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교회사2 교실

[스크랩] 경건주의

류성련 2014. 9. 13. 23:19
 

* 들어가는 말

여의도 순복음교회 국제신학연구원과 한세대 영산신학연구소는 지난 4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에서 ‘사랑의 실천’이라는 주제로 전국 신학자 학술 세미나를 갖고 나눔과 섬김의 교회공동체가 되기 위한 방안을 깊이 있게 모색했다. 최일도, 손용철, 맹용길, 박석돈, 김홍근 등 현장 실천가와 신학자들은 발제를 통해 그 동안 교회가 본질이 아닌 비본질에 지나치게 집중해 왔다고 지적하고 교회는 말씀 선포(케리그마), 교육(디다케), 나눔(디아코니아), 섬김(코이노니아)을 동일선상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밝혔다.1)

본 소고(小考)의 주제는 ‘경건주의’ 신앙과 그 실천에 대하여 살펴봄에 있다. 우리는 여기서 경건주의의 태동과 본질, 그리고 현대에 끼친 영향 등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나아가 경건주의 대표자들의 사상과 경건주의자들의 신앙 실천을 살펴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한국교회는 경건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모색해 보고자 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1. 경건주의(Pietism) 란 무엇인가?

경건주의는 17세기의 독일 루터교 안에서 종교 개혁운동의 새로운 양상으로 시작되었다. 경건주의 운동은 그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점차 여러 나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는데, 일반적으로 4가지의 성격을 띄고 있다.2)

1) 경건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개인적으로 체험되는 내적 변화라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개인적 신앙을 여타의 다른 것보다 더 중히 여기는 두드러진 특징을 갖는다.

2) 경건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는 것을 그 이상으로 삼고 있다. 즉 낡은 옛 생활을 깨끗하게 단절하고 새로운 삶으로, 거룩한 인격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경건의 훈련을 강조한다.

3) 경건주의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성경의 역할에 새로운 관심을 부여한다. 일반적으로 정통 교회에서는 성경을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근거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교리를 가르쳐 주는 규범도 되지만 영적 생활의 근거이기도 하다. 경건주의자들은 성경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초래하는 성령의 수단으로 이해하였다.

4) 경건주의는 기존 세력에 대한 하나의 저항 운동이었다. 즉 기존 세력들이 기득권 안에서 안주하면서 문제를 보지 못하는 요소들을 그들은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래서 기존 교회론, 신학적인 문제점들, 종교적인 현실 등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시의 지배 세력들과 큰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2. 경건주의의 본질 요약

1) 거듭남과 영적 각성을 근거하여 갱신을 추진하고 온전한 성화를 지향한 성결 운동이다.

2) 경험적 신앙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삶의 변화와 실천을 강조하여 선교를 지향하는 평신도 운동이다

3) 경건모임(교회 안·밖의 작은 모임)을 근거하여 신앙의 역동성을 중시한 작은 모임 운동이다

4) 성령의 역사에 의해 밝혀지는 성경을 근거하여 설교와 신학 갱신을 지향한 하나님 말씀 운동이다.


3. 경건주의가 현대에 끼친 영향과 공헌

1) 경건주의는 17세기에 시작하여 19세기까지 계속되었고, 20세기의 종교계에 공헌하여 성서신학이 출현하게 하였다.

2) 경건주의자들은 현대 에큐메니즘(Ecumenism)에 큰 공헌을 하였다.

3) 경건주의는 사람이 종교적인 인간이 되면 저절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을 깨뜨렸다


4. 경건주의 실천의 대표적인 인물들3)

1) 경건주의 아버지: 필립 야곱 스페너(Philip Jacob Spener:1635-1705)

경건주의의 아버지 하면 대체로 스페너를 꼽는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경건주의 아버지로 스페너보다는 요한 아른트(Johann Arndt:1555-1621)를 꼽기도 하지만 스페너가 훨씬 괄목할 공헌을 하였다. 스페너는 독일 알사스(Alsas)에서 출생하였다. 스페너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철저한 루터교 신앙의 분위기 속에 성장하였다. 그는 요한 아른트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ity: 1610)를 백작부인으로부터 교습 받았다. 스페너는 스트라스부르그와 제네바 등지를 유학하면서 칼빈파 교회들과 교제하였다. 그 뿐 아니라 리용에서 공부도 하고 독일의 여러 대학도 순방하였다. 1663년에서부터 1666년까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목회를 하면서 대학 강사 생활 중 신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1660년 프랑크푸르트 교회에 초청 받아 목회를 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경건의 모임들'(Colleges of Piety)이라 부르는 성경 공부 중심의 경건회 모임을 설립하였다. 그는 경건회 모임을 시작한 지 5년 후인 1675년에 「피아 데시데리아」(pia desi-deria;경건의 욕망)를 출판하였다. 이 책에는 신자들의 경건성을 양육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진술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현실교회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함을 주장하였고 참된 기독교는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영적 생명력이 생활 속에 나타나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존 교회의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가하지 않았지만, 그는 목회자나 신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후보자들은 그들이 깊은 개인적인 신앙을 갖춘 진정한 기독교 신자인지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반 평신도의 문제점도 지적하였다. 술 취함도 가벼운 죄로 예외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매음이나 간음, 우상숭배, 동성연애, 도둑질, 폭력이 근절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순수 목사 중심적 교회를 극복하고자 ‘만인사제설’을 강조하면서 평신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국가가 교회의 머리 노릇을 하면서 교회를 지배하려는데 대해서도 담대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특히 순수 정통 루터주의에 반대하여 “실천적 그리스도교”의 일환으로 경건주의를 이끌어 나가면서 사회적 곤경을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 프로그램을 실행하였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각의 디아코니아적 책임을 구체적으로 인식해야 하며, 교구는 그들의 임무를 구체적으로 검증하고 공공존재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개혁의 일환으로 교회와 헌금 규정의 연결을 효율적으로 시도하였으며, 고와와 노동자의 집을 공적 복지 행위의 사업으로 행한 프랑크프르트의 구상은 독일과 유럽에 하나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 대해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도움 제공이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더 이상 기독교적 동정에만 의존하지 말고 국가가 담당해야하는 과제임을 제시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현대 공적 복지체계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다. 이때부터 병원, 빈민구호, 노동촉진과 교육촉진이 지역적, 국가적 보호가 되었으며, 그의 사후인 1794년 프로이센 법에 보편적 사회보조의무의 원칙이 가동됨으로 사회적 법치국가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1691년, 그는 베를린(Berlin)으로 옮겨가서 그의 여러 논문을 모아 「신학사상」(Theologische Bedencken)을 펴냈고, 프랑케와 함께 '할레'(Halle)에 새로운 '할레 대학'을 세웠다(1694). 이 할레 대학의 신학 교수진은 스페너와 프랑케의 영향으로 경건주의의 학문적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후에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선구자인 니콜라스 진젠도르프에게 있어서도 스페너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 스페너는 그의 대부(代父)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스페너는 1705년 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스페너에게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프랑케에 의해서 더욱 크게 발전하게 된다.


2) 경건주의의 중심인물: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ke: 1663-1727)

프랑케는 루벡(Lubeck)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키엘(Kiel)에서 학생 시절에 스페너의 감화를 받고 경건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라이프치히(Leipzig)대학교에서 학생으로서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던 중 특별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가 참석했던 모임은 성경연구를 통해 학문적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모임이었다. 그렇지만 프랑케는 성경 연구는 경건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라이프치히를 떠나 스페너를 따르게 되었고,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와서 스페너 방식에 의한 새로운 성경 연구 운동을 시작하였다. 프랑케의 경건주의는 더욱 더 금욕적인 생활 방식과 율법적 생활 방식을 강조함으로 스페너의 정신을 능가하게 되었다. 1694년에 브란덴부르그(Brandenburg) 선제후가 할레(Halle)대학을 세우면서 베를린을 강력한 영적 운동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래서 경건주의자인 스페너를 불러 들였고, 스페너는 프랑케를 할레 대학에 합류시켜 프랑케는 1698년에 할레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할레 대학은 경건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후에 프랑케는 할레 대학보다도 다른 할레의 기관들 설립으로 더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프랑케는 그의 스승 스페너의 경건주의 이론을 실제 생활 현장에서 구체화하는 일에 힘썼다. 즉 그는 기독교적 이웃의 세계 시민적 차원들을 연결하는 것에 노력하였다. 그는 신앙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디아콘, 디아코닌(Diakon, Diakonnin)이라 주장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목적을 위해 과감히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전 사업의 촉진”, “모든 삶, 신분들의 실제적이고 보편적인 향상”, “전 세계의 총체적 개혁”이라는 표제어로 그는 전적인 디아코니아를 강조한다. 할레는 디아코니아적 교육 실천의 중심부가 되었고 대기업과 모범업체가 생기게 된다. 프랑케는 1695년 빈민학교를 열고, 1696년 2000명 이상의 젊은이들을 수용하는 캠퍼스를 만들고 그 안에 고아원, 교사양성소, 종합학교, 농장, 농업 모범업체, 가난한 과부들을 위한 서점, 화학 실험실, 도서관, 세탁소, 약품업체, 제과점, 양조장, 병원과 당시 세계의 모든 영역과 연계되는 대형 무역업체를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모델은 엄격하고 금욕적으로 이행되었지만 개인의 본성과 차이를 고려하여 실행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빈자를 위한 도움, 아동 교육, 병자 구호, 장애인 구호가 하나의 척도가 되었다. 프랑케는 교회뿐 아니라 교육을 통해 철저한 개혁으로 나가고자 하였고 독일을 벗어나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려 하였다.

프랑케는 할레에서의 놀라운 사역을 통해 기독교적인 봉사의 새로운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그가 일으킨 할레의 경건주의는 슈미트(M. Schmidt)가 말한 대로 "인간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혁"이었다. 이것은 리츨이 경건주의에 대하여 평가한 탈(脫)세상적이고 중세의 수도원적이고 신비적인 경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세상 안에서 적극적으로 변혁을 시도했으며 실천에 옮겼다. 특히 이 실천은 할레의 고아원과 기숙학교를 통한 교육과 사회복지 영역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프랑케의 이 사업은 사회의 소득의 분배에 또한 기여를 하였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 처음으로 해외 선교를 개척함으로 개신교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개신교 선교의 가능성을 일깨워 주었다.


3)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선구자: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

니콜라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는 열렬한 경건주의자들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 부모들은 그를 경건주의 학교인 할레 대학에 보내어 프랑케 아래 수학하도록 하였다. 진젠도르프는 1710년부터 1716년까지 할레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그는 일찍이 대부였던 스페너로부터 매력을 느꼈었고 프랑케로부터는 큰 자극을 받았다. 진젠도르프는 14살짜리 소년으로 '겨자씨 모임(Order of the Grain of Mustard Seed)'을 조직했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모든 인류를 사랑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루터파의 중심지인 비텐베르그에 가서 법학을 공부한 후 화란과 프랑스를 여행하였다. 도중에 뒤셀도르프에서 화가인 도메니코페티(Domenico Feti)가 그린 "내가 너를 위하여 이것을 당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라는 각명(刻銘)이 달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를 사로잡게 되었고 진젠도르프는 이 그림으로부터 그의 필생의 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주요한 자극을 받게 되었다.

1721년에 색슨 공의 정부관리가 되어 드레스덴(Dresden) 궁정에서 일을 하게 된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그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모라비안(Moravians)을 만나게 된다(1722년). 진젠도르프는 자기 사유지를 제공하여 모라비아 피난민들을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들 모라비안들은 진젠도르프가 제공한 사유지를 거류지로 정하고 보헤미안 형제단(Bohemian Brethren)을 조직하였다. 그들의 의식은 일반 교회와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소금'이라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믿는 교회는 세상의 평범한 교회가 아니라 참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로 부터 비롯된 교회 안의 교회라고 믿었다. 그래서 국가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교파적인 일반 교회와는 다르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모라비안들의 삶을 보고 진젠도르프는 궁정의 직위를 사임하고 이들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라고 하였다. 이 헤른후트 공동체는 진젠도르프의 감독 아래 점점 독특한 모습으로 갱신된 모라비아 교회가 되었다. 이 공동체는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다. 독신 형제들의 양털실 제조업은 매우 번창하였고, 독신 자매들이 짠 천과 섬세한 자수품들은 유럽 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헤른후트 공동체의 더닝거(Durninger)회사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농장과 제과점은 모범적으로 운영되었으며, 모든 이익금은 공동기금인 “어린양의 금고”에 넣어졌다. 이 공동체 안의 모든 일은 “어린양”을 섬기는 일로 간주되었다. 헤른후트와 베들레헴을 비롯한 여러 정착촌의 모라비아인들은 공동체 생활 안에서 생산과 소비 양면에서 괄목할 만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재산 전체를 공유함으로 경제·사회·종교적 기능을 집중 결합할 수 있었다. 이 공동체는 삶의 개인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차원들이 하나의 공통된 체계로 통합된, 하나의 “그리스도인의 가족으로서의 완전한 공동체”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일종의 섬김 공동체(Dienst Gemeinschaft)였다.

진젠도르프는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공동생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교구의 내적 원칙으로 섬김 사상과 세계를 포함한 행동 원칙을 삼았다. 또한 아놀드의 “처음 사랑; 초대교회의 전적인 모사와 그들의 살아있는 신앙과 거룩한 삶의 열성적인 훈련”을 그와 그의 동역자들은 형제교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로 삼았다. 즉 그들은 형제 자매간의 사랑, 평신도 실천의 강조, 가정 방문, 사랑의 식탁과 발 씻어줌, 빈자와 병자 구호에 열심이었지만, 무역, 수공업, 공공경제를 통한 일들을 통해 디아코니아적 목표 -손님접대를 기꺼이 함- 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현대적 의미에서 주택보조, 직업교육, 학교봉사, 영업 감독, 의료봉사 같은 사회적 시설도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프랑케처럼 사회와 교회 현실의 새로운 형성을 위해 종교개혁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사상과 하나님과의 동역의 사고 아래 디아코니아를 실천해 나갔다. 그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지배 하에서 행하게 하고자 했다. 여기에 루터적 은혜 보편주의가 개혁적 행동주의와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세상 안에 그리스도교적 삶의 디아코니아적 근본구조가 분명하게 되고 당시 세상의 많은 영역에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특히 모라비안들이 존 웨슬레에게 끼친 감동으로 감리교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더욱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 나가는 말

경건주의는 1600년대에 유럽에서 일어난 교회와 신앙 갱신 운동으로서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난 개신교 각성 운동 가운데 가장 크고 깊게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경건주의는 크게 보아 중세에서 근대의 계몽주의에 이르는 포물선에 위치한 운동이며 작게는 종교개혁, 정통주의에서 계몽주의에 이르는 흐름에 위치한다. 그 본질상 갱신 운동인 경건주의의 본질은 온전한 성화를 지향한 성결운동, 선교를 지향한 평신도 운동, 신앙의 역동성을 중시한 작은 모임 운동, 설교와 신학 갱신을 지향한 하나님 말씀운동이었다. 이러한 경건주의는 역동성을 가지고 신앙 실천으로 이어져 교회와 신앙의 개혁과 갱신 그리고 삶의 변화와 성숙을 주도하여 오게 되었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를 사회로부터 강력하게 요구받고 있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섬김과 나눔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즉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극복하고 삶으로서의 예배, 행동하는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을 이웃에게 베풀어 보다 행복한 복지사회 건설에 앞장 서 달라는 시대의 요청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와 17세기 경건주의와 디아코니아 정신을 되살려 오늘의 삶에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이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의 실천 과제임을 전망해 본다.




참고도서

1. Gonzalez, L. Justo, 「종교개혁사」, 서영일 역, 도서출판 은성, 1988.

2.                  , 「현대교회사」, 서영일 역, 도서출판 은성, 1987.

3. Lane, Tony . 「기독교 사상사」, 도서출판 나침반사, 1987.

4. Walker, Williston, 「기독교회사(下)」, 송인설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 홍주민, "종교개혁과 디아코니아", 「신학연구 45집」, http://diakonie.co.kr

6.「독일의 경건주의」, http://cafe.naver.com/modernth.cafe

출처 : (사랑이샘솟는우리♡)
글쓴이 : 한정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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