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루시아
크로노스의 시간의 끝은 인간이 알 수 없다. 물론 카이로스의 시간도 인간이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에는 그 마지막이 있다. 즉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 때를 일컬어 ‘파루시아’라고 한다.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신약성서에서 24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 14회가 바울이 사용한 것이다.
파루시아는 헬라어 파라(Para)와 우시아(ousia)가 결합된 말이다. 파라(Para)는 ‘나란히’ 라는 뜻이고 우시아(ousia)는 ‘본질 혹은 실재’란 뜻이다. 본질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데, 그러므로 이 두 단어를 결합한 뜻은 ‘본질과 나란히 온다’라는 뜻이다. 즉, 파루시아는 “본질로서 오시는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예수의 영적 임재를 믿는 것처럼 그 날에 몸으로(bodily) 혹은 육체적으로(physical)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은 실재적 사건이다. 우리 모두가 실제로 체험하게 될 재림을 의미하는 이 종말론적 단어는 예수께서 종말에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개역 성경에서 “강림”이라고 번역된 말은 모두 헬라어 “파루시아”라는 말이다. 이 말은 보통 “주의 강림”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파루시아”라는 말은 “출현, 임재, 나타남, 현존, 도래” 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주의 강림이란 말은 “주님께서 나타나심(오심)”을 의미한다. 이처럼 파루시아란 주님의 재림의 때로써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실체가 드러나는 시간을 말하는데 주님이 이 땅에 재림의 주로 심판의 개념을 가지고 임하는 종말의 때를 말한다. 이때는 이미 예언되어진 것으로 모든 인간은 항상 이때를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누구나 파루시아의 도래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날을 고대하며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누구도 그 앞에서 비켜설 수 없다. 파루시아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안에서 우리를 향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임박한 “파루시아”를 기대하면서 살았던 초기 기독교의 산물이다. 야고보는 구원은 반드시 “파루시아”때에 완성될 것인데, 그때에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며(1:12), “영혼이 사망에서 구원”받고(5:20),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고 하였다(2:5).
히브리서에서는 그 전체에 깔려있는 종말론적 요소들을 통하여 예수의 재림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해 준다. “장차 오는 세상(2:5)”에서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가 되시며, 그 그리스도는 “세상 끝(9:26)"에 나타나신다.
이처럼 초대 교회는 언제나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기대로 충만해 있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상 초대교회가 그렇게 강성했고 아름다웠던 이유가 파루시아에 대한 절대적 기대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나운 짐승의 이빨 앞에서도, 원형경기장의 불타는 기둥에 묶여 죽어가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아기를 업은 엄마, 수많은 동정녀들, 백발의 할아버지들이 하나님을 위해 죽기만을 소망하며 순교의 반열에 서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힘이요 소망이고 생명이었다. 몇 년 동안도 아니고 몇 십 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3백여 년 동안 순교의 피로 교회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불에 데어 죽던, 짐승에게 찢겨죽던, 죽으면서 까지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 이들로 인해 복음의 빛은 번져갔고, 마침내 거대한 제국 로마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이적이 일어났다.
“하나님을 위한 삶”만이 그들의 삶의 목표요 궁극적 가치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시간으로 잴 수 없는 파루시아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적인 개념만은 아니었다. “심판의 주”로 오시는 예수를 바라보았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은 곧 세상에서 얻는 즐거움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자신을 깡그리 그분께 바칠 수 있는 생명력을 잉태했다. 청빈과 정결과 무소유의 삶으로 내 것 네 것 없이 아낌없이 나눠주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초대교회의 힘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재림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헛되다고 말한 바 있다. 파루시아는 실재할 것이기에,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우리 믿음의 길과 기다림이 세상의 눈으로는 미련하게 보인다할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삶을 책임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능력(power)이 되며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되는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끝나는 지점 즉 파루시아의 때를 알고 있는 사람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살지만 동시에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 있다. 누구나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은혜 안에 자기를 둔다. 억지나 강요가 아닌 그 분 안에 녹아들어 자신은 없어지고 하나님만 온전히 드러낸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힘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안에 온전히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때는 죽음도 그 어떤 환난이나 공포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 때문에 받는 것이기에 기쁨이요 감사요 행복할 따름이다.
하나님은 인간중심적인 분이 아니다. 하나님 중심적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약자 중심도 아니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다. 그렇다고 약한 나라에 지진과 기근 전쟁 폭력 몰상식이 끊이지 않는 것이 약자에 대한 자비가 없어서가 아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인간의 생각으로 계산하면 지연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파루시아의 지연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목적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벧후 3:9)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때’(크로노스)에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적이기에 그 분이 원하시는 ‘때’(카이로스)에 그 분의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나 중심적인 우리의 ‘때’(크로노스)를 버리고 하나님중심적인 하나님의 ‘때’(카이로스)를 기다리며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는 자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김귀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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