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교회사
1. 미국 종교의 창조적 세력
미국교회사의 전반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식민지 시대의 미국의 종교는 대체로 급진파들에 의하여 세워졌고 이들의 지도자들은 대개 종교적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적이었다. 청교도 식민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새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환상을 지녔고 낡은 것의 제한과 기반들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였다. 독립 때까지 미국백성들은 종교적 자유 하에 종교에서의 개인주의를 장려하였다.
둘째, 미국은 그 대륙을 점차 정복하여 나갔고 교회는 이를 뒤따랐다. 새로운 개척지는 새 교파들의 증가에 우호적인 환경을 제공하였고 대학의 증가도 이러한 결과의 하나였다.
셋째, 미주교회 분열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흑인 노예 문제였다. 따라서 미국교회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예제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 내에 노예제도에 대한 찬반의 형성은 면화재배가 거대한 산업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교회가 면화재배 자로 등장하면서 노예제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 헌법 채용에 있어 모든 교회들은 만장일치로 노예제에 반대하였다. 남북 전쟁의 발발은 이러한 교회의 입장을 공고하게 하였다. 남북 전쟁이래 대형 흑인교회들의 급속한 성장은 미국에서 특수한 발전이었고 노예제도의 발전과 연관해서 연구되어야 한다.
넷째, 18세기의 30년대까지 미국 식민지의 저 계급들은 조직된 종교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인구에 비교하여 기독교계 여타 국에서보다 미국에 더 많은 비 교회 적 국민들이 살고 있었다. 교회에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였고 부흥회라는 특별한 방법이 고안되었다. 대 부흥 운동은 미국인들에게 심각한 인상을 심어준 첫 번째 종교 운동이다. 그러나 개척지의 조건들이 자취를 감춤에 따라 부흥회라는 미국 기독교의 이 특이한 상황은 점차 감소하고 교회를 위한 학문적 훈련의 강조에 따라 감정적 호소도 약화되었다.
다섯째, 국가 형성기간에 있어서 미국의 종교적 발전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와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동일한 영향은 국가와 교회에 비슷한 결과를 산출하였고 상호간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미국 역사 초기에 국가주의가 널리 영향력을 가졌고 국민의 정치적 조직뿐만 아니라 종교적 조직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많은 기독교 종파들의 반발을 샀고 지방주의의 발흥이 뒤따랐다. 이 시기에 노예제도가 국가를 분단하였고 또 교회를 분단하였다. 교회들은 국가의 이익과 교파간의 이익을 희생하여 그들의 교파의 이익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교파에의 충성이 크게 강조되었고 교리 적 분립주의는 혼동을 가중시켰다. 독립 전쟁, 남북 전쟁,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 미국의 대 전쟁 동안에 미국교회들은 정부의 계획들을 지지하였고 전후 영향들을 강하게 받았다. 남북전쟁 후에 일어나는 실업과 정부의 새로운 국가주의와 중앙집권제는 교회 내에 연방회의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개체 교회내의 효율성과 집중화의 강조인 동시에 새로운 초 교파적 조직의 시작인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동안 교회들과 국민들은 국제적 정신을 가지게 되었고 대 세계 계획들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전후 반응이 뒤따르고 협소한 국가주의에로 돌아갔다. 제 2차 세계대전동안과 전쟁 후에 있어 미국교회들은 다시금 세계적 의식을 갖게 되었고 세계재건과 WCC를 형성하는데 지도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처럼 동일한 영향들이 교회와 국가에 비슷한 결과들을 산출하였고 각기는 서로 계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구라파적 배경
본 장은 16, 17세기에 미주에 이주해서 미국교회의 기반을 놓았던 종교가들의 배경이 되는 구라파의 형편을 살펴보는데 있다. 미국은 영국인들에 의해 처음 식민지화된다. 그리고 전 식민지 시기를 통하여 영국 본토로부터 온 식민들이 모든 식민지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영국은 국내 전쟁 없이 종교개혁을 통과하였다. 헨리 8세는 로마로부터 분리하여 국 교회를 형성하였고 왕을 최고 지도자로 하고 왕이 감독들을 임명하고 또 교회제도를 지배하였다. 이 국 교회는 카톨릭 적 성향이 강했으나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자 그는 영국교회를 개신교 화하려고 했다. 예배 형식이 프로테스탄트화 되었고 예배 용어로서 라틴어 대신 영어가 등장하였고 설교와 찬송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 때부터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전 신도들에게 베풀어지도록 되었다. 그러나 카톨릭 교도였던 메리 여왕의 즉위는 개신교도들에게 무서운 핍박과 죽음 추방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종교적 혼동 기에 안정을 가져다 준 것은 엘리자베드 여왕의 즉위였다. 여왕은 수장령을 발표하여 이에 반대하는 카톨릭을 경계하였고 박해를 피해 망명하였던 영국 개신교도들의 귀국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 귀환 망명객들은 더 과감한 개혁사상에 무장되어 있었고 1563년에는 칼빈의 견해를 반영한 39개조 신조가 채택되었다. 이처럼 영국과 미주에서 급진적 청교도 운동이 승리를 거둘 뻔했다. 그러나 그 옛 중세적 의식이 승리하였다. 오직 국 교회만이 용인되었으며 모든 비 국교 도들은 파문을 당하거나 투옥되게 되었다. 카톨릭교는 이에 반대하고 저항하였기에 국가에 치명적인 적으로 고려되었고 반 카톨릭 적 입법은 더욱 엄격하여졌다. 또한 청교도들도 이에 반대하였고 영국교회를 정화하려고 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초대교회의 단순성에로 복귀하려는 급진파들이 있었는데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리었다. 그들은 종교를 위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외에 아무 것에도 묶여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결국 추방되고 화란에서의 10년 간 망명생활 끝에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종교적 자유의 새로운 삶을 찾아 미주를 향해 떠난다. 그러나 영국교회 내에 고 교회를 형성하며 그 테두리 내에 머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들은 교회를 방어하고 감독신수설을 주장하고 또 상징적 의식들과 교회의식들을 지지하였다. 또한 이들 가운데 교리 적 다양성들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청교도들은 칼빈의 교리를 주장하였고 고 교회는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를 더욱 받아들였다. 찰스의 제위기간에 청교도들은 많은 심한 박해에 직면하였고 신 영주로 떠났다. 그러나 그 후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성공하고 공화제로 변한 후 국교 도들이 박해를 받아 대량으로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등으로 떠나게 된다. 또한 이시기에 다양한 군소 종교단체들이 출현하였는데 특히 퀘이커는 주목할만한 현상이었다. 여기에는 조지 폭스라는 인물의 활동과 윌리엄 펜의 후원이 크게 작용하였다. 영국 혁명 초기에 미주식민지들 가운데 가장 큰 단일한 인종적 요소의 하나는 스카치- 아이리쉬였는데 이들은 조지 위셔트와 존 녹스의 영도아래 장로교 제도를 형성한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북아일랜드 식민지화는 경제적 압박을 가져왔고 이들은 경제적 이유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주로 이주하였다. 네델란드는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스페인은 카톨릭의 입장에서 네델란드를 정치적 종교적으로 핍박하였다. 알바공의 무자비한 탄압이 있은 후 오렌지공의 영도 하에 독립전쟁을 일으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력화시킨 후 독립을 쟁취하였다. 스페인에 대한 길고 쓰라린 전투는 화란 개신교를 강화하였다. 칼빈과 쯔빙글리, 루터는 모두 화란에 그 추종자들을 가졌다. 이들은 전쟁으로 인구가 많이 줄었으므로 미주로 많이 이주하지는 않았고 동인도회사의 경영 때문에 약간의 수가 이주하였다.
독일인들의 이주 양태를 보면 1750년에 약 10만 명의 독일인들이 미주의 영국식민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30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길을 찾아 미국으로 왔다. 30년 전쟁의 종말을 고하는 웨스트팔리아 조약은 카톨릭, 루터교, 개혁파교도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주었으나 독일 퀘이커와 던커즈, 메노나이츠 등 소 종파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았다. 이러한 종교적 박해, 편협한 통치자들의 전제 파괴적 전쟁들 그리고 경제적 불경기가 이들의 미국이주의 배경이 된다. 또 다른 박해 때문에 미주로 이주하게 된 독일인 약 3만 명이 있었으니 이들은 살즈버그인이다. 이들은 독일 루터 교도들인데 1731년 대주교의 광신적 열심 때문에 살즈버그의 오지리의 대주교구로부터 추방되었다.
이제 프랑스인들의 이주 양상을 살펴보자. 불란서에서는 1562-1598에 걸쳐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개신교도들과 카톨릭교도들은 극단적 광신주의에 고취되어 성 바돌로뮤의 학살, 가이즈스의 암살, 헨리 3세의 암살 등을 행하였다. 다행히도 헨리 4세의 현명한 처세로 종교전쟁은 종결되고 낭트칙령이 발표되어 개신교의 신앙자유가 확립되었다. 그 후 100년 간은 이 칙령의 보호 하에 살았으나 루이13세, 14세 치하에서 위그노들은 박해를 받게 되어 낭트 칙령의 페지 후 대규모의 미국이주가 일어난다.
3. 국 교회 미주에서의 시작
1607년 버지니아에 있는 제임스 해변에 상륙한 105명의 식민지들 가운데 군목 로버트 헌트가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성실하게 목회 하였다. 그 후 버지니아 회사의 주주들의 수가 증가되고 영국에서 식민사업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대 탐험대가 곧 준비되었다. 이들은 미주에서 엄청나게 고투했고 이때 덜어웨어 공의 관심 하에 경제적 종교적 상황이 차츰 개선되었다. 이때 벅크 목사가 활동하였다. 이후 데일과 함께 휘테이거 목사가 왔는데 그는 열성적으로 일하여 버지니아의 사도란 명칭을 얻었다. 그는 버지나아에서 첫 번째 시골교구 목사이며 선교사가 되었다. 휘테이거의 노동과 영향을 통하여 포카혼타스라는 여자 인디언이 첫 개종자로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이 사건은 유럽에도 일대 반향을 불러 일으켜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와 그들과의 관계 개선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야들리 경이 버지니아의 지사가 되고 샌디 경의 등장으로 식민지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 이들은 34개조항의 버지니아 법률을 통과시켰는데 교역자들의 행위들을 규정하고 특히 식민 자들의 종교적 의무를 규정하였다. 버지니아의 점진적 발전은 교육의 필요성을 야기 시켰고 대학설립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의 과정에서 죄수들과 흑인노예의 유입은 미국의 역사에 부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1624년 6월 버지니아 회사는 종말을 고하고 식민지의 지배는 직접 왕의 장중으로 넘어간다. 회사가 기독교룰 전파하고 무역증진과 제국을 확대하는데 부적절하다 는 것이다. 그러나 참 이유는 국왕의 인물 천거를 회사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영국내란(1642-1649)과 공화정(1649-1660)기간 동안에 버지니아는 크게 소란하였고 종교적 상황 역시 열악하였다. 17세기 말경에 버지니아 교회에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한가지는 버지니야를 위한 런던감독의 감독 대리로서 블레어 목사가 임명된 사실이며 다른 한가지는 윌리엄 엔드 메리 대학이 설립되어 신학 교육이 이루어진 일이다.
메릴랜드는 청교도 혁명의 영향으로 1692년 왕실이 식민지가 된다. 그리고 니콜슨 경과 브레이 박사 등의 노력으로 국 교회가 메릴랜드에 정착된다. 또한 외지복음전파협회는 국 교회의 전파를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국 교회는 미국이주 초기에 큰 힘은 가지지 못하였다.
4. 청교도 식민지: 미주 조합 교회제의 시작
메사츄세스의 개척은 청교도 목사 화이트와 앤디콧 지사의 노력에 힘입은바 크다. 메사츄세스 식민지의 청교도들은 당초 영국교회로부터 분리할 의도는 없었으나 조합교회 적 교회정부 형태만이 진정한 성경 적 형태라고 생각하였다. 즉 각 기독교회는 그들 자신의 직원을 선택하고 안수할 권리가 있었다. 청교도들이 구한 것은 관용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자신의 종교적 관념들을 방해받지 않고 실천할 자유였다. 신 영주에 정착한 교회들은 한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조합교회 제 정체를 채택하였다. 신 영주 조합 교회제도의 해설에 특별히 책임 있는 목사들은 보스턴의 콧턴 덧채스터의 머더 뉴헤이븐의 데이븐 포트, 그리고 커네티컷의 후커였다. 이들은 캠브릿지대회를 소집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조합교회의 신조로 채택하고 조합교회의 헌법인 캠브릿지 강령을 초안하였다.
5. 종교적 자유의 제 1차 실험: 로드 아일랜드와 메릴랜드-침례교와 로마 카톨릭의 시작
로저 월리엄스는 원리를 기초로 종교적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의 로드 아일랜드 식민지는 충분히 정교분리의 원리 위에 설립된 유일한 곳이었다. 미주에 오기 전에 그는 벌써 교회와 시민정부 양자에 관해 자유주의적 견해를 채택하였으며 분립주의자를 자처했다. 그는 살렘교회의 목사로 재직하는 동안 시정과 종교적 권위의 분리를 강조하였다. 그는 카턴 등에게 합리적인 비판을 받았으며 재 세례 파의 침례교적 경향이 있다고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의 간섭 하에 미국에 첫 침례교 교회가 형성되었다. 로드 아일랜드의 식민지는 결국 삼 요소로 구성되었는데 로저 월리엄스의 프로비던스 식민지 외에 헛친슨 부인이 주동이 된 마사츄세스에서 온 종교적 망명자들과 골턴의 영도를 받은 워워크의 무리들이 있다. 특별히 헛친슨 부인은 공로의 계약에 반대하여 은혜의 계약을 주장하였는데 모든 사람은 창조주와의 직접적인 교통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종교적 자유를 위한 위대한 봉사를 행하였다. 또한 하버드 학장이었던 던스턴은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주장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들 침례교도들은 메사츄세스 당국의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사정은 점차 호전되어 1691년의 신 헌장은 천주교도들을 제외한 전 기독인 들에게 양심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가 침례교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1707년 북미침례교협회가 5개 교회들의 대표들로서 회집되었다. 1742년 이 기구는 강력한 칼빈주의적 신앙고백을 채택하였는데 미국 침례교도들의 역사에 전환점으로 생각된다. 볼티모어경은 그의 종교를 위해서라기 보다 오히려 자기 종교를 돌보지 않고 종교적 관용의 원리 위에 메릴랜드를 창설하였다. 메릴랜드 의회는 종교관용의 법안을 통과하였는데 이것은 과격한 청교도들이 집권하여 그 효력이 위험시되었으나 다시금 그 효력을 회복하였다. 메릴랜드는 미국 천주교의 초석이었다.
6. 중부 식민지에서의 종교적 다양성: 화란 개혁파와 영국 청교도
뉴 네델란드의 화란 식민지는 화란 서인도 회사로 알려진 무역회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1626년 피터 미트라니는 맨하턴 섬을 구매하여 뉴 암스텔담이라 이름하여 제 3 교역소를 설치하였다. 미키엘리우스가 처음 목사로 활동하였고 매가포랜시스는 인디언을 위한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였다. 이곳은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때로는 화란 개혁교회 중심의 배타적인 종교정책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후 근처에 스웨덴 인들의 이민이 있었으나 화란인 들의 견제를 받았다. 영국인들과의 갈등관계에서 목회법안이 제시되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특허법안이 통과되었으나 결국은 이 둘은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미주에 나타난 첫 퀘이커 교도들은 피셔와 오스틴이었다. 퀘이커 교도는 교회와 국가 간의 완전한 분리를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교리들의 차이에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메사츄세스는 칼빈주의에 입각하여 교리의 엄격성을 주장하고 퀘이커에 반대하는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는 차츰 완화되었다. 퀘이커는 뉴저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자유주의적 헌법을 작성하고 프랜즈 교단을 중심으로 발전하여갔다.
평가
미국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미국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미국의 역사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위하여서는 미국교회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국이란 나라의 설립배경이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찾아 나선 사람들의 불굴의 도전과 희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초기 역사에서 교회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를 통하여 미국교회사를 접할 수 있는 것은 귀한 일이다.
이번 주 독서를 통해 미국 교회사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먼저 저자는 1장에서 본서의 서술방향 즉 미국교회사를 어떻게 전개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선 자들의 배경, 미국 개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 서부로의 교회의 확대, 노예제도를 둘러싼 교회간의 첨예한 갈등,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사의 관계성 속에서의 교회사 서술, 미국 역사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향의 제시는 그 내용에 있어서 상당히 객관적이며 균형 잡힌 견해를 드러낼 줄 것이라고 생각되며 미국교회사를 다각도에서 조명해줄 것이라 기대된다. 특별히 노예제도에 대하여 교회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는 지와 일반 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별한 흥미를 느끼게 한다.
둘째 2장에서 미국교회 시작의 구라파 적 배경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미국교회사를 다룸에 있어서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접근법이라고 생각된다. 특별히 당시 구라파의 중심 되는 국가들의 종교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서 좋았고 구라파의 각 기독교 종파가 미국에 처음 어떻게 이식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일반 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기초하여 객관적인 기술을 하기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
셋째, 어느 한 종파에 대하여 편향된 시각을 갖지 않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했고 종파 상호간의 관계 및 영향에 대하여 많은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다양한 소 종파의 기원과 그 신앙내용에 대한 기술이 눈에 띤다
넷째, 될 수 있는 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중립적으로 기술하고 자신의 사적 의견을 최대한 자제한 흔적이 엿보인다. 특별히 지리, 인물 고증이 뛰어나다.
반면 개인적으로 아쉽게 생각되는 점은 각 종파가 미국에서 입지를 굳히는 과정에서 당시 미국의 사회, 경제적 배경이 어떠한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번 주 독서에서 의문시되는 몇 가지 점이 있다.
첫째, 대부분 유럽에서의 종교 박해를 피하여 미주에 정착한 각 종파간의 경쟁적 모습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미주에 정착한 종파들이 상호간에 경쟁과 갈등을 반복한 이유는 무엇일까?
둘째, 미국교회의 초기에 조합교회의 성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민주주의의 교회 적 구현인가? 그렇다면 조합교회의 형태가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 끼친 영향이 있는가?
셋째, 로즈 아일랜드의 종교적 자유의 실험이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긍정적인 요소는? 부정적인 요소는? 미국교회사에서 제도성과 자유성은 어떻게 조우하는가?
넷째, 미국 시민정부 형성에 있어 교회의 위치와 역할은 어떠하였는가? 정 교 분립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는지? 미국에서도 여전히 마녀 사냥이 행해졌다는데....
7. 중부 식민지에서의 종교적 다양성: 독일인 단체들
재 세례 파의 직접 후예들인 메노나이츠는 미주에의 독일인 첫 이민 자들이었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집총을 거부하였으며 세상과 분리된 삶을 주장하였다. 독일인 침례교도를 의미하는 던커즈는 1719년 처음 미주에 정착하고 이후 몇 차에 걸쳐 계속 건너왔다. 바이쓸의 영도 하에 많은 발전을 했으며 남녀의 철저한 분리생활과 무저항주의가 그 특색을 이루었다. 교회정부형태를 조합교회제로 하였고 나중에 형제들의 교회로 발전하였다. 그들의 지도자 사우어는 독일어 성경을 발간하는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슈벤크펠더즈는 반 카톨릭적 반 루터적 종파로서 실레지아에서 천주교의 박해를 피해 1733년 미주로 건너왔다. 모라비아인들의 미주이민을 이끈 사람은 진젠돌프였다. 후시트 운동에 기원을 둔 모라비아인들은 1735년 헤른후트를 창설하였으나 잇따른 박해와 미주에 있는 독일인들과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열정에 기인하여 미주로 이민한다. 진젠돌프의 노력으로 독일인 단체들 사이의 통일이 도모되었고 교회가 세워지며 나사렛과 베들레헴과 같은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인디언에 대한 선교를 확장하였다. 독일 개혁교회는 보옴으로 시작하여 밀러, 슈레터에 이르러 총회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 조직형태는 장로교적이었다. 독일 루터 교도들은 처음에는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출발했으나 살즈버그인들의 이주, 뮤렌버그의 도래 등으로 루터교는 활기를 찾게된다. 뮤렌버그는 1748년 필라델피아 대회라고 알려진 첫 번째 루터교 대회를 형성하였다. 식민지 미주에서 가장 유능한 루터 교 목사들은 뮤렌버그와 폰 랭글 같은 경이다. 경건주의의 유화한 형태는 식민지 루터 교도들에게 계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8. 식민지의 장로교도
식민지 장로교는 17세기 대청교도 이민과 18세기 스카트랜드-애란 대 이민을 통해 형성되었으나 곧 장로교인들과 조합교인들로 분열된다. 이들 북 애란에서의 이민은 처음 신 영주에 정착하려고 했으나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점차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독일이민들의 종파적 다양성과 대비하여 일률적 종파를 지녔다. 그러나 1705년 목사대회 때 메사츄세스 제안의 채택으로 조합교회가 승리하고 장로교는 커네티컷에서 세이브루크 강령을 채택하여 수정된 장로교 제도를 운영하였다. 미주 장로교회의 아버지는 미케미이다. 남부에서 장로교는 성공회에 의해 박해를 받았으나 1706년 필라델피아에서 첫 장로교 노회를 형성한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1716년 필라델피아 노회를 4개 노회로 나누고 롱아일랜드, 뉴케슬, 스노우힐 노회가 새로 형성되었다. 미주 장로교회에서 한 중대한 사건은 대회가 1729년 수용령을 통과한 사실이다. 그 내용은 장로교 목사들과 유 자격 취임 목사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르미니안주의, 자연신교, 자유주의 사상 등으로부터 미주 장로교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마케미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자유주의적 사상이 세를 형성하는 듯 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무산되었고 버지니아 지역에 종교적 관용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무수한 종교단체들이 형성되고 더불어 장로교의 급속한 발전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9. 신 영주에 일어난 대부흥 운동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은 계속적인 전쟁시기였다. 팔라티네트 전쟁, 스페인 왕위계승 권 전쟁, 오지리 계승 권 전쟁, 칠년 전쟁 등은 사람들을 여러 면에서 황폐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영향 하에 신 영주의 종교적 열정도 급속도로 냉각되어갔다. 반 계약제의 영향으로 형식적 교인들만 양산하는 형편이었다. 한편 교리 적으로도 하나님의 주권에 이어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인간에게 굉장한 공포가 존재한다는 것과 회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란 교리, 그것은 1740년대에 중부 마사츄세스에서 시작된 대 부흥의 대체적 원인이 되었다. 대 부흥은 에즈워드의 영도력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지성과 종교적 열정을 겸비한 인물로 철저한 칼빈주의적 견해를 옹호하고 이신 득의의 진리를 설파하였다, 특별히 그의 설교는 엄청난 영적 위력을 지녀 사람들을 회개케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이러한 부흥은 노스햄프턴에서 현저하였다. 이러한 비슷한 운동이 태넌트의 영도 하에 뉴저지의 장로교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이 대 부흥에 날개를 달아준 인물이 휘필드이다. 그는 조지아에 고아원을 설립할 목적으로 미주에 와 능력 있는 수많은 설교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에즈워드, 태넌트, 프랭클린 등과의 만남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는 수 차례의 미주 방문을 통하여 고아원 운영과 말씀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신 영주의 부흥은 부흥에 찬성한 자들과 반대한 자들로 분리되었다. 커네티컷에서는 목사 총연합회가 순회목사들을 정죄하였고 의회는 그 실천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부흥주의자들은 물러가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고 분리주의자들이라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교리논쟁으로도 이어져 결국 조합교회를 정통파와 자유주의파 혹은 유니테리안 양쪽으로 분열하도록 하였다. 구원에 인간적 방편의 사용을 강조하는 지유주의파는 다니엘휘트비, 요한 테일러 메이휴 같은 인믈들에 의해 옹호되었다. 그러나 에즈워드를 중심한 이들이 반대 입장에 서서 새로운 신성을 주장하여 울트라 에즈워드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우선권을 두지만 인간의 책임성도 어느 정도 수용하는 입장을 보였다. 대 부흥 후 50년 간은 전 신 영주를 통하여 종교적 도덕적으로 무관심한 시기로서 영적 침체기였다. 그 이유는 심각한 교리 적 분쟁과 미국혁명을 포함한 두 전쟁, 오랜 동안의 대 정치적 불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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