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청동기 팔레스틴의 목축인들: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Pastoralists in Late Bronze Age Palestine: Which Way Did They Go?
by. David C. Hopkins
초기이스라엘 세미나(담당교수: 우택주)
2006년 3월 6일, 발표자: 양지웅
내용정리
이집트의 지배자였던 바로의 기록에 의하면, 청동기 후기 팔레스틴에 ‘샤슈’라고 불리운 목축인들에 대한 군사적 정보들이 매우 중요하게 나타난다. 람세스 3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나는 세일족인 샤슈 도당들을 파괴했다. 나는 그들의 장막과 소유물 그리고 가축들을 빼앗았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았고, 묶였으며 포로가 되어 이집트로 끌려왔다”
후기 청동기 종반에(약. 1550-1150 BCE) 시리아-팔레스틴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력이 와해되었는데, 람세스들은 제국의 안녕을 깨뜨리는 ‘샤슈 도당’들을 처리하기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허사였고, 마지막 30년 기간에 제국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한편, 샤슈를 물리치고 전리품(장막, 가축들)을 챙겼다는 람세스 3세의 주장에서 후기 청동기 팔레스틴의 목축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유물들(세티 1세의 카르낙 부조)과 문헌(아나스타시 1세의 팔레스틴 탐방기)들에 의하면 샤슈는 팔레스틴에서 분쟁을 일으켰던 전문적인 군사적인 집단으로 그려진다. 에돔에서부터 들어온 샤슈가 이집트-가나안 국경을 넘어서 어디로 갔는지 당시의 기록은 침묵한다.
샤슈의 본거지는 남부 트렌스요르단(모압,암몬)이었지만, 전지역에 걸쳐서 활동했으며(시리아, 북/남팔레스틴), 이를 통해서 샤슈가 도시국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이집트의 영향력을 거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집트에게 샤슈는 용병이거나 도적떼로 이해되었는데, 샤슈는 본래 목축활동에 종사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람세스 3세의 전리품에서 언급된 ‘장막’은 야발의 ‘장막’(창 4:20)에 대응되는 셈어를 쓰고있으며, 국경관리의 보고에서도 샤슈는 목축업과 연관된다. 그들의 이동이 정기적인 것인지 일회적인지 알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샤슈의 생존전략에 대한 정보는 당시 기록물들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집트 제국의 맥락
그러므로, 논의의 출발점은 4세기에 걸친 팔레스틴 지배에서부터 시작한다(지배 초기부터 샤슈가 등장하고 있다). 한편, 이집트에게 있어 팔레스틴은 고대근동과 지중해동부를 연결하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투트모스 3세를 시작으로(1482년의 므깃도 점령) 여러 수비대가 전략적으로 배치되었으며(가자, 욥바, 벧스안, 예노암), 이는 향후 100년 가까이 이집트의 지배권을 강화하게 된다.
아마르나 서신은 팔레스틴에서의 이집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데, 도시간의 분쟁과 농촌의 불안 속에서도 패권은 이집트가 쥐고 있었다. 국제적으로 외진 곳이긴 하지만, 나일의 지배자는 소도시국가들을 정복하고 그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으며, 주둔군의 필요를 위한 다양한 조공(조세, 출정보조, 노역충당)은 전적으로 팔레스틴 생산물을 통해서 얻어냈다(아마르나 서신은 상당량의 조공을 보여준다). 귀금속이나 사치품과 같은 물품은 팔레스틴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농작물의 국제무역거래를 통해서 충당되었다.
이집트 지배하에서 중기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팔레스틴은 분열되고, 전혀 새로운 정착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이전 거주인구에 절반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고지대의 새로운 정착지는 한정되었다(갈릴리와 브엘세바계곡과 같은 서부팔레스틴은 전무했다). 200곳이나 되었던 중앙산지의 성채들도 여남은 거주지로 줄어들었으니, 과거의 대도시가 사라지고 작은 성체 수준으로 변했다.
고지대 정착과는 반대되는 형태로 저지대 거주 형태는 주목할 만했는데(남부해안평야, 이즈르엘계곡, 골(요단계곡)), 그중에 아스돗, 라기쉬, 게젤, 므깃도, 벳스안, 하솔이 중요한 도시국가로 대두되었다(항구: 남부 텔모르 항구에서부터 갈멜북부의 텔-아부하왐 항구까지). 그러나, 서부팔레스틴의 거주민은 활로모색에 실패했으며, 기존 거주지에 머무르는 수준이었다.
요단 산지는 다양한 거주형태를 보여준다. 동부인 암만과 바카는 상당수준의 국제교역까지 했으나, 케락 산지는 고립되었다(이 지역은 이집트의 영향력이 덜 미친다-기록물이 거의 없다). 요단중앙의 LBA 거주는 글루엑의 ‘간격이론’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서 자치적인 생계를 보여줄 뿐이다.
서부팔레스틴은 MB에서 LB로 이어오면서 심하게 축소되었다(5헥타르를 넘지않으며, MB의 20%수준-분포곡선은 중앙부분이 없다). LB에 와서 중간급 도시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경제적으로 대도시는 주변지역을 복속했으며, 또한 주변지역은 내부적인 결집과 외부적으로는 대도시에 접근하여 거대한 국제적인 교역체계를 유지했었다(대도시와 주변도시의 균형발전적 상황). 그러나, LB에 와서 중앙의 행정중심 역할을 했던 지역들이 보다 큰 이집트 제국에 병합되면서, 자치적인 생산체계를 포기하고 이집트를 위한 상품을 제조하게 되었으니, 결국 작은 촌락의 자급자족은 도전을 받았다.
이러한 거주지 축소의 원인은 이집트 19왕조(1295-1186 BCE)에 무리한 출정에서 기인하는데, 구체적으로 투트모세 3세의 아시아제국 공격, 팔레스틴 원정, 지중해 연안을 둘러싼 헷제국과의 충돌(13세기 초반 25년간). 자연히 팔레스틴은 대북군사행동을 지원해야했으며, 이는 페니키아 해안, 아무루산지, 레바논의 베카계곡, 가데스의 북부 시리아까지 해당된다. 결국, 시리아는 헷제국이 차지했다.
이집트는 남부시리아 지역과 ‘휴전’을 맺으며 팔레스틴 남부 지배를 강화했으니, 이후의 왕들(세티 1세, 람세스 2세, 메르넵타)은 여러 원정을 통해서 팔레스틴을 강력하게 다스렸으며, 이는 아마르나 시대에도 유효한 일이 된다. 이전 왕조들보다 19왕조가 팔레스틴에 더욱 강력한 영향을 끼쳤는데, 상당수의 행정기관과 주둔군이 들어왔으며, 성채에서 고급 도자기까지 팔레스틴의 도시국가 경제를 착취했다: 남부팔레스틴의 텔-세라의 세금명세서 기록물(3만-10만리터에 이르는 곡물)은 지역경제의 체계적인 착취를 잘 보여준다.
결국, 북부지역의 취약성과 팔레스틴 자체의 악조건 속에서 이집트에 저항하는 도적떼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니, 람세스 3세에 대항하는 ‘샤슈’가 그들이다. 이집트는 샤슈를 처리하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으니, 이집트의 세력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는 이집트 내부의 문제와 경쟁자(블레셋)의 등장이라기보다는 오랜 기간 팔레스틴 경제를 착취한 데에서 이집트 붕궤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즉, 불균형적인 교환과 군사적 강제소집은 지역경제를 붕궤시켰으며, 지방행정도시는 이득보다 손실을 불러일으켰다. LBA(1300-1150 BCE)의 분산거주형태(농촌을 포기하고 잘나가는 도시들이 합쳐짐)는 경제적 붕궤를 보여준다.1) 람세스 말년의 출정은 샤슈라는 이집트제국의 ‘공공의 적’을 만들어놓았지만, 이는 이집트가 저지른 근시안적인 억압(경제적 착취구조)에 대한 엉뚱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팔레스틴 목축의 구조
유독 샤슈가 제국화된 팔레스틴에서 힘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목축유목의 팔레스틴적 구조 아래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말 자체가 유목민적 삶의 양태를 잘 보여주는데, 예(세티 1세2))나 지금이나 목축유목인들을 무법자로 이해하는 태도는 바뀌어야 한다. 그들은 사냥꾼과 농경거주민 사이에 있지 않고, 농경과 양을 치는 혼합 경제의 한 지류인 것이다. 인류학자인 크립은 “유목민과 거주민의 차이는 ‘문화’에 있지 않고 정치-경제적인 면에 있다”고 하면서, 이분법적인 생각을 경고한다. 결국, 고대근동은 목축과 농경이, 유목과 거주가 사회내에서 통합되어있다.
목축인은 사회경제적 혼합체에 속한다. 즉, 어떠한 지역이든, 거기엔 부족형태의 목축인들과 도시기반의 농사꾼이 공존하게 된다(한집에 가인과 아벨이 나올 수도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호의존적인혼합체속에서 목축유목인들은 ‘목자들이 움직여야 한다’는 삶의 방식이 있는데, 이는 동물들과 이동가능한 거주지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더욱 구체화될 수 있다. 특별히, 먹성 좋은 가축들과 계절을 심하게 타는 초원지대의 특성상, 정기적으로 가축을 이동시키는 것은 필수적인데(이는 목초지의 경쟁과 질병, 경제적인 수탈, 시장의 형성과 같은 요인과 함께 고려해야 한다), 토지소유권에 대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목축유목인은 다양한 사회-경제-기술-정치적 관계들에 대해서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바, 유목민 사회(베두윈)가 고대 목축인에 ‘적격이다’라는 주장은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다.
LBA 목축유목인에게 가능한 가축으로는 양과 염소를 들 수 있다: 말, 나귀, 낙타, 소, 돼지는 빈도가 높지 않으며, 관리하는데도 힘이 듣다(낙타는 철기시대에 등장하며, 소와 돼지는 정착인들에게 유효한 가축이다). 양과 염소의 뼈는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양과 염소와 함께 갔다”라는 답이 나온다.
더 자세한 내용은 재구성할 수 없지만, 민족지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50-100마리 정도이며 이는 거주민들의 5배에 해당한다. 양에 비해서 염소는 먹성이 매우 좋으며, 독립적이고 이동성도 좋다. 양과 염소의 생김새는 매우 다양해서 “심판의 날”의 모습은 도시민의 상상력에 해당한다.
양과 염소는 뼈속부터 털끝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데가 없다. 염소는 젖도 많이 생산하고, 건조한 날씨도 잘 적응하며, 특별히 생명주기가 짧아서 고기를 제공하는 점에서도 양보다 우세하다. 그러나, 양은 양털을 제공해주고, 짧은 재생산과 긴 원숙기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염소보다 시장성이 더 좋다. 결국, 목축인은 생존에 필요한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간다.
양과 염소떼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폭발적인 증가량에 있다. 1년정도면 재생산이 가능하고 5개월의 임신기간이라는 비교우위 속에서,3) 단 일년 정도면 상당한 부자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매년 11%의 성장을 보이며, 이는 6년안에 다른 동물의 2배까지 확장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로, 예견할 수 없는 질병이나 가뭄 그리고 전염병이나 도둑들의 등장은 가축의 소득이 요동하게 하며,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문은 예기치 않는 “호황 혹은 불황”을 뜻한다.
이러한 변동 아래에서 목초지 소유권과 노동의 필요성은 함께 동요되었다. 목축유목인은 그룹 성원들과 “유연성”을 가지고, “호황” 기간에는 목초지는 금세 거덜나고 새로운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것이 목축유목인의 일반적인 역사이다. 한편, 농경은 목축에 비해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다.
목축과 농경의 대조적인 성격을 통합함으로써 팔레스틴의 변화무쌍한 환경은 극복될 수 있었다. 목축유목인은 경작할 땅을 조사하면서 안정성을 찾으며, 노동집약적인 농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 중앙의 권력가들과 협조해야 한다. 이렇게, 자유적인 사회-경제적인 조건에서 목축유목인은 번창할 수 있었다.
LBA 후반에 팔레스틴 목축인들
“그들이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기능주의적인 접근은, “목축유목인-그중에 샤슈-은 어디로 갔는가?”가 되는데, LBA 팔레스틴의 목축-농경의 혼합세계에서 목축은 팽창하고 있다. LBA 후기의 몇몇 도시들의 연합과 시골의 퇴보는 농경의 후퇴와 유목화의 팽창을 보여준다. 이러한 목축유목민화는 중앙권력의 세금징수와 어려운 환경에서부터 탈출인 셈이다. 농경과 목축이 결합된 경제구조를 통해서 기존의 촌락수준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달성하는 자치적인 생존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팔레스틴 인구 중에서 목축유목민이 된 사람은 과장해서 55%까지 이를 수 있다.
이러한 급격한 증가는 목축인들 사이뿐 아니라 목축인과 거주민들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샤슈의 언급이 람세스 2세 동안 최고조에 이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집트의 출정이 목축인들을 쉽게 격분하게 할 수 있었던 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분산거주 형태는 샤슈 목축인들이 가나안을 경계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명백하지 않지만, 목축인들은 좀처럼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곳(암만공항의 구조물, 텔-데이르 알라, 실로)의 제의 구조물을 만들었을 것이며, 주변지역의 묘지들은 비-거주인들의 필요를 위했을 것이다.
샤슈라는 유목화를 양산했던 분명한 원인은 이집트의 붕궤일 것이지만, 아직 이집트의 영향력 하에서는(남부 해안평야) 나타나지 않았다. 서부팔레스틴 고지대가 초기 철기 시대에 여남은 정기적인 거주의 흔적이 시작되었다. 건축이나 거주가 아직까지는 목축인의 것이었다고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즈벹 짜르타, 길로, 하솔, 브엘 세바와 같은 곳은 목축인들에 의해 새롭게 정착된 지역임을 밝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축유목인들은 실로, 라다나, 아이, 마소스와 같은 영구적인 거주지의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요단 산지에 대해서는 12세기의 텔 엘-우메이리의 요새화된 촌락으로 목축인들이 유입되어 고대 팔레스틴의 거주지를 확장시켰다.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마을로 갔으며, 토지를 재건했으며, 씨를 뿌리고, 말 그대로, 철기 왕조시대로 팔레스틴을 변화시켰다.
질문
1. 기존의 연구가 샤슈의 군사적 측면을 강조했던 것에 비해서(이집트 문서에 근거), 저자는 자연발생적인 ‘목축유목민’의 사회-경제적인 측면(사회과학적 접근?)으로 샤슈의 정체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저자는 ‘약탈자’(to plunder)라는 측면을 오히려 축소시키는 입장인가(Tribes of Yahweh, 458)?
2. 갓월드는 샤슈(Shosu)를 아피루와 함께 ‘중다한 잡족’의 개념으로 이해하면서(출 12:38; 민 11:4) 출애굽 집단과 연결하고 있다. 특별히, 샤슈를 에돔인(세일/바란) 혹은 미디안(겐족)과 같은 특정 민족으로 접근하고 있는데(Tribes of Yahweh, 453-9), 샤슈를 특정 민족으로 규명할 수 있는가?
3. 저자는 초기 철기 고지대의 이스라엘의 등장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샤슈의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즉, 붕궤된 이집트 제국 아래에서 가장 사회-경제적으로, 생태학적으로 적합한 사회 체제가 ‘목축유목인’이라는 주장을 했다(절반 이상이 목축유목인!). 그렇다면, 그들은 그들만의 정착지에 성공적인 사회를 건설한 이후, 점차 농경사회로 변모해 나갔으며, 그 가운데 뿌리 깊은 ‘유목민적 유산-자유와 평등? 유연성?’을 지속시켜나갔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가?
1) MBII와 LBII의 발굴 그래프를 참조
2) “... 그들은 불안정과 폭동을 선동해서 서로 죽이게 하며, 우리 법들을 무시한다”
3) 낙타: 5년, 10-11개월; 소: 3년, 9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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