강조된 나머지 지성의 역할은 막대한 타격을 밭았다. 결국 경건주의는 영력과 지력을 균형 있게 유지하지 못했다. 그 결과 경건주의는 신학적 세력으로서 비교적 보잘 것 없는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아울러 과학과 철학 등 모든 방면의 학문들을 항상 혐의의 눈초리로 본다.

  (3) 경건주의는 정치, 사회 혹은 노동의 분야에 대한 기독교의 막중한 의무를 등한시한다. 경건주의자는 기독교가 단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한도 내에서만 사회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교육이나 과학 혹은 경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답은 요구하지 않는다.

  (4) 경건주의는 종종 교리를 무시하고 실제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 교리적 무관심이 W.C.C에 나타난 에큐메니칼운동(Ecumenical Movement)의 발달에 한 몫을 담당하였다. 지금도 이것은 그 운동에 교리적으로 폭을 넓게 가지는 정책에 현저하게 작용한다. 그것은 또한 경건주의적인 운동으로 신학적인 탈선과 변태로 흘러가도록 계속 방조한다.

  (5) 경건주의는 역사적으로 "교회 내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를 배려하는 경향이 있어왔으며, 영적인 교만에 빠질 위험성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6) 경건주의는 성경 읽기와 기도와 교회 출석을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정의를 하나의 윤리적 생활로 한정하여 의식적으로 교회 안에 신자를 장려한다. 그리하여 주초 금지를 사랑과 봉사의 책임적인 삶보다 더 큰 비중을 두게 한다.

 

 

5. 재세례파의 기원에 대해 논하시오

 

  재세례파와 급진적 종교개혁의 구별 급진적 종교개혁은 여러 가지 기원이 있지만  재세례파는 하나의 기원이 있다.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와 같이 개혁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서 그레벨(Conrad Grebel), 만쯔(Felix Manz), 후프마이어(Balthasar Hubmeier), 이러한  사람들이 츠빙글리의 온건한 개혁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특별히  유아 세례의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는데 처음에 츠빙글리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나중에 입장을 바꾸어서 유아세례를 지지하였다. 1519년 1월  18일 주 정부에서1525년 1월  18일 주정부에서는 모든 아동들에게 유아세례를 행하라고 한다. 그러자 1525년 1월 21일 만쯔(Felix Manz)라는 사람의 집에서 블라우록(George Blaurock)가 '내가 어렸을 때 받은 세례는 세례가 아니었다' 라고 주장하였다. '신앙과 지식에 근거한 참된 크리스챤 세례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레벨(Conrad Grebel)이 블라우록(Blaurock)에게 다시 세례를 주었다. 그 다음에  블라우록 (Blaurock)이 거기 참석한 15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 재세례파의 『후터파 연대기』라는 책에서는 여기에서부터 재세례파가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참석한 세 사람은 모두 금방 죽게 된다. 그레벨은 1526년 흑사병으로 죽고, 만쯔는 익사형에 처해져서 죽었고, 블라우록은 1529년에 화형당하였다. 결국 재세례파는 시작되자마자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독창적인 사상가들이 사상을 전개하지 못했다. 박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상당히 파급효과가 컸을 것이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꾸준히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갔다.

 

Ⅰ. 과정

 

 1. 재세례파의 확산

  1) 스위스 형제단(취리히의 재세례파)

   ①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믿는 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주장했다.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야지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② 국가교회에 반대해서 자유고백교회를 주장했다. 막스  베버나 에른스트 트뢸취에 의하면 이것은 church-type(☞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국교회는  있었고,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는 국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다)이 아니라 sect-type(☞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서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이다.

   ③ 이 사람들은 마태복음 18장에 따라 권징을 강조했다.  교회생활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권징, 치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배순서는 소박하게 정했는데 이것은  츠빙글리와 같다. 성례는 성경에도 집에서 떡을 떼었다는 말이 나오듯이 개인집에서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이다.

   ④ 이 사람들은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했다.  크리스챤은 군대에 가거나 관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정부가 박해를 하면 교회의 본래의 모습인 고난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⑤ 스위스전체로 확대된다. 특히 바젤에서 활동이 활발했다. 1529년 공개토론이후  재세례파는 금지되었다.

 

  2) 남부독일

   ① 아우구스부르크

    재세례파를 이끌어갔던 대표적인 사람은 Hut였다. 그는  스스로를 예언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이 참된 성도들(재세례파)을 박해하다가 터키(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멸망당 하리라고 예언했다. 이렇게 되면 무정부상태가 되는데 재세례파 신도들이 악한 관리들, 부패한 관리들을 처형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깨끗한 세상이 되면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새 세상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런 말을 하다가 붙잡혀서 아우구스부르크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에 갇힌 뒤 불을 지르고 어수선한 틈을 타서 도망가려 하였으나 불에 타 죽게 된다.

   ② Strassburg : Sattler이 주도했다.

    ㉠ 7개 조문

     그는 7개 조문을 만들었는데(1527년) 이것은 재세례파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실천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조 - 세례, 회심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가 소멸되었다고 믿는 자에게 세례를 준다. 2조 - 출교, 세례를 받고 죄를 지으면 출교조치했다. 출교는 성찬전에 내보내는 것이다. 3조 - 성찬, 세례를 받은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성찬이라는 말보다 떡을 뗀다는 말을 더 즐겨했다. 4조 - 교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과  구별되는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의 집단임을 강조했다. 5조 - 목회, 목사는 불신자에게도 좋은 평판을 들어야 한다. 6조 - 무력,  기독교인은 어떠한  경우도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이런 것을 평화주의 (Pacificism)라고 한다. 7조 - 맹세, 맹세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이 사람들은 결혼식때에도 맹세를 안한다.

    ㉡ Sattler는 1527년에 화형에 처하게 되고, 부인은 익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람이후의 지도자는 Hoffmann이었는데 이 사람은 1523년부터 루터의 영향을 받고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하는 순회전도자가 되었다. 1529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재세례파와 접촉을 시작하면서, 루터는 처음에는 종교개혁정신에 충실했지만 나중에는 종교개혁정신을 배반했다고 루터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고 1533년 최후의 심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533년  투옥되어서 최후의 심판을 보지 못하고 1543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2. 후터파 교회

   재세례파는 이렇게 박해를 받게 되니까 광야에 나가서 그들의  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지금의 체코지역에 있는 Austerlitz에 가서 신앙촌을 만들기  시작했다. 많은 재세례파가 모여들었는데 많을 때는  2만 명  정도가 광야에서 개간을  했다. Hutter가  공동체를 지도하였고 Hutter이후  야코프트라는  사람이  지도를  하게   되는데 이때   이 공동체는   Hutterite Community라고 불리어졌다. 이곳은 완전한 공산주의적 공동체였다. 이 2만 명 정도의 공동체를 지도하는 사람은 Bishop이었다.  그리고 200면 단위로  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였다. 이 200명 단위를 다스리는 사람은 말씀의 종(종교적인 면), 일상문제의 종(일상적인 면)이었다. 교회로 보면 목사 집사와 같은 것이다. 이 공동체에 들어오는 사람은 일체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재산을 이 공동체에 다 바쳐야  했다. 그리고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공동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독방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공동식사를 하였다. 식사가 끝나면 들판에 나가서 일을 하든지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하든지 위 에서 정해 주는 대로 일을 해야 한다. 과음, 과식을 금지시켰다. 아이는 2,3살이 지나면 기숙사로 보낸다. 이렇게 하면 가족과의 인연을 끊게 되고 하나님  아래서 한 형제요 한 자매가 된다고 주장했다. 결혼을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보았다. 결혼을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을 할 수는 없고 이 공동체를 떠나면  된다. 이 공동체에 들어오면 자신이 밖에서 무엇을 했든지 간에 육체적인 노동을 해야 한다. 이  공동체에서 가장 큰 벌은 추방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재산의 공유가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를 교회의 표지로 보았다.) 왜 재산을 공유하는가 하면 에덴동산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신천신지를 기독교의 이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원교회는 재산을 공유했다고 주장했다. 삼위일체를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인들도 삼위일체를 본받아 재산을 공유함으로써 한 몸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를 부정하는 삶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것이다. 이  길은 결국 재산을 공유하는 길이다.

 

  3. M nster의 재세례파 운동

    M nster는 지금도 있는 독일의 도시이다. 원래 이 M nster은 Prince-bishop(영주이면서 감독)이 다스렸다. 이 Prince-bishop과 민중사이에 봉토세, 교회세 같은 문제로 마찰을 일으켰다.  그런데다가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만연하고, 물가가   상승했다. 이렇게   되어서 Prince-bishop이 다스리지를 못하고 자유를 주게 된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이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루터파가 들어가고,자유가 있기 때문에 재세례파가 들어갔다. 재세례파가 숫자가 많아지니까 이 도시를 장악하게 된다.  1534는 Jan Mattys가 집단세례를 주고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을 추방하고, M nster를 재세례파의 도시로 만들었다. 재산의 공동소유, 그리고 성경이외의 책은 다 금지하고, 소각했다. Jan Mattys는  구약에 있는 기드온처럼 소수의 군대로 주교의 군대를 멸하기 위해 갔다가 전멸당하게 된다. 이후 Jan Beukelssen이라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다. Jan Beukelssen은 구약의 12사사를 본떠서  12명의 사사를 임명하게 된다. 그리고 구약성서에 근거한 법을 만들었다. 엄격한  군대조직을 만들었다. 자신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혼자 사는  여자들은 다 결혼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여자 숫자가 더 많았으므로 일부다처제가 되었다. 서구의 영주제도, 그리고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일부일 처제의 가족제도, 서구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제도를 부정했다. 1535년 제후들의 군대에 의해서 이 도시는 함락을 당하게 된다.

   여기에 있던 재세례파는 거의가 다 살해되었다. 지도자들은 큰 조롱에 시체를 매달아 놓았는데 아직까지도 이 조롱이 남아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때부터 재세례파를 믿으면 뮌스터처럼  된다고 말했다. 카톨릭에서는  종교개혁을 믿으면 뮌스터처럼 된다고 말했다. 이들이 일부다처제를 주장한 이유는 구약에 믿음의 조상들이 일부다처제를 했다. 성경에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했는데 그냥 결혼하지 않은 채로 있으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되어 있는데, 일부일처제가 되면 부인이 성을 도구로 해서 남편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4. 메노파-온건 재세례파

   메노파에서 갈려나온 극단적인 재세례파는  아미쉬파이다. 현재 재세례파중에서  남아 있는 것은 후터파, 아미쉬파, 메노파의 세가지이다.Meno Simons라고 하는 사람은 그 형제 중 한 사람이 뮌스터에서 처형당했다. 처음에는 카톨릭  사제였으나, 루터파로, 나중에는 재세례파가 되었다. 그러나 혁명적 재세례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이런 점에서 혁명적인 재세례파를 비판하고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에 세례와 권징을 강조했다. 참된  교회는 참된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했다. 세상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천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다 비난을 받았다. 마침내는 미국으로 들어가 정착을 했다.

 

 5. 영성주의자들과 합리주의자들

  1) Denck

   그는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독일의 신비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 1525년 재세례파로 들어갔다. 그는 인간안에는 성경을 넘어서는 인간의 빛을 강조했다. 인간은 내면의 빛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길이다. 그는 보편구원론을 주장했다. 나중에 그는 재세례파에 환멸을 느끼고 재세례파를 떠나게 된다. 재세례파 가운데 가장 숭고한 인물이었다.

  2) Schwenkfeld

   그는 내적 기독교와 외적 기독교,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그는  성경보다는 성서의 영감을 강조했다. 교회의 세례보다는 영혼의 내부적 세례를 강조했다. 교회에도 내적교회와 외적교회가 있는데 외적교회에 나간다고 구원이 보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성례전에서도 빵이나 포도주 같은 것이  영적인 것을 매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몸도 천상의 몸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천상의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연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람은 츠빙글리보다 더 플라톤적이었다.

  3) Frank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불꽃이 있다. 영원한 로고스는 이 불꽃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성서라고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로고스로부터 말씀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안에 있는 모든 외적인 요소는 불필요하다. 그러면서 그는 보편구원론을 주장했다.

  4) Servetus

   스페인 사람이다. 회교도에서 기독교인이 핍박을 받는 것은 그들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다신교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부정하게 된다.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같은  것은 다 비이성적이다. 성경안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처음 그는  카톨릭지역에서 재판을 받고 이단으로 투옥되었다. 처형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가 탈출을 했다. 1553년  제네바로 가서 화형을 당했다. 칼빈이 만약 Servetus를 살려  준다면 제네바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5) Sozzini(Socinus)

   삼촌 넬리오 소치니이고, 조카 파우스토 소치니인데 이 두 사람이 만든 기독교체계였다.  회교도지역에서 삼위일체 때문에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다고  보고 삼위일체를 부정했다. 이들에게 종교는 이성적이다. 이성에 반하는 것은 종교적 진리일 수 없다. 종교는 도덕적 목적에 부합되어야 한다. 신론에 있어서는 단일 신론을 주장했다.  성부 하나님만을 인정했다. 성령은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감화이다. 성서에서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도論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재, 화육, 신성의 교리를 부정했다. 예수는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 중 한 아들인데 그 중에서 가장 사랑 받는 아들이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때부터 可死的존재로 태어났다. 즉 인간은 창조때부터 불완전한 존재였다. 그래서 타락과 유전을 부정했다. 인간이 회개하는 것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 없고 자신의 힘으로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기독교의 속죄론을 부정했다. 예수의 죽음을 우리에 대한 배상으로 보았다. 도덕적 범죄는 전가될 수 없다. A가 살인죄를 저질렀는데 B가 대신 죽는 것은 이들이 볼 때는 공의롭지가 않았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킴으로 받는 것이다.

 

Ⅱ. 결론 : 재세례파의 신학사상

  ① 신론 : 反삼위일체적 경향, 용어 자체를 부정한 사람도 있었다.

  ② 교회 : 성도들(거룩한 사람들)의 공동체임을 강조했다. 개교회  중심이었다.

           (교황이나 주교의 지배 밖에 있었다.)

  ③ 세례 : 믿는 자의 세례를 주장했다. 유아세례를 부정했다. 권징을 교회의 표지 중 하나로 보았다. 크리스챤의 삶이 강조되었다.

  ④ 국가와의 관계 : 정교분리를 엄격하게 주장했다.

  ⑤ 평화주의 : 어떤 경우에도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이상은 높았으나 현실적이 아니었다.

 

 

 

 

종교개혁~ 현대

1. 중세 후기의 기독교

 ① 인문주의

 ② 스콜라 신학

  ⇒ 이러한 지적 세력이 종교 개혁을 가능케 했다.

 

7. 종교 개혁 이전의 시대적 개관에 대해 논하시오

 

 1) 대중 기독교의 성장 :- 중세후기 이전까지 쇠퇴하였던 기독교가 중세 후기에 접어들면서 대중 기독교로 성장 시기

  ① 1450-1490 :- 독일의 기독교에서 이 시기에 미사수가 증가하는 모습으로 대중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② 15C에 평신도 그룹의 중심으로 신비주의가 융성하였다. 이것만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키기에는 한계성이 있다.

  ③ 독일을 중심으로 반 교황주의(Anti-Papalism)과 반 성직자 주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④ Lollard Movement :- 1395년 위클리프의 12개 반박문을 시작으로 위클리프의 후예들의 운동이다. 교계제도, 화체설, 성직자 독신제도, 교회세속 권력 보요, 사자를 위한 기도순례, 성상숭배, 교회 내의 미술품등을 반대하는 운동이다.  사제는 설교가 주요 임무이어야 하고, 모든 일반 신도들도 자신의 모국어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⑤ 15C에 특별히 민족주의가 대두되었다.

 2) 교리의 다원화 대두

  :- 다양한 신학이 대두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등 스콜라 철학이 발전하였고,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학자가 늘어나 정통과 이단을 학문적으로 논쟁하기 어려운 상태의 시기로 발전하였다.

 3) 교회 권위의 위기

   :- 정통에 대한 구별이 어려워졌다. 그레고리 11세 이후 교황청의 분열로 시작하여 1409년에는 세 명의 교황이 세워지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교황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공의회와 교황청 파의 대립이 있었다.

 4) 교회 내의 종교개혁의 문제점

   :- 먼저는 교회 율법 체계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성직자들의 도덕 관념이 추락하였다.

 5) Absenteeism :- 성직자가 자신의 교구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성직자의 부패에 개혁의 탄원하였다.(내용 :- 성직자의 교회 권력 남용, 성직자의 교육 필요, 교황 세속적 일에 덜 관심, 성직자들의 도덕성, 행정 간소화, 남용, 영성에 관심등이다.)

 6) 교육받은 평신도의 증가 :-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의 위증 문서가 발견되었다. 콘스탄니 위증 문서의 발견으로 성서에 대한 해석의 지식이 증가하였다.  인문주의 사조 영향으로 인간 중심의 견해가 발전하였다.

 

 

8. 중세말의 특징에 대해 논하시오

  1) 유럽 국가들의 탄생 :- 근대 시민의 집권시 왕정 국가 성립. 15C에 스페인의 통일이 이루어졌고, 프랑스는 서부 유럽중 중앙 집권식 왕정 국가가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졌고, 서임권 투쟁시 프랑스가 이태리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 이로 인해 민족주의적 감정의 대립이 형성되었다. 영국은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정치적, 문화적으로 뒤떨어 졌으나 18-19C에 유럽의 중심국가로 등장한다. 민족주의 경향이 강하고, 교황청이 영국의 민족국가로 발전시키는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교황의 영향이 미치지 않게 하였다. 독일은 한나의 단일 국가가 아닌 연합국의 형성이었다. 영주국가의 형태로 인해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교황청과의 마찰이 심하였다. 이러한 연합국의 모양을 띤 나라는 스위스, 네덜란드, 보헤미야등이 있다.

 

  2) 교황청의 붕괴 :- 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됨

   교황청은 재정적인 위기로 인해 엄청난 세금을 걷었다. 이로 인해 국민의 신뢰가 떨어졌고, 모든 헌금이나 세금은 중앙(교황청)으로 보내져 막대한 이득을 챙기게 되었다.

   ① Sinmony :- 성직자의 공석 자리 판매, 공석 교부 판매, 신분상승 기회

   ② 형식적인 예전제도 :- 교회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찬 집례가 형식화되었다. 즉 내용보다는 오직 하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당시 신비주의가(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인격적 개인적 관계) 대두되는 것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③ 영적 각성, 윤리, 도덕 문제의 약화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불신하게 되었다.

 

  3) 인쇄술에 발달  :- 자료 처리와 재료가 혁명적으로 값싸고 신속하게 이루어져 책의 보급이 많아졌다.  성서를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인쇄술의 보급으로 인해 성서를 볼 수 있게 됨으로 성서해석의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① 성서와 문헌 연구 :- 사제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성서 해석의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② 희랍어 신약 성서 출간 :- 에라스무스가 처음으로 신약성서를 발간한다.

   ③ 책의 보급으로 인해 당시 개혁자들의 사상이 어거스틴의 사상을 이어받게 된다.

 

 

9. 반 종교 개혁(카돌릭 종교개혁)에 대해 논하시오

 

 1) 트렌트 종교회의

   :- 루터의 종교 개혁운동의 여파로 로마 카돌릭 내에서 반종교개혁을 불러 일으켰다. 위기속에서 카돌릭은 스스로의 내부 개혁이 불가피했다. 개신교 세력에 대한 반동으로 그들의 활동을 저지하고 자기들의 세력을 회복하기 위한 것에 중점을 둔 회의였다.  

 * 카돌릭이 스스로 전제한 문제점을 네 가지

  ① 교황과 추기경들이 너무 세속적이다.

  ② 교회의 직분을 억기 위해 뇌물을 주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③ 수도원들의 규율이 너무 해이해졌다.

  ④ 면죄부 판매에 있어 너무 무질서하게 진행되었다.

 위의 네 가지 문제가 있음을 직시하고 트렌트 종교회의는 3차에 이어 이루어졌다.

   1) 제 1기 트렌트 회의(1545-1547) :- 교황 바울3세 주도하에 회의

    이 회의에서는 원죄의 문제와 칭의같은 큰 문제를 다루려 하였으나, 전염병으로 인해 무기한 연장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동등한 권위로 인정하였고, 7가지 성례전중 세례와 견신례를 재 확인하였다.

   2) 제 2기 트렌트 회의(1551-1552) :- 교황 줄리우스 3세 주도하에 회의

    이 회의에서는 성례전 중 성체성사, 고백성사, 병자성사가 논의 되었으며, 특히 고백성사의 성격에 대해 많이 다루어 졌다.

   3) 제 3기 트렌트 회의(1582-1563) :- 교황 피우스 4세 주도하에 회의

    이 회의에서 가장 많은 성과가 있었다. 성체성사와 미사성제, 사제서품, 혼인 성사에 관한 것이다.

 

  ※ 회의의 주요 내용

  ① 개혁파에서 주장하는 2가지의 성례전에 대한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을 재확인하였다.

  ②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인정. 외경은 전통적인 성서와 같은 권위를 지닌다고 함. 어머니 교회만(카돌릭)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고 주장.

  ③ 구약의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

  ④ 칭의론을 거부. 즉 인간은 자신이 구원받았는지를 모른다고 하여 그래서 선한 행위를 함으로서 하나님과 옳은 관계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함

  ⑤ 아담의 후손에게는 원죄가 있으나 세례로 씻김 받는다고 함.

  ⑥ 개혁파의 성찬에 대한 해석에 있어 공재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전통적인 화체설을 확인

  ⑦ 사제에게 구두로 고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회개한 가슴속의 죄들은 고행을 통하여 행해질 수 있다.

  ⑧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지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 안전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함.  그러면서도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할 수 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함.

  ⑨ 유아세례의 타당성. 성당숭배.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복되는 희생이라고 주장.

 ※ 트렌트 종교회의의 영향과 의의

   가장 중요한 것은 카돌릭내의 반성과 개혁이다. 개신교 개혁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카돌릭의 모순을 스스로 반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많은 악습이 폐지되고, 사제들에 대한 교육도 더불어 이루어졌다. 물론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만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카돌릭의 재흥에 큰 기반을 준 것은 사실이다.  이 트렌트 회의가 지금 현대의 카돌릭 형성의 기반이 된 것이다. 그리고 트렌트 종교회의를 기점으로 개신교와 카돌릭과의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졌다.

 

 2.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Augsburg, Religious Peace of)

   :- 독일의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55년 9월 25일 아우구스부르크의 한 만찬회에서 체결된 협약이다.  

  1)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의 과정

   :- 카돌록을 통한 종교적, 교회적 통일을 성취하려는 황제 카롤 5세의 목표는 작센 모르츠 공작의 탈퇴와 파소조약(1552)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파소조약에 의하여 제국의 교회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대중이 루터교 신앙을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카돌릭을 옹호하는 황제측과 모리츠 공작과 일반 대중들이 지지하는 루터교 신앙은 대립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러자 카롤 5세는 그것을 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협상에로 양보하여 전권을 그의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위임하였다. 아우구스부르크 만찬회가 1555년 2월5일에 열렸을 때 페르디난트의 노력은 종교문제보다는 국가의 화해의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고집하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은 교회회의와는 무관하게 먼저 종교적 화해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고집하였다.  반대파는 마지못해 승복하였다.  아우구스부르크의 추기경 오토 폰 트루트세스를 제외하고는 종교적 군주들은 영원히 지속되는 연속적이며, 확고하고, 무조건적인 화해가 체결되고 설립되어야 한다고 동의하였다.

  2)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의 의의와 한계점

   :- 먼저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는 유럽전체가 참여한 종교화의였다.  영주가 선택하는 대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어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러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를 평화 종교화의라고도 부르는데,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 후 이를 통해 프로테스탄트가 종교로 인정받았고, 종교에 관하여 자유를 보장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범위 안에 있는 한 완전한 평화 종교 화의는 아니었다.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로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것으로 인해 30년 전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3)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의 영향

   :-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가 제국에서 종교적인 통일이 무너진 후 거대한 두 종교집단 사이의 관계를 위한 조건을 만들었다. 그 다음세대는 이 지역에서 교회 기구의 교파적(신조)인 실행과 형태에서 특징을 드러냈는데, 특히 독일 개신교의 세속적인 교회헌법이 그렇다.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의 결정은 독일 카돌릭 교회뿐만이 아니라 개신교회의 구조를 특이하게 만드는데 깊은 영향을 주었고 오늘까지 지속되는 교파적인 특징을 갖는 독일의 지도를 만들었다.  그러기에 독일 역사에서 1555은 갈림해로 중요하지만 유럽 전 역사에서는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3. 예수회의 발전

   이 예수회의 창설자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1491-1556)이다. 그의 젊은 시절은 군사적인 업적으로 점철되는데 불란서군을 맞서서 싸우다가 한 쪽 발이 부러짐으로써 군사적인 업적으로 공로로 영광을 누려보고자 했던 꿈은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그는 순례자의 길을 떠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자신의 골방에 쳐박혀서 하루 7시간씩 기도하기도 하였다. 지신의 죄로 인하여 고민하다가 그는 갑자기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모든 죄를 낱낱히 고백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신학적 배움의 부족으로 자신의 일에 지장을 더 이상 초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수명의 추종자들을 규합하고 1534년 8월에 몽마르트르로 가서, 그곳에서 청빈, 청결, 교황에 대한 순종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1539년에는 영구조직을 마련하기로 결정하면서 자기들 가운데서 선입자를 선출해서 그에게 순종을 서약하고, 1540년 바울 3세는 새로운 종단을 인가하였으며 이그나티우스가 종단의 총수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예수회는 설립 당초부터 카돌릭교회의 개혁과 개신교들의 논박에 부심하고 있던 교황의 손안에서 강력한 도구로 성장하였다. 종단의 설립될 때부터 이그나티우스의 동료인 프란시스사비에르는 동양선교사가 되어서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나라에 예수회를 설립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학문에 대한 높은 존경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회를 따르고자 하는 회원들이 필수적으로 받아야 할 영적 훈련과 학문적 교육 프로그램을 ‘현장’에 명기하였다. 이것은 교실에서 논의할 도서목록과 학문연구의 주된 원저가 될 저서들을 기록하였다. 철학 분야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선호했으며, 신학에서는 신구약성경을 읽을 것이며, 성 토마스의 스콜라 이론을 읽도록 규정하였다.

 

10. 11, 12세기에 있었던 두 가지 성찬논쟁에 대해 쓰시오(성찬론을 찾으면 나옴)

 

▶ 화체설

   카롤링 왕조2)하에서 일어난 또 다른 신학 논쟁은 성만찬의 해석문제였다. 코르비의 수도승이었고 훗날에 성자가 된 라드베르투스의 on the Body and Blood of the Lord는 떡과 즙이 봉헌될 때 그것의 감각적인 속성은 그대로 있으나 그 본체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난 몸이요 갈보리에서 흘린 피라고 했다. 라드베르투스에 의하면, 이 변화는 신비롭게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의 감각은 보통 알 수 없고 잘 믿는 이의 경우 주님의 몸과 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대머리 찰스’가 라드베르투스의 글을 읽고 의심을 갖게 되어 코르비의 라트람누스(Ratramnus)에게 맡겨 이 성만찬문제를 해명케 하였다. 라트람누스는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몸이 진실로 현존하나 이는 성령을 통한 것이어서 그 어떤 물리적 몸의 현존이 아니라 하였고, 어떤 경우에든 성만찬식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역사적인 예수의 몸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주장하는 일이 있게 되었고, 이것이 교회에 통용되기 시작하여 1215년의 제4차 라테란회의에서 화체설이 확정되었다.

 

  - 아퀴나스의 성찬 이해

    아퀴나스는 성만찬에 관해서는 12세기 초반 라드베르투스와 란프랑의 화체설을 따른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화체설이 확정되었는바 아퀴나스는 화체설을 따랐다. 아퀴나스는 떡과 즙을 봉헌의 말씀으로 봉헌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아퀴나스는 역시 아리스토넬레스의 형이상학에 의거, 떡과 즙의 속성들은 불변하나 그것의 본질이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고 본 것이다. 아퀴나스는 갈보리 산상의 단회 유일 적인 희생제사로 만족하지 않고, 사제들에 의한 반복적 제사행위를 주장했다. 아퀴나스는 평신도들에게 떡만을 허락하고 잔은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7세기 동방 교회에서 유래하였다. 즉, 평신도들이 즙을 소홀히 여겨 땅에 엎지를 경우 그것이 불경스러운 일이라 하여 그들에게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동방은 지금까지 유아들도 성찬에 참여하나 서방은 12세기와 13세기에 이것을 금했다.

 

    고대교회에 있어서처럼 이 기간(950-1350)에도 성만찬(the Eucharist)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이었다. 이 성만찬은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 거룩한 나눔(holy communion), 미사(the mass)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이 기간의 카톨릭 교회에 있어서 이 미사예문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주로 로마예전이 서유럽에 많이 확산되었는데 지역에 따라 약간의 변모를 보였다.

    400여 년 동안에 일어난 성만찬의 주요 발전은 그 예전이 아니라 화체설, 평신도에게 잔을 금하는 것, 광범위한 출교의 실천, Corpus Chrtsti 축제, 봉헌된 성례에 대한 숭상 등이다. 화체설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확정되었으나 이는 고대에서부터 주장되었고, 스콜라주의 전통을 타고 논란의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다. 서방 교회는 공의회의 결정 이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평신도에게 잔을 금하는 것은 화체설과 관계가 있다. 사제가 떡과 즙을 봉헌하면 그것이 진짜 살과 피로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평신도들은 부주의로 말미암아 이 잔으로부터 피를 흘릴 염려가 있으니 그들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사제만 이 즙을 마신다고 한다.

Corpus Chrtsti의 축제일이 생긴 것은 13세기였는데, 그것은 성만찬 제정을 기억하고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1264년 교황 우르반 4세가 모든 교회로 하여금 이 날을 지키게 하였는데, 그것은 삼위 일체 주일 다음에 오는 목요일이었다. 이 축제일을 위한 예배의식은 아퀴나스에 의하여 고안된 것으로 매우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것은 교황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진행되다가 14세기 중엽에 와서 서유럽에 주로 확산되었다. 봉헌된 떡과 즙을 예배하는 행습은 우리가 논하고 있는 기간(950-1350)중 후기에 와서 널리 퍼졌다. 사용하고 남은 봉헌되었던 떡과 즙은 투명한 성체안치기 안에 넣어 두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와서 이 성체를 예배하였다.

 


1)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성자들의 모든 공로는 아무리 퍼 써도 남는다는 이론, 즉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아도 이 공로가 우세하다는 뜻임.

2) 카롤링 왕조는 기독교적 삶과 교회의 내적 삶과의 일치에 큰 공헌을 했다. 카롤링 왕조는 약2세기 동안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네델란드, 독일의 서부와 남부, 스위스, 오스트리아, 아마도 이태리의 반 정도를 포함하는 서유럽의 넓은 부분을 통치하였다. 아마도 피레네의 남쪽과 아드리아의 동부 해안까지 그 통치력이 미쳤던 듯하다. 카롤링가의 통치는 엘베강에서 바르세로나까지 북해에서 로마의 남쪽에까지 닿았다. 카롤링가의 권력은 샤를마뉴 때 절정에 달했는데, 800년 크리스마스에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족의 왕인 찰스 - 후에 샤를마뉴라 불려졌다 - 에게 “하나님께서 이 위대하고 평화스러운 황제에게 만수무강을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왕관을 씌웠다. 324년 전에 서유럽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이래, 그리고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은 지 304년이 지난 800년에 샤를마뉴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것이다. 교회의 지지하에 태어난 이 서로마제국은 기독교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 사실이다.

 

 

 

 

 

 

   출처: 협성대학교

 

 

 

 

 

 

 

 

출처 : 개혁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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