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유혹하고 유혹받으며, 속고 속이는 삶
어거스틴은 열아홉 살 때부터 스물여덟 살 때까지 학예라고 부르는 학문과 마니교에 빠져 유혹하고 유혹받거나 속고 속이는 생활을 한다. 수사학 교수였던 어거스틴은 명성을 얻기를 소망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친하게 지내던 총독과 절친한 벗 네브리디우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점성술, 즉 속임수에 빠져 생활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던 중 고향의 친한 벗의 죽음을 맞게 된다. 어거스틴은 친구의 죽음으로 한동안 슬픔에 빠져 살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어떤 사람이든지 유한한 것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오로지 불행과 슬픔뿐이라는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변하는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우리의 안식할 자리로 여겨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인간에게는 진정한 평안과 사랑의 기쁨이 샘솟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친구가 죽었을 그 당시 마니교에 빠져있었고 실체하는 것과 감각의 대상을 쫓고 있던 터라 불변의 하나님께 자신의 짐을 내맡기지 못했다. 그 결과 시간의 경과와 새로운 친구들의 위로가 슬픔을 치유하는 역할을 했으나 후에는 그것 역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지 못함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것들 역시도 변하는 하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피조물과는 달리 전혀 과거로 지나가시지 않으시며, 언제나 한결같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는 하나님만이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외에 피조물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던 사물이던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밖에서 그것들을 흠모할 때 고통과 슬픔의 결과가 따르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것들을 사랑할 때 우리에게는 기쁨과 행복이 주어진다. 즉 질서가 바로 잡혀 올바른 사랑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과 평판에 휩쓸리어 누군가를 사랑하였던 자신을 돌아보며, 진리에 서지 못한 영혼들의 특성을 파악한다. 이런 영혼들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전존재가 흔들려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진리 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 하나님을 인간에 빗대서 변화하는 존재로 이해-교만-하였던 지난날의 잘못을 고백한다.
4권을 읽으면서 사랑의 대상에 대한 어거스틴의 깊은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존재의 계층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전존재는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최상에 계시고 불변하시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의 영혼은 잠잠하여지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을 비롯한 나 자신까지도 하나님을 벗어나 인간과 물질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그 대상의 변화와 소멸로 인해 헛된 슬픔에 사로잡히며 살고 있다. 우리는 허황된 사랑에 빠져 서로 유혹하며 속고 속이는 자기 왜곡의 길에 치닫게 되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분열시키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죄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피조물들을 사랑해야함을 속히 깨달아야 한다. 그것만이 참된 사랑을 경험하고 주님의 빛을 받게 되는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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