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교회사2 교실

[스크랩] 노리치줄리안-연민

류성련 2014. 9. 10. 22:25

 

 


2.2. 주인과 종의 비유


계시 14의 「긴 책」51장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주인과 종의 비유는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인간이 맺는 친밀한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성경적 바탕을 가지는데8) 창세기 3장의 인류의 타락,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52-53장),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루카 15장), 포도원 일꾼의 비유(마태 20장) 그리고 로마서 5장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줄리안은 환시에서 편안하게 앉아 있는 주인과 그의 뜻을 행할 준비를 하고 그 앞에 서 있는 종을 본다. 주인은 종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그에게 사명을 주어 보낸다. 종은 열망을 가지고 떠나지만 골짜기에 떨어져 심한 상처를 입는다. 그의 가장 큰 고통은 위로가 없다는 것인데, 그가 주인에게로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줄리안은 종의 7가지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넘어짐, 몸의 무거움, 그 결과 따라오는 나약함, 마음속의 혼란으로 점점 희미해져가는 주인에 대한 사랑, 일어설 수 없음, 홀로 누워 있어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음, 누워 있는 곳의 좁고 불편함이다.

     줄리안에게 ‘죄’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nothing), 인간의 삶 안에서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 자기 비난, 수치심 등의 고통(pain)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이 죄에 묶이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몰입은 하느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망각하게 만들고 절망과 무가치함으로 좌절하게 만든다.

  

          나는 종이 이 모든 고통을 어찌 그토록 온순하게 참으며 견뎌낼 수 있는지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무슨 잘못을 찾을 수 있는지 또는 그의 주인이 그에게 책임을 물어 무슨 비난이라도 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으나 정말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떨어지게 된 원인은 단지 그의 선한 마음이었으며 주인의 명을 따르려는 그의 열망이었습니다. (LT 51)


종이 골짜기에 떨어진 것은 고의적이거나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주인의 뜻을 행하려는 선한 의지와 갈망을 가지고 노력했음에도 실수로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종이 곤경 중에 있는 동안 주인은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종은 주인을 바라보지 못 하고 주인의 시야 안에 있는 자신을 진실로 볼 수도 없다. 주인이 그의 종을 어떠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주인은 종을 두 가지 태도로 바라보십니다. 외적으로 커다란 연민을 가지고 온유하고 자비롭게 그를 바라보십니다. 또 주인은 내면적이고 영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나의 이해력이 주인한테로 이끌려 들어갔을 때 계시되었습니다.〔…〕그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사랑받는 종을 보아라,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봉사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불행을 당했다. 그것은 그의 뜻이 선했기 때문이다. 그의 놀람과 두려움, 상처와 모든 근심에 보답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그가 상처를 입지 않았을 때보다 좀더 영예롭고 그에게 더 좋은 선물을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례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여기서 주인의 영적 계시의 의미가 내 영혼에 주어졌습니다. 나는 그의 사랑받는 종이 넘어지지 않았을 때보다 더 큰 상을 받게 될 것이고, 고통은 영원한 축복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LT 51) 


주인이 종에게 가지는 동정과 연민은 우리가 죄 때문에 겪는 고통 중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지시는 연민을 묘사하는 것이다. 주인이 그의 종에게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죄인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께서는 비난과 책망이 아닌 연민으로 죄인을 바라보시며, 더 나아가 그가 인내한 고통에 대하여 놀라운 보상과 축복을 계획하고 계시다.

     줄리안은 주인의 연민과 기쁨의 이중 태도를 계시 14의 다른 장에서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이 보는 방식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을 비난하고 하느님의 선은 호의적으로 인간을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인이 넘어지는 종을 보는 이중의 태도입니다. 하나는 외적으로 연민과 동정으로 드러나고 다른 하나는 내적으로 지속적인 사랑과 정의로 계시됩니다.〔…〕우리는 자신이 넘어진 것과 거기서 비롯된 모든 어려움을 진지하게 보고 인정하며, 우리 힘으로는 결코 그것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으시는 영원한 사랑과 풍성한 자비를 참되게 보고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보고 아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온순한 자책입니다.〔…〕나는 그 계시의 두 가지 양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의 비참한 타락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하시는 영광스러운 속죄입니다. 우리가 낮은 부분에서 가지는 삶과 능력은 더 높은데서 오는 것으로서 그것은 은총에 의해 자아에 대한 본질적 사랑으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개입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랑이고 우리 안에서 이중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복된 사랑입니다. (LT 52)


이어서 주인이 앉아 있는 자세와 장소, 옷의 모양, 색깔, 주인의 외모 그리고 내면의 고결함과 선함 등을 묘사하고, 종이 서 있는 장소와 자세, 그가 입은 옷의 종류와 색깔과 모양, 그의 외적 행위, 내면의 선함과 준비성 등을 묘사한다. 그리고 주인과 종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덧붙인다.


          나는 편안하고 평화롭게 앉아 있는 주인은 하느님을, 주인 앞에 서 있는 종은 아담을 상징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보였는데 그 사람이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은 모든 인간과 인간이 죄에 떨어지는 것에 대해 하느님이 어떻게 여기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이며 또한 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인 것입니다.〔…〕성부의 연민과 동정심은 그의 가장 사랑받는 피조물인 아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쁨과 행복은 성부와 같으신 그의 사랑받는 아들의 넘어짐(falling)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스러운 얼굴의 자비로운 표정은 모든 땅에 가득 차고 아담과 함께 지옥으로 내려가 이 항구한 연민으로 아담은 영원한 죽음에서 보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비와 동정은 우리가 하늘에 이를 때까지 사람들과 함께 머무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현세에서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성부,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종 안에는 삼위일체 중 제 2위가 포함되고 또한 아담, 즉 모든 사람이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자’라고 말할 때 성부와 똑같은 신성 그리고 ‘종’이라고 말할 때 아담인 그리스도의 인성을 의미합니다.〔…〕주인은 성부, 하느님이시고 종은 예수 그리스도, 성자이시고 성령은 그 둘 안에 있는 똑같은 사랑이십니다. 아담이 넘어졌을 때 하느님의 아들도 넘어졌습니다.〔…〕아담은 생명에서 죽음으로 이 비참한 세상의 골짜기로 그리고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담과 함께 아담의 가장 어여쁜 딸인 처녀의 자궁 속으로 떨어졌으며, 이는 아담을 죄로부터 구하려는 것으로서 성자께서는 큰 능력으로 아담을 지옥에서 구해내셨습니다. (LT 51)


줄리안은 그 종이 일차적으로 아담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인성을 취하고자 처녀의 자궁 속으로 떨어진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설명한다. 곧 계속된 묵상을 통해 종이 모든 인류를 상징하는 아담과 삼위일체의 2위인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에서 ‘처녀의 자궁 속으로 떨어졌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라하밈(????????)의 ‘상처 입은 자궁, 전율하는 자궁’의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아담이 생명에서 죽음으로 떨어져 지옥으로 들어가자 하느님의 아들은 지옥으로부터 아담을 구하고자 아담과 함께 지옥까지 떨어진다. ‘아담이 넘어졌을 때 하느님의 아들도 넘어졌습니다(When Adam fell, God's Son fell)’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고 모든 인간의 죄를 감당하고자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그의 연민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처럼 주인이 보여주는 측은한 연민의 정은 고의가 아닌 부주의로 죄를 지은 아담을 향한 것이며, 내면적으로 나타나는 기쁨은 아담을 구원하고 원래 주려고 했던 것보다 더 큰 상을 마련하는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다.

     줄리안은 원죄로 인하여 생겨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between)보다는 근원적 축복을 통한 하느님과의 합일(oneing)과 연민(compassion)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비유에 대한 오랜 묵상을 통해서 그 간격이 성자에 의해 메워진다고 확신한다. 성자는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기 때문이다. 비유에서 그 결합은 종이 입은 의복의 이미지 안에서 구체화된다. 줄리안은 처음에 종의 옷이 얼룩지고 짧고 낡았으며 초라하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부활 후에 그것은 넉넉하고 깨끗하고 완전하게 표현된다.

     주인과 종의 비유를 통하여 줄리안은 우리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하느님의 지속적인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인은 종에게 정의로운 심판관보다는 연민을 가진 치유자로서 묘사된다. 줄리안이 보는 하느님은 분노하여 심판하는 하느님과는 대조적이다. 연민의 마음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고 당신의 종을 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3. 그리스도의 연민


그리스도의 연민은 우리 죄를 대신 감당하는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성성 안에서 잘 드러난다.


3.1. 그리스도의 수난


그리스도 수난은 줄리안 계시의 시작이며 계시 전반에 걸쳐 흐르는 핵심적 요소이다. 수난의 모습은 계시 1, 2, 4, 8에서 잘 드러난다. 이 계시들을 통해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 멸시, 침 뱉음, 매 맞음, 계속되는 고통 등 그리스도가 당한 수난의 일부와 변해가는 얼굴색을 본다. 또한 채찍질당한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고여 넘치는 광경, 큰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그리스도의 얼굴과 모습을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내가 좀더 고난을 겪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줄리안은 그리스도의 수난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으며 이것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마지막 날까지 모든 사람들이 상상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분의 선하심은 언제라도 다시 인간을 위하여 수난을 당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이해한다.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고자 하는 하느님의 연민이 그리스도 육화의 신비를 이루었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수난의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신다.


          주님은 구원될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연민과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의 슬픔, 외로움, 고뇌를 보았고 슬퍼하였습니다. (LT 20)


줄리안은 그리스도 수난의 목적을 구원과 위로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서 죄에서 깨끗해져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우리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또한 절망과 고통의 상황에서 힘과 위로를 얻는 것이다. 이것은 연민의 계시라고도 부르는 계시 13에 잘 나타난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죄 때문에 얼마나 우리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는지 보았습니다.〔…〕이 연민에서 예수님의 수난이 보여주는 모든 자기 낮춤이 다시 보여졌습니다. 주님의 의도를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으로 그분은 우리가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다른 하나는 고통 안에서 위로와 힘을 주시려는 것으로, 당신 수난의 힘에 의해 모든 것이 영예와 이익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홀로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기 바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근원을 당신 안에 두고, 당신의 고통과 시련이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능가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안에서 그분의 뜻을 잘 관상한다면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좌절하고 비통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죄가 마땅함을 진실로 안다 하더라도, 그의 사랑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는 커다란 호의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죄 없는 아이를 보시듯이 연민과 자비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LT 28) 

그리스도의 연민은 우리 죄에 대한 신적 응답이다. ‘주인과 종의 비유’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또한 우리를 비난하지 않고 용서하신다. 더욱이 그는 우리 죄에 대한 고통을 실제로 짊어지신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고자 하시는 연민을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몸소 고난을 지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연민이란 자신보다 못한 존재에게 갖는 감상적 느낌이 아니라 함께 겪고 일치를 공유하는 행위로 고통에 실제 참여하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기 위하여 당신 수난의 얼굴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 수난에서 보여지는 연민의 계시를 통하여 우리는 고통중에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연민에서 흘러나오는 계시는 그분 자신이다. 곧 하느님의 연민은 그리스도라는 계시의 목적이자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줄리안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임박했을 때 겪으신 수난의 광경인 계시 8에서 그리스도의 두 가지 목마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이것은 육체의 목마름과 영적 목마름인데,「긴 책」17장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수난의 모습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줄리안은 이 고통을 보고 아파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겪는 고통과 구원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된다. 또한 이러한 육체적 목마름은 계시 13에서 ‘영적 목마름’으로 지속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그의 연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21) 줄리안은 이 연민을 ‘목마름(thirst)’과 ‘갈망(longing)’으로 표현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가졌던 것과 같은 목마름과 갈망을 여전히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본 바 그 갈망과 목마름은 태초부터 그분 안에 있었고, 구원될 마지막 영혼이 그분의 축복 안으로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그러하실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자비와 연민의 속성이 있듯이 목마름과 갈망의 속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갈망의 힘으로 우리도 그분의 갈망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이 갈망 없이는 어떠한 영혼도 천국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연민이 그분의 영원한 선에서 나오듯이 갈망과 목마름도 하느님의 영원한 선에서 나옵니다.〔…〕이것은 영적 목마름의 특징으로 우리가 궁핍한 상황에 처해 있는 한, 그분 안에서 지속되며 우리를 그의 기쁨 안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연민을 계시하기 위해 주어졌으며, 심판의 날에 끝날 것입니다. (LT 31)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이 이루어지자 그의 육체적 목마름은 영적 목마름으로 변화한다. 그는 우리가 그와 하나가 될 때까지 연민을 가지고 인내롭게 우리 안에서 고통스러운 목마름과 갈망을 겪으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연민은 그칠 것이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연민은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를 이루어내고, 그리스도 수난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의 죄에 아파하는 연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님은 모든 인간의 고통을 완전하게 함께 겪으시고 우리를 그와 하나되게 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수난으로 우리 고통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신다.






3.2. 그리스도의 모성성


 ‘어머니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형용사와 부사로 ‘친절한(kind), 사랑스러운(loving), 부드러운(tender), 상냥한(sweet), 자비롭게(mercifully), 온화하게(tenderly), 정중하게(graciously)’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 ‘tender’는 compassion과 성경적 개념에 있어서 유사성을 지닌다.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본능적 사랑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라하밈(????????)’이 compassion이나 tender- ness로 번역된 것이다.

     줄리안은 모성성을 나타내는 풍요로운 이미지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연민을 품은 그리스도의 모성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그녀는 모성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나는 하느님 안에서 세 가지 관상의 방법으로 모성을 이해했습니다. 첫번째는 우리 본성의 창조 근원이고, 두 번째는 그분이 우리 본성을 취한 것으로서, 여기서 은총의 모성이 시작됩니다. 세 번째는 행동하는 모성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동일한 은총에 의해 모든 것은 길이와 넓이, 높이와 깊이에 있어 끝없이 확대됩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의 사랑입니다. (LT 59)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모성성을 창조양육 그리고 섬김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3.2.1. 창조


줄리안은 성자의 두 가지 본질을 ‘본질적 창조에 있어서 우리 근본이 되는 어머니와, 우리 감각적 존재를 취하는 자비의 어머니’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자비로 수난과 죽음, 부활을 거치며 성삼위 하느님과 결합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우리 삶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부분 안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둘째 부분 안에서 성장하며, 셋째 부분 안에서 충만해집니다. 첫째 부분은 본성이요, 둘째 부분은 자비이며, 셋째 부분은 은총입니다. 첫번째에 대하여 나는 삼위일체의 크신 힘이 성부이며, 삼위일체의 깊은 지혜가 우리 어머니이시고, 삼위일체의 위대한 사랑이 주님이라는 것을 보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본성과 본질적 창조 안에서 가지게 됩니다. 또 나는 본질적으로 사랑받는 어머니이신 두 번째 위격이 이제 감각적으로 우리 어머니가 되심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에 의해서 이중의 존재, 곧 본질적인 동시에 감각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보다 높은 부분으로서, 그것은 우리 아버지 전능하신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은 본질적 창조 안에서 본성적으로 우리 어머니이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 근원의 뿌리를 내립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감각적 존재를 취하신 자비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어머니는 우리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시며, 그분 안에서 우리가 조각들로 나누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존재합니다. 우리는 어머니 그리스도 안에서 도움을 얻고 성장하고, 그분은 자비로 우리를 교정하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본질적 존재와 일치되도록 도와주십니다. (LT 58)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우리 육체는 육화된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된다. 곧 우리 감각과 본질적 본성은 죄로 인하여 분리되었고, 이는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모성성은 우리의 감각을 취함으로써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고 하나가 되고자 하는 그리스도 연민의 이미지로 이해될 수 있다.28)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뿐 아니라 우리 자신과 화해시킴으로써 새로운 탄생 안에서 우리 어머니가 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육신의 어머니는 우리를 낳아 고통과 죽음을 겪게 하지만, 참된 어머니 예수님은 우리를 기쁨과 영원한 생명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가장 극심하고 잔인한 고통을 겪기 원했던 그 충만한 시간까지 사랑과 산고 안에서 당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그러나 이 모든 것도 그의 놀라운 사랑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만일 더 겪을 수 있다면 나는 더 많이 고난을 겪을 것이다”라는 사랑의 말씀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LT 60)


그리스도는 우리의 물질적 삶과 정신적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셨다는 의미에서 우리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어머니가 자녀의 탄생을 위해 모든 고통을 견디어내고 수고하는 것처럼, 어머니 그리스도 또한 우리의 영적 탄생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짊어지신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보다 더한 고통까지도 기꺼이 감수하기를 바라시는 관대함에서 육신의 어머니를 능가한다고 하겠다.


3.2.2. 양육


줄리안은 또한 그리스도를 자신의 자궁에서 출산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 우리를 새롭게 탄생시키고 양육하시는 근원으로 바라보신다. 기르고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모성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으며,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성체성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어머니는 자녀에게 젖을 물리지만 우리의 고귀한 어머니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참 생명의 고귀한 양식인 복된 성체로 가장 정중하고 부드럽게 먹이시고, 가장 자비롭고 은혜롭게 우리를 부양해 주십니다.〔…〕어머니는 자녀를 부드럽게 품에 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드러운 어머니 예수는 우리를 그의 열려진 옆구리를 통해서 그의 복된 가슴 안으로 이끄시고, 거기서 영원한 축복의 내적 확신으로 하느님과 천국의 기쁨을 일부 보여주십니다. (LT 60)


하느님은 우리가 넘어지면 사랑으로 안아 일으켜 주신다. 그러나 그 후 어떤 사람들은 전보다 더 심각하게 넘어지는데 이것 또한 하느님은 허락하신다. 우리에게 있어서 넘어짐은 필요하다. 만일 넘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약한 존재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창조주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넘어짐과 비참한 죄가 드러날 때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나 이때 주님은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것처럼 당신에게 매달리고 도움을 구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지혜로운 어머니께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어머니 그리스도는 우리가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시면,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면서도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것이 어머니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시다. 주님은 우리가 행복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어머니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는 어린아이의 본성을 취하기를 원하신다.

     줄리안은 우리가 넘어지지만 다시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리게 되는 이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 연민의 사랑에서 온다고 한다. 우리가 죄로 낙심하더라도 거룩한 교회는 낙심하지 않는데, 거기에는 자비의 양식 즉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는 주님의 사랑스러운 피와 물이 풍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줄리안은 어머니 그리스도의 손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를 친절한 간호사로 표현한다. 그녀는 고통에 머무르기보다는 연민을 가진 어머니 그리스도가 주실 수 있는 치유와 위안을 강조하고 있고, 반복해서 수치가 영광과 기쁨으로 바뀔 것을 말하고 있다.


3.2.3. 섬김


줄리안은 모성에 속하는 모든 아름다운 일과 사랑스럽고 친절한 섬김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일이라고 말한다.32) 그녀는 그리스도의 섬기는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세 개의 단어를 사용한다.


     어머니의 섬김은 가장 가깝고(nearest) 가장 잘 준비되어 있고(readiest) 가장 확실합니다(surest). 자연스럽기에 가장 가깝고, 사랑스럽기에 가장 잘 준비되어 있으며, 진실하기에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LT 60)


줄리안이 말하는 섬김은 자비의 섬김으로 모성의 ‘자비와 은총’에 관한 것이다. 모든 것 안에서 완전히 우리 어머니가 되기를 바라시는 그리스도는 동정녀의 자궁 안에서 자신을 낮추어 준비하셨고, 모성에 속하는 의무와 섬김을 행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셨다. 그분 외에는 완전한 섬김을 행할 수 없고 또 아무도 이루지 못했다. 하느님의 모성적 측면으로 돌아감은 바로 삶의 길인 자비로 되돌아감을 뜻하며, 이러한 모성성은 정적으로 머물러 있음이 아니라 움직임과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그는 자주 사랑스러운 연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자비의 근원은 사랑이며 자비의 작용은 사랑 안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자비는 풍부한 연민과 섞여 사랑 안에서 사랑스럽고 친절하게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자비는 우리를 보호하며 모든 것을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변화시켜 줍니다. 자비는 사랑 때문에 우리가 어떤 한계에서 실패하는 것을 허락하며, 우리는 실패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넘어지기 때문에 죽습니다. 우리는 생명이신 하느님을 보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죽습니다. 우리의 실패는 두렵고 수치스럽고 우리의 죽음은 슬프지만, 이 모든 것에도 사랑스러운 연민의 눈이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자비의 작용은 그치지 않습니다. 나는 자비와 은총의 특성을 관상하였고 그것은 하나의 사랑 안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작용합니다. 자비는 부드러운 사랑 안에서 모성에 속하는 연민을 지닙니다. 그리고 은총은 동일한 사랑 안에서 왕의 통치에 속하는 영예로운 특성입니다. 자비는 부드러운 사랑으로 보호하고 인내하고 생기를 주고 치유해 줍니다. 그리고 은총은 그의 놀라운 호의 안에서 관대하고 풍성한 하느님의 고귀한 통치를 보여주고 나누면서, 우리의 사랑과 노고가 받을 만한 것을 넘어서서 끝없이 북돋우고 보답하면서 자비와 함께 작용합니다. (LT 48)


줄리안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성성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변함없이 가지고 계신 목마름과 갈망을 그의 연민과 연관시킨다. 어머니 그리스도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만 구원은 당신의 자비와 은총으로 가능하기에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당신 안에서 영적 탄생을 이룰 때까지 목마름과 갈망을 가지고 섬기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일하신다. 행동하는 어머니 그리스도의 섬김 안에서 인간에 대한 친밀한 사랑, 연민의 사랑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모성성을 나타내는 특징으로 창조와 양육 그리고 섬김의 주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는 연민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서 출산의 고통을 겪듯이 어머니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음을 겪으신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젖을 물리듯이 어머니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으로 우리를 먹이고 기르신다. 어머니가 아이를 부드럽게 품에 안듯이 어머니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가 된다. 육체적 탄생을 가져오는 어머니처럼 어머니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 탄생을 가져다준다.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고 훈련시키는 어머니처럼 사랑이 가득한 어머니 그리스도는 우리가 넘어지는 것을 허락하시고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우리를 단련시키신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모성성은 인간에 대한 친밀하고 품어 안는 연민의 사랑으로 인해 인간의 감각을 취하시고 탄생, 성장, 그리고 새로운 탄생의 과정을 친히 함께 겪으면서 우리와 하나가 되고자 하신다.








출처 : 쉽게 쓰여진 시
글쓴이 : 깜장보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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