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 운동
-----------필립 스페너
독일 경건주의(敬虔主義) 운동의 시작은 필립 제이콥 스페너 (Philip Jacob Spener, 1635-1705)로부터이다. 비록 후세인(後世人)들에 의해 '경건주의'가 불리웠던 움직임을 구성한 수많은 요소들이 이전부터 독일에는 유포되어 이었으나 필립 스페너를 '경건주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는 1635년 알사스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족은 철저한 루터파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국의 청교도들에 관한 책들과 독일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을 읽는 중 이같은 사상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 그는 독일의 존 안트의 저서 '참된 기독교'를 읽고 경건주의에 눈을 떴다. 또한 청교도 목사 레위스 베일의 '경건의 실천'이라는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학생시절에 경건과 행위에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는 졸업 후 제네바에 가서 칼빈과 여러 교회 사람들과 교제하며 그곳 교회생활에 대해 연구했고, 후에 독일 내 여러 대학을 순방하기도 하였다.
그가 1666년 안수를 받고 프랑크후르트의 목사로 있을 때, 웨드게스덴의 궁정 설교자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를 자신의 견해를 따르는 추종자로 삼았다.(후스트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3권. 이 형기, 차 종순 역. 서울: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 출판부, 1989, 394)
당시의 설교가 이론에만 치우쳐 사람의 마음 속에 큰 감명을 주는 바가 적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의 설교를 실제적이면서도 신앙적으로 만드는데 주력하게 되었으며, 1976년 그는 자기 집에서 형식적인 종교에 불만을 갖는 자들과 함께 작은 집회를 만들었다. 이 집회를 '경건회'(Cellegia Pietatis)라 불리웠다.
이러한 이름 때문에 교회 안에 있던 그 운동을 스페너에 의한 경건주의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였으며, 기도하였고 스페너가 주일날 4회 설교를 토론하였다. 특히 경건회를 통해서 신앙적인 독서를 통해 영적 생활을 함양하는데 전력하였다.
1674년에 안트의 설교집에 설교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긴서문을 통하여 경건주의 운동의 요강을 발표 하였다. 1675년에 이 글은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이란 표제로 출판되게 되었다. 이 책에는 신자들의 경건을 육성하기 위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 책으로 스페너는 일약 경건주의 운동에 창시자로 인정을 받게 되도 이 책의 출판과 함께 경건주의 운동의 새 시대가 도래하게되었다.
경건한 욕망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본 스페너의 주장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는 당대의 도덕적인 타락, 미온적인 신앙생활, 파괴적인 신학논쟁, 정치인들의 부도덕한 생활, 성직자의 잘못된 생활 등 여러가지 점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두번 째 부분에서는 교회가 구체적으로 개혁해야 할 운동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6가지로 제의하였다.
● 성서 연구: 그리스도인들은 조그마한 집회나 가정모임에서 경건한 영구를 통해서 성경을 보다 더 분명하게 그리고 심도 깊게 연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신자의 영적 제사장직 활용: 평신도들에게 이러한 집회에서 책임있는 일을 부여함으로서 신자가 만인제사장의 의미를 재발견하기를 원했다.
● 기독교의 실천적 성격: 기독교 본질이 교리적인 공식속에 갇혀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신앙의 실제적 자체인 경험, 삶 자체를 통한 태도임을 깨닫기 원했다. 기독교인의 삶은 실제적 경험과 실천이라 했다.
● 종교적 논쟁의 비 유익성: 세번째의 결과로 임해서 모든 논쟁을 자비심을 갖고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신학교육의 혁명: 목회자의 훈련은 논리적 정통 신학을 넘어서서 경건한 책과 훈련에 흠뻑 젖으며 또한 양떼를 치는 실제적인 활동과 경험을 동시에 수반할 것을 바랬다.
● 설교의 개혁: 강단은 실제생활과 거리가 먼 묵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가르치고 감찰시키고 양육하는 본래의 목적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나 스페너는 이 모든 점에 있어서 당시의 기존교리의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교리에 관한한 완전 승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리가 개인적 신앙의 내용문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주장하였다.
참으로 그는 기독교를 하나의 생활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보다 뜨겁고 보다 영적인 기독교가 되게하는 방법으로 '교회안의 작은 교회'를 세울 것을 제안한 것이다. 기독교는 지적인 지식 보다는 더욱 생활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설교는 교리적이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생활을 개조할 의도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기독교는 다만 헌신적 생활과 봉사에서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그는 마치 영국의 청교도들과 같이 극장에 가는 것과 댄스와 카드 놀이를 반대하였다. 또한 의복과 음식에도 절제를 요구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심한 반대를 받았으며 다른 여러 목사들에게도 좋지 못한 감정을 사게 되었다.
스페너는 당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다. 그러나 그는 인기를 얻기 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전형적인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생활, 확고한 도덕적 영성과 엄격성, 무엇보다도 의무와 책임에 대한 그의 굳은 신념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게 하고 또한 여러가지 창의적인 활동을 하게 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양심적인 의무감을 가지고 설교자와 교리의 교훈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아우구스트 프랑케
스페너의 동역자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는 이 운동을 교육과 사회사업과 선교사업으로 이끌어 경건의 힘을 실생활에 발휘한 사람이다. 프랑케는 1663년 루벸(Lubeck)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법학박사인 아버지 밑에서 학구적인 분위기 소기에서 자랐다. 킬에서 학생 시절을 보내고 1684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1686년 성서를 연구하기 위하여 몇몇 친구들과 함께 성서연구회(Collegium Philolilicum)로 함께 모여 연구했으며, 프랑케는 라이프지히 대학교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가 1687년 신생(新生)의 신비로운 경험을 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드레스덴에서 스페너와 함께 몇 달 지내는 사이에 경건주의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열정으로 강의를 하였다.
그후 1689년부터 그는 여러 곳을 순회하며 그이 주장을 보급했으며, 그의 이러한 경건주의적 활동은 학교 당국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었고 결국은 1691년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스페너가 그를 할례대학 교수로 초빙하였다. 프랑케는 스페너의 뒤를 이어 할례 대학교를 경건주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거기서 그는 죽을 때까지 사역하였다. 스페너의 할레 대학을 물려 받아 그곳을 경건주의의 중심지로 삼았고, 거기서 1727년 죽을 때까지 사역하였다.
할례 대학에서의 프랑케
브렌르크의 선체후인 프레데릭 3세는 토마시우스를 초빙해서 할례대학교를 설립하게 하고(1694) 그로 하여금 강의하게 하였다. 이때 스페너가 신학부 강의를 프랑케에게 맡기길 권유하여 프랑케를 초청하였다.
프랑크는 동료 안톤과 함께 새로운 교수 및 목회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할레 대학을 중심하여 경건주의 운동은 조직적으로 학문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할레 대학을 독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활동하게될 경건주의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중심지가 되도록 변모시켰다. 그는 스페너 보다도 훨씬 기독교인의 생활이 가져야할 기쁨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독일에 있어서 경건주의 운동이 최고의 절정에 오르게 한 이는 프랑케인 것이다.
할레에도 프랑케의 방침을 비평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프랑케의 방침은 여전히 실천되어 갔다. 인품의 매력으로 보는 자를 쉽게 얻은 그의 신앙은 경건주의의 한 표본처럼 되어 있다. 그는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열심으로 연구하여 충분히 준비된 설교를 하며, 공부를 하기 전후에 기도를 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는 돈이 없었으나 기도의 응답을 믿었다. 비록 기도에 의지했으나 방법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프랑케의 공헌
프랑케는 정책에 능한 사람이요 또한 조직에 재능이 있었다. 프랑케는 후진양성에만 힘쓴 것이 아니라, 할레 시민의 어려운 사정에 동정하여 사회 사업에도 손을 뻗었다. 아울러 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선교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아원의 하나이고 개신교 최초의 유명한 할레 고아원을 설립한 것도 이 당시의 일이다.
그는 또한 학교 내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신학교, 사범학교, 귀족과 부유층을 위한 학교, 희랍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학교 등을 세웠다. 그 밖의 화학실험실과 약국, 성서공회, 서점과 인쇄소,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무료 숙박소, 과부와 걸인과 그 밖의 빈민들을 위한 수용소를 세웠다.
이러한 시설들은 프랑케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들로서, 이러한 선교사업의 계획은 독일 교회에 새 생명을 넣어 주었고, 또한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생명이 없는 한개의 전통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실제의 종교가되게 하였던 것이다. 할레 대학이 창설된지 3,40년 동안에 6,000명의 신학자가 배출된 것만 보아도 그 단편을 알수 있을 것이다.
프랑케는 해외 선교사업에도 관심이 컸다. 윌리암 케리보다 약 100년전에 해외 선교를 위해 이미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의 문하생 지겐발그 프레드릭 4세의 요청에 따라 인도에 성교사로 파송하였다. 계속하여 할례는 프랑케의 주도하에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어갔다.
------------진센돌프 백작과 모라비안파
또 한사람의 경건주의 지도자로서 우리는 니콜라스 본 진센돌프(Nicholas von Zinzendorf, 1700-1760)백작을 들 수 있다. 그는 본래 경건파 가정에서 자라났으나, 정치에 몰두하여 처음에는 경건주의자들과의 깊은 유대를 가지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30년 전쟁에서 캐톨릭의 박해를 모면하려고 모라비아에서 피난해 온 이들이 갈 곳이 없어 허덕일 때에 자기 영토 안에 거주하기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그는 모라비안 운동의 지도자가 되게 되었다.
이들은 루터교의 경건을 살리며 궁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반수도원적인 공동생활을 채택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자, 여력으로 세계복음화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들은 60인마다 선교사 하나를 외지로 파견하여 선교사업을 개발하였으며,1732-1752년 간에 있어 그들이 파송한 선교사들의 숫자는 그 이전에 개신교 전체가 한 것보다 많았다. 모라비아인들로 인헤 형성되어진 경건운동은 영국 감리교도들(Methodists)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경건주의가 끼친 영향
경건주의 업적
경건주의 운동은 성경연구에 큰 자극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신학적 이론에서 실제적 방면으로 주의를 기울이게 하여 중용을 얻을 수 있게 하였고, 성령의 감화(感化)와 개인의 중생(重生)의 필요를 깨닫게 하였다.
또한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에 잇는 영적으로 냉각된 루터파교회를 많이 재건시켰다. 경건주의자들의 깊은 종교적 열성으로 인하여 이 운동은 각 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경건주의 운동의 가장 성공한 업적중의 하나는 이교도인 백성들을 위한 외국선교사업을 시작한 일이다. 특히 이 정신은 모라비안파에게 영향을 주었고, 모라비안파는 각국에서 경건주의 계열에서 가장 뛰어난 선교에 성과를 올렸다.
역사적 과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그들의 길이 기억될 만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역사적 과오를 남기기도 하였다.
● 세계관: 첫째로 그들의 세계관의 문제이다. 경건주의는 현세도피적(現世逃避的) 성향 때문에 개신교의 토양에 부활된 중세 수도원 주의를 탈피 못할 느낌이 적지 않다.
● 교회관: 둘째로는 그들의 교회관에 있다. 교회의 개혁을 시도함에 있어 열심있는 소수를 구분하여 '교회안의 교회'운동을 전개한 것은 지나친 독선주의적인 구별의식을 심어주는 목회적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 교리관: 세째로 교리의 경시로 기독교의 변질을 쉽게 초래하는 결과를 얻게 한 점이다. 종교를 개인적인 것으로 경건생활의 열매를 강조하는 나머지 정통신앙고백의 중요성이 외면될 때'아무렇게나 믿어도 좋다'는 사상적 개방주의가 따르게 된다.
55.존 웨슬리의 전도운동
-----------------웨슬리의 생애와 사역
시대적 상황
18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과학적 발전의 시기였다. 특히 종교와 철학의 주류를 형성한 합리주의 사상은 이신론(Deism)을 배출하였다. 이 시기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자연선교가 교회를 지배하였는데, 이신론은 계시를 부인 하면서 종교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성이야 마로 인간의 궁극적인 인도자이며 이성이 곧 믿음이라고 주장하며, 복음도 이성을 앞서지는 못한다고 말하며 성서를 가치없는 책으로 간주했다.
이신론의 영향을 받은 영국교회는 자연히 영적 생명력을 상실하였고, 교회의 강단은 이론적이고 배타적인 해석을 일삼는 논쟁터로 화하고 말았다. 또한 대학도 회의적이고 무신론적인 대화의 광장이었고, 교회의 교인은 많았으나 대부분의 명목상의 교인으로서 교회 출석만을 신앙생활의 전부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청교도였던 크롬웰의 전제정치 이후 온 국민은 종교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결국은 종교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으며, 교회의 부패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부패를 가져왔다. 당시의 영국의 종교와 도덕은 말할 수 없는 침체상태에 놓여 있었다.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든 실업자들은 이신론(Deism)의 기풍 속에서 전통에 의한 순결과 정절의 미덕을 냉소했으며, 원양무역으로 값싸게 제조된 술로 흥분을 일으켜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있었다. 또 음주량은 영국 역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있었다. 문맹은 넘치고, 하층계급의 정신도 퇴폐일색이었고, 오락은 더이상 타락할 수 없을 정도였다.
초기 생애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영국의 링컨셔(Lincolnshire)의 가난한 목사로서 38년간이나 목회를 하고 있던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요한 웨슬리는 성서에 기반을 두고 규율, 습관, 복종을 주제로 하여 엄격하게 자녀를 양육한 어머니 수잔나의 영향으로 유년시절부터 규칙적이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
특히 그의 나이 6세때 목사관의 화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건은 요한 웨슬리로 하여금 전도자가 되게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1714년 차터 하우스 학교에 입학한 그는 가정에서 배운 교육을 학교생활에서 실습하려고 노력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성경 읽기와 기도생활에 힘쓰면서 자신이 정한 3가지 목표, 즉 불량한 사람이 되지 말 것, 종교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호의를 가질 것, 성경읽고 기도하며 교회에 출석할 것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며 차터 하우스의 시절을 보냈다.
신성 클럽
1720년옥스포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Christ Church College)에 입학한 그는 공부하면서 보다 철저히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 1725년 그가 성직 안수(聖職 按手)를 받고 그 학교의 특별연구원으로 있을 때, 동생 찰스 웨슬리(Chrles Wesley)와 친구들과 함께 신성 클럽(Holy Club)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하였다. 그들은 함께 빈민굴과 교도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구제와 전도활동을 폈고 성경공부에 전념하였다. 후에 이 모임은 그들이 규칙적인 일과를 작성하여 실행함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규범주의자들(Methodists)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북미주 선교사
1734년부터 1738년까지의 기간의 대부분을 그는 북미주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2년 4개월동안의 북미주에서의 활동은 성결의 체험없이 자신의 인간적인 열심만 가지고 일하였던 까닭에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북미주에서 선교활동의 실패를 통하여 웨슬리는 성결의 체험없이 단순히 자신의 의지에 의한 선교의 열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몸소 경험하였고, 북미(北美)에서 선교 실패는 훗날 올더스게잇에서의 성결을 경험하는데 하나의 내적 요인이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북미선교의 실패로 영적인 고민과 좌절에 빠져있던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잇의 집회에서 성결의 체험을 함으로 인하여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 놀라운 체험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의 전도활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그의 신학사상은 이론적인 면에서 실제적인 면으로 체계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전도활동의 특징은 오직 생동하는 산 신앙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며, 시종일관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적이고 계속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왔음을 강조하였다.
전 세계는 나의 교구
그는 전 세계를 자기의 교구(敎區)로 알고 빈민과 벽촌을 찾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의 설교를 듣는 영국사람들은 회개하며 신앙의 부흥과 양심의 재생을 맛보게 되었다.
웨슬리의 설교는 인간의 타락과 죄악을 역설하며, 단지 신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만 구원이 온다고 외쳤다. 그는 신생(新生)과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을 말했다. 이같은 웨슬리의 사상은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의 영향 속에서 성숙한 것이었다.
웨슬리의 전도활동이 그의 성결 체험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은 오늘의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교훈을 던져 주는데, 곧 선교는 선교사 자신의 구원의 확신과 함께 성결의 체험이 가장 우선적이라는 사실이다. 선교사가 성결의 은혜 위에 서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며 이런 감격으로부터 선교에 대한 헌신과 열정이 나오는 것이다.
존 웨슬리는 1790년 10월 7일 최후의 설교를 하기까지 51년간 옥외설교를 하였으며 하루평균 90마일 이상을 마상에서 보냈으며 일주일에 평균 15회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51년간의 전도활동에 있어서 그는 42,400회의 설교를 하였고 250,000마일의 긴 전도여행을 하였다. 웨슬리의 복음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교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설교가중에 한 사람이었던 웨슬리의 설교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의 죄악된 생활에서 나와 마음과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웨슬리의 사회를 향한 사역
인간의 영혼 구원 뿐만 아니라 부패한 사회 속에서 희생 당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던 웨슬리는 다양한 사회사업을 통해서 그들을 구제하였다.
그는 파운드리의 교회를 편물공장으로 만들어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으며, 파운드리, 브리스톨, 웨스트 스트리트 등에 의료원을 설치하여 병자들을 돌보았다. 또한 교회에 빈민학교를 설립하여 무산 아동들의 교육울 맡았으며, 가정구조회를 설립, 의류나 음식을 수집하여 이들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근면한 빈민자들을 위하여 빈민은행을 설치하여 그들에게 저리로 대부해 주어 그들의 생업을 도와 주었으며 서점도 경영하였는데, 이 서점의 이익금은 모도 전도비로 충당되었다.
이 이외에도 웨슬리는 교도소 방문을 정기적으로 하였으며, 노예제도 반대운동과 금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웨슬리는 모라비안 학교 방문의 영향으로 New House라는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뉴케슬에는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웨슬리는 다방면에 걸쳐 사회사업을 통하여 구체적인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웨슬리의 전도운동은 비단 개개인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부패한 영국사회를 갱신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치, 문화, 경제, 사회 등 많은 면에 있어서 유럽 전역에 새로운 이상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메도디스트의 분열
그러나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Methodists) 운동의 한 주역을 담당하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의 결별은 감리교의 분열을 낳게 해 주었다. 웨슬리는 칼빈의 절대예정론을 부인했으나, 휫필드는 웨슬리의 소위 완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겨, 감리교에는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하나는 알미나인주의를 쫒는 웨슬리안(Wesleyan) 감리교요, 또 하나는 휫필드의 칼빈주의적 감리교이다.
----------------전도를 위한 메도디스트 조직
순회 전도 집회
영국 국교회가 웨슬리에게 강단을 빌려 주기를 거부하자 웨슬리는 동료인 조지 휫필드처럼 야외에서 설교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영국 교회가 합리주의와 이신론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방향으로 흐르자 웨슬리는 이를 비판하며 '성서적인 기독교'를 주장하였다.
영국교회를 비판하고 공박함으로 인하여 교회의 강단에서 쫒겨난 웨슬리는 휫필드의 옥외설교가 예상외의 효과를 거두는 것과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가장 유력한 야외 설교의 표본이라고 생각하여 옥외 설교를 통한 순회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동생인 찰스 웨슬리는 처음에는 이방법을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찬동하여 이에 협력하였다. 요한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와 찰스 웨슬리 이 세 사람의 전도방법은 당시 깊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영국사회와 교회에 커다란 경종을 울렸다.
1739년부터 5년간에 걸친 웨슬리의 순회전도는 군대편제를 이용하여 런던에 주요 본부를 두고 4인의 목사와 45인의 평신도로 구성된 순회전도단을 운용하였다. 영국 전역을 3등분 하여 구역별로 활동하였다.
조직적인 전도 활동
웨슬리의 동역자이며 불을 토하는 듯한 웅변적 설교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휫필드는 웨슬리의 조직적인 전도활동을 평가하기를 "나의 형제 웨슬리는 지혜롭게 일하였다. 그는 전도하여 얻은 사람을 신도회에 가입케 하여 그 활동의 결과를 보전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방법을 경시했기에 내가 얻은 신도들은 마치 모래로 꼬아 놓은 새끼 같았다"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뛰어난 교회 정치가였고 조직체를 구성하고 관리하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그가 조직체를 구성한 목적은 가 신도와 또는 신도회(信徒會)가 각각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락 관계를 맺게 하는 동시에 그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는데 있었으며 영국 국교회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교파를 세우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이제 웨슬리가 조직한 몇가지 조직체를 알아 보기로 한다.
신도회
웨슬리의 전도운동이 점차로 확장되고 신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에서 사용하던 신도회(United Society)제도와 또는 모라비안들이 사용하던 간친회 제도의 채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전도운동에 있어서 조직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39년의 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매주 한번씩 모이기를 원하는 여자 3명과 남자4명의 신도로 한 회를 조직하여 그들이 서로 신앙의 향상과 친목을 도모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단체가 좀 더 체계적으로 조직된 것은 몇 개월 뒤의 일로 이 사실은 1743년 발간된 연합신도회(聯合信徒會) 총칙 서문에 포함되어 있다. 1739년 말경 자기의 죄를 깨닫고 구원 받기를 원하는 8-9명의 신자가 웨슬리를 찾아와 무슨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이 이로 매우 중시하여 심사숙고한 후 매주 1차 목요일 저녁마다 모여 그들과 신가입자들에게 적절한 교훈을 하는 동시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단체를 만드니 이것이 런던과 그 밖의 지역에서 조직된 연합신도회의 시작이다. 그후 귿르은 각 회원의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여 각 가정을 방문하였던 덧이니 이 신도회의 조직이 조직적인 감리회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속회
이와 같은 신도회가 조직 되었으나 인원수가 너무 많아 신도들의 실정 파악과 지도가 어렵게 되자 이 신도회를 다시 작은 단위로 갈라 그들을 보살피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속회(class meeting)이다.
웨슬리는 이 속회의 창설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신도회의 회원이 각처에 흩어져 있으므로 나 혼자서 그들의 신앙상태와 실정을 보살피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몇몇 열심 있고 사려 깊은 사람들과 의논한 결과 한 유력한 방법을 발견하였다." 고 하였다.
이 속회 제도를 처음 사용한 것은 1742년 브리스톨에서였으며 이 속회는 한 신도회를 보다 작은 단위로 나누어 거기에 지도자 한사람씩을 두어 각 속회를 지도, 감독하게 하였다.
속회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 각 속회의 지도자들은 그 속의 모든 회원들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였으나 이 일이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매주 한번씩 일정한 장소에 모여 참된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북돋아주며 또한 책임자가 기부금을 그속의 회원들로부터 거두어 가난한 자를 돕는 제도로 발전하였다. 특히 속장을 철저히 교육 시키기 위하여 1742년부터 회원증을 발부하여 매주 화요일 마다 교육시켰고 이 회원증은 3개월마다 교부하였다.
그리고 신도들의 양육을 위하여 몇 가지의 모임이 있었다. 야성회는 매월 만월되는 금요일 저녁에 모여 자정될 때까지 기도하며 성경말씀을 상고하는 모임이었고 간증기도회(Intercession-days)는 신도들이 먼저 특별히 정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한 후 모인 자들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해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었으며 애찬회(Love-feats)는 일종의 친목기관으로 계절마다 모였는데 먼저 남자들이 모였고 다음 여자들이 모여 서로 만나서 떡과 물을 마시면서 자신의 영적 체험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또 간증문 쓰기(Letter-day)라는 모임은 속회 때 가자의 영적부흥의 체험담을 글로 쓰게 하여 이를 읽게하는 방법으로 이일은 부흥운동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연회
신도회가 조직된지 5년 후 1744년 제1회 교역자회의가 런던의 파운드리 예배당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제도화 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회원에게 교육을 시키기 위한 필요에 의하여 모인 회의였다. 이 회의에 모인 사람은 웨슬리 형제를 비롯한 목사6명과 평신도 4명이었는데 이 회의가 감리교회 최초의 연회가 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신도들에게 가르칠 내용과 방법, 그리고 교회 성장의 제정 및 그 실행문제가 결정되었다.
가르치는 내용은 의인, 신앙, 성화였고 가르치는 방법은 부르고, 순종케하고, 예수님께 바치고 신앙을 북돋아 주는 일이었고, 교회성장의 제정및 실행의 문제에서 존 웨슬리는 신도회를 재정리하여 신앙의 단계별로 네 그룹으로 나누었다. 즉 The Unitied Societies, The Bands, The Selected Societies The Penitents이었다. 이들 그룹은 각기 특별 준칙이 제정되어 운영되었다.
이 연회에서 결정된 또 하나의 규정은 평신도 설교자의 임무였다. 이들의 임무는 목사의 유고시 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그들을 다스려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었다.
평신도 전도자
존 웨슬리는 중생의 체험을 한 뒤, 교권과 교회의 의식만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영국교회의 고교회주의(高敎會主義)를 반대하였는데, 그는 평신도 전도자를 선발하여 설교와 신자의 방문에 전무케 하였는데, 이 사실로 보아 그는 의식주의 교회관에서 완전히 떠났다고 볼 수 있다. 교권과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던 당시의 풍조에서 웨슬리가 평신도에게 설교할 권한을 주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신도를 웨슬리가 설교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의 교회관에서 연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영국교회의 교권제도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웨슬리는 사도직의 전승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며, 교회제도는 교회의 근본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며, 제도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교회제도의 목적은 인간들의 영혼을 사탄의 세력에서 건져내어 하나님께 인도하여 그들을 세우고자 함이며, 제도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교회관은 그의 전도활동 전반에 깊이 영향을 미쳤으며, 평신도 전도자라는 제도도 그의 교회관에서 연유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단체를 운용해야만 전도활동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거 생각한 웨슬리는 그 조직자의 책임자를 목사가 아닌 평신도에게 맡겼다. 이 책임자들에게는 정기적인 순회교육을 통하여 책임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이들은 자기의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특별히 시간을 내어 무보수(無報酬)로 일하였다. 평신도 전도자의 자격에 대해서는 1747년 회의에서 결정되었는데, 그 자격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 그 사람이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며,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 언행이 거룩한지 살필 것
● 그들이 그 사업을 감당할 재능과 은혜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도리를 판단할 만한 분별력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에 대하여 정당한 관념을 가졌으며 어느 정도의 구별이 있어서 자기의 의사를 사리에 맞고 유창하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지
● 그들의 과거의 사역의 업적을 살필 것 등이었다.
평신도 전도자들은 비상한 극기와 금욕적 생활을 하였으며, 전도자의 규칙에 보면 초기에는 신도들로부터 금품을 받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들의 일용품은 대개 신도회로부터 받았으며, 금전은 여비 정도를 받았는데, 그것은 항상 넉넉치 못해 먼거리도 보통 걸어서 다녔다. 이와 같이 평신도 전도자들의 헌신적인 활동의 결과, 런던에서는 2,000여명의 신도들이 모였고, 속회 제도는 원만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평신도 전도자의 사용은 목회자 혼자 10인분의 일을 할 것이 아니라, 10인의 평신도와 함께 공동사역을 해야 한다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목회자 혼자 일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함께 일을 해야 한다는 교회성장학의 주장을 이미 18세기의 웨슬리가 이미 실천했었다는 사실을 놀라움을 우리에게 안겨다 준다.
제 21장 위대한 선교의 세기
56. 위대한 선교의 세기 이해
-------------------19세기 유럽의 상황
1815년에서부터 1914년까지의 1세기 동안은 인류의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독특한 시기를 형성하였다. 1815년에 있었던 나폴레옹의 결정적인 패배에 뒤이어 서부세계는 약 1세기 동안의 비교적 평화스러운 시기와, 중대하여 가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기독교가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전쟁으로부터 해방되었던 때는 일찌기 없었다. 전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나 18세기 그리고 20세기에 비해서 보면 전 기독교권을 휩쓸거나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은 없었다.
이러한 안정된 19세기의 특징은 인간이 물질과 환경을 급속도로 개발해 나갔다는 데에 있다. 다른 나라들도 산업혁명을 맞고 있었으나 충분히 진전된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다만 대영제국만이 목적에 맞는 노동력의 유효한 이용법과 고도로 발달한 금융자본을 단단히 결부시킬 수 있었다. 그것으로 영국은 국내에 있어서는 공업을 고도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한편으로는 세계 국제무역양의 3분의 1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사람들은 산업분야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고학 분야에서도 새 질서가 나타나고 있음을 느끼고 잇었다. 이 시기에 증기기관과 전기가 발명되고,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이라는 학문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처럼 늘어나는 지식은 인간이 그 환경을 지배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증기가 이용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제조업에, 다음에는 선박과 철도를 통한 운송에 사용되었다. 전호와 전보가 통신수단이 되었고, 방부제와 마취제 그리고 세균학의 발전은 사망률의 감소를 가져왔고, 육종학(育種學)의 발전은 식량공급을 튼튼하게 했다. 물질환경의 발전과 이에 대한 지식의 증가는 인류생활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실들은 18세기에 일어났던 산업혁명이 19세기에 이르러 극대화되었고 따라서 부(富)는 급속히 성장했다. 새로운 자원의 획득과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구질서(舊秩序)의 붕괴로 말미암아 유럽은 낙관주의적인 분위기가 팽창하였다.
도시에서는 새로운 중산계급의 자본가들이 경이적인 성장을 이룩하며 부를 늘리고 있었고 줄기찬 정력을 기울여 모든 사회인을 기업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노동자의 임금은 오르고 영국 정부는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법령을 발포하기 시작했다.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조차 일고 있었다. 과학은 나날이 주위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넓혀 갔다. 의학지식이 향상되어 수명을 연장시키고, 병을 치유하는 비약적인 진보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인간의 놀라운 재능은 그야말로 한이 없는 것 같았다.
신학적으로 이 시기는 쉴라이엘마허(F. D. Schleiermacher)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경건주의와 칸트의 영향을 받아 인간에 대해 낙관적 견해를 가지고 특이한 성서문학주의를 싫어했다. 그리고 이 세기 동안에 성서 고등비평(高等批評)도 등장하였다.
리츨(Albert Ritschl)은 이 세기를 마감하는 인물인데 형이상학을 싫어하고, 쉴라이엘마허의 믿음을 '절대적 의존감정'이라는 종교적 감정을 거부하며, 리츨은 복음을 과학적 역사에 의하여 결정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기독교를 하나의 윤리체계로 보았던 것이다. 신앙으로 신국이 실현되며, 거기에 사랑의 행위를 동반한 인간성이 구현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세기 말경에는 인간의 진보적 가능성에 대한 낙관주의가 마치 개신교의 면모처럼 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개신교회에 대단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교파 성공회의 경건주의와 신비주의적 전통 그리고 할레 대학과 헤른후트의 경건주의, 이 모든 세력들이 합하여 영국에서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이 일어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복음주의 운동의 칼빈주의적 세력이 영국 교회 안에 남아 있었다. 개인적인 회심과 생활의 경건성에 대한 요구에 있어서는 웨슬리와 견해를 같이 하면서도, 그 위에 시민의 투철한 책임의식을 추가하고 있어서, 이들의 사상은 자연히 노예제 폐지와 같은 사회개혁운동과 선교사업을 위한 열성의 두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 부흥운동이 19세기에 놀라운 능력으로 독일의 여러 지역을 휩쓸었고, 1830년대의 제네바에서 일어난 각성운동(覺醒運動)은 프랑스 개신교회로 퍼져 나갔고, 스위스에서와 같이 해외로 선교운동을 촉발시켰다.
이 운동은 가끔 상당히 독립적인 성격을 나타낸 적도 있었으나, 성공회의 복음운동처럼 국교 안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같은 복음운동이 모두 쇠퇴해 가고 있을 즈음에 두번째의 복음적 각성운동이 1858년 미국으로부터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들어왔다. 이 운동의 성격은 초교파적인 것이었다. 이 운동은 19세기의 새로운 현상, 즉 범교파적인 혹은 비교파적인 선교회를 이룩했다.
------------------- 선교의 발전
선교회의 설립
이 시대는 위대한 선교회들의 시대였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개신교회들은 선교사업을 감당할 힘도 없었고, 또 하려는 의도도 갖고 있지 않고 있었다. 이 선교의 사업은 자발적인 협회들에게 맡겨졌으며, 헌신한 개개인들의 자발성에 의존하고, 관심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자원해서 바치는 재정적 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때에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에 의해 1792년 5월 31일 열두 교역자로 구성된 침례회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가 발족되었는데, 이것이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선교회였으며, 침례회선교회의 창설은 선교 역사상 새로운 한 시대를 이룩하는 시작이었다.
이어서 다른 협회들도 급속히 그 뒤를 이었다. 처음에는 초교파적이었다가 후에는 주로 조합교회적이 된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가 설립된 것은 1795년의 일이었고, 그 후에 많은 선교회가 줄을 이었다.
● 최초의 선교회 형태는 주로 초교파적이었다. 런던선교회(LMS)와 미국해외선교회(ABCFM) 등이 비록 후에 실질적인 목적으로 회중위원회의 형태가 되었지만 이 범주에 속한다. 독일의 초기 형태 선교회들도 이런 형태였다.
● 후에는 선교활동이 강화되면서, 각 교파 기관이 교파별 지원과 통제를 받는 선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영국교회의 경우는 10여개의 독립적인 선교회가 있었는데, 실제로 그들은 교단의 공식적인 선교회가 아니었다.
● 세번 째의 형태는 신앙선교회(Faith Mission)로서, 19세기 중엽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특정한 교단이나 기관의 지원 없이 오직 믿음 만으로 파송하여 선교하는 형태로서, 제일 처음으로 이런 선교회가 나타난 것은 영국 제도였다.
최초의 것은 제나나 의료선교회(Zenana and Medical Missionary Fellowship, 현재는 Bible and Medical Missionary Fellowship)로서, 1852년에 조직되었다. 그후 영국 시리아선교회(British Syrian Mission, 현재는 Middle East Christian Outreach)가 1860년에 구성되었고, 1865년에는 중국 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현재는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가 조직되었다. 그 뒤로 여러 선교회가 연속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영국 내에만도 이러한 신앙선교회가 10여개를 넘었다.
대서양 방면에 있어 최초의 신앙선교회는 1860년에 시작된 여성연합선교회(Woman's Union Missionary Society, 현재는 Bible and Medical Missionary Fellowship과 연합)가 있다. 1887년에는 기독교선교연맹(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가 설립되었고, 중국 내지선교회는 1888년에 미국지부를 설립하였다. 그 외에 잘 알려진 선교회로는 복음주의동맹선교회(Evangelical Alliance Mission,1890), 수단 내지선교회(Sudan Interior Mission, 1893), 및 아프리카 내지선교회(Africa Inland Mission, 1895) 등이 있다.
이들의 조직적인 면이나 지원형태는 상당히 서로 다르지만, 위에 열거한 세 종류의 선교회는 사업방식에 있어 상당히 공통적인 측면이 많기도 하다. 세 형태 모두 복음전도, 의료사업 및 교육사업에 활발하게 종사하였으며, 그러한 사업을 통하여 몸과 마과 영혼을 대상으로 하는 전인격적인 선교에 많은 공헌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럴 즈음에 네번 째 형태인 특수선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 선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어느 계층이나 특수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선교사업이 중점적이었다. 예를 들면 유대인, 인디안, 에스키모, 맹아, 농아, 군인, 고아, 부녀, 아동, 나환자 등이 있고, 그 사업 내용도 특이하여, 문맹퇴치, 전도문서 배포, 방송전도, 비행에 대한 선도, 사회봉사, 구호사업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들 가운데 일부에서는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하며 일부에서는 기관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선교의 방법
위대한 선교 세기의 선교방법을 고찰해 볼 때 그 선교의 방법이 피선교지의 형편과 선교사의 재능과 소신, 그리고 소속 선교기관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드러내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 언어의 숙달
● 성서의 번역
● 문서 선교
● 피선교지 문화에 대한 연구
● 학교와 의료사업
● 토착민에 의한 선교
● 동질화(同質化)에 대한 노력
이 세기에 드러난 선교의 방법론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는 모범적인 선교방법을 볼 때 세기의 전반기에서는 근대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윌리암 케리의 선교방법에서 그 모범을 볼 수 있고 후반기에는 중국 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설립한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의 선교방법을 들 수 있다.
선교사들
19세기를 위대한 세기라고 부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시대에 많은 선교사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다양하고 많은 선교사가 배출된 시대는 19세기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선교의 세기가 시작될 1815년의 무렵에는 22,000여명의 선교사가 배출되었다. 그중 절반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선교사 전체중 1/4 이상이 독신여성들이었다. 더우기 세기말 30여 년 동안은 주로 미혼 여성 선교사들이 많이 지원했다.
그 당시 선교사들은 교육적 면에서 보면 대단히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로서, 반문맹의 사람들에서 박사 학위 소지자까지에 이르렀다. 독일과 스코트랜드 출신의 선교사들은 상당히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서, 거의 대부분이 대학 출신자들이었다. 미국의 초기 선교사들도 그러했다. 그들 대부분은 동부 연안의 명문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로서, 선교지에도 대단한 명문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으며, 특히 중동과 극동지역이 특이하다.
반면에 영국 출신의 선교사들은 그다지 훌륭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1875년에서 1891년 사이에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에서는 65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그 가운데 240명만이 대학 졸업자들이었다. 더우기 그들 대부분은 안수 받은 교역자가 아니라 평신도들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신앙선교회가 등장하면서부터 교육 수준이 낮은 선교사들의 부족을 크게 보충하였다. 신앙선교운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대단한 호소력이 있었다. 따라서 신앙선교회의 선교사들 가운데는 대학 졸업자가 대단히 적다. 대부분이 당시에 시작된 성서학교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신앙적인 자질은 지식적인 측면이 부족한 경우가 있어도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최고도로 발휘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거의 예외 없이 19세기의 선교사들은 남녀가 모두 깊은 확신과 사랑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늦기 전에 멸망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조금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 성서의 번역과 성서공회
"마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이 불원에 시작될 개신교 선교운동의 준비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고 할 만큼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언어의 숙달과 토착언어에 의한 성서번역은 필수적이었다.
초기 인도선교사 바돌로뮤 치이켄발크(Bartholomow Ziegenbal)는 그가 발표한 선교5개 조항 중에 첫번 째에 '교회와 학교를 병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모든 기독교인 자녀들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하여 성서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세기를 위대한 세기라고 말하는 중에 하나는 역시 위대한 성서의 번역에 있다. 윌리암 케리도 그의 선교방법 2번째에 그 나라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보급하여 전도활동을 지원할 것을 명시하였고, 그 역시도 인도 벵갈어로 신약을 번역하였고 손수 여덟번씩 개역하는 정성을 보여주었다.
인도에서는 1799년 세람포레(Seram Pore)에서 봉사했던 세람포레 3인조 자선학교 교장 윌리암 케리, 조슈아 마쉬만(Joshua marshman)인쇄업자 윌리암와드(William Ward)의 경이적인 업적은 선교 30년 동안 신구약 성경이 6개 언어로 번역 하였고(이중 케리는 벵갈어, 산스크리티어, 라마티어역 성경) 그밖에 23개국어로 신약전부를 번역 했으며 10개국어로 성경의 일부를 번역했고 특히 마쉬만 박사는 15년 동안 중국어를 익혀 신약성경을 번역하였다.
1806년 캘커타에 왔다가 1813년 영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31세로 죽은 헨리 마르틴(Henry Martyn)은 켐브리지 수학 수석 우등생이었으며 그 시대 최선의 어학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서 7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지금도 기본적인 번역으로 쓰이는 신약성경 우르드(Urdu)역을 완성했고, 페르시아역의 완전 개역을 마무리 지었고, 아라비아역 성경의 개역(改譯) 작업도 상당히 진척시켰다. 젊은 나이에 그가 죽은 것은 인도 선교의 중대한 손실이었다.
1811년에 자바에 온 시계제조공 요한네스 엠데(Johannes Emde)는 부분적으로 된 자바어 성경을 보급하였다. 1816년 팔림코타에서 바젤(Bazel)의 선교훈련원 출신인 독일인 챨스 레니우스(Charles Rhenius) 에 의해 신약성경, 타밀어 새번역이 완성되었고, 타밀어 문법책도 쓰여졌다.1829년에 인도 트라반코레에서 4명의 성공회 교회 선교회(Anglican Church Missionary Society)의 선교사에 의해 최초로 말라얌어 역 성경이 번역되어 1829년에 출판되었다.
버마에서는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에 의해 1834년 버마에 신구약성경 번역이 완성되었고, 1850년 그가 사망할 당시에는 버마 사전(辭典)을 위한 자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중국어역 성경은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에 의해 1813년 신약성경이 번역되고, 1819년에는 구약성경이 번역되었으며, 그의 위대한 중국어 사전은 중국어에 과학적인 토대를 부여하는 데 공헌했다.
1843년의 중국어 성경 개역 작업은 선교의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843년 중국 6개 도시에 자리잡고 있던 선교단체가 일부분 맡아서 번역에 착수했다. 그러나 곧 봉착하게 된 문제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즉 센(神)으로 해야 하는가 상티(上帝)로 번역해야 하는가, 아니면 캐톨릭 번역에 따라 티엔 추(天主)로 표시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례준다(baptize)고 하는 말을 어김 없이 침수(沈水)로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었다.
1850년 처음으로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위원회는 '하나님'과 '성령'은 번역하지 않고 그냥 놔두어, 각 선교부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 빈칸을 채워 인쇄하도록 결정하였다.
이처럼 1852년에 완성된 번역의 문체는 중국의 학자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체의 우아함을 위해서 정확성을 희생시켰으며, 교인 대중에게는 너무나 고전적인 것이었다. 1862년에 완성된 번역은 보다 정확했으며,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이전 번역이 갖고 있던 문학적인 우아함은 결여되어 있었다.
1847년 장로교도인 윌리암 번즈(William Burnes)는 중국말에 능통하여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번역하였는데, 썩 훌륭한 번역으로 평가되었다.
1857년 로버트 모팻(Robert Moffat)은 츠와나(Tswana)어를 연구하여 스스로 문자와 문법을 창제하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성서를 번역하여 손수 인쇄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일단 언어를 익히자 주민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고, 종교부흥 같은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타 문화권의 선교가 시작된 이래로 선교사들의 열망과 각고의 노력은 수백 종의 말을 문자화시켰고, 사람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쳤으며, 그래서 1910년대에는 성서가 500여 방언으로 번역되었다.
성서공회
성서 번역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업은 성서공회(聖書公會)다. 사실 이러한 기관이 없다면 선교회의 활동이 상당히 장애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신교 여러 나라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각국의 성공회를 조직하여 현재에는 그들 가운데 59개 성서공회가 연합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ies)에 속해 있으며 본부는 런던에 소재하고 있다.여러해를 지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 선교에 괄목할만한 공헌을 한 성서공회가 있는데 즉 영국 해외성서공회(British and Bible Society:1804) 스콧틀랜드 국립 성서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1809) 네덜란드 성서공회(Netherlands Bible Society:1814)및 미국 성서공회(American Bible Society: 1816)등이다.
이러한 성서공회는 상당히 독특하다. 세계 역사에서 볼 때 성서공회만큼 한권의 책의 번역, 출판, 배포에 이렇게 거대한 노력을 기울인 기관이 일찌기 없었던 것이다. 교단배경과는 무관하게 이들 성서공회는 여러 선교회와 상당히 친밀하게 동역해 왔으며 신학적 경향이나 지리적 위치도 초월한 사업에 힘썼다. 실제적으로 성서발간에 가장 책임을 진 것이 곧 성서공회가 되었다. 성서번역 사업은 성서공회의 언어 전문가의 조언과 감독을 받아 선교사들이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배포 문제에 있어서는 성서공회가 자체로 판매담당원을 고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지역적인 측면에서 볼때 선교사들을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어떤 해설이나 해석이 없이 그대로 출판되었고 선교회의 전폭적인 협력을 가능케하였다. 또한 원래의 목적이외에 쓰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무료 배포보다는 판매를 하였다. 그러나 제3세계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입하여 읽을 수 있도록 상당히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였다. 성서공회는 선교회처럼 국내교회의 공헌에 의존하고 있다.
57.선교의 주역들
-------------------- 캐톨릭 예수회
선교활동
예수회는 근대 기독교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수회의 목적은 그들의 모토인 '하나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에 나타나 있는 거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예수회의 임무는 통상적인 성직자로서의 임무 외에도 해외선교, 자국내 선교, 장년교육사업 및 경건서적 학술서적들의 발간 등이었다. 이그나시우스는 효과적으로 조직되고 고도의 훈련을 받은, 또한 언제든지 교황이 바라는 일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학식있는 성직자들의 모임을 계획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복종을 이 수도회의 특징적인 덕목으로 강조하였다.
예수회(the Jesuits)의 선교 목적은 기독교인들을 돌보는 일과 성지(聖地)에 있는 사라센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일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중세 이후 인도, 중국, 일본, 필리핀 제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멕시코, 미국 및 캐나다 등은 물론, 현대에 있어서는 전 세계 어느 지역에도 미치지 않은 고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이들의 독특한 선교방법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치밀하게 짜여진 계획과 전도표에 따라서 선교지 또는 식민지의 문화가치적 혼란을 최소한도로 줄이면서, 원주민으로 하여금 점진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견해는 예수회가 정열적으로 지지하고 실천한 것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성과를 올린 것이다. 선교단체로서 이 예수회 사업은 주로 인도, 일본, 중국, 필리핀제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매시코, 캘리포니아 및 캐나다에까지 이르렀다.
교육선교
이 수도회는 1540년부터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특히 교육과 선교 방면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상당 부분의 인문주의적 교육철학을 받아 들인 커리큐럼을 사용한 뛰어난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예수회는 설교와 교육 등을 통하여 캐톨릭적 신앙을 다시 불붙여 갔고, 이들의 독특한 교육은 특히 상류계층 사람들과 정계(政界)의 유력한 사람들에게 커더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개신교인들 조차도 그들의 자녀를 예수회 소속의 학교에 보낼 정도로 높은 교육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수회에 있어서의 선교란 하나님의 구원에 전 교회가 참여하는 참여 양식이라면, 교육은 그 선교를 가능케 해주는 신앙구조의 대화와 참 자유를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돕는 전 교회의 의도적 시도이다.
예수회는 인본주위적 종교교육에 이상을 지니고 수백개에 달하는 학교를 경영하고, 이그나시우스는 청년 교육사업을 예수회의 기본사업의 하나로 간주했다. 그는 1548년에 처음으로 메시나에서 대학을 세웠고, 그후 50년 이내에 예수회는 100여개에 달하는 대학을 설립하였다.
예수회의 교육기관은 유럽 뿐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및 극동아시아 지방에서도 계속해서 숫적으로 증가해 나갔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예수회는 621개의 대학과 176개의 신학교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전도와 성사(聖事) 집행, 아이들과 무시 받는 농민들에 대한 교리문답식 교육을 통해서, 교육 받지 못한 문맹자 사이에 만연해 있는 신앙의 무지를 상당히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격 가치를 역설하는 예수회의 신념은 신앙과 영적 지도에 있어서 분쟁을 거듭하던 당시에도 세계적 인간애(人間愛)의 독특한 인상을 주었다.
로만 캐토릭 교회는 수많은 예수회 선교사들로 말미암아 동서양은 물론하고 여러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함으로서 자비에르가 인도와 일본에서 얻은 성과와 같은 성과를 얻게 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치밀하게 짜여진 계획과 진도표에 따라서 선교지 또는 식민지의 문화 가치의 혼란을 최소한도로 줄이면서 원주민들으로 하여금 점진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라나 예수회가 수백년 간 내려오다가 불건전한 도덕주의를 가지고 있어서 위험한 행위를 생산하게 된것이다. 로욜라는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악한 수단도 허용한다"고 회원들에게 가르쳤다. 예수회의 음모와 계책은 여러 나라에서 수없이 자행되었다. 저들은 목적이 가하면 수단도 가하다는 주의를 가지고 실행한 것이다. 이 도덕주의에 남아 있는 약점이 로만 캐톨릭 내부에서 현저한 비난을 받은 것이다.
헬리 베터는 자비에르와 그 밖의 다른 용감한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하여 기록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그들의 미신적인 사상과 성격의 결함과 또한 그들의 선교정책이 잘못 되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예수회는 이교(異敎)의 관습과 행위를 지나치게 많이 따른다는 비난을 로마교회의 다른 교단들로부터 많이 받았다.
마침내 1773년 교황 크레멘트 14세는 예수회를 폐지시켰다. 그러나 1814년 교황 피우스(Pius) 7세는 예수회를 다시 부활시켰다. 이는 로마교회의 민중으로부터의 호감도가 점차 높아감에 따라, 예수회는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예수회는 로만 캐톨릭 국가 내에서 그 세력을 다시 확보해 나가게 되었다.
그후 예수회는 교황 Pius 9세를 설득하여 1854년 마리아의 무염시태설(無染始胎設)을 공포하고,1870년에는 교황의 무오설(無誤設)을 선포케 하였다. 즉 교황이 ex cathedra라고 하면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규정할 때,"최상의 사도적 권위 때문에 그는 무오하다"고 하였다.
-------------------- 윌리암 케리
선교사로서의 윌리암 케리의 생애
1761년 영국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케리는 그의 유년시절, 가정 형편으로 인하여 유족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14세 때 구두를 만듥거나 수선하는 집의 고용살이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기독교인이던 William Warr의 전도로 18세때에 회심하였다. 그는 주인의 서재에소 우연히 발견한 성서 주석서에서부터 흥미를 갖고, 라틴어와 헬라어를 독학으로 습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Hackleton의 Meeting-House에서 thomas Chater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할 것을 결심하였다.
Moulton에서 조그마한 침례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교사로 부르시는 소명을 받았다. 그는 '제임스 쿡 선장의 항해기'와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를 읽고 선교적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1792년 5월 31일 노팅헴에서 한 무리의 침례교 목사들 앞에서 행한 윌리암 케리의 설교로부터 소급할 수 있다. 이사야 54장 2-3절의 “너의 줄을 길게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 찌어다”를 본문으로 하여 두개의 행동 원칙을 제시하였다.
●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이 설교를 들은 12명의 목회자가 선교회를 결성하였는데, 선교회의 명칭은 'Particular Baptist Society for Propagating the Gospel among the Heathen'이었다. 4개월후에는 침례교 선교회가 결성되었다. 이 선교회의 후원으로 윌리암 케리와 그의 가족은 1793년 6월 인도를 향하여 떠나 5개월 후인 그 해 11월 인도에 도착하였다.
그가 인도에 도착했던 시기는 선교활동을 시작하기에는 아주 불리한 시기였다. 그 이유는 당시 무역회사였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가 하나의 제국으로 탈바꿈하려던 과정에 있었으며 인도의 지배적인 권력으로 성장해 있었는데, 그들은 선교사들의 복음전파로 야기될 수 있는 혼란이 자신들의 지배권을 위협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선교사들의 활동에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항상 추방 당할 위험을 안고 있던 케리는 인도로 향하던 배의 선장의 충고에 따라, 인도 내륙 깊숙이 이주하여 인디고 농장의 지배인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아내는 지병을 얻어 12년 동안이나 의사의 치료를 못받아 고생하였고, 그의 자녀들은 교육을 받지 못하므로 불량배처럼 성장하엿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벵갈어를 독학으로 공부하여 1798년에는 벵갈어로 된 신약성서를 번역하였다.
1800년 그는 그의 나머지 34년 동안의 다양한 교활동의 본부가 된 덴마크 령 세람포레로 이주하였다. 그 이유는 1799년 자선학교의 교장인 Joshua Marshman과 인쇄업자인 William Ward의 도착으로 사태가 변했던 것이다. 새로 도착한 그들은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 덴마크의 작은 식민지인 세람포레로 이주 정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덴마크인들은 영국인들처럼 선교사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1823년 William Ward가 주을 때가지 '세람포레 트리오' 사이에 지속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제후관계 중의 하나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세람포레에 정착한 후 착수한 사업 중의 하나는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는데, 이 교회의 목사로 케리가 아니라 워드가 선출되었다.
선교전략
영국 동인도회사의 노골적인 박해와 냉대를 피하여 덴마크 령인 인도 세람포레에 정착하여 케리는 선교사업에 대해 꼭 같이 요청되는 다섯가지 분야에 대한 선교의 정립과 적용으로 인도 선교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후속 선교사들에게 귀한 모범을 주었다.
● 가능한 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전파할 것: 정치적인 정세가 허락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전도여행이 이루어 졌으며 사업의 발전과 발을 맟추어 간지스 심지어 버마 같은 먼 지방까지 선교사를 정착시켰다. 이를 위하여 그는 복음전파가 가능한 지역이면 어느 곳이든지 다 찾아내었다.
● 둘째, 토착어(土着語)로 된 성서를 배포하여 복음전파를 도울 것: 세람포레 3인조의 기념비적인 사업은 동양의 주요언어들로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이는 실로 거대한 사업으로 30년동안 신구약성경이 6개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케리의 번역은 벵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라티어 성경이다. 이 밖에도 23개 국어로 신약을 전부 번역했으며 10개 국어로 성경의 일부를 번역했다. 마쉬만 박사는 중국어를 배우는데 15년을 보낸 후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그러나 중국 밖에서 이루어진 번역이 관용어구의 정확성과 적합성이 결여 되어있었다. 심지어 케리가 아꼈던 번역도 자신이 열 번 개역을 했지만 그의 사후 결국 다른 번역으로 대치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외에도 벵갈어, 산스크릿트어, 마라티어, 펀잡어, 델그어, 시크어 등의 사전과 문법서 등을 발간하였다.
● 셋째,가능한 한 속히 교회를 세울 것: 이를 위하여 세렘포제에 정착 하면서 이들이 착수한 사업의 하나는 침례교 방식에 따라 교회를 조직하고 목사를 선출하는데 목사로 선출된 사람은 가장 훌륭한 설교자라고 정판되어 있었던 와드였다. 그리하여 영국 침례교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도의 현존하는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 교회는 처음부터 교회와 선교의 통합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 넷째, 비기독교인의 사상과 배경에 대한 충분한 연구를 할 것: 문화와 역사가 오나전히 다른 영국에서 태어난 그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도인의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인도의 역사와 환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인도의 상황 속에서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케리와 그의 동료들은 기독교신앙의 배타적인 주장에 대하여 강경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해야할 일속에는 복음을 전파할 언어를 숙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고장의 사상을 이해하는 일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1천여 페이지에 아름답게 인쇄된 케리의 산스크리트 문법책은 기념비적인 공헌이었다. 또 힌두의 생활 양식과 관습에 대한 와드의 책은(1806)한 외국인이 전혀 낫설은 힌두의 사상과 관습에 얼마나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었느냐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다섯째, 가능한 한 속히 원주민 교역자를 양성할 것: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이 원주민 교역자를 양성하는데 무관심했던 것과는 달리, 미래의 선교사역을 위해서 원주민을 훈련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개신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원주민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를 설립한 인물이 되었다. 선교 초기부터 케리는 유능하고 잘 훈련된 인도 동역자들의 필요를 줄곧 주장했었다. 1805년 선교사들의 사업수행원칙을 밝힌 천명서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임무는 토착인 형제들의 여러 가지 재주와 재능과 은사를 잘 키워 그들의 유용성을 육성하는 일이다. 이 방면에 있어서는 그들의 개발을 위하여 우리의 관심을 아무리 쏟는다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이 거대한 대륙 모든 곳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토착인 전도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설교 및 번역 작업
케리가 인도에 도착한 직후 당한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언어의 문제였다. 그는 인디고 농장의 일꾼들이 사용하는 벵갈어는 말할 수 있었으나, 자신이 사용하는 벵갈어는 표준적인 벵갈어와는 매우 달라서 인도 원주민들에게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원주민의 언어로 설교하기를 열망했고, 그는 몇 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원주민의 언어를 배웠고, 마침내 그는 원주민의 언어로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설교는 매우 능력이 있어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는 원주민에게만 설교한 것이 아니고, 그 지역에 흩어져 사는 유럽인들에게도 설교를 하였는데, 포르투칼인으로 무역상이었던 Ignatius Fernandes는 케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선교본부에 예배소(禮拜所)를 건설하여, 여기서 그가 죽을 때까지 벵갈어와 영어로 설교하였다.
그는 특히 성서의 번역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인도어의 모어(母語)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릿트어에 대한 지식 없이는 인도 각 지방의 방언을 완전히 배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산스크릿트어를 배우기로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도의 여러 방어느올 전하기 위해 산스크릿트어까지 배운 케리는 1794년 신약의 번역을 시작하여 Madnabati에 있는 동안 신약의 번역을 거의 끝냈으며, 한번의 수정을 거친 후 1801년 세람포레에서 인쇄되었다. 케리는 인도의 뛰어난 학자였던 Ram Ram Busu으로부터 번역작업에 커다란 도움을 받았다. 그는 마침내 35 방언으로 된 인도어 성서를 번역, 출간하였고, 벵갈어 산스크릿트어 마라티어 펀잡어 델그어 등의 사전과 문법서를 제작 발간하여 현대 벵갈 문학의 탄생을 낳게 하였다.
교육
선교사들의 선교방법은 지역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나, 공통적인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위 하나가 바로 학교교육을 통한 선교였다. 처음에는 초등학교 중심적이었으나 점점 고등교육에 힘씀으로서, 단순히 교육받은 기독교인을 배출한다기 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미치기 어려운 지적 수준이 높은 엘리트 층에 복음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교육이 개인의 마음을 진리의 복음 안에서 확실히 일어나도록 비춰준다고 믿었으므로 교육은 회심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케리와 그의 동료들도 원주민들이 성서 읽는 법을 배우자 마자 그들이 기독교의 우월성을 확신하게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침례교선교회의 설립취지문에도 기독교를 인도에 소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교와 번역사업과 함께 학교를 설립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많은 교육은 받지 못하였으나 외국어를 배우는데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던 케리는 사람들을 교육시킬 여러 학교들을 설립코자 노력하여, 1819년 그는 세람포레에 대학을 설립하였으며, 1821년까지 126개의 학교를 설립하여 1,000여명의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1819년 세람포레의 아시아의 기독교인 청년 및 기독교인이 아닌 청년들에게 동양 문학 및 유럽 과학을 기르치는 대학이 개교함으로서 일대 진전이 이루어 졌다. 이 대학은 37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는데 이중 19명이 그리스도인이었으며 18명은 비기독교인이었다.
이교적 악습을 금지
그는 천박한 열광주의자는 아니었으나, 기독교 신앙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이교적 악습을 폐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옛부터 전해내려 오는 인도의 희생제사(犧牲祭祀) 때에 유아(幼兒)를 희생으로 드리는 악습과, 남편이 죽어 화장할 때 젊은 부인까지 함께 태우는 사티(Sati)라는 제도의 폐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대하여 종래의 선교사들이 취하던 유약하고 타협적인 태도를 버리고 계급타파운동에 앞장 섰다.
그리고 가장 비천한 존재로 취급받던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케리는 정부에 여성교육기관의 설립을 강력히 건의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교육받지 않고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허드슨 테일러
1853년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가 중국전도협회의 소속으로 중국으로 들어 왔다. 이 협회는 그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거의 전적으로 실패하여 불명예스럽게 해체된 무력한 기구였다.
7년 동안이나 테일러는 중국어를 배우고 여행을 많이 했으며 전도협회를 사임하고 모든일에 오직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게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중국인들과 일치하는 기장 명백한 방법으로서 중국식 복장을 채택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많은 선교에 종사하는 이들의 거의 광적인 반대를 당했다.
1860년 건강을 잃고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중국선교에 마음을 태우다가 1865년에 어떤 교단에도 알리지 않고 또한 그들의 지원도 없이 맨주먹으로 한때 세계 최대선교회의 위치를 차지한바 있는 '중국 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창설하였다. 이 선교회의 설립초기 단계에그는 선교회의 원칙들을 마련하였는데 이 원칙들은 당시 다른 선교단체들이나 개신교 세계의 교회들에서 유행되고 있는 것과는 여러 면에 있어서 달랐다.
● 이 선교회는 초교파적이어야 한다. 보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는 이 선교회는 소속교단에 관계없이 이 선교회의 간단한 교리선언에 서명만 할 수 있다면 확신을 가진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선교사로 임명한다.
● 공식 교육이 모자라는 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한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당시는 선교회들이 전문성을 띠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따라서 로버트 모팟(Robert Moffat)과 같은 개척자들이 나설 수 있는 기회가 많지 못했다. 한 선교회가 문호(門戶)를 계속 개방하기로 작정한 것은 훌륭한 결정이었으며, 또 실지에 있어서 교육이 부족했던 사람들이 저명한 학자나 중국학 연구가로 발전한 예가 없지 않았다.
● 선교회의 지휘부는 영국이 아니라 중국에 있어야한다. 이것은 원대한 의미를 띤 변화였다. 그리고 이 선교회의 책임자는 지휘의 전권을 장악한다. 그와 동시대였던 윌리암 부드(William Booth)처럼 이 청년도 거의 교황에 유사한 권위를 가만히 떠맡았다. 이것은 개인적인 거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사업은 신속한 결단과 신축성 있는 행정력이 요청되며 또 어느 누구도 이 임무를 담당할 수 없다는 자신의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 선교사들은 중국식 복장을 해야하며 가급적이면 중국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해야된다.
● 선교회의 일차적인 임무는 언제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를 돌보고 교육에 종사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나 중심적이며 일차적인 목적을 방해하거나 가리울 정도까지 되어서는 안된다.
테일러에게는 싸워야할 어려움들이 적지 않았다. 중국과 본국에서의 이해부족 그의 동료중 몇 사람들의 불성실, 중국 당국자들과의 어려운 입장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오전 좋지 못한 건강, 1870년 헌신적인 아내와의 사별등이다.
그러나 거의 시작부터 그의 사업은 선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선교사 후보들로 그의 문전은 성시를 이루었다. 거절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실패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맡은 자리를 지켰으며 너무도 성공적으로 선교사업을 개척한 사람들도 있었다.
1882년까지는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들이 들어갔으며 3개성을 제외한 모든 성에 선교사가 주재하였다. 설립한지 30년후에 이 선교회는 여러 나라에서 모여온 641명의 선교사를 그 산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사업은 중국의 서쪽 변방의 원주민들 가운데서 시작하였다. 신키앙성과 티벳 변경에도 선교사들이 배치되었다.
--------------------------존 네비우스
네비우스는 1829년 4월 4일 뉴져지 주에서 네델란드 혈통의 사람으로 태어났다. Ovid에서 학교에 다닌 후 16세의 네비우스는 유니온 대학교 입학하기 위해 준비했다. 1850년 그는 장로교회의 목사가 되기 위해 프린스톤에서 공부했다.
1853년 그는 선교사로서 장로교회 외국선교위원회에 지원하여, 위원회는 그의 원대로 남포(南浦) 선교를 그에게 맡겼다. 중국에 도착하자 그는 양자강 계곡과 산동성에서 일했다. 이중 특별히 한국에 있는 미국 선교사들 사이에서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그의 저작 [선교교회의 개척과 발전]이었다. 그래서 그는 1890년 한국에 초청되었다. 중국 산동성의 미국 선교사 네비우스 목사는 이 자립원리를 배워서 한국에 이것을 실천하도록 그의 후배 선교사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저서 [선교 교회의 설립과 발전](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교과서가 되어졌다.
특히 네비우스는 중국에 머물면서 많은 선교적 영향을 주었다. 네비우스는 한국의 젊은 외국 선교사들에게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저녁마다 새로이 개방되고 있는 한국에서 현재 필요로 하고 있는 것들, 그리고 당장 실현 가능한 제안들과 동의를 요구하는 충고 등을 하면서 지냈다.
"한국 선교는 네비우스 박사의 제안을 매우 중요하게 고려해서 그것을 선교정책으로 채택했고, 초기에서 모든 신참 선교사들에게 이 책자를 나누어 주었고, 그것에 관해 시험을 보아 합격하기를 요구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학생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고도에 달하고, 수백명의 선교사들이 자기 나라를 떠나고자 했을 때, 이 책자는 선교학(宣敎學) 과목의 교재로 쓰여졌다".
중국에서의 종래적 방법과 그 결점들
네비우스의 방법은 그 출발부터가 원주민교회들의 독립을 강조했다. 이것은 그들의 주목표가 원주민 교회의 설립에 있었던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들과 조화를 잘 이루는 것이었다. 이 새 방법은 종래의 방법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나온 것인데, 이 종래의 방법은 원주민 대리인(paid native agency)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선교사들은 복음전파를 위해 많은 원주민 대리인(原住民 代理人)을 고용했다.
선교사들과 또 그들의 본국에서는 당장의 결과를 주장하지만, 선교사 자신 만이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전도사업에 커다란 장애를 느낀다. 그래서 '중국은 결국에는 중국인 자신들에 의해서 복음화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또 하나는 원주민 기독교인들의 환경이 그것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복음을 위한 개인적인 시간이 없었다. 그는 종래의 방법에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했다;
● 새로운 개종자들의 고용 대리인을 만든다는 것은 그들이 관리하고 있는 선교지부(the station)에 위험한 영향을 끼친다. 만일 고용된 대리인이 자리를 옮기거나 해고되는 경우에는 선교사와의 아름다운 관계는 산산히 깨어지게 되기 쉽다.
● 새로운 개종자 고용대리인을 만든다는 것은 종종 개인적으로 그에게 해가 되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것은 일종의 직업 감각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만하고 자기 기만에 휩싸이며, 혹은 타인에 대한 존경심이나 영향력을 상실하기도 한다.
● 이 체제는 진짜 신자와 가짜 신자를 판정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단지 영적인 도덕적 유익이 그들에게 돌아오면 그들은 채용된다. 그러나 그들이 채용되지 않을 때는 뒤로 떨어져 나가는 경향이 있다.
● 이 체제는 돈을 바라는 마음을 자극하며, 보수를 바라는 기독교인들의 수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
● 이것은 자발적이며 댓가를 바라지 않고 기울이는 노력을 중단시켜, 전 체계가 목적하는 성과를 가져오지 못하게 한다.
● 그것은 기독교인들 자신 그리고 비기독교 단체들이 보는 앞에서 전체 선교를 비화시킨다. 영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마치 그들이 경제적인 이유를 위해 그러는 것처럼, 일반신자들이 그것 때문에 그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실제적으로 혹은 가능한 한 그들이 예수를 믿도록 권하는 것은 전하는 자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숫자를 증가시키려는 노력으로 간주된다.
새로운 방법
네비우스의 새로운 방법인 3S를 요약한다면 성경반 제도와 경제적 자립으로 나타난다.
● 넓게 순회하는 개인 복음전도,
● 모든 일에 있어서 성경 중심.
● 자력적인 교회 육성
● 자치하는 교회
● 자립하는 교회
● 그룹 지도와 순회조력자 밑에서의 모든 신자들을 위한 체계적인 성경공부.
● 성경법에 의한 강화된 규율.
● 다른 지체(肢體)들과의 연합과 협동.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최소한의 지역 분파를 목표하는 일.
● 소송 혹은 그와 유사한 일에 있어서의 불간섭,
●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생활의 문제를 받을 만한 지역에서의 관대한 도움 등이다.
자립
시작에서부터 한국교회는 자립(自立)의 원칙에 의해 세워졌다. 자립교회란 경제적인 면에서 또는 행정적인 면에서 자립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전도하며 나아가 자기들의 문화에서 교회가 뿌리를 박으며 견실한 지도를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교회가 되기를 추구하는 교회이다. 한국에서의 자립의 기대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시작 때부터 한국의 기독신자들은 선교회로부터의 댓가를 기대하지 않았다.
마을의 신자들은 자기들이 교회를 생기게 할 힘이 있을 때까지 서로 돌아가면서 그들의 집에서 모였다. 그들 중 가장 능력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하여 아무 댓가없이 사업의 진행을 책임 맡긴다. 선교사는 이런 곳에 일년에 한두번 방문하여 조언을 하기도 하며,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감독과 치리를 하기도 한다. 이런 때를 제외하고는 신자들이 스스로 처리해 나갔다.
이렇게 볼 때 이 자립이란 경제적인 자립 뿐만 아니라 또한 행정적인 자립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자립은 장로교일 경우 경제적인 난제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인 양상으로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회 자립의 능력을 믿었다. 가난과 자립이라는 문제와는 한국교회에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립이 타당하다고 믿었으므로 그들은 보다 연야간 교회에 전도 명령을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네비우스가 자립에 근거를 둔 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의심할 필요 없다. 물론 앤더슨과 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립교회가 생겨난다고 하는 논리도 믿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교회성장의 가장 큰 비결은 성경공부반 제도라고 믿었다. 한국에서 선교사들과 기독신자들은 성경을 가장 권위있는 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명확한 기준과 본보기들을 명시하는 명백한 신조문(信條文)을 가지고 있다.
시작부터 한국교회는 성경을 강조했다. 또한 네비우스도 한국교회의 모든 성공은 성경공부를 강조한 데 그 기초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만약 이것이 잘되면 자립, 자력, 자치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잘 양육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 성경은 정확무오(正確無汚)한 언어로 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소개되었다.
자전
한국교회에서의 자전(自傳)은 자립의 프로그램과 병행하여 이루어졌다. 무보수로 일하는 사역자들이 실제적으로 시골에서 지교회들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지교회들은 전도할 수 있는 한두 사람을 따로 세워놓고, 개종하지 않는 이웃을 전도하거나 또는 순회방문하기 위해 파송한다. 1877년, 서울 장로교회는 전도하며 자기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파송하여 행주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출발에서부터 한국교회는 적어도 다른 사람을 전도하려고 애쓰는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아예 세례를 주지 않는 것을 관습처럼 행해왔다.
자기증식(自己增殖)의 방법은 다양했다. 선교사들의 심방, 시장 전도, 사랑방운동, 주막 전도, 팜프렛 배부, 신앙부흥전도집회, 성경공부반 등이다. 교육과 의료사업이 중요하게 생각되긴 했으나, 그것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즉 모든 믿는 자는 다른 사람의 교사이고, 또한 나은 사람에게서 배우는 자가 되는 것, 즉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휘몰아쳐 가는 방법을 열심히 추구하는 것이다.
자치
네비우스는 그의 책에서 교회가 자치(自治)를 하기 위해서는 항상 거주하는 지도자가 교회에 임명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지도자는 조력자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도자는 자기의 밑에 있는 것 중 발전시킬 수 있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비우스의 원리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목사, 전도사, 조수, 통치 장로 그리고 영수라고 부르는 대리자의 직분을 세움으로 해서 토착화된 교회통치권을 가지고 있다.즉 선택된 무보수지도자들 아래의 모든 집단과 그들이 고용한 조수 관할 하에 순회교구, 이들은 모두 목사들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다음의 지방 지역, 그리고 국가적 지도력을 위한 사람들을 훈련하는 순회집회(巡廻集會)이다.
58.근세 선교의 회고
---------------------------근세 선교의 업적
개신교회가 해외선교를 추진할 수 있기까지는 산업혁명(産業革命)이라고 하는 과학적, 경제적인 외적 변혁에 따른 제국주의적 확장과 함께, 종교 각성이라고 하는 영적 부흥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의 영적 부흥운동의 거창한 흐름은 17세기의 청교도 혁명이라든가 웨일즈와 북미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부흥운동과 독일의 경건운동으로부터 나타난 여러 종교단체 등의 종파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다.
이 영적 부흥운동의 영도자는 존 웨슬리였으며, 웨슬리가 이끌던 이 영적 부흥운동은 개인의 구원과 함께 생활의 거룩성, 곧 이웃 사랑을 바탕으로 한 사회개혁을 주장하여 사회개혁의 일면으로 노예제도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다른 면으로는 선교활동에 열중한 나머지 해외선교로 발전케 된 것이다.
19세기도 위대한 선교협회와 위대한 선교사들의 시대였다. 오직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으로 그들은 인도에서 중국에서 아시아와 남태평양 제도에서 아프리카에서 저들의 삶을 불태웠고 실로 그들은 그들의 피로 복음의 밑거름을 삼았다. 이것이 또한 위대한 세기의 기초가 되었다.
19세기 선교사들은 무엇보다도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순전한 마음과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이들은 당시 선교지의 문제에 대처해 나갔다. 그러나 인간이 살고 있는 사업가운데 100% 성공률을 갖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근대 선교사업도 그 예외는 아니어서 제한적인 성공 뒤에는 광범위한 실패도 뒤따랐다. 선교사업의 이러한 업적과 실패에 대해 스테펜 네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 선교 사업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런 것을 시도하였다는 것 자체가 놀랄만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성과를 올렸다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하는 것을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모든 선교사업이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결론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교사업에 있어서는 잘못이나 실패를 말하기 전에 선교사가 해야할 일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라고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곧 실패다. 그렇지만 선교명령의 한 부분이 될 수 없는 일에 실패했다면 그런 실패에는 비난이 있을 수 없다.
선교사들의 공적
그들이 성취한 승리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확실히 그들은 무엇인가 훌륭한 일을 하였으며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기독교의 대부흥을 세계는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 선교사들은 그들이 일하는 지역의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심지어 부자주의도 실상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 자녀들만큼 그들을 사랑하였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평화로울 때나 전쟁할 때나, 곤경이 있을 때나 그들 가운데서 사랑하고 돕고 보호하고 가진 것을 나눠주었다.
● 선교사들은 토착 문화에 대한 진정한 애착심을 발전시켰다. 선교사들은 흔히 선교지의 문화를 손상 시키고 서구문화(西歐文化)로 대치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사실 서양교육을 소개해 들어온 것은 사실이며 특히 중국의 경우를 보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교육제도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토착문화를 파손시키려고 그렇게 시작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토착언어를 배웠다. 어떤 국민에게나 가장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어를 배우는 것이다. 이 분야에 있어서도 선교사들은 길을 보였다. 즉 그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언어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데 있어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미개한 지역에서 그것은 결코 용이한 작업이 아니었다. 문어체가 없는 언어가 상당히 많았다. 그들이 쓰는 말을 배운 후에 그것에 알맞는 글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기본어나 사전도 없이 문자를 고안해낸 다음 그것을 회심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런 일은 오래 걸리고 고통스런 것으로서 끈기 있게 여러 해 동안 지적인 노동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 선교사들은 성경을 번역하였다. 엄청난 작업인 성경번역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선교사가 번역사업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적어도 10여 년의 황금기간이 소요된다. 올바르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의 문법과 문장법 어형론을 포함하여 세밀한 부분까지 알아야할 뿐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문화도 철저히 알아야한다. 성경학자들은 언어학을 훈련 받지만 초기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런 기술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도 못하였다. 다만 가지고 있는 도구와 재능을 최대한도로 발휘하여 최선을 다해야했던 것이다. 그들의 기념비적(記念碑的)인 성취는 가히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 선교사들은 피선교지 국민들에게 근대교육을 제공하였다. 상당수의 나라에서 최초로 개설된 학교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많은 나라에서 서구지식을 처음으로 제공한 것도 선교회들이었으며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는 그것이 대단히 절실하였던 것이다.
● 선교사들은 자국민의 잠재력을 최초로 믿은 사람들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신세계에 왔을 때에는 야만적인 인디안들에 관해 희미하게 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은 인디안들이 반인간같이 여겨졌고 문화의 초기도 요구하기 불가능한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그런 태도에 반대한 것은 선교사들 뿐이었다. 아프리카의 경우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 선교사들은 병원, 의원 및 의과학교를 개설하였다. 교육과 아울러 그들은 근대적인 과학적 의약을 소개하였다. 초기의 선교사들은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미신은 말할 것도 없고 또한 마술사와 의료인들을 상대로 투쟁하여야 했다. 카메룬의 한 선교사 의사는 백인인 자기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온 첫 아프리카인을 기다리는데 8년이 걸렸다. 그러나 인내에는 그 대가가 있었고 끈기로 견딘 것이다.
------------------근세 선교에 대한 비판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잇는 종교개혁 운동은 그 성격이 복음의 외적인 확장보다는 내적으로 변질된 기독교를 개혁하는 것이었으므로, 종교개혁자들은 선교운동에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선교가 사도시대(使徒時代)에 이미 끝났으며, 자기들의 임무로 보지 않았다.
또한 루터가 신학적 확신 속에서 캐톨릭교회의 이원론적 성속(聖俗) 개념의 상징인 수도원을 없애 버렸는데, 믿음 은혜 성서 그리스도를 강조한 루터는 구교의 선교수단인 수도사회를 없애면서 수도사회를 대신하여 동등한 선교의 기능을 발휘할 선교기관을 창립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개신교는 약 300년 동안 세계선교의 대열에서 낙오하고 말았다.
또한 엄격한 칼빈주의의 영향으로 윌리암 케리가 근대 개신교의 선교를 시작하기까지는 이교도들을 기독교하려는 일은 주님이 그 자신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 하실 일이며, 인간이 이를 서두른다고 해서 되어질 일이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교회에 팽배해 있었다.
선교사들의 과오
● 선교사들은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서양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보다 더한 것은 문화와 기독교를 나란히 놓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피 선교지 사람들을 자국민이라고 하면서 본국으로 보내는 편지에는 그들이 게으르고 더러우며 부정직하고 책임감이 없어 신뢰 할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혹평하였다.
● 선교사들은 이방종교(異邦宗敎)에 대한 지식이 적었다. 이런 종교에 대하여는 불필요할 정도로 부정적이어서 무조건 우상숭배(偶像崇拜)라고 하여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기 때문에 종종 듣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토착 종교를 상세히 조사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전부 거짓이라고 생각하여 다 포기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후에 그들이 발견한 사실은 그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자기들에게 패배가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동안은 사업이 잘 안되었지만 어느새 평판이 흔들린다.
● 그들은 기독교와 서양문화를 구별하지 못하였다.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들어오면서 대헌장에서 로버트의 질서법에 이르는 거창한 짐보따리들을 들고 들어왔는데 곧,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금기(禁忌)들 개인적 편견과 편애, 윤리적및 도덕적 신조, 경제적 정치적인 기관등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회심자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멍에를 그들 목에 걸어 놓았던 것이다.
● 선교사들은 복음과 함께 교파주의를 수출 하였다. 초기에는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말했지만 곧 선한 의도를 망각하고 말았다. 사업을 마치기도 전에 서양의 중요 교단과 소수교단이 거의 신설되었다. 특히 남침례교는 북부 중국에 있고 북침례교는 남부 중국에 있게 되자 중국인들에게는 적지 않은 혼란을 준 것이다.
●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토착화를 격려하지 못했다. 기독교가 비서구식 형태로 표현되어야 그 핵심적인 것이 존속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갖지를 못했다. 형식이 실질을 나타내는데 근본적으로 생각하여 기독교는 영원히 그들이 생각 하던 서구식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세울때 언제나 뾰족탑과 종과 십자가를 알았던 것이다.
● 선교사들은 부자주의(父子主義)의 죄책(罪責)이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선교사들을 반대하게 된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기독교 선교의 다소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불행한 사람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버지가 자식을 돌보듯하는 부자주의가 언제나 나뿐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최초에는 19세기라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상당히 당연하고 또 필요하였으며 불가피한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했는데 당시의 대부분의 회심자들은 부족사회에서 도망 나온 노예와 무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그들을 그들의 지역 내에 들어오게 하였는데 후에 그들은 선교부의 피보호자가 된 것이다.
● 선교사들이 식민체제와 너무 가깝게 동일시되었다. 선교사들의 과오는 아닐지 모르나 그들은 19세기 유럽제국의 거대한 세력을 확장하는데 있어 하나의 부분이나 도구가 되었으며 그런 방식으로 유럽제국은 아프리카, 아시아 및 남양군도 각 곳에 식민 세력을 획득하였다. 식민 통치자들과 기독교선교사들은 같은 배를 타고 여행하여 같은 국기 밑에서 일하고 그곳도 같은 나라안에서 서로 협력하여 지냈던 것이다.
문화와 선교의 관계
이 시대의 선교에 있어서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문제는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성에 대한 것이다. 개신교는 그들의 선교활동에 있어서 자의든 타의든 복음과 함께 문화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어 왔는데, 이로 인하여 생기게 되는 문화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던 서양문화의 강점으로 극복된 예가 많았다. 그러나 여기서 숙고되어야 하는 문제는 선교전략에 있어서 선문화 후복음이냐 아니면 선복음 후문화냐 또는 동시적인 것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19세기에 이르러 또 하나의 선교이해에 대한 생각할 만한 전개는 특히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선교가 문화적 전달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선교를 역사적 비판주의와 합리주의의 결과와 조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이같은 견해에 따르면 선교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선포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유일성(唯一性)은 그 기독교의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가 가져다 주는 결과에 있다는 것이다. 경건주의적이고 교회 중심적인 선교활동에서 나타난 서구 기독교의 종교적 우월감은 이 새로운 견해를 믿고 나아가는 자들에 의해 문화적 우월감으로 변한 것이다.
언스트 부드(Ernst Buss)같은 이는 선교의 목적을 회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때 지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선교의 목적을 '기독교와 문명' 또는 '교육'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생각들은 식민화(植民化)를 간접적인 설교 형태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을 비롯한 열강들에 의한 강제조약에 뒤이은 선교의 확산은 복음에 대한 거부보다 서방에 대한 거부로 인해 떼어버릴 수 없는 선교의 영원한 장애요소가 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하는 기독교 선교가 지닌 중대한 전환점 중의 하나는 서양에서 시발되어 비서방 즉 비기독교세계에 복음이 전달되고 기독교문화의 영향을 끼쳐왔던 일들이 오늘날 더 이상은 지속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러한 발견은 단지 신학적인 통찰이 깊어졌기 때문에 보여진 결과만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서구 교회가 자신의 지배적 위치를 상실했다는 사실과, 교회가 스스로 이웃을 위한 교회라는 것을 보기 시작한 사실에 기인한다. 이러한 인식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적 책임이 세계를 변화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교회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외침을 불러 일으켰다.
교회는 항상 선교를 통하여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던 그런 면에 대한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선교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우리의 '사랑의 빚'을 나누기 위해 나아가는 겸허한 발걸음이어야 한다. 그리고 선교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지나날 우리 교회의 세상에 대한 자만함과 적개적이었던 부끄러운 태도를 참회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는 이 모든 짐을 겸허히 지고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모든 경계선을 넘어 '땅끝'을 향하는 교회의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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