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기(감리교신학대학)
1992년 감리교신학대학의 웨슬리회심기념 제6회 신학공개강좌
'웨슬리신학의 현대적 조명'중 두번째강의 내용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과거 사실의 단순한 객관적 묘사의 서술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요 만남이다. 역사연구란 과거
사실을 암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요, 오늘의 역사적 상황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이다. 오늘의 실존적, 상황과 만나는 역사해석이 없다면 그것
은 죽어버린 역사다. 따라서, 역사신학의 일부분인 웨슬리의 신학이 오늘
의 현대 신학적, 현재의 한국감리교적 문제와 대화하여야한다. 그것이 역
사신학적 과제다.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의 모습과 한국 교회의 신학적 풍
토를 진단해 봄이 있어서 웨슬리신학과 만나는 일은 너무나도 절실하고
긴요하다. 특히, 현대 해방신학적 조명 - 여성해방, 흑인해방, 남미의 해
방신학 - 에서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신학을 재해석하는 일이 최근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이런 해방신학적 시각에서 웨슬리와 민중신학을 재해
석해 보고 비교하여 보는 것이 아주 흥미로운 측면이 있을 뿐 아니라, 아
주 가치 있고 귀한 일로 여겨진다.
더욱이, 역사연구는 과거의 현재의 만남일 뿐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된다. 내일의 한국감리교회, 내일의 한국사 - 통일의
역사적 과제 - 창조를 위한 신학적 에너지를 웨슬리와 현대신학 특히 민중
신학과 대화함에서 새롭게 창출해 낼 수 있다.
= 성화 교리의 역사신학적 배경 =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신학은 그의 탁월한 역사 신학적 재해석을 그
배경으로 두고 있다. 그는 여러 역사신학적 전통을 에큐메니칼하게 종합
(ecumenical synthesis)하였다.
먼저 그의 구원론은 루터신학 및 모라비아주의 (Noravianism) 에 의해
영향받았다. 그의 올더스게잇체험은 루터의 로마서 서문 특히 로마서 1장
17절 해석을 어떤 청년이 읽는 것을 듣다가 뜨겁게 일어난 것이다. 루터의
신앙의 인화(Justification by faith)를 모라비안교도로부터 배웠다. 그래
서 철저히 신앙으로만 의롭게 됨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루터신학과 모
라비안주의의 정숙주의(quietism,stillness) 를 비판한다. 행동하지 않는
율법폐기론(antinominianism) 에 이를 수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루터적,
모라비안적 의인화는 전가 되고 주어지는 의(imputd righteoursness) 만을
강조하지만, 웨슬리의 의인화는 성도의 실성이 하나님의 의로움(iustitia
Dei)의 성품으로 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주어지면서도 본성적 변화를 일
으키는 의(imputed and imparted righteousness)의 양면성을 웨슬리는 믿
는다. 따라서, 루터와 모라비안주의의 신앙제일주의(Solafieism)와 '용서
받는 죄인' (simul justus et peccator)의 개념을 웨슬리는 비판한다. 의
인화 뿐만 아니라 의인화의 요소를 강조하고 계속 죄인으로 남아 있는게
아니라 죽기전에도 완전한 의인 곧,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
(righteorsness and holiness of God)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partaker) 혹
은 파트너(partner)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둘째로, 웨슬리는 칼빈신학적 요소를 받아들인다. 곧, 칼빈의 율법의
제3의 용법 (the third use) 을 수용한다. 루터는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
는 역할 (제1의 용법) 과 공민법을 위반한 형사적 범인을 다스리는 역할
(제2의 용법)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칼빈은 제3의 용법으로 성도를 성화
시키는 채찍질의 역할을 말한다. 이런 제3의 용법이 웨슬리에게 강하게 나
타난다. 그래서 웨슬리는 산상수훈을 여러번 나누어 설교하면서 그의 종교
개혁 교과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성화론은 어디까지나 전가되고
주어지는 성화(imputed sanctification) 이요, 인간의지는 노예신세임을
웨슬리가 비판한다. 웨슬리는 인간 의지의 참여가 강조되는 신입협조설
(Synergim) 적 선행을 강조하는 성화(imputed and imparted holiness)를
말한다.
셋째로, 영국성공학적, 로마천주교적 영향을 또한 받았다. 그가 올더스
게잇을 경험하기 전까지 영국성공회적, 가톨릭적 선행의인화
(Justification by good works)를 추구하였다. 그래서 (Jeremy Taylor
Thomas A Kempis William Law 등의 신비주의적 경건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신앙의 인화를 강조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전통을 강조하기에 이르렀고 신비
주의를 비판하게 된다. 신비주의가 성서보다 체험을, 공동체적 성화보다
개인적 고독한 성화를 강조함을 웨슬리는 비판하면서 기독교는 사회적 종
교요, 고독한 은둔자의 종교를 만들려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성화와 선행 - 의인화 이후의 - 사상
은 성공회와 천주교의 영향을 다분히 많이 받았다. 그의 신학의 4대원리
중 셋 - 성경, 전통, 이성 -은 영국성공회에서 그대로 전수한 것이요 그
위에 체험만 웨슬리가 추가하였다.
넷째로 웨슬리의 복음적 신인협조설(Evangelical synergism),은총론 선
재적 은총론은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다. 어거스틴의 말, "우리 없이 우
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Quifecit nos sine nobis,non salvabit nos sine nobis)를 인용하면서 선
재적 은총(prevenient grace)과 은총이 주도권적으로 개입함에 대한 인간
의 수동적 의지적 참여(Evangelielical Synergism)를 웨슬리도 강조한다.
또한,어거스틴의 은총론의 양면성(imputation and inpartation) 을 루터는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웨슬리는 수용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
(concupiscence) 때문에 죽기 전에 완전히 불가능하며, 불가항력적 예정의
은총이 강조되는 어거스틴의 구원론은 웨슬리에게서 받아 들여지지 않고
있다.
다섯째로, 웨슬리는 또한 동방교회(Greek Or thodox Church) 전통을 강
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Macarius the Egyption 을 통해 Gregory of Nyssa
를 이해하게 되었고, 사무엘 웨슬리(부친)의 권고에 의해 John
Chrysostom을 열심히 읽게 되었다. 이런 동방교부들에게서 자유의지의 참
여, 점진적 성화, 그리고 완전의 개념을 배웠다. 그러나 동방교회의 금욕
주의적, 신비주의적 성화개념보다는 사랑의 행동주의로써의 성화개념에 더
욱 큰 영향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서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신앙을 배웠기에 선행사상의 강조되고 사회적 성화의 행동주의가 강조되는
성화신학을 웨슬리가 형성허게 된 것이다.
= 사회적 성화의 특징 =
1.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
웨슬리의 성화개념은 소극적 의미에서 성결(holiness) 이다. 이것
은 의인화의 순간에 외적 행위죄(actual sins) 가 사함 받았으나, 내적죄
(innersin, roots of sin,original sin)는 남아 있기에 (remain) 성화의
은총이 필요하다, 죽기전에도 이 내적죄가 뿌리 뽑히는 완전한 성결이 가
능하다고 웨슬리는 이해한다. 그러나, 완전한 성도도 의식적인 죄
(voluntary sin)는 안 짓지만 무의식적인 죄(involuntary sin)는 지을 가
능성이 있기 때문에 계속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이 필요하다. 죽기전에도
이 내적죄가 뿌리 뽑히는 완전한 성결이 가능하다고 웨슬리는 이해한다.
그러나 완전한 성도도 의식적인 죄(voluntary sin)는 안 짓지만 무의식적
인 죄 (involuntary sin)은 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계속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이 필요하다.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성결의 요소(holistic foctor)는 더욱 적
극적인 성육신적 요소(incarnational factor)로 나타난다. 그것이 곧 사랑
이다. 그 사랑은 사회적 행동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회적 참여,
곧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로 이어진다. 신앙의 본질
(essence)은 내면적일찌라도, 신앙의 증거 (evidence)는 외향적, 공중적
사회적이라고 Outler 는 가오한다. Hildebrandt는 복음의 인본주의적 요
소가 루터의 신학 속에서는 운명론적으로 무시되었지만, 웨슬레에 의하여
인본주의적 요소가 자리하게 되었다고 본다. 또한 세리 창녀 조인, 소외된
자들이 인간 대우 받던 예수시대처럼 웨슬리 시대에도 인간답게 인정받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Outler는 자신의 의로움만을 강조하고 내세지향적 구
원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건전한 복음주의 (Unhealthy Evangelism) 인데,
웨슬리처럼 이웃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이 세상속의 하나님 나라 실현
을 강조하는 것이 건전한 복음주의 (Healthy Evangelism)이라고 해석한다.
2. 사회적 성화의 가르침
이 사회적 성화는 그의 논문들과 설교들에서 강하게 외쳐지고 있다.
웨슬리는 1772년 자유에 관한 논문 "Thoughts on Liberty" 1777년 노예해
방에 관한 논문 "Thoughts o Slavery", 그리고 1773년 가난에 관한 논문
"Thoughts on the Present Soarcity of Provisons"을 썼다. 가난과 경제에
관한 논문에서 그는 제도적 개혁을 강하게 부르짓고 있다. 그는 고용체제
의 개혁, 부자들의 사치와 음식 낭비에 대한 경고, 대자본가와 대지주의
독점화에 대한 비판, 시장경제(laissezfaire)의 모순지적, 및 부유층과 정
치지도자의 작은 세금부과 및 가난한 계층의 높은 세금 부담의 세제개혁,
상속재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사회에 환원할 것을 촉구하는 등 다양한 사
회 경제개혁안을 내놓는다. 또한 그의 설교에서 경제의 세가지 원리들
gain all yon can,save all you can,give all you can 을 주장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제3의 원리, 할 수 있는대로 모든 것을 나눠주는 것이다. 그
는 청지기 의식을 강조하면서 나눠주는 자는 유대인 신앙 밖에 안되고, 십
분의 이를 나눠주는 자는 바리새인 신앙 밖에 안되고 참 크리스챤은 식구
들이 필요한 필수품을 사용하기 위해 애쓰는 것외에는 모두 나눠주는 것이
라고 말한다. 부자드에게 다가올 곤경을 위해 울라고, 돈을 사랑함이 일
만악의 뿌리라고,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고 말하는 것은 사단적이고 거
짓말이라고 지적한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돈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은
헌금만 의미하지 않고 이웃을 구제하고 나누어 주는 것도 뜻한다고 강조하
였다.
3. 사회적 성화의 실천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경제 구조와 사회구조의
전환점에 서 있었다. 수공업에서 갑자기 기계공읍으로 바뀌면서 노동자들
의 심리적 불안, 정신적 발광,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노동강요까지 일어나
는 사회상황이었다. 감리교의 부흥운동은 노동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치유
해 주는 운동이었고, 최초의 영국 노동조합을 결성시켜 주었다. 1831년 전
국 노동자연맹 (The National Union of Working Classes) 이 조직되었다.
초기 노동조합조직은 감리교 속회조직과 같았다. 노조 규칙이 속회규칙이
었고, 12명의 회원과 1명의 지도자로 구성되었고 속회처럼 매주 1페니씩
지불하여 정치적 자유를 얻고 권리를 찾는 목적에 사용하였다. 수천명의
노조지도자들이 모두 감리교도들이었고, 8천명의 감리교지도자들(속장,재
산관리집사, 평신도 설교가등) 모두 노등자 출신 - 민중 -들이었다. 그런
데, 놀라운 것은 감리교운동이 산업부르조아 (중산층, 고용주)와 프로레타
리아(무산대중, 노동자) 모두를 만족시켜 주고 양자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분배해가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리교는
산업혁명의 자녀(A Child of Industrial Revolution) fkrh Oscar Sherwin
은 해석한다 (Friend of People). 또한 그는 당시 일어나고 있었던 Adam
Smith 와 Adam Ferguson 의 시장경제 이론 (Theory of Laissez - faire)
을 비판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요소 (gain all yor can, save
all can) 를 강조하면서도 재분배 운동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give all
you can). 또한 웨슬리는 여성해방운동에 앞장선 지도자였다. 감리교회가
영국 각처에 개척되어가는 과정에 여성의 역할이 아주컸다. 특히, 과부들
이 재산을 헌납하여 예배당을 사거나 짓는일에 크게 봉사하였다. 순회 선
교하러 다니는 웨슬리에게 방을 제공한 사람들이 대부분 과부들이었다. 그
당시 여성들은 감히 공중 앞에서 말할 수도 없었는데, 웨슬리는 과감하게
여성에게 공중기도,간증, 권면, 속회운영 및 지도 그리고 설교의 기회까지
주었다. Sarah Crosby 는" 내 양을 먹이라" 는 음성을 듣고 속장으로써 용
기있게 속도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하여 20-30밖에 안 모이던 속회가 갑자기
2백여명으로 늘어 남으로써 웨슬리가 개인적 차원에서 - 연회에서 공식적
으로 인정안함 - 그녀의 설교를 허용하였다. Mary Bosanquet 은 남편 John
Fletcher 갑자기 죽자, 보수적인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을 갖고 그녀를 비판했으나, 웨슬리는 1771년 그녀의 소명을 하나의 특
수한 부르심 (extraordinary call)이라고 받아들였다. 마침내 1787년 맨체
스터 연회에서 웨슬리는 Saran Mallet를 공식적으로 여성 설교가로 인정
하였다. 그녀는 시각과 청각등 온몸의 감각이 마비 되면서 오직 말씀을 전
하는 권능만을 보유하게 되어, 이 특유한 광경을 보기위하여 2백여명 이상
의 무리들이 몰려들어 그녀의 설교에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
회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4. 해방신학적 해석
이런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 혹은 해방운동은 현대의 해방신학적 조
명에서 다시금 재해석 되고 있다. Elie Halevy 는 그의 저서 The Birth of
Mothodism in England 와 England in 1815 에서 감리교의 종교적 영적 폭
발이 참으로 혁명적인 정치력을 폭발시켰기에 불란서 혁명 같은 정치적
혁명이 영국에서는 안일어났다고 해석한다. 감리교도들에 의해 조직된 노
동계급 성장을 도모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James H.Cone 은 흑인
예배는 흑인들의 영적 경험인 동시에 성령에 의한 자유의 투쟁의 공동체적
사건이라고 성화와 해방의 연속성을 흑인의 상황속에서 해석한다. Jose
Miques Bonino 는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 이해는 역사속에서 해방운동을 전
개하는 남미해방신학의 이상과 같다고 해석한다. Elsa Tamez 는 제3세계
(남미) 의 해방 투쟁시각에서 웨슬리의 성화론이 재발견되어야 한다고 해
석한다 Theodore W.Jennigs, Jr, 는 그의 책 Good News to the Poor
(1990) 에서 웨슬리의 복음적 경제론이 해방신학의 주제에 대한 신선한 충
격을 제공하였을 뿐 아나리, 해방신학 자체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고 관찰한다. Leon D,Hynson 의 책 To Reform the Nation 도 웨슬리의 사
회윤리적 성격을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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