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겐 시대의 배경과 삶 (교회사)
오리겐은 그의 무쇠 같은 근면으로 말미암아 칼켄테로스라고 불렀고 그의 철저한 정신적 예리성과 지칠줄 모르는 인내로 말미암아 아다만티오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185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기독교인인(그리스인) 그의 양친으로부터 부드러운 사랑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성서교육을 받았다. 그의 부친이 순교한 후 어는 부유한 늙은 귀부인이 돈을 대주어 판네누스와 클레멘스에게서 신학을 공부했다. 또한 일반 학문의 공부에도 관심을 돌려 18세때 이미 데메트리우스 감독의 소원에 따라 당시 전체 기독교국의 대학인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의 탁월한 재능 보기 드문 교수능력, 그의 거룩한 행실은 그의 청강생들을 열광하게 만들었으며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 박해시 순교자들을 도왔던 용기와 뚝심은 기독자들로부터 높은 평판과 큰 위엄을 얻게 했다.이로써 그는 학문 활동의 긴 여정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중에는 가이사랴에서 했으며 여러 면에서 전임자들을 능가하였다.
오리겐은 정열, 헌신, 학식, 비범한 지적 능력을 과제로 삼았다. 그는 금욕주의적 생활 양식을 따랐고 평범한 교리학습자를 가르치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을 위해 세속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고급 수준의 반을 운영하면서 엄청난 활동을 펼쳤다. 초기에는 별로 저작활동을 펼치지 않았지만 점차 쓰는 것이 많아졌고 데메트이우스 감독과의 분열로 영원히 가이사랴로 가게되었을때 오리겐은 그의 저작계획에 따라 필경사를 많이 두었다. 수년이 지나자 그의 유명한 [헥사플라],주요한 교의 논문인 ]제일 원리], 몇가지 주석들, ]기도에 대하여], [순교],[반셀수스], 그리고 그의 즉흥 설교를 속기한 것에 기초한 [설교]와 같은 것이 나왔다. 249년 테키우스의 박해가 있을때 오리겐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후 몇년 더 살았지만 이것이 그의 건강을 해친것 같다. 그는 255년 두로에서 죽었다.
오리겐의 삶을 간단히 나타내자면 185년경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탄생, 202년경 부친 레오니데스가 순교하다. 215~220 집필과 출판을 시작하다. 250 투옥되어 고문당하다. 254 두로에서 죽다.
오리겐의 저술
오리겐은 다작의 저술가였으나 그의 저술의 대부분은 지금은 수할 수가 없으며 남아있는 것도 단지 번역으로만 남아있어 때때로 그것의 정설을 이용하기 위하여 복원되었다. 그의 주용 저술을 넷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경에 관한 저술]: 오리겐은 병행란에 히브리어 본문, 희랍적인 특징을 지닌 히브리어 본문 그리고 네권 이상의 희랍어 번역본과 함께 부피가 큰 구약성경을 편집하였다. 그는 또한 많은 주석(박학한 해설)과 설교(실천적이고 교화적인)와[스콜리아]를 썼다.
[제일 원리들](First Principles): 초기 교회에 있어서 최초의 조직신학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것은 네권의 책-하나님, 세계, 자유, 성경-으로 나뉘어져 있다.
[켈수스에 반대하여]: 켈수스의 [참된말씀]에 대한 오리겐의 답변이다. [참된말씀]은 170년 후반에 쓴 광적인 반 그리스도인의 책이다.
[실천적인 저술들]: 그는 [기도]와 [순교에 대한 가르침]을 썼다.
오리겐의 주된 신학적 저술은 [제일원리]이지만 [기도에 대하여]라는 그의 논문은 헌신이라는 특징적인 맥락에서 많은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논문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기도의 요점과 목적을 안내해달라는 친구 암브로스와 타티아나라는 여인의 요청에 의해 쓰여졌다. 오리겐은 이 질문에 답하면서 그의 사색적인 정신과 폭넓은 학자적 자질로 이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시라는 의미를 보존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항상 성서의 귀절을 인용한다. 실로 그가 [매우 완전하고 영적인 말]들을 쓰고 [복음서들에 기록된 기도들을]보다 분명하게 성명하도록 그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기도하면서 이 일을 착수한다.
오리겐의 신학
오리겐의 신학에 쓰는 정신은 그의 스승 클레멘트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 즉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행하던 철학사조였던 신 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는 철학자들의 가르침에 빠져 기독교 신조를 상실할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사도들과 교회의 정통에 어긋나는 것은 아무것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 하였다. 이러한 전통속에는 무엇보다도 우주 창조주이자 통치자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이에서 비롯되는 바 영지주의에 대한 부정이 포함된다. 두번째로 사도들은 예수그리스도 께서 모든 피조물들 이전에 잉태되셨으며, 그의 성육신을 통해 그는 계속 신성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이 되셨다고 가르쳤다. 오리겐은 성령에 관하여는, 성령의 영광이 성부와 성자에 못지 않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도들의 전통아 완전 명료하지는 않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사도들은 이 세상에서의 생활에 따라 잘래 영혼이 상과 벌을 받게 되며, 우리들의 육체는 최후의 부활을 통해 영원히 썩지않는 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오리겐은 우리가 일단 이처럼 중요한 교리들에 승복한 후에는 다른 문제들을 보다 자유스럽게 명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사도들과 교회의 전통은 우주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음으로 이 문제에 관하여는 자유스럽게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는 창조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오리겐 이전의 유태인들 학자들로 알고있었다. 그 중 한 장면에서 인류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그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고 표현되었다. 두번째 장면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후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드셨다고 되어있다. 첫번째 장면에 나오는 바 하나님의 행동을 묘사하는 희랍어 동사는 "창조하다"인 반면 두번째 장면에서는 "형성하다".혹은 "형태를 주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양자 사이에는 어떤 의미의 차이가 있을까? 현대 학자들은 이 두가지를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오리겐은 실제로 두 개의 창조가 있었기 때문에 두 개의 창조 장면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리겐에 의하면 최초의 창조는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것은 육체를 갖지 않은 영혼들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문은 "남자와 여자". 즉 성별없이 시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형성 하셨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오리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창조된 영혼들이 신적인 것에 관한 명상에 전념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일부가 명상을 게을리 하여 타락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제 2의 창조 사역에 임하시게 되었다. 두번째 창조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타락한 영혼들을 위한 임시의 처소를 마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가장 바닥으로 떨어진 영들은 악마들, 그리고 나머지들은 인간 영혼들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인간 영혼들-타락하여 선재하던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현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육체들을 만드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이들을 "형성하여"일부는 남자로 일부는 여자로 만드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인간 영혼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순수한 정신들로서-오리겐은 이들을 이지들이라 불렀다-존재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이전에 순수한 영적 존재로서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비록 오리겐은 그의 모든 주장들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역설했으나, 이부분은 플라톤주의적 전통에서 연유된 것이 분명하다. 플라톤 학파는 이미 오랫동안 이러한 주장을 해오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는 사탄과 그의 악마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고 있으므로. 이러한 사탄의 세력을 쳐부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들의 진정한 영적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보여 주셔야만 했다. 그뿐 아니라 사탄 역시 우리들과 같은 영적 존재들에 불과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므로 궁극적으로는 사탄까지도 구원받을 것이고, 따라서 일체의 피조 세계는 모든 존재가 순수한 전신으로서 존재하는 원래 상태로 귀환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 정신적 존재들은 그 때에도 여전히 전과 같은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므로 실상 새로운 타락, 새로운 물질세계,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타락, 구원,그리고 타락 이라는 순환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게 된다.
이러한 이론을 공부하면서 우리들은 오리겐의 정신적 사고의 규모에 경탄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 열렬한 숭배자들을 소유해 왔다. 그런데 우리들은 오리겐이 이 모든 이론들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 들여야만 하는 진리나 혹은 기존 교리를 대체할 신조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있는 가르침과 비교되어선 안될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의견으로 제안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또한 오리겐이 여러 가지 점에서 기독교 신자라기 보다는 플라톤주의자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오리겐은 이 세상이 보다 열등한 조물주의 창조라고 했던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교훈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는 역사와 아울러 물질세계가 죄의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특히 이점에서 오리겐은 역사의 존재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일부라고 파악하였던 이레니우스와 큰 대조를 이룬다. 또한 영혼들의 선재라든가 타락과 구원의 영원한 순환에 이르러서는 오리겐이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를 벗어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리겐은 희랍 철학에 완전히 익숙한 자였다. 그는 지도적인 이교 철학자들에게서 사사받았다. 어떤 이들은 그가 신플라톤주의 창시자인 암모나우스 사카스에게서 배웠다고 생각하나 확실하지 않다. 저스틴에서 클레멘트, 오리겐으로 옮아가면서 점점 더 확실하게 철학적인 관념에 열중함과 함께 점점 더 철학에 대한 적대감이 증대된 것은 역설적인 현상이다. 철학적인 요소는 특히 오리겐에게서 뚜렸했다. 그의 정통성은 그의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어오고 있다. 4세기에는 반 오리겐주의자 운동이 강력했다. 6세기에는 공식적으로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희랍 신학의 가장 영향력있는 교부로 남아있다.
오리겐의 목표는 정통 기독교에 충성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저술의 대부분은 성경을 힘써 성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이것까지도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오리겐은 풍유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는 성경을 적절하게 이해할 우 없다고 생각했다. 보다 심오하고 감추인 의미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것은 풍유적 해석방법에 의해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풍유적 방법을 오리겐이 말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희랍인들이 신들을 공적에 대한 재미없는 전설에서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내기 위한 시도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A.D 1세기에 유대인 필로가 구약 성경에 이것을 최초로 사용했다. 그의 주된목적은 구약성경을 희랍사상에 일치시키고자 한것이었다. 오리겐의 접근 방법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성경이 문자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때에 문자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또한 희랍 사상과 조화를 모색하기 위하여 풍유적 해석 방법을 채택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이것을 [의식적]으로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본문의 참되고 합리적인 의미를 끌어내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그가 "희랍 문화에 눈이 멀었다"는 4세기의 비난은 진실되다. 한 이교도 적대자는 그가 "플라톤적 관념을 이질적인 신화에 이입했다"고 비난했다. 즉, 플라톤주의를 성경의 뜻으로 해석했다고 비난했다.
오린겐은 그가 정통의 시금석으로 택했던 사도적 전통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들은 모든 선지자들에게 명백한 용어로 어떤 교리들을 말했다. 오리겐은 이것들을 열거했다. 이것들은 신학을 위한 기초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명하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런 교리들과 모순되자 않는 한 이것들을 제안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색에 대한 개방은 비록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과는 날카롭게 대립되고 있지만 클레멘트를 따르고 있다. 클레멘트에 있어서와 같이, 기초는 기독교적이면서, 반면에 보다 발전된 경향은 희랍적이다. 구원에 관한 그의 겨리에서 이점을 분명히 보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죄에서 속량하셨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대중을 위한 가르칠 뿐이다. 왜냐하면 일반 대중은 고도의 원리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리겐의 진정한 관심은 다른데 있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것 즉 하나님을 사색함으로 [신화]되는 있다. 영혼은 변화의 세계로부터 실제적 존재의 영역으로 초월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씀이 이런 능력을 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지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예수를 초월하여 영원한 말씀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사색함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이런 관념은 철저히 희랍적이며, 성경적인 기독교보다 영지주의와 더 공통점이 많다.
오리겐에서 정통과 이단사이의 갈등은 그의 삼위일체 교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군주신론(성부가 곧 성자라는 이론)에 대해 맹렬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삼위되심을 과소평가하는 어떤 이론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은 영원히 [세 위격들], 즉 개별적 존재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하나님의 삼중적 특징, 곧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이지 후에 만들어진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제 2위를 [성자]로 부르는 것은 그가 어떤 특별한 순간에 [태어난] 또는 [출생한]또는 [생겨난]분임을 암시할지도 모르겠다. 오리겐은 반대로 성자는 성부에 의해 영원히 생겨나거나 또는 출생하였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영원한 과정, 또는 영원한 관계이다. 이것은 한 번에 끝난 사건이 아니며, 심지어 영원 전에 한번 일어났던 어떤 일도 아니다. 이것은 언제나, 영원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정통을 벗어났다. 그러나 거기에 다른 면이 있다. 오리겐은 하나님의 삼위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삼위는 [등급을 가진]삼위일체였다. 즉 성부는 성자보다 더 높고 성자는 성령보다 더 높다. 오직 성부만이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자는 성부와 동일하지만 낮은 계급에 있다. 만일 성부가 하나님이시라면 성자는 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리겐의 삼위일체는 3계층의 삼위일체, 즉 다른 세 계급의 하나님이다. 그 다음 세기에 아리우스는 이것을 더 진전시켜 오직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피조물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오리겐은 정통적인 것으로 보여지는 영원한 출생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논증했다. 만일 아들의 출생이 영원하지 않다면 성부는 성자를 출생케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이 두 점 모두는 하나님과 부합되지 않음으로 성자의 출생을 영원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오리겐은 또한 이 똑같은 논법을 창조는 영원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용했다. 그는 말씀 뿐만 아니라 모든 이성적 존재들도 영원부터 존재했다고 믿었다. 어떤 순간에 그들은 하나님을 사색하는 것에서부터 타락하여 그들이 악해진 정도에 따라 천사들, 인간들, 그리고 마귀들이 되었다. 이 물질적인 우주는 이 타락한 존재들을 위해서 창조되었다.(창세기1~3장에서 우주가 타락후에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약간 어려운 풍유적 해석 방법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원의과정은 타락의 역순이다. 이성적 존재들이 하나님을 사색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성적 존재들을 도외시 하고서는 오리겐의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할 우 없다. 존재의 네 계층이 있는데,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이성적 존재들이 잇다. 각 계층은 보다 높은 계층의 존재를 소망한다. 그래서 성자는 성부의 신성을 기대하고 우리는 또한 성자를 기대함으로 말미암아 [신화]되어진다(성령은 실제로 종종 무시된다).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 사이에 어떤 단계에도 과도한 불연속성은 없다. 대신에 거기에는 위로부터 아래로 신성이 퍼진다. 이런 체계의 영원한 출생에 대한 개념을 앞질렀다.
오리겐은 이단이었는가? 그의 철학은 단지 "일반 대중을 위한 플라톤 주의였는가?" 이러한 무제들은 언제나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두가지 점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에게는 정통이 되고자 하는 열렬한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천적 믿음,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헌신이 있었다. 동시에 그의 실제 신학은 전적으로 플라톤 주의로 가득 찼다. 그의 신학 체계에 있어서 플라톤 주의는 쉽게 제거될 수 있는 군더더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 골조와 같은 것이다. 이 골조를 제거하면 그의 전 신학 체계도 허물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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