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저 코끼리가 서면 집채만 하고,
움직이면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하고,
귀는 구름이 드리운 듯하고,
눈은 초승달과 비슷한데,
발가락 사이에 낀 진흙이 언덕과 같아 개미가 그 속에서 집을 짓지요.
개미가 그 속에 비가 오나 싶어 줄지어 나와 두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코끼리를 보지 못하니 어째서일까요?
보이는 바가 너무 멀기 때문이지요.
또 코끼리가 한쪽 눈을 찡그리고 보아도 개미를 보지 못하니,
이는 다름 아니라 보이는 바가 너무 가까운 탓이지요.
만약 안목이 좀 더 큰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백 리 밖 멀리에서 바라보게 한다면
아득하고 가물가물해서 아무 것도 보이는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사슴과 파리, 개미와 코끼리를 족히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今夫象立如室屋, 行若風雨, 耳若垂雲, 眼如初月, 趾間有泥, 墳若邱壟, 蟻穴其中.
占雨出陣, 瞋雙眼而不見象, 何也? 所見者遠故耳.
象矉一目而不見蟻, 此無他, 所見者近故耳.
若使稍大眼目者, 復自百里之遠而望之, 則窅窅玄玄, 都無所見矣, 安有所謂麋蠅蟻象之足辨哉 ?
산에서 멀리 떠나오면 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 산이 없어져서이겠는가. 멀리 떠나온 때문이다(《장자》, 〈천운天運〉).
높은 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람들은 개미 같고 지나는 자동차는 장난감 같다.
그렇다면 머리 위에서 이[蝨]가 바라보는 사람은 또 어떨 것인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저마다의 위치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객관적 대상이란 늘 내 안으로 들어오면서 주관화된다.
《장자》엔 ‘대동소이大同小異’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크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클 수 있고,
작다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작을 수 있다는 말이다.
파리가 작다 하지만, 개미보다는 크고 이[蝨]보다는 훨씬 크다.
코끼리가 크다 하지만 산보다는 작고, 바다보다는 훨씬 작다.
멀리 떠나오면 산도 안 보이는 것처럼,
사슴과 파리, 개미와 코끼리도 똑같이 구분할 수 없이 작고 미미한 존재가 된다.
‘세계도 한 송이 꽃[世界一花]’이라고 하거니와,
밤하늘을 수놓는 저 무수한 별들도 아주 작은 보석 같지 않던가.
조물의 눈과 천지의 마음으로 본다면 우리가 사는 지구도 달팽이 눈과 같이 작은 것인지 어찌 알 수 있으랴.
그래서 ‘저 눈’ 속에서는 천자의 부귀도 티끌 같을 수 있고,
농부의 소박한 삶도 태산 같을 수 있다.
개미의 집도 그에게 충분히 안락하고 넓은 집일 수 있고,
코끼리에겐 큰 우리도 비좁을 수 있다.
무릇 모든 거리란 원遠과 근近 사이에 있고, 모든 관점이란 내 안과 내 바깥 사이에 있다.
10리를 같이 가도 아이와 어른, 여자와 남자가 느끼는 거리는 다르고,
한 닢의 금화金貨도
백만장자가 가지고 있는 것과 거지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 가치의 정도가 완전히 다르다.
공원의 흔한 벤치도 그곳에서 첫 키스를 나눈 이에게 특별한 장소가 된다.
<기기碁記>를 썼던 고려 문인 이색李穡처럼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으로 남겨진 낡은 바둑돌은 그에겐 소중한 것이 된다.
이처럼 삶은 늘 저마다의 관점과 거리를 지니면서 있다.
그러니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것도, 무엇이 뛰어나다 못하다는 것도,
무엇이 소중하다 하찮다는 것도, 아름다움과 추함도, 성공과 실패도, 사랑과 미움도,
나와 너도 모두다 멀리에서 보면 희미해져서 구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저 조물의 눈 속으로 들어가서, 삶을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하나가 될 터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의 마음이 없어,
그 눈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늘 작은 눈으로 작은 것들만 아등바등 재고 사는 것은 아닌지!
자료출처 -<바람에 떨어진 고금 / 김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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