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3·6교실/신약신학 교실

[스크랩] 예수의 케리그마

류성련 2015. 1. 24. 08:54

 

 

[초기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연구]
by J.Dunn(제임스 던)

 


-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


 

1. 제 1 부

 

다양성 안의 통일성

 

제 2 장

 

케리그마 혹은 케리그마들

 

3. 예수의 케리그마

 

 

공관복음서* 모두는 예수의 공적 활동을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여'(막1.14),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눅4.43; 9.35),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여'(눅4.43; 8.1; 16.16)라는 요약적 진술들로 특성화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핵심단어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이다. 왜냐하면, 마가도 역시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복음선포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견지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이 하나의 문장속에서도 예수의 케리그마가 갖고 있는 주요한 특징들이 가득 들어가 있다.

 

*제4복음서(요한복음서)는 여러 이유로 인해서 kerusso, kerygma, euaggelizomai, euaggelion이라는 단어를 사용치 않는다.

 

 

 

1)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1.15; 마10.7; 눅21.31).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현 세계사의 종말과 심판을 야기시킬 하나님의 명백한 통치를 의미한다(마10.15/ 눅10.12; 마24.37-44/ 눅17.26-36). 그 나라가 가까왔다는 표현은 예수 자신의 세대가 생존할 동안에 도래할 것임을 나타낸다(막9.1; 13.28-30; 마10.23). 바로 하나님께서 곧 모든 사람들의 불의를 판단하실 이때(눅16.19-31;18.7 이하; 마23.33) 가난한 자들이 축복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래할 나라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눅6.20/ 마5.3). 이것이 가난한 자에 대한 복음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의 제자들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마6.10/ 눅11.2)라고 기도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종말 통치의 임박성은 위기의 순간을 향한 예수의 케리그마의 도전을 날카롭게 한다. 도래할 그 나라를 생각할 때 인간들은 결단해야만 하며 그것도 지금 결단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가장 독특한 선포 형식인 비유들 중에 일련의 위기의 비유들을 발견하는 데, 그곳에서는 경계를 요하는 소리가 크고 분명하게 들린다. 특히 하인들은 집주인이 돌아올 것에 대해 준비해야 할 것을 경고하는 부재중인 집주인의 비유(막13.34-36; 눅13.36-38; 마24.42, 45-51/ 눅12.42-46); 그리고 뜻밖에 임할 도적에 관한 비유(마24.43 이하/ 눅12.39 이하); 열 처녀의 비유(마25.1-12) 등에서 그렇다. 또한 막 13.14-20을 보라.

 

적어도 예수가 이야기했던 방식대로 그의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항상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문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박함에 대한 기대가 예수의 케리그마의 일부가 되고 있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의 공적인 선포의 핵심과 특징적 강조점을 공정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공적 활동기간 중에 이미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었다고 하는 선포는 예수의 케리그마의 보다 뚜렷한 특징이기도 하다.

 

 

2) '때가 찼다'

 

예수는 또한 하나님의 종말 통치가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하여 이미 실현되었음을 선포했다. 메시아적 시대에 대해 오랫동안 간직했던 희망은 이미 성취되기 시작했다(마11.51; 눅7.22; 마11.11/ 눅7.28; 마11.12/ 눅16.16; 마12.4 이하/ 눅11.31이하).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13.16 이하/ 눅10.23이하)"

 

특별한 기간 중에 그 나라는 청중들 속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눅17.20이하). 즉, 시대의 종말에 사탄이 결박당할 것이 예견되었으나 예수는 사탄은 이미 그 행로를 정했음을 주장했다(막3.27; 눅10.18). 逐邪(exorcism)로 표현되는 악한 영들에 대한 예수의 능력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사람들에게 임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마12.28/ 눅11.20).

 

예수의 다른 여러 비유들 가운데에 동일한 성취에 대한 기록이 드러나 있다. 즉, 혼인잔치에 대한 묘사(막2.18이하), 낡은 옷에 붙이는 생베 조각과 낡은 부대에 넣는 새 포도주에 대한 비유(막2.21이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극히 값진 진주의 비유(마13.44-46), 그리고 종말 추수의 은유(마9.37이하/ 눅10.2)가 그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그 나라에 대한 선포속에 이미 성취된 희망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임박성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은 신약성서 신학의 또 하나의 문제가 되고 있다. 그 문제는 선교에 대한 예수의 자이해 속에서 그 둘 사이의 긴장이 완전히 해소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매우 간단히 해결된다. 하나님의 종말 통치가 예수의 공적 활동속에 이미 작동하였다는 확신은 그것의 완전한 실현이 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신념을 발생시켰다.

 

 

3)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가 그의 청중들에게 기대했던 반응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이 두 개의 문구로 요약될 수 있다. 회개의 중요성은 여러 곳에서 두드러져 있다(마11.21/ 눅10.13; 마12.41/ 눅11.32; 눅13.3, 5; 15.7, 10; 16.30). 여기에서 예수가 그의 청중들의 기본적인 생활과 태도의 방향에 대한 어떤 본원적이고도 철저한 전향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은 몇몇 비유들 특히, 탕자의 비유(눅15.17), 예수와 부자 청년과의 만남(막10.17-31)에서, 그리고 삭개오와의 만남(눅19.8)에서, 아마 무엇보다도 회심한 제자들이 되라는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는 예수의 요청속에서 뚜렷하게 제시된다(마18.3; 막10.15/ 눅18.17)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어린 아이와 같은 의존의 또다른 측면이 바로 믿음이다. 공관서들에서 믿음이란 보통 이적들과 관련해서 언급되었는데 예수는 치유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러한 개방성을 자극하며(막5.36; 9.23이하; 마9.28), 또는 온전함에 이르는 믿음을 칭찬한다(막5.34; 10.52; 마8.10/ 눅7.9; 마15.28; 눅7.50; 17.19; 막6.5이하와 대조하라). 우리들은 예수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직접적으로 요청한 기록이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기대했던 믿음은 그를 통하여 움직이는 하나님의 종말 능력에 대한 믿음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선포와 부활절 이후의 케리그마와 비교할 때 또 하나의 문제를 발견한다.

 

4) 예수가 제공했던 회개와 믿음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종말 통치에의 참여와 그것의 축복에 관한 것이었다. '가난한 너희들은 복이 있나니 너희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것이다'(눅6.20/ 마5.3). 특별히 이것은 용서와 승인의 축복을 포함하는 데(막2.5; 눅7.36-50), 그러한 사실이 여러개의 비유들, 예를 들면 거대한 채무와 무자비한 채무자의 비유(마18.23-35; 하늘나라는,....같으니), 두 채무자의 비유(눅7.41이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18.9-14), 그리고 탕자의 비유(눅15.11-32)에 나타나 있다.

 

예수는 자신의 봉사활동 속에서, 특히 식탁친교 속에서 이러한 용서와 종말적인 그 나라의 승인을 체현했다. 예수는 이들 모임에서 한 사람도 몰아내지 않았고, 그의 메시지의 핵심을 표현하는 바, 죄인들에게조차 그 모임을 개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 시대의 메시아적 잔치를 미리 맛 본 자들이기 때문이다(눅14.13, 16-34). 이 사실에서 막2.17이 유래한 것이다- 나는 의인을 초청하러(즉, 혼인잔치에)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초청하러 왔다. 따라서 그의 측근인 제자들의 무리속에도 몇몇의 세리들과 창기였던 자들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고 그렇게 비난하듯 불리워졌던 이유이다(마11.19/ 눅7.34; 눅15.1이하; 19.7).

 

5) 끝으로 우리는 예수의 메시지 중에서 '윤리적 추론'에 간단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록된 또는 점차적으로 구전된 법률이 하나님과 타인과의 모든 관계를 결정짓는 상황속에서 예수의 메시지는 순전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요청을 철저화했다. 즉, 인간의 숨겨진 동기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도달한다(마5.21-32). 따라서 단지 규칙과 법률의 차원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요청을 회피하는 것이 된다(막7.1-23). 고로 예수가 생각했던 회개는 그러한 요청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마23.26).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요청을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축소시켰다. 첫째 되고 가장 큰 계명은 '전 존재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막12.28-31). 율법 그 자체에 있어서도 그러한 사랑의 표현을 훼방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파기되고 또 무시될 것이다(마5.38-48).

 

6) 요약컨대, 예수의 케리그마의 특징들은 이와 같다.

 

(1) 임박성과 실재성을 포함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 예수는 자신을 이러한 종말통치의 도구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케리그마의 내용으로 내놓지 않는다.

(2) 종말 능력과 하나님의 요청에 직면하여 회개와 믿음에로의 부름- 그러나 예수 자신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다.

(3) 용서의 제공과 사랑의 윤리적 추론과 더불어 새시대의 메시아적 잔치에의 참여.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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