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6·6교실/요한계시록 교실

[스크랩] 바울서신에 나타난 “파루시아(παρουσ?α)” 사상

류성련 2016. 12. 1. 01:23

목 차

서론

파루시아에 관한 배경

1. 구약에 나타난 파루시아 사상

2. 외경 및 위경에 나타난 파루시아 사상

바울서신을 제외한 신약성서에서의 파루시아

1. 공관복음에서의 파루시아

2. 요한복음에서의 파루시아

3. 일반서신에서의 파루시아

바울서신에서의 파루시아에 관한 전승문제와 표현

1. 바울의 파루시아 사상의 전승

1) 묵시문학의 전승

2) 초대교회의 전승

2. 바울서신에 나타난 재림을 의미하는 용어

1) 파루시아

2) 하포카둘피스

3) 에피파네이아

4) 헤 헤메라

바울서신에 나타난 파루시아의 관경과 때의 문제

1. 파루시아의 이전에 나타나는 조짐

2. 파루시아 때에 나타나는 현상

3. 파루시아의 때

1) 데살로니가서에 나타난 파루시아의 때

2) 고린도서에 나타난 파루시아의 때

3) 후기서신에 나타난 파루시아의 때

바울서신에 나타난 파루시아 사상의 발전적 해석

1. 파루시아의 부활

2. 파루시아 때의 심판과 보응

3. 파루시아의 발전

결론

 

서론

바울이 그의 최초의 서신인 데살로니가전서에서부터 그가 마지막으로 기록한 서신인 빌립보서에 이르기까지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사상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매우 흥미있는 것이다.

Ⅰ. 파루시아에 관한 배경

바울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사상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구약 성서에서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사상의 표현과 외경과 위경에서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사상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본 논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1. 구약에 나타난 파루시아 사상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고전 희랍어와 코이네 희랍어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함께있음(임재)”를 뜻하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도착, 또는 도래를 뜻하기도 하였다.

구약의 70인역 성서는 “오다”라는 뜻을 가진 서로 다른 히브리어 단어들을 “πάρειμι”로 번역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재림한다는 사상의 배경은 구약 신현현으로 출애굽기에서 보여주는 불꽃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강림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과 교통하시는 하나님의 오심이라는 사상은 심판을 행하고 백성들을 구원하며, 구원을 선사하시는 하나님의 오심이라는 사상과는 이미지가 다르다.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개입하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대하였다. 여호와께서 어디로부터 나오시는 가 하는 장소의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오시는 목적이다. 여호와께서 악인을 벌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다.

하나님의 마지막 임하심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원도 의미하며, 자기 이름을 부르는 곳에 자기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구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구원자와 심판자로서 오실 날을 기대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심판, 파멸, 공포의 날’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Ⅱ. 바울서신을 제외한 신약성서에서의 파루시아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신약 성서 저자들이 “오심”과 “임재”라는 관념을 나타내고 헬레니즘 문화에서는 통치자가 의례적으로 그의 백성을 방문하는 것를 가르치는데 사용되었다. 바울 서신을 제외한 신약성서에서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가리키고 있다.

1. 공관복음에서의 파루시아

공관복음서의 초기 전승에는 예수의 재임이 연기되었다는 구절과 비유들이 있으며, 더구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의 재임 시기가 확실치 않으므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죽지 않고 그 시간을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에서의 그리스도의 재임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관련하여 묘사되며 이 세대의 종말을 구획지을 것이라고 한다.(마 24:3)

예수는 묵시적이고 임박한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다.

마태는 예수가 유대 백성을 향해 임박한 위기에 대해 준비할 것을 촉구했던 이 비유를 인용하여, 자기 시대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지연되고 있는 예수의 재임에 대해 계속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재림 비유로 바꾸었다.

마가는 그의 공동체가 로마라는 악의 세력에 의해 받고 있는 현재적 핍박과 임박한 환란을 견딜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소망을 제공하면서(막 13:13), 하나님의 절대 주권인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의 때”에 최후 승리를 보장받을 것임을 확신시키고 있다.

공관 복음서에 나타난 재림에 관한여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을 말하는 구절들만이 예수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지며,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의 지연에 관한 것들은 교회의 산물로 이해된다.

2. 요한복음에서의 파루시아

요한복음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부활과 심판이 나타날 때를 주님의 재임의 때라고 보고 있었다. 그들은 멀지않은 미리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다시”라는 표현이 요한복음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재림의 뜻을 더욱 노골화 한 것은 초대 교회 전승보다도 요한에게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다시 와서(παλιν ἔρχομαι)’라는 희랍말을 사용함으로써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파루시아”의 뜻을 재림으로 밝혔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재림이라는 요한복음의 개념은 공관 복음서의그것보다는 �씬 복잡하다. 예수는 자신이 세상을 떠났다가 부활하여 다시 돌아 올 것이라고 말한다. “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요 16:16)”

공관복음에서의 재림에 대한 전승은 묵시적 전승에 의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요한은 이런식으로 영향을 받지 않은 한 전승을 나타내 보여준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확실한 표현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에 나타난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신다는 의미는 그의 부활에서 이미 일어났으며, 교회가 기다리던 ‘파루시아’는 성령의 임재를 통한 그리스도의 현재적 체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에 있어서의 ‘파루시아’는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에서 하나로 일치가 되는 것이다.

요한의 미래는 구원은 이미 완성되었고, 현재 이 세상에 남아있고, 계속 ‘새로와지는 사건’으로 요한의 현재는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허황된 것이 아니고 ‘심판과 구원이 일어나는 시간’이요, 성령의 현존으로 ‘파루시아’가 경험되는 시간이다. 요한은 예수의 재림이 반드시 이루어 진다고 한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미래저거 종말론의 모습은 공관복음(막13, 마24장)에서와 같은 강한 묵시문학적 특징이나 바울(살전)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임박한 재림과 같은 모습은 볼 수 없으나 미래적인 종말 사상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초대교회 전승이 보도하하는 미래에 닥쳐올 심판, 부활, 주님의 재림 사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루시아’는 이미 실현된 현재적인 것과 아직 아닌 미래적인 것으로의 이중성을 지니는데 이것은 예수 재림의 지연으로 인하여 느슨해진 공동체의 기대에 신뢰성을 유지하고 현실과 미래의 소망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3. 일반서신에서의 파루시아

베드로 전서에서는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나 “άποκαλυφις(나타나심)”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말하고 있다.

베드로 전서가 현재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면 베드로 후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짓 선생들을 경고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벧후 2:2)

베드로전서에 사용하지 않았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를 베드로 후서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종말과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의 영향이었다.(벧후3:4) 또한 베드로후서가 기록될 당시의 교회는 사도시대의 후기로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의 지연이 문제로 부각되던 때이기도 하였다.

베드로후서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인간의 계산에 의하면 지연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의 지연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목적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한다(벧후 3:9)

히브리서에서는 그 전체에 깔려있는 종말론적 요소들을 통하여 예수의 재림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해 준다. “장차 오는 세상(2:5)”에서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가 되시며, 그 그리스도는 “세상 끝(9:26)"에 나타나신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구약적인 소망의 성취임을 보여주는 종말론적인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재는 ‘종말론적 성휘의 때’이면서 동시에 완성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은 전체에 산재해 있다. 지금은 성취의 때이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고,(4:3) 종말에 누릴 축복을 이미 누리고 있다. 그러나 완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4:9)

야고보서는 임박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를 기대하면서 살았던 초기 기독교의 산물이다. 야고보는 구워은 반드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때에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그때에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며(1:2), “영혼이 사망에서 구원”받고(5:20),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고 한다.(2:5)

Ⅲ. 바울서신에서의 파루시아에 관한 전승문제와 표현

바울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사상에서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50번 이상이나 언급된 예수의 재림에 대한 그의 각각 다른 표현들 뒤에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 대한 바울의 상황인식그 교회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 바울의 파루시아 사상의 전승

1) 묵시문학의 전승

바울의 묵시 문학 사상은 그가 가지고 있던 그의 유대묵시적 세계와 그가 전승 받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 전통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구원의 완성이 기대되는 미래를 “하나님의 나라(고전 15:50)”, “그리스도의 재림(고전 15: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고전 1:7)”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부활과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에 의해 완성되는 새 시대를 열어주는 묵시문학적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시작된 종말론적인 세대는 주의 재림과 함께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비롯한 모든 악의 세력들이 종국적으로 그리스도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바울은 이해하였다.

2) 초대교회의 전승

초대교회의 전승은 멀지않은 장래에 있을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를 기대하고 있었고, 예수의 재림시에 일어날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그 부활은 뉵체의부활이며, 심판과 함께 말하고 있다.

초대교회에서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에 관한 전승은 매우 극적이고 묵시문학적인 미래사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유대교의 묵시문학에 영향을 받은 “인자의 날” 종말 사상이 특징이다.

바울은 예수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할 때, “주의 말씀(살전 4:15)”임을 전제로 하여 초대 교회의 전승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와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던 종말의 현상으로부터 자기의 표현을 묘사하고 있었다.

이렇듯이 바울은 묵시문학의 구조와 초대교회의 전승을 이어받아 그의 서신을 통하여 새 창조에서의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건과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의 중간기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종말론적인 삶의 요청이다. (고전 15:34, 58)

2. 바울서신에 나타난 재림을 의미하는 용어

1)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이 단어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방문할 때, 특별히 왕들이나 황제가 어떤 지방에 방문할 때 사용되는 반기술적인 술어이다.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신약성서에서 24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 14회가 바울의 것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실제적인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미래에 속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사건으로서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격변적으로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어느 한 점에서 이루어질 궁극적인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에 의해 열려지는 것은 종교적 의식에 최고의 절대적인 중심점을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아포칼룹시스(ἀποκάλυψις)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강림을 지칭하는데 사용한 둘째 용어는 “계시(아포칼룹시스-ἀποκάλυψις)”이다. 이 개념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데 먼저 전적으로 지상적인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즉, 숨기는 것과 드러내는 것(게시), 모두가 땅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개념은 메시야가 이 낮은 세상에 나신 후에 숨어 계시다가, 마침내 자신을 백성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고, 특별한 사역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파루시아가 주로 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용어인 반면에 아포칼룹시스는 주로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들에게 관심한다.

3) 에피파네이아(ἐπιφάνεια)

에피파네이아(ἐπιφάνεια)는 “나타남”, 즉 그리스도의 재림의 가시성을 뜻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성육신과 재림 두 가지 모두를 나타내는 이중적인 용법이다. 주로 목회 서신에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파루시아는 다시 나타나심에 강조점이 있고, 에피파네이아는 그리스도가 강력하고 영향력있는 행위의 주체자로서 즉, 심판과 종말론적 성취자로서 다시 돌아오신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4) 헤 헤메라(ἡ ἡμεʹρα)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칭하는 또 하나의 용어로 “헤 헤메라(ἡ ἡμεʹρα)”가 있다. “그 날”이란 구약의 “여호와의 날”,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그의 날” 또는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과 대적들의 파괴를 가져오는 날이다. 즉 rm 날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날이었다.

바울의 사상에서도 여호와의 날이 그리스도의 날로 되면서 종말론적인 중요한 칭호가 되었다. 이것은 바울의 종말론이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인 규정을 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유대적 종말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주의 날”은 첫째, 주의 주권이 완전히 드러나는 날로서 감추어져 있던 그리스도의 형태가 그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누구 한 사람도 의심하지 못할 만큼 하나님의 지배가 드러나는 날이다. 둘째, “주의 날”은 심판의 때로서 종말의그리스도는 심판의 때에 심판의 그리스도가 되신다. 그리스도의 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진노가 반역의 세계 위에 부어지는 날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주의 날이요, 재림의 날인 동시에 심판과 구원의 날인 것이다. 셋째로 “주의 날”은 급격한 초 자연적, 우주적 파국과 같이 도래한다는 유대교의 종말론적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바울은 살전 5:2에서 그 날이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갑자기 아무 경고도없이 올 것이라고 한다.(살전 4:16f; 고전 15:52 등등)

Ⅳ. 바울서신에 나타난 파루시아의 관경과 때의 문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과연 언제 올 것이며, 그 때에는 어떠한 일들이 나타날 것인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크나큰 관심이다 그렇다면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와함께 일어나는 현상들은 어떠한 것이며, 그리고 그 때는 언제 임하는지 알아보자!

1. 파루시아의 이전에 나타나는 조짐

바울은 “파루시아(παρουσία)”가 이르기 전에 악한 통치자,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며, 이 불법의 사람은 사람들이 그의 통치에 완전히 굴복할 것을 요구하기에 그가 나타날 때는 “배도하는 일”도 동반될 것이라고 한다.(살후 2:3f)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했지만 지금은 “막는 자(살후 2:7)”가 있다. 그 불법의 사람은 사단의 능력을 받아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그들을 진리에서 떠나게 할 것이다.(살후 2:9f)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크게 전파되고(롬 9:24ff; 엡 2:11-20), 이스라엘인들의 회개가 일어난다(고후 3:15; 롬 11:25-29)

2. 파루시아 때에 나타나는 현상

바울은 그리스도 재림과 함께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 주께서 하늘로부터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불꽃 가운데(살후 1:7)강림할 때에 세가지 소리(주의 호령,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가 그와 함께 난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썩지 않을 몸으로 일어난다. 또 살아있는 그리tm도인들의 몸은 죽을 몸으로부터 죽지 않을 몸으로, 썩을 몸으로부터 썩지 않을 몸으로, 죄있는 몸으로부터 죄없는 몸으로 순식간에 변화된다. 셋째, 예수 안에서 죽은 자나 살아남은 자들은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된다.(고전 15:51)

3. 파루시아의 때

데살로니가서에 나타난 파루시아의 때는 그 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임박하여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에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 때와 시기가 숨겨져 있는 주의 오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다릴 것과, 주에게 속하는 빛의 자녀로서 냉철하고 성실하게 생활 할 것을 권면하였다. 바울은 거의 매장에 한번씩은 주님의 재림을 언급한다.

고린도서에 나타난 파루시아의 때에 관하여는 16:22의 마라나타라는 말은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해되고, 통용되었던 표어, 슬로건, 함성, 암호 그리고 그들의 신앙고백으로서 주의 오심을 기대하고 있었던 대표적인 말이다.

바울의 후기서신에 나타난 파루시아의 때에서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 즉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만국으로 전파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초기의 서신에서 처럼 재림이 그렇게 속히 일어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Ⅴ바울서신에 나타난 파루시아 사상의 발전적 해석

바울은 그 기간 동안에 교회의 여러 가지 질문과 또한 각 교회가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서 적절한 서신들을 보냈다. 그의 각 서신들에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아마도 그의 근본 사상에는 변함이 없으나 표현의 방법이 달아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1. 파루시아와 부활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바울은 먼저 죽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때에 일어나서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주를 영접한다는 문제만을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보다는 고린도서에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때에 일어나는 부활의 모습을 더 자세하게 묘사하면서 발전시키고 있다.(고전 15:52f). 이러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사상에 관한 변화의 근본적인 이유는 바울이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중요시하면서 부활은 재림 시에 일어날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재림보다는 죽음과 부활의 모습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바울에게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의 확신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후기 서신에서도 여전히 주의 재림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파루시아 때의 심판과 보응

바울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에 나타나는 심판의 사상도 매우 중요하다. 그는 인간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함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고 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얻게되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진노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보상교리가 바울의 가르침 속에서도 존재함을 여실히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자기가 행한 일로 말미암아 최종적인 심판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있을 것이요, 반면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진노의 분”이 있을 것이다. 심판의 날에 각 사람의 행한 일은 실제로 그대로 드러날 것이며, 의롭게 행한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 그 분이 심판의 자리에 앉을 것이요, 그 분 앞에 선 각 사람은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했는가, 못했는가에 따라 좋은 것, 혹 나쁜 것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우리 몸이 행하였던 일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살전 5:1-11에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의 날이 갑자기 임하기 때문에 그 날을 당하여 당황하지 않으려면 항상 깨어 근신하는 준비된 자세로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후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공의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을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환란으로 갚으시고, 환란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안식을 누리게 해주시는데 그 때가 바로 주 예수께서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실 때라는 것이다.

3. 파루시아의 발전

바울의 종말론은 몇단계에 걸쳐서 발전되었는데 첫째단계는 배교하는 일과 적대자, 최후 심판과 재림, 신앙의 완성으로 인한 은총을 입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둘째 단계에서는 최후심판과 부활과 은총입음을 완성을 말한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온 땅에 전파되고, 재림과 심판, 부활을 말한다. 넷째로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원한 지속, 정신적 세계로의 그리스도의 구속의 확장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종말론의 발전적 단계를 보아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에 대한 사상도 점점 발전되어진 것임을 개별적인 전승 단계들과 변형들을 통하여 개략적으로알 수 있다. 즉, 바울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에 대한 사상이 시간이 흐름으로서 바뀌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재림의 기대가 발전되어 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사상은 그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메시야 강림사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사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초대교회는 임박한 종말론적인 왕국과 그 왕권을 가진 인자가 곧 임할 것임을 말하였다. 그 때에는 부활과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었다.

바울은 초대교회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하고있다, 그렇지만 주의 재림과 이 세대의 종말이 언제 일어날 것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그의 서신에서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의 날이 언제 임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영적으로 깨어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준비할 기회가 있음을 주지시킴으로써 불건전한 동요와 공포, 현실포기 등의 어리석음을 경계시키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주의 재림의 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어떠한 영적인 모습으로 그를 만나느냐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어 하루하루의 신앙생활, 즉 영적이며 현재적인 삶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요약 후 정리과제

① 핵심주제?

: 본 논문의 핵심주제는 바울의 재림 사상 즉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구약과 신약과 초대 교회에서 전승되어진 것으로서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적 접근을 통해 바울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 영적인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것에 중심 무게가 실렸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를 맞이하는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을 영적으로 보다 현재적인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함을 그 중심 주제로 설정하였다.

④ 새로운 깨달음이 있다면

: 바울이 아무리 율법적인 것을 탈피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의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전승되어져 오는 기본 사상을 저버리거나 전혀 다른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처럼 점점 하나님의 뜻을 완성시켜 나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⑤ 아직도 이해되지 않거나 어려운 내용은 무엇인가?

⑥ 요약 후 한국 교회나 우리 자신들이 꼭 적용하거나 또는 고쳐야할 것이 있다면?

: 바울이 자신 종말에 대한 자세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사상을 현대를 살아가는 참된 크리스찬들이 깨달아 지난 날의 폭발적인 부흥에 주춤했던 신앙의 끈과 생활의 모범을 다시 재발견하여 이 땅에 크리스찬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참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를 맞이하는 한국 교회와 오늘을 사는 나를 주님께서는 요구하고 계실 것이다.

⑦ 소감 또는 하고 싶은 말 쓰기

: 바울에게 있어서의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으매 그 뒤를 이어 성도들의 부활이 이어질 것을 생각했고, 그러므로 바울은 이미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의 때가 임박했음을 강조했다. 그런 바울은 더욱 영혼에 대한 열정을 품고 정말 기관차와 같이 쉬지 않고 선교의 열을 올렸다.

참으로 바울과 같이 이 시대를 사는 나와 같은 크리스챤들이 참된 윤리관을 가지고 이 땅에서 빛과 소금된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할 것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논문이었다.

다시 한번 귀한 학문을 할 수 있도록 채찍해주신 김성환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_____^ 샬롬!

출처 : 은별나라 신학
글쓴이 : mats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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