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의 의미에 대한 현대교회의 윤리적 고찰
강원돈(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헌금은 매우 도전적인 주제가 되었다. 사렙다 과부의 헌물이나 두 렙톤을 바친 과부의 헌금은 자발적인 헌신의 모범으로서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교회 안팎에서 헌금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시비와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교회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든지, 헌금을 바치는 사람들의 동기가 모호하다든지, 교회가 헌금을 사용하는 방식이 적절치 않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그런 예에 속한다.
이 글에서 나는 위에서 말한 시비 거리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헌금의 윤리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밝히기로 하겠다.
헌금을 강요한다는 시비에 대해서
교회에 모이는 많은 사람들은 헌금이 신도의 의무임을 잘 알고 있지만, 헌금이 교회의 문턱을 높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국 교회가 헌금을 강조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교인들이 헌금을 통하여 헌신의 자세를 갖도록 훈련시키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과제이다. 교회 재정의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서 신도들이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을 탓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교인들이 헌금을 강요받는다는 생각을 할 만큼 헌금이 지나치게 강조된다는 데 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만 짚고 넘어 가겠다.
첫째,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 교인들의 헌금은 교회 재정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그것은 이들 교회들이 개교회 차원에서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헌금이 줄어들면 교회는 심각한 재정 압박을 받게 되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재정 수단도 빈약해진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을 독려할 수밖에 없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 교회당 건축이나 기타 부대시설들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에게 특별 헌금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둘째, 헌금의 강조는 한국교회의 성장 강박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1960년대 중반 이래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성장했다. 1990년대 초까지 한국교회의 초고속 성장은 인구의 4분지 1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재의 증거로 여겨졌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로 여겨졌다.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 목회자는 카리스마를 받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고 교인들에게서 신망과 존경을 얻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성장은 강박이 되었다.
교회 성장은 교인들의 수효와 그들이 내는 헌금 액수, 이 두 가지 지표들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통례이다. 교회 성장을 도모한다면, 그것은 필경 양적 성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셈이다. 양적 성장의 강박에 휩싸인 교회에서 교인들의 수효가 감소한다든지 헌금 액수가 줄어드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교인들을 동원하기 위해 정교한 장치들이 강구되고, 교인들이 헌금을 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도록 만드는 정교한 축복 기계들이 설치된다. 나는 헌금과 축복을 직결시켜 생각하도록 만드는 모든 관행을 축복 기계라고 간주한다.
목회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의 개교회 중심적인 재정 구조와 성장 강박, 그리고 축복 기계는 철거되어야 마땅하다. 대형 교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헌금을 모을 수 있지만, 전체 교회의 70%에 달하는 교회들은 재정적으로 미자립 상태에 있다. 교회를 개척한다든지, 인구가 끊임없이 이탈하고 있는 농촌 지역이나 산업 공동화 지역에 교회가 있을 경우에는, 교회의 재정적 자립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불균형을 그대로 방치하고서 거대한 규모의 헌금을 모으는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가 내렸다고 자랑할 수는 없다. 지역 교회들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동역자들의 연대 정신에 입각해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정의 개교회 중심주의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의 크기와 교회의 지역적 분포 등을 넘어서서 전체 교회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교회헌금을 노회와 총회 차원에서 재분배하는 장치를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성장 강박의 폐해는 더 강조할 것도 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아브라함의 소수파여야 한다. “하면 된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밀고 나간 군사 정부 시절에 교회가 성장 강박에 휩싸인 것은 비판적으로 짚고 넘어 가야 할 대목이다. “하면 된다!”고 외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잘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 하기 위해서는 바르게 해야 한다. 선은 정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교회는 양적 성장의 강박에서 벗어나 아브라함의 소수파로서 질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갈 때가 되었다. 교인들을 동원의 대상으로 삼거나 축복 기계에 묶어두는 일은 교인들의 영적 능력을 억누르고, 생각과 판단과 행위의 자율성을 훼손시키고, 교회에서 개방적 비판주의를 추방하는 결과를 빚어낼 것이다.
교인들은 어떤 동기로 헌금을 내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헌금을 바치며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정성과 의지를 표현할 것이다. 예수가 과부가 두 렙톤을 바치는 것을 보고 칭찬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헌금의 정신이다. 헌금은 강요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위를 위해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겠다는 자발적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
러나 모든 교인들이 이러한 순수한 마음을 갖고서 헌금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하는 경우들도 늘어나고 있다. 헌금을 바치는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헌금을 바치면 하늘의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 복을 받기 위해서는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는 것 같다. 이러한 교인들의 생각을 촉발시키고 강화하는 것이 앞서 말한 축복 기계이다. 이 기계는 교인들이 세상의 삶에서 더 좋은 기회를 얻고자 하는 안달하면 안달할수록, 불안한 세계에서 안정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더 잘 작동한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재물을 훔치는 것이라는 서슬이 시퍼런 가르침은 이 기계의 작동을 원활하게 한다.
헌금을 하면 하늘에 재물이 보관된다는 신념도 피안의 복락을 염원하는 신자들에게는 강력한 헌금의 동기가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어수룩할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서의 복락과 피안에서의 복락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이 실용적이라고 믿을 것이다.
아주 세속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대접받는 풍조도 무시할 수는 없다. 교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는 것은 교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욕구들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의 풍조가 세상의 풍조와 달라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교회와 세상의 통로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경우도 많다. 개교회 중심의 재정 구조가 굳어져 있는 한국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그 돈을 어떻게 벌어들였건 교회에서 당연히 환영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이 분명하다. 헌신의 가시적 표현이 교회 출석과 헌금일진대 이 두 가지를 잘 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중책을 맡는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헌금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인정투쟁에서 승리하는 길로 여겨지고 있는 셈이다.
목회윤리의 관점에서 나는 성서의 몇 구절들에 대한 굳어진 해석으로부터 벗어나서 헌금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재물을 훔치는 것을 직결시킨 말라기의 경고는 당대의 사제들에 의해 십일조가 착복되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백성이 하나님에게 바친 십일조가 사제들에 의해 절취되는 일은 그 당시 매우 흔한 일이었다. 하늘에 재물을 쌓아 놓으라는 예수의 권면은 재물의 사용을 만물의 주재자의 뜻에 맡기라는 가르침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늘에 쌓은 재물이 좀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겨진 재물이 좀 같은 훼방자들에 의해 허투루 사용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헌금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는 뜻을 나타낸다면, 헌금을 바치는 것은 축복 기계와 무관한 자발적인 행위여야 할 것이다. 헌금은 실용주의와 위신의 수단이어서도 안 된다. 헌금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고, 그 분의 뜻대로 쓰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헌금을 사용하는 방식은 적절한가?
교회가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교회 재정의 원칙과 사용 내역들은 많은 경우 공개되지 않고 있다. 한국 교회의 재정 운영 방식과 그 내역을 연구하려는 시도들이 한계를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교회 헌금을 엉뚱하게 사용한 여러 가지 사례들은 대개 내부자 고발에 의해 알려졌다. 담임 목회자가 헌금의 일부를 교단장 선거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했다든지, 교회 일과 무관한 사업 용도로 사용했다든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을 무마하거나 소송 변호사를 고용하기 위해서 헌금을 사용했다든지, 헌금의 일부를 착복하기 위하여 재정 장부 작성을 비공개로 하였다든지, 심지어 교인들이 헌금으로 마련한 교회 건물을 자기 명의로 등기하여 뒤로 빼돌렸다든지 하는 사례들이 그런 것이다.
정확한 통계 자료가 없기 때문에 교회 재정 가운데 선교비나 사회봉사비로 쓰이는 비율이 어느 정도가 되는가를 말하기 어렵지만, 이 부문의 재정 지출 비율이 낮다는 것은 많은 교인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 비공식 견해이기는 하지만, 이 부문의 재정 비중이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3% 수준에 머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헌금의 용도에 관한 목회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이 기준을 마련할 때 참고할 만한 것은 성서의 십일조이다. 구약에서 십일조는 본래 약자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시일반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소득의 십분지 일을 하나님에게 바쳐서 그것을 가지고 과부와 고아, 거류자들을 위한 사회기금으로 운영했고, 생산수단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들을 위한 종교기금으로 활용했다. 사제들의 경우에는 성전에서 직분을 수행하는 기간에 레위인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통해 그 보상을 받았다. 왕조가 성립된 뒤에 십일조는 국세로 전환되기도 하였지만, 요시아 개혁 때에 3년마다 바치는 십일조 제도가 도입되어 본래의 십일조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구약의 십일조 정신은 초대 교회에 전승되었다. 초대 교회는 헌금을 모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열성적이었고, 특별히 집사 제도를 두어서 헌금을 관리하고 약자를 위한 봉사를 하도록 했다.
고대 이스라엘의 십일조 제도를 오늘의 교회 재정 제도에 직접 도입하기는 물론 어렵다. 현실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일조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자립 교회의 경우에는 교회 헌금의 적어도 3분지 1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교회의 봉사 활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펼치는 일이다. 재정 자립을 이루지 못하는 교회들을 위한 지원과 외지 선교를 위한 기금은, 교회의 여력이 있는 한, 별도로 조성하고, 그 기금의 운영에 관한 원칙을 정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는 교역의 전문성과 전업성이 강조되기 때문에 교회가 교역자의 생활과 전문적인 활동을 뒷받침하는 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대로 개교회 중심의 재정 구조를 넘어서서 노회와 총회 차원에서 연대적인 교역자 봉록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시급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지출 내역들을 정해 놓은 다음에 개교회의 발전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 성장 제일주의가 청산되어야 한다. 성장 강박에서 비롯된 동원 장치들과 축복 기계들을 철거하면, 새로운 교역의 길이 열린다. 이 교역에서 중요한 것은 교인들에게 헌금의 정신을 제대로 가르치고, 평신도들이 교회 재정의 건전성과 투명성을 감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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