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치의 줄리안의 靈性 - 장긍선 신부 편저
I. 서 론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은 14세기에 영국에서 살았던 신비가이다. 때마침 영국에는 흑사병이 나돌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희망이 없이 보였던 암울한 시대였다. 줄리안은 고통 가운데서도, 환시 속에서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이렇게 되풀이 하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을 잘 되게 하겠고 나는 모든 것이 잘 되게 할 것이고, 또 나는 모든 것을 잘 되게 할 수가 있다." 이 표현은 삶에 대한 그녀의 태도와 영성을 말해준다. 이는 단지 피상적인 낙관론을 피력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희망이 주님에게 뿌리를 두고 있음으로 어떠한 절망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긍정적 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는 깊은 믿음을 엿보게 한다. 줄리안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녀가 그리스도와의 행복한 일치의 체험에서 퍼내는 기쁨을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나누기를 갈망하는 태도는 인간의 미래가 오직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강한 믿음을 표명하는 삶이었다고 보인다. 줄리안은 그 당시 유럽과 영국을 휩쓸고 있던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해 처참하게 고통하며 절망하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의 신비를 살았던 영성가이다.
그녀는 몇 차례에 걸쳐 하느님의 환시를 받았고 그 환시를 바탕으로 일상의 삶을 깊은 신심과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살았던 신비주의자이다. 특히 줄리안은 자신의 신비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은혜가 그 속에서 작용할 수 있게 하도록 살고 증거했기에 가톨릭 영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토마스 머톤은 줄리안이 '영국의 위대한 신비가'라고 했으며 뉴만과 함께 영국의 위대한 신학자의 반열에 자리 매김 했다.
이 논문에서는 줄리안의 신비주의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빛을 던져주는 몇 가지 관점만을 다루고자 한다. 줄리안의 생애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어 여러 영성 작품 안에 부분적으로 언급된 그녀의 생애를 바탕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줄리안의 영성은 그녀의 작품,『계시, Showings』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또한 줄리안의 영성적 지혜가 현대인에게 주는 가르침을 조명해 보려한다.
II. 줄리안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1. 줄리안의 생애
영국의 최초의 신비주의 여류작가요 영성 지도자로 활약했던 줄리안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대하게 영향을 미친 신비주의 영성가 이지만, 우리가 줄리안의 내력에 대해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미미하다. 단지 그녀의 작품과 시청에 남아 있는 유언장을 통해 그녀의 생애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줄리안은 1342년 12 월에 노리치 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노리치는 당시에 런던 다음으로 번창했던 큰 항구도시였다. 줄리안은 그 당시 흔히 열심한 신자가 택했던 은수자들을 위한 제 3 회원 수도생활의 양식을 살며 신앙을 증거했던 평신자이다. 줄리안은 수도 명으로 그녀가 정착하여 살았던 노리치의 줄리안 교회에서 따온 이름이다. 아무도 그녀의 정식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다. 줄리안은 칼로우(Carrow)지역에 있던 성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교육받은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고 쓰고 있으니 이는 라틴어를 모르던가 아니면 조금 밖에 모른다는 의미에서 한 말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당대의 관습으로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을 한다.
1373년 5월 8일 심하게 아팠는데 그 때 주님으로부터 16 번의 "환시"를 보는 체험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후 줄리안은 노리치 교회의 여성 은수자(anchoress)가 되어 죽는 날까지 교회에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줄리안 교회는 그 당시 400년의 역사를 가진 오랜 전통의 교회였다. 그녀의 은둔소에는 두 개의 창이 나 있었는데, 하나는 교회를 향해 있어 미사 참여와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는 창으로 쓰였고 다른 하나는 넓은 신작로를 향해 있어서 영적인 담화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창으로 사용했다. 그녀의 집은 큰 길 가로 나 있어 때때로 자기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영적 지도나 조언을 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줄리안은 노리치 교회에 붙어 있는 작은 "기도 집"으로 쓰이는 은둔소에 기거했으나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줄리안의 은둔소는 단순한 구조로 지어진 집으로서, 그녀는 살림을 도와주는 여자와 함께 살며 때로는 손님이 와서 잠시 머물다 가기도 했다. 쥴리안은 높은 담을 쌓고 약간의 가축을 길렀던 것으로 보아 약간의 사유재산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녀의 생활은 대부분 기도와 관상으로 짜여진 단순한 삶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극심한 고행을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저리 캠프(Margery Kempe)란 여성은 그녀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그녀는 줄리안보다 한 세대 젊은 영국 신비가이며 전기 작가로서 줄리안을 방문하고 며칠 동안 그 곳에 머물면서 줄리안으로부터 영적인 지도를 받았다. 그녀는 그 기록에서 줄리안이 거룩하고 지혜로운 여성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 마저리는 줄리안을 존경하여 줄리안 부인(Dame Julian)이라고 불렀다.
줄리안은 두 개의 텍스트로 이루어진 『계시』라는 한 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 저서 집필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으로 삼았다. 이 작품은 길이가 짧은 텍스트(short text)로 알려진 첫 번 째 작품과 긴 텍스트로 알려진(long text) 두 번 째 쓴 작품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 텍스트는 『계시』(Showings)라는 제목으로 1373년 5월 8 일에 그녀가 하느님께 받은 환시에 기초하여 쓴 것이다.
두 번째 텍스트는 줄리안이 환시를 받은 후 20년간 줄리안 교회의 은둔소에서 기도와 성찰, 신학화 작업을 거친 뒤에 그녀가 체험한 환시의 의미를 더 깊게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첫 번째 텍스트의 네 배의 길이로, 신학적 주석을 붙여 완성시킨 것이다. 당시의 추상적이었던 신비가들의 용어보다는 덜 난해하고 덜 조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관상적인 통찰로서, 초기의 환시 체험에서 받은 영적 강렬함과 감정을 되살려내는 다이나믹한 상징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신비적인 그녀의 신학적 역량을 높이 평가한 주석가들은 줄리안을 아빌라의 데레사, 시에나의 가타리나에 뒤이어 교회의 세 번째 여성박사로까지 추천하였다. 또한 이 책은 영국 여성이 최초로 영어로 쓴 작품으로서 세계 영성 문학의 위대한 고전으로 간주된다.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그 신학적 깊이로나 연민의 폭에 있어서 언어의 아름다움이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작품이다.
줄리안은 이 두 텍스트를 통해서 하느님을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줄리안의 사후 거의 2세기 동안이나 그녀의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잊혀진 채 무시되었고 17세기에 와서야 최초로 출간되었다.
1413년 그녀의 첫 텍스트『계시』의 편집자는 줄리안이 노리치 교회의 은수자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녀의 유언장의 기록에서 우리는 그녀가 사라(Sara)와 알리스(Alice)라는 2 명의 하녀와 함께 살았음을 알 수 있다. 1416 년 그녀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그녀가 소유했던 유산은 20 실링이었다.
1768년의 역사가 부름힐드(Blomefield)는 그의 역사책에서 줄리안을 가장 거룩하고 존경받는 여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사망한 날짜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단지 그녀가 80 세까지 살았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당시의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산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무덤은 추적할 수가 없다. 그녀의 부모와 탄생에 대한 정확한 내력도 알 수가 없다.
2. 줄리안이 살았던 시대상황
줄리안이 살았던 시대는 흑사병(1348년부터)이 창궐하고, 백년 전쟁 (1337-1453)과 농민 혁명(1381)으로 영국 전체가 혼란했던 시기였다. .
당시 교황들은 불란서 아비뇽(Avignon)에서 1309년부터 감금생활을 하다가 1377년이 되서야 로마로 돌아 왔다. 동시대에 살던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교황이 로마로 귀환하도록 돕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마침내 이를 성사시켰다. 줄리안은 자신의 저서에서 교황의 포로생활에 대한 비판도, 로마로 돌아온 데 대한 기쁨도 표시하지 않았다. 교회가 커다란 분열의 위기(1378-1417)를 겪었으나 줄리안은 그 모든 사건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특히 지역 교회 책임자들의 부패 상황에 대하여도 아무 말이 없다. 그렇다고 줄리안이 무감각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그녀가 책을 쓴 목적이 다를 뿐이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무엇을 알리고, 관찰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하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3. 중세의 은수자의 삶
영어의 은수자를 칭하는 용어로 남성 은수자 (anchorite)와 여성 은수자 (anchoress)는 그리스 동사 '물러가다, 은퇴하다 (to retire)'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서 세상을 떠나서 은둔소의 봉쇄 구역에 철저하게 머무는 기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러한 삶은 4세기에 사막에서 은둔하며 살던 교부들에게서 유래한다. 그 목적은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14세기의 은수자들이 사막의 교부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일에 연계되어 살았다는 것과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살았다는 점이다.
은수자들은 두 명의 하인을 둘 수 있었는데 이는 사치가 아니라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들은 은둔 생활을 방해하는 외부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였으며 생활 전반에 걸쳐 필요한 일을 거들고 협력했다. 줄리안도 그녀의 은수자 생활을 도와주는 여성과 함께 살았다. 오늘 날 에는 이들을 관리인이라고 부른다. 은수자는 우선적으로 독신과 정결의 삶을 살고자 서원한 사람이다. 갈멜 수도자와 같은 당대 수도자들은 수도원 내에서 살았으나 평신도로서 은수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수도원이나 교회에 인접해 있는 은둔처에서 살도록 허용되었다.
줄리안의 은둔소에는 두 개의 방이 딸려있었는데, 이 집은 줄리안 교회의 종탑 근처에 있어서 교회의 벽과 인접해 있었다. 이 집은 두 개의 창문이 나 있어 하나는 사제가 제대 위에서 미사 집전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용이하게 미사에 참석하며 일 개월에 한 번 정도로 성체를 모셨던 것 같다. 외부 손님들의 출입은 제한되었고 무질서하게 대화하는 것을 규칙으로 금하고 있었다.
현대인에게는 기도하는 소명이 특수한 부르심으로 예외적인 삶처럼 보일 수가 있겠으나 줄리안이 살던 당시에는 기도와 관상으로 일생을 헌신하며 사는 삶이란 그 어떤 형태의 삶보다도 으뜸가는 소명으로 보았다.
대교구 참사 위원이었던 올킨(A. M. Allckin)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녀는 주교좌 성당을 중심부가 되게 했던 한 시민이었다. 이 성당은 예술적인 작품으로 건축된 것이 아니고 기도와 예배를 인간의 활동 중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필요한 인간의 활동으로 생각했던 당대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지어진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당대의 은수자들은 현실적인 면에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에 참여했다. 은수자들에게는 세상을 향한 창구가 열려있어서, 그들은 오늘날의 사회사업가, 결혼 상담가, 정신과의사, 사제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이 하는 일의 일부분을 맡아서 했다.
4. 작품의 배경
영국의 신비주의는 14세기 말경에 절정에 달한다. 리챠드 롤(Richard Rolle, AD. 1290-1391)은 자신의 신비 체험을 적었고 특히 시로 썼던 신비가이다. 그의 『사랑의 불』은 쥴리안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어거스틴 수도회의 워터 힐톤(Walter Hilton, 1395-1896)은 쥴리안과 같은 시대의 가장 영향이 컸던 수도승으로 심오한 내용을 담은 영적 담론을 썼다. 쥴리안의 책 이외에 당대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또 하나의 영적 서적으로는 저자 미상의『무지의 구름』이 있다.
영국에서 14 세기에 신비주의가 성행하고 환영받았던 이유를 질의하고 숙고해 본다면, 이는 역사적 질문이기 보다 수사학적 질문이 될 것이다. 이 시대에는 영어가 크게 발달했다. 초서(Geoffrey Chaucer)는 줄리안과 동시대 사람으로 영어로 글을 발표했다. 줄리안은 단 하나의 작품만을 남겼지만 그녀의 문장은 매우 우아하고 명료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III. 줄리안 노리치의 영성
줄리안은 신비가이다. 신비가란 하느님에 대한 높은 지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메시지를 직접 받은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신비가들을 보통 사람과 분리시켜서 특수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상한 사람, 초월적인 인간들이 아니다. 신비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내재해 있어서 이를 민감하게 지각하고 주의 깊게 의식한다면 누구나 모두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사랑에 접할 수 있는 신비체험에 불림을 받게 될 것이다.
줄리안의 하느님 체험은 시간적으로 즉각적이고 공간적으로 밀착하여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줄리안은 스스로 자신의 종교 체험의 권위를 주장한다. 여기서 참된 종교체험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는 에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의 평가기준을 들어보기로 하자. 종교체험은 우선 자기가 속한 신앙 공동체의 신앙전통 안에서 발생하고 지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종교체험은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기심이 없는 행동을 하도록 사랑스럽게 마음의 권유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며,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내적인 권위로부터 흘러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1. 줄리안의 환시 체험
줄리안이 환시를 본 것은 교회의 전통에서 신비가들이 하느님 체험을 했던 다음의 세 가지 방법에 의해서이다.
첫째, 신체의 비전을 통해서 보는 환시이다, 즉 그녀는 자신의 감각을 통해 알았다. 즉 보고 듣고 때로는 냄새로 알았다.
둘째, 영적 비전을 통해 보는 환시이다. 영적 비전이라는 것은 그녀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환시이다.
셋째, 지적 조명을 통해서 보는 환시이다. 그녀의 지성이 빛에 의해 조명되어 하느님을 이해하는 환시이다.
신비가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체험을 알리는 일을 절실하게 열망한다.
줄리안의 경우 자신의 체험을 알리고자 하는 강박관념이 그 체험의 본질처럼 보인다.
즉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난 후, 그녀가 받은 환시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줄리안은 자신의 환시를 기록하면서 계속하여 메시지의 절박성을 강하게 느낀 것 같다.
그녀의 말이 한 번에 전달되기를 열망했는데도 그 말들이 깨지고 부셔져나가면
그녀는 그 말들이 주게 되는 무게를 인내심을 가지고 이겨내야만 했다.
환시를 받기 이전에 줄리안은 하느님께 세 가지의 은혜를 선물로서 주실 것을 청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실제로 동참하여 그 고통에 깊이 참여할 수 있는 은혜였다.
줄리안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며 그리스도의 고통을 증거하기 를 원했다.
둘째로 죽기까지 신체적인 병을 앓을 수 있는 것으로, 줄리안은 신체적 병과 더불어 모든 종류의 신체적 영적 고통을 청했다. 이런 태도는 당대에 유행했던 일반적인 신심행위 중의 하나였다.
셋째로 하느님의 선물로써 세 가지의 상처를 경험할 수 있는 은혜였다.
세 가지의 상처란
줄리안이 일생동안 느끼게 될 통회의 상처, 연민의 상처, 하느님을 갈망하는 지향으로부터 느끼게 될 상처였다.
그녀는 처음 두개의 은혜는 조건적으로 청원했고 세 번째의 은혜는 조건 없이 청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신심 생활이 극도로 진지했음을 알 수 있다. 줄리안의 이러한 청원은 그녀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수난에 동참함으로써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는 은혜를 소망했다고 보여진다.
1373 년 5월 8일, 부활 제 3주일은 그녀가 삼십살 육 개월 되던 해로 그토록 소원하던 기도의 청이 들어졌다.
그녀는 칠일 동안 심한 병으로 죽도록 아팠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다시 소생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나 또한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줄리안은 젊은 여성으로 하느님께 더 잘 봉사하며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두려움 없이, "나는 마음을 다하여 내 뜻을 하느님의 뜻에 맡겨드렸다"고 적고 있다.
줄리안이 본당 신부님에게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는 순간, 사제는 십자가를 들고 그녀에게 십자가를 보도록 명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당신의 창조주이며 구원자의 상징을 당신께 가져왔으니 이것을 보고 힘을 얻으십시오."
줄리안이 한 동안 죽음의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보였으나 그녀의 생명은 놀랍게도 회복되었다.
"별안간 나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나는 전보다 좋아졌다."
새벽 4시, 새벽의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올 때, 첫 번째 환시를 체험했다.
죽어가던 줄리안은 눈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뜻밖에 예수의 가시관에서 흘러나오는 성혈을 보았다.
같은 환시에서, 갑자기 성삼위께서 내 마음을 커다란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셨고
나는 하느님 나라에 가면 거기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끝없는 기쁨을 체험할 것이라고 깨달았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이요,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다. 삼위일체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며, 우리의 끝없는 축복이자 기쁨이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이후 새벽 4시부터 오후 3시까지 15차례의 환시를 보았으며 낮에는 정지되었다.
그 날 밤에 1차례의 환시를 또 보았다. 이 환시는 그녀가 주님께 요청한 대로 선물로서 받았고,
그녀가 기도한 대로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인 것같이,
즉 그녀가 꼭 받아야 하는 하느님의 뜻인 것같이 주어졌다.
줄리안의 글에서 기록하기를 그녀가 고통을 당할 때 그녀의 어머니가 침대 곁에 있었다고 했다:
"나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거기에 있었고, 그녀의 손을 들어 나의 눈을 감겨 주었다.
사람들은 그 순간 마치 내가 이미 죽었거나 또는 죽어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슬픔을 더 크게 하였다.
이러한 나의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위한 나의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는 것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통해 줄리안이 환시를 받는 순간 의식이 깨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어둠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앞에 있는 십자가상이 보였고 희미한 불빛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이때 그녀는 5시간 동안이나 탈혼 상태에서 15차례의 환시를 보았다.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다가오심과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고통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환시였다.
그 때 그녀의 의식은 깨어있었고 자신이 병고에서 벗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다음 밤, 그녀가 본 다른 환시 속에서 이미 본 환시들에 대한 의미가 상세히 설명되어 명확하게 해주었다.
이 16 차례의 환시를 기록한 것이 오늘 날 우리에게 알려진『짧은 텍스트』이다.
이 환시는 주로 성 삼위와 예수의 수난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유의 할 점은 줄리안이 은수자로서 기도하며 고독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 언제였나 하는 점이다.
그것은 아마도 줄리안이 환시를 본 후에 주님이 보여주신 엄청난 신비를 묵상하면서,
일생동안 주님과 친밀한 영적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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