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4·6교실/구약신학 교실

[스크랩] Bitter Bounty[Marvin L. Chaney]

류성련 2015. 11. 27. 22:35
호된 하사품

한맺힌 하사품(Bitter Bounty): 8세기 예언자들이 비판한 국가의 경제 역학1


마빈 L. 체이니



      기독교 제국의 그 어느 것도 개혁주의 전통보다 기독교 경전으로서 구약 성서를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개혁주의 유산의 어떤 부분이 경제에 관해서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특별히 경제적 정의라는 측면에서-즉각적으로 히브리 예언자들이 떠올리게 된다. 많은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8세기 예언자들, 즉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그리고 미가의 선포에는 경제적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관점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현대 신앙 공동체가 이들 본문들을 평가해 온 것을 본다면, 종종 명확하지 못했고 실제적이지도 못했는데, 이는 해석학적으로 정밀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상화하려는 경향성이 이러한 잘못을 야기한 것이다. 예를 들면, 아모스 5장 24절의 “정의를 물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명령은, 모든 사람들이 경제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종종 인용되지만, 이 말씀은 오히려 어느 누구도 거역하지 말고 반드시 순종해야만 하는 그런 명령으로 인용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런 명령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다. 대다수의 신앙인들은 경제정의를 추상적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할 뿐, 그것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아마도 전능자께서는 충분히 무에서의(ex nihilo) 창조를 잘도 해내실 것이겠지만, 그러나 우리 같은 하찮은 인생들은 근거자료가 필요하다. 특별히 그것이 경제를 다루게 될 때는 말이다!

      예언자적 경제를 합당히 해석하는 데 있어서, 추상주의가 실라(Scylla)라면 개별주의는 카리브디스(Charybdis)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개인주의 문화가 극에 다다를 정도라고 여겨지는 가운데, 예언서를 접한 현대의 많은 독자들은 이들 본문이 규범을 위배하면서까지 돈을 밝히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렬히 비난하고 있다고 여긴다. 경제 구조가 건강하고 정당하다면 이들은 규범을 준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금,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현실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듯하다. 경제 역학에 관한 신탁들을 자세히 읽는다면 자연히 드러나는 것처럼, 예언자들은 통합된 전체로서 국가경제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어떤 변화를 비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서 이익을 얻는 쪽이 힘이 있고 특권을 가진 소수의 특정계층(generic class)이라고 한다면, 예언자들은 바로 그들이 또 다른 특정계층(generic class)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 대다수의 빈약한 생계를 희생시켰다고 주장한다.

      수십개가 넘는 8세기 예언자들의 신탁들은 하나같이 전자(특권계층-역주)에 대한 야웨법정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후자(가난한 사람들-역주)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이들 본문이 다양하게 관련된 경제역학의 측면들을 암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전하게 기술하고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고대인들의 갈등에 대한 모든 양상은 그들의 경제 운용-비록 서로가 가치를 달리 둔다 하더라도-에 달려있으며, 그러므로 거듭해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예언서를 읽는 현대인들은 그러한 선이해를 공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살지 않은 현대인들은 성서의 역학구조를 재구성하는 예비적인 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관련된 예언서 본문들을 자세하게 석의하는 일은, 한권의 책을 써야할 정도이기 때문에, 이 연구논문의 할당된 지면을 벗어난다. 그 대신에 우리는 예언서 밖에 있는 서로 다른 출처에서 자료를 통합하는 것에 중점을 둘 것이다. 그러므로 개략적인 배경진술만으로도, 내가 바라기는, 상당수의 명백한 신탁들은 그 자체가 해석이 될 것이다.

      이 작업은 내가 예전에 아주 간단하게 다루었던 문제를 다시 불러일으킨다. 1981년 12월에 처음으로 제출된 연구논문에서, 나는 기원전 8세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적인 이유들로 . . .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유재산을 보유한 농사꾼 대부분은 고지대에 살고 있었다. 이러한 산간 지대에서 생계를 위한 여러 개의 소규모 토지들이 저당물로 잡히고 점차 보다 큰 사유지로 편입됨에 따라, 경작 방법 역시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농사꾼 가정이 혼작을 통해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던 고지대 평지는, 시장에 단일 품종을 제공하기 위해서 보다 넓고 “효과적인”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으로 통합되어졌다. 이러한 재식농업(plantations) 혹은 대토지소유(latifundia)의 형성은 결과적으로 포도주와 기름의 증가를 야기했고, 이는 새로운 사업 계획에서 최소한 두 개의 역할을 해냈다. 한편에서, 포도주와 기름은 각 지역 엘리트의 점차적으로 소비적인 생활양식의 상징물로 등장하는데, 소위 마르제악(marzeah)이라고 불리우는 조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른 한편에서, 포도주와 기름은 최상급 농작물에 비해서 무게와 부피면에서 더 가치가 높기 때문에, 그것들은 지배계층 몇몇이 탐냈던 호화물품과 전략무기 수입을 위한 이상적인 수출품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금작물의 “효용성”은, 실제로 그것들을 생산하는 농사꾼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만 했던 풍족한 삶을 빼앗아 가버리고 마는 엄청난 손실로 다가오게 된다. 사유재산을 소유했던 옛날 구조에서는 이들 농사꾼 대다수는 조심스럽지만 충분하며 균형잡힌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구조에서, 그들은 같은 밭에서 노동을 하는데, 단지 주기적으로 포도재배와 과수농업이 한창일 때뿐이며, 시장에서는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싼 값으로 팔릴 뿐이었다. 농업 불경기 시기 동안에, 그들은 일할 밭이 없기 때문에 고용되지 못했다. 일이 있건 없건, 그들은 자신들의 주식인 밀과 보리를 사기 위해서 시장으로 가야만 했다. 예전에 그들은 언덕중턱의 작은 밭에서 자신들에게 충분한 곡물들을 생산하곤 했었지만, 그러나 이제 그 곡물들은 대규모의 충적 평야와 산록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재배되어 시장으로 출시되었다. 시장에서는,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변동이 심한 임금을 받은 농장일꾼들이 필요한 수준에 못 미치는 음식을 구입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나약한 소작농들은 저질의 곡식들과 불량 저울에게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역학에서 기인된 저당과 토지몰수의 과정은 매수된 법정에 의해 가속화된다. 불법 이익으로 인한 저당행위가 금지되기는커녕, 이들 부도덕한 법정은 소송절차를 인정하고 말았다.2


      비록 1981년이라는 공간과 시간의 영향 아래에서 제공된 이들 역학구조에 대한 밑그림을 미묘한 차이점에 대한 인식도 없이 그저 단순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을지도 모르기만, 상당수의 다양한 학자들은 내가 대토지화라는 개념을 가지고 통합을 시도하려 했던 요인들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하게 연구해왔다. 이들 요인들을 기술하려는 이후의 시도들은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 방향은 조직적인 통합(systemic integration)을 조사하는데 있다.

      기원전 8세기의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나타난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세력과 지역적인 확장-특별히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가 통치했던 오랜 동시대 동안에-은 의심할 나위 없다. “8세기 중반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영토는 부족할 정도였으며, 솔로몬 제국에 버금갈 수준이었다.”3 세부사항들은 다른 곳에서 잘 나타나있기 때문에,4 여기에서 지체할 필요가 없겠다.

      나는 이러한 지정학적인 상황안에서 두 개의 요소들을 간단하게나마 주목하고자 한다. 1)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 이래로 인접지역이건, 외부지역이건 군사적 위협에서부터 안전했던 적은 없었다. 이들 두나라의 상호 안전은, 서로가 동맹을 맺은 왕들끼리의 장기 집권이라는 맥락에 맞추어, 그들의 경제를 포함해서 국내적인 시설들을 재정비하는 왕정 행정조직에게 있어서 예전보다 더욱 강력한 기회로 다가왔다. 기원전 745년에 앗시리아의 왕좌를 차지한 티글랏-빌레셀 3세는 그 기회의 장을 닫아버린 상징적인 인물이다. 2)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가 자신의 국가 경제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기회뿐 아니라, 동기는 국제적인 교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던 증거들에 의해서 잘 나타난다.

      데이비드 C. 홉킨스(David C. Hopkins)가 인식한 바와 같이, “국경의 확장은 소득원과 수출입 교역을 위한 물품이 증가했다는 점을 의미할 뿐 아니라, 지정학적인 조건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통과무역(transit trade)의 확장으로까지 이어졌음을 뜻한다.”5 모리스 실버(Morris Silver)는, 그는 최대주의자(maximalist)일지도 모르지만, 8세기 이스라엘과 유다의 순조로운 조건들에 대한 증거들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제공한다.6 그러나 실버와는 반대로, 엘랏(M. Elat)은 통과무역에 대해서 “그것이 비록 왕실의 이익을 제공하며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과는 반대로, 지역 경제와 시민들의 직업분배에 대해서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7라고 했는데, 그 말은 전적으로 옳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농수꾼 대다수에게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고, 그들의 통치자들이 농업 생산품의 가치와 분류, 그리고 분배를 바꾸도록 부추겼던 것은 다름 아닌 수출입 교역이었다. 관련된 자료들을 간파하고 종합한 이후, 홉킨스는 “문자적이며, 금석학적이며, 그리고 유물적인 증거들에 의하면, 왕조 시대 경제 구조에 있어서 선택된 상품은 기름, 포도주, 그리고 밀이었음이 드러난다.”8라며, 당시에 널리 공유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품들은 주로 두로(Tyre)나 그 도시를 통해서 수출되었는데,9 이곳은 해상무역을 하는 사회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통과무역을 함에 있어 필요한 육로보다 훨씬 경제적인 해상 운송을 취급해왔다.10 이러한 운송비의 차이는 페니키아 사람들 대다수가 통과무역을 통해서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던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기름, 밀, 그리고 포도주를 수출하는 대신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사치품과 군사물품을 수입했다. 이스라엘과 두로 사이의 교역의 본질이 거기에 있었다는 점은 지금에 와서야 기록된 문서에뿐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전거(全擧)되었고, 찾아볼 수 있다.11

      국제교역이라는 상황과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회적 계층화의 형태 사이의 상호작용은 중요하다. 농사꾼 대다수가 생산한 식량은 수출되었다.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나 필요한 사치품과 무기들은 수입되었다. 아마도 집약농업(agricultural intensification)을 통해서 식용 작물 생산량을 증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증가에는 한계점이 있었고, 수출품은 농사꾼의 생계와 직접적으로 경쟁하게 되었다. 모든 면에서 학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실버의 “공급중시(供給重視, supply-side)” 분석법은 이러한 간단한 사실들도 간파하지 못했다.12

      수출 가능한 상품은 제한적으로 공급되는 것에 비해 수입된 사치품에 대한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엘리트들은 세가지의 중요 수출 작물 생산을 증가하기 위한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생산을 증가하기 위한 한가지 방법은 지역적으로 차별화된 농경법이었다. 1981년에 개최된 성서문학학회의 연례 회의에서, 안손 레이니(Anson Rainey)와 나는 서로 무관하게 역대하 26장 10절에 대한 주해-히브리어 구문론과 경제적 지리 부분에서 알려진 사실들을 기초로 번역했다-를 했는데, 거기에서 웃시야가 다음의 과정을 착수했음이 기록되어 있다.13


그는 스텝지역에 망대를 건설하고 많은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이는 그가 대규모의 가축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셰펠라 지역과 평야 지역에서도 농부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산간 지대와 갈멜에서는 포도밭과 과수원 일꾼들이 있었다. . . .


      여기에서 우리는 왕실의 보호 아래에서, 망대와 수조의 도움으로 초원 지역에서 목축이 증가했고, 경작-밀이 주된 재배 작물로, 곡물 재배를 뜻한다-은 평야와 산록지대에서 집중되었고, 그리고 포도재배와 과수농업은 고원지대에서 이루어졌다. 각각의 경우에, 주어진 지역에서의 경제적인 개발은 한 개 혹은 두 개의 생산품으로 특성화되었는데, 그 생산품은 해당 지역에서 최대한으로 수출 교역을 할 수 있는 물량을 공급하고(거나) 지역 엘리트들에게 두드러질 정도로 소비되었다. 레이니는 유다 내에서 이러한 지역들의 정확한 현실과 위치들을 자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14

      역대기서의 이 짧은 한 구절에서 전체 역사의 재구성이라는 짐을 안길 필요는 없다. 라기쉬(Lachish)의 단층 분석 결과와 이 구절을 실마리로 삼아서, 레이니는 상당한 논의를 거쳐 유다의 것으로 인정된 lmlk이라는 인장 자국을 통해, 기원전 8세기 종반에 이르러 왕실 포도원이 조직화되었음을 보여준다라는 논증을 펼 수 있었다.15 보다 북쪽에, 사마리아의 도편(陶片)-정확한 연대와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논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은 기원전 8세기 동안에 “. . . 아마도 왕실의 관직으로 기름과 포도주가 유입되었다는 증거가 된다.”16 아마도 이러한 문서들로부터 가장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개인 포도원과 왕실 포도원이 함께 있었으며, 올리브 과수원이 그 사이에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17 텔 카실레(Tell Qasileh)에서 출토된 도편들은 아마도 이 기간에 기름의 수출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18 그리고 비문 발굴도 계속된다. 1978년 다윗성 발굴에서 8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석조 기념 명판(plaque)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왕실 저장소의 것으로 곡식이나 보물 물품을 기록한 것 같다.19

      무비문 고고학(Anepigraphic archaeology)은, 역시, 더욱 풍성한 증거들을 보여주는데, 특별히 올리브기름의 처리를 잘 보여준다. 돌로 지반을 깎아내어 만든(rock-cut) 올리브와 포도 처리 설비시설은 아마도 팔레스틴에서는 아주 오래된 농경 방식이었지만, 최근의 탐사에 따르면 그러한 설비가 양성화되고 혁신화된 시기는 다름 아닌 기원전 8세기였음이 제기되었다.20 올리브에서 기름을 추출해내기 위한 도리압착기술(beam press)이 특별히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런 종류의 가장 이른 압착 형식은 기원전 9세기에 시작했다고 발견되지만,21 그러한 장치들이 널리 퍼졌다고 생각되는 시기는 기원전 8세기에 해당한다.22 앞서 지적한바와 같이, 수출교역은 얻어낼 수 있는 올리브기름의 남은 한 방울까지 싹쓸이를 해버렸다. 이같은 추출과정의 강화로 인해, 예상되는 것은, 아마도 기름의 질적인 차이가 생겼을 것이다. 가장 좋은 제품은 올리브를 깨트려서 얻어지는데 이는 압착하지 않고 단순히 물로 씻겨내는 방법이다. 이어지는 과정은 걸쭉해진 것을 가지고 압착하는 것인데, 이러한 방법은 종종 불순물이 기름에 들어가서 제품의 질을 저하시킨다.23 아마도 수출교역을 위해서라면 많은 수량의 확보에 최우선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결국, 도리압착기술 뿐이었다. 그러나 지방과 외국의 엘리트들의 입맛은 고급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사마리아 도편에서 양질의 “씻겨낸 기름”이라는 용어가 나타난 것에 대한 해석이 가능하다.24

      만약 기름과 포도주 생산 설비가 누구에 의해서 활성화되었는지에 대한 별다른 암시를 주고 있지 못하다면, 대하 26:10은, 왕실 포도원와 올리브 과수원에 대한 비문 증거들을 맞추어볼 때, “계획 경제(command economy)”의 일부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25 홉킨스는 이와는 반대로, “왕조가 세운 중앙화된 건축물의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주생산품의 의사결정 기능이 약화되었을 것인데, 이는 아마도 완전한 강탈의 수준으로, 소위 ‘계획 경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만들어낸 결과이다”26라고 언급한다. 적지 않은 수의 특출한 사회과학자들은, 그러한 “계획 경제”는 특정 계층이 등장함에 따라서 나타나는 진보된 농경 사회의 특성이라고 주장해왔다.27 이들 학자들이 자신의 근간 이론의 기본으로 삼았던 비교 자료들과 고대 유다와 이스라엘을 위한 증거로 제시된 특별한 정보들 모두는, 8세기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대다수가 개인적인, 즉 자유 시장 경제를 보인다고 주장했던 실버의 추종자들을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28

      실버조차도 기존에 논의되었던 다양한 역학구조에서 경작 가능한 토지들이 점점 소수의 사람들의 손으로 통합되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29 다시 한번, 홉킨스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언급했다: “왕실의 계획을 충당하기 위해서 비용이 지불되고 노동의 손실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고서라도, 농경의 집약화라는 왕실의 계획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토지를 빼앗음으로써 촌락 기반의 농경 구조를 와해시키고 말았다.”30

      8세기 예언서에서 나타나는 토지 대통합은 역사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 다윗 왕국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스라엘에서 보장되는 소유지는 고지대에 집중되었다. 남부 시리아를 연구했던 레온 마포에(Leon Marfoe)가 발견했던 유사한 형태에 따르면,31 “산간 지대의 토지는 평지의 소유자들에 비해서 작았다.”32 왕조 이전의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작은, 고지대 토지들은 전형적으로 혼합 농경에 알맞다.33

      이러한 형식은 다윗에 의해서 변화되었다.


. . . 다윗은 블레셋을 물리쳐서, 그들을 5대 도시(pentapolis: 아스돗, 아스글론, 에글론, 가사, 가드-역주)로 제한하고 처음으로 가나안의 충적 평야를 이스라엘의 영역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것에도 성공적이었다.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는 빚을 지게 되었다. 그의 가신들, 즉 그가 사회적으로 도적떼였던 시기 이래로 그를 충심으로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영광을 업게 되자 적절한 보상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는 제국을 정복했고, 지방 행정조직은 자연히 새로운 관료제도를 양산했다. 농경사회라는 맥락에서, 이들에게는 토지 수여가 주어지게 되었으니, 이는 곧, 세습 토지이며 수급 토지가 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과연 무엇을 수여했는가? 고지대의 땅은 확실히 아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농사꾼들의 사유지로 그의 핵심 지지자들이었던 자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왕조를 형성시켰던 강력한 힘은 고지대에서의 거대한 토지를 이룩해냈는데[참조., 예를 들면, 삼상 22:6-8], 그러나 그들이 후원해야했던 직업 군인들에게 있어서는 수적으로나 중요도에 있어서 적당했다[할펀(Halpern) 1981: 86-87 곳곳에; 벤-바락(Ben-Barak) 1981: 73-91]). 그러나 풍족한 평야는 왕조 이전의 이스라엘에게 단 한번도 안전한 영역은 못되었으니, 다윗이 정복을 통해서 소유할 수 있었다. 세습과 수급 영토가 전형적인 농경사회와 결합되어지면서, 저지대의 토지들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런 경우에, 새로이 세워진 이스라엘 귀족과 관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34


      만약 이러한 분석이 옳다면, 이스라엘의 지도층인 엘리트들은 기원전 8세기의 농경의 집약화가 있기 훨씬 이전부터 “곡창지대(breadbasket)”를 주도적으로 운용했던 셈이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므로, 밀 생산량을 최대화하기 위한 저지대 토지 변경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문제였다. 그렇다면 고지대는 어떠했는가? 만약 고지대의 상당수가 작은 단위로 남겨졌다면, 즉 이전의 촌락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서 여전히 소규모로 경작되었다면, 그러한 조직은 도시기반 엘리트들의 목적에 중대한 장애물로 여겨졌음에 분명하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도시 엘리트들은 수출과 자신들의 소비를 위해서 밀, 기름 그리고 포도주 생산에 최대한 효율성을 찾아왔다. 고지대 농사꾼들은, 그들 자신의 도구만을 가지고, 가능한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위험분산방식(risk spreading)을 통해서 자신들의 생계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촌락 기반 농업의 절대적인 법칙은 위험 분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 위험을 집중시키는 방식은 이러한 안전제일이라는 목적에 직접적으로 위배된다.”35

      직접적인 증거들은 흩어져있지만, 간접적인 증거들과 보편적인 비교연구를 종합해 볼 때, 이스라엘 고지대 농업이 위험 분산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그림은 상당히 확신할 수 있는 수준이다. 곡물을 생산하는 밭은 매년 사용되지 않는다. 비옥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휴경을 했으며 최소한 몇 번의 윤번식으로 콩을 심었을 것이다. (오벧 보로스키[Obed Borowski]는 히브리 성서와 고고학적 유물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콩 재배 수확물의 증거들을 수집했다.)36 단백질을 흙으로 되돌릴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규칙성은 음식에 있어서 단백질로도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휴경지는 미개간된 목초지가 되어 양, 염소, 그리고 소들-그 수와 비율은 다양했다-의 목축을 위한 음식을 제공해 주었다. 농부들의 생활에 있어서, 그러한 목축은 “단순히 농업 생산이라는 위험 인자를 막아낼 수 있는 좋은 방지책”을 제공했다.37 사육된 동물들은 “최후의 긴급 식량 조달원(disaster bank on the hoof)”으로, 풍년의 잉여생산물은 흉년 때까지도 이어진다. 그 거름들은, 비록 비료처럼 그리 효과적이지는 못할지라도, 방목중인 휴경지를 비옥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목축은 촌락에서 노동력-이들은 매우 어리거나 매우 늙은이들이다-을 이끌어내는데, 사실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전혀 생산성이 없는 사람들이다. 나무와 포도 열매는 고지대 촌락 농업에 있어서 대미를 장식한다. 필요한 노동력은 곡물을 재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보충되며, 처리된 과실은 상당 기간 안전하게 보관되기 때문에, 위험 분산이라는 목적에 큰 공헌을 한 셈이다.

      단지 더 많은 양의 기름, 밀, 그리고 포도 생산을 원했고 독력했던 도시의 엘리트들은


. . . 위험 분산과 다양한 생계 수단을 통한 노동의 최적화라는 촌락의 목적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제한된 노동력과 토지를 고려할 때, 이러한 상품들의 생산량을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다른 생산량을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한 생산물의 절대적인 증가는 꼼짝없이, 만약 농경 촌락이 잉여 생산물을 국가에 제공하고 최소한의 생계 수준을 유지할 수만 있었다면, 적어도 다음의 경로를 따라서, 방목 토지를 없애는 대신 선호 상품을 위한 경작 용도로 촌락의 토지를 상당량 확장시켰을 것이다. 그동안 촌락에서 이루어졌던 위험과 노동 분산 농업에서 빠뜨릴 수 없었던 양들과 염소들은 납세에 있어서는 필요하지 않았고, 결국 촌락 구조에서 퇴출되고 말았다.”38


      역대하의 증거와 연관시켜볼 때, 초원지역에 왕실 목축을 했다는 26장 10절은, “. . . 유복하고, 고기를 소비하는 이스라엘 대중의 출현을 돕기 위해서, 토지 용도가 방목에서 목축으로 전환되었다라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생각이 아니다”39라고 말한 실버의 주장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 점차 명백해져가고 있는 이유들로 인해, 이스라엘 대중이 거의 모두 유복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적어도 계절적인 방목이 가능할 뿐 상당히 건조하기 때문에, 경작할 수 없는 상태의 유다 토지는 일반적인 대중들이 주기적으로 고기를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하지 못하다. 경작 가능한 모든 토지들은 점차적으로 3개의 주요 수출 작물들 가운데 하나를 생산하는데 모아지게 되었다.

      보다 더 그럴싸한 시나리오는 도시에 사는 소수의 특권계층의 식탁에서나 고기를 볼 수 있는데, 우기 동안 초원에서 방목되다가 도살하기 전에 마구간에서 키워졌을 것이다. 이렇게 축사에서 길러진 동물들은 거름을 얻어내는데 용이했을 것으로, 보다 집중적으로 경작했던 밭의 비옥함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했다. 루시안 터코스키(Lucian Turkowski)는, 적어도, 농경이 집약화된 유다 고지대에서 거름의 사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세기부터 새로운 형태의 증진된 농업이 유대 산지에 널리 퍼졌다. 이것은 토지의 어느 부분도 불모지로 남겨두지 말아야 했다. 휴경지로 남겨진 주요한 부분은 지금은 거름으로 비옥하게 되었다.40


      휴경지는 촌락의 방목토지의 중요한 부분으로, “최후의 긴급 식량 조달원”을 기를 수 있었다. 그런 장소는 마구간에서 길러진 동물들을 먹일 사료를 제공해주기 위해 곡물 밭을 손으로 잡초를 뜯어야만 했다.41 이런 사료가 부유한 사람들의 입맛에 불충분할 때, 아마도 값비싼 곡물이 사용되어졌을 것이다.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가 용인하고 있듯이, “집약화의 비용과 편익(cost-benefits)은 농부들이나 노동자들의 경우가 지도층의 사람들과 같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42

      이스라엘과 유다의 고지대에서 이루어진 8세기어간의 농경의 집약화에 부분적으로는, 위험분산에 도움이 되었었던 다용도의 토지는 점차적으로 포도와 올리브 나무를 기르는 테라스로 전환되어졌다.43 엘리트들은 그들의 생산물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기를 원했지만, 생산량은 그 자체로 주변 환경에 따라서 오르락내리락했으니, 올리브의 경우엔, 대체 수확물의 형태에 달려있었다.44 과거 그러한 변동의 위험을 분산시켰던 “효과가 없는” 다양화는 사라지고 말았다. 홉킨스는 이러한 변화들과 그 결과들을 다음과 같이 특징을 지운다:


특성화된 곡물들의 조직적인 증가는 짧은 시간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증가를 가져왔으나, 자연재해를 막는데는 오히려 악영향을 끼쳤다. 이전에 상대적으로 자급자족적인 농경 촌락은 점차적으로 자신들이 먹여 살렸던 중심도시와 상업구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변치 않는 협조와 감독이 중심지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모든 구조는 붕궤하고 말았을 것이다.

. . . 이 기간(8세기)은 자치적인 촌락기반의 농경과 중심도시가 주도하는 경제 사이의 연속성 안에서 매우 민첩하게 이동했다.45


      비록 수량에 대한 자료는 복원하기가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농경 사회에서는, 한편으로는, 정치적 안정성, 영역의 확장, 수입/수출 교역의 증가와, 다른 한편으로는 왕궁 건축이라는 역학구조에서 아마도 매우 관련이 높을 것이다.46

      나중의 요인들은 또한 “임대 자본주의(rent capitalism)”라고 불린 것의 증가와도 관련이 있다.47 그러한 조직아래에서, 토지의 소유자와 노동자는 구별될 뿐만 아니라,48 농업 생산품의 관리인들 각각은 서로 나뉘며 따로 임대를 하게 된다.49 시골에 사는 부자들은 가난한 소작농들과 모든 자금줄이 막혀버리는 보호관계(patron-client)를 선호하는 반면, 도시 엘리트들일 경우에는 하나의 경제 착취 관계만이 생기게 된다.50


이러한 이간질은 사회적으로 특권층을 가진 자들과 후원인들의 도움이 별로 필요 없을 정도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상위 계층의 상황일 뿐만 아니라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땅부자들(‘부재지주[absentee landlordism]’)이 선호하는 것이었다.51


      부유한 지주들이 도시에 살도록 이끌었던 것은 수입된 사치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장에서 사치품을 얻을 수 있으며 도시적 삶의 양식에 상응할수록. . . [,]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착취였을 것이다.”52

      이러한 상황 아래, 화려한 도시와 비참한 시골의 대조는 가혹했으며 이는 “절대 과장이 아니다.”53 최근의 연구는 이러한 상황이 신-앗시리아 사회의 특성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 . . 심지어 엣살핫돈의 치세에서 정복을 통해서 수집된 것보다 국내 각 지방에서부터 더 많은 수입을 얻게 되었다. 제국의 부유함과는 상관없이, 시골에 사는 농부들의 경제적 상황들은 전혀 개선되지 못했고, 오히려 제국이 확장되어갈수록 상황은 악화될 뿐이었다. 문제는 재화와 용역의 공급이 아니었고, 그것들을 가지고 분배할 권리를 요구했던 중앙의 관료들에게 있었다.54


      이스라엘과 유다가 앗시리아와 같은 개념의 제국은 아니었지만, 다른 모든 표시들은 기원전 8세기에 유사한 역학구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조직에서는, 풍년일 경우에도 일반 농사꾼이 힘들게 경작해야만 했으니, 그 이유는 엘리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잉여생산품을 원했기 때문이며, 결국 생산을 지속하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품만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평균 이하일 경우엔, 분산이라는 대책이 없어진 농사꾼들은 생존을 위해서 대출을 해야만 했다. 분산에 의해서 안정화된 사회 조직에서, 생계를 위한 농경은 특정 촌락과(혹은) 친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상호간에 무이자로 생존 대출을 해준다.55 그러나 집약화된 구조에서는 단지 자금만이 사용 가능하므로 점차적으로 부유한 대금업자들만이 점점 더 부유해질 뿐이었다. “대출을 한다는 것은, 매우 높은 이자율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 자동적으로 장기간의 혹은 영구적인 의존상태로 이끌어가고 만다.”56 많은 경우에, 추수한 것들은 주기적으로 저당잡히게 되는데, 각각의 담보물들은 이미 조달된 생산 요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리대금의 이자율은-채무 계약이 이루어지는 때는 추수철로, 농작물의 가격이 가장 낮을 때를 골라서 이루어졌는데-더욱 확대된 대부로 이끌었다. 대부해준 사람의 판단에 따라서 담보물에 대한 유질(流質)은 채무 소작농민들을 짓누르며 끝까지 따라다니는 위협(sword of Damocles)이 되었다.

      위에서 상술한 역사적인 이유들로 인해, 이스라엘과 유다의 저지대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아마도 기원전 8세기가 되기 훨씬 전에 대토지로 조직되었을 것이다. 그곳의 많은 농사꾼들은 토지가 없는 소작인이었을 것이며, 이들은 “임대 자본주의”의 역학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었다. 8세기에 밀이 집중적으로 경작되면서, 이들 소작인들은 보다 더 험난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으니, 생존을 위해서 모든 형태의 빚을 늘려야만 했으며, 엄청난 수의 채무노예를 양산하게 되었다.

      고지대의 상황은 달랐다. 왕실 포도원과 올리브 과수원은 의심할 바 없이 왕조가 출현한 이래로 계속 존재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고지대에서는 소규모 토지 소유라는 전통이, 여기에서는 혼합 생산으로 자신들의 토지를 경작할 수 있었는데, 뿌리가 흔들리는 일격을 당하고 만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러한 조직의 특정 부분들이 8세기에 들어와 변화의 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 도시의 엘리트들은 국가 세금을 관리할 수 있었기에, 아마도 무력을 사용했을 것인데, 기름과 포도주 생산을 확대하라고 요구했을 것이며, 이로 인해 위험분산이라는 것은 사라지게 되었다. 흉년이 되면 도시의 임대 자본주의로부터 대출을 해야 했으니, 고지대의 소구획들이 담보물로 저당잡혔다.

      비록 증거들이 여기에서 세밀히 검사하기에는 너무나 양이 많고 논쟁거리가 될 정도로 드문드문 존재하고 난해하며 이차적인 문학자료들이기는 하지만, 고지대의 소구획들은 어느 부분도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포도나무와 과일나무를 심은 이들은 아마도 대대로 가족 내에서 영구적으로 지속되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다년생 식물을 경작한다는 일은 완전히 결실을 맺기까지 수년이 걸리기 때문이고, 경작을 거의 하지 않음으로써 주기적으로 재분배되는 토지는 매우 비옥하게 되었다.57 팔레스틴에서 비교적 나중에 나타난 증거에 따르면,58 다양한 비교 연구와 언급들에서도 나타나는데,59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서 사용된 밭들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전체로서 촌락이 소유했고 주기적으로 제비를 뽑아 각 가정에 재배분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포도원과 올리브 농장이 도시 엘리트의 손아귀에 빠졌던 최초의 토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저지대에서 가장 좋은 대부분의 논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고지대에서는 처음엔 기름과 포도 수확에 일차적인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포도원과 과수원은 각 가정의 “소유(belonged)”였기 때문에, 심지어 그들이 그것을 즉시 팔아치울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담보물로 내놓기에는 덜 복잡했다: (열왕기상 21장은, 내가 믿기에, 해석하기가 매우 용이한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법은 그러한 재산을 즉각적으로 팔거나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만약 촌락의 논이 세금을 내야한다면, 이후의 시대들의 증거들로 추측해 보건데,60 무겁게 내려진 국가의 현물세금은 수출 교역에 사용될 밀을 바치도록 했고, 예전엔 경작지였던 것을 포도원과 과수로 바꾸도록 계단식 밭(terrace)을 만들도록 촌락민들을 강력하게 이끌었다. 홉킨스가 기록한 바와 같이,


토지의 양도는, 그것이 일반적으로 가장 기름진 땅일 경우에, 다양한 생태학적인 장소들을 관리할 농업 가족의 능력을 저하시키며, 어찌되었든 살아남아야만 했던 가정으로 하여금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악조건의 토지로 내몰리게 했다.61


      자신들의 농산물을 재배할 수 없게 되자,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자신들의 토지에서 모두 내몰리게 되고 임금을 받는 소작인으로 좌천됨에 따라, 앞서 말했던 토지소유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음식을 충당하기 위해서 곡물 교역에 나서게 된다.

      가족의 토지가 저당잡히고 유질(流質)되자, 그들의 재산은 법정에 서게 되었다. 촌락의 법정에는 합의된 정의라는 오랜 전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관리들은 왕명을 들고 지역의 사법기구들을 제한하고 종속하는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62 기원전 8세기 왕실 정책의 우선권 아래에서, 그러한 법정이 토지 합병과 그 파생효과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는 점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법정에 의해 재산몰수를 언도받은 자들의 슬픔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8세기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벌어진 정치적 경제 역학이라는 이러한 밑그림은 이러한 역학을 반영하고 비난했던 예언서 본문의 세심한 석의를 통해서 아마도 좀 더 자세히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세부 작업은, 이러한 예언자들의 세계와 오늘날 소위 제 3세계라고 불리는 세계 사이에서 상당한 평행점들을 해석하려고 그 어떤 시도라도 해야만 하는 것처럼, 또 다른 경우를 예견해야만 한다. 나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조금은 변치 않는 토대가 이 두 개의 정신위에 세워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둘 모두는 개혁주의 신앙과 경제 사이의 완전한 대화에 있어서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1 Refromed Faith and Economics, ed. Robert L. Stivers (Lanham, MD: Univ. Press of America, 1989): 15-30.


2 Marvin L. Chaney, “Systemic Study of the Israelite Monarchy,” Semeia, XXXVII (1986), 72-73. 인용된 단락에서 마르제악(Marzeah)이라고 불리운 조합에 대해서, 다음을 보라: Robert B. Coote, Amos Among the Prophets: Composition and Theolog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1), pp. 36-39.


3 John Bright, A History of Israel 3rd e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1), p. 258.


4 Ibid., 255-59; S. Yeivin, “The Divided Kingdom: Rehoboam-Ahaz/Jeroboam-Pekah,” in The Age of the Monarchies: Political History, ed. by A. Malamat, Vol. IV:1 of The World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ed. by B. Mazar (Jerusalem: Massada Press, 1979), pp. 161-72; and Yohanan Aharoni, The Archaeology of the Land of Israel, ed. by Miriam Aharoni, trans. by Anson F. Rainey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2), pp. 251-54.


5 David C. Hopkins, “The Dynamics of Agriculture in Monarchical Israel,” in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1983 Seminar Papers, ed. Kent Harold Richards (Chico, CA: Scholars Press, 1983), p. 195.


6 Morris Silver, Prophets and Markets: The Political Economy of Ancient Israel (Boston: Kluwer-Nijhoff, 1983), pp. 49-52.


7 M. Elat, “Trade and Commerce,” in The Age of the Monarchies: Culture and Society, ed. by A. Malamat, Vol. IV:2 of The World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ed. by B. Mazar (Jerusalem: Massada Press, 1979), p. 186; 참조. Gerhard Lenski and Jean Lenski, Human Societies: An Introduction to Macrosociology (5th ed.; New York: McGraw-Hill, 1987), pp. 183-85; and Hopkins, “Dynamics,” p. 195.


8 Hopkins, “Dynamics,” p. 196; 참조. Silver, Prophets and Markets, p. 24; 그리고 Bernhard Lang, Monotheism and the Prophetic Minority: An Essay in Biblical History and Sociology, The Social World of Biblical Antiquity Series, Vol. I (Sheffield: The Almond Press, 1983), p. 123.


9 Elat, “Trade and Commerce,” pp. 225-28.


10 Lenski and Lenski, Human Societies, pp. 216-19.


11 Shulamit Geva, “Archaeological Evidence for the Trade Between Israel and Tyre,”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CCXLVIII (1982), 69-72.


12 Silver, Prophets and Markets, passim.


13 Anson F. Rainey, “Wine from the Royal Vineyards,”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CCXLV (1982), 58; Chaney, “Systemic Study,” pp. 73-74; 참조. Hopkins, “Dynamics,” p. 200.


14 Rainey, “Wine,” pp. 58-59.


15 Ibid., pp. 57-61.


16 Hopkins, “Dynamics,” p. 199


17 Devadasan N. Premnath, “The Precess of Latifundialization Mirrored in the Oracles Pertaining to Eighth Century B.C.E. in the Books of Amos, Hosea, Isaiah and Micah” (미간행 박사논문,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 1984), pp. 60-62.


18 Silver, Prophets and Markets, p. 17; N. Avigad, “Hebrew Epigraphic Sources,” in The Age of the Monarchies: Political History, ed. by A. Malamat, Vol. IV: 1 of The World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ed. by B. Mazar (Jerusalem: Massada Press, 1979), pp. 33-34; and Benjamin Maisler (Mazar), “The Excavations at Tell Qasileh: Preliminary Report,” Israel Exploration Journal, I (1950), pp. 208-210.


19 Silver, Prophets and Markets, pp. 36-37; 그리고 Yigal Shiloh, “City of David: Excavation 1978,” Biblical Archaeologist, XLII (Summer, 1979), p. 170.


20 David Eitam, “Olive Presses of the Israelite Period,” Tel Aviv, IV (1970), pp. 146-54.


21 Lawrence E. Stager and S. R. Wolff, “Production and Commerce in Temple Courtyards: An Olive Press in the Sacred Precinct at Tel Dan,”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CCXLIII (1981), pp. 95-102; 그리고 Lawrence E. Stager, “The Finest Olive Oil in Samaria,” Journal of Semitic Studies, XXVIII (1983), p. 244.


22 Eitam, “Olive Presses,” pp. 146-54.


23 Stager, “Finest Olive Oil,” pp. 241-44.


24 Ibid., pp. 241-45.


25 Chaney, “Systemic Study,” p. 74; Hopkins, “Dynamics,” p. 193 그리고 n. 71, p. 200; Premnath, “Latifundialization,” p. 56.


26 Hopkins, “Dynamics,” p. 193.


27 Lenski and Lenski, Human Societies, pp. 183-85; 그리고 Robert L. Heil broner, The Making of Economic Society (5th ed.;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1975), pp. 7-46.


28 Silver, Prophets and Markets, 곳곳에.


29 Ibid., pp. 73-77; 259-63.


30 Hopkins, “Dynamics,” p. 200; 참조. Chaney, “Systematic Study,” pp. 72-73; 그리고 J. Andrew Dearman, “Prophecy, Property and Politics,” in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1984 Seminar Papers, ed. by Kent Harold Richards (Chico CA: Scholars Press, 1984), pp. 389-91.


31 Leon Marfoe, “The Integrative Transformation: Patterns of Sociopolitical Organization in Southern Syria.”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CCXXXIV (1979), 21-23.


32 Lawrence E. Stager, “The Archaeology of the Family in Ancient Israel,”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CCLX (1985), 24.


33 Marvin L. Chaney, “Ancient Palestinian Peasant Movements and the Formation of Premonarchic Israel,” in Palestine in Transition: The Emergence of Ancient Israel, ed. by David Noel Freedman and David Frank Graf, The Social World of Biblical Antiquity Series, Vol. II (Sheffield: The Almond Press, 1983), pp. 50, 64-65.


34 Chaney, “Systemic Study,” pp. 67-68; 참조. Albrecht Alt, “Der Anteil des Kinigtums and der sozialen Entwicklung in den Reichen Israel und Juda,” in Kleine Schriften zur Geschichte des Volkes Israel, ed. by Martin Noth, III (Munich: C. H. Beck, 1959), pp. 348-72. 직업 군인들을 후원하는 고지대의 대토지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Baruch Halpern, “The Uneasy Compromise: Israel Between League and Monarchy,” in Traditions in Transformation: Turning Points in Biblical Faith, Baruch Halpern and Jon D. Levenson, eds. (Winona Lake: Eisenbrauns, 1981), pp. 86-87 곳곳에; 그리고 Zafrira Ben Barak, “Meribaal and the System of Land Grants in Ancient Israel,” Biblica LXII (1981), pp. 73-91.


35 Hopkins, “Dynamics,” p. 201.


36 Obed Borowski, Agriculture in Iron Age Israel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7), pp. 93-97.


37 Hopkins, “Dynamics,” p. 191.


38 Ibid., p. 197.


39 Silver, Prophets and Markets, pp. 97-98.


40 Lucian Turkowski, “Peasant Agriculture in the Judaean Hills,” Palestine Expliration Quarterly, CI (1969), p. 24.


41 Ibid., p. 101.


42 Marvin Harris, Cultural Materialism: The Struggle for a Science of Culture (New York: Random House, 1980), p. 103.


43 Hopkins, “Dynamics,” p. 200; 그리고 Gershon Edelstein and Mordechai Kislev, “Mevassert, Yerushalayim: The Ancient Settlement and Its Agricultural Terraces,” Biblical Archaeologist, XLIV (1981), pp. 53-56.


44 Hopkins, “Dynamics,” p. 197.


45 Ibid., p. 201.


46 Ibid.


47 Lang, Monotheism and the Prophetic Minority, pp. 118-19.


48 Ibid., p. 108.


49 Eric R. Wolf, Peasants, Foundations of Modern Anthropology Series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1966), pp. 55-56; 그리고 Robert B. Coote, Amos among the Prophets: Composition and Theolog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1), pp. 29-32.


50 Lang, Monotheism and the Prophetic Minority, pp. 118-19.


51 Ibid., p. 119.


52 Ibid.


53 Ibid., p. 120.


54 Dearman, “Prophecy, Property and Politics,” pp. 393-94; 참조. J. N. Postgate, “Some Remarks on Conditions in the Assyrian Countryside,” Journal of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the Orient, XVII (1974), pp. 225-43; 그리고 G. van Driel, “Land and People in Assyria,” Bibliotheca Orientalis, XXVII (1970), pp. 168-75.


55 Lang, Monotheism and the Prophetic Minority, p. 120; 그리고 Richard Critchfield, Villages (New York: Anchor Press/Doubleday, 1983), p. 345.


56 Lang, Monotheism and the Prophetic Minority, p. 117.


57 Chaney, “Ancient Palestinian Peasant Movements,” pp. 50, 64-65.


58 Turkowski, “Peasant Agriculture,” pp. 23-32.


59 Chaney, “Ancient Palestinian Peasant Movements,” pp. 50, 64-65.


60 Turkowski, “Peasant Agriculture,” p. 23.


61 Hopkins, “Dynamics,” p. 201.


62 Dearman, “Prophecy, Property and Politics,” pp. 391-92; 그리고 Keith W. Whitelam, The Just King: Monarchic Judicial Authority in Ancient Israel,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Supplement Series, Vol. XII (Sheffield: JSOT Press, 1979), 곳곳에.


출처 : `anoki sabboti (삼상 22:22b)
글쓴이 : 진실과 열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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