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성격심리와 종교교실

[스크랩]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을 위해 있는 것인가

류성련 2014. 9. 13. 22:43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을 위해 있는가

 

존 맥아더

 

어떤 사람이 내게, 유치원 아이들에게 방언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주일학교 인쇄물 견본 하나를 보내어 주었다. 그것은 “나는 성령으로 충만하다!”라는 제목이 붙은 8페이지 분량의 컬러로 된 책자였다. 첫 페이지에는 “성령의 사람”이라는 글이 쓰여진 티 셔츠를 입은 역도 선수가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 아래에는 “방언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라는 고린도전서 14:4이 쓰여 있었다.

또 다른 페이지에는 Howdy Doody처럼 보이는 소년이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 실려 있었다, 그 아이의 가슴에는 점선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영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 “발리 오도마 타 노모”라는 글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아이의 입으로부터 만화에서 볼 수 있는 풍선 모양의 그림과 함께 “발리 오도마 타 노모”라는 글이 반복되어 있었다, 그의 머리에는 구름 모양의 뇌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물음표가 들어 있었다. 또한 그 구름 안에는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이상의 내용은 은사주의 특성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방언의 은사는 사람의 영 안에서 활동하는, 그러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적으로 신비스러운 능력으로 보여진다. 심지어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그들이 받은 은사가 능력을 발휘하도록, 의도적으로 그들의 지성을 묶어두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예를 들어 찰스 헌터와 프랜시스 헌터(Charles And Francis Hunter)는 한 번에 수천 명이 참석하는 “치유 폭발”이라는 집회를 가졌었는데 그 집회에서 헌터 부부는 사람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받는 방법에 대해 가르쳤다. 찰스 헌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기도할 때 여러분은 언어의 소리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만 믿고 내가 시키는 소리만 내십시오.

내가 한 말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는 순간 여러분은 이상스런 소리들을 냄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처음엔 그 소리들을 빨리 말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평상시 해 오던 언어로 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크게 소리를 지르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찰스 헌터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성은 전혀 개입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청중들에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환기시킨다. “여러분 가운데 유창하게 말하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그 소리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도를 할 때 하늘의 언어로 말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생각하려 하지 마십시오.” 후에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려는 것조차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더 엘 존슨(Arthur L.Jonson)은 신비주의에 대한 그의 탁월한 글에서 적절한 이유를 내세우며 은사주의를 “신비주의의 절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그것이 지성에서 멀어져야 하며 이성적인 것에서 분리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은사Ⅱ 제7장을 보라) 이방 신비 종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은사주의자들의 모든 가르침의 특징은 순수한 신비주의이며, 따라서 은사주의자들이 스스로 방언에 대해 묘사하는 방법보다 더 완벽하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비교할 수 없는 극치의 경험으로 묘사한다. 한 저자 로버트 V. 모리스(Robert V. Morris)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내게 있어서…… 방언의 은사는 찬양의 은사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했을 때, 지금까지 생각하면서 기도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랑과 경외, 순수한 경배가 내 안에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언에 대한 신문의 한 논단은 산 호세의 빌 엘 윌리엄(Bill L. William) 목사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그것은 당신이 깊은 애정을 가지고 헌신한 누군가에게 몰입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많은 말들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그 의식은 “감정이나 지성을 뛰어넘는” 것 이라고 했으며,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중심으로 하나님의 중심에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깊은 내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초자연적인 말들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 논단은 또한 뉴 멕시코 주 화밍턴에 있는 빌리 마틴(Billy Martin) 목사의 글을 인용했다. “그것은 기쁘고 영광스럽고 놀라운 경험이다.” 테네시 주 노스빌의 다린 밀러(Darlene Miller)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당신이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설교할 때의 달콤함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방언을 하는 다른 이들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의 말들을 할 것이다.

그러면 그 같은 경험들의 문제점들은 무엇이겠는가? 만약 그것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간 것처럼, 혹은 영적으로 더 강해진 것처럼 느끼게 한다면, 심지어 관란 상태에 빠지게 한다면 어쨌든 그것은 위험한 것이며 거짓된 것일 수 있지 않은가?

그럴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그 자신이 방언을 했을 뿐 아니라 목사이기도 했던 오순절 운동을 일으킨 고 조지 가디너(George Gardiner)는 방언으로 인한 황홀감 때문에 자신을 통제하기 못하게 되는 위험성을 날카롭게 묘사했다.

영혼의 적은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을 놓치지 않는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결과를 후회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 같은 경험들은 사탄에게 재빠르게 공격할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각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은사주의자들은 계속해서 방언을 하는 자들에게 드르이 낙담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마귀로 인한 것으로, 마귀는 사람들에게 재충만을 다그친다…….

따라서 경험을 구하는 자들은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이전의 의식에로 되돌아감으로써 황홀경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마약 중독자처럼 점점 더 큰 만족을 요구하며, 그 결과 때때로 기괴한 장면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는 사람들이 지칠때까지 방안을 뛰어다니거나 천막의 기둥에 올라가거나 괴팍하게 웃거나 여러 날 동안 몽롱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어떤 이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섬뜩한 일들을 행하기도 한다. 결국 중대한 고비에 이르게 되며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된다. 즉 그는 뒷자석에 앉게 될 것이며 구경꾼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위장된 모습을 가지거나” 혹은 모든 것이 다시 전과 같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속에 살게 된다. 가장 비극적인 결말이라면 잠잠케 되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영적인 모든 거짓된 것들을 버리게 된다. 구경꾼들은 좌절하게 되며, 위장하는 자들은 죄의식으로 고통당하고, 소망을 가졌던 자들은 가련한 자리에 이르게 되며, 잠잠케 된 자들은 비참하게 되고 만다. 이같은 운동은 진실로 해로운 것을 수 있다!

방언 은사자들은 가디너(Gardiner)가 말한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바로 방언 은사자이면서도 방언하는 것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위험성을 말하기도 했다. 오랄 로버츠 복음주의 협회(the Oral Roferts Evangelistic Association)so 출판국의 편집장이었던 웨인 로빈슨(Wayne Rovinson)은 한때 열렬한 방언 은사자였다. 그는 “나는 한때 방언을 했었다”라는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 나는 방언뿐 아니라 어떤 종교적인 경험에 관한 시험은 그것을 입증하는 논리나 진설성 여부에 관계없이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아울러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어떤 일을 행하는가? 더 특별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일에 흥미를 가지게 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 그들의 필요레 관심을 가지게 하는가?

나는 방언 은사를 통해 놀라운 자유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방언을 통해 고통스런 많은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방언은 가장 놀라운 경험인 반면 또 어떤 이들에게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발전을 저해하며 인간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은사주의자였던 벤 비어드(Ben Byrd)는 이렇게 말했다.

방언을 하는 것이 전혀 해될 것이 없으며 그것을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반대되는 증거, 즉 방언하는 것이 중독과도 같다는 것이 명백해짐에 따라 어리석은 주장이 되어버린다. 방언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그 습성,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도의 심령술, 게다가 육신의 자극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방언을 행하는 데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 방언의 양이 영적 진보의 양에 비례한다고 보는 것은 곧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며, 거짓되고 위험한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방언을 하는 어떤 사람들은 전혀 감정의 변화없이 기계적으로 방언을 하다가 멈출 수 있다. 비슷한 소리를 반복하는 것을 배운 그들은 그것을 계속 연습해서 아주 유창하게 그리고 그리 힘들이지 않고 (열정도 없이) 말할 수가 있다.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

방언에 대한 언급은 성경 중 세 군데서 나타나고 있다. 마가복음(16:17), 사도행전(2장, 10장, 19장), 고린도전서(12장-14장)가 그것들이다. 우리는 앞의 제 8장에서 사도행전의 몇 대목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즉 사도행전은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내용을 서술한 책으로써, 그것이 담고 있는 특별하고도 놀라운 사건들은 전교회시대의 보편적인 패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가복음 16:17은 단지 방언을 사도적인 표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따름이다(은사Ⅰ 4장을 보라). 교회에서의 방언의 역할을 다루고 있는 대목은 성경 가운데서 고린도전서 12-14까지의 내용뿐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면 무엇보다도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은사 사용을 꾸짖기 위해 쓴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한 말의 대부분은 교회에서의 방언사용의 제한에 관한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일반적인 영적 은사에 대해, 즉 방언은사가 어떻게 주어졌으며 또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있는 은사들에 대해 어떻게 명하셨는지에 대해 말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방언이 예언보다 하위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두 장의 중간 부분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은사 사용의 동기인 사랑에 대해 말했다.

일반적으로 문맥과 상관없이 고린도전서 13장이 단순히 사랑에 대한 예찬의 장인 양 언급되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최고의 문학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순수한 사랑을 심오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방언을 남용하는 자들에게 사랑이야말로 모든 중요한 것 중에서도 첫째되는 것임을 되새겨주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1-3에서 바울은 사랑의 탁월함을 확고히 하고 있다. 1절은 명백하게 사랑이 없는 기적적인 언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사랑없이 이기적으로 영적인 은사를 사용한 고린도 교인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가페 사랑으로 특징지어지는 자기희생적인 관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보다는, 자신들을 높이거나 황홀한 경험에 몰입시키는 데 더 관심을 가졌다.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라는 말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헬라어 글로사(glossa)에서 유래한 “방언”이라는 말은 신체 기관 혹은 언어를 가리키는 것을 수 있다. 바울은 분명하게 언어의 은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울 자신도 방언을 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고전 14:18). 그는 방언 자체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만일 방언의 은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방법대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치원에서 내는 꽹과리 소리와 다를 바 없는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언은 천상의 소리인가?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라고 말했을 때 바울이 의미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이들은 바울이 말했던 방언의 은사가 천사들의 언어나 천상의 언어와 같았으리라고 믿고 있다. 사실상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오직 하나님께만 알려진 천상의 언어, 즉 하늘의 언어 혹은 이 세상 것이 아닌 다른 류의 언어로서, 사적으로 기도할 때 사용하는 언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 같은 견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다.

이어 나타나는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은 가상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내어주고 또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방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외적인 한계로까지 실례를 확장시켜 가려 했던 것이다.

성경에는 천사들이 천상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천사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도 인간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였다(눅 1:11-20, 26-37; 2:8-14).

성경 어디에서도 방언의 은사가 인간의 언어와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고린도전서 12-14에 묘사되어 있는 참 방언이 실질적으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는 오순절에서의 기적적인 언어와 다른 것이었다는 어떤 암시도 찾아볼 수 없다. 두 곳 모두 “글로사”(gl?ssa)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언어로 말했던 것이 분명하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였다.”(2:6). 누가는 제자들이 말한 15개 언어와 그 지역의 이름까지도 열거하고 있다(8-11절).

더 나아가, “방언”으로 번역할 수 있는 헬라어 “디알레토스”(Dialeltos)는 사도행전 2:6-8에 각각 사용되었다. 오순절에 참예한 불신자들은 각각 그들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들었다. 그 같은 내용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쏟아져나오는 말일 수 없었다.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흠정역(KJV)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여러 차례 “알지 못하는 언어”(an unknown language)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언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unknown)이라는 말은 번역자들이 취한 용어일 뿐 헬라어 원문에는 그 같은 표현이 나타나 있지 않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흠정역은 그 단어를 이탤릭체로 쓰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1은 바울이 의미 없는 무아경의 언어나 천상의 언어, 혹은 천사의 언어로 말했을 것이라는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방언이 교 내에서 행해질 때 누군가에 의해 통역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4:13, 27). 만일 바울이 “개인적인”기도의 언어나 무의식적인 천상의 소리로서 무아경의 상태에서 주절거리는 소리를 염두에 두었다면 그같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통역을 뜻하는 헬라어 “허메뉴어”(Hermeneuo)는 “번역”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요 9:7; 히 7:2). 통역의 은사는 결코 배운 적이 없는 언어를 해석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서, 그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고전 ·4:5). 무아경 상태에서 횡설수설하는 것이라면 결코 통역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바울이 사람의 언어를 염두에 두었던 또 다른 암시가 고린도전서 14:21-22에 나타나 이?. 그곳에서 바울은 방언이 ?지 않는 이스라엘에 표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의 언어로 계시를 말씀하실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주어진 이사야 28:11-12의 예언에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것이었다. 의미심장한 표적이기 위해서 방언은 어떤 천사들의 언어가 아닌 이방의 언어여야 했다.

 

거짓된 방언

명백히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방언은 횡설수설하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언어이다. 그러나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에서의 방언은 제대로 된 언어가 아니다. 종종 방언(glossolalia)으로 불리는 현대의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 은사와는 다른 것이다. 토론토 대학(Toronto)의 언어학 교수인 윌리암 사마린(William Samar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5년 이상 나는 이탈리아, 네덜란드, 자마이카,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있었던 모임에 참석하여 전통적인 오순절파들과 신 오순절파들을 살펴보았다, 나는 가정에서 있었던 작은 모음에서부터 대형 집회에 이르기까지 각종 모임에 참석하여 보았는데 그때마다 브롱크스의 푸에리토리코 사람들과 에팔래치아 산맥의 뱀 조련사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한 이상한 문화적 현상을 목격하였다…… 방언(glossolia)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와 같은 것이기는 하나 이는 단지 방언을 말하는 자가 (무의식적으로) 이것이 언어이기를 발라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뿐이다. 여러 외적인 유사성이 있기는 하지만 방언(glossolia)은 근본적으로 언어가 아니다.

윌리엄 사마린(William Smarin)은 방언을 연구한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모든 연구는 오늘날 우리가 듣는 방언이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에 일치된 견해를 보여준다. 따라서 만일 그것이 언어가 아니라면 그것은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은사Ⅱ 제7장) 1세기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황홀경의 언어나 무아경의 경험들과 같은 신비 종교가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어떤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된 무아경을 유포함으로써 방언의 은사를 훼손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사용한 것은 오늘날의 방언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 같은 행위는 방언 은사의 목적을 혼란케 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바로 잡으려고 했다. 만일 그들이 그처럼 방언을 사용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유익을 주기는커녕 해만 끼쳤을 것이다.

 

고린도에서의 방언의 남용

고린도전서 14:2에서 바울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언의 은사”라는 문제로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기도할 때 방언을 말하는 것은 무익하다고 지적해 주기 위해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방언을 할 경우 단지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은사는 결코 하나님의 유익이나 은사를 받은 당사자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베드로전서 4:10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

더 나아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4에서 다음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해 방언을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파괴하고 사랑의 원리(“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를 무시한 채 은사를 사용하는 자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14:4의 “세운다”라는 것은 문맥에 따라 소극적인 의미 혹은 적극적인 의미를 취할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기적인 욕심으로 자신들을 세우기 위해 방언을 사용하였다. 그들의 동기는 건전하지 못했으며 자기중심적이었다. 방언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다른 신자들 앞에서 은사를 과시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 같이 과시욕에 가득 찬 방언은 자기 외에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방언을 하는 주된 이유는 자신의 이기심을 세우기 위한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0:24에서 바울은 이미 이같은 원리를 분명하게 했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방언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즉 고린도 교인들은 밝히 드러내야 할 말씀을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모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14:16-17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다시 말하면 고린도에서 방언하는 자들은 이기적인 자들이었으며, 다른 회중을 무시하는 자들이었고, 교제를 위해 주어진 은사를 웨손시키는 자들이었고, 모든 것을 자기만족을 위해 그리고 자기들의 영성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나타내 보이기 위해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고린도전서 12:31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말은 납득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이 구절은 매우 심각한 번역상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가운데 은사를 과시하려는 고린도 교인들을 꾸짖고 나서 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을 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현 상태를 계속해서 고수하라고 격려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그러나 사실 그 구절은 그같은 명령을 보여주는 구절이 아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직설법(사실의 진술)이 될 수도 있고 명령법이 될 수도 있는데 직설법을 취할 경우 뜻이 더욱 명료해진다. 새국제역(INIV) 성경은 이 대목을 직설법으로 옮기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열렬히 더 큰 은사를 사모하고 있다.” 그리고 알버트 반즈(Albert Barnes)가 19세기 중반의 많은 주석가들(Doddridge, Locke, Macknight)이 이와 같이 주석했음을 지적하면서 직설법을 취하였다. 반즈는 다음과 같은 시리아 역본의 대목을 비중 있게 보았다. “너희가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하므로 내가 너희에게 제일 좋은 길을 보이리라.”

다시 말하면 바울은 실제로 “너희는 질투심을 가지고 과시하기 위한 은사를 탐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책망으로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즉 바울은 그들에게게 어떤 은사들을 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시하기 위해 은사를 구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 “제일 좋은 길”은 고리도전서 13장에 나타나고 있는 사랑의 길을 뜻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장 탁월하고 가장 과시할만하고 가장 유명한 은사들을 구하였다. 그들은 다른 이들로부터 칭송받기를 원하였으며 사람들의 찬사를 구했다. 그들은 “영적인”자들로 보여지기를 소원했다. 그 결과 그들은 거짓된 방언의 사용이라는 극단으로까지 나아갔는데 고린도에서의 방언의 남용은 교회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슬프게도 그와 똑같은 문제가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방언은 그칠 것이다.

고린도전서 13:8에서 바울은 흥미있고도 놀랄 만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나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라는 표현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나”라는 헬라어 단어는 “쇠하지 아니하다”를 의미한다. 바울은 사랑이란 대적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업슨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은 영원히 유효할 것이며 결코 한물 간 것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방언은 “그칠 것이다.” 고린도전서 13:8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영원히 그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방언이 한번 그치게 되면 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게 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오늘날의 은사주의와 결부된 문제점이 나타나게 된다. 즉 만약 방언이 그치게 될 것이라면 그 일은 이미 일어났는가, 아니면 여전히 미래의 일인가? 은사주의자들은 어떤 은사도 아직 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방언이 그치는 것은 여전히 미래의 일이라고 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비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은 사도 시대가 지나면서 이미 그쳤다고 주장한다.

누가 옳은가?

나는 역사, 신학, 성경 모두 방언이 사도 시대에 그쳤음을 보여준다고 ale는다. 현재의 은사주의는 성경적 방언의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고린도에서 있었던 거짓된 방언과 비슷한 것에 불과하다.

방언이 그쳤다는 무슨 증거가 있는가?

첫째, 방언은 기적적이고 계시적인 은사였으며 여러 차례 살펴보았듯이 기적과 계시의 시대는 사도들과 함께 막을 내렸다.

신약성경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기적은 주후 58년경에 있었던 말타섬에서의 치유라고 할 수 있다(행 28:7-10). 주후 58년에서부터 요한이 계시록을 다 기록한 96년까지는 어떤 기적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방언이나 치유 같은 기적들은 초기의 서신인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후에 에베소서와 로마서 두 서신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길게 기록하고 있으나, 기적을 행하는 어떤 언급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당시 이미 기적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로 이야기되고 있다(히 2:3-4). 사도의 권위나 사도의 메시지가 더 이상 어떤 확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1세기가 끝나기 전 모든 신약 성경이 다 기록되었으며 이미 전교회에 회람되고 있었다. 계시적인 은사들은 더 이상 그 존재의 필요성이 없어졌다. 따라서 사도 요한의 죽음과 더불어 사도 시대가 끝나게 되었을 때 사도임을 입증하기 위해 주어졌던 표적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고후 12:12).

둘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방언은 믿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표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새 일을 시작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향해 모든 언어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장애물은 거두어졌다. 따라서 방언의 은사가 불순종하는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표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방언은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교체의 표시였다. 교회의 설립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새 날이 밝았다. 하나님께서 모든 언어로 말씀하시고 계셨다. 그러나 교체의 시기는 지나갔으며 그 같은 표적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팔마 로버트슨(O.Palmer Robertson) 교수가 그 결과를 적절하게 설명하였다.

방언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요람에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분명하게 유대교와 다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교체가 이루어졌으며, 교체의 표적이었던 방언은 이제 더 이상 교회 생활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단일 민족인 이스라엘에게서 전민족으로 옮기시고 계심을 보여주는 표적이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 그 같은 변동은 이미 성취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도의 직분을 세우기 위한 경우처럼, 특별히 방언이라는 교체적인 은사가 하나님의 옛 언약 백성과 새 언약 백성을 위한 언약적인 표적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그 역할이 완수되었기에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그 기능이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보다 낮은 등급의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표적으로서 주어진 것이었기에(고전 14:22) 적절하게 교회를 세울 수가 없었다. 반면에 그것은 자기를 세우는 데 쉽게 오용될 소지가 있었다(14:4). 교회는 자기 만족이나 개인적인 경험을 구하는 곳이 아니라 몸을 세우는 곳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교회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었으며, 결코 영원한 은사로 간주될 수가 없는 것이다.

역사는 방언이 그쳐진 사실을 기록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방언이 신약성경 가운데 단지 가장 앞부분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미 심장한 일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적어도 12편의 서신을 기록했으나 어디에서도 방언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베드로도 결코 방언을 기록하지 않았다. 야고보도 결코 방언을 기록하지 않았다. 요한 또한 결코 방언을 기록하지 않았다. 유다 역시 기록하지 않았다. 방언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만 일부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는 복음의 새 메시지가 널리 전파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교회가 한번 설립된 이후 방언은 사라졌다. 즉 방언이 멈춘 것이다. 신야그이 후반부는 결코 방언에 대해 다시 언급하고 있지 않다. 후기 사도 시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방언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클레온 로저스(Cleon Rogers)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방언의 은사가 어디에서도, 심지어 사도적 교부 시대에서조차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각각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최고의 신학자였던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어거스틴(Augustine)은 방언을 이미 지나가 버린 것으로 간주했다. 크리소스톰의 경우 방언이 바도 시대에 이미 끝난 것으로 분류했다. 4세기경에 쓴 저작에서 그는 은사의 특성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방언을 모호한 행위로 묘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호성은 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그 단절로 인해 그것에 대해 무지하게 된 연유로 말미암은 것이다.”

어거스틴은 방언을 다음과 같이 사도 시대를 위해 주어진 표적이라고 보았다.

사도 시대에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임하자 그들이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언어가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임했다.” 이것은 그 시대에 적합한 표적이었다. 이는 성령께서 모든 언어로 임하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세계에 두루 펼치게 하실 필요가 있어서였다. 그 일이 이루어지자 그것은 폐하여졌다. 성령받기 위해 안수하는 가운데 그들이 방언하는 것을 보았는가?(이 물음에 대해 어거스틴은 명백하게 부정적인 답변을 하였다.) 만일 성령 임재의 증거가 이적을 통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무엇으로 성령받은 사실을 알 수 있는가? 그 당사자로 하여금 그 자신의 마음에 답하도록 하라. 만일 그가 그 형제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또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렇다면 형제들이여,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모든 민족의 방언을 말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그가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이 같은 불신앙에 의해 시험당하는 것을 금하셨다…… 어느 누구도 모든 민족의 방언을 다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이는 교회 자체가 이제 모든 민족의 방언을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교회는 한 민족 가운데 있었으며 모든 방언을 했다.

교회가 시작된 지 처음 오백 년 동안 방언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낙인찍힌 몬타누스(Montanus)의 추종자들이었다(은사Ⅰ제3장을 보라).

그 다음으로 기독교 안에 방언을 하는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7세기에 들어서였다. 남부 프랑스의 세베니스(Cevennes) 지역에 있는 호전적인 한 개신교 모임이 예언을 하며 환상을 보고 방언을 하게 되었다. 때때로 그들은 세베놀(Cevennol) 선지자들로 불리며, 영적인 유산보다는 정치적 군사적 활동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들 예언의 대부분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들은 격렬하게 카톨릭에 대적했으며 카톨릭 교회에 대해 군사적인 무력의 사용을 주장하였다. 결국 그들 중 대부분은 로마에 의해 핍박받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들과는 반대편에 있던 자들로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가르치는 개혁자들을 반대했던 로마 카톨릭의 한 분파인 젠센파(Jansenists) 역시 1700년대 당시 방언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자들이었다.

방언을 말했던 또 다른 일파가 있었는데 1700년대 nd반에 일어났던 미국의 퀘이커인 쉐이커(Shakers) 교도들이었다. 그 일파의 창시자인 마더 앤 리(Mother Ann Lee)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대등한 여성으로 간주했다. 그녀는 72가지의 방언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쉐이커 교도들은 성 관계가 죄악된 것이라고 믿었는데, 심지어 결혼한 관계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그들은 몽롱한 상태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방언을 했다.

그리고 19세기 초반에 스코틀랜드의 장교 목사인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과 그 교 신도들이 방언과 예언을 하였다. 어빙파 사람들의 예언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으며 맞지도 않았다. 또한 그들의 모임은 지나치리만큼 거칠었던 것이 특징이었다. 이 운동은 그들 중 일부가 거짓된 예언을 인정하고 또 어떤 이들의 경우 자기들의 “은사”를 마귀에게 돌리기까지 하는 바람에 불신당하고 말았다. 결국 이 그룹은 카톨릭 사도 교가 되었는데, 그들은 여러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열두 사도의 직분을 세우는 등 많은 가르침을 거짓되게 가르쳤다.

방언을 하는 모든 자들은 이단적이고 광신적인 그룹들과 동일시 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비정통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성경적으로 정통한 같은 시대를 사는 신자들의 판단에 의하면 이들 모든 그룹이 곁길로 이탈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틀림없이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평가여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시대 말기에서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순수한 신약의 방언 은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방언은 성령이 말씀하신 대로 끝나버린 것이다(고전 13:8).

신약 학자인 토마스 에드가(Thomas R.Edga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사와 표적들이 그쳐졌기에 자신들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은사주의자들의 짐은 더욱 무거워질 수 밖에 없다.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비은사주의자들은 표적으로서의 기적적인 은사들이 끝났다고 하는 명백한 성경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비은사주의자들은 이것을 증거하는데 있어 전혀 어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속에서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오순절파들에 의해서도 인정된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은사주의자들은 표적으로서의 은사가 교회 시대 동안 다시 시작될 것이며, 오늘날의 현상들이 그 재현이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들의 경험이 거의 1900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은사의 재현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의 마지막 강림

방언의 은사는 20세기에 다시 시작되었는가?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은 둘 중 한 가지 방법으로 이 물음에 대해 답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은사는 단지 퇴보했을 뿐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 방언을 주장하는 자들은 동시대의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의 선두 주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 같은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들은 이단의 한 무리가 되었다.

또 다른 입장으로,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사도 시대 이후 방언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많은 은사들은 성령의 마지막 강림이며 마지막 때를 위한 은사들이라고 믿는다.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의 주된 근거는 요엘 2:28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 2:19-32에 따르면 주의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에 하늘과 땅에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 방식으로, 즉 피와 불과 구름 기둥들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31절). 그것은 명백히 다가올 천년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그전의 어떤 것으로도 말해질 수 없다. 요엘서의 문맥은 이것만이 적합한 해석임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요엘 2:20은 마지막 때의 묵시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공격할 “북편 군대”의 패배를 말하고 있다. 요엘 2:27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대부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대환난 때의 또 다른 현상으로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이다. 요엘 3장(2, 12, 14절)은 그 민족의 심판, 즉 아마겟돈 이후에 오게 되는 사건과 지상에서 있게 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도래와 관련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3장 후반부에서 요엘은 천년왕국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18절). 요엘 2장은 명백히 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그것은 오순절 때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으며(행 2장) 그 이후에도 성취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미래에 속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베드로가 오순절날에 대해 요엘 2:28-32을 인용했을 때 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따르게 된다(행 2:17-21). 어떤 성경 학자들은 베드로가 오순절을 요엘 2:28의 성취로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순절날에는 하늘이나 땅에 어떤 기이한 일도, 표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피도, 불도, 어떤 연기도 없었다. 해가 어두워지지도 않았으며, 달이 핏빛이 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은 아직 온 것이 아니었다. 그 예언은 전혀 실현된 것이 아니었다. 오순절은 단지 그 예언의 부분적인 성취이거나 혹은 미리 선을 보인 것에 불과했다. 그와 흡사한 사건이 변화산 사건이다. 거기서 우리 주님의 영광이 잠시 나타났는데 그것은 천년왕국 때 갖추시게 될 주님의 모습이었다.

베드로는 단지 오순절에 참석한 자들에게,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임시적인 것으로서 천년왕국 때 성령께서 나타내 보이시게 될 능력이 이와 같을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이 지금 예루살렘에서 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언젠가 전세계에 행하실 표적이었던 것이다.

19세기의 뛰어난 성경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조지 피터(George N.H.Peters)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순절의 세례는 성령께서 오는 시대에 행하시게 될 것을 입증하는, 미래의 성취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오순절날에 시작된 기적은 도래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왕국을 전하는, 선포와도 같은 것이었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요엘 2:23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영적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른 비는 성령께서 강림하셨던 오순절날을 말하며 늦은 비는 20세기의 강림을 말한다고 한다.

구약 전체를 통해 볼 때 “이른 비”는 가을에 내리는 비를 의미하며 “늦은 비”는 봄에 내리는 비를 의미한다. 요엘은 실제로 천년왕국 때 두 비 모두 “전과 같이”(23절) 내리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왕국에서 풍성하게 양식을 자라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요엘 2:24-26은 그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두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찻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처럼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오순절이나 20세기, 혹은 성령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은 요f 2:28을 두 번째 방언을 부어 주시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요엘은 방언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로, 오순절에서의 성령의 강림은 요엘이 예언한 것의 궁극적인 성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토마스 에드가(Thomas Edgar)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표적 은사가 교회 내에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혹은 신자들이 교회 시대 말기에 기적을 행할 것이라는 어떤 성경적 증거도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말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있다(마 22-23, 24:11, 24, 살후 -12).

따라서 우리는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의 방언은 어떤 유(類)의 것인가?

우리는 은사주의자들의 경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들은 방언이 자기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고 수없이 증거하고 있다. 다음 내용은 그 한 예이다.

“방언의 용도는 무엇인가?”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은 이것이다. “블루버드(Bluebird, 미국산 지빠귀과의 일종)의 용도는 무엇인가? 석양의 용도는 무엇인가?” 단지 순수하고 완전한 고양, 말할 수 없는 기쁨, 그리고 더불어 있게 되는 건강과 평화, 무거운 짐과 긴장으로부터의 해방과 쉼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

계속해서 다음 내용을 보라.

내가 방언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20년은 젊어 보인다고 말했다…… 나는 일으킴을 받았으며 기쁨과 용기와 평화를 얻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마침 나는 그와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하는 약한 사람이었다.

이 같은 증거들은 방언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게 해준다. 만일 방언이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 주고 당신을 더 젊어 보이게 해준다면 그 잠재적 시장성은 무한하다.

그러나 그 같은 주장들이 과연 사실일까? 정말 오늘날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경건하며 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고 있을까? 오늘날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타락한 은사주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것은 과연 은사를 주장하는 교회들이 은사를 내세우지 않는 교회들, 즉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보다 더 영적으로 견고하고 강하다는 증거가 되는가?

사실 순수하게 성경의 이해와 영적인 성장만을 추구하는 교회를 찾으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은사주의 운동이 신학적으로 잘 훈려된 영적인 신자들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결실을 맺고 있다는 것인가? 더 나아가 방언을 말하는 자들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결실을 거두고 있는가? 더 나아가 방언 운동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순수한 평화나 만족, 능력,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고 증거하는 많은 방언 경험자들의 말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초기의 황홀경의 경험에서 더욱 고조된 감정을 갖게 된 이들이 그 같은 상태를 반복하지 못하게 될 때 왜 그처럼 자주 환멸 가운데 떨어지곤 하는가?

물을 것도 없이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그 행위를 통해 유익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개-위에서 인용한 증거들처럼- 그들은 그것이 어떤 느낌을 주었으며 또 외양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만 말한다. 즉 그들은 더 나은 기독교인이 되도록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신약이 보여주는 은사는 결코 더 나은 감정이나 외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성경적인 방언임을 전혀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동일함을 증며할 수 있다거나 통역할 수 있는 언어로 말했다는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언어학자 윌리엄 사마린(William Samar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사주의자들 가운데 의심스러운 일들은 모두 그것을 입증하려 할 때마다 그 이야기들이 앞뒤가 맞지 않거나 혹은 언어학자인 관점에서 볼 때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은사를 반대하는 자들은 신야그이 은사와 그것들이 같은 현상이라는 그들의 가정 말고는 어떤 증거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면 그 현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많은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첫째로, 방언은 사탄이 주는 것이거나 귀신이 주는 것일 수 있다.

이 운동을 비판하는 어떤 비평가는 일체의 방언을 마귀의 역사로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종종 사탄이ㅏ 성령의 은사처럼 보이는 현상의 배후 세력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든 거짓된 종교의 배후로서(고전 10:20) 거짓 진리를 가장하는 일을 한다(고후 11:13-15). 오늘날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거짓말에 현혹되고 있다.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전에 방언을 말한 적이 있는 밴 비어드(Ben Byrd)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 중 일부는 “심령적인 것이었으며 사탄의 능력 같았다”고 믿고 있다.

나는 방언으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눈을 감은 채 수없이 성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내려갔다. 나는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분명히 눈이 감겨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이상한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생생한 꿈 같다고나 할까…… 내 몸은 거의 잠든 듯했으나 의식은 깨어 있는 상태였다. 다른 영역을 통해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황홀경의 언어는 일반적으로 거짓된 종교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ica)최근판은 이방 종교의 예배시에 사용하는 그들의 방언에 관해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보고서는 스와힐리어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귀신들린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그들의 말은 이해할 수가 없다. 아프리카 동가(Thonga) 사람들의 경우 귀신이 쫓겨나가게 될 때 대개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줄루(Zulu)어로 노래를 부른다. 아마도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은 “방언의 기적”에 의해 줄루어를 할 수 있는 듯 싶다.

오늘날 황홀경의 언어는 모슬렘이나 에스키모, 티벳의 승려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버지니아 의과대학의 초심리학(정신 감응, 천리안 따위의 자연적 심리현상을 다루는 학문- 여자 주) 실험보고서는 신비로운 일들 가운데 방언을 하는 것을 포함시키고 있다.

위의 것들은 이방 종교, 이단, 그리고 신비스러운 일을 믿는 이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오랜 전통을 지닌 방언의 몇몇 실례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심각한 것들로, 은사주의자들은 그것들의 영향을 약간이라도 받았음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방언이 학습된 행위라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기로는 대부분의 방언은 이 범주에 포함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찰스 헌터와 프랜시스 헌터는 어떻게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세미나를 가졌다. 그것이 배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두 사람은 기도와 찬양을 할 때 큰소리를 내도록 함으로써 감정적으로 첫 시동을 건다. 이어서 그들의 방언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몇 가지 실례가 되는 음운을 일러주면서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반복해서 내도록 권한다.

그것은 분명히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은사가 아니다. 그와 같은 방식의 방언은 “초자연적인”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거의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다.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형태의 소리를 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 모두는 근본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 따라서 그것을 듣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소리를 낼 수 있다.

존 킬델(John Kildahl)은 그의 저서 「방언의 심리학」(The Psycholosyof Speaking in Tongus)에서 여러 가지 증거들을 연구한 후에 방언은 학습된 기교고 결론을 내렸다. 임상심리학자인 킬델과 그의 파트너인 심리학자 폴 퀄벤(Pau Qualben)은 방언에 대해 폭 넓은 연구를 하도록 미국 루터 교회와 전국 정신과 협회(The National Instiute of Mental Health)로부터 요jd을 받고 그것에 대해 연구한 후에 방언이 “학습된 현상”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보다 최근에 오타와주의 칼스톤 대한(Carleteon University)에서 행해진 연구에서 사실상 약간의 지도와 시범을 통해 누구든지 방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결코 방언을 해 본 적이 없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방언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6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보았는데, 방언이 담겨 있는 오디오와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훈련을 시킨 뒤 그들 모두에게 30초 동안 방언을 해 보도록 요청하였다. 그 결과 그들 모두가 30초간 방언을 하였는데 그중 70퍼센트는 아주 유창하게 방언을 하였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방언을 할 줄 아는 어떤 사람이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그것을 배웠어요. 자 한번 보여드리지요.” 그리고는 방언을 하기 시작하여T다. 그때 내가 들은 소리는 정확하게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은 유의 소리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사주의자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사적인 기도의 언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번은 새 신자에게 방언을 가르치려고 한 어떤 열심있는 은사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아직 미숙한 신자에게 그처럼 열심히 방언의 은사를 받도록 애쓸 필요를 느꼈다는 사실이 내게는 의아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주의자들은 당신에게 방언하는 방법을 기꺼이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를 하는 동안 TV를 통해 은사에 관한 토크쇼를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이 영적인 어려움에 대해 고백을 하자 다른 은사자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매일 방언을 사용하나요? 당신은 당신이 받은 언어로 매일 말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은데요.”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것이 당신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매일 그것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시작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시작만 하세요. 일단 시작만 하면 성령께서 계속 그것을 지속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 대회는 여러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만일 성령께서 그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시작하는데 있어 왜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

은사주의 안에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은사나 능력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 같은 것이 상당히 있다. 영적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은 방언이다. 방언이 은사주의자들에게 있어 영성과 정통성 그리고 성숙도를 재는 가장 공통된 기준이자 보편적인 기준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기준이다.

킬델(Kildahl)과 퀄벤(Qualben)은 다음과 같이 썼다.

“실제적으로 계속해서 방언을 말하는 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방언은 방언을 하는 실제적인 경험 때문에 주어지기보다는 그 그룹의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이다. 방언을 하는 자들이 그 그룹의 지도자와 좋지 않은 관계에 이르거나 그가 속한 그룹으로부터 쫓겨났을 때 그들의 방언의 경험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그들의 연구 가운데 상당량은 방언에 대한 환멸을 기록하고 있다. 방언 은사자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학습된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에 어떤 초자연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이내 그들이 항상 지녀 왔던 정신적인 문제들에 직면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킬델과 퀄벤에 따르면 방언 은사자들이 신실하면 신실할수록, 그가 방언을 그치게 되었을 때 더욱 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또 다른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즉 방언은 심리적으로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방언에 관한 가장 이상스런 경우들 중 어떤 것은 심리적인 착란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방언 은사자들은 무의식적인 신경작용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은 임상학적으로 볼 때 주변의 의식으로부터 내부적으로 전격 분리되는 현상으로 묘사될 수 있다. 무의식적인 신경 작용이란 모든 수의근(Voluntary Muscles)이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뉴스 시간에 록 콘서트에서의 십대 소녀들을 본 적이 있는가? 흥분의 도가니, 열광의 함성들, 그들은 그야말로 의식의 통제를 상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중에는 극에 달해 아예 바닥에 누워버리기까지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한번쯤 의식이 희미한, 뭔가 동떨어진 듯한 의식 상태에 처한 경험들이 있다. 누구든 감정이 극도로 격한 상태에 처하게 될 경우 쉽게 자신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 방언은 그 같은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방언으로 인해 황홀경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상태는 거의 최면 상태와 같다. 킬델과 퀄벤은 연구를 통해 “최면 상태는 방언 경험에 있어 필수 불가결의 것으로, 만약 누군가가 최면 상태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은 방언을 할 수 있는 적합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방언을 하는 자들이 깊이 연구한 후에 킬델과퀄벤은 결론적으로, 지도자에 의존하며 복종하는 사람들이 대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었다고 말했다. 윌리엄 사마린(William Samarin)은 모든 유형의 방언 은사자들이 이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TV에 나오는 대부분의 은사적인 프로그램을 보라. 청중석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단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심지어 소설이든 기괴한 무슨 이야기든 모든 것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을 연발한다. 그들은 쉽사리 그 가르침을 따르며 순순히 하라는 대로 행한다. 그런 가운데 감정이 격해지고 분위기가 고조될 때 무엇인가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방언을 하는 각각의 사람을 분석한다든지 그들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까지 본 것처럼 현대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에 대한 많은 가능한 설명들이 있을 수 있다. 기독교 심리학회(the Christian Association for Psychological Studies)의 한 회원인 맨셀 패터슨(E.Mansell Pattison)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분석한 바로는 방언을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기계적 현상입니다. 방언은 심리적인 현상으로서, 일어나기가 쉬우며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신경정신과 환자들과 가진 임상적인 실험들로부터 얻어 낸 관찰을 덧붙이자면 충격이나 뇌종양 같은 데서 비롯된 뇌 손상의 경우에 환자는 언어 체계의 와해에 빠지게 됩니다. 이 같은 실어증 환자를 연구하게 되면 우리는 방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정신 분열증에서도 비슷한 언어 해체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구조에 있어서 방언과 같습니다.

이 자료는 방언과 같은 언어의 상동증(무의미한 언어를 반복 지속하는 증상- 역자주) 현상이 언어의식 혹은 언어의 통제의지가 뇌의 손상이나 정신병 혹은 의지의 통제가 포기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방언을 하는 자들은 “의지 통제의 수동적인 자기 포기” 상태로 들어가도록 분명히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을 포기하도록 자신들의 소리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몇 개의 똑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내도록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매스터스 신학교(The Master's Seminary)의 학장이었던 찰스 스미스(Chrles Smith)는 현대에 일어나는 온갖 방언 현상에 대해 가능한 모든 설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방언에 대해 여러 가지의 표현을 썼는데 “자동 무의식 작용”(motor automatism), “황홀경”, “최면상태”, “심령 점화”, “집단 정신”, 혹은 “암기의 반복”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방언은 여러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성령과 관계없이 1세기 당시의 고린도 사람들처럼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속임수의 형태로 방언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방언은

왜 그처럼 널리 퍼져 있는가?

모든 교파의 기독교인들이 방언을 계속하고 있으며 새로운 사람들이 오늘도 매일같이 그것을 갈구하고 있다. 은사주의 작가들과 교사들은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즉, 그것은 마지막 때에 교회에 주어진 전혀 새로운 능력의 역사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날 방언은 성경적이 아니다. 방언하는 자들은 성경에서 기록된 은사를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열렬히 방언을 사모하는가? 왜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방언하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가? 기본적인 이유는 영적인 고갈이다. 사람들은 방언이 놀라운 영적 경험을 가지는 방편인 양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방언을 하지 못할 경우 무엇인가를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영적으로 나타내는 일에 갈급해 하고 있다. 그들은 오랫 동안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교회 안에 속하지 못했다. 즉 특별히 영적이거나 거룩한 자로 인정 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방언하는 자들이 특별히 거룩하며 영적인 자로 인정받는다고 여기고 그와 같이 되고자 그처럼 애쓰는 것이다.

방언이 그처럼 널리 유포된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는 소속감과 안정감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룹 안에” 소속되는 것이 필요하며 “방언을 하는”자들 가운데 포함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들은 방언을 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도는 자들 가운데 속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은사주의에 속하는 것은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는 은사를 받은 자이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특별한 사람처럼, 자신이 특별한 곳에 속한 사람처럼, 즉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처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 은사주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적인, 기계적인, 학구적인 냉함, 그리고 무관심한 사회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방언을 하는 자들은 자신이 초자연적인 것에 직접 접한 것처럼 느낀다. 그들이 경험한 것에는 확실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메마른 것도, 학구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 사실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방언이 그처럼 강력하게 유포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냉랭하고 무기력한 기독교에 대해, 대체할 만한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은사주의와 결부된 사람들을 보게 되면 종종 행위나 뜨거움, 따스함이나 사랑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그들의 삶 가운데서, 즉 지금 여기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다. 죽은 정통 교리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은사주의에서 만족을 구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그들의 계시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들이 성령을 믿으며 그것을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싶어한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으며 그의 희생적인 죽음과 육체의 부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인한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가운데 살 필요가 있음을 믿는 것으로 인해, 아울러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 뜨겁게 믿음 생활을 가지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ㅐ 영광을 돌리고 싶어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왜 그들을 비판하나요?”

이는 우리의 형제 자매가 진리 가운데 바로 걷는가 그렇지 않은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도록”(엡 4:5) 가르치고 있다. 참된 사랑은 진리 위에서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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