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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노르비취의 줄리안과 신비적 영성

류성련 2014. 9. 10. 22:24

 

노르비취의 줄리안과 신비적 영성

 

                                      정미현(이화여대 강사, 조직신학)

 

 

I. 들어가는 말

2001년 9월 에쿠아도르(Ecuador)의 수도 키토(Quito)에서 제 3세계 신학자 협의회(EATWOT) 총회가 열렸었다. 한국대표로 참석한 필자는 그곳에서 남미 원주민의 삶의 상황을 잠깐이나마 둘러볼 수 있었다. 기후좋고 지형좋은 땅은 백인들에게 모두 내어주고 3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사는 사람들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살레지오회 소속의 한 이태리 신부님을 만났다. 이곳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회력의 절기가 무엇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 분은 수난절과 성금요일이라고 답하였다. 그 이유는 그곳 사람들 하루하루의 삶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쉽게 동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이원적 분리가 아니라, 연계성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수난과 죽음의 의미가 더 한층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부활이 아니라, 수난과 죽음의 성금요일을 중요시하며 십자가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오히려 역동적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이 참으로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가난한 자들의 일상적 삶과 관련하여 있음이 피부로 와 닿기도했다. 그러나 부활을 말하지 않고 십자가를 강조하는 이러한 이해에 대한 여러 가지 신학적 물음들이 한편으로는 여전히 끊이지를 않았다.

이미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을 강조한 다양한 예들이 있다. 중세 여성신비주의가 대표적 예인데, 그 가운데서도 이 논문에서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하는 것은 노르비취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의 경우이다. 그의 신비주의 신학의 중심에는 삼위일체적 기독론과 십자가의 의미가 부활과 관련하여 독특한 방법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II. 몸말

노르비취의 줄리안의 신비주의는 리차드 롤(Richard Rolle)에 의하여 시작된 14세기 영국 신비주의를 마감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 즈음에 작자미상의 "The Cloud of Unknowing"과 월터 힐튼(Walter Hilton)의 "The Scale of Perfection"등의 신비주의 저서들이 아울러서 등장하였다.1) 

일반적으로 신비주의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와 상관없는 듯이 보이기도 하며, 우리들의 일상성에서 보여지는 각종 고뇌로부터의 도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줄리안의 신비주의2)는 추상적인 신학적 내용을 쓴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사고와 삶의 방식에 크게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를 케네트 리치(Kenneth Leech)는 "성육신적, 유물론적 영성(incarnational, materialistic Spirituality)"3)이라 표현한다. 줄리안은 오랜동안 독거, 은둔 생활을 했으나, 그것이 자아 중심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웃, 신앙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돌봄의 생활로 이어졌다는 특징이 있다.4) 14세기 영국의 상황은 농민폭동이 있고, 백년전쟁으로 사회가 불안정하며 도시 노동자의 소요가 있고, 재해와 흑사병, 기아가 성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불안한 시대 상황으로 인하여 영지주의적 가르침과 환상, 묵시적 계시가 만연한 격변기였다. 즉 육적인 것, 세상적인 것에 대한 염세적 부정의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줄리안의 신비주의는 이와같은 영지주의적 성향에 대조하여 성육신을 바탕으로 땅(earthy)에 관련된 것, 육적(fleshly)인 내용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정신과 물질, 영과 육은 분리가 아니라, 보족(complementary)을 이루는 것이며, 영과 육의 조화는 곧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한다.5) 그러나 줄리안은 성육신을 단순히 신조의 내용이나 역사적 사건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진행형, 움직임, 운동, 역동적 역사(movement)로 본다. 그 성육화된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 구원됨과 온 인류의 미래적 구원의 성취, 즉 만유의 온전한 회복을 믿었던 것이다. 줄리안은 신비주의적 접근을 통해 염세주의적 현실세계에 침잠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고난을 딛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용기를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격려하여 고난과 불행과 투쟁할 수 있게하며, 이웃과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이도록 촉구하였다.6) 

줄리안의 신 인식의 신비주의적 방법은 오감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맡보고, 냄새맡는 것 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은혜에 의하여...이 세상의 현재적 삶 속에서 하나님 품에 안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우리는 주님에게로 가게되고, 우리 자신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며...하나님을 진정으로 보게되고(truly seeing), 충분히 느끼고(wholly feeling), 영적으로 듣고(hearing spiritually), 유쾌하게 들이쉬고(delectably smelling), 달콤하게 맛볼 것(sweetly tasting)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을 친숙하고 온전하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다."7) 몸, 육체성(sexuality)과 관능성(sensuality)에 대한 긍정이 체험적 신 인식에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몸과 영의 조화라는 것을 이론으로만 알던 남성 스콜라주의 신학자들과 달리 직접적 체험을 통하여 몸의 병과 고통이 영혼의 표현이므로 몸과 영의 조화의 중요성을 줄리안은 역설한다.8) 줄리안은 주저인 "신적 사랑의 계시(Revelations of Divine Love)"에서 이와같은 자신의 체험을 글로 표현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실현된 종말론이면서 궁극적으로는 미래로부터 도래할 종말론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적 신비적 합일과 미래의 궁극적 신비적 합일의 창조적 긴장관계가 어우러져 있다.

신비주의에서는 대체로 세가지의 비전체험을 분류한다. 육체적 현상으로서의 듣고(audio corporalis) 봄(visio corporalis), 내적인 영상과 결부된 직관(visio imaginaria), 순수한 정신적 깨달음인 비대상의, 비형상성의 관조(visio intellectualis)이다.9) 이러한 유형에 따라볼 때 줄리안의 신비주의는 비형상성의 관조의 형태와 연관되어 있다.10) 이와같은 신비체험은 어떻게 묘사될 수 없는 불가형언성(ineffability)을 지닌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 표현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지고 표현된 것이 줄리안의 "신적 사랑의 계시"이다. 신비주의는 체험을 강조하는 그 특성상 비지성적, 반합리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줄리안의 신비주의는 지적 신비주의의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상상으로 나는 하나님을 한 점 안에서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는 가운데 나는 하나님께서 만물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 안에서 일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중심점 안에 계시며

행해진 모든 것을 하시기 때문입니다."11)

 

신비주의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오귀스트 뿔렝은 아빌라의 테레사의 견해를 참고하여 네단계의 신비적 합일을 말한다. 첫째 불완전한 신비적 합일, 정적의 기도, 둘째 반(semi) 탈자적 합일, 셋째 탈자적 합일, 넷째 신성화하는 합일 혹은 변형된 합일, 신과 영적 결혼12)이 그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의 의미로 시에나의 카타리나나 아빌라의 테레사에게서 특징적으로 드러났던 신비적 혼인의 이미지가 줄리안에게서는 강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또한 신비주의 연구의 대가 에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신비주의자들의 심리적 발전과정을 다음과 같이 다섯단계로 분류한다.13) 첫째 환희와 고양으로 특징지워지는 신의 실재에 대한 각성, 둘째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과 훈련과 금욕을 통해 신을 향한 정진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시도, 셋째 빛을 조명해 주는 정화, 넷째 '자아'의 순화, 신비적 고통 혹은 신비적 죽음, 다섯째 합일의 과정인데 실재의 초월성 위에 자아를 확립하는 과정이다. 신비주의의 단계를 성서에 기반을 두면서 위와같은 단계 구분과 유사한 맥락에서 간소화하여 말하면 일반적으로 회개(repentance), 성화(santification), 합일(union with God) 혹은 정화(purgatio), 조명(illuminatio), 합일(unificatio)의 과정이다. 첫단계는 평화로 이끌며, 두 번째 단계는 진리로, 세 번째 단계는 사랑과의 연합의 길이다.14) 그런데 줄리안에게서는 어두움의 이미지가 아니라, 빛의 이미지가 최종적 단계에서 드러난다. 밤, 구름과 어두움을 신과의 합일의 과정으로 상징화하던 신비주의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 내적 이미지는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빛은 어두움이 깊을수록 더 빛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고난 그 자체는 결코 어떠한 형태로도 미화될 수 없으나, 그것은 빛을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배경이 된다.    

 

1) 줄리안의 삼위일체론

라틴어를 토대로 한 스콜라 주의가 만연하여 있고, 여성은 그러한 학문의 영역에서 배제되었던 시대, 여성들은 신비주의를 통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비주의는 제도권 교회의 권위주의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었다.15) 여성들은 신적 사랑에 대한 강한 열망과 체험을 통한 확신을 가진 후에 자신들의 언어를 문자화하기 시작하였다. 여성들의 체험을 주류의 신학자들에게도 설득력있게 전하고자 경험의 언어들을 신학화한 것이다. 그것은 관습과 제도와 남성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고도 보여진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권위를 바탕으로 이들은 체험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줄리안의 글 전반에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권능, 지혜, 선 혹은 사랑으로 묘사된다. "보라! 나는 내가 태초부터 정해놓았던 그 목표를 향해 권능과 지혜와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끌겠다. 그 권능과 지혜와 사랑은 내가 모든 것을 창조할 때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것들이다."16) 

 

"이것이 나다. 부성의 능력과 선성. 이것이 나다. 모성의 지혜. 이것이 나다. 사랑과 동일한 은혜와 빛. 이것이 나다. 삼위일체. 이것이 나다. 통전성. 나는 만물을 통치하는 선이다. 나는 그대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는 분이다. 나는 그대로 하여금 열망하게 하고 바라게 하는 분이다. 이것이 나다. 모든 열망들의 끝없는 충족."17)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모든 능력이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지혜이시고, 모든 것을 하는 법을 아신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온전한 사랑이시고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억누르고 있습니다."18)

 

"삼위일체의 전능성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자기 안에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의 심오한 지혜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분 안에 감싸여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지고의 선은

우리 모두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19)

 

삼위일체 하나님은 줄리안에게 있어서 생명, 사랑, 빛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세가지 속성은 생명, 사랑, 그리고 빛입니다. 생명에는 집안의 놀라운 친밀함이 있고 사랑에는 관계에 어울리는 너그러움이 있으며, 빛에는 영원한 자연성이 있습니다."20) 

그런데 줄리안의 삼위일체적 하나님 이해는 전통적 신학의 맥락을 따르는 것이다. "줄리안은 사변적 신학의 오랜 전통에 의지하여 삼위일체에서 부성의 세가지 발현을 본다. 이 때 부성이란 아버지와 어머니와 군주를 통합하는 것이다.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이며 판관이자 법의 제정자로서 부성적 속성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모성적 속성으로 표현되고 새로 태어난 인간의 어머니로 나타난다. 그리고 성령은 충성하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인간을 사랑과 은총의 선물로 치하하는 주(Herr)의 알레고리로 나타난다...줄리안은 특히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는 도덕적이고 유비적인 차원 모두에서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와 같다고 보았다."21) 

삼위일체적 토대 위에서 자신의 신비주의를 신학화하면서 줄리안은 전통과의 연속성을 추구한 것이다.

"우리의 선하신 주님께서는 나의 모든 질문들과 의문들에 대해

충만한 에너지를 갖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만물을 좋게 만들 수 있다.

나는 만물을 좋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

나는 만물을 좋게 만들기를 원한다.

나는 만물을 좋게 만들겠다.

그러면 너는 모든 것이 좋게 되는 것을

네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은 성부를 지칭하고,

'나는 -하는 법을 알고 있다'라는 말은 성자를 지칭하고,

'나는 -하기를 원한다'라는 말은 성령을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곳에서

나는 삼위일체를 깨닫습니다.

'너는 네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이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말씀들로 안락하고 평화롭게 감싸이기를 원하십니다."22)

위의 진술에서도 역시 드러나는 바와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만물을 좋게 만들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그 법을 지혜로 알고, 그렇게 되기를 사랑으로 원하는 존재자로 묘사된다. 그리고 만유는 그 안에 감싸여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을 설명하는 법이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독특하다. 즉 줄리안은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특유의 방법으로 이를 설명해 내고 있다.

 

2) 기독론적 집중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기독론을 예수의 신비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23)라 일컫는다. 종교개혁의 한 원칙에서 말해지듯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의 본성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은혜를 아는 것이다(Hoc est Christum cognoscere beneficia eius cognoscere, non eius naturas)".24) 이 말은 추상적 기독론으로부터 벗어나 움직임과 프락시스를 지향하는 기독론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다.

주변세계의 고난에 대한 연민이 가득하였으며, 이성의 냉철함을 견지한 여성이었던 줄리안의 신비주의는 바로 이러한 기독론을 담고 있다. 그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이해되기 보다는 끊임없이 찾아지고 신뢰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여지기를 원하시고 추구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기다리고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25)

 

"찾는 것은 보는 것만큼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게으름과 별 도움 안되는 슬픔없이

진지하고도 끈기있게 찾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에 차서 갑자기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26)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열망하고 찾는 이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분이시며,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육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이 강조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인간은 영육 이원론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몸과 물질은 비하되지 않고 몸과 영의 조화로운 일치속에서 삶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줄리안에게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다정스런 어머니"로 즐겨 묘사된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기도 하십니다."27) "예수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회복하고 해방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능성을 능숙하고 지혜롭게 유지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친구이시며 우리의 해방자이시기 때문입니다."28) 매튜 폭스는 줄리안이 예수 그리스도의 여성성을 강조하는 모성의 신학을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던 중세기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이 잘 발전시켰다고 평가한다.29) "우리의 구세주는 우리의 참된 어머니이시며, 우리는 그 분 안에서 끊임없이 태어나고 그 분으로부터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30)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은 "우리의 어머니"이시다. 예수의 성육신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관능적으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다. 우리의 참된 어머니가 바로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그 분으로부터 받으며, 그 분에게서 모성의 기초가 시작된다. 예수의 모성은 첫 번째 창조와 두 번째 창조에도 적용된다. 줄리안이 모성성의 자비와 부드러움으로 묘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그 모성은 해산과 양육에 수반되는 모든 진통과 아픔을 견디어내는 존재자이다.

 

4세기 이후 그리스도교의 흐름을 갈라놓았던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적 대립에서 더욱 첨예화 되었던 것은 죄와 인간의 선성(Goodness)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였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한 제도권 교회에서는 죄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주류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반면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래적 선성에 대한 긍정과 회복, 죄로 인한 억압보다는 근원적 해방과 자유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전자가 교회의 권위에 초석을 놓았던 베드로의 전통에 관련된 것이라면, 후자는 권위주의, 형식주의로부터 탈피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이며,  친밀한 만남을 추구하였던 요한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줄리안은 삼위일체론적 신학구도를 따르는 점에서 철저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창조의 본래적 선함을 인간의 죄성보다 더 역설하는 점에서는 펠라기우스적 맥락에 있다고 보겠다. 때문에 줄리안은 원죄로 인하여 생겨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틈새(between)와 심판에 강조점을 두기 보다는, 근원적 축복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with)과 연민을 오히려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31) 죄성을 강조함으로써 제도권 교회로의 소속을 강조하고 그 권위를 드높이려는 모습은 그에게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본래적인 창조의 선성(Goodness)을 강조하며 낙관적, 통전적 견해를 펼치는 것이다.32)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틈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메꾸어지고 하나님과의 합일로 인도되는 것이다.

줄리안의 표현가운데는 신인 동형론적 경향을 보이는 것이 간혹 느껴지는데 다음의 표현이 그러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우리의 실체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의 실체는 하나님과 같기까지 하다는 것입니다."33) 이러한 내용을 읽게되면, 줄리안이 범신론적 사상에 젖어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지닌 본래적 선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신인동형론적 사상과 인간의 신성화를 추구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말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은 더 한층 진전된 신학적 진술과 연결하여 보아야 될 내용이다. 줄리안의 사상은 범신론이 아니라 만유재신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다음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우리의 실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실체는 하나님 안에 있는 한 피조물입니다."34) 하나님과 피조물의 합일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전적 타자성(totaliter alliter)"을 놓치지 않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중재하시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의 소외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3) 고난과 십자가의 신학

줄리안은 30세가 되던 때 몸에 아주 심한 아픔을 느끼며 죽어가면서 고난의 문제에 심각하게 직면하여 있었다. 이 때 그는 오히려 삶에 대한 강한 열정을 드러내는데 이것으로부터 그의 주저인 "신적 사랑의 계시"가 시작된다. "...나는 살기를 간절히 바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을 더욱 더 잘 사랑하고 더 오랫동안 사랑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천상의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사랑할 것이었습니다."35) 그는 하나님이 손에 쥐어준 개암열매 크기의 둥그스름한 자그마한 물체를 보는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모든 것이 지속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드러낸다. 창조된 모든 것은 "지속하고 끊임없이 지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36) 피조물의 모든 고난 뒤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함께 하신다. 죽음의 표징인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이지만37), 십자가와 고난은 마지막 말은 아니다. 부활이 그 십자가의 고난 너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이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  

 

"행복은 영원하고 고통은 지나갈 것이며 동시에 끝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모든 것을 행하고

우리 자신을 강하게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의 느낌들 때문에 초췌해지고 한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보다 더 잘 살고

삶을 계속해서 향유하는 것입니다."38)

 

중세 여성신비주의에서는 금욕, 고난, 희생등의 개념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특히 그리스도교의 역사상 가난한 이들과 여성들에게 더 많이 부과된 마조키즘적 현상으로써 여성신학적으로 볼 때 상당히 문제화 된 것들이다.39) 특히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고난을 합리화 하게되면 문제는 더 드러난다. 예를 들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아들의 희생을 향유하는 아버지의 가부장성을 드러내는 것과 연결되기도한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불의한 구조속에서 생겨난 고난 가운데 인내를 강요하는 억압 이데올로기와 연관되기도한다. 고난의 상황을 죄에 대한 형벌이나 대가라던지, 교육수단으로 설명하는 것은 흔히 압박자가 피압박자를 향하여 하기 쉬운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고난은 하나님이 인간을 교육시키는 수단이라는 식으로 미화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궁극적 행복을 원하시지 인간을 형벌과 고통으로 내몰려고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고난의 상황자체를 우리가 도외시하지 않고, 굴복하지도 않으며, 맞서 대응할 때 그 고난은 의미있는 고난이 될 수 있고, 그러한 과정에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것이다.

고난의 상황을 참고 무조건 인내하라던지, 고난의 문제를 약화시키거나, 오히려 피압박자가 고난을 즐기는 것으로 미화하는 등의 고난의 왜곡 현상은 여성신학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중요 주제이다. 가진 자와 압박하는 자의 입장에서 불의를 정당화하고 합리화 하는 수단으로 십자가나 고난이 언급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어느 순간에도 가부장사회 그대로의 모습(status quo)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세라는 시대적 특성과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지 않고, 현재적 여성신학의 시각으로 중세여성 신비주의에서 사용된 이러한 개념들 자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줄리안의 시기에 영국은 잦은 자연재앙과 정치, 경제적 불안정 등으로 염세적인 시대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일반적인 문체적 특성도 시대상을 반영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줄리안의 신학은 인간이 처한 모든 고난의 문제, 비애, 슬픔, 불행등을 간과하지 않지만, 이에 머물르지 않고 극복하고 승화하도록 이끄는 힘을 지녔다. 사람들을 격려하고 삶에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소외되고 주변화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자각을 촉구하며,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줄리안은 고통당하고 상처받은 이들의 소리에 귀기울였고, 이들이 처한 문제상황으로부터 십자가와 부활의 상관관계를 연관지으며 희망을 부어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줄리안의 신비주의는 탈세상적, 염세적, 소극적 경향성을 보이는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40) 

줄리안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습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춘 것은 세상의 악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끌어안고 생명으로 인도한 그 사건에 힘입어, 다양한 이유로 부과된 인간의 형형색색의 고난을 승화시키도록 돕고자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고난과 승화의 길항작용을 통한 중세 여성신비주의에서 우리는 생명문화를 추구하는데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신비주의를 통하여 삶의 근원적 에너지를 찾고, 온 우주의 유기체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도로테 죌레의 다음의 진술은 줄리안에게서도 보여지는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고난에 맞서는 저항의 긴장성을 잘 드러내준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 결정적인 것은 우선 부당한 행위를 당하는 자가 부당한 행위를 하는 자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다. '하나님은 항상 고난받는 자와 함께 계신다.'는 말에는 위로 뿐만이 아니라 힘을 북돋아 주는 점도 내포되어 있다. 즉 특권층과 억압을 연결시키기 위해 사용되어 온 모든 형벌 관념의 거부도 내포되어 있다. 모든 것을 허락받은 자들과 상류층에 속한 자들에게 대항해 폭동을 일으키고, 발견된 진리를 고집하는 그런 신비스런 반항이 그것이다."41) 

자의적, 선택적 고난에의 동참의 길은 십자가의 연민을 따르는 길이다. 그것은 고난을 향유하는 돌로리스무스(Dolorismus)가 아니라, 고난의 현실과 상황을 도외시하지 않고 직시하며,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고 극복하기 위한 신비적 방안인 것이다.42) 고난을 야기시키는 각양각색의 원인들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으면서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신비주의적 저항의 표현이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으며, 그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골 1, 24)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이 부족하여 우리의 고난을 보태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고난에 대한 이와같은 능동적 참여를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극복한 십자가 사건의 실재성에 힘입어 삶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다.

 

줄리안의 신비체험의 특징은 고통스러운 관조의 과정을 통하여 엄청난 고통을 느끼지만, 이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희열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피학증적 금욕주의(masochistic asceticism)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줄리안의 저서 "신적 사랑의 계시"에 나타난 16가지 계시의 주제도 예수의 소중한 고난의 의미를 주로 부각시키고 있으며 궁극적인 하나님의 충만한 기쁨으로 맺음되고 있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의 가장 값비싼 가시면류관과 삼위일체성, 2. 소중한 수난으로 변색된 그리스도의 얼굴, 3. 하나님의 것으로써의 모든 존재와 권능과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 4. 그리스도의 몸의 고통과 피흘림, 5.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해 정복된 악, 6. 우리 주 하나님이 하늘에서 모든 축복받은 종들에게 내릴 보상, 7. 행복과 고뇌, 기쁨과 슬픔의 빈번한 체험, 8. 그리스도의 마지막 수난과 죽음, 9. 그리스도의 고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환희, 10. 수난의 시간에 인간을 위해 열려진 우리 주 예수의 사랑, 11.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염려하는 숭고한 영성, 12. 우리 주는 온 생명, 13. 하나님이 창조한 만유의 온전한 회복을 기원함, 14. 우리 기도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15. 우리의 모든 고통과 슬픔은 사라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계신 곳에서 충만하게될 기쁨과 행복, 16.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명하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대략적 내용이다.43)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틈새(between)는 극복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실 때 우리도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위대한 하나됨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44)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이해에 따라, 이 세상을 창조했으되 세상안의 모든 고난에 눈감아 버리고 내버려두는 매몰차고 냉혹한 그러한 존재자가 아니시다. 그러한 존재자는 과정신학이 거부하는 고전적 유신론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줄리안이 파악한 성서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고난을 부여잡고 감싸안으시는 분이다. 하나님 스스로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고난을 짊어지신 것이다.45) "고통을 겪으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그 분과 함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던 시간에 하늘과 땅이 쇠약해 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의 일부이시기도 했기 때문입니다."46)

 

죄와 고난의 문제를 결코 경시하지는 않았으나, 줄리안은 그것이 본래적 속성을 지닌 것으로 보지 않았다. 죄와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부분이지만, 그것은 비본래적인 것으로서 극복되고 치유되어야 할 것이다. "죄가 존재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죄가 존재한다고 해도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며,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것이 잘 될 것이다."47) 또한 줄리안은 고난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게되면 고난을 야기하는 문제의 근원을 보는 비판적 시각이 흐려질 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시련과 고뇌가 마치 너의 모든 결점이라도 되는 것인 양 네 자신을 너무 많이 탓하지 말라. 네가 경솔하게 가혹하거나 비탄에 잠기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48)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정화하고 참 자아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참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나는 죄를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가 여하한 종류의 실체도 없으며, 여하한 존재도 없으며, 그것이 일으키는 고통을 제외한다면 죄는 알려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은 우리를 정화하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알게하고 자비를 구하게 합니다."49) 

줄리안의 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성과 두려움에 떨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끌어올려 환희로 이끄시는 궁극적 하나님의 축제성, 즉 충만한 기쁨(gaudium plenum)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충만한 기쁨에로 이끄십니다. 우리의 길과 우리의 하늘이 신실한 사랑이며 확실한 신뢰입니다."50)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빈번한 실패들 때문에 슬픔에 잠기기 보다는 하나님의 완전한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다."51)

아우구스티누스가 추구하였고 안셀름이 이어받은 지성을 추구하는 신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의 방법론처럼 줄리안은 믿음을 전제로 하되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열망을 놓아버리지 않는 것이다. "충만한 기쁨은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5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고통에서 돌이켜 우리가 신뢰하고 앞으로 우리의 것이 될 기쁨으로 옮기는 것입니다."53)

 

4) 희망을 품고: 줄리안과 엘리엇

줄리안의 신학언어의 배경에는 중세 기사문학적 특성이 배어있다. 하나님을 열망하고, 그 합일을 추구하는 것은 중세문학의 뚜렷한 특징가운데 하나인 기사도적인 열정적 사랑과 비교되기도 한다. 줄리안이 보여준 "사랑과 열정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우리와 함께 하였고, 십자가에 달리신 해방자의 고뇌와 생생한 상처를 안은채 자신을 나타냈던 한 남자를 위한 것이었다."54) 민네(Minne)와 십자가, 사랑과 고난등의 연관성은 중세 신비신학에서 등장하는 주요 특성이다.55) 그러나 줄리안에게는 영적 신랑(Seelenbrautigam) 혹은 민네 그리스도 사상(Minne-Christus)보다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중심에 있다.56) 줄리안의 신비주의에서는 결코 고귀한 여성을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면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불꽃을 태우던 중세 기사의 사랑과는 달리, 사랑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향유되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합일됨을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 시인 T.S. 엘리엇은 줄리안의 신비주의와도 연관되어 있는 신비주의적 특성을 지닌다. 그는 신비주의와 시와의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비주의와 어떤 종류의 시 또는 시가 만들어지는 어떤 종류의 상태 사이에는...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습니다."57) 그의 시세계에는 신비주의적 요소가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아일랜드 출신의 신비주의 연구의 대가 윌리암 존스톤은 엘리엇을 근대의 신비주의가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58) 엘리엇은 일찍이 "직관적인 순간, 우주를 진동시키는 순간, '회귀하는 세계의 고요한 정점(the still point of the turning world)'"에 관심하였다.59) 존스톤은 엘리엇의 대표작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에서 불교의 선의 상태와 가까운 표현들이 많이 있음을 또한 주목한다. "음악은 너무 깊이 들려, 전혀 들리지 않네. 그러나 당신이 음악인 것을 음악이 지속되는 한..."60)

전체 5부로 되어있는 엘리엇의 "네 개의 사중주"의 구조는 앞서 에벌린 언더힐이 말한 신비

주의적 심리적 다섯단계와 유사한 것이다.61) 제 5부는 부정적 절망의 경험을 벗어나 합일의

단계에 이르는 긍정의 부분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엘리엇은 줄리안을 인용하는 것이다. 엘

리엇이 이 시에서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랑과의 합일이며, 스스로 사랑이 되

는 것이다. 고난과 어두움의 과정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닫는 단계로 보여진다. 이러한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두운 회의의 과정까지도 감수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는 하나님

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되고 무지로부터 벗어나 지혜의 길에 이르러 하나님과의

합일이 가능하여 지는 것이다.  "네 개의 사중주"의 주제는62) 버언트 노오튼(Burnt Norton

1935), 이스트 코우커(East Coker 1940), 드라이 셀비이지스(Dry Salvages 1941), 리틀 기딩

(Little Gidding 1942) 이다. 이 시의 가장 주요 특성가운데 한가지는 시간성이다. 버언트 노

오튼은 존재의 무시간성, 무의미성과 영원한 현재성을 다루고 있다. "네 개의 사중주"의 마

지막인 리틀 기딩에서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 다른 시와는 조금 다른 점이다.

그곳은 혁명 후에 패배한 찰스 1세가 피신왔던 곳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연상되

기도 하는 비극의 장소이다. 이러한 곳에서 시인은 줄리안의 언어들을 끄집어내어 자신의

시를 마무리짓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정화한 인간은 새로운 희망을 느끼게 된다. 그

희망은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All shall be well)"63) 

 

줄리안은 궁극적으로 "사랑이 우리 주님의 의미(Love is our Lord's meaning)"라고 말한다. 요한 1서 4장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성서적 진술은 두려운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출산의 아픔을 몸소 겪고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풍만한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선한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이 지닌 선은 하나님입니다."64) "나는 하나님이 선한 모든 분이시고, 기운을 북돋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65) 줄리안의 신비스런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는 나를 사랑하며 우리의 사랑은 결코 둘로 나누이지 않을 것이다...내가 그대를 돌보고 있다. 나를 믿어라."66)

줄리안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은 것으로 그의 책을 매듭짓고 있다. "너는 네 주님께서 이 계시들로 의미하는 것을 확실히 보기를 원하느냐? 그것을 잘 보거라. 네 주님께서 의미하신 것은 바로 사랑이었느니라. 그것을 네게 보여 준 분은 누구였는가? 사랑. 네가 본 것은 무엇이었는가? 사랑. 그것은 왜 보여졌는가? 사랑을 위해서."67) 그것은 지금은 우리가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가 되면 분명히 보게 될 일들이다.(고전 13:12) "지금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비밀한 계획들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68)

엘리엇은 리틀 기딩에서 모든 것이 잘되리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희망의 끝없는 가능성을 말하였다. 이것은 줄리안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승리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 합일의 온전한 모습은 지금은 우리에게 이해되고 파악되지 않고 감추어 있을지라도 그 날에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질 것이다.

 

III. 나가는 말

줄리안의 신비주의 신학은 중세말기에 고난의 압박이 심한 상황가운데 등장하였으며, 인간이 곤궁과 무기력함에 휩슬려 버리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하여 끈기있게 저항하는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 소통으로 무기력하고 메말라버린 제도권 성직주의에 대한 도전을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69) 줄리안의 시대는 앞서 언급했듯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한 고난의 시대였다. 몸의 중요성, 육체의 건강함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간절하였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영지주의적 탈육체성이 아니라 몸과 물질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것이 줄리안 신비주의의 묘미이다. 그에게서 신과의 합일을 주장하는 수직적 신비주의는 피조물과의 어우러짐과 윤리를 촉구하는 수평적 신비주의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황홀경을 최고의 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며, 현실을 망각한 자아도취나 광신적 열광주의를 경계하였다.70) 줄리안의 신비주의는 비지성적 열광주의, 비현실주의와는 전적으로 거리감을 둔 채 발전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줄리안의 신비주의에는 고난의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고난을 미화하며 중세기적 금욕주의와 연관된 자학증도 아니었다. 불의를 용인하며 억압당하는 이들에게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고난의 문제가 작용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고난의 상황에서 현실도피적, 탈 세계적 황홀경에 젖어들게 하는 것은 더우기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승화된 고난이며, 궁극적으로는 온 피조물의 온전한 회복으로, 충만한 기쁨으로 인도되는 것이었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극복된 고난이었기 때문에, "희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함"71)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피조물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주어진 고난의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적 기독론에 토대를 둔 줄리안의 신비주의는 고난을 야기하는 현재에 저항하며,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희망을 역설하는 힘을 지녔다. 그리고 세계내적 신비주의, 일상성과 연결된 신비주의의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줄리안의 신비주의는 고난의 문제와 씨름하며 억압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이들과의 연대감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그래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속에 생겨난 각양각색의 고난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의 신비스런 합일을 열망하는 신학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중세라는 시대적 제한성을 너머서서 줄리안의 신비주의 신학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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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랑안에서의 현존
글쓴이 : insigh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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