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4·6교실/종교사회학 교실

[스크랩] 십일조와 헌금의 의미와 사용에 대하여

류성련 2015. 12. 12. 15:34

십일조와 헌금의 의미와 사용에 대하여
A Study of the Meaning of Tithe, Offering and Their Use
 
논문 요약-------------------------------------------------------------------


십일조란 자신의 소득의 10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다.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십일조와 헌금을 세계 어느 나라의 신자보다 열심히 드리고 있다. 특히 십일조는 개교회의 경제적인 자립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강조되었지만 십일조의 사용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는 성직자,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떠돌이, 고아, 과부)에게 십일조를 사용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교회는 십일조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대체적으로 준수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게르만족에게 전파된 이후 십일조의 상당한 부분이 교회를 후원하는 사람과 성직자에게 돌려졌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교회의 개혁은 신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실제 생활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한 예로 루터는 신자들의 헌금이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에 대한 글을 1523년 작센 선제후국의 라이스니히市의 성 마태우스교회의 헌물함에 있는 헌금의 사용에 관한 글을 통하여, 모든 복음적인 교회(루터교회)들이 이러한 규정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였다. 루터는 헌금을 공정하게 관리해야 함은 물론 종교적인 목적 이외에 라이스니히시 전체의 복지를 위하여 사용해야할 것을 권하고 있다.

십일조와 헌금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 복지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 기독교인들은 십일조와 헌금을 드릴 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이며 물질은 단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것이므로 인간은 청지기에 불과하며 인간이 결코 물질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고 십일조와 헌금이 교회에서 올바르게 사용되도록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 성서적인 가르침에 따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I. 서언

십일조는 한국 개신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개교회의 살림을 꾸려 나가는데 신자들이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는 없어서는 안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까지 한국 교회는 주로 십일조를 드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드려진 십일조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십일조와 헌금의 성서적인 의미와 사용법, 敎會史에서 본 십일조 그리고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헌금 사용에 관한 글을 통해 십일조와 헌금을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다루려고 한다. 십일조를 드리는데 역점을 두었다는 것은 십일조가 지니고 있는 제의적 성격과 여기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축복을 강조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십일조는 이런 제의적 성격 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격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서를 통해 가르쳐 준 내용에 확실히 드러나 있다.

성서에 나오는 십일조와 헌금에 대한 신학적인 내용은 성서 신학자의 몫이므로 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보다 종교개혁시대에 헌금에 대한 사용을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어떻게 헌금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십일조와 헌금을 어떻게 드렸고 사용했는지를 성서와 교회의 역사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II. 구약성서에 나타난 십일조

구약에서 십일조라는 말의 히브리어 '마아세르'는 십분의 일을 뜻하며 (에스겔 45:11;14), 소득의 십분의 일에 대한 헌금으로 쓰이고 있다(창 14:20, 아모스 4:4, 말라기 3:8;10, 역대하 31:5;6;12, 느혜미야 10:38. 12:44. 13:5;12). 마아세르의 동사형은 '아사르'로서 '십분의 일을 부과하다'(Qal, 사무엘상 8:15;17), '십일조를 드리다'(Pi'el, 신명기 14:22, 창 28:22), '십일조를 드리다 및 십일조를 모으다'(Hif'il, 신명기 26:12, 느혜미야 10:39)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 오경에 나타난 십일조


1)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 (창 14:17-20)

구약성서의 맨 처음에 나오는 십일조는 창세기 14:17-20에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라고 말하자 아브라함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이라는 문장에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십일조의 범위를 규정해주는 단서가 된다. 또 하나는 십일조의 성격 규정이다. 19절에는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멜기세덱이 하나님께 복을 빌었고, 20절에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라는 멜기세덱의 요청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는 아직 모세의 율법이 시행되지 않은 때이다. 또 멜기세덱이 노략물의 10분의 1을 아브람에게 "과세"했다는 암시도 전혀 없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세무요원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보답의 형태가 십일조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더 복을 받기 위한 행위가 아닌 감사제의 행위이다. 이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헌금 방법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태도를 예시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십일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여졌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2) 야곱의 십일조 약속 (창 28:18-22)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중 광야에서 꿈을 꾼 다음 그곳을 베델이라 칭하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는데, 이 서원의 마지막 내용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십일조를 바친 구체적인 사실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해주시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라. 그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라.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3) 제사법전에 나오는 십일조

(1) 레위기 27:30-34

농산물의 십일조와 가축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칠 것을 말하고 있다.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 그리고 소 떼와 양 떼의 십분의 일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할 거룩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특히 가축의 십일조는 새로 태어난 것 가운데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 가축 가운데서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있다 (32절).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밭에서 난 곡식이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이든지, 모두 주께 속한 것으로서,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누가 그 십분의 일을 꼭 무르고자 하면, 그 무를 것의 값에다 오분의 일을 더 얹어야 한다. 소 떼와 양 떼에서도, 각각 십분의 일을 나 주에게 거룩하게 바쳐야 한다. 목자의 지팡이 밑으로 짐승을 지나가게 하여, 열 번째 것마다 바쳐야 한다. 나쁜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을 골라내거나 바꿔치기를 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그가 꼭 바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어떤 것을 바꾸었다면, 처음 그 짐승과 바꾼 짐승이 둘 다 거룩하게 되어, 도저히 무를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주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더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고 내리신 명이다.


(2) 민수기 18:20-32

레위기와는 달리 민수기에서는 십일조 전부가 레위인의 몫이고 그 중에서 십분의 일만 제사장에게 돌리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먼저 레위 사람이 십일조를 받아야 할 당위성을 먼저 언급한다. 주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의 땅에서는 아무런 유산도 없다. 그들과 더불어 함께 나눌 몫이 너에게는 없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네가 받은 몫, 네가 차지할 유산은 바로 나다."(20절).

레위인은 땅을 분배받지 않았기 때문에 땅의 소산물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에게는 회막 일을 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고 오직 레위 지파에게만 주어졌다(23절).다른 지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전적으로 성막 봉사에 대한 의무를 지닌 레위인을 위하여 십일조를 드렸다. 레위인이 받는 십일조는 회막에서 하는 일에 대한 보수의 성격을 띠고 있다(31절).

바로 여기에서 십일조에 대한 용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레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유산이다. 특히 레위인도 자기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25절, 28절). 십일조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비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제사를 정기적으로 드리기 위해 들이나 포도원을 가꾸는 일에 얽매이지 않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비 대책이 가정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종교적 예식들이 정기적으로 시행되고 합당하게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임한다고 믿었다.


4) 신명기에서의 십일조

(1) 신명기 12:6-19, 14:22-27

신명기 12:6-19에 언급된 십일조는 제사와 함께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이 복을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서 가족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축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이 축제에는 자녀들, 남종과 여종 그리고 차지할 몫이나 유산도 없이 성 안에서 사는 레위인을 다 초대하여 함께 즐거워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12절). 여기에서 드려진 십일조는 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었다(17절).

신명기 14:22-27에 기록된 십일조 규정에는 매년 농사를 지은 수확물의 10분의 1을 드리라고 되어있다. 신명기 12:6-19절과 마찬가지로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할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 특히 이 축제에 레위인을 초대할 것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종들을 초대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하나로 이해된다. 십일조를 드릴 때 축제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 축제에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을 초대할 것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2)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 (신 14:28-29, 26:12-15)

너희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 실 것이다.

세 해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되면, 너희는 너희의 모든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따로 떼 어서, 그것을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너희가 사는 성 안에서 마음껏 먹게 하여라. 그렇게 할 때에 너희는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어라. '우리는 주께 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 집에서 성물을 내어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다 나누어 주어서, 주의 명령을 잊지 않고 어김없이 다 실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애곡하는 날 에, 이 거룩한 열의 한 몫을 먹지 않았고, 부정한 몸으로 그것을 떼놓지도 않고, 죽은 자에게 그것을 제물로 바친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 순종하여서, 십일조에 관하여 명 령하신 것을 그대로 다 지켰습니다.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고, 주의 백성 이 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주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주신 땅, 곧 젖과 꿀 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려 주십시오.'

여기에서는 십일조가 사회복지적인 목적과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가장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십일조는 일단 다 모아져서 성소가 아닌 '성 안에 저장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사람은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인데 이들은 일정한 경제적 생산수단이 없던 사람들이다. 거룩하고 구별되게 드려진 것이, 성 안에 저장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했던 대로 쓰임을 받게될 때 거룩해지는 것임을 암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매 삼 년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십일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복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물론 복을 받겠지만,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복을 내리시는 것은 결국 더욱 많은 나눔을 생산하기 위함이라 여겨진다. 이 십일조 제도는 그 당시의 사회사업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십일조를 통해 나타내신 것이다.

 

2. 말라기에 나타난 십일조(말 3:6-12)

한국의 개신교 강단에서 선포되는 십일조에 관한 설교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성경 본문이다. 여기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하나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8절).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이 범죄 행위에 해당되는 까닭은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인간은 단지 이것을 위탁받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10분 1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인간은 나눔의 최소화를 실천하게 되는데 이것은 물질소유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훈련의 기본단계이다. 이 훈련을 통하여 인간이 물질의 종으로 타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랑의 하나님의 뜻을 위반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일조의 운용을 통하여 복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소득의 재분배를 계획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십일조의 규례를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인위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여기에서 특기할만 한 것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사람에게 저주를 경고하고 바치는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주가 무섭기 때문에 바치거나 축복을 받기 위해서 바친다면 이것은 중세 시대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발행되었던 사면부(indulgentia)와 조금도 차이가 없다. 구약의 십일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현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물질이 필요하지만 물질세계의 지배는 받지 말아야 함을 암시한 것이다.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받게 되지만 궁극적인 바치는 대상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서 재산이 있는 자는 그 재산을 나눌 수 있는 최소단위를 하나님께 바치게 하셨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는 위정자들이 세금으로 거두어가는 십분의 일세와는 성격이 달랐다 (참조 삼상 8:15;17). 제사장과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내게 된 것도 이들에게는 토지분배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하나님이 이들의 유산이 되기 때문이다).


3. 신약 성서에 나타난 십일조

1. 복음서에 언급된 십일조 (마 23:23, 눅 18:9-14)

신약 성서에서는 십일조에 관한 언급이 별로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복음서를 통해서 볼 때 구약시대의 십일조 전승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십일조는 유대인의 형식적인 경건의 요소로 언급되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십일조는 드리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지 않음을 비판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십일조는 바쳐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누가복음 18:9-14에는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것은 외적 종교적 행위를 하는 사람과 내적 심령의 종교를 가진 사람을 대조한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은 성전에서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2절)라고 기도했다. 바리새파 사람의 외적 종교적 행위에는 십일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데 그는 내적 심령의 종교를 가진 사람에 해당되며,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닌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14절).


2. 히브리서에 언급된 십일조 (히 7:1-4)

창세기 14:17-20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내용을 멜기세덱과 예수를 비교하는 가운데 히브리서 7:1-4에 언급하고 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여러 왕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에, 그를 만나서 축복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 그가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족장인 아브라함까지도 가장 좋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4. 교회사에 나타난 십일조와 헌금


1. 고대 교회

고대 교회에서 헌금은 자발적 이었다. 구약 성서적인 모범에 따른 십일조에 대한 요청은 동방 정교회에서는 대단히 오래된 것이지만 (Did.13) 서방교회에서는 3세기까지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 세상의 소유의 한 부분에 대한 포기로서의 구제는 금욕적인 행위가 되어 내세에 대한 보상을 상속하는 한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가졌다. 이것은 예배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교회에 바칠 헌물로 정해진 것들(농산물과 돈)을 예배 때 가져와 교회의 장로에게 전달하였다. 장로는 이 헌물을 성찬대 위에 봉헌(Oblationen)한 다음에 집사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선물로 자유 재량에 따라 궁핍한 사람들과 선지자, 교사, 교회 직원에게 나누어 주었다.


2. 중세 시대

중세 시대에 십일조의 자발적인 실행은 585년에 열린 제2차 마콘(Mâcon) 종교회의에서 법적인 의무로서 고시되었다(제5조). 그 후 프랑켄 왕국의 카롤링어家 출신인 칼 대제(Karl d. Gr., 768-814)는 교회에 대한 무제한적인 지배를 왕의 의무로 여겨, 외부의 적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내적인 문제까지 관여하였다. 779년 프랑켄 왕국에서 카롤링어가의 법령은 헤리스탈(Heristal)의 주교좌 성당 참사 회원에게 십일조를 국법으로 인정해주었다. 그 결과 교회의 경제적인 기초가 든든해지게 되었다. 십일조의 인정으로 교회는 그들의 반환권리에 대한 과제를 국민의 비용으로 맡게 되었다. 다른 나라들은 이보다 늦게 십일조의 의무가 법제화되었다. 예를 들면 포르투갈은 11세기에 덴마크와 아이슬란드는 13세기에 이루어졌다. 십일조는 거의 전적으로 소득의 십일조였다(개인 십일조: 개인의 수입에서 바침, 물질의 십일조: 농작물과 가축에서 바침; 이 십일조는 밭에서 나온 소산물로 바치는 대십일조와 정원과 과일나무 열매의 소득에서 바치는 소십일조로 구분됨).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곡물의 십일조에서 달성하였다. 십일조에 대한 의무는 원칙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있었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식민지 지역에서 지배받고 있는 주민들의 감소된 십일조 의무(슬라브족 십일조)는 1036년 트리부르(Tribur)의 종교회의에 의하여 표준 십일조로 균등화하게 되었다. 다만 교회 성직자의 소유지, 수도원 그리고 때때로 귀족에게는 십일조 의무가 제외되었다.

교황 겔라시우스(Gelasius, 492-496)의 분배규정은 십일조의 수령 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주교, 성직자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교회의 필요를 위한 것(건물, 시설유지 등)을 위해 각각 4분의 1을 지급한다. 사유재산화된교회제도(Eigenkirchenwesen)의 발전은 교회 후원자가 예배당의 건축과 유지(Baulast)에 대한 보상으로서 교회의 십일조의 많은 부분(일반적으로 3분의 2)을 요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나머지 3분의 1은 성직자에게 지급되었다. 규칙적으로 이 "십일조의 3분의 1"(tertia pars decimarum)은 18세기까지 성직자에게 지급되었다. 사유재산화된 교회제도에 대한 투쟁은 또한 평신도에 대한 십일조 권리를 일으켰지만 이 목적은 결코 달성되지 못했다. 겔라시우스의 분배규정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십일조의 사용 목적에 부합되었으나 교회의 사유재산화는 십일조를 교회 소유주와 성직자에게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에 농민들로 하여금 십일조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게 하였다.


3. 헌금의 사용에 관한 루터의 견해

루터가 살았던 시대에도 십일조는 있었다. 농민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525년 2월말에 독일 슈바벤(Schwaben)에서 농민들이 제시한 "12개 조항"에는 곡물의 십일조는 성직자에 대한 사례,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전쟁시의 곤궁을 대비한 비축식량으로 써줄 것을 요구한 항이 있다. 그리고 가축에 대한 십일조는 면제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한 루터의 답변은 십일조의 폐지는 "도둑"이다 라는 강경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루터는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십일조를 폐지할 생각은 없었으며 그것이 또한 성서에 명시되어 있는 경우 그러했다. 그리고 그는 십일조는 아니지만 교회의 헌금에 대한 용도에 대한 구체적인 제시를 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에 한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오늘 우리의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은 전제해야 한다.


1) 교회의 헌물함에 대한 규정(Ordnung eines gemeine Kasten, 1523)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분리하여 나온 복음적인 교회들은 교회 생활의 실제에 있어서 복음적인 견해의 구체화와 더불어 성직자와 교회 직원들의 보수는 물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와 관련된 교회 재정규정에 대한 새로운 제정이 불가피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루터는 1523년 작센 선제후국에 있는 작은 도시인 라이스니히시에 있는 聖 마태우스 市敎會(die Stadtkirche St. Matthäus)에 보관되어 있는 헌물함에 있는 재물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실례를 '교회의 헌물함에 대한 규정'이라는 글을 통해 자세하게 밝혔다. 루터는 라이스니히시를 방문한 적이 있으며 이곳에 있는 교회가 부흐(Buch) 수도원으로부터 보증된 교회 후원자의 권리를 깰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하여 조언을 주기도 하였다. 헌물함인 라이스니히의 "게마이네 카스텐"(der gemeine Kasten)은 라이스니히市의 교회 안에 4개의 자물쇠로 채워져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이 자물쇠 4개는 각각 다른 것이었는데 그것은 귀족, 시의회, 市 敎會, 농민의 대표가 각각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시대에 교회에 있었던 이 헌금함은 교회 자체 보다는 市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루터는 이 글이 라이스니히에 있는 교회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독일에 있는 모든 루터교회에 모범이 되어 다른 교회들도 이를 본받도록 인쇄를 한다고 밝히고 있다.


(1) 라이스니히 헌물함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

오늘날 교회에서 헌금을 바칠 때 대부분 화폐를 사용하는데 반하여 16세기에는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께 드렸다. 라이스니히시의 헌물함은 상시의 지출을 위한 재산이기 때문에 한 방향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려운 시절을 위한 비축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헌물함에 포함된 것들은 무엇인가? 루터는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이자들, 전답, 조세, 돈 그리고 재산 모든 것이 모아져서 영구히 헌납되고 한데 모아져야만 한다." 루터는 이 헌물함의 몇 가지 수입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① 목사의 재산과 조세에서

② 교회의 재산과 조세에서

③ 네 개의 제단(그리스도의 몸의 제단, 수태고지제단, 마리아의 수태제단, 십자가 제단)들의

    수익금, 자선 기관들의 재산과 조세에서

④ 형제단들로부터

⑤ 수공업자들과 농민들이 낸 헌물에서

⑥ 빈민구제함과 헌금함에 있는 음식물과 돈에서

⑦ 건강한 날들에 대한 감사 헌금과 유언을 통해 언급된 헌금에서

(2) 라이스니히 헌물이 사용되는 곳

라이스니히의 헌물이 사용되는 범위는 라이스니히 교구에 한정되어 있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몇가지 예외적인 조항도 있다. 루터는 이 헌물이 사용되어야 할 곳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목사를 위해서-연봉과 일년에 네차례의 보조금.

② 교회의 사찰을 위해서-연봉과 일년에 네차례의 보조금.

③ 학교를 위해서-교사들의 사례비-연봉과 일년에 네차례의 보조금.

④ 장애자, 병든자와 가난한 사람들, 병과 노년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열명의 위원들이 매 주일 또는 부정기적으로 위와 같은 어려운 사람들 을 돌본다(이들이 살 수 있는 집, 옷, 먹을 것). 이렇게 함으로써 구걸행위를 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⑤ 버려진 고아와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서-이들의 교육과 생계를 돌보아야 한 다.

⑥ 구걸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⑦ 나그네들을 위해서

⑧ 교회당, 다리, 목사관, 학교, 사찰 사택, 구빈원의 건축과 유지

⑨ 비축할 수 있는 곡식을 사들이기 위해


(3) 라이스니히 헌물에 있어서 행정적인 사항들

루터는 이 헌물을 지급하기 위해서 10명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위원들은 두명의 귀족, 두명의 시의원, 일반 시민들 가운데 세명은 도시민 그리고 세명은 농민으로 이루어졌다. 루터는 이들이 선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일해줄 것과 사사로운 것들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들은 매주 목사관이나 시청에 모여서 그들에게 위임된 일들을 성실히 수행하고 토의와 협의를 해야 한다. 10명의 위원들은 일년에 네번(사순절 첫째주일 다음의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성령강림절, 9월 14일, 12월 13일)에 걸쳐 헌물의 수익상황을 점검하고 부족함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루터는 라이스니히 헌물함의 규정을 통하여 교회 재산의 사회적 기여도를 심도있게 다루었다. 그는 철저히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이상은 초대 교회의 재산의 공동분배에 있었다. 그는 사도행전 2:44과 4:32과 유대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헌금에 대해 언급한 고린도후서 9:2을 교회 재산의 사용에 있어서 이상으로 보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35-46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최후심판 날에 말씀하신 것과 같이 루터는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을 섬기는 기독교적인 사랑보다 더 큰 예배는 없다고 말한다.


5. 결론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가와 온전한 십일조를 바친다고 양심있게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제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첫째, 교회의 회계는 투명해야 한다. 모든 교인들이 낸 헌금이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를 단 한푼까지 정확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를 해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건강하게 한다. 이렇게 된다면 신자들이 헌금을 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교회는 십일조를 바치라고 신자들에게 가르치지만 말고 교회 스스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 이 교회의 십일조는 교회 경상비에서 10분의 1을 자신의 교회를 위한 일이 아닌 곳에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이 교회의 십일조는 십일조를 받은 레위인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내는 것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다. 가난한 교회라고 예외일 수 없다. 가난한 신자에게 십일조는 면제가 되는 것인가? 교회의 경상비의 10분의 1에서 모아진 교회의 십일조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제용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 십일조는 개교회가 연합한다는지 지방회 또는 노회별로 연합한다든지 아니면 총회적인 사업으로 발전하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 십일조를 총회적으로 모은다면 한국의 개신교회도 독일 루터교회들이 하는 사회봉사국(Diakoniewerk)을 설립하여 대대적인 사회 복지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헌금이 꼭 필요한 일에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 가장 우선적인 일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교회는 과거의 습성에 젖어 필요하지 않는 일에 재정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 한 예로 매주마다 한번보고 버려지는 주보의 발행을 들 수 있다. 과연 주보를 계속 발행해야할지 우리는 한번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주보를 매주 발행하는 것 대신 그날 부를 찬송과 성경말씀을 교회의 벽이나 앞면에서 알려주면 될 것이다. 그리고 매주 마다 바꾸는 강단의 꽃꽂이이다. 꼭 비싼 생화를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 경비가 소외되고 그늘진 이웃들에게 전해진다면 그곳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지 않을까? 이런 일을 할 때에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일은 교회나 어떤 목사 또는 장로의 이름으로 하지 말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골 3:17)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넷째, 십일조와 헌금은 신자의 소유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준 것의 십분의 일 또는 그 이외의 것을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경제관은 물질이 그의 소유가 아니라 단지 위임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점이 아닌 공유이며 나눔이다. 십분의 일이라는 나눔의 훈련을 통하여 십분의 일 이상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닌 세상을 향해서 전파해야할 복음이다. 십일조의 정신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교회가 진정으로 십일조를 한다면 세계의 굶주림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서구 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십일조에 난색을 표한다. 십일조와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물론 제의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랑과 정의의 실현을 가르치신다. 문제는 이것을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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