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교회사2 교실

[스크랩] 종교개혁사

류성련 2014. 11. 1. 19:57

 

 

종교개혁사


제 1 장 종교개혁의 요인
제 2 장 독일의 종교개혁
제 3 장 루터
제 4 장 스위스의 종교개혁
제 5 장 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제 6 장 칼 빈
제 7 장 영국의 종교개혁
제 8 장 과격파 종교개혁
제 10 장 끝내면서


들어가면서

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면죄부 반박문을 못박을 때에 교회당 안에 울려퍼지는 소리와 더불어 중세 카톨릭 교회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지금까지 교황의 일방적인 독재아래 미신적인 신앙으로 시달림을 받던 자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다.
중세 말기에 지식인들이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풍자하며 도덕적인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중세인들에게는 사람의 소리가 아닌 하늘의 소리를 듣기 원했고,인위적인 평안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주시는 평안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바로 이러한 요구를 루터가 충족시켰던 것이다.
루터는 중세의 신비주의적 경건과 예리한 지성으로 중세교회의 부정과 인위적인 가면을 벗기고서 복음의 실체를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물했다.
독일에서 일기 시작한 개혁의 움직임은 스위스를 거쳐서 프랑스와 영국,그리고 북부지방에 이르기까지 전유럽으로 번져나갔으며,16세기 내내 유럽은 대변혁을 맞이 하였다.이 사이에 국가는 점차적으로 교회의 억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으며,문예부흥과 더불어서 지금까지의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변하였으며,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가 호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서 교회의 확장과 박해받던 유럽의 개신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며,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제 몫을 찾기 위해서 조용한 시위를 일으키는등 사회전반에 걸친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 났었다.
그리고 공격을 받은 카톨릭 내부에서는 조용하게 자신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개신교들을 반격할수 있는 철갑을 더욱 단단히 함으로써 더욱 폐쇄적인 모습으로 바뀌었으며,다른 한 쪽에서는 개신교들이 미처 힘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교황권 옹호와 해외선교에 힘을 쏟는 교단이 시대적 필요에 부응해서 창설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독일과 스위스,그리고 영국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운동에 만족하지 못하고서 더욱 철저한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있었다.이들은 소위 말하는 초대교회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재세례파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하는 신령주의자들과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반 삼위일체파들이었다. 이러한 혼탁와 분열가운데서 그래도 종교개혁의 주류는 도도히 흘러서 근세로 연결되어짐을 볼수 있다.
종교개혁의 역사는 위에서 열거했던 내용으로서 진행되었다.종교개혁은 어떤 사상이나 제도든지 원래의 순수하였던 이념을 상실하고서 그 이념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에 메이게 되면 내부적으로 썩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그래서 유대교의 전통과 제도에서 썩어버린 복음을 예수님께서 새롭게 개혁하셨듯이 언제나 스스로를 개혁함으로서 제도속에 살면서도 제도에 메이지 않고 이념을 구현할수 있는 종교가 참다운 종교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제 1 장 종교개혁의 요인

종교개혁은 카톨릭교회의 잘못을 고쳐서 신약교회의 원형으로 개조하려는 운동이었다.그런데 16세기의 종교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그 이전 사람들이 있었다.
위클맆 이나 후쓰는 사상적인 개혁자들이었고 사보나롤라 같은 이는 도덕적인 개혁자 였고 버나드나 타울러나 엑카르트는 신비적인 개혁자들이었다. 이들에 의하여 준비된 종교개혁은 성경의 절대 권위,이신득의의 교리,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기본 원리로 하여 카톨릭 교회의 변화를 추구 하였다.
루터나 칼빈은 이러한 운동을 보다 더 효과있고 광범하게 전개 하였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을 준비시킨 요인은 3가지 정도로 말할수 있을 것이다.

1.도덕적 요인

만일 루터가 속죄권판매를 정당시한 텟젤과의 대결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늦어졌을런지 모를 일이다. 교회가 신령한 축복을 돈받고 파는 장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합리화 시키려 할때 루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그외에도 성직매매가 성행 했다.그리고 신부의 문란한 생활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생활을 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일부 주교들이 교회개혁을 교황바울 3세에게 정식으로 건의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

2. 지적인 요인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고대 문학에로의 복귀,개인주의적 각성,지리상의 발견에따라 동서문화의 교류,봉건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인구의 격증,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득세한 옥감주의의 득세,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다.르네상스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열은 교부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불지르고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중세의 긴 지적인 통제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3.사회적 요인

십자군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경제가 상업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졌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아래 들어오게 되고 교황청의 바벨론 포로로 인한 교황 위신의 실추는 교회개혁을 부채질 했다.교회가 부과하는 세금과 교황청의 사치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했고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자 독일의 농민들은 일제히 봉기 했다.
십자군 운동의 결과로 동방의 사치품이 수입되고 서방사회는 사치풍조에 휩쓸리게 되었고 사제주의의 횡포로 하나님꼐 직접적인 교제가 단절된 무리들은 영적인 해갈을 위하여 현실도피에 신비주의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렇듯 교회와 백성사이에 생겨진 괴리에 새로운 개혁의 가교는 누군가에 의하여 놓여져야만 했다.

제 2 장 독일의 종교개혁

독일의 종교개혁은 먼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각종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외침이 독일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복음에 의한 해방과 더불어서 로마교회로 부터의 경제적,정치적,자유를 얻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1.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서 십자군 전쟁이후로 도시의 발달과 봉건제도에 도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전쟁의 군대파견으로 전쟁이후의 세력권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스페인은 1492년 이래로 통일 스페인 시대를 맞이해서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영국은 스페인의 위성국가 였으며,스코틀랜드는 프랑스의 위성국가로서 힘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교회의 가장 강력한 힘이 미칠수 있었던 곳은 독일뿐이었다.그리고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기질마저 겹쳐져서 로마교회의 시녀 노릇을 하였다. 면죄부를 구매하고 각종 세금성 헌금을 바치는등 독일은 로마교회의 재정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통치아래 대봉건영주들의 총회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 하였다. 공동의 주전법으로 화폐를 통일 시키고 관세법을 통일 시킴으로서 하나의 의회 아래에서 통일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운영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8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던 막시밀리안이 1519년 1월에 죽고 부르군디의 필립의 아들이며,스페인의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챨스5세가 1519년 6월 선재후들의 손에 의해서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찰스5세는 독일계 스페인 사람이었다.

2.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로마교회의 착취

로마교회는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각종 예술의 부흥이 유럽전역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교회도 예술적인 감각을 도입하였다.교황들은 취임과 더불어서 자신의 임기동안에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예술적으로 치장하는것을 보람과 업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 자금원은 광활한 토지를 중심으로 각 개인의 경건한 신앙심을 가진 독일인들 이었다. 이들은 각종 세금성제도에 합당한 이유만 첨가된다면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였다. 루터가 그의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통하여 독일내에서 개혁되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로마교회의 수탈과 관련되어 있었다.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제일 폐회가 컸던 첫수입세,팔리움,보류권,사라젠세 등은 각종 제도와 면죄부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밖에도 조달비,공석금,기부금,특별면죄권,등이 있었다.그런가 하면 로마교회는 십일조를 강요하였는데 각 교회는 수입의1/10을 교황청에 바쳐야 했다. 그리고 죽은 날을 위한 미사와 개인을 위한 특별미사, 매일같이 지속되는 성자의 날 기념미사와 특별헌금-----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도화 되어 있었다.

제 3 장 루터

1.마틴 루터의 어린 시절과 회심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광산촌 만스펠트 지역에 속한 조그마한 아이스레벤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르가레테 지글러 사이에서 태어났다.그는 어려서 부터 가난을 체험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경험하면서 자랐다.그는 공부를 하면서 학비를 면제 받았지만 교회의 성가대에서 의무적으로 노래해야만 했다.
루터는 3년간의 아이제나하의 생활을 마치고 에르푸르트 대학 시절을 맞이 하였다.이 대학은 후기 스콜라학문에 속하는 스코투스 노선을 채택하였으며 오캄과 가브리엘 비엘로 이어지는 유명론의 전통에 서 있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출세를 보장하는 법학을 공부하기로 하였고 또한 자격을 가졌다.그러던 그가 주위의 부러운 눈총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느날 사라져 버렸다.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된 동기에 대해서 많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오히려 루터를 모독하는 내용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영혼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으로부터 죄사면의 확신을 받기를 원했다.그의 이런 자세가 수도원 문을 두드리게 하였다.


2.수도원에서의 루터

루터가 문을 두드린 수도원은 어거스틴파 운둔수도회 였다.이 수도원은 당시에 가장 신선한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며,여기에는 후기 유명론에 입각한 스승들이 있었다.그리고 이들은 교황의 절대성,양심의 가책,교황의 면죄부의 효력등을 엄격하게 주장 하였다. 루터는 이런 유명론 신학에 서서 혼자 성경을 읽는것이 금지 되었고 스승들의 글을 읽도록 하였다. 루터는 성경읽는것이 금지 당한채 자신의 죄를 찾아서 고백하기 시작 하였다.루터의 고해 성사는 수도원의 가벼운 규율을 어긴 데에 이르기 까지 모든 죄를 찾아서 고백하고 또 고백 하였다.그러나 아직까지 고백해야 할 죄를 찾지 못한듯한 자책감 속에 있었다.
이러한 루터의 고뇌를 알아차린 사람은 당시 교황청 대리인 으로서 교황청을 방문했돈 요한 스타우피츠 였다.그는 루터의 고민을 듣고서 성경을 읽을수 있도록 허락 하였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여기서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대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무능이 서로 상반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의롭게 될때에 한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는 것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슈타우피츠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자신의 소유가 될수 있다.고 설명하여 주었다.하나님과 인간은 인격적인 신뢰를 통해서 서로 교제할 수 있으므로 믿음이야 말로 의인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이었다. 루터가 이런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 후기 유묭론적인 참회제도를 벗어나는데는 무려 2년이란 고뇌의 기간이 필요했다.그렇지만 자신의 이런 깨달음이 중세의 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대의 문을 열었으며,종교개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그런가 하면 이것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면죄부 반박문을 못박은 소리와 함께 중세인들의 귀에 울려 퍼져 나갔던 것이다.

3.비텐베르크의 루터

후기 중세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학을 설립하였다.그래서 유능한 교수를 초빙하고 도시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선제후 프레데릭도 챨스 5세의 삼촌으로서 자신의 영지내에 대학을 세움으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할려고 하였다.그래서 비텐베르크 마을에 대학을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고 교수를 모집했다.그러나 운영이 점점 어려워지자 프레데릭은 새로운 교수진을 초청하기를 원했는데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추천을 받아 에르푸르트 수도원을 떠나 비텐베르크로 옮겼다.루터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 했으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를 요청받고 어거스틴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그는 설교도 하였으며 1511년에는 교단의 업무차 로마를 방문하였다.
그의 공적인 업무를 마치고 거룩한 계단에 이르러서 전통에 따라서 무릅으로 오르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말씀이 떠올라서 계단을 걸어서 내려 왔다고 한다.그리고 그토록 거룩했다는 로마의 부정과 부패를 보고서 중세적인 제도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1512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교수가 되었다.그는 중세적인 스콜라 강의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는 실천적인 힘이 있는 강의를 하였다.인간은 자신의 공로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신앙이란 스리스도 역사적 사역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러한 사면에 대한 깨달음이 성화의 시작이다.
루터는 1515년과 1516년에 어거스틴과 중세의 신비주의를 더욱 연구 하였으며,이때부터 중세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 했다.이때부터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으며,많은 학생들이 몰려 들었고 비텐베르크 대학은 성장하기 시작했다.이처럼 루터의 종교개혁은 상호유익을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다.
즉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삼촌인 프레데릭의 신변보호가 필요하였고 프레데릭은 자신이 세운대학을 명문대학으로서 성장시켜주는 명교수이며,명설교자인 루터가 필요하였다.

4.95개논제를 못박기까지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면죄부였다.중세의 참회제도에 의해서 사람은 완전하게 죄를 고백할수 없으며,사제가 부과한 보속행위도 완전하게 행할수 없었다.따라서 교리적으로 누구든지 영세를 받았으면,지옥에는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천국에도 가지 못하였다.그래서 중세인들은 누구든지 연옥에 갈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연옥에서의 고통의 기간을 얼마나 단축시키느냐가 관심거리였다.그래서 오직 자신을 위해서,연옥에 있는자를 위해서 면죄부를 사는것은 중세의 미덕이었다.
1513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 레오 10세는 전임자 율리오스 2세가 남겨놓은 재산을 탕진하였다. 르네상스 교황으로서 그는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교황청의 재산을 탕진해버린 그로서는 면죄부를 다시금 발매하기로 결정했다. 레오10세가 선포하고 브란덴부르크의 알버트와 마인쯔의 대주교가 징수를 맡고 도미니크파 수도자 요한테첼이 판매하였던 면죄부는 루터를 그대로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입성한 면죄부 판매인 요한 테첼은 “하늘문이 열리노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면죄부를 판매하였다.다행히 비텐베르크는 프레데릭의 명련에 따라서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주민들이 인근 부근에까서 면죄부를 사오는 것을 보고 루터는 참을수가 없었다.
매년11월1일 모든 성자의 날을 기해서 프레데릭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당에 보관중이던 유물을 무료로 개방하였으며 그날이 되면 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유물에 보관되어 있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ㅂ주속교회당 정문에 95개에 달하는 면죄부 반박 논제를 못박아 게시 하였다.

5. 라이프찌히 논쟁

1519년 엑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이 개최 되었다. 이것은 루터의 95개조의 면죄부 반박을 게제한후 엑크는 “오벨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해서 발표하고 또다시 루터는 “아리테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하였다.이렇게 시작되었던 대결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자 결국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노련한 논쟁사 엑크의 승리로 끝났다. 루터 스스로 이단을 좋게 말하게 함으로서 스스로 이단에 속한다고 인정케 하였다.루터는 우울하게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것인가를 더욱 명확하게 간파 하였다.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단순하게 면죄부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종세교회의 존재 그 자체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터는 힘이 있었다.젊은 인문주의자들이 루터를 도와주었으며,도시민들도 독일이 로마로 부터 독립해야 된다는 마음을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로마교회의 존재를 뒤엎어 버리고 동시에 종교개혁의 대헌장이라고 할수 있는 3개의 논문을 발표 하였다.

6.종교개혀 3대 논문

1519년 라이프찌히 신학 논쟁 이후로 엑크는 로마로 돌아가서 교황청 법원회의를 개최하였다. 일련의 어려움이 있었의나 1520년 6월15일 출교교서는 완성되었다. 그러닌까 루터가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과 때를 맞추어서 출교교서는 완성된 셈이다. 그리고 이어서 루터는 같은해 8월에 기독인의 자유를 발표하였으며, 또다시 10월에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서 루터는 1520년 12월10일 교황의 출교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움으로서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 하였던 것이다.

1)출교교서 :주여 일어나소서
교황청 출교 교서는 시편 74:22절을 인용하면서 작성 되었다.여기서 루터는 41개조의 정죄문과 더불어서 루터의 모든 책을 소각할것을 명하였으며,모든것이 금지 되었다.그리고 추종한는 사람들의 동조를 취소할것을 명하였다.

2)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루터는 이 논문에서 먼저 교회의 3가지 담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첫째는 교회가 지닌 영적인 권한으로 인해서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특권, 둘째는 교황의 성경해석권으로서 어느 누구도 성경을 통해서 교황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한 특권, 세째는 회의 소집권을 오로지 교황에게만 국한 시킴으로서 어느 누구도 회의로서 교황을 비판하지 못하게 한 특권.
이상의 3가지 담이 지금까지 로마교회를 세속화 시켜 왔으며,교회를 지켜주는 특권이었는데 이제는 교회가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평신도를 통해서 교회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대원리 가운데 하나인 “만인제사직”이론을 주창 하였다. 루터는 사제의 중재라는 중세의 대원칙을 무너뜨렸다. 이상과 같은 루터의 만인제사직 이론은 중세인들을 사제의 공포와 전횡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와 의미를 되찾게 해 주었다.

3)기독교인의 자유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이 개혁되어야 할 사항들에 대한 문제제기 였다고 한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수 있는 이론적 배경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루터는 기독인의 자유라는 논문을 통해서 종교개혁의 신학적 부분에 해당하는 구원론을 다룬다.특히 중세의 공로중심적인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반대하면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이것이 기도교인들을 중세의 교리적 쇠사슬에서 풀어주는 자유였다.
여기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3대 명제인 하나님의 말씀,은총,그리고 신앙을 모조리 이야기 한다. 그리고 루터는 여기에서 또한번 만인 제사직 이론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지금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일반 교인 사이의 차이는 각각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능을 가진 성직자인을 강조 하였다.

4)교회의 바벨론 포로
여기에서 루터는 자신의 수도원 시절의 악습들을 간파하면서 중세인들이 사제의 중재라는 쇠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7성례전을 파기하고 성경에 근거한 세례와 성찬 두가지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세는 7성례전으로서 사람의 70년 인생을 묶어 버린다고 해서 바벨론 포로기 70년에 비유해서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루터는 희생설에 기초한 중세의 화체설을 부인하고 공재설을 주장함으로서 중세의 성례전 이론을 뒤엎었으며,특히 성체성사 이론에서 일종성찬을 베푸는 중세의 악습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 하였다. 더 나아가서 참회제도를 극렬하게 비판 하였다.

5)출교교서의 소각.
루터가 종교개혁 3대 논문을 작성하는 동안 로마교회는 루터를 출교시키는 교서를 유럽의 여러곳에 배포하고 루터의 손에까지 들어왔다.
1520년 12월10일 아침 9시에 교황청의 헌장과 스콜라 신학서적등을 공개적으로 소각 시킬 예정이므로 비텐 베릌 학생들이 증인으로 참여 해 달라는 것이다.
루터는 교황청의 교령들,교회법 법전들,그리고 엑크와 엠저의 몇가지 글들을 화염속에 던지면서 여호수아 7:25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대가 주님의 거룩한 자를 근심으로 괴롭게 하였듯이 영원한 불길이 그대를 괴롭게 하리 라고 되뇌였다.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교황청 법령의 장례노래를 부르기도 하였고 교황청을 조소하면서 스콜라서적과 교황청 서적들을 화염속에 던졌다.
이날 이후로 루터는 확고한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교황은 적 그리스도의 상징이며,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 되었다.

7.윔스의회

1520년 12월 10일 루터가 교황청의 출교교서를 소각하였다는 소식을 곧바로 독일 전역과 유럽으로 퍼져 나갔으며,이제 독일인들은 루터가 독일을 대변하는 사람처럼 받아 들이게 되었다.이러한 즈음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이 죽고 그의 손자인 챨스 5세를 선출했다 그의 대관식을 갖고 첫번째로 주재한 회의가 1521년 1월 22일에 개최한 윔스의회 였다.
교황청에서는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루터의 범법성을 밝히려고 하였다. 루터는 윔스의회에 두번 출두 출두 하였으며,무오하다고 믿는 교황과 성경에 입각한다고 주장하는 루터 사이에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그래서 루터를 윔스로 부터 비텐베르크에 되돌아가게 했다.그러나 설교는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갑자기 루터가 사라졌다. 프레데릭은 협상이 결렬된 이후 루터를 안전한 장소로 피신 시킬것을 슈팔라틴에게 명령하였으며,루터는 바르크 부르트에 피신해서 융거 게오르그 라는 이름을 가진 귀공자로 변장해 있었다.루터는 이곳에서 고전에 속하는 교부들을 더욱 열심히 연구 했으며,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영적으로 무장하였으며,어떤 의미에서 제2의 영적 고뇌기간이었다고 할수 있다.루터의 이 기간은 사도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여 동안 영적인 고뇌의 기간을 가졌던 것과 동일한 준비의 기간 이었다.
크게 움츠릴수록 더 높이 뛸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종교개혁에도 적용될수 있었으며,아마도 하나님께서 루터에게 이 기간을 허용해 주셨는지도 모른다.

8.농민소요와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윔스의회에 참석할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랑히톤에게 위임했다.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 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금까지의 불만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전역에는 농민들의 권리회복을 부르짖고 있었다.이러한 농민들의 불만이 루터의 힘을 얻고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개혁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 였다 지금까지 루터 가장 강력한 지지를 입고 있는 푸레데릭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레데릭은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선제후와 농민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결과적으로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수 없었으며,아우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개혁운동을 이끌어 갈수 없게 되었다.

1)칼슈타트의 개혁운동
중세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경건주의적 신앙운동은 여러 갈레로 나뉘어 졌다. 형제회 등과 결합한 운동은 학교교육을 통한 자녀교육,경건서적 탐독 및 구제와 봉삭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후쓰 운동의 한 줄기인 타보르파의 흐름에서 나온 사람들은 신비적인 종말운동으로 흐르고 있었다.
루터가 없는 비텐베르크는 칼슈타트가 주도하는 개혁운동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도시 전체는 영적인 각성으로 정열적으로 흐르고 있었고 칼슈타트는 수도원 서약,독신제도,성직자의 구별된 의복착용,미사의 대속적인 헌신의 의미,교회내의 화상과 성상 사용 등의 구세대적인 행습을 대대적으로 비난 하였다.
칼슈타트는 개혁의 고삐를 더욱 강하게 잡아 당겼다. 1522년 1월 24일 시 당국은 법령을 공포하였다. 도시의 공동금고를 설립해서 시의 모든 수입과 지출을 관리케 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는 프레데릭을 위시한 루터의 지지자들을 근심케 하였다.선제후는 조지 공작하게 비텐베르크의 문제는 칼슈타트와 쯔빌링이 일으킨다고 지적할 정도 였다.멜랑히톤은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서 흥분된 분위기를 가라 앉힐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제는 루터가 아니면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 루터는 언제 잡혀서 로마로 압송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바르트부르크를 몰래 빠져나와서 1522년 3월 7일 비텐베르크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거의 일년만에 돌아 왔으며,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2)농민소요
유럽의 농민들은 14세기 부터 시작해서 16세기의 대변혁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소요를 끊이지 않고 일으켰다.그리고 이것들은 성직자의 착취를 언제나 언급하고 있다. 십일조는 자발적인 헌금이 아니라 강제적인 세금이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없는 사람은 교회에도 다닐수가 없었다.
이때 한스 힘의 설교는 모든 소외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그는 사제들에 대한 욕설과 공격으로 시작해서 황제와 제후들과 군주들을 모조리 공격했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자유를 허락해 달라고 외쳤다. 이것은 그가 화형 당함으로 영적 각성이 끝이 났지만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동요의 불씨를 심어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524-1525년 사이의 독일에서는 농민들이 소요를 일으켰다.이들은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으며,이들의 신분은 신분상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이들의 요구사항은 12가지로 말할수 있다.
첫째:시민 당국이나 교회 당국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위배될 때에는 정당한 권리요구를 갖는다.
둘째,목회자의 청빙의 자유와 축출의 자유
세째:대십일조는 의무로서 지킬수 있으나 소십일조는 거부한다.
네째:대십일조에서 부락사제의 급여를 감당할 것이며,나머지 부분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에 사용하라.
다섯째:농노제도를 폐지하라
여섯째:적법한 명령에는 순종하겠지만 강압적인 명령은 거부한다.
일곱째:낚시의 권리,사냥의 권리를 갖는다.
여덟째:삼림,목초지,경작지를 지주로부터 찾아와야 한다.
아홉째:모든 유형의 강제 봉사은 폐지 되어야 한다.
열 째:모든 형태의 노력 봉사는 정당한 임금의 지불이 있어야 한다.
열한째:사망세의 명목으로 고인의 귀중한 동산을 압수 할수 없다.
열두째:모든 지역에 공평한 재판소를 설치하라.

이상의 열두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작성된것이기 때문에 어느것 하나라도 잘못이 있으면 기꺼이 배제 시킬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농민소요는 더욱 거세게 몰아치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짧은 시일내에 결성된 모임체 였기 때문에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으며,운동 자체나 외부의 대항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수 없었다. 농민들의 소요사태는 북독일로부터 진압되기 시작 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 거의 진압이 되었다. 진압과정에서 소요군의 사망는 100,000-150,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 였다. 루터는 농민들이 잠잠해 줌으로서 원하는 독일의 개혁이 달성될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소요지역을 찿아 다니면서 운동을 자제해줄것을 당부 하였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개혁운동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여행을 떠났으며,이 기간 동안에 그토록 자신을 지지했던 프레데릭이 사망했다.
루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떼를 반대하여”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심지어 루터는 이 책자에서 제후들에게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말하였다. 물론 루터의 고민을 충분하게 이해 할수 있으나 그는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제후들,특히 선제후 프레드릭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선무 설교여행까지 감행했던 것을 볼때에 손을 씻은 빌라도를 연상케 된다.
아무튼 농민소요는 루터의 개혁에 치면타를 가한것은 사실이다.

9.루터의 죽음

루터적인 개신교를 지지하는 슈말칼트 동맹은 헤세의 필립이 이중 결혼으로 인해서 심각한 타격을 입기는 했어도 개신교측은 꿋꿋하게 버티어 나갔다. 그러나 챨스 황제가 1544년 프랑스와의 평화를 마무리 지음으로 이제부터는 독일문제를 원하는 대로 다룰수 있었다. 그래서 트렌트에서 총회를 개최하도록 명하였다.그렇지만 개신교들은 여기에 따르지 않으려 하였으며,총회는 생각보다 지루하게 지속됨으로서 황제는 무력을 사용해서 개신교도들을 무찌르려 하였다.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루터는 죽음을 맞이 하였다.

10 루터에 대한 평가.

루터의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많은것을 시사해 준다.어떻게 가난한 벽촌에서 태어난 한 젊은이가 가진것도 없이 엄청난 일을 감당할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성공에 대해서 분석해 보았다. 그렇지만 루터에게는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을 철저하게 의지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루터의 가장 큰 꽤는 꽤를 부리지 않아야 한다는 바로 그 꽤 였다.
루터는 말씀의 사람 이었으며,기도의 사람이었으며,경건의 사람 이었다. 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하게 믿으면서 모든것을 기도로써 시작하고 기도로써 끝을 맺었던 사람 이었다. 루터는 또한 자신의 개혁을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계획표를 짜고서 밀고 가지 않았다. 루터는 일이 되어지는 대로 하나씩,하나씩,처리해 갔으며,억지로 일이 되게끔 몰고 가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하게 순종하려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 하였다.
루터가 단 하나 머리를 써서 세밀하게 이끌어갔던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절대로 개인자격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터는 자신의 의견을 언제나 공중적인 전체 회의나 집회를 통해서 발표하였다.이러한 점에서 루터는 당시의 시대적 조류인 회의 중심적 개혁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루터의 개혁은 철저하게 복음중심적인 원칙적인 싸움이었지 무력이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에 힘이 있으며, 또한 동시에 지식인들과 지도층의 지지를 확보 하였다.루터는 개인의 인기를 편승해서 사람을 압도하려고 하지 않았으며,본인이 몸소 터득한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심어 줌으로서 중세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야 된다는 강한 사명감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제 4 장 스위스의 종교개혁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오지에 속하는 척박한 땅으로서 산업이 발달할수 없는 곳이었다.그렇지만 자유를 원하는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자주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각종 박해받던 신앙인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언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1291년 연방체계로 발전 하였다.
스위스는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서쪽의 프랑스어 사용권 지역과 북쪽의 독일어 사용권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종교개혁 즈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박해를 피해서 많은 개신교도들이 피난와서 슈트라스부르크를 중심으로 이민사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제네바도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산업의 발달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나,지리적인 조건 아래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인해서 스위스인들은 오래전부터 교황청의 용병으로서 재정적 수입을 충당 하였다.이러한 전통적인 용병제도는 프랑스의 아비뇬 교황청 시절에 양쪽으로 용병이 팔려감으로서 상호 전투를 겪는 민족적 어려움을 겪었으며,챨스5세와 프란시스 1세 사이의 전투에 다시 한번 용병으로 팔려가서 동족끼리 살상하는 모순을 겪었다. 그래서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용병제도의 근절이라는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으로 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크게 틀렸다고 말할수 없다.

1.쯔빙글리의 개혁

즈빙글리는 루터보다 7주 늦은 1484년 1월 1일 토겐부르크 자차주의 빌드하우스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대대로 부락의촌장을 역임해 왔으며,외할아버지는 사제 였다 삼촌은 베젠의 학장으로 취임함에 따라서 쯔빙글리의 신학교육을 전담하게 되었다.삼촌은 새로운 학문조류인 인문주의를 받아들여 조카에게 전수해 줌으로서 자신의 역활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10세때에 베젤에서 바젤로 옮겨서 라틴어 문법,음악,그리고 변증학을 배웠다.1498년에는 베른 대학에 입학해서 스위스 종교개혁의 기수로 알려졌던 하인리히 뵐플린에게 배웠다,1500년 부터 2년 동안 쯔빙글리는 비엔나로 옮겨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보호 아래에서 학문활동을 하였다.
1502년에는 다시금 바젤로 돌아와서 성마틴 대학에서 라틴어를 배웠으며, 1506년에는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 하였다.

1)글라루스의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1506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사제로 임직 되었으며,글라루스의 목회자가 되어 부임 하였다 10년의 목회 활동을 하면서 헬라어를 공부했고 희랍과 로마의 철학자,시인, 웅변가,저술가들을 공부 하였으며,이 기간 동안에 에라스무스와 서신교환을 하면서 우정을 쌓았으며,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글라루스 목회자로서 자연히 용병으로 싸우는 글라루스 연대의 연대소속 목사로 두차례나 이탈리아로 갔었다, 이때부터 쯔빙글리는 용병제도의 위대성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스위스의 죄악,악덕,불신앙성,외국숭배와 이것이 조국의 자녀들을 집어삼키는데 대해서” 와 “황소의 우화”을 통해서 스위스의 용병제도를 공격 하였다.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상징적이며,풍자적 이었다. 이곳에서 쯔빙글리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철학자,수사학자,인문주의자,도덕주의자라고 말하는것이 옳을 것이다.

2)아인지델른의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용병제도를 반대함으로서 교구민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1516년 4월 순례지로 이름난 아인지델른으로 목회지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설교가로 알려 졌으며, 교부들의 책을 읽었고, 면죄부의 해악성을 설교 하였다.동시에 그는 주민들에게 마리아가 아닌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가르쳤으며,교황청의 악덕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1516년에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3)취리히의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적이 많았다. 그것도 교리적인 면 보다는 그의 자유 분방한 행동에 관한 성토가 대부분 이었다.그렇기 때문에 만장일치가 아님 다수에 의해서 1518년 12월 27일 쯔빙글리는 취리히에 도착 하였다. 취리히에서의 그의 개혁은 노랍게 진행 되었다.
[1]루터가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하는데 반해서 설교의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였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전통으로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는 마태복음을 연속적으로 강해하기 시작했다.
[2]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인 베르나르딘 삼손이 도시에서 면죄부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에 도시 밖으로 추방시키는데 성공 하였다.
[3] 쯔빙글리는 1519년 8월 취리히에 페스트가 발생해서 많은 사람이 고생하게 되자 밤낮 쉬지 않고 환자를 돌봄으로서 9월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아프게 되었다.이것을 통해 그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4] 쯔빙글리는 십일조에 관한 공격적인 설교를 퍼부음으로서 십일조의 자발성을 강조 하였다.
[5] 쯔빙글리는 금식기간 동안에 육식을 먹어도 괜찮다고 선언 하였다.
[6] 쯔빙글리는 교황청에 파송하는 용병과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연금의 잘못을 파악하고서 본인에게 지급되던 연금을 포기 하였다.
[7] 쯔빙글리는 공개토론회를 통해서 교황청의 각종 악덕을 지적하고 비난 하였다.
[8] 쯔빙글리는 안나 라인하르트와 결혼함으로서 지금까지의 비난과 물의를 일소 시켰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결혼 하였다.

4)쯔빙글리의 최후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스위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나, 모든 곳에서 환영받는것은 아니었다. 삼림 자치주들은 개혁교회 스타일의 개혁을 원하지 않았다.그러자 개신교 자치주에서는 산림자치주에 생활필수품을 공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그래서 삼림 자치주는 전쟁을 통해 해결할수 밖에 없었다.
1531년 삼림 자치주는 샤벨을 쳐들어 왔다, 쯔빙글리가 이끄는 취리히 군대는 1010월 11일 샤펠에서 교전 하였으며,쯔빙글리를 위시한 목회자 의회의원등 다수가 전사 하였다. 47세의 인생의 황금기에 접어든 쯔빙글리는 개혁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끝내 숨지고 말았다.

5) 쯔빙글리의 평가.
쯔빙글리는 독일의 개혁자 루터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루터는 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위한 영적 투쟁으로 부터 출발해서 복음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다음에 로마 가톨릭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는 순서를 밟았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처음부터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고서 이것들을 에라스무스적인 풍자와 학문적인 공격으로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럼로 쯔빙글리는 개인의 구원과 말씀안에서의 구원의 확신이 처음부터 약했다.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목회자로서의 경륜이 쌓여감에 따라서 교회와 교인들의 요구사항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으며,본인도 점차적으로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 이해는 인문주의적인 합리적 요소가 끝까지 있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재세례파 사람들이취리히를 중심으로 반기를 들면서 재세례를 베푸는 불상사가 일어 났었다. 그렇기 때문에 쯔빙글리는 과격 재세례파 사람들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 고통이 있었다.
쯔빙글리의 개혁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루터 보다 훨씬 강하였다. 그는 용병으로 벌여들이는 수입보다는 한 사람의 동족의 생명을 더욱 안타까워 했다. 그래서 그의 개혁은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이라는 고육책으로 모범을 보이는데서 인정을 받았다.
쯔빙글리는 루터만큼 많은 저술활동을 하지는 않았다.그렇지만 그의 글은 개혁교회의 기초가 될수 있는 복음 이해와 성찬 이론을 확립 시켰다.
한마디로 말해서 쯔빙글리는 47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에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벌여 놓았던 많은 일과 사업의 뒷 마무리를 후배인 칼빈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면에서 같은 인문주의자로 출발해서 복음주의로 바뀌었던 칼빈은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며,또한 완성자 였다고 말할수 있다,.

제 5 장 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제네바는 1387년 이래로 도시의 군주로서 주교,도시의 소유자로서 사보이 가문의 백작,그리고 자유 시민들로 이루어진 3원체제에 의해서 통치 되어 오다가 1444년 이후로는 사보이 가문에서 주교까지 세습적으로 계승함으로서 자연히 자유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제네바의 시민들은 스위스의 자치주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라이부르크와 제휴하였지만 베른은 이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적잖은 대결상태를 유지 했었다.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제네바 시는 소의회와 대의회제도로 바뀌었으며, 모든 중세사는 대의회에서 결정 하였다. 베른은 제네바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눈치 였으나,공개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현수막 사건이 발생 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를 회개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진실하게 믿으면 모든 죄에 대한 완전 면죄부를 수여 받을수 있다”라고 쓰여 졌다.
이로 인해서 1532년 가을에 제네바에 도착해서 조용하게 가정집에서 설교하던 파렐,사우니어,올리베탄은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파렐은 제네바를 포기 할수가 없어서 프로망을 불어선생의 자격으로 제네바에 잠입 시켜서 불어교습과 더불어서 개혁적 복음주의를 설교케 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숫적으로 불어난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 사이에 시민전쟁을 방불케하는 격렬한 몸싸움도 있었다. 여기에서 윌리라는 이름의 가톨릭 사제가 희생 되었다.
카톨릭측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베른은 복음주의자 편에 서서 옹호하고 나섰다. 프로망의 활동으로 가톨릭 수도자와 공개 토론회가 실시 되었으며 파렐은 공개 토론회 참가자로서 1532년 12월20일 에 다시금 제네바에 발을 딛을수 있었다. 그래서1533년 2월에는 최초의 복음주의식 세례를 베풀었으며,3월1일 부터는 공개적으로 복음주의식 예배를 드렸으며,수도원의 교회를 빌려서 사오천명씩 한꺼번에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제네바 시는 기사도 정신에 뛰어난 프랑스인 파렐을 맞이해서 개혁을 이끌어 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길이 닦인 도로 위에 복음주의 마차를 이끌어갈 마부가 필요 하였다. 바로 이러한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준 사람이 바로 존 칼빈 이었다.




제 6 장 칼 빈

1.칼빈과 제네바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피가르디 지방의 북부에 속하는 교회도시 노용에서 아버지 게라드 코뱅과 어머니 잔느 라 프랑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아버지는 이름있는 법률 자문관으로 중상위권의 생활을 누렸으며,이러한 아버지의 덕분으로 칼빈은 귀족의 집에 머물면서 일종의 가정교사 역활을 했다.그러다가 14세가 되어서 드 몽트모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파리로 유학의 길에 나섰다.
칼빈은 파리의 드 라 마르슈 대학에 입학해서 프랑스와 라틴어를 배우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그러다가 부모의 걱정에 못 이겨서 더 보수적인 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다.여기서 토론술을 배웠다.
1528년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칼빈은 오를레앙의 법과대학에 입학해서 일 년간 머무르다가 부르쥬로 옮겨서 국제 법학자 알키아트의 강의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칼빈은 오를레앙에서 인문주의를 그리고 부르쥬에서는 개신교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칼빈은 12세된 소년으로서 장차 칼빈의 동역자가 될 베자를 사귀었다.
1531년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서 칼빈은 다시금 파리로 돌아와서 포르테 대학에 들어 갔는데 이곳에서 부데,콥등과 더불어서 인문주의의 모임에 가담 하였다.
1532년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라는 주석집을 발간 하였다.
이 무렵 칼빈은 이미 파리의 개신교 모임에 가담하고 있었으며,그의 첫 저서가 출판됨과 동시에 왕 프린시스 1세는 개신교도인 휴그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사이에 1533년 칼빈은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주제로서 그의 취임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다. 소르본느에서는 이 연설을 국회에 이단으로 제소 하였으며,국회는 이에 동의 했다. 이와 더불어서 1534년 10월18일 밤에 열광적인 개신교도들이 혐오스럽고 도저히 참을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현수막을 파리 전역과 심지어는 왕실의 정문에 부착함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 하였다.
칼빈은 1533년 부터 1534년 사이에 나바르의 여왕인 마가리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냈다. 이 기간동안에 칼빈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와 개신교주의의 대가인 르 페브르와 사귀었다.
1534년 10월에 칼빈은 고국을 떠나서 스위스에서 은신처를 찾기도 하였다.칼빈은 프랑스의 개신교도 망명잗ㄹ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슈트라크 부르크를 방문하였으며,그곳의 목회자인 부처로 부터 환영을 받았다.그곳에서 바젤로 옮겨 갔으며,거기에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저술하였다.

1) 칼빈의 개혁
파렐은 27세의 칼빈보다도 20세가 더 많았다. 그러나 아직도 젊은 피가 끓은 사람으로서 칼빈과 한 마음이 되기에 충분 했다. 칼빈은 성베드로성당에서 매일같이 바울의 서신들을 가르쳤다.
그러는 사이에 1536년 10월 베른은 새로운 점령지역에 대한 개신교와 로마주의 사이의 대토론회를 개최 하였으며,칼빈은 이 자리에서 교부들을 낱낱이 열거 함으로서 로마주의자들을 납작하게 만들었으며,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더불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 1537년 1월에 칼빈은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 하였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만찬,공중예배에서의 찬양,어린이의 종교교육,결혼등 4가지 였다.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 하였다. 성만찬은 일년에 4차례 집행하며,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 하였다.

2) 칼빈에 대한 배척과 칼빈의 이동
제네바 시는 파렐과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추진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파렐과 칼빈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 시의 간섭과 더불어서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빈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 하였다.베른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을려고 하였으며,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 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꼬로우,파렐,칼빈은 제네바시를 떠날것을 명 받았다.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를 떠났으며,칼빈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동안 개혁을 시도 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 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일에 전념 하였다.


3) 다시 돌아온 칼빈과 그의 개혁
파렐과 칼빈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오히려 악화되는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 하였으며,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빈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1539년 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칼빈은 윔스국회에 참석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채 번민에 있었다 이 때 파렐릐 충고가 크게 작용 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 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빈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년 9월 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데 이르기까지 칼빈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 하였다.

2. 제네바의 개혁추진과 칼빈의 신학

칼빈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 이었다.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개혁을 추진하기는 이루 말할수 없이 힘들었다.다시 돌아온 칼빈을 그들은 조직적으로 괴롭혔으며, 칼빈과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뿐만 아니라 제네바로 많은 이단성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칼빈의 개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 하였다.이들의 출현은 칼빈을 더욱 힘들게 하고 개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 하였다. 마치 루터에게서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는 결과를 초래 하였듯이 칼빈도 이들을 맞이해서 개혁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간다.

1)제네바의 현지인과 자유주의자.
칼빈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이단성이 있는것은 정죄 하였으며,자유주의자들을 맞이 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2) 교리적인 문제
칼빈을 괴롭혔던 교리적인 문제는 미카엘 세르베투스 와의 신학적 논쟁과 그에 대한 처형에서 야기 되었다. 칼빈은 그를 처형시킴으로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비난을 받아 왔지만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수 없었던 결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많은 형편이다.

3)훈련을 강조하는 칼빈의 개혁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 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나라 였다 그래서 오히려 이것이 방종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제2세대 사람으로서 상당히 문란해 있던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다. 이 4가지 개혁안 중에서 교인들의 생활규범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이 가장 중요하였다.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 가는듯하였으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강하게 요구 하였다.

[1] 생활규범 강조
제네바 시를 이끌어 왔던 사보이 가문의 자유주의자들은 종교개혁과 더불어서 자신들의 방탕한 호기를 펼칠 기회를 맞이 하였다.그래서 이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방종에 빠지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제네바를 바로잡기 위해서 칼빈은 무릅을 쓰고 훈련을 강요하기 시작 하였다.
훈련의 목적은 교회를 오염과 세속화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교인들이 악한 자들과 접촉함으로서 타락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범법자들로 회개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케 하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3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훈련을 시키는데 첫단계는 개인적인 권면 둘째 단계는 공중앞에서의 권면 세째단계는 주의 만찬에 참여치 못하게 했다.
엄중한 죄를 지은자는 감독ㅇ나 목사가 개인적으로 출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전체의 회의를 거쳐서 출교를 명했다 그리고 회개하였을 경우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특히 칼빈은 목회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평신도들 처럼 엄격한 훈련울 받아야 했다. 목회자는 선발에서 부터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였다. 성경지식과 교인들의 교화능력 여부를 시험을 통해서 알아본 다음에 품행에 대한 심사를 통해서 선생이 될수 있는가를 분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선발되면 후보자를 소회의에 넘기고 소회의는 주민들 앞에서 설교케 한 다음에 주민들은 설교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받았다고 보고케 했다. 이렇게 3단계를 거친 심사에서 합격하면 목회자로 세웠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생활규범은 생활전반에 걸쳐서 실시 되었다. 춤,도박,주정,술집출입의 횟수, 방종,사치,분수에 넘치는 접대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등 금지,혹은비난,구금형을 가하였다.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웠다.
주민들의 교회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일년에 한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 하였으며,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밷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칼빈의 훈련은 방종에 빠진 제네바를 바로 잡기에 충분 하였다.물론 칼빈도 힘들었지만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델란드와 스코틀랜드,그리고 영국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좋은 전통이다.

[2] 학교 설립
칼빈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소요리문답을 작성해서 어린이들에게 교육시켰으며,모든 목회자들이 책임을 지게 했다.그러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559년 6월5일 제네바 아카데미 라는 학교를 세우고서 유럽의 유명한 교수들을 초빙하였다. 이 학교는 일반학 과정과 신학과정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유럽의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 들었다. 그 가운데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요한 녹스가 있었으며,네델란드의 아르미니우스는 베자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3] 칼빈의 목회와 그의 최후
제네바에서 칼빈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에 임했었다.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던 1536년으로 부터 3년간 의욕에 찬 목회를 감행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로 쫒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541년 다시금 제네바로 부임해서 처음14년 동안은 반대자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를 했다.그러다가 1555년부터 1564년 사망시까지 최후적으로 9년동안 소신 있는 목회를 할수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월급의 증액을 거부 하였으며,그나마도 구제와 헌금으로 거의 다 바쳐 버렸다.
그는 매일같이 저술활동,설교,강의,교회법원의 회의참석, 목사회의 참석,손님접대,각종 자문등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당하기 벅찬일을 했다. 그는 종합병원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많은 병을 지니고 있었다.그가 걸을수 없게 되자 설교단 의자로 옮겨줄것을 부탁 하였다. 1564년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하였으며,4월 2일 에는 교회로 옮겨가서 베자로 부터 마지막 성찬을 받았다.
그는 1564년 4월25일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증언이 담긴 글을 남겼다.
하나님께 대한 송구스러움과 감사로 가득찬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선택,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 등을 부드럽게 표현 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그치고 저 멀리 하고서 하늘나라를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4월 26일 소위원회로부터 친구들에게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작별인사를 하였다. 5월19일에는 목회자들을 다 초청해서 저녁을 나누었다.파렐은 80세가 넘은 나이로서 칼빈의 임종을 보러 왔다.칼빈은 마지막 몇일동안 기도와 시편의 위로의 시를 암송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5월27일 동녁에서 뜨는 해를 받으면서 54년간을 이 세상에서 살다가 조용하게 하는나라로 옮겨갔다.


제 7 장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의 개혁과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전통적인 로마 카톨릭의 반대로 부터 출발하지 않고 정치적인 문제로 진행되었으며,한사람에 의해서 주도된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서 많은 사람이 조금씩 개혁쪽으로 이동되어 갔다. 따라서 영국의 개혁은 신학적인 이론에 있어서는 자연적으로 대륙의 개혁자들의 신학을 받아들였으며,그것도 주로 스위스 개혁자들의 사상으로 흘렀다.

1.튜더 왕조와 헨리 8세

리차몬드의 공작이었던 헨리7세는 영국 내부의 결속을 어느정도 다진 다음에 종주국 이었던 스페인과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리 사이의 셋째딸인 캐더린을 맞이해서 큰아들 아더와 결혼 시켰다. 1501년 11월 14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1502년 4월에 신랑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해서 아더의 도생 헨리 8세와 재혼 시킬것을 요구했다. 만일 듣지 않으면 결혼 지참금을 회수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케더린은 1509년 시동생인 헨리8세와 결혼 하였다.
철이 들면서 헨리8세는 어쩔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계승할려고 했지만 케더린 사이에는 딸만 낳았고 그것도 다 죽고 오직 메리 튜더만 살아 남았다. 후일의 역사는 그를 가리켜서 피의 여왕 메리라고 부른다.
이렇게 복잡하자 헨리8세는 정치를 추기경인 월시에게 위임한다. 월시는 수도원을 세속화 시키고 거기서 얻은 돈을 가지고 그리스도 대학을 세운다.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헨리 8세는 궁녀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를 갖고 만다.따라서 자신이 게더린과의 결혼은 불법이므로 이혼하고 앤과 함께 결혼하기를 원했다. 월시추기경은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영국을 떠난다.깜짝 놀란 케더린은 조카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챨스5세에게 결혼 뮤효승인을 취소케 하였다.그래서 월시는 실각되고 그의 뒤를 이어 토마스 크롬월이 영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토마스 크롬웰은 헨리8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권 제한령과 사전 보호법을 발동 시킨다. 이 두가지 법으로 교황의 권한이 영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국왕의 허가 없이 교황에게 항소 할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헨리8세와 앤과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공포되고 앤은 여왕이 되었다.
1533년 9월 공주 엘리자베드가 태어나고 1534년 국왕의 영국교회 수장법이 통과 되었다.그리고 1536년에는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 시킴으로서 드디어 영국교회가 탄생되고 말았다. 앤은 두번째 임신과 더불어서 왕위계승법을 통과 시켰는데 이법은 누구든지 왕자를 낳으면 계승권을 가지고 그 다음으로는 메리튜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엘리자베드라고 명기 하였다.
1536년 앤은 두번째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간통죄를 적용해서 처형 당하고 세번째 여인인 제인 세이모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고서 죽고 만다. 그후 헨리8세는 클리부스 앤과 결혼 하였으나 이혼하고 크롬웰도 참수 시킨다. 이제는 보수파에서 케더린 하워드를 왕비로 내세우면서 카돌릭6개 조항을 발표 시켰다. 그러나 보수파도 얼마가지 못하고 헨리8세는 케더린 하워드를 간통혐의로 처형하고서 마지막 여섯번째 부인인 케더린 파르와 결혼 하였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음으로서 에드워드6세가 왕위에 오른다.
헨리8세는 6번을 결혼하면서 각 권력의 암투에 휘말리면서 개혁보다는 권력유지에 부심했다.즉 개혁을 향한 의지는 약하였다 그러나 어느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새로운 독립을 유지 하였다. 그래서 영국 교회는 완전한 개혁측도 아니고,그렇다고 완전한 카톨릭측도 아니고 중간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2. 에드워드 6세

에드워드 6세는 10세에 왕위에 오르면서 너무도 어린 나이에 오르게 되었다.그래서 자연히 외척이 힘을 가질수밖에 없었다. 삼촌이었던 헤르포드의 백작은 섭정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솜머세트 공작으로 승진 하여서 국가의 총사령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솜머세트는 개신교 추종자 였다.종교개혁은 속속 진행되었다.
[1]영국 전역에 대한 방문조사 겸 상황파악이 실시 되었다. 결과는 너무도 심각 하였으며,더 나아가서 당혹케 되었다. 여기에서 성직자의 무능과 무식이 지금까지 교회에 통용되어 왔으며,이것이 교회의 부패의 근원이었음을 지적 하였다.
[2]가톨릭 6개 조항을 파기 시킴과 더불러서 모든 이단법을 파기 시켰다. 이렇게 해서 영국교회와 국민들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3]국회는 이종성찬을 허용하였다. 또한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법령을 무효화 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회는 신아의 미신적인 행위를 금하였다.
[4]에드워드 제 1기도서 의 작성이었다.
이상과 같은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나자 유럽으로 피난 하였던 개혁추진파들이 급거 귀국하였으며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서 영국으로 망명오는 사람들로 있었다. 이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마틴 부처 였다. 이렇게 해서 대륙으로 피난 하였던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과 개혁적 전통을 영국교회에 소개하기 시작 함으로써 영국의 대변화가 일기 시작 하였다.
[5]성경의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허락 되었다.
[6]에드워드 제 2기 도서가 마련 되었다.
[7]영국교회의 대헌장이라고 할수 있는 42개 조항이 발표 되었다. 물론 이 헌장은 엘리자베드 여왕 시절에 39개 조항으로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영국 교회의 근본적인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8]새로운 헌금법을 발동하여서 모든 헌금을 국왕의 수입으로 함으로써 카톨릭교회의 재정을 압박하였다.

3. 메리 여왕의 반동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은 영국의 왕위계승 문제를 야기 시켰다. 영국사람들은 메리에게 눈길을 돌렸으며 왕위에 오른 메리는 자연스럽게 조카인 챨스 5세의 자문을 구하였다. 메리 여왕은 한 많은 여왕 이었다.그래서 그는 헨리 8세의 시절과 에드워드 6세의 시절 법령을 상당수 번복 하였다. 헨리 8세와 케더린과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었으며,메리는 적법한 왕위계승자라고 선포하였다.에드워드의 6세의 모든 종교적인 법안을 폐기 시켰으며,헨리 8세 시절의 반-교황적인 법을 무효화 시켰다. 영국교회의 수장으로서 메리 여왕은 중세적인 예배전통을 그대로 복구 하였으며, 미사를 다시금 실시 하였다.
메리여왕은 스페인의 왕 필립과 결혼 하였다. 그리고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 했다.대륙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서 왔던 개신교 지도자들은 모두 대륙으로 되돌아 갔으며,영국의 개신교들도 대륙으로 도피 하였으며,가톨릭 성직자들이 속속 복귀하였다. 교황청 사절이 공식적으로 파견 되었다.
교황청 사절은 순종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이단 규제법도 발동 시켰다. 이때부터 개신교도들의 박해가 시작 되었다.
메리여왕은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 하였으며,불운한 삶을 살았던 자다.

4.엘리자베드의 수습

엘리자베드(1559-1603)의 즉위 이전부터 영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개신교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리자베드는 1559년 1월 15일 대관식을 거행하고서 왕위에 올랐으며,1603년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영국교회를 개신교쪽으로 이끌어 갔으나 어느한쪽으로도 과도하게 흐르지 않았다. 이러한 좀에서 청교도들의 출현은 당연했다.
[1] 엘리자베드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4월 29일 왕의 영국교회의 지존법을 통과 시켰다. 이렇게해서 헨리 8세의 모든 권한이 엘리자베드에게 주어졌다.
[2] 영국교회의 통일법을 통과 시켰다.그래서 성직자의 복장과 교회의 장식을 비롯한 모든것을 통일 시켰다.
엘리자베드는 1563년 두번째의 국회소집으로서 제 2차 통일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번에는 훨씬더 종교개혁을 강하게 추진 하였으며,많은 점에서 칼빈 유형의 개혁교회의 형태로 기울어져 갔다.
[3] 에드워드 6세의 42개 조항을 39개 조항으로 개정 하였다.
그러나 1563년 두번째 국회는 영국교회의 통일법을 가지고 분열을 초래 하였으며,청도교측의 패배로 끝났다.로마교황청은 엘리자베드의 파문을 미루다가 여기에 맞선 엘리자베드는 반교황법을 통과 시켰다.그리고 1585년 예수회사람들을 영국에서 추방 하였다.
엘리자베드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서 로마 교황권과 로마주의 신앙으로 부터 영국을 보호 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서 화려했던 과거의 영국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엘리자베드의 영국 교회의 개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어느하나도 버리지 아니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영국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를 따르지만 예배모범과 교회조직에서는 가톨릭 모범을 많이 반영한 복합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제 8 장 과격파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루터파,개혁 교회파,그리고 영국 국교회로 대별되는 3대 우파 종교개혁과 재세례파,신령주의파,그리고 반 삼위일체파로 이어지는 3대 좌파 종교개혁이 있다.후자에 속하는 종교개혁을 흔히 과격파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전자에 대한 종교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며,성경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뿐만 아니라 우파에게도 배척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한시적인 운동에 불과 했다고 말할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우파에서 볼수없는 신선함이 있었고 이들은 집단적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 본다.

1.재세례파

재세례파의 기본적인 핵심은 성경의 초대교회를 이 땅에 회복하려는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1] 교회와 국가 사이에 상호 긴장관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2] 중세로부터 내려온 비교권주의 신앙운동들이 있었다.
[3] 이들의 과격한 행동에 이론적인 확인 작업은 루터가 바르크 부르트에 은거해 있던 동안에 비텐베르크의 개혁을 이끌었던 칼슈타드의 개혁안 이었다.
[4] 이렇게 일어날 준비를 갖추고 있던 과격파들에게 종말론적 신비주의 자들의 부르짖음은 구체적인 행동을 시작하라는 나팔소리와 같았다.

1)스위스를 중심으로한 평화주의자.
재세례파의 활동의 시작은 스위스로 부터 일어났다.콘라도 그레벨은 쯔빙글리의 개혁안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더 철저한 개혁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회를 조직하여 사람을 규합 하였다.그들은 예배와 신학과 교회행정에 있어서는 초대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 하면서 교회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공동체라는 용어로 대체하였고,찬송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반대 하였다. 이들은 유아세례의 반대,세속적인 직업 거부등을 주장 하였다 그러나보니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 그리고 스위스의 개혁파들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이들은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려고 했다.비폭력을 주장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죄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고 거듭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2)뮌스터를 점령한 혁명적인 재세례파
이제는 제 2단계 재세례파인 혁명적인 구룹이 등장 하였다. 선구자는 멜키오프 호프만 이었다.그는 본래 루터파에 입문 했다가 쯔빙글리를 거쳐 재세례파로 옮겼다.그는 초대교회의 영지주위에 가까운 이론을 가르쳤다.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론과 묵시적인 종말론을 가르쳤다.그리고 예수님은 슈트라크부르크에 재림하셔서 새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하였다.이런 소문이 네델란드까지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 했다. 그러자 시 당국은 멜기호프를 감금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그리고 그를 처형하자 이제는 장소를 뮌스터로 옮겨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교 하였다. 이렇게 전개되자 도시밖의 재세례파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도시내의 재세례파 종말론자는 가톨릭전통의 모든 유산들을 파괴하고 소각하고 도시내의 비 재세례파 사람들을 축출 하였다. 이제는 시민운동이 일어날 차례였다. 급기야는 전쟁으로 인하여 남자들의 죽음으로 일부다처제를 실시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불만을 품은 내부 반동자들이 주교군과 내통하고서 성문을 열어 주었으며,결국 그들은 무참히 살해되어 갔다.

3)메노 시몬즈를 중심으로 한 평화주의 재세례파
새 예루살렘의 꿈이 깨진 다음에 재세례파 사람들은 다시금 첫 번째의 평화주의를 회복하는 길을 택하였다. 메노 시몬즈는 네델란드 출신의 카톨릭 사제로 일하다가 재세례파에 가담한 사람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기초라는 일종의 변증서를 저술 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과격파가 부르짖었던 칼, 일부다처제도 등을 반대하면서 재세례파의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였다.그래서 이들은 메노나이트라는 교회를 세우고 원하는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교인들의 말씀중심적인 훈련을 강조 하였다. 주의만찬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상징하며,불신자와는 결별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했고 공직을 거부하게 했다.특히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행을 실천하는 길을 강조 하였다.
이들은 3단계에 이르러서 평화주의를 되찾았으나,이들의 이론에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게 되었다.먼저 유아세례를 반대함으로서 재세례 금지법을 어겼으며,둘째는 자의적인 세례란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그리고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했다. 그렇지만 신앙인의 책임과,개인적인 경건과 보다더 성경에 철저하려는 이들의 동기는 높이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2.신령주의자.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로부터 종교개혁이 한창 무르익을때까지 개인적인 영적생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이들은 교권적인 기도문에 의한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영적인 교제를 바람으로서 자연적으로 반- 교회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이들은 종교개혁의 대원리인 성경과 은총과 믿음을 거부하고서 대중속에 파고 들어서 조용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성경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에서 얻은 영감을 더욱 권위있는 것으로 보면서 기록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렸다.그리고 오직 각 개인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나누는 영적인 교제를 가장 가치있게 보았다.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불필요한것으로 보므로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부인하는쪽으로 흐르기 쉽다.어떤 면에서는 이들은 합리주의적인 면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캐스타슈벵크펠트(1489-15612),세바스티안 프랑크(1499-1542),후안 데 발데스(1490-1541)등을 들수 있다 이들은 모두 체계적인 교권을 부인하는 사람들 이었다.그리고 신비주의자라고 할수 있다.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내면적인 영적인 교제는 언제나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마련 이었으므로 어떠한 면에서는 이들이 19세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자유주의의 선구자라고 말할수 있다.

3.반--삼위일체파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부르짖는것이 아니었다.이러한 면에서 루터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예전을 부인하는것이 아니라 잘못 시행되고 있는면을 바로잡자고 외쳤을 뿐이다. 그런데 루터로 부터 시작된 개혁의 바람을 타고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본교리를 부인하는 무리들이 있었다.이들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유럽의 자유지역이라고 할수 있는 폴란드,모라비아 지역으로 도피 하였다.그리고 네델란드를 거쳐서 영국으로까지 퍼졌으며,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미국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들의 신학적인 이론은 “라코비안 요리문답”을 통해서 알수 있다.이들의 신학적 구조는 속죄론에 있다.이들은 전통적인 속죄설을 부인하는 틀안에서 삼위일체를 부인한다.그래서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반대하고 예수께서 도덕적인 스승으로 뛰어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것보다는 도덕적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삶의 모범을 따라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 시켰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자가 아니라 일위일체론자 였다.흔히 유니테리안이라고 부른다.
반-삼위일체론자들은 인격적으로 매우 존경할만한 사람들이었다.높은 학시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칭찬을 받을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전략시킴으로서 초대교회의 에비온주의를 다시 등장시킨 이단들 이었다. 다만 이들이 지금까지 존재할수 있었던 이유는 도덕적인 윤리관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독교라고 부를수 없고 다만 기독교를 빙자한 도덕주의자들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제 9 장 로마 카톨릭의 반동

종교개혁은 단순하게 신앙적인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온통 뒤바꾸어버린 분기점이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이 로마교황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었으며,예술에 있어서도 인문주의와 더불어서 신앙적인 주제를 떠나서 인간을 중심으로 삼았으며,과학에 있어서도 신앙적인 면에서 벗어나서 합리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종교개혁은 각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해 줌으로서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더불어서 권위를 상실케 하였다.
교황청으로서는 잃어번린 권위를 회복해야만 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필요성에서 로마 카톨릭의 신학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트렌트회의를 개최 하였으며,새롭게 조직된 예수회라는 종단의 창설을 허락 하였다.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은 이 두가지 대안으로 해서 종교개혁을 능동적으로 대처 하였다기 보다는 오히려 움추려 들었다.그리고 방어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결국 가톨릭은 자유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1869년-1870년의 바티칸 제 1 차 회의에서 더욱더 보호망을 강하게 하였다가 1962년 -1965년의 바티칸 제 2차 회의에서 보호막을 벗어 버리고 개방을 허락 하므로서 종교개혁의 도전장을 던졌다고 말할수 있다.

1.예수회의 창설과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피레네 산맥에 접한 로욜라에서 태어났다.그는 가문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일찍부터 군대에 가입하였다.그러나 전투에서의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그는 성경과 여러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꿈을 끼웠다.그리고 영성훈련과 운둔생활,고행,대학에서의 공부,신학공부를 하였다.
1541년 4월14일 예수회는 이그나티우스를 공식적인 대표자로 선출하고 4월22일 새로운 교단으로 출발 하였다. 예수회의 창설 목적은 분명했다. 헌장에서 밝히는 대로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실추된 교황의 절대권 회복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교단이 될 것과 해양개척으로 인해서 발견된 신대륙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교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더 붙인다면 학문을 발달시킴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대적인 절대복종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 되었다.
예수회는 그 설립목적과 부합되게 전세계에 선교활동을 펴 나갔다.그러나 예수회는 설립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선교에 있어서는 선교현지의 사상과 너무나도 급속도로 동화되었으며,신학적으로는 자유의지와 은총론에 있어서 정통신앙과 신학에서 종종 벗어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1773년에 교황 클레멘트14세가 예수회의 활동을 전면적으로 중단할것을 선포 하였다. 그러다가 1814년 예수회는 교황 피우스 7세에 의해서 복권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설립에는 정치적인 요소도 많이 작용하였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이들의 선교는 지나친 토착화로 인하여 복음의 왜곡을 가져 오기도 했다.

2.트렌트 회의

트렌트 회의의 목적은 이단들이 점차적으로 강성해 가는것과 교회내부의 부패상을 개혁하는 것이었다.이런것은 주교들의 태만으로부터 야기 되었다고밝히며 새로운 각성을 촉구 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교회의 증가하는 부패는 영적 이상의 상실,교리문제에 관한 신학적인 불명확성, 그리고 종교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었다.따라서 제7차와 제14차 회의에서 교회개혁에 관한 중요 안건으로는 교회의 무는,성직자 중임제,그리고 감독의 소홀등 이었다.
교리문제에 있어서는 불가타판 성경을 정경으로 재확인 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는 의인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의인론에 있어서도 종교개혁을 대항하는 새로운 의인론을 제시하는것이 아니라 종래의 의인론을 재확인하는데 불과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회의는 아무것도 얻은것이 없는 꼴물견의 회의에 불과 했다.

3.종교재판

중세에 유행한 종교재판이 16세기에 신교박멸의 수단으로 부활된 것이다.
고문으로 강요한 고백이 읽어진 후 정죄되면 세속 정권에 의하여 형이 집행되었다.재산 몰수,투옥,유배 및 사형 등의 형이 내려졌다.
바울 4 세 6명의 추기경을 종교재판의 대법관으로 임명하고 전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탄압의 기수로 삼았다. 그들은 교회의 순결을 구실 삼아 이단의 엄벌을 정당화시키려 했다.1542년에 이태리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종교재판의 형틀에 수없는 개혁자들이 처형됐다.

제 10 장 끝내면서

초대교회가 신약의 표준에서 탈선될 때마다 새로운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교회는 신약교회적 면모를 새롭게 갖추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이런 개혁운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것이 1517년을 계기로 일어난 북유럽의 종교 개혁 운동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빈만의 운동은 아니었다.종교개혁 이전부터 교황의 무오설을 비롯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탈선된 교리에 대하여 누누히 지적해오던 선구자들의 터 위에서 계속된 것이다.
이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위크맆,후쓰를 위시한 신학적 도전은 중세교회의 기초에 균열을 가져오게 하였으며,신비주의 개혁자들의 집단적 운동은 점차 하나의 범 시민 운동으로 번져서 중세교회의 단일체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거기에다 교회의 위신은 교황청의 분열로 땅에 떨어졌으며,교황청의 지나친 과세 및 면죄부 판매는 일반 시민의 원망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이러한 부조리는 16세기 유럽대륙 중에서 독일의 경우가 제일 심했다. 또한 독일은 연방제이므로 교황의 세력이 왕권을 통하여 직접 미치기가 힘들었으며,르네상스를 통한 인문주의의 영향이 지성인들 사이에 컸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도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날 루터의 개혁운동을 보다 폭넓은 동기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종교적 관심에서 출발했던 교회개혁운동으로만 보아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宗敎改革 Reformation]




요약
중세 가톨릭교회를 분열시키고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수립한 16세기의 교회개혁. 중세 가톨릭교회는 14세기의 교회분열로 인하여 보편적 권위를 잃고 보헤미아에서는 J. 후스에 의하여 교회개혁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콘스탄츠공의회(1414∼16)는 분열의 해결 즉 교회 전체의 통일과 후스 처리에 일단은 성공하였으나 교회 전체의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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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중세 가톨릭교회를 분열시키고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수립한 16세기의 교회개혁. 중세 가톨릭교회는 14세기의 교회분열로 인하여 보편적 권위를 잃고 보헤미아에서는 J. 후스에 의하여 교회개혁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콘스탄츠공의회(1414∼16)는 분열의 해결 즉 교회 전체의 통일과 후스 처리에 일단은 성공하였으나 교회 전체의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그 뒤 신학자·신비주의자를 비롯해서 각 방면으로부터 개혁요구가 제시되었으나 가톨릭교회는 세속적 영화와 권세를 추구하여 교의의 형해화(形骸化), 성직자의 부패를 쇄신하지 못하였다. 이때 M.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은 새로운 신앙원리에 바탕을 둔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를 분열시키고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종교개혁운동은 J. 칼뱅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보이며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 무렵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는 단계여서, 그 과정에 종교개혁운동이 끼어들게 되었다. 각국의 정치사정에 따라 그 전개양상은 여러 가지 변화를 보였는데, 국왕권력의 절대화에 이바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국가의 독립운동의 사상적 근간이 되는가 하면 양심의 자유도 낳게 하여 근대화에 이바지하는 측면이 나타났다.


1 루터의 개혁
가톨릭교회는 구원으로 이르는 길은 성사(聖事)에 있다고 하고, 특히 회개(고백)의 성사가 인간을 속죄로 인도하는 출발점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 속죄는 선행으로 얻어지는데 그것을 쉽게 하기 위하여 면죄부(免罪符)를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 건설을 위하여 면죄를 고시하고, 독일에서 면죄부의 판매를 허락하였다. 면죄부는 <상자 속으로 던져 넣은 돈이 짤랑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구원을 받는다>고 선전되어 마구 팔렸다. 루터는 사람들이 면죄부를 삼으로써 모든 벌과 죄책으로부터 해방되며 확실히 구제된다고 믿는 사실에 종교적 위기를 느꼈다. 금전에 의한 면죄부의 구입이라는 안이한 행위에는 <회개>라는 그리스도신자의 기본적 행위가 완전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운동의 도화선이 된 《95개조 논제(1517)》에서는 로마에 의한 독일의 재정적 착취를 문제삼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신앙원리를 제시하였다. 루터는 이 논제의 제 1 조에서, 그리스도가 <믿는 자는 일평생 회개하기를 원하였다>고 말하고, 제36조에서 <진실한 회개가 벌과 죄책으로부터의 완전한 사면(赦免)>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제28조에서 하느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사람은 단지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며(義認說), 그 믿음의 근거는 성서밖에 없다(성서주의)고 확신하였다. 이 확신은 다시 만인사제주의(萬人司祭主義)를 이끌어 냈다. 《독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1520)》에서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교인은 진실로 교회적 신분에 속하며 서로간의 직무상의 구별 이외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하여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서의 특별한 신분 특권을 가진 성직자 계층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근원적 주장은 가톨릭교회체제(敎階制度)의 토대를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1519년 가톨릭신학자 J. 에크와 가졌던 라이프치히토론회에서 루터는 교황의 교의상의 권위와 공의회의 무류성(無謬性)을 부정하였고, 20년에는 교황의 파문협박장을 공공연히 태워버렸으며, 21년 보름스국회(제국의회)에서는 황제 카를 5세의 면전에서 행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았으므로 제국추방처분형을 받았다(보름스칙령). 이와 같은 신념에 근거한 루터의 영웅적 행위는 독일국민 각계각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개혁운동은 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국추방처분형을 받은 루터는 작센의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 한때 은신했다. 한편 국민 각계층은 이 무렵부터 루터의 교설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루터로부터 이반(離反)해 나갔다. 비텐베르크에서는 21년 A.R.B. 카를슈타트가 교회관습의 구체적 변혁을 지향한 이른바 비텐베르크 소요를 일으켰다. 22년 F. 지킹겐이 이끄는 제국기사가 <기사의 난>을 일으켰으며, 24년에는 독일농민전쟁이 발발하였다. 농민들은 성서를 방패로 촌락에 의한 목사의 임면권, 십일조(十一條) 폐지, 농노제의 폐지, 공조(貢租)·부역의 경감, 공유지의 확보 등을 요구하며 봉기하였다. 당초 루터는 농민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농민편에 서서 영주측의 양보를 요구하고 중재재정적(仲裁裁定的) 해결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T. 뮌처가 튀링겐지방의 농민을 이끌고 사회체제의 변혁을 목표로 활동하자 농민을 철저히 탄압할 것을 제후에게 호소하였다. 《반란을 일으키는 영혼의 소유자에 관하여 작센의 제후에게(1524)》에서는 뮌처의 폭동적 성격을 논하고, 《농민의 살인, 강도단에 대항하여(1525)》에서는 영주들을 고무·격려하고 반란농민의 철저한 처형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루터는 농민들의 주장과 행동이 영적 사항과 세속적 사항을 혼동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는 양자의 명확한 구별 위에 세워진 루터의 세계관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25년 인문주의자의 대표인 D. 에라스무스와도 갈라섰다. <인문주의 없이는 종교개혁도 없다>고 하듯이 당초 인문주의자는 루터를 지지하고 공동전선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의 파문이 확정될 무렵부터 인문주의자들은 루터를 지지하는 자와 가톨릭에 머무르는 자로 나뉘면서,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1524)》, 이에 응한 루터의 《노예의지론(1525)》으로 인하여 양자는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이처럼 국민 각 계층이 루터의 개혁운동에서 이탈하자 개혁운동은 영방제후(領邦諸侯)와 긴밀하게 밀착되어 갔다. 독일농민전쟁 뒤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개최된 26년의 슈파이어국회에서 <일반공의회 또는 국민회의의 개최까지>라는 조건부이기는 하나, 제후는 <신과 황제에 대해서 책임질 것을 기대하면서, 다만 확신할 수 있도록 스스로 생활하고 통치하며 사태를 처리해야 한다>고 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 결의에 입각해서 루터파 제후는 영내의 종교적 정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작센선제후령 내에서는 《순찰자를 위한 훈령(1527)》을 발표하고 루터파 신학자 가운데서 순찰자를 임명하여 영내의 종교와 교육사정을 시찰하게 하여 종교적 통일을 꾀하였다. 이 순찰교회제도는 종교적 통일을 꾀하는 동시에 영내의 정치적 안정도 확보한다는 사실상의 영방제후 교회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져 갔다. 이후 종교개혁은 주로 영방제후들이 담당하여 전개하였다.


2 츠빙글리의 개혁
독일의 종교개혁은 루터의 개성과 그 사상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의 사상을 전한 군소개혁자를 무시하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남독일에 큰 영향을 끼친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U. 츠빙글리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완성하였는데, 이전에는 스위스 인문주의의 흐름에 동조한 사람이었다. 에라스무스에게 크게 공명하여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의 입장에서 성서중심주의를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재생을 생각하고 있었다. 츠빙글리는 <우리 고향사람들이 루터의 이름을 듣기 훨씬 전인 1516년에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하여 루터와는 별도로 신앙에 의한 의인을 재발견하고 개혁에 착수했던 것을 강조하였다. 루터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에라스무스의 그리스도교 재생의 입장을 종교개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단계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결정적인 대립을 확인한 현대 시점이 아닌, 1520년 전후의 시점에 서서 종교개혁과 인문주의의 관계를 볼 때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츠빙글리의 개혁방식은 도시의 시민적·정치적 전통에 적합한 것이었다. <도시는 종교개혁운동의 모체, 본래부터 있던 사회기반으로 간주하여야 한다(J.A. 묄러)>라고 주장하였는데,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도시에서의 최초의 성공사례였다. 따라서 취리히의 개혁방식은 다른 여러 도시가 본받게 되었다. 그 개혁방식은 공개토론회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도시의 영방제후의 경우와는 달리, 종적 지배관계가 아닌 횡적인 동료간의 단결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가 기본축(基本軸)이었다. 종교개혁을 실시하는 경우에도 명분상으로는 시민의 총의에 근거하였다는 동료적 관계 위에서 실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이 공개토론이다. 이는 도시의 정치를 결정하는 확대시참사회의(擴大市參事會議)의 면전에서 다수의 성직자·신학자·학자를 모아 놓고 개혁의 가부를 성서에 비춰서 토론하고, 그 토론의 경과와 결론을 반영하여 확대시참사회의가 도시 내의 질서와 평화유지를 도모하면서 개혁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만인사제주의의 원리를 실현한다는 취지로서 가톨릭교회로부터 자립해서 속인인 시민도 참가하여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단 결론이 도출되면 도시당국자는 개혁자와 협력하여 위로부터의 개혁통일을 꾀하며 신교회를 수립해 나갔다. 이 방식은 남독일·스위스의 각 도시에 도입되어 도시의 종교개혁을 진전시켰다. 한편 개혁자와 도시당국자가 손을 마주잡은 형국으로 개혁을 실시하는 데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츠빙글리를 비롯한 취리히의 젊은 지식인들이 철저한 성서주의와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며 시작한 이 운동은 회개한 자들의 증표로 재세례(成人洗禮)를 실시하는 재세례파운동으로서 순식간에 도시민중과, 농민전쟁 패배 뒤 우울한 상황 아래 있던 농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독일에서는 H. 후트·B. 후프마이어 등의 활약이 주목되는데, 전파되는 과정에서 신비주의·천년왕국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 운동은 가톨릭·프로테스탄트 양파의 제후 및 도시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전형적인 예로 뮌스터천년왕국사건(1533∼35)을 들 수 있다.


3 종교개혁의 정치화
종교개혁은 점차 정치적 투쟁의 색채가 짙어갔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교도시동맹을 결성하고 가톨릭 세력에 대항하였다. 루터파 제후의 중심인물이었던 헤센대제후 필립은 프로테스탄트의 정치적 대동맹 결성을 위해서 1529년 루터, 츠빙글리 등 신학자를 마르부르크에서 모임을 갖게 하여 신학적 일치를 달성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황제 카를 5세는 3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국회를 개최하여 종교분열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루터는 제국추방형을 받은 상태라 공식장소에 모습을 나타낼 수 없으므로 그의 측근인 P. 멜란히튼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종합해서 제국회의에 제출하였다. 가톨릭과 교리상의 차이를 될 수 있는 한 줄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회답은 로마교회로 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보름스칙령의 재실시에 의하여 31년 5월 15일까지 로마에 복속하라는 권고가 내려졌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루터파제후는 슈말칼덴동맹을 맺어 정치적으로 결집하여 군사적으로 황제와 가톨릭 제후에게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다. 38년 가톨릭측도 뉘른베르크동맹을 결성하여 결국 슈말칼덴전쟁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46년 루터가 사망하고 프로테스탄트 제후의 중심인물이었던 작센제후 모리츠의 배신까지 겹쳐 프로테스탄트측은 패배하였다. 48년 황제는 가신조협정(假信條協定)을 제국법으로 공포하였는데, 부분적으로 타협할 의사는 보이고 있었으나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가신조협정은 프로테스탄트측에서도 평판이 나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측의 쇠퇴가 심해지자 황제는 승리에 도취되었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아들 필립을 제위계승자로 뽑으려 하고 에스파냐와 독일을 항구적으로 결합시키려고까지 하자 가톨릭제후도 황제에게 반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모리츠는 한번 더 배반을 하여 신교쪽에 서서 황제를 공격하였다. 황제군은 패배하고 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를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 결과 영방제후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중 어느 한쪽 종파를 선택해서 그것을 신하에게 강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제국도시는 양파 병존을 인정하여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츠빙글리파·칼뱅파·재세례파를 선택할 신앙의 자유는 없었다.


4 칼뱅의 개혁
루터·츠빙글리의 개혁이 결국은 국가교회체제의 수립으로 끝난 데 비하여, 칼뱅에 의한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형태로 개혁이 전개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제네바는 타향이며, 그는 시민적·도시정치적 전통의 밖에 있었다. 츠빙글리의 경우와 같이 도시당국과 유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평생을 통해서 도시당국과 긴장·대립 관계를 유지하였다. 칼뱅신학의 특징인 교회(종파)와 국가(정치)의 분리와 구별의 외적 조건이 여기에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그의 신학사상이 작용하였다. 그는 자율적 교회훈련,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자를 교회에서 제외 또는 치유·교정시키는 방법>을 교회에 정착시키는 것에 심혈을 쏟고, 교회정치의 직제로서 장로제(長老制)를 확립시켰다. 시민은 그에 의해서 엄격한 공공도덕을 준수할 것과 또 시민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엄격한 규율을 지킬 것을 요구당하였다. 이것은 칼뱅의 예정설 교의의 한 측면이기도 하였다. 즉 인간의 구원은 신만이 예정하고 있으며 인간은 신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신에게 선택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시민생활도 당연히 신의 뜻에 알맞는 규율바른 것이어야 하며, 헌신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그 전제가 된다. 칼뱅사상의 집대성인 《그리스도교 요강(1536)》은 시참사회(市參事會)가 신성한 가르침이라 인정하여 제네바의 종교개혁이 확립되었다. 한편 칼뱅의 가르침은 주로 신흥시민층과 중산층을 통해 각국으로 전파되어 스코틀랜드에서는 프레즈비티리언즈(長老派), 잉글랜드에서는 퓨리턴(淸敎徒),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네덜란드에서는 고이센이라는 교파를 형성하였다. 칼뱅파의 세력보다 우세한 종파가 존재하였던 이들 나라에서 그들은 <신의 도구> 의식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행동주의를 취하였다. 능동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고,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또는 민족운동과 결합해서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J. 녹스가 지도하였다. 그는 망명중 칼뱅과 알게 되었으며, 고국에 칼뱅적 종교개혁을 전파하고 스스로 《스코틀랜드신앙고백》을 기초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에스파냐의 가혹한 지배에서 독립하려는 운동과 종교개혁운동이 결합되었다. 1566년 칼뱅파의 교회회의에서 봉기를 지지하여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다. 북부지방은 위트레흐트 동맹 아래 결집하여 모든 강제신앙에 대한 저항을 선서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칼뱅파의 엄한 교회규율을 제정하고 독립도 달성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종교개혁이 왕권과 귀족의 정치투쟁에 말려들었다. 72년 성 바르톨로뮤의 밤의 학살(2만∼5만명)에도 불구하고 위그노교도는 귀족과 동맹하여 교회의 조직화를 진행시켜 갔다. 98년 낭트칙령으로 개혁파교회도 잠시 용인되었다.


5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 종교개혁의 발단은 종교적 요소보다는 정치적 요소와 국왕의 이혼문제에서 비롯되어 다른 나라와는 다른 경과를 거쳤다. 튜더왕조 제 2 대국왕 헨리 8세는 1521년에 루터를 비판한 《7성사의 확립》을 저술하여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으나, 왕후 캐서린과의 이혼을 교황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변하여 로마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였다. 이른바 종교개혁의회(1529∼36)를 개최하여 다수의 반로마적 의회입법을 성립시켰다.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제정하여 국왕은 <영국교회의 지상 위의 최고통치자>가 되었다. 교회조직면에서는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하여 영국국교회(잉글랜드교회)가 성립되었으나, 교의나 의식면에서는 6개조법(六個條法, 1539)에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가톨릭적이있다. 그러나 다음 에드워드 6세 때에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한 《42개조 신앙고백(1553)》이 제정되고, 모국어에 의한 통일적 예배양식이 《일반기도서(1552)》로서 정해지는 등 T. 크래머에 의해 교의의 프로테스탄트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에드워드 6세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헨리 8세에게 이혼당한 캐서린의 딸 메리 1세가 53년 왕위에 오르자 재차 가톨릭화가 실시되었다. 메리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고 이단단속법(異端團束法)을 부활시켰으며 크래머 등 고위성직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을 처형하였으므로 <피에 굶주린 메리>란 별명을 얻었다. 다음의 엘리자베스 1세는 중도(中道)를 택하여 영국국교회를 확립시켰다. 59년 수장령과 예배통일법을 제정하였는데, 수장령은 헨리 8세 때와 마찬가지로 왕권을 교회보다 우위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국왕을 성속(聖俗) 양면에서의 최고통치자라고 규정하여 국왕의 사제적(司祭的) 권위는 약화되었다. 예배통일법은 에드워드 6세의 《일반기도서》를 부활시킨 것인데 여기서도 반가톨릭적 성격이 약화되었다. 71년 《42개조신앙고백》을 요약한 《39개조신앙고백》이 의회에서 인정되었다. 《42개조신앙고백》과는 달리 그다지 종교개혁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영국교회의 전통을 표출하고 있었다. 《39개조신앙고백》은 오늘날 아직도 영국국교회의 신앙기준이 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중도주의가 평탄한 길만 걸었다고는 할 수 없다. 국교기피자는 가톨릭만이 아니라 청교도 속에도 있었다. 60년대부터 비난의 뜻을 담아 청교도라고 불렸던 칼뱅교도는 교회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 행사에 동의하지 않고 국교회 내부에 장로회제도의 설립을 꾀하였다. 또한 단일교회의 자율성을 주장한 회중파(會衆派)가 탄생하고 그 중 분리파는 국교회로부터 분리·독립된 교회조직을 지향하였다. 그 때문에 국교기피자처벌법(1593)의 제정에 의하여 철저하게 탄압받았다. 그러나 청교도를 모두 탄압할 수는 없었으며 청교도혁명에 의해서 영국국교회는 크게 흔들렸다.





연표


AD 1415 J. 후스, 콘스탄츠공의회에서 이단이라 하여 화형

1483 M. 루터,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출생

1484 U. 츠빙글리, 스위스 빌트하우스에서 출생

1509 J. 칼뱅, 프랑스 누아용에서 출생

1512 루터, 성서학 강의를 개시

1516 D. 에라스무스, 《교정신약성서》 간행

1517 루터, 《95개조 논제》 발표

1519 츠빙글리, 취리히에서 개혁 개시. 루터, 라이프치히에서 J. 에크와 토론회

1520 루터, 《독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 간행, 교황의 파문협박장을 불태움

1521 루터, 보름스국회에서 제국추방처분형(보름스칙령).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P. 멜란히톤, 《신학요강(神學要綱)》을 간행

1522 F. 지킹겐 등, <기사의 난>을 일으킴

1523 츠빙글리, 《67개조 논제》를 제 1 회 취리히토론회에 제출

1524 독일농민전쟁 시작(~25). 에라스무스, 《자유의지론》을 간행

1525 루터, 《농민의 살인, 강도단에 대항하여》 간행. 루터, 《노예의지론》으로 에라스무스와 자유의지논쟁. T. 뮌처 처형

1526 제 1 회 슈파이어국회, 보름스칙령 실시 연기

1527 작셀선제후령 안에서 순찰교회제도 개시. 스웨덴에서 종교개혁 실시

1528 베른시, 종교개혁 도입

1529 제 2 회 슈파이어국회, 보름스칙령 실시 요구. 루터와 츠빙글리, 성찬론을 둘러싸고 마르부르크종교회담. 영국에서 종교개혁의회(~36) 시작

1530 아우크스부르크국회에서 신·구교의 화해 실패.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루터파의 기본신조가 됨

1531 슈말칼덴동맹 창설. 츠빙글리, 카펠싸움에서 전사

1534 프랑스에서 신교도 탄압이 격화되어 칼뱅, 스위스 바젤로 망명. 영국, 수장령 제정

1536 칼뱅, 《그리스도교강령(초판)》 간행, 제네바의 개혁운동에 참가. 영국의 헨리 8세, 수도원 해산 실시. 루터파 및 츠빙글리파간에 《비텐베르크일치신조》 성립. 루터주의가 남독일 침투. 덴마크, 종교개혁 착수

1538 칼뱅, 교회규율을 둘러싸고 도시당국과 싸워 제네바에서 추방됨

1539 뉘른베르크에서 가톨릭제후의 동맹 성립

1540 예수회 인가

1541 칼뱅, 다시 제네바에서 활약

1545 트리엔트공의회 시작(~63)

1546 슈말칼덴전쟁 시작(~47)

1548 아우크스부르크의 <가신조협정>, 제국법으로 공포

1549 《취리히일치신조 (제 1 스위스신조)》, 츠빙글리파와 칼뱅파의 일치신조 성립

1552 영국, 《일반기도서》 제정

1553 영국에서 《아우크스부르크신앙고백》을 기준으로 《42개조신앙고백》 성립

1555 아우크스부르크화의. 칼뱅, 제네바에서의 지위 확립

1559 영국, 수장령 및 예배통일법 제정. 국교회제도 확립. 프랑스개혁파, 제 1 회 전국교회회의

1560 《스코틀랜드신앙고백》, 의회에서 승인

1562 위그노전쟁(~98)

1563 영국국교회 《39개조신앙고백》 성립

1565 네덜란드, 신교파 귀족동맹을 결성

1566 네덜란드, 칼뱅파 민중 성상 파괴

1568 네덜란드독립전쟁(~1648)

1572 성 바르톨로뮤의 밤 학살

1573 남프랑스의 미요에서 개혁파가 정치회의를 개최. 위그노파는 국왕정부에서 독립한 정치조직을 결성

1576 프랑스 과격파 가톨릭, 구교동맹 결성

1579 네덜란드 가톨릭파 귀족, 아라스동맹 결성. 이에 대항하여 위트레흐트동맹 성립

1593 영국, 국교기피자처벌법 제정

1598 낭트칙령, 프랑스 개혁파교회 용인

1618 30년전쟁 시작(~48)

1620 청교도 회중파, 메이플라워호로 북미 이주

1640 영국, 청교도혁명 시작



독일의 역사-종교개혁시대

16세기와 17세기의 유럽은 종교개혁으로 인한 종교분열과 종교전쟁의 시기였다.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에 의해 정신적인 변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새롭게 깨어난 비판의식은 교회의 폐해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불만은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폭발되었다. 그 결과 종교적인 영역을 훨씬 뛰어넘어 전체 사회체계가 개혁운동 속에 빨려들어갔다. 루터를 지지하는 기사들이 1522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1525년에 발생한 농민전쟁(Deutscher Bauernkrieg)은 독일 역사상 첫번째의 커다란 혁명적 운동으로써 정치적 개혁과 사회적 개혁이 동시에 추구되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농민전쟁은 1524년에서 1525년 사이에 일어난 봉건 영주에 대한 독일 농민들의 집단 반란으로 1524년에 튀링겐 농민이 봉기한 데 이어서 남서 독일의 농민이 잇달아 봉기하여 공동 강령으로 '12개조의 요구서'를 내걸고 싸웠으나, 지역적인 대립과 내부 분열로 시바벤군에게 패배하여 1525년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이로써 농민들은 다시 봉건적 지배에 굴복하고 중소 영주의 정치적 세력도 저하되었으며, 독일은 연방 군주에 의한 절대주의 체제가 강화되었다.




독일농민전쟁의 주요전투지도
당시의 농민



그 후 독일의 제후들은 루터파와 카톨릭파로 나누어져 각각 동맹체를 구성하였다. 종교개혁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합스부르크가의 황제인 카알 5세 였는데 그의 목표는 제국의 통일과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므로 루터 및 루터를 지지하는 독일의 제후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조약으로 지방제후들은 종교를 그들의 예속 아래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으며, 개신교는 구교와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음으로써 독일은 종교적으로 양분되었다. '지배자의 신앙이 지배지의 신앙이다'라는 원칙에 의해 각 지역의 주민들은 그들 군주의 종교에 따라 구교와 신교 둘중 하나를 믿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북부 및 중부독일은 대부분이 신교 지역이고 남부는 주로 구교이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정치적 종교적 분쟁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수 십년 동안 카톨릭 측에서 반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카톨릭을 지지하는 남부독일의 제후국인 바이에른의 대공들이 반종교개혁을 수행하였다. 1555년 조약 당시 독일은 전체 5분의 4가 개신교였으나 반종교개혁으로 많은 제후국들이 다시 카톨릭으로 돌아섰다. 독일에서 카톨릭 세력이 확대될수록 신교와 구교간의 긴장이 더 커졌다. 보헤미아에서도 반종교개혁을 수행하려는 합스부르크가의 무력적인 시도에 신교파도 무력으로 대응함으로써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이는 전유럽의 대결로 확산되어 종교적인 대립과 정치적 대립이 충돌하였다. 30년 전쟁은 종교분열에 해답을 제공하지도 못한채 독일에 정치적 경제적인 큰 손상을 입혔다. 이 전쟁으로 독일의 대부분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인구가 격감했다. 독일이 이 전쟁의 폐허로부터 일어서는 데는 1세기가 걸렸다. 30년전쟁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 사이에 있었던 종교 전쟁으로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교 사이에 벌어졌던 최대 종교전쟁이다. 합스부르크가(家)의 카톨릭교에 의한 독일 통일책에 대하여 대제후(大諸侯)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도화선이 되어 덴마크군과 스웨덴군이 독일에 진주하였고, 후에 프랑스군도 가담하여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이 났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로 독일의 각 제후국은 독립국에 가까운 권력을 얻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유명무실해졌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이 조약을 끝으로 종교 전쟁은 마무리를 지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프랑스의 유럽 제패와 프랑스 문화의 유럽 지배가 시작되었고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이 촉진되었으나 독일의 국토는 황폐해지고 정치적 분열과 문화 발달이 뒤지는 원인이 되었다.




30년 전쟁 이후 독일지역
루터의 연설



1648년의 베스트팔렌 강화조약에 따른 정치적 결과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합스부르크가의 우월권은 깨어졌고, 프랑스와 스웨덴이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스위스와 네덜란드가 독립했다. 독일의 다른 제후들도 황실의 약화에 의해 실제적인 독립을 이루어 무려 300개 이상의 연방들이 독일에 들어서게 되었다. 제후들은 그들의 영내에서 신성로마황제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절대권력을 가진 제후들과 도시들은 이제 자유롭게 다른 나라와 개별적으로 동맹을 맺을 수 있게 되었고, 제후들의 득세로 신성로마제국은 전체로서의 힘을 상실하여 이름만 남아 있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의 정치적인 허약성은 대대적인 문화의 부흥기를 가져다 준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독일은 표현력이 풍부한 문학적인 언어를 가지게 되었다. 철학과 시, 건축 및 음악이 이 시기에 전례없는 전성기를 누렸다.

 

출처 : 해안도로
글쓴이 : 해안도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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