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1·6교실/교회사1교실

[스크랩] 바티칸 박물관의 콘스탄티누스의 방

류성련 2014. 7. 26. 01:19

 

바티칸 박물관 / 라파엘로의 방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

 

 

라파엘로의 방(Stanze of Raphael)으로 알려진 4개의 방들은,

 

교황궁(Pontifical Palace) 오른쪽 2층에 자리하고 있다.

 

교황 율리우스 2(Pope Julius II 1503-1513)는

 

교황직에 선출되어 보르지아(Borgia)의 교황궁(Pontifical Palace) 2층에

 

1400년대 중엽에 마련된 4개의방에 새로운 거처를 정한다. 

 

이 방들에는 라파엘로(Raphaelo)의 스승인 페루지노

 

(Pietro Perugino, 1450-1523)와 피엘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라파엘로의 방(Stanze of Raphael)]

 

 

자신의 새로운 거처를 장식할 새로운 벽화를 그릴 화가로 당시

 

 

성 베드로 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의 공사

 

총감독관이었던 브라만테(Bramante)는 당시 약관의 20세의 청년

 

라파엘로(Raphaelo)를 추천한다.

 

이에 반신반의 하던 교황 율리우스 2세(Pope Julius II)

 

'서명의'이 젊 라파게 의뢰를 한다.

 

그리고 이 결과에 매우 만족한 교황은

 

기존에 있던 파엘로의 스승인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1523)와

 

피엘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등의

 

벽화를 다 지우고 새로이 벽화를 제작할 것을 주문한다.

 

 

 [라파엘로의 방(Stanze of Raphael)]

 

 

이런 연유로 1508년에서 1512년에는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

 

1512년에 1514년에는 엘리오도르의(Stanza d'Eliodoro)의

 

벽화를 제작하는데,

 

1514년에 바티칸 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공사 총감독이었던 브라만테(Bramante)는 자신의 뒤를 이을

 

공사 총감독관으로 당시 31세이던 라파엘로(Raphaelo)를 임명하고

 

그 다음해인 1515년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바로 이 시기에 라파엘로(Raphelo)는 바티칸 대성당의 신축 공사 총감독관을 하며

 

이 벽화들을 진행했던 것이다.

 

1514년에서 1517년까지는 보르고 화재 방(Stanza dell'Incendio di Borgo),

 

그리고 마지막으로 1517년에서 1524년까지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벽화를 진행하게 된다.

 

그러던 중 1520년 4월 6일에는 라파엘로(Raffaello)가

 

37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벽화 작업은 당연히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라파엘로의 제자 쥴리오 로마노(Giulio Romano)와

 

지안 프란체스코 펜니(Gian Francesco Penni)에 의해

 

작업은 완성된다.

 

 교황 율리우스 2거처로 쓰여지기 위해 만들어진 이 방은

 

 라파엘로 방( Stanz di Raffaello,)으로 불리운다.

 

이 4개의 방은 보르고 화재의 방(Stanza dell'Incendio di Borgo),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

 

엘리오도라의 방(Stanza d'Eliodoro),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Sala di Constantino)으로 나뉜다.

 

 

 [라파엘의 방(Stanze of Raphael) 중 첫번째,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

 

 

입구에 들어서며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방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Sala di Constantino)이다.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 307년)으로 박해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교회의 시대를 열게 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2.27 - 337.5.2)의

 

중요 사건들을 묘사한 프레스코(Fresco)들이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에는 입구 바로 오른쪽 벽에는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가 있고 창문 전면 벽에는

 

밀비오 다리의 전투,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가 있다.

 

천장에는 1585년에 토마스 라우레티(Tommaso Laureti)에 의해

 

그려진 그리스도교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라는 그림이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을 주제로 표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2.27-337.5.22)는

 

 중기 로마 황제(재위 306 - 397)로 흔히

 

그리스도교 역사서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Great Emperor Constantinus)로

 

통칭하며,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콘스탄티누스( St. Constantinus, Μέγας Κωνσταντίνος)'로 불린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콘스탄티노 대제(Sanctus Constantinus Magna)로 불린다.

 

396년 7월 25일 브리타니아(Brithania)의 요크(York)에서 병사들에 의해

 

군주로 추대되어 죽는 날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을 주제로 표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Great Emperor Constantinus)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했다.

 

또한 교회의 압류된 재산을 돌려 주고 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정했다.

 

그는 또한 325년 제1차 니케아공의회(1st Concilium Nicaenum Primum)를

 

소집하여 그리스도교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을 주제로 표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1)는 272년

 

또는 273년 2월 27일 로마제국의 다뉴브 강(River Danube)남쪽

 

모에시아 수페리오르(Moesia Superior) 속주,

 

현재의 세르비아(Serbia)와 불가리아(Bulgaria)의 나이수스((Naissus)에서

 

장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와

 

그의 첫째 부인 성녀 헬레나(St. Hele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성녀 헬레나(St. Helena)는 여관 주인의 딸로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1)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을 주제로 표현하였다]

 

 

293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막시미아누스 황제(Emepror Maximianus)의

 

신임을 받게되어 승진을 거듭하며

 

로마 제국 서부의 총독으로 갈리아(Galria) 지역,

 

지금의 프랑스, 남독일, 스페인 등의 지역을통치하게 된다.

 

 이 임명에 앞서 황제는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새로 부임하는 조건으로 그의 부인 헬레나(Helena)와

 

이혼하고 막시미아누스 황제(Emepror Maximianus)의 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과,

 

아들 콘스탄티노(Constantino)를 볼모로

 

 소아시아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 터키 이즈미트(Izmit, Turkey)에 있는

 

리지니오(Riginio)의 저택에 남겨 둔다는 것을 제안한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을 주제로 표현하였다]

 

 

이에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헬레나를 버리고

 

 제국 서방 구역의 정제인 황제(Emepror Maximianus)의 딸

 

테오도라(Theodora)결혼을 한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가

 

사두정치 체제(테트라키아, Tetrarchia)에서

 

2명의 부제 중에하나로 임명된 직후 젊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의 휘하로 들어가,

 

소아시아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 터키 이즈미트(Izmit, Turkey)에서 복무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305년 2명의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가 은퇴하고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의 뒤를 이어 서방의 정제로 승격하게 되자,

 

콘스탄티누스는 즉각 니코메디아((Nicomedia)를 떠나

 

갈리아(Galria)에 있는 아버지의 휘하로 들어갔다.

 

정제의 바로 밑의 자리인 부제에는

 

 세베루스(Seberus)와 막시밀리아누스 다이아(Maximianus Daia)가 추대되었는데

 

사실상 부제의 위치 즉, 정제의 아들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의 아들인

 

 막센티우스(Maxentius)는 권력에서 소외된 셈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를 주제로 표현하였다]

 

 

1년 후인 306년 7월, 브리타니아(Brithania) 원정에 나섰던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에보라쿰(Eboracum),

 

지금의 요크(York)에서 병사하자 그의 휘하의 장병들은

 

즉각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병사들에 의한 콘스탄티누스의 정제 승계는

 

 당시 사두정치 체제(테트라키아,Tetrarchia) 아래에서 적법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Gallerius)에게

 

자신의 권좌승계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였고,

 

갈레리우스는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영토를 승계하도록 하되

 

부제로 인정하고 서방 정제로는 세베루스(Seberus)를 임명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를 주제로 표현하였다]

 

 

제국 내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관할 구역은

 

이베리아(Iberia) 반도의 히스파니아((Hispania), 브리티아(Brithia),

 

갈리아(Galria),그리고 게르마니아(Germania) 지방이었다.

 

 이로써 그는 중요한 라인 강(River Rein) 방위선의

 

강력한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갈리아(Galria) 지방은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 중에 하나였으나

 

 이른바 제3세기의 위기(3rd Century Crisis) 동안에

 

인구는 소실되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306년부터 316년까지 10년 동안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라인 강 방위선을 굳건히 하고

 

갈리아(Galria) 지방을 재건하는데 힘썼다.

 

당시 그의 주요한 거주지는 트리어(Trier)였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를 주제로 표현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지역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면 즉각적이고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붙잡힌 포로들은 원형경기장에서 모두 살육하는 무단정치를 과시했다.

 

이러한 그의 전략이 나름대로 효과를 나타내어서

 

그의 통치기간 동안 라인 강 방위선은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한편 로마 국내정치는 사두정치(테트라키아,Tetrarchia)의

 

한계를 드러내며 복잡한 내전 상황으로 빠져들어 갔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의 프레스코,

 

덕목(Virtue)를 주제로 표현하였다]

 

 

307년 막센티우스(Maxentius)가 로마에서

 

 사두체제(테트라키아,Tetrarchia)와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면서 봉기하고

 

막시마아누스(Maximianus)도 은퇴 생활에서 복귀하여 아들을 도왔다.

 

 서방의 정제인 세베루스(Seberus)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진격하지만 선제인 막시미아누스가 지휘하는 군대에 궤멸당하고

 

 세베루스는 로마로 잡혀가 자살을 강요당해 죽는다.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nstantino)]

 

 

이후 동로마의 정제인 갈레리우스(Galerius)가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단죄하기 위해 군사행동에 들어갔지만 실패하고

 

결국 선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그리고 갈레리우스(Galerius) 세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서방의 정제에 리카니우스(Licinius)를 임명하기로 했다.

 

이에 막센티우스는 불만을 품게 되고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Maximianus)와 논쟁끝에 갈라서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

 

 

입구 바로 오른쪽 벽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337년 죽기 바로 직전에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 터키 이즈미트(Izmit, turkey)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죽기 직전까지 세례를 받는 것을 미루어서 현세의 죄를 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

 

 

아들과의 불화로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는

 

 트리어(Trier)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와서

 

 자기의 딸파우스타(Fausta)와 혼인을 조건으로 합류했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야만족을 격퇴하러간 틈을 타

 

쿠테타를 시도하다가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콘스탄티누스에게 공격당하고 310년 마실리아((Massalia),

 

현재의 마르세유( Marseille)에서 죽음을 맞았다.

 

311년 갈레리우스(Galerius)가 죽자 리키니우스(Licinius)가

 

동방의 정제로 취임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독자적인 황제의 권리를 주장하는

 

 막센티우스(Maxentius)를 처단하기 위해 출정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세례(Baptimism of Constantine) 그림 중 오른쪽 일부]

 

 

312년 초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고

 

 투린((Turin, 토리노, Torino)과 베로나(Berona)에서

 

막센티우스(Maxentius)군을 차례로 무찔렀다.

 

이후 벌어진 유명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Battle of Milbius Bridge)로 결국

 

막센티우스(Maxentius) 군은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에게 대패하고

 

 막센티우스(Maxentius)'는 전사한다.

 

이 전투로 인해 제국 서방에서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유일한 강자이자 정제로서 군림하게 된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멜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에서의 대승으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313년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Licius)와

 

서방의 정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밀라노(Milano)에서 만나

 

 '콘스탄티누스의 동생 콘스탄티아(Constantia)를

 

 리키니우스(Licius)에게 결혼시켜 서로의 동맹관계를 확인하고

 

제국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공인하게 되는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도 여기서 발표된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이 회담은 짧게 끝났지만 동방의 부제인 막시미아누스 다이아(Maximianus Dia)가

 

보스포루스 해협(Bosporus Strait)을 건너

 

리키니우스(Licius)의 영토를 침범하였다.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의 공격을 격퇴하고 동방에서 일인자의 지위를 굳혔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이로써 제국의 서방과 동방에 두 명의 황제만 남게 되었고

 

그들의 동맹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두 정제의 세력은 서로 충돌하였는데 315년 키발라에 전투(Battle of Kibalae),

 

317년 마르디아 전투(Battle of Mardia)에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승리하게 되고 두사람은 휴전협정을 맺었다.

 

이후 몇 년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아들 크리스푸스(Chrispus)의 도움으로 야만족과의 싸움에 전념한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324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이제 로마의 패권을 놓고

 

일대 결전을 벌인다.

 

아드리아노폴리스(Adriapolis)에서 벌어진 육상전에서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의 승리로 끝났고

 

이어 비잔티움(Byzantium) 근처의 해전에서도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크리스푸스(Chrispus)가 이끄는 콘스탄티누스의 해군이 승리했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이어 소아시아에서 벌어진 지상전에서도

 

 리키니우스는 패하고 항복하여 강제로 테살로니카(Thessalonica)로 은퇴당했고

 

이듬해 반란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로마 제국의 권력과 부와 문화 등의 중심지는

 

 급격하게 동 로마제국(East Roman Empire)으로 이동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비잔티움(Byzantium)을

 

 자신의 도시로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원로원과 로마와 같은

 

공공건물을 지어 새로운 로마(Nova Roma)로 불렀다. 

 

그의 사후에 비잔티움(Byzantium)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City of constantinus)라는 뜻의

 

콘스탄니노폴(constantinopol)로 이름이 바뀌었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된 계기가 된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326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는 아들 크리스푸스(Chrispus)가

 

아내 파우스타(Fausta)와 간통했다는 죄목으로 체포하여

 

고문 끝에 처형했다

 

크리스푸스(Chrispus)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지만 재판도 없이

 

 29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아내 파우스타도 목욕을 하다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죽였다.

 

 그의 시신은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겨져서 매장되었다.

 

그의 권좌는 파우스타(Fausta)가 낳은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ne Ⅱ, 316-340)와 콘스탄니우스 2세

 

(ConstantiusⅡ)에게 이어졌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콘스탄티누스 대제(Great Emperor Constantinus)는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했다.

 

 또한 교회의 압류된 재산을 돌려 주고

 

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정했다.

 

그는 또한 325년 제1차 니케아공의회(1st Concilium Nicaenum Primum)를

 

소집하여 그리스도교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비록 311년 선제 갈레리우스(Gallerius)가

 

이미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과 비슷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였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1)의 적극적인 그리스도교 진흥책으로

 

로마에서 그리스도의 위상은 새로이 정립되었다.

 

학자들 사이에서 콘스탄티누스(Contantinus)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언제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어머니 성녀 헬레나(St, Helena)의 영향 아래서 자라 어린 시절에

 

이미 그리스도교에 귀의했다는 설과

 

인생의 여정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1)의 어머니인 헬레나(Helena)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제 자신은 40세가 되어서야 스스로를 크리스챤으로 불렀고

 

사망 직전에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한편, 콘스탄티누스(Contantinus)는 오직 자신의 정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하였을 뿐이라는 점과

 

권력을 위해 무고히 아들과 아내를 무참히 살해한 잔혹성으로

 

 그의 행실이 그리스도의 정신과 거리가 멀다는 점 등에서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의 성공이

 

확실히 하느님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고

 

자신의 치세 동안 교회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그리스도인을 관료로 중용하고 선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시절의 그리슫도교 박해 때 몰수한 재산을 모두 되돌려 주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1)에 의하여 채택된

 

로마 황제의 표장(標章)인 그리스도(Xpioros)의 처음 두 자를

 

조합시킨 라바룸(Labarum)을 처음 사용한 것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a di San Pietro)을 세운 것,

 

그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Helena)에 대한 수많은 전설 등을 볼 때

 

그가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

 

 

그의 그리스도교 진흥 정책은 다소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수많은 내전을 거쳐 권력을 잡게 된 콘스탄티누스(Contantinus)에게

 

권좌를 위협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로마 황제는 교회의 권위 내지는 하느님의 권위에 의해 임명된다는

 

원칙을 세우고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권위는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325제1 차 니케아 공의회(1st Concilium Nicaenum Primum)를

 

소집하여 그리스도교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동방정교회(East Othordox)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며

 

헬레나(St. Helena)와 함께 5월 21일을 축일로 지정하였다.

 

로마 가톨릭에서도 성인으로 공경한다.

 

 그의 축일은 정교회(Othrdox Church)와 마찬가지로 5월 21일 이며

 

헬레나(St. Helena)의 축일은 8월 18일이다.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 제국(West Roman Empire)의 패권을 놓고,

 

드디어 막센티우스(Maxentius)와의 최후의 결전이 이루어진다.

 

로마의 신학자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 날 밤 꿈에

 

 부하들의 방패에 그리스도가 그의 군대를 보호한다는 의미인

 

 'X '자가 쓰여져 있는 꿈을 꾸었다 한다.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

 

 

 

또 다른 전승으로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군대가 행진하고 있을 때, 콘스탄티누스는 한 낮에

 

천국에서 빛나는 승리의 십자가가 밝은 햇살을 내비추며 떠오르고,

 

뒤이어 '인 혹 빈센스(In Hoc Signo Vinces),

 

즉, '이 기호로 승리하리라 ( In this sign, You will conquer)"는

 

소리가 들렸다."고 쓰고 있다.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

 

 

 

또 다시 다움날 콘스탄티누스의 꿈에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

 

 "천국의 기호를 그려 넣은 라바룸(Labarum) 휘장을 만들어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 라바룸(Labarum)은

 

 그리스어로 "Chis(Χ)"자에 "Rho(Ρ)'자가 결함된 ""로,

 

그리스어로 구세주 "그리스토스(Chrostos)"를 상징하는

 

치로(Chi-Rho), 혹은 크리스토그램(Chritosram)으로 해석되어,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깃발,

 

방패, 병사들의 군모에 이 "천국의 기호"를 붙이고 붙이고 나가서,

 

 AD.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 앞에서 벌어진 멜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는 콘스탄티누스의 대승으로 끝났으며,

 

이로써 그는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

 

 

멜비우스 다리의 전투(Battle of Milvian Bridge)에서의 대승으로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된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는

 

이 떄 그가 하느님께 약속했었던 일,

 

즉 승리 후 모친 헬레나 왕후(Queen Elena)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오던

 

사도 베드로(Apostles Peter)와 바오로(Apostles Paul)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세울 것을 공표한다.

 

 

 [십자가의 환시(Vision of Cross)]

 

 

그리고 인류 최초의 교회인 일명

 

콘스탄티누스 기념 성당(Constantinian Basilica) 이라 부르는

 

초기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은

 

324년에 세워지게 된다. 

 

그리하여 첫 공사를 시작하고 

 

326년에는 교황 성 실베스트로(Pope St. Silvestro,314-335)가 축성하고, 

 

그후 23년 후인 349년에 완공된다.

 

 

 [교황 식스투스 5세(Pope Sixtus V, 1585-1590) ,

 

프레스코(Fresco Sala di Constantino)]

 

 

정의를 의미하는 '유스티티아(Justitia)'와

 

가톨릭교회의 사랑의 행위를 의미하는 '카리타스(Cartitas)

 

 

 

 

 [로마의 헌증(Donation of Rome)]

 

 

 

 [로마의 헌증(Donation of Rome)]

 

 

콘스탄틴 황제(Emperor Constantine)가

 

교황 실베스터 1세(Pope Sylvester 1) 앞에서 무릎을 꿇고, 

 

로마를 상징하는 황금상을 교황에게 바치고 있다. 

 

교회국가의 설립과 교화의 현세적 권력의 정당화에

 

기반을 이 에피소드에 두었다.

 

교황 실베스터(Pope Sylvester)는

 

교황 클레멘트 7세(Pope Clement VII, 1523-1534)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옛날 성 베드로 성당(Bascilica di San Pietro)의 내부에

 

기록으로 남겨져있었으나 후에 없애버렸다.

 

 

 [로마의 헌증(Donation of Rome)]

 

 

 

로마의 헌증(Donation of Rome) 또는 콘스탄틴의 헌증(Donatio of Constantine)

 

으로 불리우는 이 작품은 라파엘로(Raphaelo)의

 

도움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그림의 대부분은

 

1520년에서 1524년 사이에 지안프란체스코 페니(Gianfrancesco Penni)와

 

줄리오 로마노(Guilio Romano)에 의해 그려졌다.

 

 1520년 라파엘이 죽자 라파엘 공방의 제자들이

 

 이 방의 나머지 프레스코를 완성하였다.

 

 

 [로마의 헌증(Donation of Rome)]

 

 

 

이 그림은 교황의 지배권을 교황의 통치권을 소유 영토 너머까지 인정한다는

 

저 유명한 위조문서에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

 

그림은 가상적인 역사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콘스탄틴 황제(Emperor Constantine)가 교황 실베스터 1세(Pope Sylvester 1)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교황과 그 후계자들이 로마를 비롯한

 

서로마 제국(Western Roman Empire)

 

전체를 통치하여달라고 청원하고 있다.

 

 

그림에는 시대 착오적인 장면들이 보이는데,

 

그림의 배경으로 원래의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의

 

실내장식이보이는데, 이 그림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재건축되었다. 작가는 옛날의 건물을 상상해서 그려넣었다.

 

중앙의 배경에 있는 제단에 뒤틀린 기둥, 솔로몬의 기둥(Solomonic columns)은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로 부터 기증받은

 

것으로, 아마 유대사원(Jewish Temple)의 잔해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노 대제의 방(Sala di Constantino)]

 

 

 

그리고 이 성당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너져 내려

 

 1200년이 지난 1506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Pope Julius II)가

 

새로운 성당을 세우기 위해 시공을 하고 다시 120년이 지난, 1625년 11월 18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Pope Urbanus VIII)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lica di San Pietro)'으로

 

새롭게 축성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Great Emperor Constantinus)가 최초로

 

세운 교회가 시작된지 1300여 년 만의 일이다.

 

 

 [그리스도교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

 

토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 작품]

 

 

 

 [그리스도교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

 

토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 작품]

 

 

땅에 떨어져 깨어져 있는 것은이교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

 

토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 작품]

 

 

원래의 나무 기붕은 교황 레오 10세(Pope Leo X, 1513-1521)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후 교황 그레고리 13세(Gregory XIII,1572-1585)에 의해

 

현대식 지붕으로 재건축되었다. 

 

그리고 이를 장식하기 위하여 

 

토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에게 의뢰하여 

 

지붕 중앙 패널에 그리스도교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를 제작한다.

 

이 작업은 교황 식스투스 5세(Pope Sixtus V, 1585-1590) 때인

 

 1585년 말에 완성되었다. 

 

 

 [그리스도교 승리(Triupm of the Christan Region),

 

 토마소 라우레티(Tommaso Laureti) 작품]

 

 

 

출처 : 베라이콘의 꿈
글쓴이 : 베라이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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