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 후반부터 루터파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 경건주의(pietism)의 조상은 스페너(Philipp Jacob Spener)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은 본래의 열정을 잃어버리게 되고 신앙은 일상생활과는 별로 상관없는 도덕과 교양의 문제처럼 이해되었다. 복음의 빛이 가리워지면서 끝없는 교리 논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믿음으로 구원 얻으면 되지 행위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런 분위기에 대항해서 신앙생활을 새롭게 해 보려고 하는 복음주의 신자들의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 것이 경건주의의 시작이다.
30년 전쟁이 끝날 무렵이 17세기 말이다. 그 때 독일의 루터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교회의 활동이 복음 중심이기 보다는 국가들의 영주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었고 많은 목회자들은 설교를 통해서 주로 신학적인 논쟁을 벌이고 복음의 생동력은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시의 신자들에게 신앙은 더 이상 루터의 개혁시대처럼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니었다. 종교개혁시대는 복음 자체가 굉장한 권능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가 지도자들의 생각 속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도덕과 신앙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되었다. 정통주의를 내세워 경건 생활의 무관심으로 영적인 침체 현상이 계속 되었다. 이러면서 교회는 세속화 되어가고 신앙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도전으로 교회보다 생활을 강조하며 신앙의 생활화 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경건주의 운동이다. 가장 중요한 교회 지도자들도 시대의 흐름을 따르고 있었으니 목회자들은 예배의 열정보다 형식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앙은 생활과 거리가 멀어졌고 목사는 원고를 읽는 것으로 메시지를 대신하고 신자들은 교회당 아래 또는 윗 층에서 침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이러한 풍조에 대항해서 일어난 것이 스페너의 경건 운동이다.
스페너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철저히 배우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 서재에는 많은 장서들이 있었다. 스페너가 거기서 존아른트의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거기에는 당시 기독교의 무능을 비판하는 글이 있었다. 신학적인 논쟁 자체에만 몰두하거나 능력 없이 교리만 외워서 하는 신앙생활은 빈껍데기와 같다. 신앙과 생활은 절대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생활에 실천해야 한다는 것들의 내용이었다. 이런 책들을 접하면서 신학에 몰두하다가 루터의 글을 만나 매혹되고 결단한 것이 구원은 죽은 후에나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현재 느끼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배운 실천적 신앙은 루터에게서 원동력을 얻게 되었다. 신자는 믿음으로 생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매 순간 느끼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영적 영향을 주는 경건한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이런 순수한 교회 운동을 조국에서도 펼쳐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경건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경험을 실제적인 윤리생활에 나타나게 하는 것을 중요한 가르침으로 삼고 있다. 참 신앙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전통은 생명 없는 교리주의에 대항해 신앙의 실천을 강조한다. 물론 신앙의 실천은 인간의 자연적인 힘으로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이 내 삶의 주인이 될 때 실천적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다.
스페너는 프랑크 푸르트에서 목사가 되었다. 그는 곧 교리 문답적 제도를 갱신하였다.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불만족한 신자들을 자기 집에 초청해서 성경공부와 기도 그리고 예배를 강조하였다. 이런 모임의 목적은 보다 깊고 보다 열정적인 영적 생활을 육성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집회는 경건 집회 혹은 건신단(Collegia Pietatis) 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이런 모임이 지속되면서 그 운동이 스페너에 의해서 경건주의 (Pietism)로 알려지게 되었다.
스페너는 이러한 성공의 결과 때문에 프랑크프르트 대표 목사로 초빙되었다. 그 도시의 12명 이상 되는 고참 목사들을 통괄하면서 큰 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는 여기서도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주일날은 어린이들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치고 시 당국자들에게는 주일날 장사를 못하게 하고 평상시에도 단정한 옷차림을 하도록 법제정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잘 되지 않자 강한 신앙 훈련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일날 대중 설교를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신자가 택함 받은 제사장임을 깨닫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향해 자신의 직분을 행사하도록 그들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경건주의가 강조하는 신앙생활의 실천에 대한 가르침이 나타났다. 이런 훈련은 처음에 그의 집에서 주일과 수요일에 시작되는 미션 홈이었다.
모임은 기도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난주일 강단 메시지를 가지고 포럼을 하였다. 비판하기 위한 포럼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바로하기 위한 힘을 주었다. 모든 대화는 신앙의 도움을 위해서 진행 되었고 대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성경 구절들과 그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 모임이 점점 평신도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주일학교, 교리문답 연구회, 기도회, 성경연구회 등으로 계속 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다가 스페너는 1674년 안드트(Arndt)의 설교 집에 서문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긴 서문을 통해서 경건주의 운동의 요강을 발표하였다. 뒤에 이 글은 따로 경건의 열망(Pia desideria)이란 표제로 출판되었다. 이 책으로 스페너는 일약 경건주의 운동의 창시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이 책의 출판과 함께 경건주의 운동의 새 시대가 도래 하게 되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당대의 도덕적 타락, 미온적인 신앙생활 및 번거로운 신학 논쟁을 비판 하였다. 정치인들의 부도덕한 생활도 비판하였으나 성직자들의 잘못을 더 신랄히 규탄하였다. 목사들이 도덕적 순결을 잃고 목회에 전념하기보다 비생산적인 논쟁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교회의 개혁 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서 여섯 가지 제의를 내세웠다.
첫째는, 성경 연구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을 것을 강조하였다. 소그룹으로 시작하여 서로 해석하며 연구의 결과를 서로 포럼하면서 영적인 충족을 찾는 일이다. 이런 모임을 통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둘째는, 신자의 영적 제사장직 활용이다. 신자는 성경을 읽어서 자신이 영적인 제사장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종교개혁의 주요 원리를 다시 명백히 했다. 신자들에게는 모든 영적인 가능과 은사가 예외 없이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졌다. 신자들은 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기도 감사 선행 구제 등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는, 기독교의 실천적 성경이다. 신앙은 단지 지식으로 그치면 안 되고 행동에 옮겨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믿음이 있다면 선행의 능력도 함께 있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종교적 논쟁의 비유익성이다. 신학적 논쟁은 안해야 된다는 것이다. 자신과 다르다고 정죄하고 갈라설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랑으로 참을성 있게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지도자가 되려는 이들은 참된 신앙의 실천자로서 철저한 훈련을 해야 한다. 교수들은 경건 생활의 모범이 되어야 학생들에게 영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였다.
여섯 번째는 설교의 개혁이다. 기독교는 속사람 또는 새사람으로 변화 시키는 것이다. 설교는 박식을 자랑하는 것 보다는 쉽고 단순한 것이어야 하고 설교는 신앙을 깨워주고 믿음의 열매를 맺도록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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