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빠져있던 육신의 정욕은 내면의 배고픔을 채워주기는 커녕 괴로움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연극관람을 통해(안목의 정욕) 슬픔과 동정하기를 사랑하며(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아님) 자기 감정의 표면을 긁기를 바랐던 것은 오히려 자기의 내면을 썩게하는 행동이었음을 고백한다. 또한 수사학에서의 뛰어난 재능을 남들에게 드러내기를 즐겨했고(교만) 난폭한 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난폭한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자기를 고발한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통해 앞서 추구했던 정욕들과 자랑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지혜 그 자체, 즉 진리를 추구하는데 관심을 갖게 된다. 이것은 지적 회심으로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어거스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씌여진 성서를 통해 진리를 찾고자 했으나, 그 당시 본인은 교만하여 성서의 뜻을 헤아리기는 부족했으며 성서의 문체를 쉬이 여기고 성서를 멀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바로 마니교이다. 그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마니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에로 향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았던 날들을 후회하고 마니교를 반박한다. 마니교는 물질적 존재 이외에 참 존재인 다른 실체를 모르는 종교로 진리(선)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악(선의 결핍)의 종교라고 밝힌다.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반박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내적 정의(본질은 변하지 않으나 시간과 장소, 행위자의 동기에 따라 적용되는 정의)와 인간의 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의 필요성, 그리고 인간의 어떠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종합적으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법 아래에 정해진 세상의 정의와 법을 따름과 동시에 이러한 것들은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끝으로 어거스틴은 어머니가 그의 회심을 확신할 수 있던 2가지의 근거, 즉 어머니의 꿈(잣대 위에서 만난 젊은 청년)과 어느 감독으로부터의 충고(이렇게 흘리는 눈물의 자식이 망할 리 없습니다)에 대한 회상을 하면서, 하나님 음성의 확신을 이야기하며 마친다.
<느낌> 청년기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져 있던 어거스틴의 모습은 지금의 나와 너무도 흡사하다. 나도 하루하루를 쾌락과 감정적인 동요와 세상적인 평가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영원한 진리요, 전능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유는,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질서 있는 생활과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거스틴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던 어머니 모니카와 같이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는 나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되새겨보았다. 동시에 내가 훗날 어머니가 되었을 때 내 아이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질문> 어거스틴이 중요시 여겼던 것은 세상의 질서, 전체성이라고 보여집니다(“어떤 부분이든 전체와 일치되지 못하면 추하게 보입니다”라고 말한 부분/p.109-2째단락 2째줄). 자칫 이러한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거스틴이 부분을 무시하는 전체주의에 옹호한다는 비판을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만일, 어거스틴은 개인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비판받게 된다면 과연 어거스틴은 무어라고 반박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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