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도널드 위니캇(D.W.Winnicott)의 연구
- M.Klein에게 교육분석 받음.
- 소아과 의사로 어린이 병원에 40년간 근무하면서 6만여명의 어린이와 부모를 돌보며, 다양한 임상경험을 토대로 정신분석적 치료에 대한 하나의 포괄적인 견해제시.
- 특히 신경증으로 보이지만 전통적인 정신분석으로 치료되지 않는 장애를 치료할 경우, 전 오이디푸스기의 발달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된다.
- 전오이디푸스기(preoedipal period)발달과 이에 관한 정신병리에 초점
- 초기 환경의 중요성 강조.
Ⅰ. 발달
• 위니캇의 이론에서 가장 포괄적인 개념은 ‘성숙과정과 촉진적 환경’이다.
모든 유기체는 ‘성숙과정’이라 불리는 욕동을 가지고 태어나며, 정해진 방향을 따라 발달한다. 이런 선천적인 요소를 바꿀 수는 없지만, 성숙과정에서 요구되는 ‘촉진적 환경’이 실패할 경우 유기체의 발달은 방해받는다. 성숙과정을 위해서 환경이 완벽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충분히 좋아야만’한다. 그렇지 않으면 발달에 방해를 받아 정서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위니캇에게 있어서, 모든 증상은 발달이 정지되거나 성숙과정이 차단되었음을 나타낸다.
• 위니캇은 다른 어떤 이론가보다도 아기가 아동으로 성장하고 발달하는데 환경(모성적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모성적 환경을 떠난 아기란 생각할 수조차 없으며, 아이와 어머니사이의 의존관계는 이론의 핵심축이다.
• 발달은 아이가 어머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단계로부터 시작해서 상대적 의존을 거쳐 ‘독립을 향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절대적 의존단계와 상대적 의존단계사이의 ‘중간(transition)단계가 있는데, 이는 상대적 의존단계의 하위단계로, 그의 이론에서 중요한 발달적 지표로서 기능한다.
∴발달과정 = 절대적 의존단계:중간단계 → 상대적 의존단계 → 독립을 향해(오이디푸스기)
• 위니캇이 발달의 마지막 단계인 ‘독립을 향해 가는 단계’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이 시기가 오이디푸스기에 해당되고, 고전적 정신분석의 이론의 틀안에서 잘 개념화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절대적 의존단계 (대략 0~6개월)
1. 유아
• 이시기 유아는 자신이 환경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winnicott,1963a)자신을 환경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나’도 없고 ‘나 아닌 것’도 없다. 이 단계의 유아는 욕구가 존재하는 순간 바로 충족되는 마술적 세상(전능세계)에서 산다. 유아의 존재는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기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관련속에 있는’ 아기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 분리됨에 대한 인식이 없는 이 단계에서 유아-어머니 관계는 신체접촉의 토대위에서만 가능하다(winnicott,1963a). 유아는 만져지고 안겨지고 쓰다듬어지거나 다른 신체접촉의 경험을 통해서만 관계를 인식한다. 이런 접촉이 철회될 때, 유아는 접촉의 상실을 느끼는데,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의 분리를 경험하지는 않는다.
• 위니캇은 유아의 경험안에 ‘시간요소(시간감각)’가 결핍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즉, 유아는 자기 또는 타자가 계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감각(존재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지신이 존재한다거나 어머니가 실제로 존재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분리가 발생할 때, 상실한 접촉을 채워주는 것은 신체적 접촉이다.
• 이러한 원시적인 존재감은 아주 초보적인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방해만으로도 위협받을 수 있다. 유아에게는 경고신호로서의 불안을 관리할 수 있는 자기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불안은 멸절불안으로 경험된다(winnicott,1952,1960a). 시간감각의 결여로 유아는 안정감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멸절불안에 사로잡힌다. 환경(모성적 환경)은 멸절불안을 막아주고 유아가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양의 현실만을 경험할 수 있도록 ‘거의 완벽한’ 적응을 제공해주어야 한다(winnicott,1956a).
[절대적 의존기의 발달과제]
1) 통합의 성취
• 절대적 의존기의 첫 번째 결정적인 발달과제(성숙과정)는 통합의 성취이다. 감정, 욕구, 긴장상태들이 하나의 전체에 속한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처럼, 경험 또한 ‘통합되어 있지 않다’(winnicott,1945a,1962). 거기에는 경험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나’가 없고, 경험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도 없으며, 또한 그 경험들이 계속될 수 있다는 시간적 감각도 없다. 따라서 경험은 연속적이지 못하여 ‘진정한 심리적 현실’이 되지 못한다. 시간적 연속성의 감각은 경험들을 점진적으로 통합된 자기에 연결시킴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2) 인격화(personification)
• 두 번째 발달과제는 인격화(personification)이다. 이 시기의 유아는 자신을 인격으로 경험할 수 없는데 그것은 아직 ‘나 아닌 것’으로부터 ‘나’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능력은 경험의 ‘인격화(personification)’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유아의 감각, 욕구 그리고 감정이 아직 ‘나의 경험’으로 인격화되지 않은 것이다. 경험이 아직 우리의 인격안에 자리를 잡지 못한것이다. 인격화는 초기 의존기를 성공적으로 통과함으로써 얻어진다.
3) 현실감 발달
• 세 번째 발달과제는 현실감을 점진적으로 발달시키는 것이다. 유아의 욕구충족은 현실감각을 통해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 유아에게 아직 현실감이 없기 때문이다. 유아는 좌절을 겪을 때마다 약간의 현실을 경험하는데, 이때 ‘전능성’에 구멍이 뚫리게 된다. 환경적 실패로 인해 ‘현실에 대한 인식(realization)’이 가능해지기 때문에(winnicott,1945), 적응의 실패는 적응의 성공만큼이나 유아의 현실감 발달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위니캇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환경이 완벽해야할 필요는 없다. 유아가 필요한 것은 단지 유아가 보통 얻는 것, 즉 누군가의 돌봄과 관심이다’라고. ( >.<ㅋ~~)
**환경의 적절한 적응의 실패는 유아에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현실을 제공한다. ‘돌봄의 주된 특징은 유아에게 세상을 일관성있게 제시하는 것이다(winnicott,1963). 유아의 필요가 충족됨에 따라 최초의 자기감이 자라나고, 좌절은 점점 더 견딜 수 있는 것이 되며, 그 결과 시간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고 점차 현실과 환상의 구별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절대적 의존기 동안에 현실감은 여전히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후기 의존단계에 도달해서만 현실경험과 환상을 구별할 수 있고, ‘현실에 대한 인식’에 도달 할 수 있다.
[유아가 인식하는 대상]
• 절대적 의존기 동안에는 자기와 타자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아에게는 아직 대상이 없다(winnicott,1971). 유아가 인식하는 대상은 유아의 전능성이라는 테두리내에서 경험된 대상이다. 즉, 유아의 전적인 통제아래에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전능영역내에서 ‘대상관계’에 대한 감각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직 대상사용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대상을 사용할 수 있으려면, 자기에 의해 외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런 인식은 상대적 의존기에 가서야 발생한다.
** 이 시기에 외적대상이 없다면, 유아가 어머니를 바라볼 때 유아는 무엇을 보는가? 유아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본다. 아기를 보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그녀가 거기서 무엇을 보는가에 달려 있다’. 이때 어머니는 ‘거울역할(mirror role)'을 수행한다. 즉, 어머니는 유아가 바라보는 것을 유아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거울로 기능한다. 유아가 만나는 자신에 대한 첫 이미지는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의 얼굴표정에 의해 유아는 자신이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감동ㅠㅠ~~)
[공격성]
• 위니캇(1947,1962,1963b)은 공격성이 타고난 것이라는 프로이트와 클라인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내재적인 공격적 욕동과 ‘사랑-충동(love-impulse)안에 있는 타고난 공격성’이라는 두 가지 모두를 언급했다.
위니캇은 초기 상태에서 공격성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연민-이전의’(pre-ruth) 무자비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는 아기는 심지어 자궁속에서 조차도 발로 찬다고 지적했다.
• 공격성은 본래 ‘활동성과 거의 동의어’이다(winnicott,1950). 유아에게는 자신의 공격성이 타자를 해칠 수도 있다는 인식이 없다. ‘사랑- 충동’안에 공격성이 본래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유아는 흥분과 함께 ‘파괴한다. 본능만족에 수반되는 흥분은 어머니의 신체에 대한 공격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는 자신의 공격이, 흥분하지 않았을 때 자신이 사랑하던 동일한 대상에게 가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 ‘정상적인 아이는 놀이에서처럼 어머니와의 무자비한 관계를 즐긴다. 유아는 어머니가 놀이에서 그의 무자비성을 견딜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어머니를 필요로 한다. 이때 아이의 무자비성은 실제고 그녀를 다치게 하고 지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유아는 자신의 공격성이 상처를 줄 수 있으며, 공격성이 ‘사랑충동’의 일부로 남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 초기 공격에 대한 위니캇의 견해는 클라인의 것과 유사하면서도 분명히 다르다.
Klein |
Winnicott | |||
분열
리비도적 욕동 공격성
|
공격성 사 랑 흥분! 평~온
공격성은 사랑의 일부다 두 가지 욕동들은 처음에 융합되어 있다. (①공격성을 포함하고 있는 흥분상태+②평온상태)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의 분열은 초기 공격성을 안아주지 못한 환경의 실패를 방어하기 위한 병리적 반응. |
• 위니캇은 공격성은 유아의 현실감을 발달시키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아가 대상을 전능영역으로부터 축출하는데 공격성을 사용한다고 믿었다. 먼저 대상은 ‘파괴되어야’한다. 그리고 나중에 유아가 상대적 의존기에 도달해서 대상을 외적대상으로 ‘재발견할 때’ 비로소 대상은 ‘사용될’ 수 있다. (대상이 공격성에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
➡ **위니캇에게 공격성은 자기의 발달, 현실감, 그리고 대상 인식과 대상사용능력의 발달에 결정적인 요소이다.
[요약]
절대적 의존단계는 자기감각, 현실감각이 없고, 대상경험도 없는 마술적인 전능세계안에 살고 있다. 이때 경험은 연결성을 갖지 못하고, ‘진정한 심리적 실재’ 바깥에 있다. 이 시기는 원시적 정신병리의 신비를 푸는 단서를 제공하는 중요한 시기다.
2. 어머니
[일차적 모성 몰두]
• 위니캇은 어머니가 ‘일차적인 모성몰두’(primary maternal preoccupation)의 단계를 거친다고 믿었다. 이 단계는 곧 태어날 아기에게 어머니가 정서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단계로서, 정서적 몰두는 어머니가 유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포기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출생전후의 이 기간동안 어머니의 정서적 몰두로 유아는 분리됨을 인식하지 않고, 엄마와의 유대를 형성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전능경험을 즐길 수 있다.
• 이 시기 유아는 자신의 욕구에 대한 신호를 보내지 못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유아의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감을 사용해야 한다. 유아와의 동일시를 통해 말이나 신호없이도 유아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동일시는 어머니 자신이 아기였을 때 자기 어머니의 돌봄을 경험했던 것에 기초해 있다. 유아의 생존은 어머니가 그의 행동을 신호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
• 적응은 유아가 전능성을 경험하도록 허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좋은’ 것이면 된다(winnicott,1960a). 초기에 어머니의 적응은 유아가 전능적인 망상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거의 완전한’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적응은 완벽할 수도 없고, 완벽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유아가 현실에 안착하는데 환경적 ‘실패’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환경 어머니-안아주기]
• 어머니가 유아에게 제공하는 모성적 기능은 ‘대상 어머니(object mother)’와 ‘환경 어머니(environmental mother)’로 구분된다.
- 대상 어머니 :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안아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을 통해서 아이의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어머니.
- 환경 어머니 : 유아가 아주 초기부터 ‘자아욕구(ego needs)’를 충족시켜주는 어머니.
예) 온도와 습도가 적절한 공기, 적절한 자극을 주는 소음의 수준, 압도적이지 않으면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자극,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서적 성장을 방해하는 ‘침범(impingement)'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
• 위니캇은 자아욕구들이 적절히 충족되지 못한 채, 배고픔 같은 ‘본능적’욕구의 충족은 성장으로 인도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위니캇은 절대적 의존단계의 일차적 발달과제들(현실에 대한 인식능력의 형성, 인격화, 통합)은 모두 자아욕구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자아욕구들이 충족되는 한에서만, 본능적 욕구의 충족은 인격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 따라서 자아욕구들은 본능적 욕구들보다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
• 절대적 의존단계에서 환경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는 **‘안아주기(holding)인데, 위니캇(1960a)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안아주기란 용어는 유아를 신체적으로 안아주는 것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환경제공을 의미한다. 이러한 환경의 제공이 있은 다음에야 함께 살기(living with)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이 시기는 유아가 나 아닌 존재로서의 어머니와 함께 사는 시기보다 앞선다. 다시 말해서, 안아주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3차원적 또는 공간적 관계가 점진적으로 첨가되는 과정을 말한다. .... 그것은 경험을 관리하는 것을 포함하는데, 그러한 경험의 관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순전히 생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아의 심리적인 과정의 완성(또는 미완성)에 따른 결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적 과정의 완성은 어머니의 인식과 공감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심리적 영역안에서 발생한다(pp43-44).
충분히 좋은 어머니는 유아의 욕구와 정서상태를 잘 안아주는데, 그런 어머니란 어떤 긴장상태가 발생하더라도 아이를 공감적으로 담아주는 어머니를 말한다.
• 이 단계에서 어머니는 유아가 멸절불안에 노출되지 않도록 유아의 불안을 충분히 ‘안아주고’ 또한 유아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그리고 유아를 침범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한다. 이점에 대해 위니캇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960a)
따라서 안아주는 환경의 주된 기능은 침범을 최소한으로 줄여주는 것이다. 유아는 침범을 개인적인 존재가 멸절되는 것으로 경험한다. 호의적인 상황에서 유아는 존재의 연속성을 확립하는데, 그때 유아는 침범을 전능감의 영역 안으로 끌어 모을 수 있는 심리적 능력을 발달시키기 시작한다(p.47).
따라서 **‘안아주기’의 주된 기능은 환경적 침범으로부터 유아를 충분히 보호해줌으로써 유아가 전능환상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공격성에서 살아남기-대상사용하기]
• ‘환경 어머니’에 의해 ‘안김’을 받아야만 하는 유아의 정서상태안에는 유아의 공격성이 포함되어 있다(Winnicott,1950). 위니캇에 따르면 유아의 성애적 욕구는 자체안에 ‘연민-이전의’ 무자비한 공격성을 처음부터 포함하고 있다. 유아의 본능적 욕구는 어머니의 신체를 ‘공격하지만’, 어머니는 기꺼이 그 공격을 견뎌주고 안아주어야 한다.
• 위니캇은 파괴적 욕동이 대상을 유아의전능성 영역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처음으로 대상을 객관화한다고 믿었다. 유아가 자신의 파괴적 공격에서 살아남은 대상을 경험하는 것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때에만 유아는 ‘주관적 대상(subjective object)으로부터 ’객관적 대상(objective object)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즉, 대상이 파괴적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때에만, 그 대상은 유아에 의해 사용될 수 있다.
• 위니캇에게 있어서, 파괴적 공격을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 유아가 전능성에서 성장해 나오기, 그리고 대상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본래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파괴적 공격을 안아주고 보복하지 않을 수 있는 어머니의 능력은, 유아가 현실을 지각하고 대상을 ‘나 아닌 것’으로 보며, 더욱 성장하기 위해 타인들을 분리된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키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요약]
➡ 절대적 의존단계에서 환경이 맡은 기능을 충분히 잘 수행한다면, 즉, 침범을 막아주고, 유아의 좌절을 감싸줌으로써 멸절불안으로부터 유아를 지켜주고, 공격을 ‘견뎌주고’, 유아의 자아욕구와 원본능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면, 유아는 연속성의 감각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고, 통합, 인격화, 현실인식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킬 것이다.
➡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환경의 실패는 아이에게 어느 정도 현실을 직면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즐거운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안아주기가 ‘좋다면’, 이러한 짧은 현실인식의 순간은 유아의 전능성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 때 자라나는 아이는, 위니캇이 자기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발달과제로 꼽았던, 의존에 대한 인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상대적 의존단계 (6개월~2세)
1. 아이
• 초기 발달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6개월~8개월 된 유아들이 환경을 새롭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Spitz,1965 ; Mahler,1975 ; Stern,1980)
예) 엄마의 얼굴을 탐색하는 것으로 엄마를 만지고, 달래주고,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토닥거리고, 어머에게 젖병을 주기도 하고, 낯을 가리고... : 말러의 ‘부화(haching)기
• 위니캇은 아이가 자신이 외부대상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러한 인식과 함께 유아는 절대적 의존에서 상대적 의존으로 옮겨간다. 이제 유아는 의존대상을 탐구하는데 관심을 갖게 되며, 이 때 유아는 대상과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유아가 ‘나’와 ‘나 아닌 것’의 차이를 처음으로 인식하는 현상은 유아가 대상을 향해 손을 뻗는 새로운 놀이활동에서 엿볼 수 있다.
• 환경과의 분리됨에 대한 이런 인식은 최초의 자기감의 경험인 동시에 최초의 상실의 경험이다. 유아는 이 단계에서 새로운 종류의 불안을 경험하는데 ‘어머니가 살아있다고 믿어지는 시간적 범위를 넘어서까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경우, 유아는 불안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유아가 외부대상에 대해 알고 있음을 알려주는 첫 신호이다’.
➡ 위니캇에게 있어서 상대적 의존단계는 절대적 의존단계의 전능성이 붕괴되고, 현실을 수용하고, 전체 대상을 향한 양가감정을 받아들이게 되는 장기간의 발달과정을 포함한다.
[발달과제]
1) 첫 번째 발달과제 : 유아가 자신이 어머니와 분리된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에 대한 불안, 즉, 자신이 스스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인식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런 불안을 감당하고 현실원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유아는 위니캇이 *중간현상(중간대상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포함하는)이라고 부른 새로운 경험을 이용한다(Winnicott,1951).
※ 중간현상과 중간대상
1. 중간현상 위니캇에게 있어서, 모든 **중간현상의 본질적인 의미는 절대적 의존기의 전능적인 환상세계와 상대적 의존기의 현실세계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 중간현상의 3가지 유형 ① 최초의 중간경험은 ‘내 것(mine)'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닌 것(not mine) 모두를 포함한다. 옹알이(cooing)의 기능이 바로 이런 것이다. 유아는 자신이 소리를 내지만, 그 소리를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듣는다. 그 경험은 안과 밖의 연결을 제공하는 동시에 ’안‘과 ’밖‘을 구별하도록 돕는다. ② 엄지손가락 빨기는 근육의 사용능력을 요하는 또 다른 중간현상이다. 엄지손가락을 사용하는 것은 전능적 통제환상을 제한된 영역에서나마 근육통제로 대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발달적 진전이다. 즉, 엄지손가락 빨기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인 전능환상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현실수용을 향해 내딛는 중요한 발걸음이다. ③ 얼마후, 유아는 최초의 ‘나 아닌(not mine)' 소유물을 만들고, 그것에 강한 애착을 보이게 된다. 이 소유물이 중간대상(transitional object)이다. 보드라운 동물인형, 담요, 장난감, 인형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임을 안다. 첫 소유물의 사용은 전능통제를 근육통제로 대체할 뿐만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을 최초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전능통제 바깥에 있는, 또 자신의 외부에 있는 대상을 사용함으로써, 아이는 현실 수용을 향해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담요조각(또는 다른 어떤 것)이 젖가슴과 같은 부분-대상의 상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의 상징적 가치 못지 않게 그것의 사실성 또한 중요하다. 그것이 젖가슴(또는 어머니)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젖가슴(또는 어머니)을 상징한다는 사실만큼 중요하다.(Winnicott,1951,p233)
2. 중간대상 1) 중간대상은 현실 대상이 아니다. • 중간대상은 강렬하고 강력하며, 개인적인 의미로 흠뻑 물들어 있다. 그런 대상을 발견하는 즉시 아이의 강렬한 불안은 감소된다. 아이는 그것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어머니인양 취급한다. 중간대상의 역설은 그것이 현실적이지도 망상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환각적(illusory)이며, 현실과 무의식적 환상(fantasy)사이에 있는 경험의 중간영역이다(Winnicott,1951,1971).
• 위니캇에 따르면 중간대상은 환각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놀이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아이의 놀이는 현실적인 것에 환각적인 의미를 제공하는데 기초해 있다. 그 대상에 부과하는 의미는 환각이지만, 놀이하는 동안에 그 대상은 실제대상인양 취급된다. 그 의미가 항상 개인적이고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중간현상과 놀이는 항상 창조적이다. 위니캇은 심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뿐만 아니라 아이와 성인의 모든 창조성이 중간현상에 속한 것이며, 이러한 경험의 중간영역은 건강한 삶의 영역이기도 하다.
2) 중간대상은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 이런 이유로 위니캇(1971)은 중간대상은 ‘우울 불안에 대한 방어’로 사용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간대상의 고유한 특성은 어머니나 젖가슴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중간대상은 유아가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현실 세계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전능환상에서 현실로 가고 있음을 가리킨다.
• 중간대상이 충분히 기능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 아이는 그 대상에 대해 완전한 소유권과 통제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강렬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 - 그 자체의 현실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 유아가 과도한 좌절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 통제권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동시에 대상에 대한 통제권이 전능성과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상이 그 자체의 현실을 가지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모든 특성들을 가지고 있을 때, 중간대상은 마치 어머니처럼 기능한다.
3) 중간대상은 의존과 분리에 대한 인식에서 야기된 분리불안과 낯선이 불안을 완화시킨다 • 이는 멸절불안에서 대상상실에 대한 불안으로 옮겨갔음을 가리킨다. 낯선이 불안은 어머니에 대한 표상과, 특별한 애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2) 두 번째 발달과제 : 통합된 시간감각(temporal integration)을 갖는 것
• 이제 유아는 개별적인 경험들만을 인식하기보다는 다양한 경험들을 통합하는 한 사람의 인격으로 자신을 인식한다. 이러한 계속성의 감각은 초기 자기감(sense of self)으로 인도한다.
3) 세 번째 발달과제 : 현실화(realization)
• 경험들이 하나의 단위에 속한 것으로 느껴지면서 ‘인격화(personalization)’의 감각발달하기 시작한다. 이제 아이는 ‘진정한 심리적 실재(lived psychic reality)’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새롭게 ‘나’로 느껴지는 ‘내적인’ 감각은 단지 인지적인 내용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유아는 이제부터 ‘외부’와 구별되는 ‘내부’를 가지며, ‘내적 환경’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 상대적 의존기의 경험은 좀더 ‘나에게’속한 것이 되는데, 이 시기에 ‘나’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 인격화는 ‘현실화(realization)'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분리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유아의 현실감이 발달한다. 유아는 개인적인 현실감을 얻게 되면서, 자기와 타자사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세상은 처음으로 그 자체의 현실을 가진 것으로 경험한다. 이런 인식은 실제 인간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감각과 독립적 현실로서의 세계에 대한 감각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세계와 자기는 모두 ’현실적인 것‘이 된다.
이제 유아는 욕구가 어머니에 의해 충족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욕구충족을 위해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 예)손으로 음식 가리키기...
[자아관계]
• 아이는 자신의 욕구들을 총족시켜주는 한 사람에 대한 일관성 있는 감각을 형성하면서 관계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없더라도 어머니에 대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되면, 아이와 어머니 사이에는 ‘자아관계(ego-relatedness)'가 생겨난다. 이러한 관계방식으로부터 대상이 내재화되고 관계가 형성된다. 유아와 어머니 사이의 ’자아관계‘는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개념을 발달시키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 자아관계의 또 다른 측면은 자아조직의 발달이다.
‘최초의 자아조직은 유아가 멸절의 위협을 겪지만 실제로 그 위협에 압도되지 않고, 그 상태로부터 반복해서 회복될 때 생겨난다. 그런 경험에서 생겨나는 회복의 확신은 좌절을 다룰 수 있는 자아의 능력으로 변형된다. 유아는 자신을 보호해 주는 모성적 환경과의 자아관계를 내재화함으로써 자아조직을 발달시킨다.
• 자아관계의 능력을 발달시키기 위해서, 유아는 **홀로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머니가 곁에 있는 상태에서 홀로 있을 수 있을 때, 유아는 신체적 접촉이나 욕구의 만족 없이도 관계를 경험한다. 환경어머니는 아이에게 자아관계를 제공함으로써 자신을 내재화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위니캇의 견해에서, 일단 어머니가 내재화되면 유아는 어머니 없이 홀로 있을 수 있다. 자아-관계성과 내재화는 서로를 암시하고 촉진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발달하면서 인격의 시간적 통합이 강화된다(Winnicott,1962).
• 이 시점에서 ‘안아주기’는 ‘함께 살기’로 대체된다. 어머니는 의사소통을 필요로 하는 독립적인 존재임을 유아가 인식하는 것은 그가 ‘함께 사는데’ 필요한 관계의 능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안아주기’에서 ‘함께 살기’로의 이동은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상태에서 어머니의 무릎에서 내려와 멀리 기어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어머니에게로 돌아오기도 하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신체적 성장에 있다기보다 유아가 어머니를 독립된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는 인식의 성장에 있다. 유아는 그런 어머니와 소통하며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Winnicott,1960a)
[관심의 단계]
• 통합된 시간감각의 발달과 함께 아이는 경험들을 연결시키기 시작하고, 자신의 흥분한 상태에서 ‘파괴하는’ ‘대상 어머니’가 평온한 상태에서 사랑하는 ‘환경 어머니’와 동일한 사람임을 지각하기 시작한다(Winnicott,1963b). 즉, 유아는 어머니의 신체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는(대상 본능적으로) 상황으로부터 돌보아주는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공격성을 인식하는 상황으로 옮겨간다.
• 위니캇은 클라인처럼 죄책감은 대상통합의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고 보았다(죄책감이 오이디푸스기에 발생한다고 믿었던 프로이드와 다르다.). 자신이 사랑하고 의존하는 사람을 증오하고 그에게 분노했다는 사실에 대한 아이의 인식은 자신이 대상에게 손상을 입혔다는 불안을 낳고, 이런 불안은 불가피하게 죄책감을 야기한다(Winnicott,1954a). 하지만 클라인과 달리, 죄책감의 발달과 변천은 아이의 공격성에 대한 환경의 반응에 따라 타인들에 대한 건강한 관심으로 인도할 수 있고, 우울불안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공격성에 대한 아이의 경험]
• 유아에게 필요한 핵심적인 경험은 자신의 공격으로 인해 어머니가 손상되거나 파괴되지 않았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공격성을 살아남고 수용해준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유아는 자신의 공격성이 지닌 가치를 믿을 수 있으며, 그때 공격성은 ‘성애적 충동(erotic implus)’과 연결될 수 있다. 유아는 공격성을 파괴와 연결시키는 대신, 모성적 대상에 대한 애정과 연결시킨다. ‘만족 추구와 대상추구를 포함하는 성애적 측면과. 근육성애를 사용하는 분노와 증오를 포함하는 공격성 측면을 연결시킨다’(Winnicott,1963b).
• 아이는 이제 손상되거나 파괴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동일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증오를, 그리고 긍정적인 느낌과 부정적인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이때 아이는 타인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죄책감을 느끼지만, 이는 성숙과정을 촉진시키며, 애타심과 윤리적 책임으로 발달한다. 위니캇의 견해에서, 전체대상을 향한 양가감정의 경험은 가족과 공동체에 공헌하고자 하는 욕망의 원천이다.
[양가감정]
• 같은 대상을 향한 사랑과 증오의 경험은 다음의 2가지로 자기의 발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① 어머니는 전체 대상으로 지각되며, 그것은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구별을 더욱 촉진시킨다. 위니캇에 따르면, 양가감정을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유아의 ‘대상관계 경험은 주관적인 요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객관적으로 지각된 ’나-아닌‘ 요소들이 점점 더 증가한다.
② 유아의 자기경험이 한 차원 높아진다.
어머니가 전체 대상이 될 때, ’심리적 실재는 ....유아에게 현실적인 것이 되고, 유아는 자신의 내부에 개인적 풍성함이 존재한다고 느낀다. 이런 개인적 풍성함은 성숙한 양가감정을 나타내는,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느끼는 경험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양가감정이 성숙되고 세련됨으로써 대상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출현한다‘.
[자기감의 발달]
• 사랑하는 대상을 손상시키는 환상은, 유아가 자신을 행위의 주체(agency)로 느끼는 첫 경험이다. 절대적 의존기에서 유아는 자신을 공격자에 의한 무기력한 희생자로 경험한다. 상대적 의존단계에서 유아는 자신을 공격적 행위의 주체로 경험한다. 이 단계의 성공적인 완성은 책임감과 죄책감의 능력을 가져오며, 공격성에 대한 과도한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온다. 행위자라는 감각과 책임감은 처음으로 삶의 사건을 통제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기감으로 발달해 간다.
• 상대적 의존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이는 지속성을 지닌 통합된 자기감을 갖게 되고, 타자와 자신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아이는 이제 전체 대상 수준에서 양가감정을 가질 수 있고, 타인들과의 관계를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다. 발달의 이 지점에 도달한 아이는 오이디푸스기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양가감정의 능력을 갖는다.
2. 어머니
• 상대적 의존기 동안의 발달과정 전체는 ‘충분히 좋은’ 모성적 환경에 달려있다.
‘대상 어머니’와 ‘환경 어머니’ 모두는 아이의 발달하는 자기감에 맞추어 적응해야 한다. 상대적 의존기 동안에 어머니는 아이와 ‘함께 살기’위해 차츰 아이에 대한 몰두에서 벗어나야 한다.
• 위니캇에 따르면, 상대적 의존기 동안의 어머니의 일차적 과제들 증 하나는, 아이가 의사를 표현하도록 허용해주고, 그 표현에 반응해 주는 것이다. 아이는 이제 공감보다는 의사표현에 대한 이해를 통해 더 많이 반응한다. ‘공감에 기초해서 유아의 욕구를 이해하는 것(절대적 의존기의 모성몰두)과, 욕구에 대한 아이의 의사소통에 기초해서 아이의 욕구를 이해하는 것(상대적 의존기)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 유아가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한 후에도 계속 모성적 공감을 사용해서 유아의 전능감을 조장하는 어머니는, 자기감과 현실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유아의 욕구를 희생시킨다. 어머니는 유아가 멀어지는 움직임에 맞추어 유아에 대한 몰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아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전능환상을 포기하기 시작하고, 자기감을 발달시키며, 독립된 존재로서의 타자와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 어머니의 ‘실패’는 ‘아이에게 현실을 가져다 주는’ 결정적인 요소이다(Winnicott,1956a).
어머니가 아이의 욕구를 완전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실패와, 보다 독립적이 되려는 아이자신의 욕구가 오히려 아이에게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어머니는 안전하고 보호된 환경을 제공해주되, 아이가 환경을 탐구하고 조작하며, 방해받지 않고 놀이할 수 있도록 허용해줌으로써, 아이의 자라나는 독립욕구가 필요로 하는 ‘자아지원’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이때 아이는 신체적 접촉의 의존없이 관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정서적 접촉이 제공되는 ‘자아 관계’를 제공해야 한다.
• 아이의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의 발달에서 어머니의 과제는, 아이가 위협받지 않은 채 어머니 옆에서 홀로 있을 수 있도록 자아 관계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런 상황에서 철수하지 않은 채,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잊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어야 한다.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현존하면서 자아 관계를 제공할 때, 그 경험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으로 내재화 될 수 있다.
•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기꺼이 허용해주는 것은 어머니가 제공해주는 ‘자아 제공’의 특정한 측면이다(Winnicott,1960a). 이러한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줄 때, 아이는 심각한 장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러한 환경은 아이에게 ‘존재감’을 허용해주고, 자아가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게 해준다.
독립을 향해 가는 단계
[아이]
• 아이가 자기감각을 통합하고 전체대상을 내재화하면, 아이는 ‘독립을 향해 가는 단계’로 진입할 채비를 마치게 된다. 이 시기의 발달은 오이디푸스기와 겹친다.
• 아이는 ‘내적 환경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홀로 있을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종종 홀로 있기를 추구한다.
• 위니캇은 아이가 이제 삼자관계(three-party relationships)를 감당할 수 있다는 고전적 정신분석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아이는 이제 부모 각자와의 관계를 넘어 부모 자신들만의 배타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모를 향한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향한 양가감정의 해결이 오이디푸스기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보았다.
- 위니캇은 아이의 발달된 자기와 양가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아이로 하여금 ‘각각의 부모 대상과 함께 사는’ 상태에서 ‘부모와 아이, 세 사람 모두가 함께 사는’ 상태로 옮겨가도록 허용하는 요소로 믿었다.
- 아이는 이제 타인들과 함께 관계망을 구성할 수 있게 되며, 가족이나 다른 단위의 일원으로서 타인들과 관계할 수 있게 된다.
[어머니]
• 이 시기에 어머니는 보다 독립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어머니가 아이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아이의 의존욕구를 충족시켜주면서도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성취할 때, 아이는 가족안에서 다 함께 사는 삶을 경험하게 된다.
Ⅱ. 정신병리와 치료
• 정신병리에 대한 위니캇의 견해는 그의 발달이론의 틀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그는 환자와 아기라는 말을 서로 맞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위니캇의 견해에서, 모든 정신병리는 환경이 충분히 촉진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촉진적이지 못한 환경은 유아를 침범하게 되고, 그런 침범에 대한 반응으로 유아의 성숙과정이 정지되는데, 그것이 곧 정신병리이다.
- 절대적 의존기에 발생하는 침범 : 심리구조의 근간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형태의 정서장애 초래
- 상대적 의존기에 발생하는 침범 : 성격병리 초래
- 오이디푸스기에 발생하는 침범 : 신경증 초래
정신병리와 절대적 의존
• 위니캇(1952)은 절대적 의존기에 발생한 침범을 욕구가 처음부터 충족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절대박탈(privation)'이라 불렀고, 주어졌던 것을 도로 빼앗은 것을 의미하는 ’박탈(deprivation)‘은 상대적 의존기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 절대적 의존기 동안에 환경 어머니에 대한 욕구와 대상 어머니에 대한 욕구가 ‘충분히 좋은’ 것으로 경험되지 못하면, 아이는 ‘존재의 연속성(going on being)'을 경험할 수 없다. 모성적 공감이 결여되면, 아이는 전능환상(omnipotent fantasy)을 점진적으로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정상적인 과정을 밟지 못한다. 그리고 유아의 전능환상은 때 이르게 현실에 의해 공격받는다. 아이는 욕구들이 무조건적이고 자동적으로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숙하게 인식하고, 따라서 조숙하게 자기와 대상의 차이를 인식하도록 강요받는다. 이런 조숙한 인식은 통합, 인격화 그리고 현실인식능력의 발달을 저해한다. 절대적 의존기에서 유래하는 모든 형태의 정신병리는 이런 문제에서 발생한다.
[멸절불안과 전능방어]
• 자기와 타자의 차이에 대한 조숙한 인식은 멸절불안, 즉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 또는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은 공포를 낳는다(Winnicott, 1952). '모성실패는 침범에 반응하게 만들고, 이런 반응은 유아의 존재의 연속성을 방해한다. 이런 반응들이 과도해지면 좌절이 아니라 멸절의 위협이 생겨난다. 이것은 죽음이란 용어로 서술되는 불안의 종류보다 더 초기의 원시적 불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Winnicott, 1956).
• 이런 상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방어되어야 하며, 이때 유아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는 전능환상이다. 따라서 유아는 전능환상을 사용해서 멸절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Winnicott, 1952). 그러나 문제는 이런 환상들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차츰 포기되지 못하는 데 있다. 전능환상에 사로잡힌 유아는 자신의 사적 세계를 현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기위해 자신을 강력하게 보호한다. 실제로 현실의 침입에 대한 위협이 느껴질 경우, 아이의 전능환상에 따라 재해석되거나 방어적으로 처리된다.
• 유아적 전능성(infantile omnipotence)에 의한 현실왜곡이 정신증을 발달시키는 기원이라는 것이 위니캇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정신증을 발달시키는 기질적 요소의 관련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침범이 멸절불안을 만들어내고, 전능방어를 야기함으로써 정신증의 발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전능방어에 대한 고착된 자아는 통합을 성취할 수 없으며, 실제로 정신에너지가 전능방어를 통해 자신을 보호한데 집중되기 때문에 모든 발달적 과제가 손상을 입는다. 즉, ‘정신에너지가 인격의 핵이 아니라 껍질에 집중되는’일이 발생한다(Winnicott, 1960a).
• 모든 긴장상태들이 멸절불안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좌절과 실망은 부인되기 쉽고, 인격이 마술적 사고수준에서 고착되기 때문에, 전능환상의 수준에서 재해석된다. 따라서 아이는 현실에서 더 멀어지고 정신증 발병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 사례1) X양의 사례(Winnicott, 1963d) p.230
- 분열성환자, 치료회기동안 무릎덮개를 사용하는 습관
- 화요일 면담에 무릎덮개 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거의 말 안함
그녀와 위니캇 모두 불안해하지 않고, 아무일 없이 끝남.
- 수요일 면담이 끝날 무렵, 그녀는 ‘화요일 면담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분석을 가로막고 있었던 난관을 깨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함.
- 이전 분석가는 말없이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경험 때문에 처음에는 화요일 경험이 실패라 느꼈지만, ‘분석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잃어버린 감정 을 되찾을 것이고, 심한 고통을 겪을 것임을 알았지만, 화요일 시간이 만족스러웠고, 감사했다’고 말함.
➡ X양은 분석가가 듣지 않고도 그녀의 공포를 알아주길 바랬음 → 환자가 위니캇에게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해 받았다고 느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전능성을 ‘떠나보낼’ 수 있었고, 미약한 자기감을 치료자에게 맡길 수 있었으며, 진정한 자기감을 발달시키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능방어가 포기되자, 환자는 밑에 숨어있던 멸절불안을 경험할 수 있었다.
➡ 위니캇 : X양같은 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석가가 ‘환자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환자들이 항상 알고 있는 바로 그것을 분석가가 알아차리고 말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 위니캇은 ‘탈인격화(depersonalization)와 ’탈현실화(derealization)' 상태에 대해서도 유사한 분석을 적용했다. 위니캇은 이 두 상태 모두가 절대적 의존기의 침범에 기인한 것이며(Winnicott, 1962), 근저의 인격화의 결여 또는 발달되지 못한 현실감의 문제가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간주했다.
- ‘탈인격화’ 에피소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경우(정상인이든 신경증환자든)
: 자신이 ‘진정한 심리적 실재(lived psychic reality)'를 갖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고, 경험을 진정으로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
- ’탈현실화‘경험
: 자기가 현실에 대해 느끼는 근저의 불확실성이 표면으로 떠오른 것
➡ 비록 인격이 비교적 건강해 보일지라도, 이 두 상태 모두 절대적 의존기의 침범으로 인한 손상된 자기발달의 결과이다.
• 전능방어가 모두 정신증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침범의 심각성에 따라 병리의 발생가능성이 다르다. 자기가 전혀 통합되어 있지 않을 경우, 정신증 발생가능성이 크다.
• 경계선 인격장애와 자기애적 인격장애는 전능방어수준에서 발달이 정지된, 절대적 의존기에 발생한 외상개념과 잘 들어맞는다.
- 이 수준의 환자들은 타인이나 치료자가 자신의 전능세계를 반영해 주고. 자신의 모든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켜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환자들의 요구는 모두 절대적 의존기의 침범으로 인해 발생한 전능성의 표현이다.
- 또한 타인을 독립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상에 대해 연민을 느낄 수 없다. 자신들의 분노가 타인을 해칠 수 있음을 알지 못하고,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치료자의 역할]
• 치료자의 역할은 치료상황 안에서 유아기에 충족되지 못했던 환자의 전능적 욕구를 가능한 한 많이 충족시켜주는 것이다(Winnicott, 1954).
- 치료자는 환자자신이 의사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하더라고, 환자의 행동을 의사소통으로 이해해야 한다.
- 치료자는 충분히 좋은 어머니가 표현되지 않은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아이와 동일시하듯이, 환자와 동일시해야 한다.
• 아이의 망상적 전능세계가 너무 이른 시기에 방해를 받아 정신병리가 생긴 것으로 보기 때문에, 치료자는 가능한 한 환자에게 전능한 세계로 돌아갈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아기로서 마땅히 경험해야 했던 것, 즉 인식할 필요없이 의존하고, 의사소통할 필요없이 욕구들이 충족되는 마술적이고 전능적인 상태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욕구에 대한 치료자의 만감성과 충족시켜주려는 노력이 환자를 성숙과정과 자아발달이 정지된 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한다.
‣ 사례2) 심각하게 퇴행하지는 않았지만, 순간적인 철수상태로 빠져드는 성향이 있는 분열성적인 우울증환자
- 환자는 한 회기에서 몸을 웅크린 채 카우치 너머로 굴러 떨어지는 환상을 경험.
- 몇 주 후, 환자는 위니캇에게 조언을 구했으나 위니캇이 응하지 않자, 환자는 철수했고, 몸을 웅크리고 싶다고 느낌.
- 위니캇은 환자가 여기저기 굴러 떨어지고 몸을 웅크리는 것은, 떨어져도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는 ‘매개물(medium)'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라고 해석.
- 그러자 곧 환자는 방패를 던져버리는 꿈을 꾸었고, 위니캇은 그 꿈이 이제 방어가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 그리고 이 방어가 퇴행의 순간에 환자에게 필요했던 매개물이었다고 말해줌.
- 이후 상당한 치료적 진전
- 위니캇은 몸을 웅크린 채 기댈 수 있는 품에 대한 환자의 욕구를 이해하고 ‘분석적 품’을 제공한 것이다.
➡ 일반적으로 퇴행하지 않는 환자들은 절대적 의존기에 고착되어 있는 자기의 원시적 부분으로 되돌아가는 퇴행의 순간이 필요하다는 위니캇의 견해를 보여준다. 이 환자는 양가감정과 삶의 현실상황에 직면하기 위해 인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존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매개물’ 즉 웅크리고 있을 수 있는 ‘품’에 대한 환자의 욕구를 이해해주는 것을 통해서, 위니캇은 상대적 의존으로 나아가기 위해 절대적 의존으로 잠시 되돌아가려는 환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 위니캇은(1959) 심리치료란 ‘명석한’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견해를 포기하고, 환자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들을 채워주는 것이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치료자의 역할은 각 환자의 발달이 정지된 시점을 평가하고, 그 정지된 욕구에 적응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에 관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적응의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으나, 전오이디푸스적 장애일 경우 언어는 종종 그 과제에 적합하지 않다.
‣ 사례3) 세상에 잘 적응하는 것으로 보이는, 호감이 가는 47세의 여자 환자
- 그러나 환자는 자신의 삶이 불만족스러웠고, 자신과 접촉하지 못한 채 살고 있음
- 위니캇이 서술한 부분(책p235): ‘나는 퇴행적 경향을 촉진시켰고, 그것이 어디로 이끌던지 그대로 따라가게 했다. 결국 퇴행은 한계에 도달했고, 그 이후로는 거짓자기의 활동대신에 참자기의 활동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와 함께 한 2년간의 분석과정에서 그 환자는 확실히 출생 이전의 초기 단계로 반복해서 퇴행하는 과정을 거쳤다’.
- 위니캇과 만나기 전의 분석에서 환자는 돌발적으로 카우치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이 행동을 위니캇은 출생과정을 재경험하려는 환자의 무의식적 욕구의 표현으로 해석.
- 환자는 위니캇과의 치료에서 출생경험을 반복해서 재경험을 했으며, 자신의 머리가 부숴지는 불안을 경험했다. 환자는 부숴버리는 방어기제를 사용하여 머리를 파괴하는 환상을 통해 불안을 처리하고자 했고, 결국 멸절불안을 직면해야만 했다.
환자는 ‘알지 못함(a not knowing)'의 상태에 도달했고, 자신의 ’알지 못함‘을 수용하는 것은 환자에게 커다란 안도감을 주었다.
➡ 이 사례는 보통 잘 기능하는 것으로 보이는 환자의 근저에 놓여있는, 절대적 의존기로의 퇴행욕구를 보여주며, 이런 욕구에 ‘적극적으로 적응’해주는 사람으로서의 분석가의 역할을 보여준다. 환자가 카우치에서 떨어진 것을 출생과정을 재경험하고 싶은 욕구로 이해했고, 위니캇은 환자가 출생과정을 재경험하도록 도와 환자의 피상적인 현실적응을 사용해 방어해오던 멸절불안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왔다.
• 치료과정의 열쇠는 환자가 분석가에게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것’(즉, 절대적 의존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환자는 진정한 자기감을 형성할 수 있다. 해석을 제공하는 것보다 환자의 의존욕구를 관리하는 것이 분석가의 역할이라고 위니캇은 개념화했다. 분석가는 절대적 의존상태와 멸절불안의 상태로 퇴행하려는 환자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환자의 욕구에 적응해주는 사람이다.
‣ 사례4) 관리(management)개념을 사용한 마가렛 리틀의 사례
- 자신도 분석가인 리틀
- 첫 회기에 리틀은 담요를 덮어쓰고 웅크린 자세로 조용히 누웠있었음.
위니캇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끝날 즈음에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내게 마음을 닫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라고 말함
- 몇 주후 리틀은 공포에 질려 경련을 일으켰는데, 그때 위니캇은 그녀가 출생을 재경험하고 있다고 말해주었고, 경련이 지나갈 때까지 자신에게 매달리도록 허용.
- 여러회기 동안 리틀은 담요를 뒤집어 쓴채 무기력하게 있었고, 그때마다 위니캇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줌.
- 리틀은 위니캇이 항상 ‘안아주었고’,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의 삶의 관리를 포함해서 모든 책임을 맡아주었다고 서술함
(위니캇의 휴가동안 리틀이 잘 견딜지 걱정되어 리틀모르게 친구에게 부탁하여 리틀을 스위스로 초대함. 또 다른 경우는 분석회기에 나올 수 없는 기간에는 리틀의 집으로 찾아가기까지 함.)
➡환자의 돌봄을 전체적으로 관리해줌으로써 절대적 의존상태에 대한 환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위니캇은 절대적 의존기의 유아를 돌보는 ‘충분히 좋은’어머니처럼 기능했다. 리틀이 스스로 더 많은 것을 하기 시작하자, 유아가 상대적 의존기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가 그런 것처럼 차츰 그녀에 대한 ‘적응에서 벗어났다’.
[해석]
• 위니캇(1963c)은 분석가가 환자의 필요에 적응해주는 한에서만 해석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믿었다.
‣ 사례5) 해석과 관련한 한 여성의 사례
- 위니캇이 휴가를 떠난다고 말하자, 환자는 자신의 분석횟수를 1회→5회로 늘리기를 원함.
- 휴가에 대한 언급이 있기 전에 꾼 꿈 : 연한 껍질을 가진 거북이가 죽임을 당하는 꿈을 꿈. 이 꿈은 그녀가 자살 경향성 때문에 치료를 받으러 왔다는 것을 의미.
- 위니캇은 자신의 휴가가 환자의 아동기의 외상적 사건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이해함.
- 위니캇은 “환자는 내가 그녀를 안아주고 있다가 어떤 다른 문제에 몰두하자, 자신이 ‘멸절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때 위니캇은 환자에게 자살충동은 취약하고 의존적인 느낌과 연관된 멸절 공포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함. 그리고 환자의 질병이 자살충동을 신체화한 것이라고 지적. 이 해석은 환자를 무기력감에서 구해주었고, 위니캇은 휴가를 떠날 수 있었음.
• 위니캇은 해석의 효율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환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적절한 순간에 주어지는 해석은 신뢰할 만한 적응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례에서 환자가 나의 부재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자신이 이제는 멸절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좀 더 긍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녀 자신이 나의 관심을 받는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더 지나 보다 완전한 의존상황이 발생한다면, 언어적 해석은 충분하지 않건 소용없을 수도 있다.
• 위니캇에게 있어 해석의 가치는 아동기 욕구, 즉 의존관계안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에 있다.
[치료자의 실패에 대하여]
1) 위니캇은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적응이 결코 완벽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치료자의 실패 또한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았다.
• 어머니의 실패가 아이를 망상적 전능세계에서 이끌어내어 현실감을 갖도록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치료자의 적응실패 역시, 환자로 하여금 치료자가 자신의 전능통제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잠시나마 알게 한다.(Winnicott, 1963b). 치료자의 한계를 환자가 인식하는 방식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현실을 가져주는 방식’과 같다.
-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너무 많은 양의 현실이 너무 빨리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패가 외상이 될 정도로 심각하지만 않다면, 적응과 실패가 반복되는 치료과정은 환자로 하여금 시간감각을 발달시키고 경험의 연속성을 성취하도록 돕는다.
➡ 요약하면, 치료자의 역할은 어머니 역할과 같다.
아이 또한 환자의 욕구를 가능한 한 충족시켜주고 나서 적응, 실패 그리고 회복과정을 통해서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현실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환자(아이)를 현실로 인도하는 것이 치료자의 역할이다.
2) 치료의 성공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치료자가 자신의 ‘실패’를 기꺼이 인정하는 것이다. 치료자의 실패로 인해 혼란에 빠진 환자는 현실감으로 가져오지 못한 전능환상의 잔여물을 얼마쯤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실패를 인식하는 것은 치료에 필수적이다.
• 치료자가 실패를 기꺼이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며, 한 사람으로서의 치료자의 현실을 환자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 순간에 치료자는 환자의 유아적 전능환상을 깨뜨릴 수 있다. 유아가 실패와 좌절을 통해 점진적으로 현실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자 또한 치료자의 실패와 그 실패를 치료자가 현실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을 통해 점진적으로 ‘현실로 나오게’ 된다.
[주물애착(fetishism)]
• 위니캇(1951)은 주물애착이 절대적 의존기에 그 기원이 있다고 믿었다. 물건에 대한 그런 애착은 방어들로 둘러싸인 정신증(encapsulated psychosis)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현실에 대한 부인에 기초해 있다고 보았다. 위니캇은 중간대상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아이와 달리, 주물애착자는 주물대상(fetishistic object)이 자신이 갈망하는 대상이라고 믿는다.
• 주물애착의 기원은 유아가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그를 망상세계로부터 현실세계로 나가도록 강요하는 침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조숙한 현실인식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욕구가 그 자체로서 만족을 가져다주는, 즉 마술적 소망이 충족되는 ‘전능영역’안에서 주물대상이 만들어진다.
• 주물대상은 중간대상과 달리 전능통제에서 제한된 통제로 옮겨가는 과정을 돕지 못하고, 아이(환자)를 전능통제의 궤도안에 머무르게 한다. 주물대상은 욕망을 항상 마술적으로 만족시켜주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주물대상은 외부에 있는 것으로 경험도지 않는다. 그것은 ‘중간대상 이전의 것’이며, 따라서 주물대상에 대한 애착은 환각적인(illusional)것과는 달리 망상적(delusional)이다.
• 주물애착의 치료는 절대적 의존기 동안에 발생한 다른 증상의 치료와 동일한 원칙을 따른다.
[거짓자기]
• 절대적 이존기의 침범에 따른 결과 중 가장 경미한 것은 ‘거짓자기(false self)의 형성과 관련된 자아의 왜곡’이다(Winnicott, 1960b). 침범이 과도하게 심각하지 않은 결과 자기의 통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면, 아이는 환경에 순응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방어는 환경과의 접촉에서 철수한 ‘참자기’를 보호해 주는 동시에, 아이에게서 살아있다는 감각(sense lf aliveness)을 몰수한다.
• 피상적 인격은 정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세상은 그를 진짜 인격으로 간주하기 쉽다. 그의 주된 감정은 지루함, 산만함, 그리고 공허함이다. 이런 상태는 내적경험과의 연결이 결여된 데서 온 결과이다.
• 위니캇에게 진정성은 참자기가 지배하는 건강한 인격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진정성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자아가 왜곡되었음을 말해준다. 인격구조가 방어적 반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환경과의 진정한 접촉을 차단한 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 겉으로는 정상적인 적응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47세 여성(=사례3)
- 참자기와 거짓자기의 분열의 예
- 환자의 인격과 삶은 지적 기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음 : 그녀는 자신의 다른 부분들과 차단된 채 머릿속에서만 살아온 결과 자기감을 가질 수 없었고, 그런상태는 절대적 의존에 대한 그녀의 퇴행적 욕구를 이해해줄 때까지 계속 됨
- 위니캇의 도움으로 멸절공포를 극복하고, 자신의 욕구의 한계 수용하게 됨.
- 자신의 참자기에 도달했고, 처음으로 자신과 연결됨을 느낌.
• 위니캇은 거짓자기 인격구조는 정신분석가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마치 참자기인양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의 경우, 치료적 진전을 위해서는 치료자가 먼저 그들의 ‘존재하지 않음(nonexistence)'을 인식해야만 했다. 이런 환자들은 자신의 존재하지 않음이 인식될 때에만 비로소 누군가와 의사소통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시점에서야 분석은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있다.
‣ 사례6) 위니캇은 장기간 다른 분석가에게 분석 받았던 한 남자사례를 보고했다.
그의 분석작업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분명히 말했을 때에야 진정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그동안 그의 분석작업은 그가 거짓으로 존재했는데도, 그가 존재한다는 가정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몇 년에 걸친 모든 작업이 공허한 것이었다. 내가 그의 존재하지 않음에 대해 말 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누군가와 진정으로 의사소통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유아기에 숨어버린 그의 참자기가 이제 안전하게 분석가와 의사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례는 참자기 개념이 정신분석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 진짜 같지 않은 감정 그 자체가 바로 분석의 중심적인 이슈이며, 이 때 분석가의 과제는 참자기가 출현할 때까지 거짓자기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방어에 대한 해석은 거짓자기의 밑바닥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한에서만 유용성을 갖는다. 만약 해석이 거짓자기를 진짜 인양 취급한다면, 그것은 치료를 망칠 수 있다. 이때 분석가의 과제는, 위니캇이 그의 사례에서 환자의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을 통해서 그랬듯이, 환자의 참자기와 접촉한는 것이다.
정신병리와 상대적 의존
• 상대적 의존기의 유아는 어느정도 내재화를 성취했기 때문에 절대적 의존기 동안에 침범을 ‘절대박탈(privation)’로 경험한 것과 달리, 획득한 것을 다시 잃어버리는 ‘박탈(deprivation)’로 경험한다.
• 위니캇에 따르면 상대적 의존기의 어느 순간까지 어머니의 돌봄이 충분히 좋았다가 그후에 상당한 실패가 발생한다면 그리고 그 실패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아이는 상실한 것을 다시 얻으려는 노력은 인격장애와 경계선 사례의 다양한 증상들로 나타난다.
[훔치는 행동]
• 한 가지 전형적인 반응이 물건을 훔치는 행동인데, 이것은 모성적 박탈을 다른 어떤 물건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니캇은 상실한 어머니를 세상으로부터 되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해했다. 훔치는 행동은 한 때 소유했다가 박탈당한 것을 되찾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위니캇은 훔치는 행동을 긍정적인 지표라고 생각했다.
- 위니캇은 물건을 훔치는 8세 된 소년의 사례에서 그의 훔치는 행동이 어머니가 동생을 임신하기 전에 그가 경험했던 ‘좋은 어머니’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을 때, 그런 행동이 중지되었다.
- 경우에 따라 치료자의 해석을 넘어 박탈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시트를 난도질하고 훔치는 행동외에도 다른 심각한 말썽을 일으키던 13세 소년의 사례에서, 위니캇은 소년이 집에서 ‘쉬면서 돌봄을 받게’ 해주었고, 그 결과 그는 퇴행기간을 거쳐서 자발적으로 병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독]
• 어떤 환자들은 성적 문란, 과식, 마약 또는 알콜 중독 등의 직접적인 신체적 만족을 통해 상실한 대상을 재발견하고자 시도하기도 한다(Winnicott, 1951). 이런 중독현상은 추구되는 대상이 어머니를 나타내는 동시에 어머니가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중간현상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이의 중간대상과 달리, 중독은 박탈에 대한 퇴행적 반응, 즉 박탈이전에 어머니와 가졌던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결코 자연적으로 포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중독은 발달과정을 고착시키는 경향이 있다.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
• 어떤 아기들은 절대적 의존기에 ‘절대적인’ 적응으로 상대적 의존기에도 대상 본능적 흥분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이런 유아는 계속적인 접촉 욕구에 매달리게 되고, 항상 관계안에 있어야 하며, 따라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한다(Winnicott, 1958). 유아는 어머니와 있는 동안에는 생생하고 전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진정된 심리적 실재’를 갖고 있지만, 어머니가 부재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상실하고 만다.
- 이 수준에서 고착된 환자들은 외로움을 느끼며, 삶과 현실이 느낌을 복원하기 위해 신체적 접촉을 필사적으로 추구한다. 그들은 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환자들은 과도한 의존욕구나 성적 욕구로 인해 타인들에게 중독된다.
• 홀로 있지 못하는 문제는 어머니가 곁에 있으면서 아이를 ‘홀로 있을 수’ 있도록 허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런 환자들은 아기시절에 어머니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 치료자와 경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치료자가 곁에 있는 동안에 홀로 있는 경험을 해야 한다(Winnicott, 1958).
이때 치료자의 역할은 혼자있고 싶어하는 환자의 욕구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치료자의 침묵은 신체적 접촉없이 환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제공하며, 그 결과 환자는 치료자를 좋은 대상으로 내재화 할 수 있다.
‣ 사례7)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한 여성환자의 치료(p246~247)
- 주 5회 분석을 6년간 받은 후, 자신이 보다 긴 시간의 회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음.
- 위니캇은 일주일에 한번씩 3시간짜리 면담을 했고, 나중에는 2시간으로 줄임
- 한 회기에서 환자는 30분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았다가 바닥에 앉기도 하고, 사무실 주변을 걸어다닌 후 “나는 내가 될 수 없어요. 나는 진정으로 보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내안에는 쓰레기와 갈등만이 있어요”라고 말함.
- 약 1시간 후 쿠션을 베고 누워 꿈 이야기를 함.(한 소녀가 아무런 진전이 없는 그림들을 가지고 왔다고 말함)
- 그 후 30분 동안 말이 없음. 그러다가 “구름처럼 둥둥 떠있는 존재인 것 같다”고 말함.
- 그리고 자신은 기대에 순응함으로써 자신의 중요성을 느낀다고 말했고, 그때 그녀는 갑자기 놀라워하며 한 소녀가 자신에게 우편엽서를 보낸 것이 생각난다고 말함.
- 위니캇은 그 순간에 “그 소녀에게는 당신이 중요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녀에게나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군요”라고 말함. 환자는 자신이 하루 종일 위니캇과 접촉하지 않은 채 혼자 지냈다고 말함.
- 2시간 후 환자는 처음으로 ‘위니캇 자신과 함께 방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환자는 자신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위니캇이 알아주어서 기쁘다고 말했음.
- 위니캇은 그녀의 말들을 연결짓기 시작했고, 그녀가 한 말을 반영해주기 시작. 어느 한 시점에서 환자는 위니캇을 방해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는데, 이는 위니캇의 존재를 수용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한 것.
➡ 중요한 점은 위니캇이 환자 곁에 있어주면서 환자로 하여금 홀로 있을 수 있도록 기꺼이 허용해주었다는 점이다, 환자에게 말이나 질문을 하지 않고, 환자가 그와 접촉을 시도할 때까지 홀로 있게 허용해 주었다.
위니캇이 수행한 과제는 여러 순간들을 연결시키고, 그것들을 그녀에게 되돌려주는 것을 통해서, 치료상황을 ‘안아주는 것’이었다. 환자의 자기의 파편들을 응집된 형태로 되돌려줌으로써, 자기를 통합시켜주는 기능을 수행했다.
• 위니캇은 침묵이 환자의 발달단계와 치료단계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믿었다.
강렬한 정서로 인해 불안해하는 신경증 환자의 침묵은 저항이기 쉽다.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키려고 애쓰는 전오이디푸스 환자의 침묵은 자아관계의 경험을 통해 자기의 창조를 위해 애쓰는 발달적 노력이기 쉽다. 이런 욕구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치료자의 책임임을 밝힌 것은 위니캇의 또 하나의 공헌으로 보인다.
[경계선 인격장애]
• 위니캇은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들이 보이는 강력한 의존적 유대와 행동화를 세상 안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려는 시도로 보았으며, 상실한 모성적 유대를 되찾기 위해 사람이나 물건을 중간대상으로 사용하려는 노력으로 보았다.
• 환자가 보이는 강력한 기대와 요구는 이전에 소유했다가 상실한 대상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치료적 과제는 만족을 주는 대상에 대한 환자의 갈망에 가능한 한 적응해주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치료자는 환자를 위한 중간대상(모성적 만족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다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 포기되는)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위니캇은 이런 적응이야말로 묶여있는 성숙과정을 풀어주는 요소라고 보았다.
• 경계선 환자는 융합과 분리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유아기의 ‘중간영역’에서 살고 있다. 융합상태에 있는 동안 어머니(치료자)는 유아(환자)가 분리에 대한 욕구를 느끼는 순간에 아무말이 없더라고 그 욕구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모성적 공감은 유아(환자)에게 분리욕구를 질식시키는 공격으로 느껴진다.
따라서 치료자에 대한 환자의 ‘요구들’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고, 빠른 변동을 보이며, 특정 순간에 어떤 욕구가 표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때 치료자는 침범받는다고 느끼고 혼돈스럽고 낙심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느끼고, 마지막에는 환자에 대한 격노를 폭발시키게 된다. 치료자는 환자의 이런 행동들이 중간단계에서 발달과정이 정지된 데 따른 결과임을 이해하고, 중단된 성숙과정을 재개할 수 있도록 중간대상에 대한 환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과제를 갖는다.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치료자가 환자행동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치료기회의 상실을 의미할 뿐아니라, 구조신호를 보내는 환자의 필사적인 노력을 헛되게 만든다는 점에서 치료적이지 못하다. 치료자는 마치 위안이 필요할 때 항상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다른 때는 잊혀지는 중간대상처럼, 어떤 때는 융합된 대상으로 그리고 어떤 때는 분리된 대상으로 자신을 환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대상의 사용 - 공간의 사용]
• 위니캇은 경계선 사례 및 다른 전오이디푸스사례들에서 해석에 많은 비중을 두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치료자를 대상으로 ‘사용하는’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절대적 의존기 동안의 유아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고, 대상사용을 하지 못한다. 중간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대상을 전능성의 영역으로부터 ‘축출(expels)할 수 있을 때, 아이는 비로소 ’대상사용‘을 배운다. 치료자는 중간대상으로 사용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할 때는 존재하고, 필요치 않을 때는 잊혀질 수 있어야 한다.
• 환자가 이런 식으로 치료자를 사용할 수 있으려면, 치료공간은 형태없는(formless)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환자가 치료공간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치료자는 자신이 미리 생각하고 있는 틀을 환자에게 강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만 환자는 텅비어있는 공간으로 퇴행하여 아이가 중간대상을 창조해내듯이, 개인적인 의미를 지닌 새로운 대상을 창조해낼 수 있다.
• 위니캇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창조성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현실에게 부여할 수 있으며, 자기를 형성하는 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창조성은 모든 효과적인 분석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한다. 정상적인 발달에서 중간대상은 이런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분석치료에서 분석공간은 개인적인 의미창조를 촉진시킴으로써 중간대상과 유사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 이 원리는 중간단계에서 정서발달이 정지된 경계선환자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 환자에게는 내재화된 모성이미지가 없다. 전이의 주된 문제는 모성이미지의 부재에 있다. 따라서 부재공간(absent space)에서 새로운 대상을 창조하는 것은 성공적 치료를 위한 주된 요소이다.
• 위니캇의 기본적인 치료원리들 중 하나는, 환자 스스로가 해석을 한다면, 해석의 치료효과는 크게 향상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해석과정에서 환자들은 자기의 창조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위니캇(1971)은 자기의 창조를 위한 치료공간의 사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탐색은 산만하고 형태없이 기능하는 것에서, 또는 중립적인 영역안에서 발생하는 초기 형태의 놀이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만, 즉 통합되지 않은 인격상태(unintegrated state of the personality)에서만, 우리는 창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출현할 수 있다. 이 순간에 출현하는 그것이(창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반영된다면 그리고 반영될 때만, 그것은 개인 인격의 부분으로 조직화되며, 궁극적으로는 한 개인의 존재로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가정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치료과정이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암시를 제공해 준다 : 치료과정에서 치료자는 환자에게 형태없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창조적 충동들 및 신체운동과 감각을 가지고 놀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인간이 경험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런 놀이에 달려 있다. (♡.♡~)
[역전이]
• 이런 환자들의 치료에서, 역전이는 치료자를 중간대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환자의 욕구로 인해 특별히 어려운 문제가 된다. 위니캇은(1960c) 역전이를 치료자의 관찰적 입장이 방해받은 상태라고 정의했다. 환자가 치료자에게 중간대상을 기능할 것을 기대하고 그 기대에 부응해 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치료자는 역전이 긴장을 느끼게 된다. 이때 치료작업의 주된 요소는 이런 힘든 역전이 감정을 관리하는 것이다.
• 위니캇에 따르면 우선 치료자는 역전이 감정(분노와 붕괴, 위협받는 느낌~사랑과 애정)을 느껴야 한다. 위험은 역전이 감정을 갖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억압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억압은 역전이 행동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런 강렬한 감정을 담아내는 것은 어머니가 유아의 고통을 감당해줄 때 느끼는 것만큼이나 치료자를 힘들게 한다. 아기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머니가 아기의 고통을 견뎌주는 것처럼, 치료자는 환자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환자의 개인적 감정을 흡수해주고 견뎌주어야 한다.
• 위니캇은 하나의 특정한 역전이를 강조하는데, 치료자가 자신들을 증오할 것을 요구하는 환자들의 사례에서 발견된다.(Winnicott, 1947). 정신증 사례와 경계선 사례에서 치료자는 치료과정 중에 환자를 어느 정도 ‘증오’할 수 밖에 없다. 심각한 장애를 가진 환자들의 치료에서 증오심에 대한 명백한 인식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치료자가 느끼는 증오가 환자의 병리의 핵심적인 측면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 예컨대, 위니캇(1947)은 자신의 강박증환자가 몇 년 동안 혐오스런 존재였음을 깨달았다. 그 환자가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었을 때, 위니캇은 비로소 그 환자에 대한 혐오스러움이 환자의 증상의 일부였음을 깨달았다. 위니캇은 이런 유형의 증오를 ‘객관적’ 증오라고 불렀다. 그는 분석가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환자를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공격성]
• 공격성과 사랑을 통합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또한 다양한 성격장애 환자들에서 발견되는 문제이다(Winnicott, 1963a). 상대적 의존기에 발생하는 특정한 침범들은 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공격성을 통합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어머니가 아이의 공격성에 살아남지 못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공격성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공격성과 관련된 미해결된 죄책감이 발생하며, 그 결과 심각한 형태의 방어적 반응들 중 하나가 형성된다.
• 만약 어머니가 공격성에 대해 과도하게 불안해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공격성에 대해 불안해 할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인격 안에 있는 공격적 요소를 거부할 것이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사랑과 분노를 융합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본능의 탈융합(defusion)은 공격성을 전체인격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 위니캇에게 있어서, 대상을 향한 본능적 만족과 흥분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격성의 통합, 즉 두 충동의 ‘융합’이 필요하다. 게다가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건설적인 능력이 ‘공격적 충동’에서 발달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공격성의 부재는 이런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공격성의 억제는 삶에 대한 흥미와 동기의 고갈을 가져오며, 그 결과 충일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의 상실을 가져온다.
• 다양한 방어들이 공격성을 차단하는데, 그 모든 방어들은 인격안에 있는 공격적 요소들을 앗아간다. 위니캇에 있어서, 분열은 우울발안에 대한 방어로, 자신이 사랑하는 의존대상으로부터 공격성을 떼어놓으려는 시도이다. 이런 분열을 유지해야 하는 환자들은 다른 대상들을 향해 공격성을 분출할 수밖에 없으며, 공격 목표물로서의 ‘나쁜 대상들’을 계속해서 찾게 된다. 역으로, 자신들이 의존하고 있는 관계는 갈등 없는 상태로 유지되어야 하며, 그 관계안에 존재하는 어떤 장애도 위협으로 경험한다. 이러한 대상관계형태를 가진 개인들은 항상 적들을 필요로 하는 한편, 그들을 사랑관계(love relationship)는 성애적 충동으로부터 모든 공격성이 제거됨으로 인해 강렬함과 흥분됨을 상실한다.
• 공격성에 대한 보다 경미한 방어는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에서 발견된다. 아이는 이 방어를 사용해서 모든 공격성을 정반대의 것으로 바꿈으로써, 대상에 대한 공격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삶의 목표와 포부를 위해 공격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개인은 모든 관계를 항상 긍정적인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갈등을 부인해야 하고, 따라서 현실의 많은 부분을 부인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자기-보호를 위해 공격적 반응을 필요로 할 때, 그런 개인은 금지하고, 억제하는 성격특성으로 인해 공격성을 사용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전형적으로 수동적인 성격이나 부적절감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수동성과 부적절감은 상대적 의존기 동안에 공격성이 인격으로 통합되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서, 이때 개인의 건설적인 목표추구는 심각하게 손상된다고 위니캇은 믿었다(1950).
‣ 자주 파괴적인 행동을 폭발시켰던 환자의 사례(Winnicott, 1963b)
- 그는 분석시간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분석이 세상을 위해 가치있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함
- 이 회기 동안 환자는 자신이 좋은 분석가로서의 위니캇에 대한 시기심을 갖고 있음을 인식하게 됨. 또한 위니캇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고 말함.
- 위니캇이 환자의 파괴적 충동과 자신을 좋은 분석가로 보는 환자의 긍정적인 충도을 연결시켜주었을 때, 환자는 동의함. 동시에 분석을 통해 세상에 공헌하고 싶다고 한 말을 위니캇이 파괴적 소망에 대한 방어로 해석하지 않은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고 말함.
- 위니캇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회복충동을 인식하기 전에 먼저 파괴적인 충동과 접촉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시간에 맞게 그리고 자신의 방식대로 파괴적 충동과 접촉해야 했다. 여기에서 그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커다란 기여를 하였으며, 이것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파괴성에 보다 가깝게 접촉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가 말했듯이, 먼저 파괴성과 접촉하지 못한다면, 건설적인 노력은 거짓이며,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만다.
• 위니캇의 견해에서, 파괴적 충동과 건설적인 충동은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공격성과 ‘접촉하지’ 못하는 환자들은 건설적인 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다 ; 그때 삶의 흥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손상된다. 그런 환자들을 위한 치료적 과제는 자신들의 파괴적 충동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 만약 아이가 환상속에서 애정대상에게 입힌 상처를 ‘회복해내지’ 못한다면, 그는 공격적 감정에 대한 죄책감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Winnicott, 1963). 억제된 성격을 가진 환자가 그러하듯이, 우울증 환자는 공격성에 대한 과도한 불안으로 인해 공격성을 건설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죄책감으로 인해 손상을 입은 우울증 환자는 공격성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위니캇은 클라인과 마찬가지로, 우울증 환자들이 자기-증오, 자기-비난에 탐닉하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손상시키려는 무의식적 의도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보았다.
• ‘내향성(introversion)' 역시 상대적 의존기에 공격성을 담아주지 못한 환경의 실패로 인한 퇴행적 반응으로 간주된다(Winnicott, 1950). 이런 방어전략 역시 일종의 분열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 좋음은 내부에 유지되고 모든 나쁨은 외부대상에게 투사된다. 이런 투사의 지속적인 패턴은 공격성을 방어해주고 죄책감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시켜주지만, 세상을 박해자들로 가득 채운다. 그 결과 적대적인 대상들의 세계에 대한 방어로서 철수가 사용된다.
아이는 박해자를 공격함으로써 이런 내향성으로부터 회복을 시도하기도 하는데, 위니캇이 볼 때, 이런 ‘행동화’는 건강한 신호지만, 만약 행동화가 환경에 의해 부정적인 행동으로 오해된다면, 아이는 다시 내향성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이 패턴의 극단적인 형태에서 숨어버린 참자기를 감추기 위한 거짓자기가 생겨난다. 공격성에 대한 갈등은 이처럼 참자기-거짓자기 병리를 낳는다.
• 위니캇(1950)은 자기의 발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공격성이 부인될 경우, 아이는 자신의 삶에서 진정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믿었다. 현실에 대한 느낌을 얻기 위해 아이는 자신의 공격성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추구한다.
• 위니캇은 격노행동안에 자기를 정의하고자 하는(self-defining) 의도가 담겨있다고 보았다. 극도로 공격적인 환자들은 격노행동을 통해서 현실감과 자기감을 성취하고자 한다는 위니캇 이론이 갖는 임상적 함의는, 그런 환자들이 치료상황에서 자신들의 격노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공격성의 표현이 허용되어야 하는 이유는
① 치료환경은 공격성에 부정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어린시절에 돌봄을 맡겼던 사람이 저지른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환자의 공격성의 분출을 가로막는 반응을 한다면, 그것은 최초의 외상을 재연하는 일에 공모하는 것이 된다.
② 환자들은 공격성을 표현하는 것을 통해서 그들 자신에 대한 감각을 얻기 때문이다. 환자들의 공격성에 대한 치료자의 부정적인 반응은 그들의 연약한 자기감을 강탈하는 것이며, 그 결과 자기됨(selfhood)을 성취하려는 더욱 절박한 노력으로 이끈다.
③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그런 표현이 가져올 수 있는 바람직한 결과는 공격성과 성애적 욕동의 융합이기 때문이다. 본래 하나였던 이 두 가지 욕동은 최초의 외상에 대한 반응으로 탈-융합된 것이다.
➡ 위니캇은 과도한 적대감은 공격적 충동을 담아내지 못한 초기 환경의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런 실패로 인해 전체인격으로부터 공격적 충동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라고 간주했다. 따라서 치료자의 과제는 환자의 공격성을 ‘담아주어’ 전체 인격안으로 통합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공격성을 담아주는 것은, ‘충분히 좋은’ 어머니로 행동함으로써 가로막힌 성숙과정을 재개하도록 촉진하는, 치료자 역할의 일부라고 보았다.
• 위니캇은 어디까지 공격적 충동의 표현을 허용한 것일까? 리틀의 사례
- 리틀은 한 회기에서 꽃병을 깨뜨리고 짓밟아버린 행동 → 위니캇은 방을 나갔다가 회기가 끝날 무렵에 돌아오는 것으로 반응
- 리틀이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가 무모하게 차를 몰려할 때 → 위니캇은 회기가 끝날때까지 차열쇠를 맡아둠.
➡ 위니캇은 안정이 보장되는 한계안에서 리틀에게 격노에 찬 공격적 표현을 허용했음을 보여준 것
• 공격충동의 표현을 허용하는 위니캇의 접근은 공격성에 대한 모든 병리적 반응들에 그대로 적용된다. 분열, 반동형성 그리고 우울증에 대한 그의 치료목표는 환경적 실패로 인해 탈융합된 공격적 충동과 성애적 욕망을 다시 ‘융합’시키는 것이다. 건강한 인격안에도 공격적 요소의 잔여물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공격성을 표출하기 위한 대상의 추구는 계속된다. 그러나 그러한 공격적 표현은 ‘적절한 반대’를 추구하기 때문에, 즐거운 것으로 경험된다. 공격성이 온전히 표현될 수 있을 때에만, 공격성은 성애적 욕동과 융합될 수 있고, 인격안으로 통합될 수 있다.
• 상대적 의존기는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가 시작되는 시기라는 점에서, 병리의 또 다른 원천이 될 수 있다. 이 시기에 어머니는 아이에게 자신을 만족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법을 배우고, 아이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조정하는 법을 배운다. 이런 방식으로 어머니는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버리고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다시한번, 인격의 ‘핵심부분’이 ‘껍질부분’에 희생되고, 그 결과로 거짓자기 병리가 발생한다. 아이의 공격성은 이런 거짓자기 증후군의 주된 특성이다.
- 만약 아이가 자신의 공격성이 어머니를 위협한다고 느낀다면, 아이는 어머니의 불안을 달래주기 위해 공격성의 표현을 억제할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어떤 강력한 감정에 의해 위협받는 다면, 아이는 자신의 모든 감정들을 없애기 위해 막 태어난 인격을 묻어버려야 할 것이다. 그 결과 비현실감(a feeling of nonreality)이 발생하고, 삶은 공허한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그런 환자의 치료는 참자기의 발견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
Ⅲ. 요약
• 발달 : 일련의 의존단계들을 거쳐 건강하고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성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과정
• 전오이디푸스적 정신병리 : 절대적 의존상태로부터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 즉 전능세계에서 현실세계로 나가가는 움직임이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정지된 것.
• 치료 : 발달 정지된 지점을 확인하고, 적절한 환경적 반응을 제공해주는 것과 관련
• 전오이디푸스적인 정신병리, 퇴행한 신경증 환자들 : 전오이디프스기에 박탈되었던 발달적 경험들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치료적 분위기를 제공하는 것.
• 위니캇의 정신분석 치료 : 발달과정에서 어머니가 수행하는 역할과 같은 것이며, 그 역할의 본질은 욕구에 적응해주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의 발달 수준에 맞추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듯이, 정신분석 치료자도 환자의 의존수준과 그것과 관련된 발달장애에 맞추어 환자에게 접근해야 한다.
• 해석의 효과는 치료자가 발달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때 가장 클 수 있으며, 신경증환자의 경우에도 빈번히 해석과는 다른 형태의 개입이 필요.
• 위니캇의 사고는 분석과정을 환자가 정신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퇴행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 건트립의 견해와 뚜렷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그 차이는 위니캇은 개별적인 환자들의 특정한 욕구에 맞추어 치료를 조정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건트립의 작업에서 관찰되었던 병리의 균일화를 피할 수 있다는데 있다.
• 위니캇의 사고는 코헛의 자기심리학의 몇몇 특성들을 예견했다.
- 두 사람모두 자기와 대상사이의 관계를 발달의 핵심적 요소로 강조
- 초기발달에서 아이가 대상에게 비현실적 기대를 갖는 경험의 중요성을 인식
- 현실감각의 발달을 환경의 점진적인 실패에 따른 결과로 봄
• 정신분석 치료에 대한 위니캇의 견해는 프란츠 알렉산더가 말하는 ‘교정적 정서경험(corrective emotional experience)과는 다른 것이다.
- 알렉산더 : 인위적으로 특정상황을 만들어 환자에게 치료적이라고 생각되는 경험을 유도
- 위니캇 : 치료과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에 반대함. 치료는 자발적으로 표현된 환자의 욕구에 초점을 맞출 때에만 치료적일 수 있으며, 심리치료의 진수는 드러난 발달욕구를 평가하고, 그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켜줄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있다고 믿었다. ‘거짓자기’ 환자에게 인위적인 장치는 훨씬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기존의 방어들과 잘 맞아 떨어지고 또한 그런 방어들을 위한 버팀목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 위니캇은 다른 어떤 정신분석 이론가들보다도 어머니-유아관계에 기초해서 개입방식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가장 순수한 대상관계적인 이론가이다.
Ⅳ. 비평
[공헌]
• 위니캇의 이론은 발달정지를 강조하는 대상관계이론 중에서 가장 철저하고 상세하며 일관성있는 이론이다. 그가 발달을 의존단계라는 측면에서 개념화한 것은 관찰연구와 경험적 연구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 또한 위니캇이 보고한 임상사례 결과들은 매우 인상적이며, 가장 이해하기 힘든 임상자료에서조차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 것도 그의 공헌 중 하나다.
• 치료전략의 효율성 : 장애가 매우 심한 환자들과 접촉하는 방법을 발견했으며, 많은 분석가에게 유용한 기법적 원리들을 제공해 주었다.
[비판]
• 그러나 위니캇의 사고 안에서 몇몇 개념적 모호성이 존재한다.
① 해석의 역할이 분명하지 않다.
정신분석이 욕구에 적응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 과정이 해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정지된 발달욕구에 적응하는 것을 분석과정으로 보는 위니캇의 견해는 해석의 자리를 아예 없애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② 발달욕구에 대한 적응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치 않다.
상담실에서 발생하는 퇴행기간 동안에 발달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다소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Ⅴ. 위니캇 학파
• 위니캇 추종자들은 위니캇의 업적으로 다음 3가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① 정신분석 이론을 심각한 정서장애 치료에 적용한 것
② 이런 유형의 치료에 정신분석 상황을 어떻게 사용할 지를 밝힌 것
③ 분석과정에서 특히 심각한 병리를 가진 환자와의 분석과정에서 치료자가 담당하는 역할과 역전이가 담당하는 역할을 강조한 것.
• 칸(Khan,1963)의 견해
- 환경에 의한 침범이라는 위니캇의 개념이 정신병리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지적했다.
- 위니캇은 ‘누적된 외상(cumulative trauma)의 개념을 통해 병인론에 결정적인 차원을 추가했으며, 일차적인 모성기능은 자아발달을 방해하는 침범에 대한 보호막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 유아는 현실에 적응할 수 있기전에 전능상태에서 살아가는 기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보호막은 아이가 이런 환각을 누릴 수 있도록 허용한다. 보호막이 기능을 못하면 외상은 누적되어, 아이는 자아가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감당할 수 있기전에 환경을 인식하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 누적된 외상을 가진 아이들은 거짓자기를 형성함으로써 환경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그때 심리적 능력의 발달은 정지되고, 발달정지는 다시 상징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가져온다.
- 상징능력을 거의 발달시키지 못한 채 거짓자기조직에 의해 방어되고 있는 발달 정지된 정신을 경계선 인격장애로 부름.
- 적절한 치료접근은 환자들이 보이는 행동화를 그들의 유일한 의사소통수단으로 인식하고 관용해 주는 것이다. 분석가는 보조자아로 기능하면서, 환자가 분석가를 새로운 대상으로 내재화할 때까지 분석상황을 ‘안아준다’.
- 일차적인 분석도구는 역전이이며, 분석과의 과제는 환자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 위니캇의 환각개념, 즉 현실과 환상사이의 중간공간개념은 프로이트가 ‘언어에 의한 치료’를 발견함으로써 창조한 정신분석적 공간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상징화 능력을 소유한 환자들은 분석공간을 사용하여 새로운 자기감을 창조할 수 있으며, 이런 높은 수준의 환자들을 위한 치료자의 역할을 그들이 새로운 자기경험을 할 수 있도록 치료자자신을 매개물로 제공하는 것이다.
• 마가렛 리틀의 견해
- 심각한 장애 환자 치료에 위니캇의 통찰을 적용했다.
- 전이신경증과 망상적 전이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를 설명해 냈다.
전이신경증은 상징에 기초한 관계인 반면, 망상적 전이(delusional transference)는 말이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미분화된 상태에 기초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망상적 전이를 만들어내는 경계선 환자들과 정신증환자들은 정신과 신체를 통합시키지 못한 사람들은 신체적 존재(somatic existance)가 언어적 또는 심리적 수준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행동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은 해석을 사용할 수 없으며 현실을 말해줄 필요만을 갖는다.
- 리틀은 환자가 해석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망상적 전이를 용해시키기 위해, 고전적 기법 중에서 2가지를 변형해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① 심각한 장애를 가진 환자들을 위한 치료에서 분석가 안에 불러 일으켜진 감정을 통해 환자의 경험을 의사소통하는 것, 즉 역전이를 사용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믿었다. 환자에 대한 분석가 자신의 반응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데 치료 목표가 있다. 어린시절에 진정으로 비합리적이었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부모였음을 깨닫을 수 있고, 또한 분석가가 어떻게 느끼는 가에 대한 지식은 환자에게 충격을 주어 그를 현실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준다.
② 환자의 망상적 전이를 용해시키기위해 가끔씩 신체적 개입을 사용하는 것이다.
리틀은 ‘현실을 제공’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낄 때면, 보통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접촉하는 방법을 사용하곤 하였다. 이러한 행동의 목적은 환자로 하여금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 리틀의 기법이 효과적일 수 있으려면 분석가가 진정된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자발적인 반응을 환자에게 제공해야만 한다.
- 리틀은 역전이를 분석과정의 핵심적 요소로 보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환자에 대한 분석가의 전체반응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시켰다.
• 앙드레 그린의 견해
- 정신분석적 대상관계이론이 인간의 주체성을 재발견하는데 공헌했다고 지적했다.
- 위니캇이 정신분석이 발달에 몇가지 항구적인 공헌을 하였다고 지적한다.
① 정신분석 이론을 경계선 인격장애에 적용한 것
② 역전이를 치료과정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위치시킨 것
③ 치료적 틀(setting)에 초점을 맞춘 것.
④ 이론적 도식화보다는 환자의 경험을 일차적 관심으로 삼은 것
- 그린에 따르면, 위니캇은 아이의 대상이 ‘주관적 대상’에서 ‘객관적 대상’으로 발달해가는 것이 발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측면이며, 이 과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핵심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 경계선 인격장애나 다른 심각한 인격장애는 주관적인 망상적 대상과 객관적인 현실적 대상 사이의 중간단계에서 발달이 정지된데 따른 병리적 결과이다. 그런 환자를 위한 치료는 새로운 대상의 창조를 위해 ‘분석공간’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발달에서 어머니-아이 관계에서 초기대상들이 창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대상은 치료적 상호작용에서 창조되기 때문이다.
- 치료의 목표는 치료적 상호작용을 통해 분석가가 부재하는 동안에도 환자가 사용할 수 있는 ‘분석적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 경계선 인격장애의 병리는 부재(absence)로 개념화된다. 경계선 인격장애의 특성은 대상표상의 결핍이며, 그 결과로 발생한 공백, 즉 자기발달의 결여이다. 그린에 따르면 그런 환자의 치료는 ‘발견’에 초점을 맞추어져서는 안된다. 그에게는 발견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린은 치료본질이 ‘분석대상’을 창조해내는 것을 통해서 부재가 가능성으로 변형된다고 보았다.
- 그린은 경계선 환자가 정신과 신체의 통합을 성취하지 못한 채 분열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상징사용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리틀의 견해에 동의한다.
• 칸, 리틀, 그린 모두 위니캇의 항구적인 공헌점으로 분석과정에 대한 재개념화를 꼽는다.
- 위니캇은 분석과정을, 새로운 대상을 창조하고, 그 결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함으로써 초기에 발생했던 발달 정지로부터 환자를 해방시켜주는 것으로 재개념화했다.
• 이제 분석은 과거의 지각, 관계패턴, 방어들을 초월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경험이 되었다. 위니캇과 그의 추종자들은 프로이트가 제시했던, 정서적인 거리를 유지한 채 관찰하고 통찰을 제공하는 작업으로서의 치료모델을 두 사람이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모델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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