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6·6교실/요한계시록 교실

[스크랩] 사해 문서(死海文書, Dead Sea Scrolls, DSS), 사해 두루마리 또는 사해 사본(死海寫本)

류성련 2016. 12. 3. 14:06

 

 

1947년부터 1956년까지 10년간 사해 북서쪽 쿰란 지역 11개 동굴에서

900여편(800개가 넘는) 옛 문서들로 대부분 구약성경의  원본들인

72개의 두루마리 사본의 파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B.C. 200년에서부터 A.D, 70년사이에 기록된 사본들이었으며

히브리어와 아랍어 그리고 희랍어로

양피지나 파피루스(papyrus)(2개 사본은 구리판 위)에 기록되어 있었다.

 

금세기 중엽의 그노시스, 헤브라이즘 및 헬레니즘 세계의 극히 중요한 2개의 대 발견이

나그함마디 문서와 이 사해 문서(DSS, 사해 사본, 사해 두루마리)의 발견이라 한다.

나그함마디 문서에 관해서는 다룬 바 있다.

 

사해 문서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에센파의 고문서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쿰란'이란 가장 보수적 유대인 집단이었던 '에센'(Essens)파 사람들이

하나님께 완전하고도 엄격한 헌신의 생활을 하기 위해 함께 모여 살았던 공동체를 말한다.

 

사해 문서(死海文書, Dead Sea Scrolls, DSS)는

사해 두루마리 또는 사해 사본(死海寫本)으로도 불려지며

소수의 일부분을 제외한 구약성경 대부분의 필사원본이라 한다.

(크기:너비 44cm, 길이 1~8m, '이사야서' 길이 7.34m, 폭 평균 26cm )

 

 

 

 

<내용 순서>

1. 위키백과:사해 문서

2. 사해 사본이란?

3. 쿰란 동굴

4. 사해 문서와 기독교인들의 딜레마

5. 사해 사본에 관해서

6. 사해 두루마리들이 현대 성경에 미친 영향

(내용이 조금씩 다르므로 같은 내용이 겹치나 모두 소개함)

 

사해-남북의 길이가 77㎞, 동서 최대의 폭이 16㎞, 면적은 9백65㎢로 갈릴리 호수의 6배다. 해저 4백20m, 소금농도가 30%로, 코발트색의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살지 않는 주변,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다.  사해는 요단강에서 매일 5백만t의 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언제나 넘치지 않고 일정한 수면을 유지한다. 뜨거운 날씨로 인해 그만큼의 물이 수증기로 증발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 4개의 당파가 있었다. 제사장 중심의 사두개파, 평신도 중심의 바리새파, 민족독립 투사들의 단체인 열혈당파, 그리고 에센파들이다.
이 에센파들은 주전152년 대제관 직분까지 겸임해버린 요나단을 배격하고 '의의 선생'이란 지도자를 따라서 수도원을 건설하고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곧 임박할 종말의 전쟁을 대비해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후 68년 로마가 여리고를 거쳐 쿰란을 정복하게 될때 아무런 저항도 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에센파 자료:1, 2, 3>

 

1. 사해 문서

사해 문서(死海文書, Dead Sea Scrolls, DSS), 사해 두루마리 또는 사해 사본(死海寫本)은 히브리어 성경을 포함한 900여편의 다양한 종교적인 문서들을 아우른다. 1947년에서 1956년경까지 사해 서쪽 둑에 있는 와디 쿰란 (사해의 북서쪽 해변에 있는 고대 키르벳 쿰란 근처) 주변과 11개의 동굴들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의 연대는 기원후 100년 이내로 올라가기 때문에 엄청난 종교적, 역사적 가치가 있다. 현재 대부분의 문서는 예루살렘의 지혜의 신전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암만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서 일부들.           

 

목차

내용

탄소 측정법과 문서에 대한 분석, 글씨체에 의해 사해 문서들은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대선지자 이사야 문서는 기원전 335년에서 기원후 107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한다.

사해 사본 이외에는, 십계명이 담겨 있는 이집트의 Nash 파피루스 정도가 이에 비견할 만한 오래된 순서였다. 비슷하게 쓰인 문서들이 근처, 특히 마사다 요새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일부 문서는 파피루스에 쓰여 있고, 많은 문서들이 갈색 동물 가죽 위에 쓰여 있다. 탄소 계열의 재료로 만들어진 잉크깃털촉으로 쓰였다. "구리 두루마리"라 이름 붙인 문서는 종이처럼 얇은 구리판에 기록되어 있다. 사해 문서 가운데 80% ~ 85%는 각각 고전(또는 성서) 히브리어, 사해 문서 히브리어와 원시 탄나이트(미쉬나) 히브리어로 불리는 3개의 히브리어 방언들로 쓰였다. 일부 문서는 아람어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이기도 했다.

발견 과정, 각 동굴의 문서들

문서들이 발견된 동굴들

 

사해사본은 1947년에 한 베두인이 쿰란 지역 동굴에서 처음 발견을 하였다. 그 사실을 안 E.L. 수케닉(E. L. Sukenik)고고학자는 사해사본을 베두인에게서 샀다.

사해사본 두루마리들은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쿰란 주거지에서 적게는 125m (제4동굴)에서부터 1km (제1동굴)까지 떨어져 있다. 사람이 살던 주거지에서 발견된 문서는 없다. 염소와 양을 치는 베두인 모함메드 아흐메드 엘-하메드 (별칭 에드-디브, "늑대")가 1947년초에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양치기가 잃은 동물을 찾기 위하여 돌멩이를 동굴로 던졌는데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나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오래된 항아리에 들어있는, 면에 싸여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존 트레버 박사는 무함메드 에드-디브라는 사람에 대해 여러 사람과 인터뷰를 했지만 모두 기본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포함한 여러 변형된 이야기들이었다고 한다.

이 두루마리들은 골동품 상인인 이브라힘 이즈하(Ibrahim 'Ijha)가 베들레헴에 가지고 들어왔으며, 시나고그에서 훔쳤다는 의혹 때문에 그들에게 돌려 주었다. 그 후 이 문서들은 칸도라고 불린, 칼릴 에스칸더 샤힌(Khalil Eskander Shahin, "Kando")이라는 도굴꾼이자 골동품 상인에게 넘어갔다. 처음 베두인들이 이 문서를 발견했을 때에는 세 개의 두루마리를 꺼냈는데, 그들은 칸도의 말에 나중에 동굴에 다시 들어가 더 많은 문서들을 꺼내오게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칸도가 적어도 네 개의 두루마리를 불법적으로 발굴했다고 하기도 한다.

베두인에게서 건네받은 문서들은 제 삼자에게 흥정을 통해 넘어갔다. 그 중 하나는 시리아 정교회의 일원인 게오르게 이샤야(George Isha'ya)였고, 그는 곧 이 문서의 정체를 문의하기 위해 성 마가 수도원에 접촉했다. 이러한 발굴 소식은 메트로폴리스 주교 아타나시우스 예수에 사무엘(Athanasius Yeshue Samuel)---또는 마르 사무엘(Mar Samuel)이라고 더 잘 알려짐---에게 전해졌다.

문서를 조사하고 나서 오래된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마르 사무엘은 이를 사는 데 관심을 보이게 된다. 4개의 두루마리들을 곧 사게 되며 이들은 현재 유명한 이사야 스크롤 (1QIsa)과, 공동체 규칙, 하박국 페샤르(하박국 주석)과 창세 묵시록이다. 또다른 두루마리들이 고문서 시장에 나돌았으며, 이스라엘의 고고학자이면서 히브리 대학의 교수인 엘레이저 수케닉(Eleazer Sukenik)교수가 3개의 두루말이를 얻게 되었다. 이들은 전쟁 두루마리, 추수감사 찬송과 이사야 문서의 단편들이었다.

1947년 말까지, 수케닉은 마르 사무엘이 가지고 있는 문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들을 사려고 시도했다. 정말 거래가 성사되지는 않았고, 대신 미국 동방 연구소(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ASOR)의 존 트레버 박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트레버 박사는 이 문서의 구절들을 당시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인 내쉬 파피루스와 비교했고 이 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트레버 박사는 아마추어 사진가로도 열정이 있었다. 그는 마르 사무엘을 1948년 2월 21일에 만나 두루마리의 사진을 찍는다. 나중에 어떤 사진은 사본 자체보다 보관 상태가 더 좋기도 했다. 사본들의 면 커버를 제거하고 나서 사그러졌기 때문이다.

그 해 3월에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나 안전을 위해 문서들을 이동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으며, 곧 베이루트로 옮겨졌다.

1948년 9월 초, 마르 사무엘은, ASOR의 새 소장인 오비드 셀러스에게 새롭게 얻은 사본들의 단편을 가지고 간다. 그 해 말, 학자들은 사본이 발견된 동굴의 위치를 알아내게 된다. 당국에서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에,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셀러스는 시리아인들의 도움을 받아 동굴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하지만, 셀러스가 주겠다고 한 돈보다 더 비싼 돈을 요구했다. 제1동굴은 결국 1949년 1월 28년에 국제 연합의 조사관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 사해 사본을 팔겠다는 광고가 1954년 7월 1일 월 스트리트 저널에 실리게 된다. 이는 다음과 같다.

MISCELLANEOUS FOR SALE
THE FOUR DEAD SEA SCROLLS
Biblical manuscripts dating back to at least 200 B.C.
are for sale. This would be and ideal gift to an educational
or religious institution by an individual or group.
Box F 206 WALL STREET JOURNAL

7월 1일, 몇 번의 섬세한 협상을 통해 메트로폴리탄과 다른 두 명이 가지고 있던 사본들은 미국 뉴욕의 월도르프-아스토리아 호텔로 옮겨지고, 250000 달러에 팔린다. 마르 사무엘은 그 돈의 아주 일부분만 받게 되고, 서류상의 이유로 미국 정부가 대부분의 돈을 세금으로 가지고 가게 된다.

제2동굴

베두인들은 제2동굴에서 30개의 단편들을 발견하게 되고 이중에는 고대 히브리어로 된 희년(Jubilees)과 벤 시라흐(ben Sirach)도 포함되어 있다.

제3동굴

가장 신기한 문서는 동 문서이다. 이는 동으로 되어 있는 문서로 제3동굴에서 발견되었고, 이스라엘 전역의 지하의 비밀 장소 64곳에 묻힌 보물들의 목록이 들어 있다. 이에 따르면 금, 은, 향료,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되어 있던 보물들로 추정하고 있다.

제4동굴

1950년말부터 40%의 문서들이 제4동굴에서 발견되었지만, 출판되지 않아서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제5, 제6동굴

제5, 제6동굴은 제4동굴이 발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되었다.

1954년 7월 1일, 월 스트리트 저널은 사해 사본 문서에 대한 광고를 실었는데 이에 대한 것이었다.

제7에서 제10동굴까지

고고학자들은 제7동굴에서 제10동굴까지 1955년에 발견했으나, 많은 문서들이 들어 있지는 않았다. 제7동굴은 17개의 그리스어 문서들 (7Q5를 포함)을 담고 있으며, 이들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제8동굴은 5개의 단편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9동굴은 단 하나의 단편만이 있었다. 제10동굴에는 도편만이 들어 있었다.

제11동굴

성전 문서가 제11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가장 긴 두루마리이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의 길이는 8.148미터이다. 내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원래의 길이는 8.75미터로 추정된다.

 

 

 

 

 

 '사해문서'는 '유다의 황야'에 있는

① 쿰란(Wadi Qum-ran) 동굴

② 무라바트(Wadi Murabbaat) 동굴

③ 미르드(Khirbet Mird) 폐허

④ 하브라(Wadi Habra) 동굴

⑤ 세이얄(Wadi Seiyal) 동굴

등에서 이미 발견되었고 현재까지도 계속 발견되고 있는 수많은 고문서의 총칭이다.

 

 

 

 

2. 사해 사본이란?

(NAVER 지식 iN)

 

 

사해사본이란 1947년과 1956년 사이에 사해바다 주변에서 발견되어진 사본을 말한다. 이 "사본들"은 일부 완전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분적인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광범위한 의미로 보면, 사해사본들은 주전 3세기 부터 주후 8세기 무렵까지의 문서들로서 사해바다 주변 지역의 7 장소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을 통칭한다. 사해바다 주변 지역들이란 것은 쿰란, 마사다, 와디 무라바아트, 나할 헤베르, 나할 쩨엘림, 나할 미쉬마르, 그리고 키르벳 미르드 지역들을 일컫는다. 이러한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에는 카이로에서 발견되어진 "그니자"까지도 포함되어지기도 한다. 한편, 협소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은 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쿰란 사본들을 가리킨다. 1952년 3월 10일 부터 29일까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사해바다의 북서쪽 해변가 일대, 즉 하자르 엘 아쯔바흐에서 부터 라쉬 훼쉬카에 이르는 8 km 지역에 흩어져 있는 273개의 동굴들에 대한 답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39개의 동굴들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자취를 확인하였고 25개의 동굴들에서 쿰란 제 1동굴과 쿰란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같은 형태의 토기들과 유물들을 출토하였다. 그중에 단지 11개의 동굴에서만 "기록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들을 가리켜 협소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이라고 일컫는다.



◈ 어떻게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알았을까 ?

사본과 함께 발견되어진 토기와 동전들을 통한 연대 결정과 더불어 서체를 비교 연구하는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이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어졌다. W. F. Albright, N. Avigad, S. A. Birnbaum, F. M. Cross, R. S. Hanson 과 J. T. Milik 등이 이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에 의해서 사해사본의 서체들이 4가지 부류로 분류되었다. ① 고어체; 250 B.C. 부터 150 B.C. 까지, ② 하스모니안 서체; 150 - 30 B.C. 까지, ③ 헤롯시대 서체; 30 B.C. 부터 A.D. 70 까지, ④ 헤롯시대 이후 또는 장식서체; A.D. 70-135 까지 등의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고딕체와 필기체 등으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고문서체 비교 연구 방식에 의해서 얻어지는 연대 결정은 + 50년의 오차 범위 한도내에서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문서체에 대한 비교 연구와 함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이용하여 연대를 결정 짓는다. 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C14)를 이용하여 산화되고 남아있는 방사능 물질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얻어지는 연대는 + 200 년 또는 + 80 년 정도의 오차를 보여 고문서체 연구와 함께 연대 결정의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진다. 1951년 시카고 대학의 과학자 W. F. Libby 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둘러쌌던 천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1917, + 200년 또는 A.D. 33, + 200년. 즉, A.D. 233 년과 168 B.C. 무렵이라는 결정을 얻었다(O.R. Sellers, BASOR 123[1951] 24-26 참조). 또한 1956년 런던의 한 연구소(Laboratory of the Royal Institution)에서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종려나무 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940 + 80 년, 즉, A.D. 16 + 80 년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마지막으로 사본 자체 내에 연대 산출의 근거를 제공하는 단서들에 근거한다. 예를들면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된 나훔 주석서(4QpNah)에 [ Dmy ]trws 는 Demetrius III Eucerus 라는 주전 2세기 경의 셀류커드 통치자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며, 알렉산드라 여왕의 히브리식 이름 "샬롬찌온",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후계자 "히르카누스", 그리고 첫 번째 시리아의 로마 총독 Aemilius Scaurus(ca 63 B.C.)에 의하여 일어난 "'Emilyos 학살 사건"등과 같은 내부 기록들은 연대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한다.



제 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7개의 두루마리 사본이 발견되어진 곳이다. 7가지 두루마리 사본들은 이사야 두루마리A(1QIsaa) ② 이사야 두루마리 B(1QIsab) ③ 공동체 규칙서 (1QS) ④ 전쟁사 (1QM) ⑤ 감사 찬양시편 (1QH) ⑥ 하바국 주석서 (1QpHab) 창세기 외경 (1QapGen) 등이며, 이것들 외에도 72개의 조각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고 그 가운데 15개가 성서 내용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은 미가, 스바냐, 시편의 주석서들과 2개의 공동체 규칙서의 부록들이다(1QSa; 공동체의 메시야 규율 1QSb; 축복문 모음집).



제 2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2번 동굴에서는 18개의 구약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는데, 레위기 11:22-29 의 내용을 담고있는 2Q5 같은 문서는 고대 페니키아 문자들과 비슷한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2Q18 은 제 2경전 가운데 하나인 시라서(Sir 6:14-15, 20-31)의 내용을 보존하고 있으며 이것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으로는 매우 초기에 해당하는 시라서 사본으로 알려진다. 왜냐하면, 10세기, 12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카이로 그니자에서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기록된 시라서는 헬라어와 라틴어 사본 만이 알려져 왔었었다. 2번 동굴에서는 또 다른 히브리어로 기록된 제 2 경전 사본 조각들도 제공한다. 그 밖에도 15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텍스트들도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2개의 '쥬빌리(Jubeilees)' 사본들(3Q19, 3Q20)과 아람어로 기록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3Q24)' 등이 있다.



제 3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3번 동굴에서는 14개 조각의 텍스트들을 발견하였는데, 3개가 성서(에스겔 16:31-33, 시편 2:6-7,애가 1:10-12, 3:53-62) 내용들이고 11개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고 그 중에 하나는 이사야 1:1에 대한 주석(3Q4)이다. 또한 유명한 "청동 플라크"(3Q15)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는데 12개의 칼럼에 보물들(돈, 금, 은, 기타 보석들)이 감춰진 장소들이 열거되어 있다. 감춰진 보물들의 수량은 가히 경이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들면, 4600 달란트의 은과 금 등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아무 누구도 텍스트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4번 동굴은 가장 중요한 동굴이랄 수 있다. 완전한 사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15,000 조각들"의 사본이 발견되어진 곳이다. 나훔의 주석서(4QpNah)가 5개의 칼럼으로 기록된 가장 긴 사본이고 나머지는 모두 끼워맞추어야하는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1952년 부터 1960년 까지 끼워 맞추기 퍼즐을 통하여 584개의 텍스트 종류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에 127개가 성서 내용들이고 나머지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가운데는 테필린, 메주자, 그리고 탈굼(4Q128-157)들인데 DJD 6 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주석들과 구약성서와 관련된 시리즈들(4Q158-186)은 DJD 5 에서 다루었다. 또한 여러 종류의 제 1에녹서가 1976년 J.T. Milik 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그 외에도 10개 내지 11개의 공동체 규칙서와 1896년 카이로 그니자를 통해서만 알려졌던 다마스커스 사본이 8개 정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헬라어로만 알려져왔던 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의 일부도 발견되었고, Jubilees 의 히브리어 원본의 일부도 알려졌다. 또한, 토빗서의 사본(4개는 아람어, 1개는 히브리어- 헬라어와 라틴어를 통해서만 알려진 제 2경전)과 1번 동굴에서 발견된 감사 찬양시편 조각, 그리고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본들이 발견되어진 곳이 4번 동굴이다. "하나님의 아들(4Q246)", "축복문 모음집(4Q525)", "율법의 실천을 위한 모음집"으로 알려진 4QMMT 등, 이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구약성서에 대한 본문 비평 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 사상의 배경을 연구하는데에도 중요한 자료들로 알려졌다. (DJD=Discoveries in the Judean Desert(Oxford:Clarendon)



제 5번, 6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5번 동굴에서는 정경화 이전의 성서 텍스트들 8개(신명기 7:15-24, 8:5-9:2 열왕기 상 1:1, 16-17, 27-37 이사야 40:16, 18-19 아모스 1:3-5 시편 119:113-20, 138-42 애가 4:5-8, 11-15, 16, 18-19, 20-22, 5:1-3, 4-12, 13, 16-17 애가 4:17-20 과 개봉하기가 아주 어려운 테필린 한 개)와 17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 발견되었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는 1QS 2:4-7, 12-14와 병행구에 해당하는 "공동체 규칙서(5Q11)", 그리고 카이로 그니자 다마스커스 사본 9:7-10과 병행구인 "다마스커스 사본(DD)의 사본(5Q12)", "아람어로 기록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5Q15)" 등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6번 동굴에서는 비교적 덜 중요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7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2개는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6Q1 창세기 6:13-21 과 6Q2 레위기 8:12-13 등의 기록이다). 나머지는 열왕기 상 3:12-14, 12:28-31, 22:28-31 열왕기 하 5:26, 6:32, 7:8-10, 7:20-8:5, 9:1-2, 19-21 시편 78:36-37 아가 1:1-6, 6-7 다니엘 8:20-21, 10:8-16, 11:33-36, 38 등의 내용들이다. 그 밖에도 24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도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중요성이 덜한 이야기체 문학들, 예언적, 사법적, 제의적 내용들과 찬양시들이다.



제 7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놀랍게도 19개의 문서 조각들이 전부 헬라어로 기록된 것들이 발견되어진 동굴이다. 이 중에서 2개가 확인되었는데, 7Q1은 출애굽기 28:4-7 그리고 7Q2는 예레미야의 편지 43-44(=바룩서 6:43-44)로 밝혀졌고 다른 것들은 너무 조각이 작고 적힌 내용의 분량이 충분치 않아서 해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제 8번, 9번, 10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8번 동굴에서는 4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테필린에서 또 어떤 것은 메주자에서 나왔다. 또한 창세기 17:12-19, 18:20-25 그리고 시편 17:5-9, 14, 18:6-9, 10-13 등의 문구들과 한 개의 비성서적 찬양 텍스트가 발견되었다. 9번 동굴에서는 6 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파피루스 조각 한 개만이 발견되었고, 10번 동굴에서는 2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오스트라카 한 개가 발견되었다.



제 1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11번 동굴은 1번, 4번 동굴들처럼 중요하다. 고대 히브리어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11QpaleoLev)와 시편 두루마리(11QPsa), 욥의 탈굼역(11QtgJob), 거의 완전한 성전 두루마리(11QTemplea), 그리고 여러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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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사해문서 논평>

           

 

 

구약의 원본 사해 문서(두산 백과)

사해두루마리라고도 한다. 1947년 2월, 베두인의 한 소년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 예리코 남쪽 13.6 km의 사해 서안의 절벽 위에 있는 여러 동굴 안을 수색하게 되었다. 소년은 그 중 한 동굴 속에서 아마포(亞麻布)에 잘 싸인 가죽 두루마리가 들어 있는 높이 64.8∼75 cm, 지름 25 cm 정도의 여러 개의 항아리를 발견하였는데, 이들 두루마리 중 5개를 시리아의 예루살렘 정교회(正敎會)의 대주교 마르아타나시우스 사무엘이 샀으며, 나머지 3개는 예루살렘의 헤브라이대학교 E.수케닉 교수가 매수하였다. 1954년 수케닉의 아들 Y.야딘이 25만 달러를 지불하고 사무엘 대주교로부터 5개의 두루마리도 사들여 현재는 이들 두루마리 전부가 이스라엘 국가의 소유로 되어 있다.

그 후 두루마리의 가치성이 인정되었으나, 1948년 초에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이 동굴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를 못하고, 1949년 2월 15일∼3월 5일 사이에 요르단 고고학연구소의 L.하딩과 성서학원의 R.드보에 의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때 성서의 여러 사본들 및 외경(外經)에 대한 단편(斷片)들과,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700점을 상회) 기록물들이 발견되었다. 거기서 발견된 항아리 파편의 양(量)으로 보아 그 동굴에는 약 20개의 두루마리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동굴들 안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제1동굴에서 발견된 2개의 《이사야서》 두루마리이다. 제1동굴의 첫 번째 《이사야서》는 헤브라이어로 기록된 완전한 《이사야서》 사본이며, 두 번째 두루마리는 그 1/3에 해당한다. 첫 번째 두루마리는 길이가 7.2 m, 나비가 25.9 cm이다. 이 두루마리가 가장 방대하고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데, BC 2∼BC 1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고대 헤브라이어로 기록된 《레위기》의 단편들은 이보다 더 오래 된 것이고, 그 뒤로는 《사무엘서》의 여러 단편들이 나왔다. 그리고 외경에 속하는 《에녹서》 《다메섹의 새 언약 규정:Rule of the New Covenant in the Land of Damascus》 《훈련교법서(訓練敎法書:거룩한 생활)》 등이다. 이 사해문서의 발굴은 구약성서 연구에 새 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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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쿰란 동굴

  

 

 

(1) 쿰란

 

'쿰란'이란 가장 보수적 유대인 집단이었던 '엣세네'(Essens)파 사람들이 하나님께 완전하고도 엄격한 헌신의 생활을 하기 위해 함께 모여 살았던 공동체를 말한다.(쿰란동굴) 

 

우연히 한 목동에 의하여 1947년 한 굴속에서 '사해사본'이 발견된 이후 고고학계에 관심이 '쿰란'으로 몰리게 되었었다. 마침내 고고학계의 발굴작업으로 보수적 신앙을 갖고 함께 모여 살았던 '엣세네'파 신앙인들이 살고 간 옛 마을의 흔적을 그대로 고스란히 찾아 내게 되었다. 그 찾아낸 바로 그 마을터를 가르켜 '쿰란'이라고 부른다.

 

 

 

(에세네파의 공동 거주지)  

 

  (쿰란의 공동 주거지와 저수장)                

  

 '쿰란'은 여리고와 사해(Dead Sea)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까 여리고로 부터 남쪽으로 10키로쯤 떨어져 있으며 사해의 서북쪽 끝에서 부터는 1키로쯤 서쪽으로 떨어져 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따르면 쿰란은 여러 부대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물 저장탱크와 공동묘지를 비롯하여 휴게실과 식당 그리고 부엌과 기도실 또 순결의식에 필요한 목욕실과 성경연구실등 모든 부대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긴요했던 물은 모아 두었던 빗물을 사용하였으며 식료품은 멀리 '예루살렘'으로 부터 조달되었다고 한다.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 문서의 보관 모습)

 

 

특별히 발굴팀에 의하여 발견된 한 방에서는 로마시대에 사용했던 필기도구들, 잉크와 펜들이 원형 그대로 잘 본존된채 발굴되었기 때문에 엣세네 사람들은 성경사본들을 그방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 당시 에세네파 사람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헌신적 삶이란 성경을 복사하는 일과, 목욕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동시에 경건한 수도원적 생활을 계속해 나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는 동시에 성경을 옮겨 써서 사본을 만들어 두는 일에 전심 전력을 다 했던것 같다.

 

                                                                  (쿰란동굴의 일상 용기들)  

 

 

 

 

 

그렇지만 이 보수적인 신앙공동체에도 로마군에 의한 위협이 한발 한발 다가오자 그들은 사본해 두었던 두루마리들을 모두 동굴속에 감추어 둔채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 때가 바로 주후 70년경이었다. 그러니까 보수적 신앙인들의 집단공동체는 주전 130년경부터 시작하여 주후 70년경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사야 사본을 찾은 곳)  

 

 

 

 

그리고 800개 이상의 사본을 감정한 결과 그중에 170개 사본은 '에스더'를 제외한 구약 전편이었으며 특별히 '이사야'서는 놀랍게도 완전한 사본으로 고스란히  잘 보존되어 있었다.

  

 

 

 

 

 

 

 

 

 

                               (발견된 두루마리 성경 사본) 

 

 

 

 

 

이미 언급한것 처럼 1947년, 양을 몰던 한 복동에 의하여 쿰란동산의 동굴속에서 고대 사본 하나가 발견되었으며 이 일이 있은후 계속 사본을 탐색한 결과 40,000여개에 이르는 고대사본과 성경주석(하박국,미가) 그리고 쿰란생활 자체에 대해 기록해 놓은 문서등을 11개 동굴에서 찾아내는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쿰란 수도원 규칙서) 

 

 

 

 

  

발견된 사본들은 주로 주전 200년에서부터 주후 70년사이에 기록된 사본들이었으며 히브리어와 아랍어 그리고 희랍어로 양피지나 파피루스(papyrus)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단 2개의 사본만은 구리판 위에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한편 제4 동굴에서 있었던 사본발굴 이야기는 발굴작업이 때로는 우연한 일로 인하여 발굴작업이 촉진되고, 진행된 동시에 또한 동기부여도 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문서 보관된 모습) 

 

 

 

 

사본 발굴작업이 시작되었을때에 학자들을 돕는 한 보조원이 발굴작업에 사용하는 꼬챙이를 작은 구멍속에 빠트렸었다고 한다. 그 보조원은 꼬챙이를 찾아 내려고 꼬챙이가 빠진 구멍에 긴 막대기를 넣어 흔들었는데 이상스럽게도 꼬챙이가 빠져들어간 그 구멍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무엇인가 물건이 밑바닥에 닿는것 같은 느낌이 들어 파 보았더니 그곳에 바로 사본들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쿰란공동체'에 모여 살았던 신앙인들은 같은 시대에 활거하면서 형식과 허세에 힘을 쏟던 바리세파 사람들과는 큰 차별성을 들어내면서 엄격한 금욕과 더불어 경건한 생활을 '모토'로 살아갔던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엣세네파 사람들은 목욕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옯겨쓰는 동시에 예배드리고 묵상하는 종교적인 생활에만 오직 정진했던 흔적들이 '쿰란'동산의 여기 저기에 역역했다.

 

 

 


 

 

 

 (문서가 가장 많이 발견된 제 4번 동굴)

 

 

쿰란동산에 살았던 보수적인 신앙인들인 엣세네파 사람들은 수천년전에 모두 떠나갔지만 그들이 살다간 그 자리에서 필자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만 들은것이 아니라 그들이 남겨두고 떠난 '영혼의 생동감'이 아직도 살아 '쿰란'동산의 여기 저기에서 움직이는것을 느꼈으며 그 영혼의 노래를 듣고 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2) 쿰란 사해 사본

 

사해 문서(死海文書, Dead Sea Scrolls, DSS), 사해 두루마리 또는 사해 사본(死海寫本)은 히브리어 성경을 포함한 900여편 다양한 종교적인 문서들을 아우른다. 1947년에서 1956년경까지 사해 서쪽 둑에 있는 와디 쿰란 (사해의 북서쪽 해변에 있는 고대 키르벳 쿰란 근처) 주변과 11개의 동굴들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의 연대는 기원후 100년 이내로 올라가기 때문에 엄청난 종교적, 역사적 가치가 있다. 현재 대부분의 문서는 예루살렘의 지혜의 신전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내용

탄소 측정법과 문서에 대한 분석, 글씨체에 의해 사해 문서들은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대선지자 이사야 문서는 기원전 335년에서 기원 후 10년사이의 것으로 추정한다.

사해 사본 이외에는, 십계명이 담겨있는 이집트의 Nash 파피루스 정도가 이에 비견할 만한 오래된 순서였다. 비슷하게 쓰인 문서들이 근처, 특히 마사다요새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일부 문서는 파피루스에 쓰여 있고, 많은 문서들이 갈색 동물 가죽위에 쓰여 있다. 탄소계열의 재료로 만들어진 잉크로 새의 깃털 촉으로 쓰였다. "구리 두루마리"라 이름 붙인 문서는 종이처럼 얇은 구리판에 기록되어 있다. 사해 문서 가운데 80% ~ 85%는 각각 고전(또는 성서) 히브리어, 사해 문서 히브리어와 원시 탄나이트(미쉬나) 히브리어로 불리는 3개의 히브리어 방언들로 쓰였다. 일부 문서는 아람어와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이기도 했다.(하략)

 

쿰란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유적지

 

 

<출처:쿰란 사해 사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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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블로그 용PowerPoint 2007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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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4 New! pps-Bible (파워포인트 쇼로 접하는 성경이야기) <Blog용> & Ave Maria   

2013. 4. 29. 6시간 20분 대장편 영화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Full Movie)1977

& 영화 이해를 돕기 위한 4복음서 내용 장별 비교

 

 

 

 *사해문서의 미스테리

위 자료 내의 주요 링크 사이트들

1. Children of Ezekiel

2. 히스토리 lHistory-사해문서

3, DEAD SEA SCROLLS

4. The New York TIMES-사해문서

5. 기사 스크렙(사해문서, 히툴러)

6. The Evidence For Ancient Communications

 

 

 

★히브리어 성서 사본(구약성경의 사본)

쿰란에서 발견된 문서 가운데 성서 사본이 대략 200여 개나 되는데, 에스더를 제외하고는 전체 구약성서가 단편으로나마 모두 발견된 셈이다. 대다수 사본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에스더서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에스더 9장 20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부림제"를 거부하는 에세네파 사람들의 의도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부림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축제가 아니라는 이유임)

이제가지 발견된 성서사본의 수는 다음과 같다.

 

쿰란문서

 창세기

 15사본

 사무엘상,하

 4사본

 애레미아애가

4 사본

 출애굽기

 17사본

 다니엘

 8사본

 전도서

 3사본

 잠언

 2사본

 시편

 36사본

 열왕기상,하

 3사본

 민수기

 8사본

 욥기

 4사본

 이사야

 21사본

 신명기

 29사본

 레위기

 13사본

 예레미아

 6사본

 여호수아

 2사본

 아가

 4사본

 역대상,하

 1사본

 사사기

 3사본

 룻기

 4사본

 에스더, 느헤미아

 없음

총 202개 사본

 

 

이 발견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현제 우리가 읽고 있는 히브리 성경본문은 중세에 만들어진 사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본의 신뢰성에 의문의 여지가 많았다.

쿰란에서 발견된 오래된 사본은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올라 간다. 나머지 성서 본문들은 쿰란 거주지가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는 해인 기원 후 68년 이전에 기록이 되었다. 현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이 성서가 토대로 삼은 중세대의 사본들보다 800년 이상 앞서서 기록되었다.

쿰란에서 발견된 성서 본문과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마소라 본문 사이의 차이는 쿰란사본을 통해서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던 성경사본 본문은 1000년 전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어로 성경을 번역한 이른바 70인역본(셉투아긴다)과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에 들어있는 구약성경 외경에 속하는 유다서, 마카베오 상.하, 솔로몬의 지혜서등 어느 하나도 쿰란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진 70인역본과 우리가 현제 사용하고 있는 "마소라"본문과 비교해 보면 본문과 단어 이해에서 차이가 나는데 쿰란에서 발견된 성경사본이 70인역과 동일함이 드러났다. 70인역과 마소라본문 차이는 팔레스타인에 현존했던 다양한 본문의 차이에서 근거를 둘 수 있다.

 

 

 

 

 

4. 사해 문서와 기독교인들의 딜레마

 

우연한 발견

 

위대한 고고학적인 발견이 오히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 있다. 특히 새로운 유물이 기존의 믿음을 송두리째 뒤집는 경우 그 유물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기 쉽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사해문서死海文書'이다. 사해문서는 서양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발견이면서 동시에 가장 푸대접을 받아온 것 중의 하나이다.

 

사해문서가 발견되자 전세계 기독교 신도들은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다. 수많은 서양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정신세계를 구성해온 예수의 말씀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서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사해문서를 통해 예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것은 곧바로 기독교의 교리나<성서>의 내용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문서의 내용이 해득되자 유럽인들은 사해문서를 애써 외면하고자 했다. '전설의 고향'이 불운한 운명을 맞게 된 것은 사해문서에는 유대교도들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지금의 교리와 어긋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해문서는 1947년 5월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사해 근처 쿰란Qumran의 동굴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이 발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근처 마을에 사는 한 소년이었다. 그 날도 염소를 돌보는 일을 하던 무하마드 소년은 무심코 염소를 헤아리다가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염소를 찾기 위해 자기가 온 길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그러자 서쪽 벼랑의 바위틈에서 염소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벼랑을 올라가 바위튼에 뚫려 있는 동굴에서 염소를 찾았다. 동굴은 길이 8.5m 에 너비 3m, 높이가 3m나 되는 꽤 큰 동굴이었다. 동굴에는 높이 60cm 정도의 큰 항아리가 8개 있었다. 무하마드는 그 날 저녁 친구에게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했다. 친구가 그의 말을 믿지 않자, 무하마드는 다음날 같이 가서 확인하자고 했다. 다음날 무하마드는 친구와 함께 다시 동굴로 갔다. 쿰란의 동굴 속에는 무하마드의 말대로 8개의 큰 항아리가 있었다. 둘은 급히 항아리 속을 살펴보았으나 그들이 원하는 보물은 없었다. 대신 그 항아리 속에는 너비 44cm, 길이 1~8m의 시커먼 두루말이가 엉켜 있었다. 쿰란의 사해문서가 발견된 순간이었다.

 그들은 두루말이를 들고 골동품상에 갔다. 골동품 상인은 다시 두루말이를 시리아 정교회 소속 성 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사무엘 대주교에게 가져갔다. 대주교는 이 두루말이가 어쩌면 <구약성서>의 원본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우여곡절 끝에 당시에는 거금인 24파운드에 모두 구입하였다(6년 후 사무엘 대주교는 이스라엘 정부에 이들 문서를 25만 달러에 되팔았다). 사무엘은 헤브루 대학교의 수케닉 교수에게 두루말이를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현지 정황은 아랍과 유대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어 언제 분쟁이 터질지 모를 때였다. 수케닉 교수는 두루말이를 들고 예루살렘에 있는 아메리카 동방연구소의 트레버 박사를 찾아갔다. 트레버 박사는 두루말이를 보고 놀라울 정도로 오래된 것이며 기원전 1~2세기의 '이사야 사본'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사해문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 있었다.

 

구약성서의 원본을 찾다

 

곧 그들은 사진 촬영에 들어갔다. 그리고 1948년 2월에 그 사진을 전세계에 있는 유명한 고고학자들에게 보냈다. 1948년 3월 15일 사무엘 대주교는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고고학 교수 알브라이트 박사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이 문서는 <구약성서>의 원본이며 기원전 100년경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두루마리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발견이며 인류 역사에 가장 뛰어난 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부디 나머지 두루마리도 찾아서 구약 39권을 모두 갖추게 되기를 바랍니다."

 

1949년 중동 전쟁이 끝나자 사해 지방은 요르단의 땅이 되었다. 예루살렘에 있던 프랑스의 드 보 신부는 두루마리가 발견된 곳에는 에세네파가 살았던 자취가 남아 있을 것이며 그런 엄청난 보물이 동굴 한 곳에만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귀중한 자료는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여러 곳에 분산해 놓았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는 사해문서를 처음 발견했던 무하마드 소년과 함께 벼랑으로 갔다. 드 보 신부의 생각은 옳았다. 그는 계속해서 동굴들을 찾아냈고 곳곳에서 수백 개의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탐사가 진행될수록 놀라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바위 아래 깊은 땅 속에서 옛 도시의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 두 겹으로 된 성벽 안에는 저수지와 급수시설, 공동묘지도 있었다. 수도원의 방에는 나무로 만든 큰 책상과 걸상이 먼지에 덮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잉크병과 붓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이 모두 그 방에서 기록되었음이 분명했다. 실제로 잉크병의 잉크와 두루마리 글씨의 잉크가 같은 것으로 훗날 밝혀지기도 하였다. 한 동굴에서만 4만 개에 이르는 두루말이 조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문서들은 그 이전까지 알려졌던 성서의 가장 오래된 사본보다 무려 1천 년이나 더 오래된 것이었다.

 

사해의 서북 연안의 동굴은 베두인들이나 고고학자들의 답사가 이어졌고, 매년 새로운 발견이 있었다. 쿰란 지역의 동굴은 1956년 봄까지 11개 곳이나 발견되었다. 발견의 순서에 따라서 1Q(Qumran Cave1)에서 11Q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사해문서는 쿰란에서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와디·므라바트 지역의 동굴과 킬베트·밀드 지역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문서의 종류는 무려 600종이나 되며 두루마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도 10권 이상이다. 특히 '쿰란동굴1'에서 발견된 것(양피지로 되어 있으며 길이 7.34m, 폭 평균 26cm이다)에는 '이사야서' 전 내용이 수록돼 있고 '쿰란동굴4'에서 발견된 두루마리에는 '키므엘기'가 적혀 있다. 사해문서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았다. 고온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와 사막의 열기가 두루마리의 부패를 방지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풀기 힘든 퍼즐

 

엄청나게 많은 사해문서들이 발견되었지만 이들 조각들을 짜맞추는 것은 발견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11개의 쿰란 동굴에서 발굴된 두루마리는 약 900개 정도로, 대부분이 완전하지 않은 채 수많은 조각들로 이어져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손으로 일일이 조각들을 이어서 약 3m 정도의 두루말이가 될 수 있었다.

 

이들 조각들을 짜맞추기 위해 두루말이들은 동예루살렘에 있는 '록펠러 박물관'으로 보내졌고 1953년에 7명으로 구성된 국제 연구팀이 구성되었다. 학자들은 사해문서 두루말이들을 양피지와 파피루스 같은 재질에 따라 또는 쓰여진 색깔에 따라 분류를 했다. 검정 잉크색으로 기록된 것들이 일차로 분류되었지만 이들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손톱 정도의 크기에 단지 자음 두 자만 쓰여져 있는 것, 손바닥 크기만한 것, 글자들이 중간에 뚝 떨어진 것에 이르기까지 상태도 다양했다. 고통스러운 작업은 1958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연구팀의 일원이었던 훈징어 교수는 그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만약 여러분이 어느 날 다락에 올라갔다가 귀퉁이에서 아주 오래된 헌 궤짝 하나를 발견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걸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당신의 증조할머니가 쓴 연애편지가 약 600통이 들어 있었죠. 물론 증조할머니께서 쓰신 연애편지뿐만 아니라다른 많은 사람들이 쓴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 편지들은 모두 잘게 찢어져 있고 그 수가 대충 10만개 정도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것들이 모두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것은 물론 그 조각들의 80%는 불에 탔습니다.

이것들을 갖고 퍼즐을 맞추는 거죠. 말하자면 증조할머니께서 누구에게 무엇을 썼는지를 읽어내는 겁니다. 바로 이게 우리들의 일이었지요. 단지 다른 게 있다면 우리 증조할머니의 연애편지가 아니라 모음도 없이 자음으로만 쓰여져 있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본문들이라는 겁니다."

 

쿰란에서 발견되 수많은 조각들이 성서에 관한 것만 적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문학작품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과거 그 당시 책들에 대한 주석서라든가 또는 에세네파의 교훈집 같은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해문서들의 연대를 알기 이해서는 여러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사본과 함께 발견된 토기와 동전들을 통해 연대를 추정하는가 하면 더불어 서체를 비교해 보다 정확한 사해문서의 연대를 추정하기도 했다. 알브라이트 박사 등은 사해문서의 서체들을 다음과 같이 네 부류로 나누었다.

 

① 고어체: 기원전 250년부터 기원전 150년까지

② 하스모니안 서체: 기원전 150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③ 헤롯 시대 서체: 기원전 30년부터 기원후 70년까지

④ 헤롯 시대 이후 또는 장식서체: 기원후 70년부터 135년까지

 

서체를 비교 분석해 연대를 추정한 결과 제4번 동굴에서 발견된 '나훔 주석서4QpNah'는 기원전 2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울러 리비가 발명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도 동원되었다. 이를 통해 제1번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의 천 조각은 기원전 233년부터 기원전 168년 사이의 것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1956년에 런던의 왕립연구소에서 측정한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종려나무 조각은 기원후 16년(오차 한계 80년을 더하면 96까지)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전해진 그 어떤 히브리 사본의 연대보다 1천 년 이상을 앞당기는 연대들이었다. 1990년, 94년에 실시된 방사능 탄소 연대 측정은 많은 자료들이 기원전 2세기 것으로 판명됐다.

 

발견 당시에는 '에스더서'를 제외한 <구약성서>가 모두 들어 있는데다 '이스라엘의 구세주', '정의의 교사', '하나남의 아들'이라는 말이 들어 있어 예수 탄생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들 연대추정법에 의할 경우 사해문서는 예수가 태어난 연대보다 50년에서 100년 정도 더 먼저라는 것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사해문서의 제작자들

 

드 보 신부가 밝힌 사해 동굴의 두루마리에 얽힌 유래는 이렇다. 기독교가 등장할 당시 유대 민족은 여러 종파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다수파는 바리새파였고, 사두개파와 에세네파는 소수파였다. 바리새파는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했던 율법의 수호자들이었다. 율법학자와 랍비, 신분이 낮은 사제계급들로 이루어진 바리새파는 중산층과 일부 평민층을 대표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그치지 않고 여러 세부적인 율법들을 발전시켰는데 안식일에 낳은 달걀은 먹을 수 있으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심각한 논쟁을 벌일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세상이 언젠가 멸망할 것이라는 생각에 외우기도 힘든 수많은 규율들을 지키며 기도 생활을 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 언젠가 최후의 심판일이 왔을 때 부활이라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서>에서 예수는 종종 이들의 지나치게 맹목적이고 위선적인 율법주의를 비판하였는데 가령 "회칠한 무덤" 등의 표현이 이를 지적한 것이다.

 

한편 소수파인 사두개파와 에세네파는 종교 및 정치 문제에서 바리새파와 다른 입장을 보였다. 사두개파는 소수파였지만 성직자와 지배층이 주요 구성원으로 유대교의 보수층을 대표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십계명)이 기록된 성궤를 보관하는 곳이자,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상징인 성전의 제례의식을 주관하는 자들로 세금과 공물을 받으며 최고의 지위를 유지했다. 부활이나 사후 보상을 믿지 않았던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는 더 완고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대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세력들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즉 로마인들이 성전의 예배와 제례의 전통에 대해서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로마의 통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고, 이를 통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에세네파는 '구세주' 혹은 '정의의 사도'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끌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율법과 제사 등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 것에 비해 에세네파는 쿰란의 광야에서 유대의 율법을 지키며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결혼을 하나의 필요악으로 간주했던 그들은 대부분 독신의 남자들로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를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을 하며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에세네파는 하층 계급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첨예한 사회·정치 문제에 무관심했으며 광신적인 애국자가 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의식적인 측면보다 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중요시해 오로지 하나님을 믿고 기도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오면 빛의 아들들이 어둠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믿음 속에 세상의 종말에 대비했다. 흰색 복장에서부터 종교의식에 따른 식사에 이르기까지, 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두루마리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모든 일상사는 다가올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최후의 결전에 맞추어졌다. 영광스러운 새 시대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에세네파 교인들은 200년 동안 금욕적인 기도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전달하는 일만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들 에세네파들이 기다리던 세상은 끝내 오지 않았다. 제국의 지배자들에 맞선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군이 진군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후 68년이 되자 그들은 '어둠의 아들들'이 아닌 이들 로마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쿰란 동굴의 문서들은 바로 로마인들의 약탈을 피해 동굴 속에 감추어졌던 것이다.

 

☞ 유대 민족사 - 책에 나오는 사진 설명 중에서

<구약성서>에 따르면 유대 민족의 역사에서 최초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아브라함으로 유대 민족의 시조라고도 한다. 이후 유대 민족은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치세 기간 동안 엄청난 건설 사업에 동원되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기원전 13세기경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모세의 인도에 의해 이집트를 탈출한다(출애굽).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유대 민족과 하나님의 계약(이를 예수와 하나님의 새로운 계약인 신약에 앞선 계약이라 해서 기독교인들은 구약이라고 부른다)을 중재한다.

 

모세 이후 유대 민족은 다윗 왕에서 솔로몬 왕에 이르는 치세 기간(기원전 11~10세기) 동안 전성기를 맞이한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립하는데 성전은 솔로몬 대에 이르러 완성된다. 다윗은 유대 민족의 영광을 상징하는 인물로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왕이었고, 모세의 십계명이 새겨진 성스러운 '법궤'를 모신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민족이 하나님을 받느는 성소였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 왕국은 분열되어 기원전 8세기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기원전 6세기에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멸망하고 유대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성서>에서 '느부갓네살'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뛰어난 군주로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과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세운 인물이다.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하자 유대 민족은 고향으로 돌아와 파괴된 성전을 다시 건립한다.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대 민족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점령당하는 등 자주 주변 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점령당한 뒤 로마에 의해 유대의 통치자가 된 헤롯왕의 지배를 받다가 이후 로마 총독의 직접 지배를 받는다. 기원후 66년에는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시작되었지만 기원후 70년, 타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때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파괴된 채 성전의 기물을 약탈당한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된다.

 

에세네파와 이스라엘의 구세주

 

사해문서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고문서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종교의 창시자는 '이스라엘의 구세주', '정의의 교사', '이사야의 고뇌에 찬 종', '하나님의 아들' 등의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괴로운 죽음을 맞을 운명이었다. 그는 고문을 받았으며 흉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는 인내와 형제애, 자선과 빈곤을 가르치며 새로운 계율과 정의와 세례, 그리고 성찬聖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부활해 세계를 구원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게 된다.

 

이 사람이 누구일까?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대부분 "예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해문서에는 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직 '구세주'라고만 표기돼 있으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고민하는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사람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이 예수였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구세주는 예수보다 150년 전의 인물로 추정된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인이 믿는 예수는 오직 단 한 사람의 인물은 아니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미 그 이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서 설교되었던 것으로 예수가 되풀이했다는 것일까? 사해문서는 정통 성서학자들에게 엄청난 골칫거리가 되었다.

 

사해의 두루마리들에는 '에스더서'를 뺀 <구약성서>가 모두 들어 있었다. '메시아의 서', '하박국의 주석서註釋書', '계율에의 지도서', '라메크의 묵시록',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과의 전쟁' 등도 수록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제목만 알려졌던 고대의 서지書紙들로 실물은 전해지지 않았었다. 사해문서의 연대가 큰 문제가 되자 다른 여러 고대 문헌과의 비교를 통해 연대를 추정해보는 한편 사용된 양피지에 대한 화학 분석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략 기원전 400년에서 50년 사이에 사해문서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 그리고 기록된 언어를 조사한 결과 대략 기원전 100년 무렵의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사본의 내용 그 자체도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문서상에는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것은 '킷티임'이라고 적혀 있는데 로마군은 팔레스타인을 세 차례나 침공했었다. 기원전 63년에는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기원후 6년과 68년에도 침략했는데 킷티임은 기원전 63년의 로마 군대로 추측된다. 사해문서에 나타나는 구세주를 십자가에 매달게 한 흉악한 제사장은 알렉산더 야누스로 추정된다. 그가 유대교의 분파 운동을 심하게 탄압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문서에는 내란의 지도자 역시 흉악한 제사장의 손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쓰여 있으며 또 다른 문서에는 구세주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속죄일에 흉악한 제사장을 타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대사건이 일어난 해를 역사에서 찾으면 로마 제국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기원전 63년에 해당한다. 만약 이 문서가 정확한 것이라면 이 문서가 기록된 것은 기원전 63년에서 기원전 43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임이 다시금 확인되는 것이다.

 

선지자 피타고라스의 수수께끼

 

성서학자들을 더욱 고민스럽게 만든 것이 하나 더 있다. 그리스의 학자인 피타고라스(기원전 580~500?)의 존재 때문이다.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은 기원전 1세기, 로마인에 의해 부활되어 초기 로마 제국의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 이집트 종교, 기독교 등 당대의 여러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은 특히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에 관한 전설들과 유사한 점이 많아 성서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에 관한 몇몇 전설이 피타고라스의 전설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는 다음과 같이 피타고라스와 예수의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그리스 시대 사람들은 피타고라스가 신의 아들(아폴론 신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피타고라스의 어머니는 '파르테니스'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처녀'를 뜻한다. 이집트로 떠나기 전에 피타고라스는 예수가 산에서 홀로 철야기도를 했던 것처럼 카르멜산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유대교의 한 분파인 에세네파는 이 전설을 자신들의 이야기로 만들었는데 에세네파는 세례 요한과 연결된다. 피타고라스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전설도 있으며 예수가 행했다는 기적과 능력의 많은 부분이 피타고라스의 전설과 일치한다. 피에르 몬테트에 의하면 피타고라스는 같은 시각에 두 장소에 나타나기도 하고, 신의 목소리로부터 인사를 받기도 했으며, 물 위를 걷기도했다고 전해진다.

 

피타고라스의 사상이 예수의 가르침과 유사하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했다. 철학적인 면에서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은 그와 동시대인인 붓다(기원전 약 560~480)의 가르침과도 유사한데 두 사람 모두 인간이 죽은 후 동물로 환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피타고라스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에 반대하고 철저한 채식을 주장했다. 또한 피타고라스는 소유가 신성한 진리의 추구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당대의 그리스인들은 양털옷을 입거나 다채로운 색상의 옷을 착용했지만 피타고라스는 사치를 배격하고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아마포로 만든 간소한 흰옷 외에는 어떤 것도 입지 못하도록 했다. 이들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돈을 벌지 않고, 기부금이나 집단 구성원이 공동체에 헌납한 재산에 의존해 생활했다. 학자들은 초기 기독교인들도 피타고라스 교단과 유사한 생활을 했다고 믿는다.

 

기원후 2세기에는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은 플라톤이 세운 학교인 아카데미와 결합하면서 보다 번창하였다. 그러나 기원후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자 피타고라스 후예들은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인들은 피타고라스 후예들의 긴 머리와 수염, 그들이 쓰는 약물, 그들의 신앙을 싫어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플라톤의 아카데미를 폐쇄했다. 이 영향으로 유럽의 중세가 암흑시대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피타고라스의 원리가 사해문서의 원작자인 에세네파와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성서학자들을 더욱 고민하게 만들었다.

 

사두개파를 제외한 유대교의 모든 종파는 기독교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우주 발생론과 십계명을 받아들였으며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초월적 신에 대한 개념을 교리의 기본으로 삼았다. 사해문서가 해득되었을 때 기독교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놀란 이유는 기독교가 예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수보다 훨씬 전부터 기독교의 기본 이론이 정립되어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실제 학자들 중에서는 기독교가 에세네파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종교라고 단언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유사성이 많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가 불교의 스님들이 머리를 깎고 수도에만 정진하는 것과 비슷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에세네파의 생활이 그러했다.

 

지금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 유대교나 기독교나 <구약성서>를 공통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유대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기독교 세계에서 아직도 유대교가 차별 대우를 받는 이유인데 그런 차이를 확인시켜주는 것이 바로 사해문서이다. 사해문서에는 문맥의 내용만으로 볼 때 예수의 행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선지자의 이야기가 버젓이 들어 있다. 정통 기독교인들로서는 예수 이전에 예수와 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기독교가 에세네파의 교리와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해문서가 유대교에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기록인 반면 정통 기독교측에는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 교단의 이견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사해문서에 대해서만 거론하며 다음과 같은 대담한 가설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유대교의 한 분파인 에세네파는 기원 전후에 상당히 많은 신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예수가 구세주 혹은 정의의 사도로 알려졌던 에세네파의 지도자와 거의 같은 방법으로 사망하자 예수의 행적과 에세네파의 교리가 접목됐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의 종교 중 하나로 성장한 기독교가 예수라는 한 인물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몇 년간의 활동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피타고라스 원리와 에세네파의 교리 등을 기독교가 받아들이면서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해문서는 1963년 마사다 요새를 찾아낸 야딘이 사무엘 대주교로부터 25만 달러에 구입해 이스라엘 정부에 기증했고,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의 '고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고요한 집이라는 뜻의 '나베 샤난' 언덕 위에 있다.

(에세네파=에센파)

[출처] 사해문서와 기독교인들의 딜레마|작성자 hanamander

 

 

 

 

5. 사해 사본에 관해서

 

(1) <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금세기 중엽에 그노시스 세계, 헤브라이즘 세계 및 헬레니즘 세계에 있어서 각각 극히 중요한 대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즉, 첫째 1946년(1945년이라고도 한다)에 나일강변의 한 촌락 나그.하마디(카이로의 남쪽 약 570킬로,옛 케노보스키온)에서 그노시스파의 서고를 발견했고, 둘째로 뒤에 말할 1947년의 사해 사본의 발견이며,셋째로, 크레테섬 크노소스 및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선문자 B가 1952년에 영국 건축가 마이켈,벤트리스(1922-1956)에 의하여 해독되고, 이것이 기원전 1400년대의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라는 것이 판명된 일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경위는 이렇다. 1947년 봄(1945년 이었다고 한다) 사해의 북서부 사막의 구릉지대 쿰란에서 베두인(아랍계 유목민)이 양과 염소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의 염소를 찾기 위하여 한양치기 청년이 반 쯤 허물어진 벼랑의 동굴에 돌을 던졌더니 무엇인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튿날 그 청년은 사촌 형제와 함께 그 동굴로 기어 올라가 보니 좁은 동굴 속에는 항아리의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안쪽에는 뚜껑이 덮인 항아리 여덟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일곱 개는 빈것이었고 나머지 한 개의 항아리 속에는 큰 두루마리 한 권과 작은 두루마리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이 두루마리를 결국 베들레헴의 고물상에게 넘어가고, 그 해 12월에 예루살렘의 헤브라이 대학이 이 세 두루마리를 사들이게 되었다.

그후 사해의 서북 연안의 동굴은 베투인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답사되고 매년 계속해서 발견이 있었다. 와디,쿰란 지역의 동굴 발견은 1956년 봄까지 11개 곳(1956년에 발견)이었으며, 발견의 순서에 따라서 1(1Q,Qumran Cave1)에서 11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그 밖에 와디,므라바트 지역의 동굴, 킬베트.밀드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들,그리고 킬베드,쿰란과 아인.페스카 폐허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모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해 사본 또는 사해 문서라고 부르는 것은,1947년에서 수년 간에 걸쳐서 사해의 서북연안과 서안에 펼쳐져 있는 <유다의 황야>의 동굴이나 폐허에서 발견된 고사본들을 말한다. 발견한 장소나 사본의 내용과 성격 등은 여러가지이며, 그 정리와 분류는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간행된 사본과 단편들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1) 와디.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2) 와디.므라바아트(쿰란의 남쪽 약 16킬로미터,예루살렘의 동남남 약 24킬로미터)지역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사본 단편들(대부분은 2세기 전반, 특히 유대인의 대로마 제 2차 반란(AD 132-135년)시대에 속하는 것이며, 이 반란의 지도자 발,코호바에 관한 사료도 포함되어 있다.
(3) 킬베트.엘밀드(예루살렘의 동남쪽 약 14킬로미터)지역의 유적(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자리)에서 발견된 신약성서의 사본 단편들(AD 5-8세기에 속하며, 쿰란 사본들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4) 아랍인 베투인들이 가지고 온 출저 불명의 사본 단편들.
이것들 종에서 사해 사본이 중심이 되는 것은 (1)의 쿰란 사본들이다. 사본의 종류는 600종이나 된다고 하며, 두루마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도 10권 이상이 되며, 특히 동굴 1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전권(54난의 양피지로 돼있으며, 전장 7.34m,폭 평균 26cm, 각 난은 평균 30행. 이사야 66개 장이 전부 들어있다)과 동굴 4에서 발견된 키므엘기는 귀중한 것이다. 사본들의 연대는 대개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쿰란 종단의 본거지가 로마군에게 점령된 기원 67년에 걸쳐있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본은 대부분이 구약성서의 사본이다. 대부분의 두루마리 연대는 성서의 사본도 쿰란 종단 문서도 기원전 2세기말 이후, 특히 기원 전후의 그시게에 속한다 <사해사본>중에서 오래된 것은 와디.므라바아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단편들이며 기원전 8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발견된 많은 사본이나 파편을 양피지, 파피루스 ,동판,오스트라카 등에 기록되어 있다.

 

(2) <쿰란 사본들> 은 무엇을 말하는가

쿰란 사본들은 구약성서 정전.외경,주해서 및 쿰란 종단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의 종교 문서로 나뉘고,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다음 네가지 문서로 대별된다.

(1) 구약성서 정전의 사본들(단편을 포함)
전체의 약 4분의 1이 되고 에스델기를 제외한 구약 각서가 있다. 신명기 이사야서,소예언서,시편등의 사본은 10종 이상이 된다. 주요한 것은 성마르크 수도원 소유의 <이사야서>의 두루마리(완본)와 헤브라이 대학 소유의 <이사야서>단편,<시편>단편 등이다.
(2) 구약성서의 외경(또는 위경)
여러가지 단편이 출토되고 있으나 가장 많은 것이 요엘서,에녹서 등이다.
(3) 구약성서의 주해서
창세기,시편,이사야서,호세아서,미가서, 나훔서,스바니야서,하박국서 등의 주해서의 단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장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하박국서 주해서는 가장 흥미 깊고 중요한 것이다.
(4) 쿰란 종단의 종교 문서
사해 사본을 남긴 사람들의 종교 집단의 조직, 목적 계율,의식 등을 기록한 <종규 요람><종단 계율제요>라고도 한다. <회중규정>,<축복기도문>,<감사의 시편>등의 예배식문에 속하는 문서, 그 밖에 <빛의 아들들의 싸움의 규칙>,아람어로 된 <외경 창세기>등이 있다. 그리고 1952년 3월에 발견된 동굴 3 속에서는 성전의 보물표와 그 숨긴 장소등을 기록한 이른바 <동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으나 이 리스트가 성전의 보물이었는지,또는 쿰란 종단의 재산이었는지,아니면 허구적인 것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동굴 1에서 남쪽으로 약 1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폐허는 오늘날 킬베트,쿰란<쿰란의 폐허>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이미 1851년에 F.두.서씨에 의하여 답사되었고 <사해사본>의 발견과 함께 이 폐허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51년에서 56년까지에 6회에 걸쳐서 예루살렘의 도미니코파 성서학원 원장 롤런,두.워 신부와 요르단 왕국의 고적 보존국장 G.L.하딩의 지도 아래 킬베트.쿰란의 발굴 조사가 실시되고 그 전모가 밝혀졌다.

 

(3) <쿰란의 폐허>는 어떻게 발굴되었는가

두.워 원장이 얻은 결론에 의하면 ,킬베트,쿰란의 역사는 다음에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1) BC 8-7세기(철기시대 제II기)
(2) BC 2세기말-AD 68년까지
(3) AD 68-90년경 (로마군의 점령)
(4) AD 132-135년(유대인의 대로마 제2차 반란시에 유대인 저항군이 점거)

(1)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벽의 일부와 토기,오스트라카(ostraca)의 단편이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
(2)의 시기에 속하는 유적은 쿰란 종단의 본거지로서 공동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건물은 북서쪽 구석에 견고한 성루가 있는 30미터 * 37미터의 장방형 건물이며, 안뜰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작은 방이있고, 집회실, 사경실,식당,부엌 등이 있다. 그리고 부근의 와디.쿰란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7개의 저수조, 6개의 욕실 등이 있고, 이것들은 쿰란의 종단의 교리나 생활을 아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 쿰란 종단이 형성된 것은 요하네.하르카누스(BC 135-104)시대였던 것 같다. 그후 기원전 31년에 이 근처 일대는 대지진을 만나 포기되었다. 이것은 건물의 균열로 알 수 있으며, 프라비우스.오세퍼스도 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쿰란 사본들을 만들어 낸 쿰란 종단은 그후 재건된 것 같다.
이곳은 기원전 4년의 헤로데 대왕의 죽음에서 기원 7년경까지 사이에 재건되고 건물의 개축이 있었다.
(3) 의 시기는 유대 반란 제 3년에 시작된다. 출토품 중에는 반란 제2년과 제 3년의 날짜가 새겨져있는 화폐 70여매와 로마군의 화살촉 등이 들어있다. 로마군은 1세기 말까지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4) 의 시기에 속하는 층에서 출토된 로마의 화폐에 의하면 로마 점령군이 약 10년간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후 단기간이기는 하지만 이유대인의 제2차 대로마 반란(AD 132-135)때에 발.코호바를 수령으로 하는 저항군이 일시 이곳에 진를 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워는 건물의 동쪽에 있는 묘지들을 시굴했다. 또 제분소,빵 굽는 곳, 도기 공장 등의 작업장도 발견했다.
이상의 모든 점으로 봐서, 이 폐허는 유대교의 어느 종교 집단의 본거지이며, 종단의 구성원은 부근 동굴이나 천막에 있는 일시적인 건물에 살면서 이곳을 도장으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4) <사해사본>의 발견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종규 요람> 에 의하면,쿰란 종단의 단원은 자원해서 인적이 떨어진 이 유대 황야에 모여서 임박한 종말을 바라보며 메시아의 내림을 기다리는 종단의 엄격한 계율에 따라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사경은 그들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에 의하여 구약성서 각서 및 구약성 외경의 대부분이 양피지, 파피루스,동판 등에 필사되어 남겨졌다.
<사해사본>의 발견은 좁은 의미의 성서학이나 성서 고고학 분야 뿐아니라, 특히 유대교의 공인된 교정본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구약성서의 본문 비판학은 물론, 기원전후의 유대교 역사나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교섭, 원시 그리스도교단과 유대교와의 관계 등의 제 분야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사해사본>의 연구는 전문가들의 국제적인 협력체제 아래 계속되고 있다.
쿰란 종단의 단원들에 의하여 필사된 구약성서의 사본들은 세계 최고의 것으로 높은 학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나베.샤난<고요한 집>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 위에 있으며 22에이커의 부지에 60년의 역사를 가진 옛 베자렐 미술관 (주로 유대인의 민속 자료,슈나고게의 비품등의 종교 사료,16-20세기의 근대 서구 미술작품)과 성서,고고학 박물관(주로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고고 출토품)을 포함한 본관과 사해 문서들을 소장한 고문서관이 있으며, 그 중간에 현대 조각을 배치한 조각 정원으로 돼있다.
그 밖에 창고, 연구실, 수복용 시설 등이 있다. 이 조각 정원의 설계가 그 규모 면에서 전후 최대인이 이스라엘 박물관은 1964년에 창립되고 이듬해 1965년에 개관했다. 그 내용은 광범위해서 고고학적, 미술학적, 민속학적 제 요소와 근대 미술관적 제 요소를 겸비하여 인류 문화유산을 통해서 미래의 전망을 하게 하는 총합적인 민족의 미술관이다.

박물관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고문서관>에는 사해 문서 및 기원 2세기의 발.코호바의 반로마 봉기 관계의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고문서관은 지상으로는 흰 돔과 장방형의 검은 외벽을 보일 뿐이고 중요한 부분은 지하로 들어가 있다. 그 내부는 이중의 포물선 돔으로 돼있으며, 그것은 굴곡이 있는 거대한 항아리 같이 생겼다. 소용돌이 치는 굴곡은 천장 꼭대기에 있는 약 1.8미터의 구멍까지 위로 뻗혀 있으며, 그 구멍에서 하늘 빛이 실내로 비쳐 들어온다. 고문서의 역사의 중요성을 재현해 주는 것 같은 설계와 구조의 건물이다.

 

(5) 예수의 탄생은 기원 1년인가

현재 우리가 보는 역사서는 연대를 표시하는데 서력 기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탄생한 해를 기원1년으로 하고 그 이전을 기원전 (BC.Before Crist)로표시하고, 그 이후를 기원후(AD.Anno Domini)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남러시아의 스키티아 지방에서 출생한 6세기 로마의 수도사이며 연대사가인 죠니 시우스,엑시구스(497년경-550년경)가 525년에 로마 교황의 명령을 받고 <부활절>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글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탄생 기원을 채용하여 확립하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 건국 754년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이 기원법은 9세기가 되어 프랑스 왕국 카로링왕조 제2대 왕 칼 대제(742-814)시대에 다른 기원법보다 결정적인 우위에 두게 된 이후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년표에는 예수의 탄생을 기원전 4년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정확하다면 서력 기원법의 전체 체계는 기원전에 관해서는 4년을 빼고 기원후에 관해서는 4년을 가해야 한다. 그 근거는 차치하고 실제로 예수가 탄생한 것은 후일의 연구에 의하여 기원전 6년경에서 기원전 4년경 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는 오랜 습관대로 이것을 편의상 그대로 상요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동시대의 다른 인물에 비해서 비교적 정확한 편이지만,예수의 탄생에 관한 사료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과학적 검토에 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소극적이긴 하지만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나 그 이전이라고 주장하는 연대의 연대학의 성과를 인정하고 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2장 1절이하에 의하면, <예수는 헤롯 왕 때(BC 3-74)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했으며 헤롯왕의 유아 학살의 명령을 피해서 이집트로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누가복음에도 로마황제 어거스투스 시대(BC 27-AD14)에 전 로마 제국의 인구조사 칙령이 있어서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유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남쪽 약 9킬로미터에 있는 도시이며 다윗왕과 관계가 깊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해서가 아니라,예수가 다윗의 호순으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다윗과 인연이 있는 베들레헴이 예수의 탄생지로 전해졌다고 한다. 마가복음 12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 자신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 또 예수의 생애에서 베들레헴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또 예수의 탄생지는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의 거의 중간에 있는 갈리리아의 도시나사렛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나사렛은 예수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도시였다.
아무튼 마태,누가 양 복음서의 탄생 기록은 예수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이 그 만년에 로마 황제의 신뢰를 잃고 그 결과로 헤롯은 광기가 들어서 많은 육친까지도 살해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고,그것은 구약성서 위경의 모세의 승천 6장 이하에도 나타나있다. 누가복음의 탄생 설화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모두 헤롯왕 시대라고 했다. 그리고 <클레니오(로마의 귀족 스루피큐스.퀴리노)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에 한것보다 이전의 국세조사>때였다고 한다.

1세기의 유대 역사가 프라비우스.요세퍼스(37년경-100년 이후)의 <유대 고대사>나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5장 37절 등에 의하면 클레니오가 유대에서 인구조사를 한것은 기원 6년이다. 아마 이 인구조사는 몇년에 한번씩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칼타고 태생의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로 유명한 텔트아누스(160년경-220년이 이후)의 <마르키온에 대한 반론>4-16에 의하면 사르투르니누스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BC 9-6)에 인구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4세기의 로마 역사가 문법학자 마크로비우스(340/360년경-?)에 의하면 어거스투스가 동시대인 헤롯이 자기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2세 이하의 남아를 모두 학살한 것을 엄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마크로비우스에 의하면 예수는 평화 정책을 써서 각지의 신망을 얻고 로마 황제 어거스투스(그는 헤롯왕가의 유대인에게도 우호적이었다고 한다)시대와 헤롯왕 시대에 탄생한 것은 분명하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 의하면, 예수의 활동의 시작은 30세경이며,그는 그 만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30년경에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지방 총독 본디오 빌라도(26-36)에 의하여 극형,즉 십자가형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 확증되고 있다. 이 해부터 역산하면 예수의 탄생은 기원 전후가 된다.
한편 헤롯은 기원전 4년의 과월절 전에 요르단강 하류의 서쪽 여리고에서 죽은 것이 역사적으로 확정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후는 될 수 없다고 한다. 여러가지 점을 고려해서 예수의 탄생은 기원전 6년에서 기원전 4년 사이라고 추정된다.
인간 예수의 짧은 생애는 그 죽음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으나, 예수를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 =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원시 그리스도교단 안에서 형성된 전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삼일만에 부활했음을 전하고 있다.

 

(6) 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인인가

각 복음서에 의해서 묘사돼 있는 예수상은 차이가 있으나 복음서는 전체적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예수>란 헤브라이어 인명 예수아 또는 예호수아(여호수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예수스이다. 사도행전 7장 45절,히브리서 4장 8절에는 모세의 후계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예수>로 기재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야훼의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며, 인명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기원 1세기의 프라비우스.요세퍼스나 파피루스 문헌등에 의하면 헬레니즘 시대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10명이 넘었다고 하니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꽤많았던 것이다. 골로새서 4장 11절에도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라는 예가 보인다. 마태복음 27장 16절에는 <예수.바라바>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리스도>Christos (<크리스도>또는 하리스토스>라고도 표기된다>란 그리스어의 동사 크리오 chrio(<기름 붓다>란 뜻)에 유래하는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뜻이며, 헤브라이어의 마시아하,아람어의 메시하,즉 그리스,라틴어형의 메시아스 Messias에 해당한다(요한복음1장 41절 4장 25절).

기름 특히 향유는 고대에는 귀한 것이었다. 올리브유의 용도는 여러가지였으며, 기름에 유향을 섞어서 태워 향기 예물로 바치거나(레위기 6장 15절),기름은 번영의 표시이며(신명기 8장 8절,예레미야서 31장12절),귀중한 상품으로 수출됐다(느헤미야기 5장 11절,에즈라기 3장8절),또는 기름은 융성(신명기 33장 24절),기쁨(시편45편 7절,히브리서 1장 9절)의 상징이 되며,기름이 떨어지는 것은 비애를 나타내는 것이었다(요한계시록 6장 6절).

돌 벼개를 벤 야곱은 천사의 꿈을 꾸고 깨어서 그 돌을 세워서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창세기 28장 18절,이것은 가나안 종교의 특징의 하나인 신성한 돌을 숭배하는 흔적이다), 사울,다윗 그 아들 솔로몬드 제사장 아론,예언자 엘리사도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사야서 45장 1절에는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고 했으며, 이방 페르샤의 왕 큐로스가 구약성서에서는 왕의 칭호인 <메시아>로 불리고 있다. 이것은 큐로스가 유대인을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에서 해방했기 때문이며 이 호칭이 당시 일반 민중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원래 보통 명사였으며 복수형도 있었을 것이다.<그리스도.예수>또는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칭호>인 예수 (인명)>라는뜻이다. 그리스도는 나사렛의 예수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목수였던 요셉을 가장으로 하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구약성서를 읽고 주의 사람들에게도 요셉의 아들로 인정받고, 나사렛에서 교육을 받아 성인이 되었다. 모친 마리아는 카톨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모친>으로 숭배되고 있다. 예수에게 여러 동생들이 있었다. 사해 문서는 예수가 태어난 배경을 전해주고 있다.

 

(7) 알파벳은 언제 생겼는가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최대의 유산은 알파벳과 헤브라이즘일 것이다. 전자는 실용적인 유산이며 후자는 정신적인 유산이다. 먼저 알파벳의 정의부터 해보자.

알파벳이란 말의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즉 표음 문자를 가리키며, 이런 글자가 일정한 순서로 배열된 자모표 이다. 원칙적으로 1장 1음을 표기하는 것이다. 4항에서 말한 것처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은 우선 글자의 사용 여부로 할 수 있다. 오리엔트에서는 기원전 3천년대에 이미 글자가 사용되었다. 즉,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인의) 쐐기글자와 이집트의 신성 문자가 그것이다. 양자가 모두 독자적인 표의 문자이며, 각기 극히 복잡한 구조와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기나 신관 계급등의 독점물로서 신성시되었다.

한편 이러한 서기제도는 대 신전이나 대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의 산물이었다. 이 글자들은 처음은 그림 글자에서 발달한 것이었으나 거의 원형 그대로 일부 표음 문자로 바뀌어 갔다. 이렇게 해서 글자는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 함께 발달했으나 지금부터 약 2천년전에는 읽혀지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미 기원전 2천년경부터는 가나안인은 쐐기 글자와 신성 문자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가나안 글자의 창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기원전 1500년 경에 <시나이 그림 글자>가 나오고 이것이 알파벳의 직접 조상이 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인의 발명한 글자를 페니키아인,아람인,이스라엘인 들이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각지에서의 무역 활동 상의 필요 때문에 표음화된 이집트 글자를 근거로 해서 독자적인 간략한 표음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지중해를 통해서 그리스.로마로 전달된 알파벳은 유럽인의 글자로서, 즉 라틴 글자의 알파벳으로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라틴 글자의 알파벳 없이는 유럽 문화는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나안에서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처럼 거대한 중앙집권 국가는 성립되지 않았다. 가나안 사회의 중심은 상인층이었다. 그들에게는 왕후나 신관과 같이 서기를 양성할 경제적인 힘은 물론 없었으나 문자를 신성시할 필요도 없고 문자를 오직 실용적인 기호로 바꾸어 사용해갔다.

별표에서 보는 것처럼,첫 글자는 <숫서 머리>를 뜻한다. 숫소는 가나안어로 <알프>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글자도 <알프>로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 <알프>는 <숫소>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순히 <아> (엄밀하게 말하면,<아>를 발음하기 직전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 라고 하는 첫 소리를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0세기의 비문에는 이 <숫소의 머리>가 이미 양식화 되어 두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어 있었다. 이 글자가 180도 회전하면 고대 그리스 글자(BC 8세기)의 알파가 되며, 이것을 90도 회전하면 라틴 글자 A가 된다. 둘째 글자는 <집>을 뜻한다. 이것은 가나안어의 <집>을 나타내는 <벳>의 첫 소리 B음을 나타낸다. 이 그림 글자는 기원전 10세기에는 한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고 그것을 180도 회전한 것이 고대 그리스 글자 베타가 되고 그 베타의 윗부분 획이 이어져서 라틴 글자 B가 됐다고 한다.

알파벳이라는 명칭 자체는 그리스.알파멧의 처음 두 글자 알파와 베타에서 나온 것이며, 그 어원은 가나안어의 <숫소의 머리>와 <집>에 유래한다. 고대 이스라엘인은 가나안이게서 알파벳을 배우고, 이것을 독자적으로 헤브리어 글자로 발전시킨 것이다.

 

(8) 유럽 사조의 근본은 무엇인가

전항에서 우리는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유산의 하나, 즉 실용적인 유산인 알파벳의 기원을 살펴봤으며 다음은 정신적인 유산인 헤브라이즘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헤브라이즘이라는 것은 원래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고나 행동속에서 자라난 것이며,고대 이스라엘인의 유일 인격신 야훼 신앙에 유래하며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되고 신의 의로움과 사랑을 근본 원리로 한다. 헬레니즘(그리스 사상 문화)과 함께 유럽 정신의 전통을 형성하여 온 2대 사조의 하나이다.

영국의 문예 사회 평론가 머슈.아놀드(1822-1888)가 평론집<교양과 무질서> (1869)에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논한 이래, 이 양자가 유럽사상의 2대 원류로서 파악되게 되었다. 보통,헤브라이즘은 인간중심주의의 헬레니즘과 대비해서 논의되는데 그것은 구약성서에 근거한 헤브라이적 사유의 특질을 나타내는 경우와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으로 대별된다.

노르웨이의 신학자 트리프.보만(1894-)은 그 저서<그리스도인의 사유와의 비교에 의한 헤버라인의 사유>에서 헤브라이인과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의 구조적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헤브라이인의 사유벙밥의 특색은 동적이고 힘차고 열정적이고 자주 거의 폭발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비해서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은 정적이고 온화하고 절도를 중히 여기고 조화를 사랑하는데 있다. 헬레니즘이 이성적 과학적 미적인데 비해서 헤브라이즘은 의지적 윤리적 신중심적 인생관 세계관이고 그 특색이다.

예수가 언제 어디스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자세히 알아 내기는 사료의 제약으로 극히 어려운 일이지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유대인의 편협한 선민 사상도 부정하고 하나니의 사랑과 공정을 믿었고, 그것을 유대교의 전통적 문화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보면 변경지인 북쪽 갈릴레아를 거점으로 해서 도시와 마을을 순회하면서 동포에게 전했다.

그리스도교는 일면으로는 유대교를 모태로 해서 그것을 계승하고 다른 면으로는 그것을 변형 발전시킨 것이다. 유럽인이 받아들인 헤브라이즘은 신약성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된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인 것이다.

4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인이 고전 고대의 세계로 침입하여 이른바 헬레니즘,헤브라이즘,게르마니즘의 융합이 시작되고 역사의 담당자가 로마인에게서 게르만인으로 바뀌고,그와 함께 무대도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유럽으로 이동하고 역사 개체로서의 유럽이 형성된다.

출처 인터넷 이영제 목사의 성경연구

<출처:NAVER 지식iN>

 

 

 

 

6. 사해 두루마리들이 현대 성경에 미친 영향

 

 

제1절 우리의 구약성서가 하나님 말씀임을 증거 사해 두루마리 발견으로 오늘날 우리의 구약성서는 대체로 잘 번역되고 잘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이 아니다. 더 연구하여 원문 회복에 노력해야 하면 필요한 수정을 가해야 한다. 사해 두루마리를 통해 구약성서 중 에스더서를 제외하고 신명기, 시편, 이사야 서 등을 중심으로 대부분이 발견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현대 성경을 만드는 데 근본적 자료로 사용해 온 맛소라사본(Masoretic text)이나 칠십인역 사본(Septuagint), 벌케이트(Vulgate)사본과 이 번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와 비교해 볼 때 서로 다른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문을 회복하고 필요한 수정을 가해야 하며 완전한 변역에 노력해야 한다. 특히 구약성서의 마지막인 말라기서는 BC400전의 기록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약 400년 동안 없었다. 그러나 사해 두루마리를 통해서 그 공백을 상당히 메꿀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은 요한계시록 22장 18절-19절의 구절을 잘못 이해하고 현대 우리 성경에서 일획일점도 빼지고 말고 더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이 받은 계시 중에서 빼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라는 말이지 성서의 전 부분의 말은 아니다. 즉 고대 원문과 상이한 부분으로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시는 가감한 수정을 가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경전을 받아 드리는 열린 마음의 문이 필요하다. 제2절 외경에도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 많다. (1) 많은 오늘날 기독교 성서학자들은 정경[正經: Canon,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그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정경이냐 외경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결정은 유한하며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가령 신앙에 큰 도움을 주는 책일지라도 다른 외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는 경전을 읽는 것을 금하게 하고 탐독하는 자를 이단시 취급한다. 그러나 사 실상 외경[外經: Apocrypha]에도 정경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많으니 성신의 도움으로 분별력 있기 읽어 신앙에 큰 발전을 갖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외경 중 많은 부분이 정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사해 두루마리에서 발견된 많은 외경은 오늘날 신학 해석에 큰 발전과 전환기를 부여해 주고 있다. 특히 오늘날의 창세기를 읽을 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고 생략된 부분이 많이 있는 데 여기서 발견된 외경 창세기는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시편도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에는 150편이 있으나 사해 두루마리에서는 무려 4,050편이나 된다. 여기에 참으로 진귀한 하나님의 무궁한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으며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입을 막을 수 없다. 인간이 갖고 있는 편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외경을 연구해 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신학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성경에 일획 일점도 더하지 말라고 강조하면서 편견과 아집으로 구한 자기 이론과 학설로 성경을 해석하여 수만 권의 주석서를 읽히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신앙인가 자기 명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인지 알 수 없다. 이러기보다는 근거 있는 예언자의 기록인 참된 외경을 분별력 있게 읽고 연구하여 정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아야 하며 진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2) 사해 두루마리 발견으로 하나님 말씀은 요한이 요한복음 21장 25절과 같이 "예수께서 하신일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들을 다 두기에 부족하리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이 세상에 있는 가 우리는 알 수 있다. 가령 신약성서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실 때 택한 12제자의 기록 중 마태, 요한, 베드로, 야고보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밖의 제자들이 기록이 신약성서 27권 중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나머지 제자들의 기록들은 없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정경의 규정은 인간이 했기 때문에 외경 중에 하나님의 말씀은 무한히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에녹서는 욥기 다음에 있었으나 구약성서를 정경과 외경으로 구분할 때에 에녹서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에녹서를 정경에 삽입하지 않았다는 신학 적 이론은 사해두루마리 발견으로 더욱 확고히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지혜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 수 있지만 외경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태도는 무한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데 한계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물론 외경 중에는 신빙성이 없는 책도 있다. 그러나 성신의 도움으로 분별력 있게 읽을 때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3) 신약성서의 형성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성서 27권이 정경으로 인정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로마의 콘스탄틴(Constantine) 대제가 왕위에 올라 A.D. 313년 종교 자유의 칙령을 선포하고 A.D. 325년 기독교를 중심된 종교로 삼고 원로원의 반대와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회를 비잔틴(Byzantium)으로 옮겨 여기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즉 새 로마(new Rome)라고 부르고 새 기독교 제국의 수도로 정했다. 콘스탄틴 대제가 즉위하자 즉시 명령한 것이 각 곳에 흩어진 그리스도의 가르침 즉, 마태복은, 야고보서, 배드로후서, 요한계시록, 여러 사도들의 편지 등을 모아서 한권의 책으로 만드는 일이다. 콘스탄틴 대제는 그 당시 가이사랴의 감독이며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 (Eusebius AD 264-340)를 수석 종교 고문으로 택하여 흩어진 성경을 한권으로 집권하는 일을 다음과 같이 명했다. "나는 그대에게 성문서 50권을 복사하도록 명령한다. 그 준비와 사용은 교회 교육에 가장 필요하도록 하며, 준비된 양피지에 휴대할 수 있는 형식으로, 기술 좋은 복사기들이 읽기기 쉽게 기록하기를 바란다. (중간 생략). 그대는 그것을 운반하기 위하여 마차 두 대를 사용할 수 있고 그 사본은 잘 되었을 때 나의 검열을 쉽게 받을 수 있다. 이 일을 그대가 감리하는 교회의 집사에게 위임해도 좋다. 그가 여기에 도착하면 후한 대접을 해주겠다. 하나임의 가호가 사랑하는 그대에게 있기를 바란다." 유세비우스는 흩어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쓴 편지나 복음서를 수집하는 일을 위해 갖은 역경과 어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기차와 비행기나 라디오도 없었다. 인쇄술도 알려져 있지 않아 손으로 쓴 파피루스(Papyrus) 사본을 수집하는 일이었으므로 잘 보관된 사본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사도들 이나 제자들이 쓴 원본은 한권도 찾을 수 없었고 원본을 손으로 베껴쓴 사본을 수집했다. 유세비우스는 널리 조사하여 어떤 책이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지 알아냈다. 1) 보편적으로 인정된 책: 27권 중, 2)를 제외한 것. 2) 논쟁을 일으킨 책: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 2,3서 3) 논쟁이 많은 책: 27권 중 삽입시키지 않음. 그 책의 수는 수십권이다. 결국 1)과 2)를 합한 27권을 정경(Canon)으로 택하여 양피지(羊皮紙)에 가록하여 50권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 27권이다. 이 책은 그 후 칼타교회(AD 397년)에서 27권을 정식으로 공인하여 세계 교회가 통일하여 사용케 되었다. 결국 성서는 정경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정경과 외경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에서는 몰몬경, 교리와 성약, 값진 진주를 정경으로 규정하고 성경과 전혀 반대됨이 없이 상호 보충적, 그리고 체계적이고 정통성 있는 신학적 이론을 확립시키고 있다. 또한 천주교회에서는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 마케베오상, 마케베오하를 정경으로 삼고 있다. 신앙인으로 더 높은 차원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폭 넓게 지혜와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탐구하려는 열망을 갖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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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바이블 루트-성지 Masada(마사다):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KBS

 저작권 관계로 직접 업로드 시 구동 불가, 제목과 그림에 링크함

마사다, 사해 문서, 출애굽~성 베드로 성당, 사도 바울 순교까지-1: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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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4 New! pps-Bible (파워포인트 쇼로 접하는 성경이야기) <Blog용> & Ave Maria   

2013. 4. 29. 6시간 20분 대장편 영화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Full Movie)1977

& 영화 이해를 돕기 위한 4복음서 내용 장별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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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내용의 제목에 출처 링크함

글 밖의 사진 출처:사진 클릭

 

쿰란 연구3

쿰란(Qumran) - 최고의 구약필사본이 발견된 곳

다음 아고라-사해문서

쿰란 동굴의 사해사본

사해사본과그리스도교의기원展]사해사본 발견 이야기

이집트에서 발견된 그노시스 사해문서의 미스테리 에스겔서와 UFO

율리아 수녀:사해문서와 쿰란 공동체

사해 문서:동굴 이름

이스라엘박물관 사해문서

 

*사해문서의 미스테리

위 자료 내의 주요 링크 사이트들

1. Children of Ezekiel

2. 히스토리 lHistory-사해문서

3, DEAD SEA SCROLLS

4. The New York TIMES-사해문서

5. 기사 스크렙(사해문서, 히툴러)

6. The Evidence For Ancient Commun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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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3 현 본 블로그 카테고리 〈pps-Bible, 성경세계, 종교 영화, 종교 관련 자료가기(작성일 역순)

첨부자료:

2013. 6. 17 New! pps-Bible (파워포인트 쇼로 접하는 성경이야기) <Blog용> (일자 조정 포스트)

2013. 5. 14 에스겔(에제키엘:Ezekiel)서와 UFO (성경과 UFO-1회)

2013. 5. 13 마사다(Masada)의 항쟁과 비극! 그것은 슬픈 아름다움이었다

2013. 5. 8 사해 문서(死海文書, Dead Sea Scrolls, DSS), 사해 두루마리 또는 사해 사본(死海寫本)

2013. 5. 8 나스티시즘(영어: Gnosticism,영지주의)의 나그함마디 문서들 코덱스 내용, 자료와 목록 링크

2013. 5. 8 막달레나 마리아 복음서(Excerpts from the Gospel of Mary : Magdalene)

 

2013. 4. 29  6시간 20분 대장편 영화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 (Full Movie) 1977 & 영화 이해를 돕기 위한 4복음서 내용 장별 비교

2013. 4. 25 문서 《요한의 비밀 가르침》(The Apocryphon of John:나그 함마디 문서 코덱스 II , III, IV 중)

2013. 4. 22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나스티시즘, 그노시즘) 바로 알기

2013. 4. 17  도마복음의 "학자 번역"서 영역 원본과 한글 번역본 음미

2013. 4. 14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 또는 토마스 복음서, 라즈니쉬 도마복음 한글 번역본, 도마복음 해설

2013. 4. 7 유다에 관한 진실 공방과 유다복음서의 발견(동영상)

2013. 4. 2 성경 번역의 변천사와 한글 킹 제임스 성경(KJV)과 개역, 개정개역성경의 다른 점(동영상 2)

 

2013. 3. 2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무덤 이야기

2013. 3. 18  성경 중에서 정경과 외경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가? (성경의 전반적 이해)

2013. 3. 14 새 교황 프란체스코 1세 선출 & 말라키의 예언 관련 자료!

2013. 3. 12  기독교 및 세계 개신교 교파, 우리나라 기독교의 유래와 개신교의 교파

2013. 3. 9  마리아 막달레나(막달라)의 정체성과 다빈치 코드의 허구성

2013. 3. 2  종말론에 대하여 &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등 예언 관련 주요 동영상(8개) 다시 보기

2013. 3. 1  베네딕토 16세 교황 사임, 성 말라키 예언 교황 연대표

 

2013. 2. 27  종교개혁과 개신교 교파, 종교개혁 관련 동영상 2편 & 영화 마르틴 루터

2013. 2. 24 영화 : 쿼바디스 도미네! QuoVadis! Domine! (2001)

2013. 2. 20 로마의 興亡 盛衰(흥망 성쇠)와 종교 개혁의 시작 & 영화 <황제 아우구스투스>, 동영상 비잔티움과 오스만 제국

2013. 2. 20 로마의 황제 목록(WIKIPEDIA)

2013. 2. 17 요한계시록 17. 18장의 pps-Bible & 음녀와 큰 성 바벨론!, 러시아 운석우~! 성 말라키의 예언과의 관계는?

2013. 2. 14 교황제(敎皇制)의 성립과 교황 연대표, 성 말라키의 예언

2013. 2. 10 사도들의 순교

2013. 2. 7 성경 구약에 기록된 아담의 창조에서부터 로마 제국의 지배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의 개괄적 흐름

2013. 2. 2. 노아 대홍수와 아라랏 산, 그 후손들(노아의 방주 동영상)

 

2013. 1. 28 헤롯의 가계와 신약성서의 이해

2013. 1. 25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성경 기록, 롯과 그 아내의 소금 기둥 & 영화 이야기

2013. 1. 22 사도 바울의 생애와 바울 서신서 및 전도 여정, 영화:성 바울

2013. 1. 17 삼손과 데릴라 - 성경 기록과 영화(映畵:Movie)와 명화(名畵) 비교 감상

2013. 1. 11 명화 십계(十戒)와 출애굽기 슬라이드

2013. 1. 1 유대력과 성서력의 이해

 

2012. 12. 31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2012. 12. 28 글1. pps-Bible Home (파워포인트 쇼로 접하는 성경이야기 홈

2012. 12. 23 [성탄 특집] 영화 벤허(1959년 HD & Wide) 보기

2012. 12. 23 예수 그리스도 탄생에 대한 구약성서에서의 예언과 신약성서에서의 기록, 성탄절 유래 소개

2012. 12. 18  예수 그스도의 족보

 

2012. 11. 30  글4. <글1, 2>의 pps-Bible 파일 저장 요령 및 CD 여는 방법

2012. 11. 30 글3. 구약, 신약보기 및 기타 자료 안내 - 그림 아래의 안내 파일을 열어 보세요

2012. 11. 29 글2. <글1>에서 링크되지 않는 슬라이드 파일을 차례로 올립니다. (맛보기1,2 실행 후 그림들 클릭) 그 외 사항은 <글3>을 참고하세요

2012. 11. 27 New! pps-Bible (파워포인트 쇼로 접하는 성경이야기) <Blog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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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pps-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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