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동
종교개혁은 단순하게 신앙적인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온통 뒤바뀌어 버린 분기점이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이 로마 교황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었으며, 예술에서도 인문주의와 더불어서 신앙적인 주제를 떠나서 인간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과학에서도 신앙적인 면에서 벗어나서 합리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종교 개혁은 각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해 줌으로서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더불어서 권위를 상실케 하였다.
교황청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해야만 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필요성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였으며, 새롭게 조직된 예수회라는 종단의 창설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쇄신 운동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시도에 그쳤다. 그것은 개혁을 주도해야 할 교황이 교회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세속 문제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에 반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해야 했고 유럽 각 나라들의 정치적 분쟁에 일일이 개입하여 중재해야만 했다.
게다가 157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개신교를 신봉하는 용병들이 교황령에 쳐들어 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의 일로 가톨릭교회도 그에 따라 종교 개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오히려 태도가 강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톨릭 교회는 자유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1869년-1870년의 바티칸 제1차 공의회에서 더욱 더 보호망을 강하게 하였다가 1962년-1965년의 바티칸 제2차 공의회에서 보호막을 벗어 버리고 개방을 허락함으로써 비로소 종교 개혁에 도전장을 던졌다고 말할 수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
1545년 12월 13일에 교회 개혁을 수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교황 바오로 3세의 주최 아래 트리엔트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18년 동안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세 시기 즉, 교황 바오로 3세 치세에 속하는 제1기(1545년-1547년), 교황 율리오 3세가 속개한 제2기(1551년-1552년), 교황 비오 4세 치세 때 열린 제3기(1562년-1563년)로 구분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목적은 이단들이 점차적으로 강성해 가는 것과 교회 내부의 부패상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주교들의 태만으로부터 야기되었다고 밝히며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교회의 증가하는 부패는 영적 이상의 상실, 교리 문제에 관한 신학적인 불명확성, 그리고 교황청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었다. 따라서 회의에서 교회 개혁에 관한 중요 안건으로는 교회의 무능, 성직자 중임제, 그리고 감독 소홀 등이었다. 교리 문제에서는 불가타판 성경을 정경으로 재확인하였다.
그런데 1552년 1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선으로 회의장에 도착한 개신교측 사절들은 새로운 공의회 소집, 이미 결의된 신앙 교리의 취소, 교황 수위권 거부, 공의회 우위사상의 인정과 같은 무리한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게다가 루터교를 신봉하는 독일인 기사들이 갑자기 회의장 안으로 난입해 난동을 일으키자 교황은 공의회를 서둘러 중단하였고 더 이상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대화는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기독교 세계의 분열만 두드러졌다.
예수회의 창설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피레네 산맥에 접한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일찍부터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나서 그는 성경과 여러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꿈을 끼웠다. 그리고 영성 훈련과 운둔 생활, 고행, 대학에서의 공부, 신학 공부를 하였다.
1541년 4월 14일 예수회는 이냐시오를 공식적인 대표자로 선출하고 4월 22일 새로운 수도회로 출발하였다. 예수회의 창설 목적은 분명했다. 헌장에서 밝히는 대로 종교 개혁으로 인해서 실추된 교황의 절대권 회복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 교단이 될 것과 해양 개척으로 인해서 발견된 신대륙에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집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붙인다면 학문을 발달시킴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대적인 절대 복종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예수회는 그 설립 목적과 부합되게 전세계에 선교 활동을 펴나갔다. 이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유럽에서 개신교에게 빼앗긴 교회 영역을 유럽 밖의 선교에서 보충하였다. 세계 선교를 통해서 이름 그대로 보편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예수회는 신앙의 토착화라는 새로운 선교 방법을 개발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고 원주민들과 의식주를 함께하면서 그들이 가톨릭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이단 심문
한때 중세 유럽에 유행했었던 이단 심문을 16세기에 자신들의 전제적 통치에 일대 위협을 느낀 교황청이 강경일로로 돌아서서 개신교 박멸의 수단으로 부활시켰다. 용의자로 지목되기만 하면 교황청에서 파견된 심문관의 철저한 고문으로 강요한 고백이 강요된 후 정죄되면 세속 정권에 의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재산 몰수, 투옥, 유배 및 사형 등의 형이 내려졌다. 교황 바오로 4세의 영도 아래 소위 '거룩한 이단심문소(Sanctum Officium Sanctissimae)'라 불리는 악명 높은 신앙교리성성이 모든 나라들의 종교재판 중심기관으로 설립되어 수많은 이단심문관들을 양성하여 전 유럽의 개신교 탄압의 기수로 삼았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처럼 이단으로 지목되고 박멸의 대상으로 곤욕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서도 똑같이 가톨릭 교회 신자들과 자체 내부를 향해 종교재판을 자행하였다. 개신교에서 자행한 종교재판에서 비롯된 각종 고문형과 마녀 사냥은 가톨릭 교회 이상으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출처 : Daum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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