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론이 신자가 의로운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되는가?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 중 칭의론을 방종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남용할 사람이 있을까. 믿기만 하면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니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행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거짓신자일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이 거하는 신자는 아무리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도 그런 식으로 살 수 없는 내적 생명력과 거룩한 부담이 있다.
그들은 늘 자신이 원하는 만큼 거룩하게 살지 못하는데 대한 안타까움과 신음과 탄식이 있다. 간혹 영적으로 침체하고 둔감해져 거룩에 대한 갈망과 의식이 약화되기도 하지만 그런 심적인 부담과 추구는 신자 안에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신자 안에도 부패성이 남아있기에 그런 나태로 치우치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칭의론은 그런 위험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차단하는 논리적인 안전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칭의론은 참된 경건의 바탕과 다이내믹을 제공한다. 칭의론은 영적으로 민감해져 자신의 연약함과 부패함으로 인해 쉽게 고통 받고 신음하는 거듭난 양심의 유일한 위로이며, 자주 죄에 쓰러져 자괴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영적 회복의 바탕이다.
애초에 거짓 신앙을 가지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은 영적으로 어두워 칭의론에 담긴 은혜의 풍성함과 영광을 보지 못하고 그 교리를 방종과 나태를 조장하는 가르침으로 남용할 것이다. 칭의론이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될 이에게는 무한한 축복과 위로가 되지만 멸망에 이르게 될 이들에게는 거침돌이 된다. 그들의 거짓 구원의 확신과 위로를 강화하여 그들을 확실하게 망하게 하는 올무가 된다.
나는 지금까지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참된 신자가 칭의론을 그런 식으로 남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 중에 율법주의적으로 각색된 가르침에 찌들어 가시지 않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확신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임을 발견하였다. 진정한 신자에게는 칭의론이 의인된 삶의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칭의 복음의 부재가 거룩한 삶의 치명적인 방해가 된다.
실제 목회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우리의 신학적 이론이 어떻게 적용되고 체화되는지에 대한 밀도 있는 현장학습도 중요하다. 칭의론을 고치면 칭의론을 남용하던 신자들이 의인된 삶을 살까. 교회가 영적으로 새로워질까. 오히려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의 누룩이 교회 안에 번질 것이다. 칭의론을 제거하면 실제로 피해를 입을 사람들은 참으로 거듭난 신자들뿐이다. 그들의 의인된 삶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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