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성격심리와 종교교실

[스크랩]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류성련 2014. 9. 13. 22:43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지음  옥성호 (부흥과 개혁사, 2008)

     요약  권영배 (2009.05.18 ~ 06.12)

 

 

 

  목  차

추천의 글 - 100년 논쟁 : 오늘날의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독자에게 드리는 글

글을 열며 : 말씀이냐 체험이냐

 

1부. 사도행전의 방언

01  방언의 첫 번째 등장 : 오순절 사건

02  방언의 두 번째 등장 : 사마리아인 회심 사건

03  방언의 세 번째 등장 : 고넬료의 회심 사건

04  방언의 네 번째 등장 : 에베소 세례 요한 제자들 회심 사건

05  사도행전 방언 사건의 결론 : 예언 성취를 통한 구속사 완성

 

2부. 고린도전서의 방언

01  고린도전서 방언 이해를 위한 배경

02  고린도전서 12장 : 은사의 본질

03  고린도전서 13장 : 은사보다 귀한 것과 온전한 것의 도래

04  고린도전서 14장 : 방언의 본질과 역할

 

3부. 오늘날의 방언

01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닌 이유

02  오늘날의 방언 열풍이 줄 수 있는 위험들

 

글을 닫으며 :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부록 : 예언의 은사

 

추천의 글 

100년 논쟁 : 오늘날의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

하나, 은사 문제에 대한 상반된 두 입장

  ‘오늘날에도 신약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은사가 계속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지붕 아래 너무 많은 부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어, 복음주의 운동이 잡종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대답은 너무 다양합니다. 그러나 크게 찬성, 반대의 두 가지 상반된 견해로 나뉩니다.

  첫째, ‘은사 중지주의’(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는 오늘날 중지되었다고 믿는 사람들)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개혁주의 신학’(장로교, 개혁파 침례교)과 ‘세대주의 신학’(미국의 침례교안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둘째, ‘은사 지속주의’입장에는 크게 3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성령 운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①구오순절 운동

(1901년 오순절 교단)

②신오순절 운동

(1960년대 은사주의 운동)

③제3의 물결운동

(빈야드 능력 운동)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

(1)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지속된다.

(2)성령세례는 회심 이후 능력을 받는 체험이며, 모든 신자들은 이 성령세례 받기를 추구해야 한다.

(3)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다

◆오순절 운동의 핵심 : 방언

 제2의 축복으로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성령세례의 유일한 증거가 ‘방언’이므로 예수 믿고 가장 강력하게 사모하고 추구해야할 것. 그래서 오순절 운동을 ‘방언운동’(방언파=오순절교단)이라고 함.

◆기존의 전통적인 다른 교단들이 자신들의 교단에 그대로 머물면서 오순절교단의 ‘성령운동’에 동조하며 참여하는 사람들의 입장

◆성령의 모든 은사가 오늘날 지속된다는 것에는 동의 하지만, 성령세례가 회심 이후의 두 번째 능력 체험이라든지, 성령세례의 증거가 반드시 ‘방언’이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음.

 

 

 

 

◆1980년대 피터 와그너 교수와 빈야드교회 목회자 존 윔버가 중심이 된 성령운동.

◆제1물결(구오순절운동), 제2물결(신오순절운동), 제3물결(표적과 기사를 중심으로 하는 성령운동)

◆‘은사 지속주의’입장은 취하지만, 성령세례가 회심 이후의 경험적 사건이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고, 방언도 크게 강조하지 않으며, ‘표적과 기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른 성령 운동과 차별화되며, 능력 운동 이라고 함.

 

 

둘,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대중적 대변을 하게 될 옥성호의 방언론

  사실 교회의 역사에서 19세기까지는 ‘은사 중지론’이 교회의 주류요, 대세였습니다. 20세기 오순절 운동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은사 중지론의 입장이 초대 교회 교부들인 크리소스토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견해였으며,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였으며, 존 오웬, 토마스 왓슨, 매튜 헨리 등의 청교도들의 견해였으며,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 나 조지 휫필드의 견해였으며, 19세기 위대한 설교자들인 스펄전과 존 라일의 견해였으며, 20세기 위대한 신학자들인 워필드 등의 견해였습니다.

  ‘은사 지속론’은 초대 교회 때부터 19세기까지 주로 이단이나 열광주의적 사이비 집단이 취한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구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 제3의 물결 운동이 확산되면서 ‘은사 지속론 견해’는 크게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오순절 신학자들의 활약으로 은사 지속론의 입장도 나름대로의 성경적인 근거와 해석을 바탕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 있는 예언과 방언과 같은 계시와 관련된 은사들에 대해서는 그 동안 ‘은사 중지에 대한 입장’과 ‘은사 지속에 대한 입장’으로 나누어져 토론과 논쟁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이 논쟁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 교회에 소개된 방언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은사 지속주의 견해’를 지닌 오순절 신학의 입장에서 씌어진 책들입니다. 따라서 오순절 방언 신학이 한국 교회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옥성호 형제의 이번 책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의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방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셋, 옥성호가 이런 방언에 대한 책을 쓸 자격이 있는가

  이번 책은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와는 달리 구체적인 성경 본문 해석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과 토론합니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을 한 학자들의 글에 대해서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들을 제시하며,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학자들의 성경 해석은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로 삼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호 형제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14장의 주해를 둘러싼 주석가들의 견해를 나름대로 분석, 평가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건전한 성경 해석을 도출해 나갑니다. 이 정도의 성경 해석에 대한 토론 능력은 이미 수준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성도의 신학적 소양과 실력에 감탄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 이렇게 성경 본문을 해석할 만한 권위나 능력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부는 꼭 학교에 입학을 해서 학교를 다녀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공부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 공부 역시 반드시 신학교를 다녀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저술하기 위해 성호 형제가 읽은 고린도전서 12~14장의 주석과 관련된 책들과 은사 문제, 또는 구체적으로 방언과 예언에 관련된 책은 그리 적은 수가 아닙니다. 현재 한국의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나 목회를 하는 목사 중에서 ‘방언’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현재 이책을 저술한 성호 형제 만큼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한 분이 얼마나 될까요? 적어도 성호 형제는 방언에 대한 이 책을 쓰는 데 있어 국내외의 어떤 사람보다 방언과 은사분야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이미 전문가 수준의 연구를 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 문제는 성경 연구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호 형제는 소위 현대 ‘방언 기도’에 대한 체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소리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성호 형제가 이 책을 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경은 방언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에 우리가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방언 체험을 성경이 말하는 진리 아래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부터 바른 진리를 수호할 ‘진리의 용사’들이 필요합니다. 2~3세기 초대 교회에는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교철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기독교를 변호했던 ‘변증가’들과 기독교 내부의 이단과 여러 불건전한 분파에 대해 바른 성경 해석과 신학을 지켜 냈던 ‘논쟁가’들이 큰 역할 감당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 루터와 칼빈,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 로이드 존스 등과 같은 영적 거장들은 한결같이 ‘진리 전쟁’의 최전선에서 논쟁을 통해 기독교의 바른 진리를 변호하고 수호했던 분들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에도 이런 진리를 위한 ‘논쟁가’의 계보를 잇는 훌륭한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신학자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성호 형제가 수많은 잘못된 견해들의 문제점을 바른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지적하고 바른 신앙의 길로 돌아오도록 토론하고 논쟁하는 일에 앞장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넷, 방언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분명히 하자

  아마도 이 책은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에 이어 또 다시 한국 교회에 큰 논쟁의 불씨를 제공하리라 예상됩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현재 ‘방언 반대’, ‘방언 찬성’, ‘방언 중립’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3부류의 사람 모두 큰 유익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방언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 일고 있는 ‘방언 열풍’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왜 오늘날의 방언 운동이 문제가 되는지를 잘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분들에게 이 책은 성경이 방언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둘째, ‘방언 찬성’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전통적인 오순절 교단에 속해 있든, 다른 교단에 속해 있으면서 은사주의 운동에 관여하고 있든 이미 오늘날의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은 왜 ‘방언’에 대해 문제삼는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방언 체험을 성경말씀으로 비추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물론 이 책을 읽은 후에도 자신의 방언 체험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방언을 금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더욱 확고히 하려고 하는 동기를 줄 것입니다.

  셋째는 ‘방언 중립’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방언’에 대해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를 깊이 연구해 보거나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아마 오늘날 다수의 목회자나 성도들이 이런 입장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방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앞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약 성경에 기록된 방언 은사가 계속되는가?’에 대한 진리는 분명 ‘예’와 ‘아니오’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둘 다 진리일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 연구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얻기까지 잠정적으로 중립적 태도를 취할 수는 있지만 계속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어중간한 태도로 일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방언’에 대해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는 데’ 촉매요,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독자에게 드리는 글

  ‘옥성호가 왜 갑자기 방언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는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실 독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3부작 중 마지막 남은 3편『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가 하루빨리 발간되기를 바라던 독자들은 ‘왜『엔부기』부터 먼저 마무리를 하지 중간에 다른 주제를 다루는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러합니다. 처음『엔부기』의 목차를 구상할 때,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로 ‘방언과 신유’ 등의 은사문제를 다룰 계획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책을 읽고 연구할수록 ‘오늘날의 방언운동’이 비성경적이며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또한 방언을 지지하는 물결이 너무 거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래부터 방언을 강조하면서 출발했던 오순절 운동에 속한 ‘순복음 교단’에서부터 ‘장로 교단’에 이르기까지, 정통 교단에서부터 각종 이단과 사이비 집단에 이르기까지 방언 열풍에 휩싸이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방언에 대한 저의 입장은 분명 거센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0년 전만했더라도 최소한 장로교로부터는 방언에 대한 저의 입장이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기대조차 하기 힘든 현실이 되었습니다. ‘방언 문제말고도 해야 할 다른 일이 너무 많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방언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엔부기』의 내용 중에서 은사 부분을 제외하고 신비주의와 노래 운동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생겼습니다. 팔복으로 유명한 김우현 감독이 쓴『하늘의 언어』가 출간되자마자 놀라운 속도로 대부분의 기독교 서적 베스트셀러 목록의 수위를 차지했으며, 연달아 방언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이 문제를 그냥 덮어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새로운 결심이 서게 되었습니다. 결국『엔부기』중 한 장에서 다루려던 ‘방언’에 대한 내용을 이제 한 권의 책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피하고 싶었던 주제에 대해 아예 정면으로 승부를 보게 되었습니다.『하늘의 언어』를 비롯한 방언을 강조하는 여러 권의 책이, ‘방언’ 문제를 결코『엔부기』의 한 장으로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님을 확신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주제일수록 모호하게 다루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부담스런 주제들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 싸울 일도 없고 논쟁할 일도 없습니다. 모호한 태도는 동의할 것도 없지만 거부할 것도 없는 셈이지요. 어쩌면 방언에 대한 많은 교회의 태도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방언에 몰두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방언을 부정하자니 부담스럽고 또 방언을 100%받아들이자니 부작용이 너무 만만찮고! 따라서 방언에 대해 적당한 원론적인 선에서 주의를 주면서 가능한 한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가 바로 오늘 많은 목회자들의 태도입니다. 과연 이런 모습이 평화의 모습이고 바른 태도일까요? 무관심으로 인한 표면상의 평화는 결코 바른 평화가 아닙니다.

  이 책은 방언에 대한 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위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책입니다. 은사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방언의 본질을 바로 파악하게 되면 방언이 교회 또는 개인 신앙에 있어서 차지해야 할 바른 위치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방언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작은 시도입니다.

  아마도 이 책으로 인해 한국 교회 안에 ‘방언 논쟁’이 일어나리라 예상됩니다. 논쟁이 벌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지만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논리와 이론이 사라진 싸움판은 잘못된 곳이지만 논리와 이론으로 최선을 찾는 과정인 논쟁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을 논쟁이 있을 수 없는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논쟁이 없다면 오히려 무엇인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이 세상에서 3년간 공생애를 사셨던 예수님은 끊임없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놓고 논쟁하셨습니다.

  진리를 바로 알기 위한 과정 중에 논쟁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논쟁을 두려워하거나 피해서는 안 됩니다. 기꺼이 그 논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논쟁을 진행할 때는 반드시 한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복음의 메시지에 동의하는 한 우리는 다 형제 자매라는 사실 말입니다. 여러 가지 신학적 주제에 대해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이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저는 방언에 대해 저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갖고 있는 분들도 형제로서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사랑이 빠진 논쟁은 말 그대로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들을 이론으로 굴복시킬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성경보다 체험이 주는 실제성에 더 기울어진 분들이 이 책을 통해 말씀의 가르침으로부터 도전을 얻기 바랄 뿐입니다. 그 다음은 성령께서 하실 몫입니다.

  제가 제기하는 이 논쟁의 목적은 말씀의 가르침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논쟁하지만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논쟁합니다. 제대로 순종하려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바로 깨달을 때 말씀에 바르게 순종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은 저를 일어서게 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이 책을 비생산적 논쟁의 산물로 보는 대신 순종을 소망하는 믿음의 열매로 봐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타협에 의한 일치가 아닌 순종에 의한 일치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이 책이 견지하는 입장에 읽는 분 모두가 다 동의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대 하나가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분이 성경 말씀에 대한 진지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방언 문제에 대해 ‘과연 성경은 방언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이 책을 읽는 모든 분의 마음 속에 타 오르기 바랍니다.

글을 열며 : 말씀이냐 체험이냐

방언 열풍 : 말씀을 향한 또 하나의 사탄의 공격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세상 모든 일이 두부 자르듯 정확하게 잘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성경의 가치 판단과 세상의 가치 판단이 충돌하는 영역은 점점 더 늘어 갑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을 힘들게 하는 것이 성경과 세상의 충돌만은 아닙니다. 같은 성경을 믿는 신자들 간의 충돌이 사실은 더 크고 심각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다 보면 성경 속에는 딱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운 많은 개념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장 흔히 사용하는 ‘기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상충된 주제가 서로 충돌하는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이처럼 성경 안에는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많은 주제가 있습니다. 이처럼 당연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대상까지도 막상 파고들어가면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주제가 가득 찬 성경 안에서 명확하게 정의 내려진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방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무엇이다.’라고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의 내려져 있습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고전 14:22).

  즉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다.’라는 정의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고린도전도, 로마서, 에베소서, 그리고 베드로후서 등 네 군데에 걸쳐 방언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이 중에서 방언이 언급된 곳은 고린도전서가 유일합니다. 따라서 만약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 주지 않았다면 방언은 참으로 쉽게 정의 할 수 없는 미스테리로 남았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 성경들 속에 언급된 은사들에 대한 정의는 성경 주석 학자마다 다 다릅니다. 한 예로 믿음의 은사를 비롯해서 많은 은사에 대해 바울은 전혀 설명하거나 정의내리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바울이 정의를 내린 유일한 은사가 바로 방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모든 은사에 있어서만은 서로 의견이 다르고 충돌할 수 있어도 방언에 대해서만은 일치된 신학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요?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방언만큼 신학적 견해가 극과 극으로 충돌하는 은사도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그런 위험을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일까요? 바울은 이 방언에 대해서만은 정말로 예외적이라고 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한 특정 은사에 대해 고린도전서 14장처럼 자세히 설명한 곳은 없습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도 한 특정 은사가 고린도전서 14장에서처럼 경계의 대상이 된 적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방언은 바울로부터 실로 특별한 관심과 대접을 받은 은사였습니다.

  방언이 가진 잠재적 위험 요소들을 이미 고린도 교회에서부터 발견한 바울은 방언을 분명히 정의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행동 지침까지 명시합니다. 바울이 방언을 그토록 특별하게 취급한 이유는 단 하나, 방언이 잘못 사용되는 일이 없도록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이 전혀 설명하지 않은 다른 많은 은사들보다 방언이 더 중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방언은 단지 다른 은사들보다 잘못 사용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은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 의도한 만큼 성경을 통해 방언을 제대로 공부하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바울이 그토록 심혈을 쏟아 설명한 방언에 대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방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주관적 견해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아직까지 성경이 정의하는 방언의 본질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과 본질에 비춰서 파악된 위치와 역할을 바로 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의 본질은 무엇이고 그 본질에 비추어 볼 때 방언이 신앙생활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이 무엇인지 바로 알 때 우리는 비로소 방언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가장 프로그래머티즘적인 은사, 방언

  제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썼듯이 마케팅이 오늘날 교회 속에 깊이 들어와 자리잡은 데는 ‘효과가 있으면 그 자체로 정당화된다.’라는 실용주의적 사고 때문입니다. 교회의 마케팅과 관련해서 하나의 잘못된 전제가 바탕에 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근거해서 무조건 사람들을 교회 속에 끌어다 모으면 된다는 잘못된 전제 말입니다. 기본 전제가 잘못되면 그에 따르는 다른 확신들도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오류를 우리는 방언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방언을 적극 지지하는 많은 사람의 경우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본질과 역할을 주의 깊게 살피기에는 방언이 주는 효과에 이미 너무 깊이 취해 있습니다. 이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오해가 마케팅을 부추기듯 많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방언에 빠져들게 하는 잘못된 전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이 못하는 한 우리는 ‘신비한 체험’을 ‘하나님의 임재’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언제라도 범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느끼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오해됩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가치 척도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입으로는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말씀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나의 체험을 검증하는 대신 나의 체험에 비추어 말씀을 왜곡합니다. 입으로는 말씀을 최우선으로 삼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말씀을 불신하고 경시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온다』라는 책을 쓴 하비 콕스Harvey Cox의 말대로 오늘날 교회 안의 현실은 말씀과 체험의 싸움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콕스는 결국 오래지 않아 체험이 말씀을 밀어 내고 더 이상 교리에 얽매인 교회가 아니라 개인마다 자유로운 체험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의 예상은 이미 현실이 되어 가는 듯합니다.

  말씀과 체험의 싸움은 생각만큼 단순하고 명료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경 말씀 속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경 문자보다 훨씬 더 크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고정관념으로 제한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런 하나님을 문자로 가두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는 듯 하는 말입니까? 그러나 사탄은 정말 교묘합니다. 사탄은 성경의 권위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법까지도 기꺼이 동원하려 합니다.

  체험과 성경의 싸움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려고 한다는 사람들이 정말 그런지 말입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제한하고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결국 말씀 너머에 있는 체험을 믿고 강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일 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내가 이렇게 느낀다는데 왜 나를 말씀으로 제한하냐?’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을 제한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의 체험을 제한해서 화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싸움의 중심에 있습니다. 체험 아래에 말씀이 놓이는지 말씀 아래에 체험이 놓이는지를 놓고 벌이는 큰 영적 전투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전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치열해질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는 성경이 정의하는 방언의 본질과 역할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분이 체험에 비추어 말씀을 해석하지 말고 말씀에 비추어 나의 체험을 해석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합니다.

 

고린도전서와 사도행전 사이의 상관관계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 약 3년간 머물던 AD 55년경에 씌어졌고, 사도행전은 AD 65년경에 씌어졌다고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동의합니다. 따라서 방언이 등장한 최초의 성경은 사도행전이 아닌 고린도전서입니다. 게다가 최초로 성경에 등장한 방언은 권장할 대상으로서의 은사가 아니라 조심하고 선별해야 할 대상의 은사로서 소개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 사건들을 살펴보는 거울로서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을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은 방언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유일한 성경 구절일 뿐 아니라 방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사건들을 통해 방언의 본질을 해석하기보다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통해 사도행전의 사건들을 해석하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존 스토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은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그 목적을 사도행전의 설화체(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한) 본문에서보다 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설교나 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것을 받아야 하며 우리에게 명령한 것을 순종해야 하는 한편, 성경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났다고 묘사된 것들이 반드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설명하는 부분은 교훈하는 부분에 근거해서 해석될 때에만 유익하다는 것이다. 사건을 묘사하는 성경의 어떤 이야기들은 그 안에 설명적인 부분을 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해석을 제공하는 반면, 어떤 이야기들은 독립적으로는 해석될 수 없고 다른 곳에 나오는 교리적 혹은 윤리적 가르침의 견지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특히 신약 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담고 있는 수많은 사건은 예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1부. 사도행전의 방언

01  방언의 첫 번째 등장 : 오순절 사건(행2:1~22)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행2:1~22).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다(고전14:22).”라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지금부터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신학자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은 외국어라는 데 동의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세 번의 분명한 방언사건이 등장합니다. 학자에 따라서 8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의 성령세례 사건까지 포함해서 네 번의 방언 사건이 등장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사도행전 8장의 성령세례는 전후 문맥으로 보아 방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행전8장을 포함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네 번의 방언 사건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오순절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없다

  네 번의 방언 사건 중에서도 오순절 날의 사건은 나머지 세 번의 사건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되는 출발점의 전환점을 만든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철저한 무신론 역사학자들을 앉혀다가 성경을 한번 자세히 읽도록 한 후에 “객관적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기독교가 오늘날의 세계적 종교가 된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아마도 그들 모두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꼽을 것입니다. 그 날이 없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결코 예루살렘이라는 조그만 도시의 ‘잡담거리 소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갑자기 예루살렘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죽은 예수의 제자들이 거리에 나타났습니다. 그 때 신변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드로가 용기 있게 설교를 시작합니다. 수천명이 울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방언입니다. 이렇게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멕시코의 어느 동네를 지나가는데 길가에 있는 한 집에서 큰 소리로 한국말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것도 내가 자란 제주도 사투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1) 당연히 발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 날 회개한 사람들만 3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은 방언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2:1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전에 자신들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들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리둥절하고 있는 그들에게 이 기적의 의미를 설명함으로 그의 설교를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방언은 다름 아닌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의미와 그들이 이미 자신들의 언어로 분명히 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선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들이 방언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이미 녹아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날 베드로와 나머지 사람들은 신상이 온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방언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놀라운 일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5가지)

  은사주의자들은 이 날 성령을 받은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을 믿는 구원받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 사실에 입각해 그들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2차 성령세례를 정당화시킵니다. 그리고 2차 성령세례를 통해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볼 때 설득력이 없습니다.

  ①은사주의자들은 2장에서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한 사람들이 120명 전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본문을 볼 때 이 날 방언을 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12제자에 국한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1장 마지막과 2장 처음이 시간적으로 바로 연결된다고 보기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 장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있고 2장 1절에 나오는 “그들”은 120명이 아니라 사도들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2장 전체에서 그 어디에도 사도들 외에 다른 사람들이 성령이 임한 그 장소에 있었다는 암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날 방언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 2:7).

  우리는 1장에서 천사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1:11).

  사도행전1장은 사도들을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120명을 갈릴리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순절 날 성령세례가 임한 장소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사도들뿐이었거나 또는 그 날 120명이 모여 있었다고 해도 방언을 한 사람들은 사도들에 국한되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②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사람 중 어떤 사람도 은사주의자가 주장하듯 ‘성령을 달라고’ 간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냥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2절) 기다렸을 뿐입니다. 아마 그 날 또는 그 순간 성령께서 임하시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세례를 갈망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간절히 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사도들은 성령세례를 갈망하면서 구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당신이 정하신 때에 사도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③이 날 성령세례의 외적인 특징은 바람소리, 불의 혀 그리고 방언입니다. 만약 방언이 성령세례의 일반적 증거이고 오순절 날의 사건이 오늘날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한다면 왜 그 날 마가 다락방에 임한 ‘바람소리’와 ‘불의 혀’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그 날 나타난 기적의 일부만이 계속되고 일부는 사라졌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④오순절 사건을 중심으로 사도행전 교회의 일반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일관성을 가지려면 방언을 넘어서 초대 교회 다른 모든 모습들에 대해서도 일반화를 주장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다른 수많은 모습은 다 무시하면서 방언 하나만을 똑 떼어 일반화를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⑤사도행전에 등장하는 20번이 넘는 회심 사건 이후에 단 한번도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없습니다. “흠, 구원받았구나, 이제는 성령세례 받을 차례다. 성령을 갈구하도록 해라!” 우리가 성경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는 순간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날 있었던 베드로 설교의 마무리를 통해 이 점을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2:38~40).

  베드로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 즉 믿음으로 구원받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다음을 성령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41절).

  이들 중 믿은 후 잠시 있다가 방언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또 물 세례를 받는 동시에 성령세례까지 함께 받아 방언하기를 시작했다는 사람도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그 때에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세례는 방언을 동반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방언하는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고 방언 못 하는 사람은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가르침은 크게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베드로는 죄사함을 받는 것이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02  방언의 두 번째 등장 : 사마리아인 회심 사건(행8:12~17)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이 사건을 놓고 2차적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의 첨예한 의견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빌립이 전도한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의 전도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아닌가의 여부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진정한 신자가 되었다면 위의 본문에서 드러나는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믿고 난 후 일정 시간이 흐르고 2차적인 성령세례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구원받는 믿음은 1차 단계, 믿은 후의 방언으로 대표되는 성령세례는 2차라는 은사주의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됩니다. 위의 본문을 볼 때 무엇보다 빌립은 “하나님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전도했다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믿음이 분명했기에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예루살렘에서 급히 이 전도 현장으로까지 내려왔을 것입니다. 빌립이 혼자 하다가 힘에 벅차 구조 요청을 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받았다”, 즉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건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초대 교회 설립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한 가지 의문에 부딪힙니다. 왜 이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먼저 믿고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 성령세례를 받았습니까? 사마리아인에게 2차 성령세례가 있었다면 누가 무슨 근거로 오늘날 우리에게 2차 성령세례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존 스토트는 이 사건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합니다.2) 사마리아인들 회심 사건에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수십 건의 회심 사건과는 구분되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의 회심 얘기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베드로와 요한을 현장으로 급파했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장 후반에 등장하는 빌립의 또 다른 전도 이야기, 에디오피아 내시가 복음을 받은 후 어떤 사도가 그에게 급파되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물론 내시가 세례를 받으면서 방언을 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이런 정황을 살펴볼 때 사도들의 사마리아 파송은 매우 예외적이고 특별한 경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이 특수성에 대해 존 스토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 예외적인 절차를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이것이 복음이 예루살렘 밖에서 전파된 최초의 사례가 아니라 이 회심자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다는 것이다.(수 세기 동안 이어 온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감을 고려할 때 과연)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용납할 수 있는가? 이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가 명백하게 예외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어떻게 대부분의 오순절주의 그리스도인들과 일부 은사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오늘날의 영적 경험의 표준이 된다고 여길 수 있는지, 다시 말해서 성령이 회심 이후에 주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받아들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한 가지 잠재적 문제가 이 방언 사건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마리아인들이 사도들의 권위에 복종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어떤 권위를 가진 존재인지 바로 깨달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마 이와 동시에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이들을 보면서 언제가 예수님의 말씀에 전 생애가 변화되었던 우물가의 여인을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오순절 날 일어난 3천 명의 회심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일반화된 모습이라면 당시 이스라엘과 특수한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의 회심사건은 당시 초대 교회 구축과 관련한 특수한 사건으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어떤 상직적인 의미가 있는지는 예수님의 승천 명령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예루살렘과 더불어 특별히 지명하셨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와 대비되어 거론된 복음 전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된 특수 상황을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됩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의 회심 사건의 경우 그들의 회심과 성령세례는 분명 시차를 두고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그 이면에는 유대와 사마리아와의 특수한 관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 한 가지 이유는 분명 그들이 회심할 당시 그 자리에 사도들이 없었다는 점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 집사였던 빌립이 아니라 사도 중의 한 명이었다면 분명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방언을 받았을 것입니다. 방언은 사도의 권위를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잠시 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03  방언의 세 번째 등장 : 고넬료의 회심 사건(행10:43~48)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행10:43~48).

  사도행전 10장에서 11장에 걸쳐 소개되는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네 번의 방언 사건 중 가장 길고 자세히 서술됩니다. 이 점은 사도행전이 왜 씌어졌으며 또한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회심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의 본질을 전하고 고넬료와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자 성령께서 임하시고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우리가 오순절 날 받은 성령과 같은 성령을 받았다”는 베드로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고넬료와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했던 방언도 오순절 방언과 동일한 외국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베드로는 자신이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에게 전도하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손길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끌려간(?)측면이 강합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 그를 강권적으로 이끄시기 전까지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분명히 내린 “땅 끝까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까지도 전통적 유대적 종교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본문은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는 고넬료의 방언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깊고 깊은 유대인으로서의 고정관념이 완전히 깨지게 됩니다. 비록 그가(유대인의 피가 반은 섞인)사마리아인들까지는 예수님을 믿고 자신들과 같이 방언을 하는 것까지는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아직도 유대의 하나님, 자신들만의 하나님을 유대 밖 이방인들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들이 오순절 날 받은 성령과 동일한 성령세례가 고넬료와 그의 주변에 임하자 기절초풍할 듯 놀랍니다.(45절)

 

세 번의 방언 사건에 나타난 한 가지 원칙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세 번의 방언 사건에서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는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 장을 시작하면서 처음에 살펴본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의 방언의 정의가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이 구절이 말하는 믿지 않는 자가 누구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방언은 결국 ‘전도용 도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방언을 전도용 도구라고 보기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세 번의 방언 사건과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a. 오순절 사건을 통해 누가 전도되었습니까?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방언을 듣고 돌아왔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직접적 원인은 베드로의 설교 때문이었습니다.

  b. 사마리아인의 방언 사건은 또 어떻습니까? 누가 전도되어 돌아왔습니까? 예, 일단의 사마리아인들의 빌립의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회심 과정에 방언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c. 지금 살펴본 고넬료는 어떻습니까? 역시 베드로의 설교에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믿음으로 기독교인이 되자 결과적으로 성령께서 방언을 주신 것이지 방언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는 데 무슨 역할을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이 말하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22절에는 중요한 또 하나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표적”입니다. 성경에 보면 표적을 특히 좋아하는 민족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12:38).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1:22)

  바로 유대인입니다. 이에 반해 그리스인은 ‘비이성적’인 표적보다는 ‘지혜’라고 부르는 논리적인 철학을 더 신뢰합니다. 이 점을 바탕으로 살펴볼 때 방언이 표적이라는 말은 방언은 유대인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믿지 않는’유대인과 관련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세 번의 방언 사건을 이미 앞에서 던졌던 질문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A. 오순절 사건 :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은 베드로의 설교 때문이지, 방언을 듣고 돌아온 것은 아님. ⇒ 그러나 그들에게 방언의 표적이 그 전에 없었다면 그들은 결코 베드로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임.

  B. 사마리아인의 방언 사건 : 빌립의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받아들임. 그 과정에 방언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음. ⇒ 역사적 배경을 생각할 때 사마리인들은 유대인으로 볼 수 있음. 베드로와 요한이 현장 도착 후 발생한 방언은 당시 주변에 있었던 다수의 사마리아인들에게 사도를 통한 복음이 진리라는 중요한 확신을 심어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에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던 사도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가짐. 그런 의미에서 방언은 그들에게도 하나의 표적이 되었음.

  C. 고넬료 방언 사건 : 역시 베드로의 설교에 회개하고 돌아옴. 방언이 예수 믿게 하는 데 아무 역할을 하지 않음. 베드로는 고넬료가 ‘자신들이 받은 방언과 동일한’방언을 하는 데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람. 비로소 베드로는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 깨닫음. 기존 유대의 선민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던 베드로에게 고넬료의 방언은 천지개벽과 같은 사건이었음.베드로야말로 가장 표적이 필요했던 유대인이었던 것.

  믿지 않은 유대인, 다른 말로 하면 세계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 바로 방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방언은 ‘외국어’여야만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장으로 들어가기 위한 특수한 언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넓이와 깊이를, 사도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04  방언의 네 번째 등장 : 에베소 세례 요한 제자들 회심 사건(행19:1~7)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이제 지금까지 살펴본 방언의 성격에 비추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마지막 방언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오순절 사건이 일어난 후 약22년이 흐른 후의 일입니다. 고넬료의 방언 사건이 있고도 거의 20년이 흐른 후에 에베소 지역에서 다시 한 번 방언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처음으로 방언사건에 바울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첫 방언의 역사가 벌어진 예루살렘에서 한참 떨어진 에베소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위의 본문을 볼 때 주목할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들은 ‘제자’라고 불림에도 불구하고 성령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오래 전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이 본문을 읽으면 이들이 예수님을 이미 믿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나오는 ‘제자’라는 용어와 더불어 그들을 향한 바울의 질문 때문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다름 아닌 “믿을 때”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존 스토트는 정확히 핵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그들에게(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을 묘사한 내용을 보면 그들은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누가가 그들을 “제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마술사 시몬도 “믿었다”(8:13)고 기록된 것처럼, 그들이 그렇게 고백하는 제자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문맥을 볼 때 시몬은 단지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했을 뿐이다. (에베소 제자들도 시몬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3)

  무엇보다 이들이 크리스천이 아니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에 대해 증거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이들은 바울을 만나는 그 날까지도 아직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메시아를 모른 채 이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이들은 원래 잘 믿고 있다가 바울을 만나 2차 성령세례를 받아 더 능력 있는 크리스천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2차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것은 본문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사건을 앞에서 살펴본 방언의 본질과 비교해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가 누구인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한 표적이 된 것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이 날 바울의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은 이들은 그 당시까지도 아직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전형적인 구약형 유대인을 대표합니다. 구약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던 ‘믿지 않던 유대인’이었던 그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 고린도 주변을 다니면서 전파할 복음이 그 지역에서 그들과 동일하게 아직도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수많은 구약형 유대인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바울의 사도성을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앞에 등장한 세 번의 방언 사건에는 다 사도 베드로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들이 일어나고 거의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이후에 발생한 이 사건을 잊지 않고 누가가 서술한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바울이 베드로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아무나 방언의 은사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방언은 철저히 사도성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마지막 방언 사건의 주인공이 사도 베드로가 아닌 사도 바울이라는 사실을 결코 놓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 이방인을 위해 부름 받은 사도였습니다. 게다가 가장 오해받을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과거 전력을 가진’사도였습니다. 그가 서신서에 빠뜨리지 않고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누가에게 있어서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는 데 그가 방언의 은사를 베풀 수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 날 방언은 은사를 받은 제자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거론 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들은 그 날 이후 사도 바울의 선교에 적지 않은 힘을 보탠 동역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방언은 여전히 초대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데 필요한 표적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05  사도행전 방언 사건의 결론 : 예언 성취를 통한 구속사 완성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네 번의 방언 사건을 누가는 왜 기록했을까요?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이 은사와 방언에 대해 집중적으로 거론한 고린도전서보다도 오히려 더 늦게 씌어진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에 대한 서술들은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방언’에 대한 가르침을 보고 오해할 소지가 있는 부분들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고린도전서를 살펴보면서 다시 보겠지만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간의 유기적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누가와 바울의 신학이 ‘방언’에 대해서만은 현격하게 달랐다는 ‘과격한’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렌스키 만큼 정확하게 설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 말한 ‘방언’이 무엇인지 당연히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사도행전을 썼으며 바울은 오순절 이후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속에 위치한 ‘방언’의 본질이 외국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고린도전서를 서술했다.4)

  다시 사도행전 전체로 돌아가서 볼 때 사도행전은 대단히 독특한 역할을 하는 성경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약은 공관복음과 서신서로 나뉘는데, 사도행전은 그 중간에 위치합니다. 이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복음서의 성격을 가진 동시에 서신서를 여는 출입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그런데 왜 이 사건을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볼까요?

 

예수님의 구원 사건과 관련된 모든 예언의 성취

  오순절 사건이 구속 사건의 마무리라는 말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내용 구성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 발생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과연 구원과 관련해 일어나야 할 사건들이 다 발생했는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도대체 그러면 무엇이 발생해야 하고 무엇은 발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구속 사역을 구성하는 사건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구약의 예언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표적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항상 성취된 구약의 예언을 들어 그분을 증거했습니다.

  오순절 사건에 대한 예언은 두 군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①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6~17)

 ②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1:8)

  이 예언을 이루시기 직전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5).

  즉, 예수님이 주실 것이라고 예언된 성령세례가 오기 전까지는 세례요한의 물 세례만 남아 있는 시대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성령세례가 없고 물 세례만 있는 곳에는 회심의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앞서 바울이 세례 준 에베소의 제자들을 통해 이미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예언이 성령이 오신 오순절 사건일 수밖에 없음은 너무 당연합니다.

 

오순절 사건의 구속사 완성과 사도들 사역의 독창성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사도들을 통해 구속 사건을 마무리하시면서 교회 시대를 새로 여셨습니다.

사도들의 중요성과 구속사에서의 위치에 대한 성경 구절을 참고해 보십시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2:20).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벧후3:2)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고전12:28).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일어난 일들을 교회 시대라는 이유로 일반화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사도들이 복음 전도를 행한 내용과 방식들은 주님 오실 때까지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귀중한 모범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발생한 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오늘날도 여전히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서 갖는 오순절 사건의 독특성과 유일성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독특성과 유일성을 일반화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수많은 사건은 무조건 지금도 반복되는 일반적인 사례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시대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오로지 단 한 번 발생한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는 동정녀 탄생이 반복될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반복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이 세상에 딱 한 번 보내셨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성육신이 더 이상 반복될 수 없듯이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방언도 사도들이 ‘달라고 해서 얻은 체험’이 아니라 성령의 반복될 수 없는 강림의 표적으로 사도들의 의지와 관계 없이 주어졌을 뿐이다. 성령의 시대는 율법의 시대가 시작될 때와 비교될 수 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율법을 내리셨을 때 그 역사적 사건은 천둥, 번개, 불, 연기 그리고 지진이 동반되었다(출19:16~18).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에게 두 번째 율법을 주셨을 때는 처음과 같은 초자연적 역사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출34장).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처음 주실 때 맛본 신비한 경험은 계속 반복되는 일상적인 패턴이 될 수 없었다. 이처럼 성령이 강림하실 때 일어난 오순절 날의 기적들도 평상시에 반복되는 패턴이 될 수 없다.5)

 

사도행전의 본질

  우리는 이 장을 시작하면서 오순절 사건이 없었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 크게는 유대인을 위한 베드로와 이방인을 위한 바울의 행적을 통해 성령이 어떻게 교회의 기초를 놓으셨는지를 보여 주는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은 특히 그 과정에서 방언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사도행전의 독특성은 이 성경이 단순한 ‘전도’로 시작하지 않고 예수님의 승천으로 시작함으로 잘 드러납니다. 이는 사도행전이 복음서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암시하고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1. 사도행전 특징(패커)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도 사도행전 2장을 해석할 때 흔히 이런 사실을 놓치지만 사도들의 체험이 갖는 독특한 위치는 너무 명백하다, 오순절 사건을 예수님의 약속과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표증이라고 보는 누가의 신학과 사도행전 전체의 요지를 볼 때, 사도들의 체험이 갖는 독특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누가는 분명 예수님의 승천에 이어 어떻게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 제국의 수도까지 달려갔는지를 말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을 저술하였다. (누가가 기록한 각종 기적들은) 복음이 로마까지 가는 길에 있었던 이정표들을 밝히고자 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보여 주는 모형이나 패러다임으로 삼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누가의 이야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거쳐야 할 체험의 단계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의 사명의 본질에 대한 객관적인 교훈’이기 때문이다.6)

 

2. 사도행전 특징(존 스토트) 사도행전(Acts)을 ‘사도들의 행전(the Acts do the Apostles)’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누가가 이 책에서 기록한 모든 기적은 사도들이 행한 것이면, 예외가 되는 두 경우조차도 사도들이 안수하여 개인적으로 위임한 자들이 행한 것이었다. 바울도 자신이 행한 기적들을 “사도의 표 된 것”이라고 묘사했다.7)

 

사도행전 방언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

1. 방언의 예언으로서의 본질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의 방언을 언급하면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한 것은 방언 속에 예언의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를 드러내는 예언으로서의 본질을 가진 방언에 대해 팔머 로버트슨 교수는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사적 계시를 담은 성경 외에는 추가적인 계시를 허용하지 않으시는 한, 즉 성경이 ‘불완전’하다고 보지 않으시는 한 계시적 본질을 가진 방언이 오늘날 여전히 사도행전 시대처럼 반복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2. 개인이 아닌 다수 속에서 나타난 은사

  사도행전16장에는 유럽 최초로 복음을 받은 루디아의 회심 사건이 등장합니다. 유럽 최초의 회심자라는 상징성으로 볼 때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언에 대한 정서를 생각할 때 루디아와 그 가족이 바울의 세례를 받는 이 순간이야말로 방언이 터질 최적의 상황이 아닙니까? 같은 16장에는 루디아의 경우보다 훨씬 더 극적인 회심인 자살하려다가 복음을 듣고 회심한 간수 이야기입니다. 두 사건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20여 건의 개인 회심 사건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회심 사건에도 방언은 전혀 암시조차 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방언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개인회심과 관련된 표적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방언은 성령세례와 관계 없다

  2차 성령세례도 존재하지 않지만 방언은 성령세례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회심한 기독교인에게 2차적인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곳은 성경에 전혀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네 번의 방언 사건에는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습니다. 즉 네 번의 사건 중 어떤 것도 100%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근거로 방언과 관련된 어떤 정형화한 패턴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특별한 사건들과 달리 성경은 일관되게 한 가지 가르침을 줍니다. 누구나 기독교인이 될 때 다 예외 없이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나타난 특별한 사건들이 아니라 서신서들에 나타난 보편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우리의 신앙 패턴을 정립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방언의 결론

  네 번의 사건은 각각 독특한 대상들을 향해 각각 독특한 방법으로 주어진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네 가지 안에서 방언이 ‘외국어’였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어떤 공통적인 패턴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방언 사건 속에 공통적 패턴이 없다는 사실은 성령의 강림이 오늘날 결코 반복될 수 없는 독특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사건임을 대변합니다. 오순절을 기점으로 사도들을 통해 이 각각의 독특한 집단에게 부어 주신 사도행전 방언의 역사는 오늘날 ‘달라고 떼쓰고 기도하면’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그런 방언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2부. 고린도전서의 방언

01  고린도전서 방언 이해를 위한 배경

  오늘날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방언의 성경적 근거를 보통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찾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계통을 포함한 은사주의자들도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들이 외국어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방언이 외국어가 아닌 이상 그 근거를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는 없겠지요. 고린도전서 14장은 대표적인 구절, 2절을 비롯해서 오늘날 행해지는 방언의 형태를 지지하는 듯한 구절들이 여러 개 등장합니다.

 

근본적 의문

  제가 이 책을 준비하는 동안 가장 고심한 점은 바로 다음 질문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등장하는 방언이 외국어인가 아니면 오늘날의 방언과 같은 전혀 새로운 언어, 일명 하늘의 언어(?)인가?”

  ‘방언이 두 가지다.’라는 주장, 즉 ‘사도행전(외국어)과 고린도전서(오늘날의 방언=하늘의 언어=개인 경건)에 등장하는 방언이 서로 다르다.’라는 주장을 수긍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성경이 그 점에 있어 전혀 어떠한 암시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점은 만약 바울이 새로운 형태의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간주했다면 왜 그는 그 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의문은 고린도라는 지역에 대해 알아 갈수록 더 커졌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곳이 아닌 고린도라는 지역이 가진 특수성은 결코 바울이 취했을지 모를 그런 모호한 태도를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도행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방언을 인정했다고 간주할 때 그런 방언은 바울이 고린도에 교회를 개척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고린도 지역에서는 고린도의 중심에 위치한 아프로디테 신전을 중심으로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라는 도시

◎교통의 요지, 올림픽경기와 더불어 2대 체육대회의 하나인 이스미안Isthmian개최

◎도덕적타락

  ①그리스어corinthiazesthai의 의미

    ‘고린도인처럼 행동하다’=‘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다’=‘창녀와 관계하다’

  ②남창들 :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고전11:14)⇒바울이 남자들이 긴 머리 하는 것을 수치스럽다고 말함.

  ③아프로디테 신전과 천 명의 여사제들 : 아크로폴리스(아프로디테‘사랑과 다산의 신’-라틴어로 비너스)에서 신전 예배의 한 의식으로 몸을 팔았음.

◎델파이 신전

  고린도 교회가 있었던 도시는 초대 교회 당시 이교도 신앙, 사탄적 신비주의가 범람했던 도시였고 그런 이교 신비주의에서는 현대의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는 방언과 같은 뜻 모를 소리들의 주문과 기도가 유행되었다고 함. 즉 고린도에서 수 마일 떨어진 델파이는 거대한 신전이 있는 그리스 최대 이교도 신앙의 중심지였음. 바벨론 사탄 숭배의 신비주의에 뿌리를 둠.

  신탁(oracle) :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여사제

  사당(Shrine) : 이스라엘 백성이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흡사

  여기서 그들은 반복적 주문을 소리 내며(이를 통역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모종의 계시를 받고 해석은 대개 모호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함. 이러한 델파이 신전에서의 신탁은 당시 그리스에 보편적이었고, 사도 바울 시대에도 풍미했던 우상 신앙이었음.8)

 

  오라클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직통 계시입니다. 고린도 근처의 델파이의 오라클은 특히 유명했습니다. 여사제가 방언으로 주는 오라클은 현금 액수에 따라 수시로 변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방언은 고린도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 전체에서 신비적 의식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기 수 세기 전, 플라톤 시대 때부터 플라톤의 대표작인『대화』에서 우리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 이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로 정의되는 ‘방언’이 창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그리스의 많은 종교 의식에서 방언이 사용되는 있음을 주목했는데 이런 방언 의식을 통해 때로는 종교 의식 가운데 많은 병고침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고대로부터 내려온 방언들이 창궐하는 지역에서 그 방언들과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은 방언을 바울이 성령의 은사로 간주했다고 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같은 종류의 방언이라고 하더라도 누가 주는가에 따라 고린도의 이방 방언과 성령의 은사로 나눠진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 둘 사이의’구분에 있어서 바울이 경고는커녕 아무런 암시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곧 살펴보겠지만 바울은 14장에서 방언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방언이 ‘잘못된 방법 또는 용도’로 사용되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전혀 ‘본질적으로 잘못되었거나 다른 방언’에 대해 전혀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교회 밖의 방언과는 전혀 다른 100%성령이 주신 방언이다.’라는 전제 아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경우 두 가지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①바울은 교회 밖에서 나타나는 방언과 본질적으로 다른 성경의 방언, 즉 사도행전에 나타난 외국어로서의 방언만을 염두에 둔 채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을 경우입니다.(고린도방언=사도행전방언=외국어방언, 바울은 단지 그 방언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 점만 경고)

  ②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고린도 지역의 신전 등에서 나타난 방언과 동일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쓰인다는 점 때문에 그 방언을 100% 성령이 주신 것이라고 가정하고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는 경우입니다.(교회에서 방언 한다고 그 방언이 100%옳은 방언이 아님. 따라서 고린도 교회 안에도 오늘날과 같이 바른 방언뿐 아니라 잘못된 방언이 혼재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의 첫 번째의 입장, 즉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마찬가지로 외국어 방언임을 확신하고 고린도전서를 저술하고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고린도 교회 안에 만연했을 수도 있는 잘못된 방언들에 대해 왜 바울은 이토록 철저히 침묵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바울은 방언의 본질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오로지 ‘방언의 바른 사용’에 대해서만 이토록 태연하게 논하고 있을까요?

 

고린도 교회의 현실, 고린도전후서 저작의 배경

  고린도 지역의 명성(?)에 걸맞게 고린도 교회도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특성상 대부분의 성도가 이방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다 안고 있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가 가진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사도 바울은 그 바쁜 중에도 네 번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고전5:9).

  고린도전서를 쓴 이후에도 또 한 번의 편지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2:1~4).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고린도 교회로 가려고 계획을 했다가 취소했던 것 같습니다. 즉, 이래저래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과 관련해 바울은 무려 네 번의 편지를 이 한 교회에 보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이해하는 핵심은 그가 이 편지를 다른 서신서와는 크게 다른 마음으로 썼다는 점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심각했습니다. 조지 가디너 교수는 고린도전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분노, 빈정거림(비꼼), 책망, 교정 그리고 교훈으로 점철되어 있다.9)

  특히 고린도전서에 담긴 바울의 빈정거리는 표현sarcastic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13장과 14장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대조적 표현’을 고린도전서 특징으로 추가합니다. 따라서 이런 고린도 교회 안에 오늘날과 같은 잘못된 방언들이 있었다고 할 때 바울이 그 점을 눈감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라는 지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떠난 후 그 교회에서 발생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 내의 분쟁, 세속화, 거짓 복음의 침투, 상상을 초월하는 성적 타락, 같은 신도들 간의 소송 사건, 결혼 문제, 자유에 대한 잘못된 생각, 여자의 복종, 성찬식의 문제, 은사에 대한 문제, 부활의 부정)

  참으로 불가사의한 교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토록 은사에 풍족한 교회가 동시에 이처럼 갖가지 문제들로 가득하니 말입니다. 문제도 보통문제가 아니라 하나같이 심각한 문제들로 말입니다. 무엇보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문제들은 이 교회가 위치한 지역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왜 썼는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고린도전서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12~14장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세 장을 왜 썼습니까? 고린도전서 저술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고린도 교회에 은사(그 중에서 방언)와 관련해서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썼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풍족한 은사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 방언의 은사가 주어진 것은 사도행전 19장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방언을 받은 시기와 비슷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고린도 교회의 은사의 시초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점은 그들이 받은 은사가 바울이 없는데도 교인들끼리 모여 기도하다가 생긴 은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사도행전에 드러나는 방언 사건들이 일관되게 사도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이 선포되던 그 때에 각종 표적들과 기사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했습니다. 그가 18개월을 그들과 함께 있으며 복음을 전하는 동안 많은 표적과 은사들이 고린도 교회에 생겨났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외국어인가 아니면 새로운 방언인가

  저는 앞서 고린도 교회 안의 방언이 교회 밖에서도 만날 수 있는 일반 방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한 또 하나의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을 향해 보인 과도한 관심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바울은 결국 고린도전서 12~14장을 쓰게 됩니다. 왜 고린도 교회는 방언에 그토록 큰 관심을 보였을까요? 만약 바울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방언의 표적이 그리스의 다른 여러 신전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그런 방언이라면 과연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에 대해 그토록 강한 관심을 보였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어! 그거 우리도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저기 아프로디테 신전에 가면 그런 방언 하는 사람 많이 있어요.”

  따라서 한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즉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에 그토록 지대한 관심을 쏟은 이유는 지금까지 그들이 보아 온 방언들과는 차원이 다른 방언을 바울을 통해 받았기 때문입니다. 실로 고린도 교회에게 있어서 바울을 통해 주어진 방언의 은사는 놀라움과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기존의 의미 없는 말들로 이루어진 방언과 성경의 방언의 차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들에게 ‘방언’이라는 단어를 써서 편지를 할 때 성경의 방언과 세상의 방언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과 함께 있었던 18개월을 통해 바울이 그 누구보다 방언에 능통함을 확실히 알았을 것입니다.(바울은 은사로의 방언 외에도, 아람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까지 능통했음.)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4:18).

  세상 방언이 창궐했던 고린도 지역이었기에 고린도 교회는 성경의 방언 능력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신 방언 은사를 자랑하고 과시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4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지만 12장과 13장은 사실상 바울이 14장을 쓰기 위한 준비 작업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고린도에 발생한 방언의 폐단을 지적하기 위해 12장을 시작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14장에 들어갔을 때, 더 잘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은사’라는 큰 테두리의 본질을 정의하는 것으로 12장을 시작합니다. 방언도 은사인 이상 은사의 기본적인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저는 이 14장을 주해한 여러 권의 주석을 보았지만 어떤 것도 서로 100% 일치하는 주해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 만큼 14장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성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문맥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1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구절의 경우 모두가 다 동의하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린도 교회와 고린도전서 배경을 바탕으로 전체 문맥의 흐름 속에서 읽어 갈 때 14장의 의미는 매우 명확합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를 바울은 전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방언은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본 외국어 방언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과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방언은 점진적 계시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들은 고린도전서가 씌어지기 몇 년 전에 발생했다. 따라서 사도행전 당시는 없었던 방언에 대한 규칙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영적 은사’의 큰 테두리 안에서 만들어져 갔다.10)

 

 

02  고린도전서 12장 : 은사의 본질

  지금부터 12장~14장까지 살펴보고 지금까지 살펴본 ‘상황적 증거들’외에 성경 스스로가 말하는 방언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크게는 고린도전서, 작게는 12~14장까지에 바울의 저작 동기를 바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은사에 대해 강의하기 위해 이 세 장을 쓴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위 말하는 이 세 장의 ‘은사장’을 통해 그 곳에 열거된 각각의 은사의 정확한 정의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원하는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은사 특히 방언을 다루기 위해 세 장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은사의 본질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방언을 설명하기 위한 바울의 의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바울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 방언과 관련해서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바로 알아야 그 본질에 비추어 문제점을 바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꽤 많은 주석을 읽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 파기 시작하면 정말로 끝이 없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이 책의 목적은 신학자도 아닌 제가 신학적 세부사항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내용의 흐름 속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줄기를 잡는 것입니다. 필요한 경우 원문까지 동원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본문의 내용의 흐름 속에서 바울의 의도를 알아내는 데 치중할 것입니다.

 

12장 1절

◇ 신령한 것에 대하여 : “무엇에 대하여”는 고린도전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절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질문한 내용들을 바울이 하나씩 짚어 가며 대답해 주고 있음.

 

12장 3절

◇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 : 하나님의 영(성령). 즉 성령이 말하게 하는 자(예언 내지 방언하는 사람) ⇒ 방언하는 사람

예수를 저주할 자 : 방언은 못 알아듣는 말이기에 통역이 필요한 은사이지만, 누구나 다 알아듣는 예언의 은사를 통해 예수를 ‘저주받을 자’라고 불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움. ⇒ 방언이 남용되는 사례(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법인 방언으로 교묘하게 예수를 저주하는 어떤 무리를 바울이 지적함)

   (그로마스키 교수의 분석)

    ․마라나타marana ta(아람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나시마anathema(헬라어) ‘저주할 자’ : 마라나타와 발음이 흡사함 ⇒ 바울은 분명 이런 상황을 보고받고 지금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방언이 매우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고린도 교회에서는 통역이 없이 방언이 마구 남발되고 있었습니다. 통역이 없는 상황에서 그가 방언을 통해 진짜 내뱉은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길이 따로 없었습니다. .

 

12장 4~7절

  4절부터 본격적으로 은사를 설명함. 은사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바울의 의도적인 노력이 가장 잘 드러남.

◇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은사의 목적 ⇒ 서로를 유익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는 은사의 본질은 14장 끝날 때가지 바울의 일관적인 주장으로 그의 가르침의 핵심.

  고린도 교인들의 은사(방언) 남용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움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고전4:8).

  ⇒너희들 정말 대단하구나. 이제 하도 대단해져서 나 같은 사람은 필요도 없겠지? 빨리 지금보다 더 대단해져라. 그래서 우리가 너희 덕에 떡고물이나 좀 먹게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고전4:10)

  ⇒너희들은 참으로 훌륭해서 어디 우리같이 천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나 하겠냐? 우리야 항상 이 모양 이꼴이지만 너희는 각종 은사로 충만하고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바울은 다른 서신서 어디를 보아도 바울이 자신의 진액을 쏟아 기른 교회와 교인들을 향해 이런 조롱과 독설을 쏟은 곳은 없습니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는 심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심각성의 중심에는 은사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마치 자신이 뛰어나서 획득한 것인 양 착각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특별한 은사를 가진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12장 8~10절, 28절

  은사의 본질을 밝힌 후 은사의 종류를 두 곳에 걸쳐 열거함. 12장의 목적은 은사의 설명 내지 강의가 아니라 은사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한 장임. 그런데 왜 바울은 갑자기 은사를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을까? 바울은 은사의 열거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방언에 대한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임. 바울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이 은사 목록을 서술했으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을 최고의 은사로 생각했다는 점.

고린도전서 14장에 가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방언에 대한 바울의 평가절하를 고려할 때 바울이 비록 방언이 ‘절대적인 가치’에서 모든 은사 중의 최하위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치더라도 그는 분명 의도적으로 이 목록에서 방언을 가장 끝에 위치시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이라는 한 은사를 너무 높이고 있었기 때문이다11)

 

12장 11~27절

  또 하나의 은사의 본질을 바울은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사는 내가 달라고 떼를 써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에 관련된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11절). 사도행전에 드러난 방언 사건들을 고려할 때, 방언은 분명 사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가진 방언 은사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교회 안에서 결국 서로가 서로를 등급화시키며 은사에 따라 누가 누구보다 더 영적인 ‘고수다’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어떻게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이 12~27절까지의 비유를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13절 : 성령세례는 믿은 후 새롭게 받는 2차 세례가 아님을 명확히 보여줌.

◇16구절 비유(12~27절) :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비유적으로 묘사함. ‘내가 가진 은사가 너가 가진 은사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식의 잘못된 생각. 1급 은사와 2급 은사로 나눌 수 없다는 점.

⇒바울이 이 비유를 통해 말하고 싶은 궁극적인 메시지 중의 하나는 교회의 본질과 관련한 것입니다. 발가락의 아픔이 몸 전체의 아픔이듯 교회 안에 있는 가장 작은 지체의 아픔은 교회 전체의 아픔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결국 바울이 은사의 본질은 다름 아닌 서로를 돕고 세우는 것이라는 바로 이전의 메시지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너의 아픔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나의 자랑에만 가득 찬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12장 29~30절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NO, NO, NO, NO입니다. 은사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 외에 특별히 신유의 은사에도 유독 관심이 많았음을 암시합니다.

 

12장 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12)

But earnest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I show you a still more excellent way.(NASB)

  우리가 별 생각없이 읽고 넘어갔던 12장의 마지막 구절은 사실상 오랜 기간 많은 성경학자들을 괴롭힌(?) 대표적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그러나’를 포함해서 몇 개의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이 구절 바로 전까지 이어진 바울의 논점을 일거에 부정하는 데, 이 전까지 바울은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고 은사 간에는 어떠한 등급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은사를 사모하라고, 게다가 은사 중에서도 등급이 높은 것을 골라 찾으라고 가르칩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해석이 그 동안 등장했습니다. 많은 주해서를 보았지만 그 중 어떤 것도 저로 하여금 ‘아, 그렇구나!’라고 동의하게끔 한 설명을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성경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읽고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서신서는 말 그대로 ‘편지’입니다. 편지는 읽는 사람이 읽고 무슨 말인지 쉽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13) 성경은 절대로 신학자가 아니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도록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씌어진 단어들과 저작과 관련한 특정 환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면 대부분의 성경 구절들은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어떤 특정 구절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는 다음 두 가지 뿐입니다.

   (1) 그 특정 구절을 잘못 이해했을 때

   (2) 그 특정 구절까지 이어진 문맥의 흐름을 잘못 이해했을 때

  지금까지 살펴본 12장의 흐름은 매우 일관성 있고 바울의 의도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31절을 이해하는 데 2번이 장애가 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결코 그의 가르침과 상충되는 명령,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을 반복해서 읽을 때 제 시선을 잡은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간절히’에 해당하는 ‘earnestly'입니다. 이 단어는 바울이 이 구절을 결코 은사를 사모하고 찾으라는 의미로 쓰지 않았다는 점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 줍니다. 즉, 은사를 그냥 “사모하라”도 아니고 아예 “간절히 사모하라”라고 썼다는 사실은 그가 도리어 이 문장을 반어적 의미로 쓰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을 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여전히 가장 좋은 길을 보이겠다14)

  이 구절 속에 두 문장이 But이 아니라 And로 연결되어 있음은 중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에 결코 순종하지 않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인내를 갖고 바른 길을 비교해서 보여 주겠다는 의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추구 방향과 자신의 가르침을 병렬적으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의도하는 평행선의 대비는 13장 1절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12장의 결론

  12장은 바울이 본격적인 방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전 방언을 포함한 더 큰 테두리인 은사의 본질을 자세히 설명함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스스로를 비추어 보도록 하기 위해 씌어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이 장에서 서술한 은사의 본질들에 비추어 그들이 스스로를 돌이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12장의 마지막에 고린도 교인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바울은 그들의 그토록 추구하는 방언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사랑’에 비교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또 방언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사랑에 비해 오래지 않아 곧 사라질 은사임을 가르치기 위해 13장의 문을 엽니다.

 

 

03  고린도전서 13장 : 은사보다 귀한 것과 온전한 것의 도래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이해의 핵심은 이 장이 ‘사랑장’으로 혼자 독야청청 존재하는 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13장의 앞 뒤의 문맥과 관계 없이 그냥 사랑의 정의를 서술한 아름다운 성경의 한 장이 아니란 사실이지요. 13장을 쓴 바울은 ‘사랑의 낭만’에 적어 이 장을 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전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13장에 등장하는 사랑에 대한 정의는 철저하게 ‘은사의 본질’을 토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13장을 제대로 이해해야 우리는 방언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14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장 1~3절

12장에 등장한 은사 목록 순서와는 달리 13장에 와서는 방언을 가장 앞에 놓음. 문제를 일으키는 면에서 방언이 중요해졌기 때문임. 사랑이 없이 혼자 특별하다고 과시하며 교회 안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음.

◇ 천사의 말 :  13장 1절은 오늘날 교회에서 보는 방언이 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하늘의 언어 또는 천사의 언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됨. 참으로 성경의 문맥과 관련 없이 작위적으로 필요에 따라 갖다 붙여지는 대표적인 구절 중의 하나임.

   (‘천사의 말’이 방언이 아닌 이유-3가지)

  ①가장 큰 이유는 본문의 의미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학자는 바울이 이 천사의 말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자신의 논점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의 표현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2,3절도 마찬가지로 강조를 위한 과장의 표현입니다.

  ②방언이 정말로 천사의 말이라면 천사와 우리는 앞으로 상당히 심각한 상황들을 직면하게 되는 데, 13장 후반에는 분명히 방언은 사라질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③12장의 마지막 구절은 방언을 최고로 여기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 진짜 소중한 것 사이의 평행선을 강조하기 위해서 씌어졌는데, 13장 1절은 방언이 사랑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말하기 위해 도입된 구절이므로 문맥을 볼 때, 있을 수 없는 주장입니다.

 

13장 4~7절

  너무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바울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의한 하나하나의 항목은 다 서로를 세우는 은사의 본질에 대한 내용입니다. 13장에 소개하는 사랑은 가을 날 창 밖으로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아닙니다. 미래와 영원이 아닌 현재에 모든 가치를 두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날카로운 칼을 대는 처방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는 은사와 사랑이 실종된 은사의 가장 큰 차이는 그 은사를 가지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가 아닌가’의 여부입니다. 바른 은사는 결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14장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4절을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의 방언을 다름 아닌 개인 경건을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많은 사람이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구절입니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다른 모든 이유를 일단 접어놓고 13장의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라는 구절만 보아도 그 이유는 너무 자명합니다. 14장 4절에서 방언은 스스로의 유익을 구하는 은사이기에(통역이 함께 하지 않는 경우) 도리어 방언 사용을 꾸짖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바울의 꾸짖음이 도리어 방언 사용을 지지하는 구절로 왜곡되어 인용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3장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14장을 바로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초석이 되는지 한 예입니다.

 

13장 8~12절

  예언과 방언 그리고 지식이 초대 교회에만 있었는가 아니면 오늘날에도 있는가의 논쟁이 계속되는 구절입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온전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놓고 두 진영(은사 종식주의자, 은사 지속주의자)이 팽팽한 설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온전한 것 : ‘성경의 완성’으로 보는 3가지 이유

  ①‘온전한 것’이 올 때 사라지는 은사들을 예언, 지식, 그리고 방언만을 따로 떼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장 후반에 들어와서 바울이 다른 은사들과 이 세 가지를 철저하게 구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구분하는 이유는 “온전한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은사에도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재림’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모든 지상 은사들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재림과 달리 오로지 예언, 방언, 지식에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온전한 것”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②만약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면 우리는 그 날까지 11절, 12절의 묘사대로 항상 ‘어린 아이와 같이 생각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보며’산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성경의 다른 모든 가르침과 크게 모순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온전하여지고 장성하라고”여러 곳에서 지적합니다. 더 이상 어린 아이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③방언은 고린도전서의 많은 은사 중 가장 끝에 언급된 후 그 이후 씌어진 다른 책들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합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고린도전서가 바울의 3차 여행 중인 AD55년경 에베소에서 씌어졌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미 씌어진 바울 서신은 단 세 권밖에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그런데 방언의 사라짐을 언급한 고린도전서의 저술 이후 신약의 서신서 그 어디에도 방언이 등장하는 곳은 없습니다.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성경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인 AD56년경에 씌어졌다고 보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입니다. 즉, 로마서와 고린도전서 간의 저작 년도 차이는 1년~2면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서는 방언과 관련된 한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1:11)

  바울이 만나서 나누고 싶어한 신령한 은사는 당시 사람들은 방언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앞으로 다가올 핍박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가 필요함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로마서 12장에 은사의 목록이 나오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방언이 없습니다. 저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고린도전서가 씌어진 지 1년 남짓 후에 씌어진 로마서에 그 중요한 은사인 방언이 빠질 수 있습니까? 몇 가지 떠오르는 이유가 있습니다.(고린도 교회의 방언은사 왜곡과 남용) 성령의 영감을 받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볼 때, 로마의 성도들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주실 의도가 없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약 성경에 방언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정황을 추측하건대 방언은 AD 60년 전후로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 시점을 전후로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대로 ‘그쳤다’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왜 방언이 그쳤습니까?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것이 왔기에 방언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 지식 그리고 방언이라는 이 세 가지의 은사는 다른 은사들과 분명 다르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이 세 가지의 은사를 다른 은사들과 구분한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사라지는 시점이 다른 은사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세 은사를 13장에 거론한 이유는 그 이유 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은사는 완성된 성경이 없었던 초대 교회 시절,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을 통해 완성되자 사라졌습니다. 목적을 완수했기 때문입니다.

 

13장 13절

But now faith, hope, love, abide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NASB)

  ◇그런즉 : “결론적으로”라는 의미는 매우 심각한 오역.(표준새번역도 마찬가지...아예 ‘그러므로’가 들어 있음)

            ⇒지금까지 진행했던 논의에 추가로 한 구절을 더 보태는 의미 정도.

  13절의 제가 찾은 가장 좋은 해석은 사랑을 하나님과 연결시킨 해석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16)’라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믿음이시다. 소망이시다.’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속성은 사랑입니다. 결국 이 구절 속의 사랑은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세 가지는 항상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거론한 세 가지의 은사(예언, 지식, 방언)의 ‘잠시성’과 믿음, 소망, 사랑의 ‘영속성’을 대비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13장을 통해 더 이상 강조할 수 없을 만큼 사랑의 중요성을 부각시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아, 은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이 있어야만 한다. 만약 은사 속에 사랑이 없다면 그 은사가 아무리 겉으로 볼 때 대단해 보이더라는 그 은사의 출발점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왜냐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13장의 결론

  바울의 이런 가르침을 주목할 때 이어지는 14장 1절이 ‘사랑을 추구하라.’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방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은사의 본질을 넘어 은사의 시작이자 끝인 사랑을 13장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합니다.

 

 

04  고린도전서 14장 : 방언의 본질과 역할

  14장에 등장하는 내용만을 가지고 14장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12장부터 시작된 바울의 논지를 제대로 좇아갔다면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4장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어려움은 앞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한글 성경의 번역 자체가 주는 난해함입니다. 앞뒤 문맥을 생각하지 않고 번역한 것 같다는 인상을 많이 받습니다. 

요약

12장

13장

◇은사의 본질 규명

  ⇒과도한 방언에 대한 관심의 잘못된 점을 지적.

◇은사의 본질=“사랑하라”

  ∵은사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

◇고린도 교인들이 최고로 생각하는 방언이 무엇보다 모든 은사의 핵심이 되어야 할 사랑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문제의 소지가 많은 은사라는 점을 설명.

◇예언, 지식, 방언 : 곧 사라질 은사임을 분명히 함.

 

14장 이해의 기초

  바울은 의도적으로 방언과 예언을 대조시킵니다.

  방언

  예언

이해 안 되는 말

이해되는 말

자신에게만 도움이 되는 은사

교회에 도움이 되는 은사

혼자 얼마든지 활용하는 은사

교회를 위해 공동체 안에서 활용되는 은사

14장 1장

  방언과 대비되는 예언을 통해 그가 ‘방언’에 대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14장 처음과 마지막은 예언을 사모하라는 말로 마무리됨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말한 가르침을 토대로 그가 말하는 은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남을 세우고 돕는 것’임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은 교회를 더 섬기고 더 세우기를 사모하라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왜곡되어 사용되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방언과 대비되는 예언은 ‘교회를 세우는 은사’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언을 사모하라는 말은 교회를 세우는 데 더 관심을 가지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14장의 전반부 : 14장 2~20절

  방언을 지지하는 책들 중에서 14장 2절은 방언 지지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지 않은 책은 ‘단 한 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방언을 지지하는 14장의 다른 구절들에서 발견되는 모든 핵심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이 구절이 ‘방언은 개인 경건용으로 사용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은사다.’라는 주장이 근거로 사용될 수 없는지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①책망을 칭찬으로 왜곡

  12, 13장을 통해 바울이 방언에 대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그런 배경을 감안할 때 이 구절을 통해 ‘비록 문제가 좀 있지만 여전히 유용한 방언의 효용성’을 강조하기 위해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든 문맥을 무시한 채 특정 구절을 해석하는 오류의 결과입니다.

  ②나의 영으로 하는 기도에 대한 오해

  이 구절을 가지고 많은 사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걸 보라니까? 이게 바로 방언 기도의 본질이야. 방언은 나도 모르는 나의 깊숙한 진심을 드러내는 기도란 말이야. 당신 정신 차리고 기도하면 5분도 제대로 하기 힘들지? 하지만 방언 기도는 영의 기도야. 그러니까 시간을 초월해서 한 시간을 기도해도 마치 1분 한 것 같다니까? 내 영은 수많은 비밀을 아버지께 다 털어놓고 토하고 싶어한다니까? 내가 가진 수많은 아픔들, 나의 이성이 기억도 못 하는 갖가지 것들을 나의 영은 아버지께 토하고 싶어해. 그게 바로 방언으로 드리는 영의 기도야.”

  바울은 12장에서 “하나님의 영”이라는 구절과 대비시키기 위해 14장에서 “나의 영”이라고 의도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12장의 하나님의 영이 성령을 의미한다면 14장 나의 영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리처드 개핀 교수의 요지) 몸과 정신이 따로 놀며 영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정신은 딴 데 가 있다고 하는 식의 가르침은 전혀 성경과 관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전인격적 존재와 전인격적 예배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은 자신이 쓴 다른 서신서들을 포함해서 성경 어디에서도 지지하지 않는 이런 식의 ‘분할 내지 분리’를 여기서 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고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너희 중에는 정신(마음)은 관계 없이 영으로만 기도하는 놀라운 사람들이 있다면서? 참으로 대단하구나. 너희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 그들을 책망하고 풍자한 바울은 15절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나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결론은 “나의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영”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나의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결국 나의 정신(마음)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 채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내가 지금 무슨 기도를 하는지 모르는 채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③은사는 개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결코 방언의 은사를 개인 경건용으로 권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은사의 본질을 고려할 때 너무 명확합니다.

  ④방언을 통역하라는 가르침의 중요한 의미

  14장 전반부에서 몇 번에 걸쳐 방언은 통역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방언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측면을 꼽는다면 ‘방언은 통역될 수 있는 언어다.’ 즉, ‘통역될 수 없는 말은 결코 성경의 방언이 아니다.’입니다.

‘통역될 수 있다’=‘그 말 속에 의미가 있다’  ‘의미가 있다’=그 언어 속에 일정한 규칙이 있음

  방언은 ‘하늘의 언어’라는 주장을 가지고 언어 속에 있어야 할 규칙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늘의 언어는 규칙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궤변입니다. 규칙이 없으면 이해도 없습니다. 규칙이 없는 언어는 언어가 아니라 단지 소리일 뿐입니다.(고전14:7~10)

  ⑤카슨의 고뇌

   ※D. A. 카슨 교수 : 시카고 트리니티 신학교 교수, 정통적인 개혁 신앙을 고수하는 동시에 오순절 은사주의의 주장에 열린 시각을 가진 교수.

   『코드 언어』의 예시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의 자비는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PRS TH LRD FR HS MRC NCRS FRVR

PTRRMNSVSVRHDHRDFRSLFSC

PATARA RAMA NA SAVARAHA DAHARA....

파타라 라마 나 사바라하 다하라....

자음재배열

자음제거

아a소리 붙임

  물론 카슨은 위의 법칙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법칙이 분명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와 같은 하나의 코드를 스스로 만들어 본 것입니다. 그만큼 그의 고민은 깊습니다. 무슨 고민입니까? 오늘날 방언 속에는 도저히 무슨 규칙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주는 고민입니다.

  ⑥믿을 수 없는 통역들의 난무

  (킬달 박사, 카슨 교수의 예시) : 7가지 통역 중 비슷한 것이 하나도 없음. 같은 방언을 놓고 서로 다른 통역을 주장하는 통역자들.

 ⇒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엉터리이거나 애초에 방언은 통역이 불가능한 소리이거나 둘 중의 하나지요. 오늘날의 방언을 보고 그 속에서 방언을 인정하는 카슨 교수와 같은 사람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카슨의 그 고민이 귀하게 느껴지는데, 성경을 정직하게 본다면 카슨의 고민은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⑦오늘날의 방언은 언어인가

언어학자 자켓Jaquett : 우리가 여기서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니다. 인간의 언어구조를 피상적으로 모방한 의미 없는 소리의 모음일 뿐이다.15)

킬달 박사 : 내가 오랜 기간 방언을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방언은 학습된 현상이다. 방언을 하는 데 필요한 심리적 조건이 갖춰진 사람은 누구나 쉽게 배워서 할 수 있다.16)

굿맨 박사 : (소리가 소리로 남지 않고 언어가 되기 위한 조건 3가지)

  첫째, 음성신호. 둘째, 언어는 끝없이 새롭게 재생산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언어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다.17)⇒오늘날 방언 세 가지 조건 중 단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함.

 

  바울이 14장 전반부에 걸쳐 강조한 것은 방언이 교회 안에서 은사로 바로 쓰여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이 명령이 지켜지려면 교회 안에서 쓰이는 방언이 언어여야만 합니다. 언어가 아니라면 어떻게 통역될 수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방언은 바울의 이런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방언이 통역될 수 있는 언어인가 아닌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성경 본문의 문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몇 구절을 자르고 조합해서 오늘날의 방언 사용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통역하라고 하는데 통역될 수 없는 암호가 바른 방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씀보다 나의 체험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장의 후반부 : 14장 21~40절

  전반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방언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14장 전반부에 걸쳐 잘못된 방언 사용에 대한 책망을 마친 후 후반부를 시작하면서 방언의 정의를 다시 정리하는 것은 마지막으로 방언의 실행 규칙들을 열거하기 전에 제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방언의 본질 앞에서 눈을 뜨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개인경건’을 위해 남용하고 있는 방언은 결코 믿는 자들이 자신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님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①방언과 예언이 예배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되어야 할지를 설명합니다. 방언은 원할 때 시작할 수 있고, 원할 때 멈출 수 있는 은사였음에 비해 예언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언은 언제 내게 주어질지 모르는 말씀이기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언제 어떻게 내게 주어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②여자와 관련된 문제(34,35절) : 남녀를 차별하기 위해 씌어진 구절은 아니라 남녀 간의 질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씌어진 구절임. 고린도라는 지역의 특성을 포함한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이 구절을 일반화시켜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 있음.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14장의 주제와 관련지어 볼 때 “말하는 것”은 방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함. 왜 바울은 여자더러 교회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고 할까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고린도의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아프로디테 신전의 천 명의 여사제들은 분명 방언에 능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교회에서 방언하는 것이 당시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방인조차도 하나님의 사람들의 집회소를 지나가다가 여자들이 알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 즉시 ‘아프로디테의 사창가인가?’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바울은 추정합니다.

  ③바울은 다른 어떤 서신서에도 다음과 같이 무서운 경고를 쓴 적이 없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린도 교회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다시 한 번 단적으로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스스로 잘난 줄 아는 인간들을, 내가 이렇게까지 알아듣게 얘기했는데도 스스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교만해서 하나님의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명심해라. 나의 말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너희가 거절하는 것은 사람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임을 기억해라.”

  ④질서의 중요성을 강조.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은 결코 은혜니 뜨거움이니 하는 단어들을 사용해 질서를 깨뜨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부터 이방 종교의 특징은 광란과 무절제입니다.

  ⑤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 문맥과 관계없이 작위적으로 해석해서 방언은 ‘권장’하고 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 방언은 당시까지는 하나님이 거두시지 않은 성령의 은사였습니다. 제대로 사용만 하면 금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 세 장에 걸쳐 고린도 교회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방언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살폈습니다. 따라서 이 편지를 제대로 읽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방언에 대해 거부감 내지 필요 이상의 우려를 가질 수 있음을 바울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대로 사용될 때 귀한 은사인 방언이 위축될 것에 대비하는 충고를 마지막에 덧붙이고 있습니다.

 

14장의 결론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방언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방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을 통해 바른 방언은 반드시 통역될 수 있으며,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계시의 은사로 사용됨을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문제는 말씀이냐 체험이냐 사이의 문제가 됩니다. 저는 오늘날의 방언이 결코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성경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이고, 둘째, 하나님은 폐품을 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방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부터 수많은 이방 종교 속에 있던 방언입니다.(다음 장에서 살펴봄)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는 기독교 외에 각종 종교들 속에 여전히 있는 방언입니다.

 

12~14장의 전체 결론

  지금까지 이 세 장을 공부하면서 바울이 태연한 마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논하고자 쓴 글이 아님을 잘 알았습니다. 이 세 장 속에는 말할 수 없는 바울의 탄식과 괴로움이 녹아 있습니다. 바울은 왜 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에 대해 이토록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은사 문제는 교회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장을 통해 은사의 본질을 공부했지만 사실상 이 공부는 교회의 본질을 공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12장과 13장을 통해 은사의 본질과 그 속에 녹아 있어야 할 사랑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14장에 들어와 방언과 예언의 대비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언이 그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바르지 않음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모든 가르침의 목적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단순히 은사가 무엇인지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은사의 본질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이 세 장을 통해 우리가 은사에서 한 걸은 더 나아가 교회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도록 만듭니다.

 

 

 

3부. 오늘날의 방언

01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닌 이유

  제가 오늘날의 방언을 부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이 설명하고 보여 주는 방언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효과가 좋은가 부작용이 많은가의 여부가 옳고 그름의 잣대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방언을 하고 있고 이 방언 기도를 통해 여러 가지 좋은 유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을 성경의 가르침 앞에 비추어 보아야만 합니다. 말씀 앞에서 반드시 검증받아야만 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기독교 진리의 역사성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 말씀의 절대 권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전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방언이 은사 중의 하나인 이상 방언은 반드시 은사의 본질에 부합해야만 합니다. 이번 장에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은사의 본질에 비추어 왜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될 수 없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⑴오늘날의 방언은 학습과 훈련으로 습득 가능하다

  성령이 주시는 은사의 가장 중요한 본질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문제입니다. 즉, 은사는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주시는 것입니다. 은사는 우리가 달라고 조른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달라고 떼쓰고 조르는 과정을 통해 얼마든지 방언은 학습되고 훈련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간단한 발음을 반복해서 따라 하게 하는 고전적 방법에서 시작해 머릿속에 아득한 십자가만을 연상하도록 하는 유도 최면식 방법까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킬달 박사는 연구 결과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방언 학습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1. 오로지 방언을 하기 위한 한 가지 목적으로 모일 것

2. 리더는 모인 사람들이 간절히 방언을 사모하도록 분위기를 상승 시킬 것

3. 참석자들이 특정한 소리를 내도록 리더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유도하고 계속적인 확신을 줄 것18)

  하나님이 주신 것과는 거리가 먼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이 말하는 은사의 본질로써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주권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심리적 요인들로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습니다.     (심리적 특징)

  첫째, 방언은 스트레스를 얼마나 많이 받는가의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방언이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여러 효과들은 더욱더 방언에 대한 동기부여를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둘째,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방언으로 인도한 지도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개인적으로 최근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은 사람일수록 방언 지도자가 유도하는 가르침을 훨씬 더 쉽게 수용한다고 합니다. 방언 지도자에 의해 방언을 하게 되는 경우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데, 방언 지도자에 대한 참석자들의 정신적 의존도가 대단히 높다는 점입니다.

  셋째, 억눌렸던 방언에 대한 갈망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경우가 아주 흔합니다. 방언의 사례를 조사해 보면 방언은 의식적 노력 또는 선택에 의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하고 싶어서 갖은 애를 다 쓸 때는 안 되다가 어느 날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방언이 시작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합니다. 이 점은 바로 앞에서 다룬 스트레스 또는 극도의 불안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방언을 더 많이 하게 된다는 조사와 일맥상통합니다.

  (음성적 특징)

  1. 그 나라 언어에 없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즉, 자기에게 고유하지 않은 외국어에만 있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방언은 전혀 다른 나라의 언어 같지만 자신의 모국어와 소리 면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다.

  2. 인도자와 소리 패턴이 비슷하게 이루어진다. 한 장소에서 어떤 인도자에 의해 집단으로 하게 되는 경우 그 인도자의 소리 패턴을 닮는 경우가 많다.19)

  방언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마친 후 킬달 박사는 다음의 최종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연구 결과 방언을 위한 심리적 필요충분조건이 갖춰진 사람은 누구나 방언을 배워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이 결론은 한 가지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일 수 있는가?”20)

 

  ⑵오늘날의 방언은 기독교 밖에 더 많이 있다.

  제가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한 책망에서 방언의 본질을 가지고 논하지 않습니다. 그는 시종 본질상 바른 방언의 ‘잘못된 사용’에 대해서만 논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고린도의 방언은 당연히 통역이 되는 언어임을 전제로 얘기합니다. 바울은 통역하지 않고 쓰이는 방언에 대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보는 방언은 어디에나 언제나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주신 방언이 아닙니다. 그 방언은 역사 속에서 바로 그 날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흔하디 흔한 이 방언은 어디에나 언제나 있었던 소리입니다.

   ①기독교 밖의 방언에 대한 기록들

     ◇그리스 플라톤의 기록 : 그리스의 각종 신전에서 신비한 예언의 통로로 사용됨.

     ◇북극의 에스키모들 : 종교의식

     ◇히말라야 티벳의 사원

   ②기독교 내 방언의 발생 기록(성경의 방언은 아님)

     ◇사도시대 후...

        몬타누스 : 이단, 스스로 성육신 한 성령 하나님으로 생각함.

        터툴리안 : 몬타누스 영향을 받은 사람.

     ◇17세기 : 퀘이커교(조지 팍스), 몰몬교(조셉 스미스)

     ◇20세기 : 찰스 팜(현대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결론적으로 지난 기독교의 2천 년 역사상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오늘날의 방언은 20세기 들어 세계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이유는 오순절 계통에서 만든, “방언은 달라고 구해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라는 새로운 방언 신학 때문입니다.

<크리스웰 교수>의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닌 이유 5가지

①오늘날의 방언이 지지하는 신학적 교리는 전혀 성경을 통해 정당화 될 수 없다.

②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칼빈, 루터, 웨슬리, 수많은 청교도를 비롯해 하나님이 가장 크게 쓰신 사람 중에 오늘날과 같은 방언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③기독교역사에서 오늘날과 같은 방언은 항상 정통 교회 밖에서 발생했고 많은 경우 이단으로 판정되었다.

④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성령의 선물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방언 속에 통역이 가능한 외국어는 찾아 볼 수 없다. 모두가 의미 없는 소리일 뿐이다.

 

 

02  오늘날의 방언 열풍이 줄 수 있는 위험들

  ⑴에큐메니컬 운동의 능력

  오늘날은 체험이 동일한 한, 교리가 달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추세입니다. 가톨릭 안에도 오순절파 가톨릭을 중심으로 방언에 대한 열기는 더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많은 사람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하나로 만드는 데 방언보다 더 좋은 도구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정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점점 교리적 가르침보다 체험적 감정 고조를 더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교리를 벗어 던지고 체험으로 하나 되도록 하는 사탄의 보이지 않는 무서운 공격은 ‘연합과 사랑 그리고 관용’이라는 달콤한 가면을 쓰고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있습니다.

  ⑵구원의 이원화

  이미 2차 성령세례가 잘못된 신학임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방언의 은사를 강조함으로 영적 엘리트와 영적 보통 사람들 간의 계층이 발생합니다. 방언 열풍은 본의 아니게 기독교인을 등급화시킵니다. 어떤 특정 은사를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 또는 ‘특별한 영성’을 가진 사람과 ‘평범한 영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괴리감입니다.

  ⑶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

  방언 열풍이 초래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왜 기적만이 성령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자연법칙은 하나님이 성령과 함께 시작하신 창조 사역입니다. 왜 우리는 자연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되는 이 ‘진짜 기적’ 속에서 성령을 만나지 못할까요?

  하나님이 오해된다는 것은 결국 바른 교리가 상실되고 성경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2천 년 교회 역사에서 성령께서 무시받았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들까지 교회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볼 때 성령이 무시받으시는 경우는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바로 성령이 직접 쓰신 하나님의 말씀이 체험에 밀려 철저하게 무시되는 경우입니다.

  ⑷한두 구절로 만들어진 신학

  앞서 고린도전서를 통해 개인 경건용 방언의 주장이 얼마나 성경과 동떨어진 가르침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성경 말씀의 유기적 관계가 무시되고 눈에 띄는 한두 구절에 의해 각종 체험과 감정주의가 정당화될 때 우리는 결국 입으로는 ‘말씀’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말씀’에서 철저하게 떠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방언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하는 2차 성령세례와 같은 신학은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패커 박사는 체험에 기초한 오순절 신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우선 은사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 나름의 신조와 신앙고백이라고 내세울 만한 점이 전혀 없다는 것부터 지적해야겠다. 신학적으로 그들은 사도들의 체험이나 전통적인 ‘기적 신앙’외에는 제시할 것이 없는 원시인에 가깝다.....그들은 신학적인 사색에는 별로 흥미가 없다. 그런 것들이 이 운동의 진정한 관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경 해석은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다. 게다가 이 운동 안에서조차 은사 체험에 대해 신학적인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거나, 그런 일에 괘념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하다.21)

  저는 이 책을 준비하면서 방언을 적극 지지하는 국내외 작가들의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책에서 성경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맥과 별 관계없는 단편적 성경 구절 몇 개를 장식용으로 올리고 나머지는 거의 모두 자신의 신비적 체험으로 대부분의 내용을 채우고 있습니다. 마헤쉬 차브다의 책 한 권이면 방언을 지지하는 책을 인용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습니다. 

 

결론

  첫째, 오늘날의 방언은 결코 성경의 방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방언과 오늘날의 방언은 은사의 본질과 목적에서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 무엇보다 오늘날의 방언은 언어가 아니다. 따라서 그 속에 의미가 없으며 결코 통역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방언은 분명한 언어이며, 그렇기에 통역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셋째, 방언 기도는 전혀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생각이 배제된 기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담기지 않은 기도는 결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채 내게 신비한 체험을 가져다 준다는 이유로 방언을 하늘의 언어라고 가르치고 권장하는 움직임은 중지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이 비록 내게 신비한 체험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글을 닫으며 :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기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제가 지금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하나의 기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방언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의 주장이 기적을 부정하는 주장은 아닙니다. 기적은 여전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언제라도 초월적 개입을 통해 우리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은사에 대한 잘못된 신학이 가져다 주는 재정적 피해를 만약 누군가가 조사한다면 아마도 천문학적인 액수가 나올 것입니다. 은사에 대한 오해는 필연적으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이어집니다. 도대체 ‘성령사역’이 무슨 뜻입니까? 저는 처음에 이 말을 접하고 무슨 뜻인가 의아했습니다. 아니 교회의 사역 중에 ‘성령사역’ 아닌 것이 어디 하나라도 있습니까?

  성령에 대한 잘못된 신학은 오늘날 교회 속에 ‘기적의 남발’이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종의 기적 중에 가장 쉽게 일어나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방언입니다.

 

실존 문제의 해결

  이 책을 쓰는 동안 한 가지 떠나지 않는 의문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방언을 중요하고 방언에 목을 매는 것일까?’ 라는 질문입니다.

  방언을 하게 된 사람들의 많은 ‘간증들’을 읽으며, 방언을 통해 얻은 유익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더 실제적으로 또는 실존적으로 느끼게 되었다는 고백을 많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부분이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방언이 인기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의문 또는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이 부분에 있어서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방언을 통해 그 탈출구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며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데 충분한 모든 것을 말씀을 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이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결국 말씀으로 해결 안 된 부분을 ‘말씀 너머에 있는 체험’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방언의 효능에 빠진 사람들에게 말씀이냐 체험이냐를 놓고 선택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기독교의 본질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신비주의적 체험에 한없이 약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기독교 초기 영지주의자들이 희망했던 어떤 신비한 몸을 가진 ‘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배고프고 피곤하고 울고 웃으셨던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기록한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종교입니다. 보고 만질 수 있는 예수를 기록한 성경을 성령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심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말씀을 통해 모든 인류가 그토록 고민하고 애태우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도록 하는 종교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체험을 검증할 것인가 아니면 체험에 비추어 말씀을 짜 맞출 것인가 사이에는 결코 회색 지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려는 시도?

  어떤 분은 “왜 당신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제한하려고 합니까?”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초대 교회에 주셨던 은사들, 특히 방언은 오늘날 더 이상 없다는 저의 생각이나 하나님은 방언을 과거에도 주셨으니까 지금도 주셔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이나 어차피 자신의 시각에 따라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비록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이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법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꾸 새로운 계시를 갈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충분하게’ 주어진 계시를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새로운 계시는 더 이상 없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의 방언도 없습니다. 성령은 완성된 계시를 통해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체험에서 말씀으로 돌아가자

  기독교의 능력은 다른 사람이 꿈도 꿔 보지 못한 엄청난 체험을 한 데서 오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데서 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존재했던 사람 중에서 성령의 은사를 모두 소유한 유일한 분은 예수님일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보여 주지 않으신 유일한 은사가 방언입니다. ‘충만’과 ‘능력’만을 찾아다니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보여 주신 진짜 능력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닮기 위한 말씀입니다. 약함 속에서 도리어 더 빛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부 록 : 예언의 은사

  예언은 방언과 달리 성경에서 ‘예언이 무엇인가.’라고 명확히 알려 주지 않습니다. 예언의 본질과 그 역할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성경 전체, 특히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언과 관련한 사건들과 구절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A가 무엇인지 알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는 A가 아닌 것들을 하나씩 지워 가는 방법입니다.

 

예언에 대한 오해 1 : 예언은 미래의 일과 전혀 상관 없이 단순히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은사다

  예언의 은사가 사도 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하는 신학자 또는 목회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예언을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이미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일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미래와 관련된 예언(요한계시록)은 철저하게 사도들에게만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사도가 아닌 사람들에게 주어진 예언의 은사는 사도에게 주어진 예언의 은사와 본질상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가장 큰 근거로 성경이 예언의 은사를 꼭 분별과 연결시키는 사실을 꼽습니다. 만약 예언이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분별’이 애초에 가능하겠느냐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 앞에서 전파하는 차원의 은사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예언의 은사가 방언과 마찬가지로 고전 13장에서 끝났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동일한 어휘(예언)에 대한 전혀 다른 잣대를 사용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미래의 일을 전달함’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동일한 어휘, 미래에 대해서는 ‘미래에 대한 일’이 아니라 ‘기존 가르침의 반복’이라는 전혀 다른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예언의 은사와 전혀 다른, 구별된 은사로 등장하는 다른 은사들과 구분할 길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볼 때 예언의 은사가 12장에서 소개되는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전혀 다른 카테고리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일’을 배제한 예언은 이 두 은사와 무엇이 다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예언에 대한 오해 2 : 예언에는 등급이 있다

⑴종식론자의 예언의 등급화

  예언과 방언의 은사는 초대 교회 시대를 끝으로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종식론자는 사도의 미래 계시적 예언과 일반인의 마래 계시적 예언을 같은 등급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아가보의 예언은 그가 사도가 아니어서 분별의 대상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거부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⑵지속론자의 예언의 등급화

  예언이 오늘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는 이들은 당연히 미래 계시적으로서의 예언을 믿을 뿐 아니라 매우 사모합니다. 마음 속에 드는 ‘생각’을 하나님이 주시는 일종의 예언 또는 계시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신앙이 낮은 사람은 아리송한 낮은 수준의 계시로 혼란을 느끼는 반면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드러나는 높은 수준의 계시로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 말입니다.

  종식론자이든 지속론자이든 예언을 이처럼 등급화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깎아 내리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언이 단순한 사도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 예언이 등급화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여전히 남은 문제들(4가지)

1. 과연 바울의 제자들과 아가보의 예언은 틀린 예언인가?

  만약 이들의 예언이 틀렸다면 초대 교회당시에도 미래 계시적 예언은 오로지 사도에게만 해당된 은사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따라서 사도행전 21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제자들과 아가보의 예언은 예언은사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본문은 성령이 제자들을 통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나 더 큰 예언을 받은 바울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바울과 같은 사도가 받은 예언이 가장 높은 수준이고 사도는 그 권위에 의해 다른 예언들을 관리할 수 있다는 요지입니다. 바울이 사도라서 성령의 예언도 무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떻게 한 성령이 바울에게는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예언을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지 말하는 예언을 주실 수 있습니까? 성령이 제자들을 통해 바울을 막으신 것이 아닙니다. 즉,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게 되자 그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1등급과 2등급으로 나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엄하게 내리시는 계시입니다. 변할 수도 없고 무시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단 한 단어도 땅에 그냥 떨어지지 않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2.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래를 어떻게 분별하는가, 왜 예언에는 분별하라는 명령이 있는가

  성경에는 예언을 포함한 각종 은사에 대한 분별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10).

  개핀 교수는 바울은 방언과 통역 은사를 연결시키듯이 예언과 영 분별 은사를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고 정확하게 관찰합니다.22) 예언의 등급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언의 분별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와 나의 생각 사이의 분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 둘 사이에 경계를 긋는 것은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이 모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생각할 때 이런 분별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명령하는 분별이 다른 분별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분별하라는 것일까요?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메시지 걸러 내기식 분별’이 아닌 ‘메시지의 기원’에 대한 분별입니다. 

예언을 분별하는 것은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라 예언하는 사람에 대한 분별입니다. 예언의 ‘기원’에 대한 분별 외에 생각해야 할 또 한 가지의 분별이 있습니다. 어떤 예언이 주어졌을 때, 그 예언이 듣는 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해석하거나 풀어 주는 의미로서의 분별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언이 도달해야 할 사람에게 바로 도달하도록 교통 정리를 해 주는 분별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등장하는 예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교회에 덕을 끼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어지는 예언들에 대한 바른 해석과 적용은 예언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방언은 많아야 세 사람이 하라고 제한한 바울이 예언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질서 안에서 서로 예언하고 분별하는 한 계속 해도 관계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방언과 비교한 예언의 우월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동시에 방언은 단지 “금하지 말라.”라고 말한 바울이 예언은 “사모하라.”라고까지 말한 그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아마도 그만큼 예언은 당시에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시는 왜 예언이 그토록 중요했던 것일까요?

3. 왜 예언을 사모하라고 하는가, 바울은 분명히 모든 은사는 성령이 당신의 뜻에 따라 주권적으로 나눠 주신다고 하지 않았는가

  은사의 본질 중 핵심이 되는 한 가지 사실(고전12:11)은 모든 은사의 중요한 본질은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이기에 주시는 대로 받아 교회를 위해 잘 사용하라고 바로 앞에서 가르친 바울이 14장에서 와서 갑자기 예언을 사모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모하라는 것은 결국 구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닙니까? 결국 교회 전체의 유익을 추구하고 소망하라는 의미의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또 한 가지의 측면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방언에 목을 메고 있는 상황에서 예언 은사를 달라고 하나님께 떼쓰라는 의미가 아니라, 방언을 그토록 사모할 바에는 차라리 예언을 사모하는 것이 낫다라는 의미로 쓰인 일종의 반어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방언을 사모하는 마음은 용인할 수 없지만 예언에 대한 사모는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당시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그만큼 예언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예언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예언이야말로 당시와 같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극에 달하던 때에 성도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는 은사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른 곳과 달리 각종 이방 사상이 난무하던 그 곳에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힘을 주는 예언이 필요했습니다.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생에 대한 소망을 통해 초대 교회를 세우고 살리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어떤 신비한 체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남들 앞에서 자랑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당시 예언의 은사는 한 치 앞을 모르는 앞길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기는 간절함을 채우는 도구였습니다.

4. 믿음의 분수(분량)대로 예언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롬12:6)

  믿음의 분수만큼 예언하라는 구절을 놓고 많은 주석을 보았지만 확신을 주는 설명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살펴본 당시 초대 교회의 상황을 다시 고려해야 합니다. 당시 로마 시대에 예수님을 믿던 많은 사람들은 노예였습니다. 너무 힘든 상황 속에서 위로를 찾는 형제를 돕고 싶은 예언 은사를 가진 형제의 마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를 도울 수만 있다면 지어서라도 그 형제에게 힘을 주는 예언을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분량’을 다른 말로 하면 철저히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만큼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언의 본질 정리

예언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신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과 “각종 지혜”를 교회에 계시한다는 점에서 사도들과 연결되어 있다.....이 신비에 관한 예언 계시는 “밝히 말함”(행15:32; 고전14:3)과 “미리 말함”(행11:28, 21:10)을 포함하고 있다......이 두 기능이 실제로 나타나는 과정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 전자가 강하게 나타날 때도 있고 후자가 강하게 나타날 때도 있다....예언과 설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예언자에게는 기존 본문이 없다는 점이다. 신약 예언이 계시라는 점이다.....핵심은 예언은 성령의 역사에서 나온 영감된 것, 그래서 권위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일반적으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고 설교가는 그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다.23)

  오늘날에도 예언이 있습니까? 오늘날에는 예언이 더 이상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언과 마찬가지로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비록 우리는 완성된 말씀이 있지만 내게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은 초대 교회의 성도나 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완성된 말씀을 손에 들고 있는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에 비해 너무 큰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개핀 교수는 말합니다.

(초대 교회를) 오늘날의 교회와 비교해 볼 만하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썼을 때 그의 독자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제자훈련에 관한 공관복음의 풍부하고도 다각도적인 관점을 알 수가 없었고, 사도행전의 교회사관도 알 수 없었으며, 로마서의 체계적인 복음 설명도 알 수 없었고, 옥중서신이나 히브리서나 요한계시록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완성된 말씀을 읽을 수 있는 형편에서 과연 얼마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 모른다. 과연 우리는 이 점을 깨닫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24)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 그리고 어떤 과정들을 통해 오실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한 충분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한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 ‘성경의 완성’이 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예언은 그쳤습니다. 예언이 그치지 않았다면 성경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언은 그쳤지만 바뀌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맞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이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십자가  박희봉

무엇이 변치 않아 내 소망이 되며

무엇이 한결 같아 내 삶을 품으리

그 누가 날 만족케 해 내 영이 쉬며

그 누굴 기다려 내 영이 기쁘리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생명이 있네

 

주여 내 영을 거룩케 하사

십자가를 품게 하시며

주여 내영을 잠잠케 하사

십자가로 만족케 하소서

십자가로 승리케 하소서

 

 


1)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날 쏟아진 방언이 단순한 외국어가 아니라 외국의 특정 지역의 방언, 사투리였다고 동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냥 한국어가 전라도 또는 충청도 사투리였다는 것이다. 이 점을 증명하는 것은 매우 쉽다. 9절에 등장하는 세 가지 종족,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은 모두 페르시아어를 하는 종족이었다. 단지 서로 완전히 다른 사투리를 사용할 뿐이었다. 10절에 등장하는 브루기아와 밤빌리아는 둘 다 그리스어를 사용했지만 역시 서로 독특한 지방색을 간직한 각기 다른 그리스어였다. 즉, 사도들 중에 몇 명의 사도들은 같은 그리스어를 방언으로 했지만 각각 다른 지역의 그리스어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명의 사도들은 같은 페르시아어였지만 서로 다른 지방의 페르시아어를 말한 것이다.

2) 존 스토트 지음, 『성령세례와 충만』, IVP,2007,pp.35~36.

3) 존 스토트 지음, 『성령세례와 충만』, IVP, 2007, p 38

4) R. C. 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Paul's Frist and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Wartburg Press, 1957, P. 505

5) Robert Gromacki, The Modern Tongues Movement, Presbyterian and Reformed, 1972, p. 96.

6) 제임스 패커 지음, ‘성령을 아는 지식’, 홍성사, 2007, p. 292.

7)  존 스토트 지음, 『성령세례와 충만』, IVP, 2007

8) http;//www.kjbbc.net/bbs/zboard.php?id=Bible3&page=1&sn1=&divpage=1&누=off&ss=on&select_arrange=hit&desc=desc&no=6

9) George E. Gardiner, The Corinthian Catastrophe, Kregel Publications, 1974, p. 16.

10) Robert Gromacki, The Modern Tongues Movement, Presbyterina and

11) D. A. Carson, Showing the Spirit, BakerBooks, 1987,p.36.

12) 이 번역에서 영어의 earnestly에 해당하는 부사는 빠져 있다. 따라서 바른 번역은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가 되어야 한다.

13) 물론 이 점에서 한글 성경은 매우 문제점이 많다. 이 구절에서도 그렇듯이 중요한 단어들이 빠진 경우가 너무 많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경우도 너무 많다. 그러나 영어 성경은 한글 성경이 가진 이런 약점들을 거의 다 보완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말하는 ‘읽고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영어 성경을 읽을 때를 의미한다. 

14) 앞에서 언급한 earnestly외 에도 세 개의 단어 But, And, still이 빠졌다.

15) D. A. Carson, Showing the Spirits, 1987, Baker, pp. 83~84

16) John P. Kildahl, 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s, Harper & Row, 1972. p. 74.

17) Felicitas D. Goodman, Speaking in Tongues, 1972, pp. 100~101.

18) John P. Kildahl, 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 Harper & Row, 1972, p. 78.

19) Felicitas D. Goodman, Speaking in Tongue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2, pp. 58~125

20) John P. Kildahl, 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s, Harper & Row, 1972,p.74.

21) 제임스 패커 지음, 『성령을 아는 지식』, 홍종학 옮김, 홍성사, 2007, p. 250.

22) 리처드 개핀 저, 『성령은사론』, 권성수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p. 86.

23) 리처드 개핀 저, 『성령은사론』, 권성수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pp. 88~89.

24) 리처드 개핀 저, 『성령은사론』, 권성수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p. 122.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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